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9월 25일 연중 제 25주간 토요일

Margaret K 2021. 9. 25. 06:46

2021년 9월 25일 연중 제 25주간 토요일

 

“너희는 지금 내가 하는 말을 명심해 두어라. 

사람의 아들은 멀지 않아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
(루가 9,43ㄴ-45)

 

 “Pay attention to what I am telling you.
The Son of Man is to be handed over to men.” 
But they did not understand this saying;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오늘 복음은 제자들이 주님의 수난에 대한 말씀을 듣고도 그 뜻을 알아듣지 못하였으며,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조차 두려워하였다고 전해 줍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관심이 있었기에 듣고는 있었지만, 그 뜻을 이해하지는 못하였습니다. 두려움 때문입니다. 또한 현실에서 주님의 부재는 물론이요 그분의 수고와 수난은 더욱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 자체가 두려움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죽음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시고 부활하시어, 임마누엘 하느님으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약속의 이행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지나치게 이기적인지도 모릅니다. 서로 다른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다양한 표현을, 우리는 자기 방식대로 이해하고 판단하고 때로는 듣지 못한 것처럼 행동하기도 합니다.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내 방식만을 고집하고 이해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먼저 배려하고 그가 한 말의 뜻을 알아 가며 노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온전한 사랑의 방법, 인류 구원의 방법을 끊임없이 들려주십니다. 내 방식과 판단을 잠깐 접고, 상대에게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그의 말을 경청한다면 ‘사랑은 함께 하는 것’이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믿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에 믿는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떤 사람에게 한 물체를 보여주면서 평면적으로 보면 무엇으로 보이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원’이라고 대답합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 이 물체를 보여주면서 역시 평면적으로 보면 무엇으로 보이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사각형’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보면 ‘원’이고, 다르게 보면 ‘사각형’으로 보이는 것이 어디 있냐고 말씀하실지도 모릅니다. 이 물체를 본 사람에게 잘못 본 것이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답은 ‘원통’이었습니다. 이 원통을 위에서 보면 ‘원’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옆에서 보면 ‘사각형’으로 보이지요. 원도 제대로 본 것이고, 사각형도 제대로 본 것입니다.

우리 삶도 이렇게 다양한 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 사각형, 마름모, 별…. 그 모든 모습을 가진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삶도 틀렸다고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나의 삶도 또 다른 이의 삶도 모두 인정받아야 하는 삶입니다.

많은 이가 자기 생각과 시각으로만 다른 이의 삶을 또 나의 삶을 평가하고 판단을 내립니다. 그래서 좌절과 절망의 삶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런 삶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다양성 안에서 진정한 일치를 이룰 수 있는 가장 멋진 삶을 주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에 대해 예고를 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알아듣지 못합니다. 당시 사람이 쓰던 아람어가 아닌 다른 나라 말로 하셨던 것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뛰어난 학자만 이해할 수 있는 어려운 단어를 썼기 때문일까요? 당연히 모두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던 것은 자기 생각과 시각으로만 주님의 삶을 보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모든 사람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고 계셨던 예수님이셨지요. 더군다나 제자들이 본 기적만 봐도 그 누구도 예수님께 수난의 시간을 준다는 것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의 말씀에 거짓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입니다. 반드시 이루어질 일이 분명한데, 정말로 그러겠냐는 의심으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관점으로만 생각하고 판단했기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이후 모두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점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면서 그들은 예수님처럼 살기 시작합니다. 즉,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하면서 용기 있게 예수님을 세상에 증거합니다.

주님의 뜻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생각과 판단을 뛰어넘는 주님이심을 기억하면서, 언제나 주님의 뜻에 순명하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랑은 사람을 치료한다. 사랑을 받은 사람, 사랑하는 사람 할 것 없이 모두(칼 메닝거).

기도가 안 돼요.

