2021년 9월 27일 연중 제26주간 월요일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빈첸시오 드 폴 성인은 1581년 프랑스 랑드 지방에서 소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프란치스코 수도원이 운영하는 학교에서 공부한 그는 1600년에 사제품을 받았고, 1617년에 가난한 이들을 만나는 체험을 하였다. 이때 그는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이 곧 하느님을 섬기는 것’임을 깨닫고, 자선 단체인 사랑의 동지회, 전교회, 사랑의 딸회를 창설하여, 가난한 이들을 돕는 데 일생을 바쳐 봉사하였다. 1660년에 선종한 빈첸시오는 1737년에 시성되었다. 1885년에 레오 13세 교황은 그를 ‘모든 자선 사업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오늘날 수많은 이들이 성인의 영성을 실천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도 사랑의 딸회, 사랑의 씨튼 수녀회,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와 평신도 사도직 단체인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가 서로 연대하며 활동하고 있다.
☆☆☆
곧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또 나를 받아들이면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루가 9,46-50)
“Whoever receives this child in my name
receives me,
and whoever receives me
receives the one who sent m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머물며 성장하게 합니다. 제자들은 ‘누가 우리 가운데 가장 큰 사람이냐?’ 하고 논쟁을 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마음속 생각을 아시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 놓으시고는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위대한 사람은 많은 일을 해내거나,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몸소 가르쳐 주신 이타적인 사랑을 실천하며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묵묵히 자신을 내어 주며 살아가는 평범한 이웃과 같은 사람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린이와 같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순진하고 단순하며 작고 연약하기에 어른의 보호가 필요한 어린이처럼,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웃과 우리 자신이 살아갈 힘을 얻고자 하느님의 보호를 청하는 순수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성령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는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로마 8,15 참조).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처럼 위대한 사람은 없습니다. 하느님께 우리의 마음을 열고 기도하며, 사랑을 실천하고 주님의 모범을 따른다면 우리는 진실과 정의 안에서 하느님의 참백성이 될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사람들에게 물어보면서 겨우 손질해서 직원들과 함께 먹을 수 있었지만, 그 뒤 다시는 이런 선물이 오지 않기를 바라게 되었습니다. 너무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요즘에야 인터넷 안에 들어가면 모든 요리 레시피를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전에는 어떠했을까요? 줘도 먹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겠다 싶습니다. 즉, 알아야 잘 먹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도 알아야 제대로 받을 수 있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받았어도 받은 줄 몰라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더 큰 시련을 주셨다고 불평하기도 합니다.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알기 위한 노력을 얼마나 하십니까? 줘도 못 받아 먹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하느님을 알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우리가 하느님을 알 수 있도록, 어떤 식으로 살아야 할지를 말씀하십니다. 즉, 어린이를 받아들여야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된다고 하십니다.
지금이야 어린이를 마치 집안의 최고 어른처럼 모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당시 어린이는 사회적으로 전혀 인정받지 못한 약자였습니다. 아직 미성숙의 단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완전한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어린이를 무시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어린이를 받아들여야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니 사람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어린이와 같이 사회 안에서 소외당하고 아파하는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주님의 이름을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도 막지 말라고 하시지요. 그들 역시 함께해야 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뜻이 마치 주님의 뜻인 것처럼 이웃을 판단하고 단죄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뜻은 모두를 포용하는 사랑이라는 것, 특히 어렵고 힘들어하는 사회적 약자를 외면하지 않는 사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모습이 주님의 뜻을 제대로 따르는 것이고, 이로써 주님께 더 큰 사랑과 은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처음 운전면허를 취득하고 동창 신부의 차를 처음으로 운전하게 되었습니다. 운전학원이 아닌 장소에서는 단 한 번도 운전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무척 긴장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동창 신부에게 운전하면서 계속 이렇게 물었습니다.
“나 너무 빨리 가는 것 아냐?”
차의 속도계도 볼 수 있는 여유가 없었던 당시의 저였습니다. 그런데 엄청나게 과속하고 있는 것처럼 차의 속도가 빠르다고 느꼈던 것이지요. 동창 신부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40km야. 조금 더 속도 내도 돼.”
