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9월 24일 연중 제 25주간 금요일

Margaret K 2021. 9. 24. 06:35

2021년 9월 24일 연중 제 25주간 금요일 


☆☆☆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루가 9,18-22)


Who do you say that I a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지금도 존재하지만, 한동안 ‘가짜 뉴스’라는 용어가 사회적 이슈가 된 적이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가짜 뉴스가 “독자를 기만하거나 조종할 의도로, 존재하지 않거나 왜곡된 자료에 근거하는 허황한 정보와 관련된다.”(제52차 홍보 주일 담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원하는 목적을 위하여 끊임없이 확산되는 가짜 뉴스는 거짓을 위한 자유이며, 거짓된 진리를 우리에게 전함으로써 다툼과 분열을 조장합니다. 주님께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라고 하셨습니다. 가짜 뉴스는 우리를 자유롭게도 평화롭게도 하지 못합니다. 오직 진리만이 우리에게 참평화를 줍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가짜 뉴스가 매우 많았던 듯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활한 요한으로, 엘리야로, 옛 예언자 가운데 하나로 여겨지고 사람들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심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어떤 수고와 수난을 겪고 부활하실지 알려 주십니다. 

오늘 미사의 입당송에서 우리는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백성의 구원이다. 어떠한 환난 속에서도 부르짖으면 내가 들어 주고, 영원토록 그들의 주님이 되어 주리라.” 하고 노래하였습니다. 주님을 참되게 알고 깨우쳐 그분께서 나의 구원자이심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떻게 현실을 살아야 하는지 알려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듣고 올바로 실행에 옮길 때, 신앙인은 어려움 속에서도 진리와 함께 자유롭게 됩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우리의 기억은 완벽할까요? 자신이 직접 보고 직접 들은 것인데 어떻게 틀릴 수 있겠냐고도 할 수 있지만, 사실 틀릴 수 있다는 것이 정답입니다.


언젠가 초등학교 동창을 만나서 대화를 하다가 제가 전혀 알지 못했던 사실 하나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저라는 것입니다. 저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데, 상대방은 분명히 제가 그랬다면서 자신의 좋은 기억력을 강조합니다. 제가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것을 했다고 하는데, 너무 강하게 이야기해서 “그래 네 기억이 맞아.”라면서 인정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그 친구가 틀렸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친구가 했다는 것을 저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고 지금도 어떻게 하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기억이라는 것은 입력되는 정보를 끊임없이 해석하고 분석한 결과라고 합니다. 이런 이유로 기억이 계속해서 바뀌는 것입니다. 지금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것 모두가 진실이 아닌 바뀐 기억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기억도 그런 것 같습니다. 주님의 뜻 자체에 맞추면 올바른 기억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뜻 자체에 맞추면 주님을 제대로 기억할 수 없습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을 채워주는 알라딘의 램프 속 ‘지니’ 정도로만 기억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옛 예언자 중 한 분이 다시 살아나신 것이라는 군중들의 말을 전하고 있습니다. 군중들이 그렇게 말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자신의 기준으로만 생각하고 판단했기에 그렇게 기억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분으로 예수님을 만들어 기억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 중의 으뜸 제자답게 베드로가 나서서 말합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예수님을 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기준으로 예수님을 보았기에 가능했던 정답이었습니다. 물질적인 욕심을 채워주는 분으로 기억했던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진정한 구원을 주시는 분으로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습니까? 잘못된 기억으로 주님의 외면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와 같은 정답을 말할 수 있도록, 주님의 뜻에 맞게 철저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올바른 기억으로 주님께 제대로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리더십은 말로 행하여지기 보다는 태도와 행동으로 보여진다(헤럴드 제닌).

잊어버리는 것도 좋아.

나이를 먹으면서 기억력이 떨어진다는 분을 많이 봅니다. 그런데 저 역시 자꾸 깜빡깜빡 잊어버릴 때가 있더군요. 치매로 고생하시는 분들을 봤기에 저 역시 불안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2019년 과학자들은 우리 뇌 속의 ‘망각 신경 세포’가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우리 몸에 쓸데없는 것이 하나도 없음을 잘 알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망각 신경 세포’는 왜 있을까요?