언젠가 새벽 묵상 글에 썼었던 기억이 나지만 다시 한번 적어 봅니다. 이런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어느 본당 교우들이 환자 방문을 하러 갔습니다. 오랫동안 병으로 누워있는 환자를 찾아간 것이지요. 그리고 그들은 이 환자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 교우들을 이끄는 대표 격인 반장님이 자유 기도를 바치는데 자꾸 말을 더듬는 것입니다. 기도의 내용이 무엇인지 모를 정도로 횡설수설입니다. 아무튼 어렵게 기도를 마쳤고, 기도 후 이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집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기도가 안 돼요.”

기도 안 되는 것이 그 집 탓일까요? 자신이 버벅거리고 횡설수설한 것을 왜 남 탓으로 돌릴까요?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치 뜨거운 물에 손을 넣으면 얼른 빼는 것처럼, 본능적으로 자존심을 지키려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종교지도자들의 말과 행동이 이해되지 않습니까? 그들의 잘못된 생각은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자기들의 이기심과 위선을 숨기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자기 자존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뜻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면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마귀들을 쫓아내시고 병을 고쳐주시며 복음을 전하십니다. 이때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고 놀라워합니다. 반전매력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은 항상 그들의 생각을 뒤집으십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고 알아들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난하고 돌아가셔야 하는 것을 아는 것이 그들에게는 두려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손”에 넘겨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여기서 '사람들'은 명확히 규정된 사람들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 반하는 분이란 뜻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믿나요? 나를 믿나요? 나를 위해서 사나요? 부모가 없는 아이는 자기만을 위해 삽니다. 그래서 나뿐인 사람, 곧 나쁜 사람이 됩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부모를 믿는 사람은 부모를 위해 삽니다. 그래서 나에게서 조금 벗어납니다. 하지만 부모를 믿고 부모의 말을 따르면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될까요? 인간은 부모조차도 믿어서는 안 됩니다. 어차피 인간이 인간을 아무리 사랑하려 해도 그리스도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넘겨져야 하시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사랑을 이기적으로 만드는 것이 세속-육신-마귀입니다. 부모를 사랑하더라도 이 욕구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부모가 그 욕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인 이상 이 욕구는 끊임없이 우리를 옭아맵니다. 어차피 이 세상 사람들은 다 돈과 쾌락과 교만으로 살아서, 세상 사람을 믿고 그들을 행복하게 하려고 살아도 어쩔 수 없이 나도 그 욕심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요즘 넷플릭스에서 흥행하는 우리나라 드라마 중 ‘오징어 게임’이란 것이 있습니다. 참가자 한 명당 1억씩 해서 456억의 상금을 걸고 생사를 오가는 게임을 자율적으로 선택해가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그렸습니다.

    여기에서 이정재는 직장에서 정리해고를 당한 뒤부터 꼬일 대로 꼬인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당뇨로 고생하면서도 월세를 위해 일을 하는 노모와 함께 삽니다. 아내는 이정재의 무능으로 이혼을 하여 다른 남자와 살고 있고 아이의 양육권도 아내가 가져갔습니다. 이정재는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고 경마를 하며 어머니 돈까지 탕진합니다.

  

    경마에서 간신히 딴 돈은 소매치기당하고 사채업자에게 쫓겨 신체 포기각서까지 씁니다. 아이 생일이라 치킨이라도 사주려고 했는데 땡전 한 푼 없어 간신히 떡볶이나 사주는 자신의 처지가 딱하기만 합니다.

    그렇게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는데 공유가 나타납니다. 공유는 돈이 잔뜩 든 가방을 열어 보이며 딱지치기를 해서 이기면 10만 원을 주고 지면 뺨을 한 대 맞는 게임을 제안합니다. 뺨을 맞으면서도 수십만 원을 벌 수 있어서 기쁩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용돈도 몇만 원 드립니다. 