이렇게 ‘빠르다, 느리다’라는 기준 자체는 상대적입니다.
언젠가 어떤 신부의 차를 타고 어디를 가는데, 속도를 내지 않고 가는 앞차를 향해 이렇게 말하더군요.
“저렇게 느리게 갈 것이면 차선을 바꿔줘야지. 뒤의 차들이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잖아? 왜 배려를 하지 않는 거지?”
앞차의 운전자가 초보자라 나름 최고 속도를 내고 있다고 느끼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긴장하고 떨려서 어쩔 줄 몰라 할지도 모릅니다.
배려는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내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남의 배려만을 외치고 있습니다.

이해한다는 말은 '나랑 똑같구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것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라고 하시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곧 당신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서로 누가 큰 사람이냐로 싸우고 있었는데, 사실 작은 사람이 작은 사람을 더 잘 받아들임으로 더 큰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계십니다. 어째서 겸손한 사람이 포용력이 좋을까요?
그 이유는 서로 커지려는 사람, 교만한 사람은 사람을 받아들일 때 자신에게 유용한지 먼저 보기 때문입니다. 반면 그런 욕심이 없는 어린이와 같은 사람은 이미 부모를 가지고 있기에 모든 이를 친구로 맞아들입니다.
만약 제가 유튜브 조회수에 관심이 많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이렇게 좋은 내용을 올리는데 왜 저렇게 많은 사람이 보지 않지? 참 이해가 안 되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욕심이 없다면 어찌 될까요? 지금 구독하고 꾸준히 봐 주시는 분들에게 더 감사할 것입니다. 그리고 안 보는 분들은 ‘다 그분들만의 이유가 있으시겠지.’라고 여기게 됩니다.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겐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를 내 욕심 때문에 나도 보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아이들은 모든 것을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삶에 만족하여 크게 바라는 게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에게 만족하여 ‘왜 우리 부모는 이러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머리가 커지고 다른 친구들의 부모님을 보며 비교하게 되면서는 ‘왜 우리 부모는 다른 부모와 같지 않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욕심이 생기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해가 되어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욕심이 사라져 내 안에 여유가 생겨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낮아지고 겸손해지면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태어난 지 20일 만에 부모에게 버려진 한 아이가 있습니다. ‘키릴’이라는 이름의 카자흐스탄에서 태어난 4살 된 아이의 이야기입니다.
이 아이는 여섯 차례나 입양이 거부된 불쌍한 아이입니다. 그 이유는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오른팔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부모에게 버려지고 입양도 거부된 것입니다.
그런데 캐나다의 한 부부가 고아원에 한쪽 팔이 없는 아이가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꼭 그 아이를 입양하고 싶다.”라며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 의문은 키릴이 캐나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 풀릴 수 있었습니다.
캐나다 뉴펀들랜드에 거주하는 레즐리와 더그 페이시라는 이름의 부부는 더그의 아버지와 함께 키릴을 마중하러 공항에 나왔습니다.
키릴은 오른쪽 팔꿈치 아랫부분이 없어 반소매 밑으로 팔 끝부분이 삐죽이 나온 채로 캐나다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낯선 공항에 어리둥절한 채 나간 키릴에게 다가온 것은 한 할아버지였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입양 부모 더그의 아버지인 크리스였습니다. 크리스 할아버지는 자신에게 다가오더니 환한 미소로 키릴을 반겼습니다.
키릴은 할아버지의 모습에 깜짝 놀랐습니다. 자신과 똑같이 오른팔이 없었던 것입니다.
“나는 아이 앞에 무릎을 꿇고 오른팔을 보여줬어요. 그냥 쭉 내밀었죠. 키릴은 흠칫 놀라더니 곧 그의 오른팔을 뻗어 내 오른팔을 만졌어요.”라며 크리스는 감격스러웠던 그 순간을 설명했습니다.