뇌로 들어오는 모든 것을 기억하면 뇌가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고 합니다. 즉, 창의적으로 생각하고 상상하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추상적인 개념을 이해하거나 얼굴을 인식하는 일에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이를 막기 위해 잊어버릴 수 있도록 돕는 ‘망각 신경 세포’가 있다는 것입니다. 잊어버려야 새로운 정보를 저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긴 치매 환자의 대다수가 과거의 기억에 매여 있습니다. 망각 신경 세포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해서 지금 현재의 얼굴도 잘 인식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잊어버리는 것도 지극히 정상적인 사실입니다. 아니 지금을 더 잘 살려면 잊어버려야 할 것입니다. 새로운 기억이 들어올 수 있도록 말이지요.

 그리스도란? 피를 흘려 피 흘릴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드는 사람

-전삼용신부-


어느 복음에서나 그리스도께서 당신이 누구시냐고 제자들에게 물으신 다음에는 항상 ‘수난 예고’라는 것을 하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하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무에게도 그 말을 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경고하십니다. 그 이유는 아직 그들이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받은 그리스도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깨닫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칫 예수님만 십자가에 매달리고 자신들은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메시아, 곧 그리스도란 성령을 받아 파견된 자를 의미합니다. 성령은 사랑의 본성을 심어줍니다. 사랑은 그 사람에게 자신의 것을 내어주라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복음 전에도 5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성체로 상징되는 빵을 거저 나누어주신 것 같지만 실상은 그 나눔이 그리스도께는 곧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죽지 않으면 준 것이 아니고 피가 섞이지 않은 어떤 선물도 사랑이 아닙니다.    

 

    중국의 마지막 황제 ‘푸이’의 일생을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황제는 국민에게 사랑을 받을까요? 그럴 수 있습니다. 중국 황제는 엄청난 권력과 부를 누립니다.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는 서태후가 지목하여 3살 때 부모를 떠나 황제가 됩니다. 푸이는 나이가 들어도 신발 끈을 묶을 줄도 모르고 칫솔에 치약을 짤 줄도 모를 정도로 완전한 대우를 받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대우가 정말 사랑이었을까요?

     

    푸이는 황제로 살다 6살 때 시대 상황에 따라 폐위됩니다. 하지만 중화민국이 그에게 생활비를 대주어 그는 아직도 자신이 황제인 줄 알고 호화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그는 그 성 안에서는 무소불위의 권위를 가진 사람이었지만 실제로는 그저 꼭두각시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결혼도 자기 뜻대로 하지 못했는데 17살이 된 푸이는 주위 어른들의 강요에 못 이겨 같은 날 2명의 부인을 얻습니다. 이는 자금성 안에서 안위를 누리던 이들이 푸위를 잡아놓기 위한 술책이었습니다. 두 황후 중 하나는 아편 중독으로 남의 남자의 아이를 낳고 다른 황후는 이혼 소송을 제기해 푸이는 중국 최초의 이혼남이 됩니다.    

 

    그 후 일본군이 세운 만주국의 황제로 등극하지만 사실 이도 일본군의 꼭두각시 역할에 불과했습니다. 결국, 그는 10년간의 감옥생활을 거친 후 식물원 정원수로 일하다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사망합니다.

     

    세상에 중국 황제만큼 엄청난 권위와 재산, 그리고 여자들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는 세 차례나 황제였고 많은 여성을 알았으며 청나라의 재산이 한때는 다 그의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 엄청난 선물들 안에 없었던 것이 단 하나 있습니다. 주는 이의 ‘피’입니다. 주는 사람들은 그를 이용하려 그런 선물들을 한 것이지 그 안에 피를 넣어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피를 줄 유일한 그 사람들은 부모였지만 그는 부모에게서 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받는다고 다 선물이 아닙니다. 그 선물 안에 피가 들어있어야 나를 살리는 선물이 됩니다. 다 가졌던 남자 푸이는 감옥에서 사람들이 자기에게 절을 하는 것을 보고는 손목을 그어 자살을 시도합니다. 그런 모든 것 안에 ‘사랑’이 담겨 있지 않음을 그때는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받는다고 다 좋은 게 아닙니다. 이렇듯 사랑의 고통이 담겨 있지 않은 선물은 사람을 그냥 껍데기로 만들어버립니다.