 

    공유는 오징어 게임에 참가할 수 있는 명함을 줍니다. 처음엔 그저 뺨이나 맞는 게임인 줄 압니다. 하지만 게임에서 지면 무참하게 죽여버립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게임을 하며 반수 이상이 죽습니다. 그래서 참가자들은 투표로 이 게임을 더는 진행하지 않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모두가 돈이 없어서 지옥과 같은 삶을 살고 있기에 그들은 다시 게임장으로 갑니다. 이정재도 돈이 없어서 언제 장기가 적출될 줄도 모르고 어머니는 당뇨 때문에 발을 절단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월세라도 벌려고 일을 다닙니다. 그러니 죽기 살기로 게임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머니를 사랑하고 아이를 사랑한다고 남과 경쟁하여 남을 죽이면서 더 큰 이익을 얻게 되면 돈에 대한 욕심이 사라질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오히려 부모 때문에, 아내 때문에, 자녀 때문에 더 돈 욕심을 내게 됩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오히려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웃을 위해 살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위해 살게 되기 때문에 사랑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은 생존본능에만 충실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이는 이기적인 성향을 벗어나기 위해 부모를 위해 삽니다. 이렇게 누군가를 위해 살 때 나의 이기심이 사라집니다. 하지만 결국엔 부모님이 원하는 것이 공부를 잘하고 성공한 자녀이기 때문에 계속 부모를 위해 살다가는 또 이기적인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외고에 다니던 어떤 공부 잘하던 학생이 공부를 잘할 때 엄마가 칭찬을 해주니 결국엔 전교 1등을 합니다. 하지만 성적표를 두고 ‘엄마 됐지?’라는 글을 남기고는 아파트에서 투신한 일도 있었습니다.

    이웃을 위해 사는 것만이 나를 이타적인 사람으로 바꾸지 못합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돈도 필요 없으시고, 쾌락도 원하지 않으시며, 겸손하신 분이라 우리가 세상 것들에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이 좋아하시는 것은 오직 사랑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위해 사랑하면 세속-육신-마귀의 욕망에서 자유롭게 되기에 이웃을 순수하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오징어 게임’의 주제는 그 게임을 만든 사람의 이 대사에 다 들어있습니다.

    “아직도 사람을 믿나?”

사람은 어차피 모두 돈에 집착하는 존재란 뜻입니다. 

    사람을 위해 살기보다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믿을만한 분은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분 때문에 하는 사랑이 아니고 단순한 인간을 위한 사랑이라면 그 사랑은 모두 오염되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죽인 것은 사람입니다.

 -조재형신부-

 

작년 코로나가 심각하게 번져나갈 때입니다병원마다 중환자가 가득했습니다사망자들이 늘어났습니다미사도 중단되었고식당도 문을 닫았습니다코로나로 인한 피해도 컸지만우리 사회를 무겁게 짓누르는 것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그것은 보이지 않고느낄 수 없는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입니다캄캄한 동굴을 불 없이 걸어가는 것 같은 공포였습니다. 1년이 지난 지금은 그런 두려움과 공포는 많이 사라졌습니다백신이 나왔고치료제도 개발되기 때문입니다작년에 퀸즈 성당의 신부님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코로나를 조심해야 합니다그러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감기를 두려워하지 않듯이 앞으로는 코로나와 함께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교통사고가 두렵다고 운전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교통법규를 잘 지키고안전운전하면 자동차는 쉽고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도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배를 타고 갈릴래아 호수를 건널 때입니다예수님께서는 잠시 누워계셨습니다그런데 갑자기 풍랑이 거세어졌습니다제자들은 모두 놀랐고두려웠습니다제자들의 소리에 눈을 뜨신 예수님은 풍랑을 잠재우시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아요.’ 제자들에게 이렇게도 당부하셨습니다. ‘나 때문에복음 때문에 더러는 박해를 받고감옥에 갇힐 것입니다그러나 걱정하지 말아요내가 함께 있을 겁니다.’ 또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마실까무엇을 먹을까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요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그러니 먼저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따르세요.’ 다락방에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시오여러분에게 평화를 줍니다.’