뒤이어 “키릴은 할아버지의 오른팔을 처음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어요.”라고 더그는 설명합니다. 오른팔이 없는 공통점을 가진 키릴과 크리스는 금세 친해졌습니다. 그리고 현재 그들은 서로를 볼 때마다 짤따랗게 남은 오른팔 끝부분으로 하이파이브를 합니다.
사연은 이랬습니다. 3년 전부터 입양 준비를 한 이들 캐나다 부부는 한 고아원에 오른팔이 없는 아이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의 아버지를 떠올렸습니다. 그리고는 아버지와 같은 처지인 이 아이를 입양하기로 하였습니다. 이 아이는 한쪽 팔이 없는 장애 때문에 다른 부부에게 여섯 차례나 입양이 거부됐지만, 이들 부부에게는 이 아이의 장애가 우선순위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키릴은 캐나다로 입양되어 부모가 생겼을 뿐 아니라, 자신의 롤모델인 할아버지도 갖게 되었습니다. 크리스는 한쪽 팔이 없다는 장애를 극복하고 사업가로 성공했으며, 장애인 올림픽에서도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더그는 말합니다.
“처음 아버지에게 키릴의 사진을 보여줬을 때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며 ‘나랑 똑같구나.’라고 말씀하셨어요.”
더그는 덧붙입니다.
“아버지는 목표를 설정하면 무엇이든 해내는 분이지요. 아버지는 키릴에게 완벽한 롤모델이 될 거에요.”
키릴은 현재 캐나다에서 행복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난 이렇게 목욕하기를 좋아하는 아이는 처음 봤어요.”
엄마의 말입니다.
“고아원에는 총 12명의 아이가 있었는데, 아이를 돌보는 사람은 단 2명이었죠. 키릴은 이곳에 오기 전까지 한번도 목욕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었다고 해요.”
키릴은 엄마 손을 잡고 장 보러 가는 극히 작은 일에도 즐거워한다고 그녀는 말합니다.
[출처: ‘팔 없는 아이 입양 고집한 부부, 왜?’, 김혜경 기자, 뉴시스, 2015. 11. 2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나랑 똑같구나!”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시고, 우리의 죄를 짊어 지으시고, 우리의 모든 처지를 겪으셨습니다. 이를 위해 당신은 작아지고 가난해지고 초라해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이러한 겸손이 우리를 이해할 수 있는 바탕이 되셨던 것입니다.
누군가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은 그 사람과 같은 처지를 겪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아이가 말썽부려도 이해합니다. 나도 그런 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작아지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작아지면 감사하지 욕망에 불타지 않습니다. 이렇게 가장 작아진 사람은 모든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 됩니다.
온유하고 겸손해집시다. 그래야만 작은 이들의 처지를 이해하게 되고 그들을 받아들여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도 만나게 됩니다.
-조재형신부-
자주 걷다 보니 신발의 밑창이 많이 닳았습니다. 다른 곳은 멀쩡하기에 신발 수선하는 곳으로 가서 밑창을 덧대었습니다. 강력본드로 접착하면 되는데 친절한 아저씨는 작은 못을 박아주었습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흙길이나, 자갈길을 걸으면 못이 신발의 깔창을 뚫고 발바닥에 닿았습니다. 약간 불편하였지만 그냥 다녔는데 양말에 구멍이 나고 말았습니다. 신발을 벗어 깔창을 벗겨내고 뾰족하게 나온 못을 드라이버로 구부려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발도 편하고. 자갈길을 걸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내 몸에 불편을 주는 것들은 바로 느낄 수 있었고,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서 행동하였습니다. 머리카락이 자랐다 싶으면 미장원엘 갔습니다. 손톱이 길었다 싶으면 바로 깎았습니다.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마트에 가서 장을 보았습니다.