     

    달걀도 유정란이 있고 무정란이 있습니다. 그냥 봐서는 모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어떤 것은 병아리가 되고 어떤 것은 썩어버립니다. 하지만 음식으로 먹을 때는 영양의 차이가 크게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유정란이 비싼 이유는 무엇일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유정란에 생명력이 더 있을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암탉이 키워진 환경을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유정란은 아무래도 양계장이 아닌 조금 더 자유로운 환경에서 키워져야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는 선물도 마찬가지입니다. 피가 들어간 선물과 들어가지 않은 선물이 있습니다. 피가 들어가지 않은 선물은 생명력이 없습니다. 내가 주는 선물에 나의 피가 섞여 있지 않다면 그것은 생명을 주는 사랑이 되고 그렇지 않다면 그냥 물질일 뿐입니다.

     사실 부모도 죽지 않는다면 자녀를 위해 주는 모든 것들이 사랑이 아닌 그냥 물질일 수 있습니다. 돈 많은 부모가 식모에게 시켜 힘들이지 않고 자녀를 키웠다고 해 봅시다. 그러면 그 자녀는 올바로 클까요?

     

    어떤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여자분은 그렇게 자랐습니다. 어머니가 너무 잘 나가는 사람이라 큰딸을 키우는 것보다 일에 더 치중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 아이가 태어나자 엄마는 육아를 위해 직장을 그만둡니다. 그래서 동생은 엄마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큰딸은 비록 풍요하게 자랐지만, 자신은 지독한 열등감에 자해까지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신을 구타하는 남자를 떠나지도 못합니다.

    돈이 많아서 돈으로 편하게 자녀를 키우면 자녀는 그렇게 자존감 없는 아이로 자라나 힘겨운 인생을 살게 됩니다.

     

    베트남 전쟁 때 미국인들은 고아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부모 잃은 아이들을 한데 모아 키웠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너무 많아서 보모들은 기계로 아이들의 젖병을 만들어 아이들이 배고플 때마다 젖을 먹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몸은 편해졌지만, 아이들은 원인도 모른 채 죽어갔습니다. 아이들은 젖을 원하는 게 아니라 피를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피 흘림 없는 그리스도가 없듯이, 고통 없는 사랑도 없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인데 그 주는 것 안에 내 피가 들어있지 않으면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내가 죽지 않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죽은 사람은 무언가 주면서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이 주는 선물 안에는 그저 그 사람도 줄 줄 아는 사람이 되게 만들려는 뜻밖에 없습니다.