 

사실 저도 걱정과 두려움은 있습니다본당과 교구청에 있으면서 재정적인 걱정은 없었습니다본당에서는 교무금과 헌금이 있었고교구청에서는 예산이 책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본당에서나 교구청에서나 주어진 일을 기쁘게 하면 되었습니다미국에서 신문사를 운영하면서 몇 가지 걱정이 있었습니다요즘은 인터넷으로 정보를 검색하기 때문에 구독자의 수가 점차 줄고 있기 때문입니다주간 신문이기에 배송이 늦어지면 몇 주씩 신문을 받아보지 못하기도 합니다홍보를 나가서 구독자 수를 늘려야 하는데 코로나로 2년 가까이 홍보를 못나갔습니다미국에서 함께 했던 가톨릭신문이 작년에 신문사 운영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갔습니다주님께서 이끌어 주심을 믿으며 걱정과 두려움을 떨쳐내고 있습니다. 1달 전에 퀸즈 한인 성당에 홍보도 시작하였고앞으로 모든 일이 잘 되리라 믿습니다.

 

오늘의 제1독서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딸 시온아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주님의 말씀이다그날에 많은 민족이 주님과 결합하여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오늘의 화답송도 희망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정녕 주님은 야곱을 구하셨네강한 자의 손에서 구원하셨네그들은 환호하며 시온산에 올라와주님의 선물을 받고 웃으리라그때에는 처녀가 춤추며 기뻐하고젊은이도 노인도 함께 즐기리라나는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고 위로하리라그들의 근심을 거두고 즐거움을 주리라.” 어둠은 빛을 이긴 적이 없다고 하였습니다칠흑 같은 어둠일지라도 작은 볼 꽃이 있으면 어둠은 걷히기 마련입니다.

 

바람이 불면 나뭇잎이 흔들리듯이 두려움과 걱정의 바람은 우리의 마음을 또 다시 흔들 것입니다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이끌어주시리라는 희망으로 힘차게 나가야 하겠습니다.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네.” 

 복음: 루카 9,44-45: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게 될 것이다

 -조욱현신부-

 

예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변모가 있은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그리고 간질병에 걸린 사람을 치유해 주셔서 감탄하고 있을 때, 제자들이 당신에 대해 정확하게 알게 하시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44절) 주님께서 사람들의 손에 넘겨진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이 예고를 제자들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 감히 물어볼 생각도 하지 못하였다. 예수님을 그렇게 오랫동안 따르면서도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직은 그들이 스승의 십자가와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산 위에서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변화하시는 것도 목격하였다. 그러나 그 영광은 십자가를 통하여 오는 것임에도 그것을 완전히 알아들을 수 있는 단계는 아니었다.

 

그들은 아직 주님의 부활을 체험하기 이전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주님을 따라다니며, 체험한 여러 기적, 그리고 얼마 전에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았으며, 악령에 사로잡힌 아이를 고쳐주시는 권능의 예수님만 보았기 때문에 그분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말씀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제자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이기적인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들은 말은 못하고 속으로 이렇게 말했을지 모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권능으로 죽은 자를 살려 내고, 호수의 풍랑을 잠재우시고, 한마디 말씀으로 사탄을 내쫓으셨던 분이 살인자들에게 넘어가시다니! 우리가 그분을 잘못 알았던 것인가?”라고. 예수님을 십자가의 신비 안에서 알 수 있다는 것을 모르게 되면, 신앙은 걸림돌이 되고 만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그 사도들이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한 후 전해준 신앙과 복음을 받아들여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도 예수께 대한 고백을 올바로 하지 못하고 많은 경우에 그 제자들과 같이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의 해결과 나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하느님으로, 예수님으로 생각하며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나의 이기적인 생각과 물질적인 집착에 팔아넘기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해야 한다.

 

우리는 그분의 뜻과 말씀을 성서 안에서 알아들어야 하겠고 깨달아 올바로 생활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에 앞서 그분이 나에게 어떤 존재이며, 무엇을 하신 분이고, 나와 그분과의 관계는 어떤 관계인지를 잘 알아야 할 것이다. 내가 그분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하지 못한다면 어떤 방법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그분을 알게 해 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가지지 못하면 다른 사람에게도 줄 수 없다. 먼저 그분의 말씀을 알아듣고 또 실천하면서 그분을 구체적으로 우리 삶 속에 강생시키는 삶이 되도록 기도하며 살아가자.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 9, 44)

-한상우신부-


길지 않는
삶의
시간 동안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우리들 삶이다.