몸의 불편함은 빨리 해결하려하지만 마음의 불편함은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행복하다고 했는데 주기 보다는 받는 것에 익숙해졌습니다. 남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면서 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주는 것을 서운하게 생각했습니다. 옷장과 서랍을 정리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6개월이 지나서야 겨우 정리하였습니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근심과 걱정 때문에 지금 감사하는 마음, 고마운 마음을 잃어버리곤 합니다. 정성과 마음을 다해서 성사를 집전하기보다는 습관처럼 성사를 집전하기도 합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결론을 내리기 보다는 미리 결론을 내려놓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은 어느덧 상처가 나있는데도 무심했습니다. 마음은 위선과 가식으로 넘쳐나는데도 치울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불편한 진실을 외면했습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성 빈센시오 드 폴 사제는 몸의 불편함 보다는 마음의 불편함을 먼저 생각하였습니다. 성인은 1581년 프랑스 랑드 지방에서 소농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프란치스코 수도원이 운영하는 학교에서 공부한 성인은 1600년에 사제품을 받았고, 1617년에 가난한 이들을 만나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이때 성인은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이 곧 하느님을 섬기는 것’임을 깨닫고, 자선 단체인 사랑의 동지회, 전교회, 사랑의 딸회를 창설하여, 가난한 이들을 돕는 데 일생을 바쳐 봉사하였습니다. 꽃동네를 창설한 오웅진 신부님도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평생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 아픈 이들과 함께 하고 계십니다. 세상은 몸의 불편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이익을 창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몸의 불편을 넘어 마음의 불편을 해결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성인들께서 가신 길이기 때문입니다.
고속도로에는 휴게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휴게소에 들러서 간단한 음식을 먹기도 하고, 일을 보기도 하고, 차에 기름을 넣기도 합니다. 같은 값이면 친절하고, 시설이 좋고, 음식이 맛있는 휴게소를 찾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잠시 휴식을 취하면 미련 없이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서 떠나기 마련입니다. 누구라도 휴게소가 좋다고 거기서 며칠씩 머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저는 종교는 고속도로에 있는 휴게소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의 나침판과 같은 지침을 준다면, 고독한 현대인들에게 위로와 기쁨을 준다면,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준다면 사람들은 그러한 종교를 선택할 것입니다. 하지만 역시 종교는 최종 목적지는 아닌 것입니다. 그 끝은 ‘깨달음, 진리, 해탈, 하느님나라, 영원한 생명’과 같이 저마다 표현은 다르지만 참된 진리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늘 겸손할 것을 요청하십니다.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열개하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더 높으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누가 더 진리를 향해서 가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대한민국은 휴게소가 많은 고속도로와 같습니다. 다른 종교를 비난하거나, 탓하기 전에 지금 내가 믿고 있는 종교가 참된 진리를 향해서 치열하게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판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어두운 시대에 등불이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불빛이 보이는 항구로 배들은 모이게 되어있습니다. 지금 험난한 파도에 돛단배처럼 떠다니는 배가 굳이 우리 항구로 오지 않더라도 어떻습니까? 어차피 항구에 도착한 배는 또다시 어디론가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기러 왔고,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막지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복음: 루카 9,46-50: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를 받아들이면...
-조욱현신부-
예수께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를 두고 다투는 제자들의 생각을 아신다. 그들은 저마다 우두머리가 되려는 욕망을 품었다. 사탄이 그들에게 뿌려놓은 욕망의 씨앗을 뿌려놓았고, 그 씨앗이 자라나고 있음을 보셨다. 그것이 가라지가 되어 멸망하게 되는 것을 바로 잡아 고쳐주신다. 제자들이 이렇게 다투는 것을 아시고 예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당신 옆에 세우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여기서 예수님 옆에 있다는 것은 가장 높은 영광의 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누구든지 이런 작은 아이 하나를 대접하는 자는 당신 자신을 대접하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또한 당신을 대접하는 자는 하느님을 대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어린이는 순수함과 겸손의 본보기이다. 어린이는 속이지 않는다. 어린이는 생각이 단순해서 높은 지위를 탐하지도 않고 높아지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다. 바로 이런 아이를 두고 예수께서는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48절) 하신다. 가장 작은 사람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 어린이와 같은 사람만이 당신 곁에 서 있을 자격이 있고, 당신의 발자취를 따를만한 자격이 있다고 하시는 것이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와 함께 스승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49절) 제자들은 그러한 권한을 자기들만 받았다고 생각했다. 사도로 불림을 받지도 않았고, 교사로도 임명받지 않은 사람이 그 일을 해도 되는지 알고 싶었다.