 -조재형신부-


할 수 없는 일을 하려다 마음이 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아서 낭패를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핸드폰과 자동차의 오디오를 연결하는 방법이 있었습니다잘 살펴보면 할 수 있었는데 2년이 지나도록 못하였습니다문득 연결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고 몇 번 시도하니 핸드폰의 음악을 자동차에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쉽게 할 수 있었는데 2년이 넘게 걸렸습니다신앙인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습니다매일 평일미사에 참례하는 분들을 봅니다한글 성경은 물론 영어 성경을 필사하는 분을 봅니다수익의 일정부분을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기부하는 분을 봅니다미사가 끝난 후 성당에 남아 방역봉사 하는 분을 봅니다주일미사에 번잡한 주차장에서 차량봉사 하는 분을 봅니다교회가 2000년 역사를 이어오는 것은 성직자들의 제의가 있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교회법과 조직이 있었기 때문만도 아닙니다삶의 자리에서 묵묵히 할 수 있는 일을 실천한 신앙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역사를 돌아보면 할 수 없는 일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아담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카인은 사랑해야 할 동생을 시기심 때문에 죽였습니다결국은 무너지고 마는 욕망의 바벨탑을 높이 쌓았습니다다윗은 욕정 때문에 충실한 부하를 죽음으로 내 몰았습니다헤로데는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2살 이하 어린이를 죽였습니다대사제와 빌라도는 하느님의 어린양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성인이 되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교회가 인류와 역사 앞에 잘못한 일들에 대해서 겸손하게 용서를 청하였습니다예수님께서는 닭이 울자 회개의 눈물을 흘렸던 베드로 사도를 용서하셨습니다자신의 재산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겠다는 자캐오에게 구원받았다고 하셨습니다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우리는 유혹 앞에 할 수 없는 일을 하려합니다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맙니다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와 연민 앞에서 희망을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잘못한 이웃을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벗이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라도 가주라고 하십니다마귀 들린 사람들을 고쳐주고병자들을 고쳐주라고 하십니다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십니다그러나 할 수 없는 일해서는 안 되는 일은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의 위선은 따라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악의 유혹에 빠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참으로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해야 할 일은 하고할 수 없는 일은 하지 않고해야 할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식별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나는 백성의 구원이다어떠한 환난 속에서도 부르짖으면 내가 들어 주고영원토록 그들의 주님이 되어 주리라내가 이곳에 평화를 주리라만군의 주님의 말씀이다.” 

 예수님은 고통과 십자가를 피해가는 메시아가 아니라 고통과 십자가를 끌어안는 메시아이십니다!

 -양승국신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루카 복음 9장 20절) 하는 예수님의 물음에 베드로 사도께서 정답 중의 정답, A+에 해당되는 모범답안을 제출합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 이 보다 더 명확한 답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그리스도가 어떤 그리스도이신지 보다 명료하게 설명하십니다.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영광과 승리, 존귀와 위엄의 메시아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 고난 받는 메시아이십니다. 사람들로부터 배척받는 메시아, 사람들 손에 죽임을 당하는 메시아,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혀 높이높이 매달리는 수난의 메시아이심을 강조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루카 복음 9장 22절) 

 

보십시오. 예수님은 고통과 십자가를 피해가는 메시아가 아니라 고통과 십자가를 끌어안는 메시아이십니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어쩔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에게 죄송스런 말씀이지만 고통과 십자가는 반드시 학점을 따야하는 필수과목이자 기본교과목입니다. 십자가 없이 부활 없듯이 십자가 없이 구원 없습니다. 

 

한계를 지닌 유한한 인간, 갖은 결핍을 끼고 사는 부족한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고 극복해야만 하는 고통과 십자가 없는 신앙, 아무런 굴곡 없이 만사형통하고 승승장구하는 삶은 솔직히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우리 안에 영원히 호흡하고 계실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신 그분의 외아들이십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하느님 그분 자체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오신 이유는 오직 하나 나를 사랑하기 위해, 나를 구원하기 위해, 나와 너, 즉 이 세상 인류 전체를 행복으로 인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적당히 믿고, 적당히 예를 갖추고, 가끔씩 존경심을 표하고, 적정선에서 추종하는 그런 존재가 절대로 아닙니다. 그분은 끝도 없는 우리의 이기적인 욕구를 충족시켜주실 요술 방망이 같은 존재가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 전체, 내 존재 전체, 내 삶의 모든 것을 걸고 추종해야할 절대자이십니다.