고통과
아픔 없이
삶을 이야기
할 수 없다.

삶의 완성은
분명
십자가이다.

삶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고정되어
있지 않기에
충돌한다.

하느님의 뜻과
우리의 뜻은
결국 십자가의
죽음에서 다시
화해하고
만나게된다.

날마다
사람의 아들을
사람들의 손에
넘기는 이는
바로 교만한
나 자신이었다.

사람의 아들
예수를 통해
우리자신을
보게된다.

복음은
예수님의
눈에 비친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삶은 구원을
간절히 원한다.

우리를
창조하신 분을
우리가 넘기는
말도 안되는
모순이다.

건너뛸 수 없는
십자가의
사랑이다.

사랑은
넘겨져도
멈추지 않았다.

모든 것을
내려놓으시는
주님이시다.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사람을
살리는 참된
희망이 된다.

끊임없이
내려놓고
배우는
삶의 시간이다.

끝내 드러나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이다.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이 여정이
바로
십자가이다.

십자가를
빼 놓고
인간의 삶을
이야기 할 수
없는 이유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반전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하는데 ...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 43-44)
예수님의 가르침과 구마, 치유의 기적들에 사람들이 놀라워하며 열광합니다. 의료적 혜택을 누리기 어려운 가난한 이들은 물론 민족적 자유와 해방에 목마른 이들이 그분의 존재와 행위에 희망을 갖게 되지요.

그런데 제자들은 스승에게 쏟아지는 이런 호평으로 으쓱할 새도 없이 엄청난 반전을 직면합니다. 당신이 바로 그 사람들 손에 넘겨질 것이라는 예수님 말씀이 충격에 가까울 터입니다.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조차 두려워하였다."(루카 9,45)
이 말씀이 두 번째 수난 예고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제자들의 귀와 마음은 막혀 있습니다. 듣고 싶지 않은 것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들었다 해도 쉽게 망각하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묻는 것조차 두려워했다니, 뭔가 불길한 예감마저 전혀 없었던 건 아닌 듯 보이지요.

사람들의 경탄과 사람들의 배척, 이 둘 사이의 거리는 사실 지척입니다. 그 사이가 아주 멀기를 바라는 건 그 명예와 영광에 기대어 한 자리 차지하고픈 욕망에 들썩이는 제자들 사정일 뿐이지요. 오히려 당사자 예수님에게서는 그 둘 사이에 경계가 보이지 않습니다. 당신을 떠받드는 영광에도 무심하고, 당신을 사정없이 내치는 공격에도 초연하시니까요.

제1독서에서는 예루살렘의 새로운 모습이 열립니다.

"예루살렘은 성벽 없이 넓게 자리 잡으리라. ... 내가 예루살렘을 둘러싼 불 벽이 되어 주고, 그 한가운데에 머무르는 영광이 되어 주리라."(즈카 2,13)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루살렘은 그들의 민족적 정통성과 이방인에 대한 배타성이 극명하게 표출되는 장소였지요. 그런데 유배 후 돌아와 다시 재건되는 예루살렘이 성벽 없이 넓게 자리 잡는다고 하니 이 또한 반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반전은 하느님께서 이 도성이 혈연과 할례, 율법으로 구분하는 경계를 넘어서는 만민의 성소가 되길 바라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불 벽"
물리적 돌로 이루어진 성벽을 없애고 활활 타오르는 불로 도성을 둘러싸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인간적 생각으로야 불이 둘러싸면 더 접근이 어렵지 않나 오해할 수 있지만, 이 불은 영의 불길, 곧 성령의 불입니다. 성령은 구분하고 선 긋고 갈라내는 힘이 아니라, 잇고 일치하고 포용하는 기운이십니다. 주님께서 기대하시는 예루살렘은 누구나 서로 넘나들며 너나 할 것 없이 소통하고 연결되고 하나 되게 하는 영으로 둘러싸일 것이고, 주님께서 그 한가운데 머무르실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삶은 반전의 연속일 겁니다. 기쁨과 슬픔, 행운과 사고, 만남과 이별, 희망와 실패 등등 늘 좋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늘 힘들기만 하지도 않은 게 우리네 삶이겠지요. 그 경계를 넘나들며 우리는 무너지기도 하고 실의에 빠지기도 하지만 이내 일어나 성장하며 단단해져가는 중입니다.