구약에도 이런 내용이 있다. 모세가 70명의 원로를 주님 앞에 오게 했을 때, 두 사람은 진영에서 영이 내려 예언을 하였다. 이때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그들을 말려야 한다고 모세에게 말했다. 모세는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민수 11,29) 이것은 성령께서 모세를 시켜서 하신 말씀이다.
여기서는 아드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신다. “막지 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50절)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이름으로 사탄을 쫓아내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일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의 은총을 입은 우리와 같다. 우리는 그들 안에서 일하시는 분이 그리스도시다는 것을 안다.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세상의 구원을 위해 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삶 속에서 참된 봉사를 통하여 진정으로 “주님 옆에” 있는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이 세상에 주님이 어떻게 현존하고 계시는지 알려 주십니다.
"내가 시온으로 돌아가, 예루살렘 한가운데에 살리라. 예루살렘은 '진실한 도성'이라고, 만군의 주님의 산은 '거룩한 산'이라고 불리리라."(즈카 8,3)
즈카르야 예언자를 통해 메시아 시대의 행복이 선포됩니다. 주님께서 다시 당신의 도성에 오셔서 당신 백성들 한가운데에 사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진실한 도성, 거룩한 산"은 예루살렘의 새로운 이름입니다. 이처럼 이름이 바뀌는 것은 예루살렘이 내적으로 변화되었음을 드러냅니다.
복음은 누가 더 큰 사람인지 다투는 제자들의 신경전으로 시작됩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는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루카 9,48)
제자들의 마음속 숨은 야망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어린이 하나를 곁에 세우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린이가 대체 뭐가 대단하다고 그러시는 걸까요?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루카 9,48)
세상의 눈은 더 높은 것, 더 크고 더 강하고 더 많은 것을 향해 달려갑니다. 하지만 새로운 예루살렘, 주님과 맺은 새로운 계약의 거처를 지배하는 질서는 정반대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크다는 말씀을 하시려고 어린이를 보여 주십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약하고 부족한 어린이 안에 예수님께서 현존하시고, 그 예수님 안에 그분을 파견하신 아버지께서 계십니다. 옛 이스라엘 백성이 주님의 현존을 화려하고 장엄한 곳에서 찾았다면, 새로운 주님의 백성은 작고 약하고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이들 가운데서 주님을 찾아내야 합니다.
복음의 대목은 이어서 또 다른 일화 하나를 덧붙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일행이 아니면서 그분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이에 대한 제자들의 반감입니다.
"막지 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루카 9,50)
구분하고 편 가르고 소외시키는 버릇은 탐욕과 이기심에 절은 어른들의 못난 방식입니다. 어린이는 아직 그럴 줄 모르는 순진무구하고 천진한 포용적 시선을 상징하지요. 예수님은 제자들이 누가 큰 사람인지 기싸움까지 하는 것도 모자라, 기득권과 특권 의식에 오염되어 자칫 스스로 뭐라도 되는 존재로 여기게 될까 염려하십니다. 사실 당신께서 친히 가르치시지 않은 이들로 인해 생길 수도 있는 문제를 감수해야 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빈첸시오 성인은 가난한 이들 안에서 주님을 발견하고 섬긴 성인 중 한분이십니다. 성인의 선택과 집중은 참으로 적확하고 지혜로웠다 할 수 있지요.
성인의 전구로 우리도 가난하고 약한 이들 안에서 주님을 찾고, 주님께서 그들을 통해 우리 가운데에 현존하심을 경축하고 감사하기를 바랍니다. 지금 내 곁에 누가 주님이시고 또 그 주님은 어디 계신지 돌아보고 살피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성 빈첸시오 드 폴,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말씀 나누기 - 연중 26주 월요일-영적 밴댕이 속알딱지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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