 용서를 통해 자유를 회복하라

 -반영억신부-


가끔 꿈 얘기를 듣습니다. 좋은 꿈을 꾸어서 복권을 샀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 무서운 악몽에 시달려 밤잠을 설치고 그 꿈 때문에 마음이 흔들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괴로워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꿈은 꿈입니다. 아무리 좋아도 꿈이고 아무리 험해도 꿈입니다. 그러므로 꿈은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좋게 생각하고 기뻐하고 또 예언의 성격을 지녔다면 철저히 준비하면 됩니다. 꿈에 끌려다녀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꿈대로 안 좋은 일이 생기게 됩니다. 좋지 않은 꿈 때문에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꿈을 다스리지 못하고 그 꿈에 매여 집착하기 때문에 안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꿈을 꿈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물론 때로는 죄를 짓고 그 죄책감 때문에 꿈을 꾸는 사람도 있습니다. 좋지 않은 일을 행하여서 악몽에 시달립니다. 그리고 안 좋은 일이 생기면 하느님께서 벌을 주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벌을 주시는 것보다 본인 스스로 불안한 마음과 죄책감으로 몸을 괴롭히기 때문에 상황이 나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그 원인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저지른 과오나 잘못이 있다면 그 잘못에 대해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하고 용서를 넘어 아버지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의 허물에 대해서도 언제나 용서해 주시고 얽매인 것을 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죄의 고백을 통해 용서의 은총을 입어야 합니다. 자유를 회복해야 합니다. 죄의 종으로 익숙해져서 그냥 그대로 편안함을 즐겨서는 안 됩니다.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 대한 여러 소문을 듣고 몹시 당황하였습니다.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하고,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하였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하면서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하였습니다. 헤로데가 불안해하고 당황한 것은 당연합니다. 사람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소유한 왕이라 할지라도 죄책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죄값을 스스로 치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존재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저지른 죄 때문에 예수님이 무서워진 것입니다. 사랑을 전하러 오신 분을 심판관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심판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잘못한 것이 부끄러워서 그렇습니다." 내면에 굳은 심지가 있는 사람은 결코, 당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뻐합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고백하면, 그분은 성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1요한 1,9). 그리고 우리의 하느님은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에제33,11). 혹시라도 마음의 불안이 있다면 하느님의 자비를 굳게 믿고 주님의 품 안에서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혹 두렵습니까? 거짓을 벗어 버리고 진리를 추구하십시오! 용서하시는 주님과의 깊은 만남을 통해 자유를 얻기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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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득형씨는 권위와 권력을 설명합니다.

권위는 1)인간적인 매력과 인격에 매어지는 것

2)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따라옴

3)자리에 관계없이 평가가 높아감

4)죽은 뒤에도 없어지지 않음

5)지도자 선택의 첫째가는 기준이 됨

권력은 1)직제상 지위(자리)에 주어지는 것

2)사람들을 덮어놓고 복종시킴

3)자리가 높아질수록 더 강해짐

4)권위가 없는 사람일수록 더 휘두름

5)그 자리를 떠나는 동시에 없어져버림

 

권위와 권력은 분명히 다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만나는 헤로데는 권력을 잡았지만 권위는 없었습니다. 헤로데는 권력을 가지고도 불안해하였습니다. 권력을 이용하여 많은 사람에게 폭력을 사용했고 특히 당시 유다인들이 최고의 예언자로 알고 따르던 세례자 요한을 죽였는데 그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소리도 들렸고 여러 소문이 있었기에 불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어도 ‘도둑이 제 발이 저린다.’고, “때린 놈은 발을 오그리고 자도 맞은 놈은 발을 펴고 잔다’고 합니다. 자기가 한 짓을 알기에 늘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속적인 권력이 아니라 권위를 지니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혹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지배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권력의 마음입니다. ‘돈이면 다 된다’는 식의 마음으로 이웃에게 재물이나 지위를 가지고 대접 받고자한다면 그에게서 권위는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권위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고, 우리는 그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로마13,1-2). 주님께서 생명을 주관하는 권위(루가12,5)를 가지셨고, 말씀대로 이루시는 힘을 지니셨습니다(요한5,39). 또한 가르침대로 행하심으로써 권위를 지키셨습니다. 우리도 삶의 자리에서 각자의 권위를 키워야 하겠습니다(2고린10,8).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어머니는 어머니로서, 자녀는 자녀로서, 아내는 아내로 남편은 남편으로서의 위치기 있습니다. 각자의 위치에 걸 맞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권위를 지키시기 바랍니다. 직장이든 가정에서든 각기 권위가 살아나기를 기원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도 함께 있었는데, 그분께서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루카 9,20-22).”