자신이 구분해 놓은 좋은 것과 나쁜 것 사이에 성벽처럼 경계를 만들고 묶이게 되면, 어차피 롤러코스터 같은 인생, 그 파도에 시달려 일희일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중심에 주님께서 계시고 구분의 성벽이 영의 불길로 바뀌면 많은 게 달라질 겁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이 규정해 놓는 성공과 실패, 기쁨과 슬픔, 건강과 질병 등의 결과론적 구분이 성령 안에서 새로이 질서잡힐 테니까요.        

주님의 영광과 그분의 수난을 함께 사랑하고 껴안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동시에 우리가 누리는 행복과 고통을 함께 받아안을 힘 또한 얻으시길 바랍니다. 성령께서 구분하고 차별하는 우리의 편견과 선입견을 태워 없애 주시고, 주님 안에서 하나로 아우를 내공을 주실 겁니다.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정녕 내가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즈카 2,14)  

 우리 가운데 계시는 주님

 -김찬선신부-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오늘 독서는 즈카르야 예언서인데

여기서 하느님은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그러니까 엠마누엘 하느님이요 육화의 하느님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 놀랍지 않습니까?

이때 이미 육화의 하느님 곧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보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사실 복음은 계속 예수는 구약에서 예언된 바로 그분이라고,

그러니 예수는 예언이 성취된 것이라고 얘기를 하고 있지요.

 

그렇습니다.

예수는 구약의 예언이 성취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시고,

우리는 그렇다고 믿는 사람들인데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을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느끼며 살아갑니까?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을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산다면

제 생각에 그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그중 하나는 다른 데서 찾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알이 먼저인지 닭이 먼저인지 모르지만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생각지 않고

다른 어디 특별한 곳에 계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찾는 것을 실패할 때

우리는 여기서 찾는 노력을 더 하기보다

하느님은 다른 어디 특별한 곳에 계신다고 눈을 돌려버리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은 지금 스쳐가는 바람결에도 계시고,

꽃에도 계시며 돌멩이에도 계시고 심지어 길바닥에 뒹구는

종이쪼가리에도 계신다고 프란치스칸들은 얘기하지 않습니까?

 

매일 떠오르는 태양이 어찌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표가 못 되고 은총이 아닙니까?

 

매일 해가 떠오르니 우리는 그것을 특별하다고 생각지 않고

해가 십자가 모양을 할 때만 기적이라고, 하느님의 표징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해가 뜨는 데 내가 한 것이 아무것도 없고, 인간이 한 것 아무것도 

없다면 그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하셨다는 표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하나는 진정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느님을 몰라 보기 때문인데

이 또한 앞에서 얘기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엠마누엘 하느님은 우리 가운데 그러니까 관계 안에 계시는 분이신데

우리가 형제를 밀어내어 관계가 단절되면 우리 관계 가운데

계시지 않는 것이고, 더 정확히 얘기하면

이런 관계 안에서는 우리가 하느님을 못 보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우리가 사랑할 때만 보이고,

나와 같이 있는 형제가 나와 같은 하느님의 자녀로 사랑할 때만 보이는데

나와 같지 않다고 나와 같이 있는 것을 거부하면

사랑이신 하느님은 그 안에 계실 수가 없는 것이지요.

 

제 기억이 정확하지 모르지만 <사막의 교부들>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떤 수도원에 형제들 간에 사이가 너무 좋지 않다는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유명한 수도승이 찾아 와서 이 수도원 형제들 중에 한 분이

주님이시라는 얘기를 하고 떠났고 그때부터 수도자들은 서로를 주님처럼 

생각하고 사랑케 됐고 그래서 형제 안에서 주님을 만나는 삶을 살았다지요.

 

우리도 지금 우리 가운데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현재적으로 만나고 느끼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9월 28일 연중 제 25주간 토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