 

이 이야기를, 복음서를 기록할 때의 시점에서, 그리고 사도들의 입장에서

회상하는 이야기로 재구성하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때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 엘리야, 다시 살아난 옛 예언자라고

생각했지만, 우리는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신 분’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수난 예고 말씀은 알아듣지 못했고, 그리스도이신 분이

왜 수난을 당해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랬다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 모든 것을 깨닫게 되었고, 이해하게 되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영적인 구세주’로 믿긴 했지만, 그때에는 아직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예고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를 비롯해서 사도들의 믿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완성되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말한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옛 예언자’는 모두

이미 죽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가리켜서 말할 때에는

‘되살아난 세례자 요한, 재림한 엘리야, 다시 살아난 옛 예언자’로 표현됩니다.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은,

예수님에게서 어떤 초자연적인 힘을 느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옛 예언자는 모두

메시아의 일을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신 일과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신 일은 하나로 연결됩니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예수님 말씀은 여러 가지 뜻으로 해석됩니다.

1) “때가 되기 전에는 내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여기서 ‘때’는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 승천, 성령 강림이

모두 이루어졌을 때입니다.

실제로 사도들이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신 분”이라고

공적으로 처음 선포한 때는 성령 강림 때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사도들에게 이렇게 지시하셨습니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그리고 보라,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루카 24,44.46-49).”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는 ‘성령 강림 때’입니다.

(사실 사도들은 성령을 받기 전에는 믿음도 부족했고, 용기도 부족해서,

‘예수님이 그리스도’ 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때가 되기 전에는 내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때가 되면, 너희는 내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말하게 될 것이다.” 라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2) “너희가 확신하기 전에는 내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예수님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신 분”이라고 베드로 사도가 신앙을 고백한

일은, 머리로 생각하는 믿음을 고백한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머리로 믿는 것도 믿음이긴 하지만,

목숨을 바쳐서 증언할 정도로 믿는 것은 아직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그 단계에서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 단계에서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말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믿음을 증언하는 일이 아니라, 지식을 전달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나중에 사도들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은 구세주” 라고 선포하게 된 것은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들 자신들이 목숨을 바칠 수 있을 정도로

자신들의 믿음에 대해서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의 경우, 천사가 전해 준 ‘기쁜 소식’을

믿지 못해서, 요한이 태어날 때까지 말을 못하게 되는 일을 겪었는데(루카 1,20),

그 일은, ‘믿음’이 없으면 선포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잘 나타내는 상징적인 일입니다.>

 

3) “내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일은

‘말’로만 해서 될 일이 아니라 ‘삶’으로 해야 하는 일이다.”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것을 확신한다면 당연히 ‘삶’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삶’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니고,

그런 상태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할 수 없습니다.

(증언을 한다고 해도 그 증언에 힘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전과 부활 후의 ‘사도들의 삶’은 완전히 다릅니다.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구세주’ 라고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또 사도들은 선교활동을 ‘말재주’로 하지 않았습니다.

‘삶’으로 했습니다(사도 2,42-47).

물론 설교도 했지만, 그들의 설교는 ‘삶’을 바탕으로 한 설교였습니다.

 

4) “너희는 나에 대해서 증언할 때, 부활만 말하지 마라.

반드시 수난과 죽음을 함께 말하여라.”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하나의 사건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우리의 신앙생활도

그렇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십자가의 길’은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가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 부활과 영원한 생명은,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간 사람들만 얻게 될 것입니다.

복음: 루카 9,18-22: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조욱현신부-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질문하신다.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8절).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중이었고, 예루살렘에는 십자가의 길이 그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즉 예수님은 이제 머지않아 십자가를 지셔야 하며 그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계획을 이루셔야 하는 중요한 때였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당신의 존재를 올바로 보고 있는지 물으신 것이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19절) 예수께서는 이 소문에 대해 무어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왜? 그 소문은 언급할 가치도 없이 틀린 소문이기 때문이다. 그 답에 즉시 예수께서는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20절).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받아들여 혼란을 겪지 않도록 그들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여 대하신다. 그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하신 것이다. 하느님의 기름 부음을 받아 그리스도라고 불린 사람들이 있었다. 더러는 임금으로 혹은 예언자로 기름 부음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하느님 아버지의 그리스도이신 분은 오직 한 분이시다. 베드로는 “하느님의 그리스도”(20절) 라고 정확하고 올바르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였다.

 

제자들에게 이 질문을 하시기 전에 예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다. 여기서 제자들은 그 기적에 놀랐고, 그분이 참으로 하느님이시면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수군거리지 않도록 칭송을 받으려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엄하게 분부하셨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길이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죽임을 당하는 길로써 구원을 이루어야 하는 길이기에 그리스도를 다른 뜻으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함구를 말씀하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제자들까지도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믿기 어려워하리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길은 바로 십자가의 길이다. 우리도 그 길을 따라 걸을 때, 우리도 영광을 입을 것이다.

 

제자들에게 함구하라고 하신 것은 그들이 선포해야 할 내용 가운데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그들은 주님의 십자가와 수난과 육신의 부활을 선포해야 했다. 제자들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분을 선포해야 했기 때문이다. 신앙생활도 잘못하면 현세적이고 기복적인 신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그리스도를 닮는 삶을 살아 그리스도를 올바로 고백하는 신앙인이 되도록 하여야 하겠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루카 9, 22)

-한상우신부-


지극히
자연스러운
어둠과 빛
고난과
기쁨이다.

우리의
삶 안으로
들어오신
사랑의
주님이시다.

우리와 함께
고난의 여정을
걸어가시는
희망의
주님이시다.

살아가는
모든 시간에서
고난을 체험하는
우리들 삶이다.

그 누구도
고난을
피할 수는 없다.

고난도
은총이
되게하시는
주님이시다.

우리 힘으로는
이겨낼 수 없는
고난의 무게이다.

고난을 통해
우리의 인격은
성숙을 향해
나가게된다.

겸손을
배우게 된다.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는
주님의
수난이다.

주님께
달려가 안기는
우리들 절박한
믿음이다.

고난이
가리키는 것은
구원의
주님이다.

우리
삶 안에서
시작된
구원의
은총이다.

고난은
숨겨져 있던
많은 것들을
수면 위로
올려놓는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안다.

힘겨운
고난 속에서도
끊을 수 없는
하느님과
우리의
사랑의
관계이다.

사랑이
고난을
끌어 안는다.

고난을
끌어 안으시는
주님을
만난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물으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루카 9,20)
예수님께서 군중이 당신을 누구라고 하는지 들으신 뒤에, 이번에는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옛 예언자... 그분을 먼 발치에서 보거나 그분에 대해 듣거나 치유나 구마 등을 통해 실제로 체험한 이들이 그렇게 여긴다면, 그렇다면 바로 곁에서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며 가르침을 받는 제자들은 누구라 여기는지 스스로 개별적인 답을 찾도록 하시는 겁니다.

군중이 예수님을 역사 안에 등장했던 뛰어난 예언자 정도로 인식한다면, 함께 지낸 제자들은 그보다 좀 더 깊이 들어가서 '하느님께서 기름부어 파견하신 메시아'로 알아봅니다.

이처럼 이 물음은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서 그분을 체험해야 진짜 답이 나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시고 메시아시라는 교리나 강론을 자주 접했더라도, 실제 자기 존재에게 구원자요 메시아이심을 경험한 연후라야 비로소 이 내용이 온기와 핏기를 얻어 생생히 체득되지요.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루카 9,22)
당신에게 "하느님의 그리스도"라고 한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 바로 그 그리스도의 운명을 알려 주십니다. 어쩌면 제자들 입장에서는 폭로로 여겨질 만큼 충격적인 내용이지요.

물론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체험은 아직 거기까지 이르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무수한 참 예언자들이 고난과 배척의 운명을 살았다는 걸 모르지 않으면서도, 그 내용을 지금 여기의 자신과 연결하기는 쉽지 않은 까닭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성전 재건을 독려하시는 주님의 목소리가 드립니다.

"용기를 내어라. ...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니 일을 하여라."(하까 2,4)
유배에서 돌아와 고향에 다시 정착하느라 분투하는 이들이 실질적 어려움과 방해를 무릅쓰고 주님의 집을 짓는 일이 그리 녹록할 리 없습니다. 무수한 난관을 뚫고 나아가기 위해서는 옛 예루살렘 성전의 영화에 대한 기억이나 구전에 더해서 주님 현존을 누리는 존재로서의 환희와 영광을 실제로 체험해야 합니다.

"나의 영이 너희 가운데에 머무를 터이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마라.(하까 2,5)
주님께서는 귀환한 이들이 개인적으로도 또 공동체적으로도 당신 현존의 은총을 깨닫길 바라시기에 그들 한가운데에 들어와 머무르십니다. 주님의 영과 하나 된 이라면 기쁨과 환희는 물론 고난과 업신여김, 배척과 죽음까지 그분과 하나의 길을 걷습니다. 게다가 끝이라 여겼던 생명의 막장에서 부활까지 체험하게 되면, 그분과 함께하는 쓴맛, 단맛을 가리지 않고 바라게 될 것입니다. 그래야 갈망이 일고 열정이 솟아, 반드시 주님을 모시겠다는 의지로 투혼을 발휘할 테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주님께서 오늘 우리 각자에게 "그러면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물으십니다. "그래, 남들이 말하는 그건 됐고, 그러면 너에게 나는 누구니?" 하고 물으시는 겁니다. 교리나 강의에서 들었던 유려한 단어들의 조합보다, 우리 각자의 생애를 통해 직접 만나 업치락뒤치락 동행해 온 체험에 비추어 주님이 누구신지 응답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우리가 인식했건 인식하지 못했건 그분은 우리 한가운데 계셨고, 사실 우리는 주님을 알고 있답니다. 

 <나를 완벽하게 지배하시는 분>

 -김찬선신부-


하느님의 존재 여부가 십대 때는 제게 너무 중요하였습니다.

모두들 공부가 제일 중요하다고 하는 그때 제게는 공부가 전혀 중요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존재 여부가 너무도 중요했기 때문이었지요.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저는 정말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고통뿐인 삶과 악이 판치는 세상을 하느님이 안 계시다면

살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존재를 다른 것 다 제쳐놓고 찾았고

십여 년이 지나서 하느님의 현존 체험을 한 뒤에야

하느님 존재 여부에 저의 전부를 걸지 않게 되었으며

다른 것을 돌아볼 여유도 생기고 일상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느님이 존재자일 뿐 아니라

나와 함께 계시는 분이어야 하고 나에게 힘 주시는 분이어야 합니다.

 

전에는 살아야 할 이유를 찾는 데 워낙 급급했기에

하느님이 존재하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는데

이제는 존재하시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나와 함께 계시며

살아갈 힘을 주시는 분 그래서 어떻게 보면 더욱 절실한 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하까이서의 주님 말씀이 아주 마음에 와 닿습니다.

 

"여호차닥의 아들 예수아 대사제야, 용기를 내어라.

이 땅의 모든 백성아, 용기를 내어라.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니 일을 하여라."

 

그런데 이것은 한 때 겁 없이 일을 저지르던 제가,

마치 내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처럼 자신만만하던 제가

이제 용기를 내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반증이며

하느님께서 옆에 계시며 계속 힘을 내라고 용기를 주시지 않으면

용기를 낼 수도 없게 되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그러니까 인간적으로만 보면 슬픈 일인데

그런데 요즘 저는 이것이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제 제가 하느님께 안착하였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용기를 내어 일을 하라고 하시지만

이제 많은 일과 큰 일을 하려고 할 필요는 없고,

주님께서 맡기시는 만큼 그리고 힘 주시는 만큼만 하면 되고,

그러다가 이 주님께서 이제 그만 살고 당신께 돌아오라 하시면 가면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내게 살아야 할 이유이시고,

살아갈 힘이시며 돌아가야 할 귀향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나라는 존재를 시작하게 하시고,

사는 동안에는 함께 계시며 살아갈 힘을 주시고

당신께 돌아갈 때까지 완벽하게 저를 지배하시는 분이십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9월 27일 연중 제 25주간 금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