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9월 11일 연중 제23주간 토요일

Margaret K 2021. 9. 11. 07:34

2021 9 11일 연중 제23주간 토요일 


 나에게 와서 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가르쳐 주겠다.

그 사람은 땅을 깊이 파고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 
(루가 6,43-49)

 

 Listens to my words, and acts on them.
That one is like a man building a house,
who dug deeply and laid the foundation on rock;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 하고 꾸짖으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추상적인 삶이 아닌 구체적인 사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사랑이란 그저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위하여 무엇을 하였는가?’가 중요합니다. 이처럼 사랑은 ‘행동하는’ 것입니다.”(프란치스코, 『사랑』, 59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로만 하는 사랑은 공허하며 아무 의미 없는 단어일 뿐입니다. 행동으로 보일 때, 그 사랑은 힘이 있습니다. 이 힘이 느껴질 때 우리는 마침내 우리를 사랑하시어 구원하시고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삶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던 죄인이었지만, 하느님의 자비로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나약하고 부족한 부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소하게는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을 보고 비판하기도 하고, 그 밖의 크고 작은 죄를 지으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자신의 잘못을 바라보고 용서를 청하며, 치유의 은사를 받아 다른 이에게도 힘이 되어 주기를 바라십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듯’ 우리는 기도와 성사 생활을 통하여 우리 마음의 곳간에 선한 은총을 풍성히 내려 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우리가 가진 것을 이웃과 기꺼이 나누는 신앙인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유산소 운동뿐 아니라 근육운동도 같이 하면서 매일 1시간 이상 운동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제관에 들어오면 헬스장에 있는 바벨과 덤벨을 비롯한 각종 운동 기구를 볼 수 있습니다. 꾸준하게 운동해서인지 근육도 꽤 붙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저를 보고 어떤 신부가 이렇게 말합니다.


“오십 넘어서 몸짱 되려는 거야? 왜 이렇게 몸이 좋아졌어?”

방송에 나오는 헬스트레이너와 같은 몸매를 가지고 싶어서 운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제가 좋아하는 책 많이 보고, 글 열심히 쓰기 위해서 운동하고 있습니다.

신학생 때, 허리를 다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뒤 병원에 입원도 하면서 허리통증으로 고생을 많이 했지요. 허리가 아플 때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냥 누워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수영, 자전거 그리고 헬스까지 모두 허리통증을 없애기 위해 시작한 운동이었습니다.

몸짱이 되기 위한 것도 아니고, 근육맨이 되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저 좋아하는 것을 계속하기 위해 반드시 해야 했던 운동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 역시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주님을 따름으로 인해 자기 마음의 안정과 함께 힘차게 이 세상을 사는 힘을 얻게 됩니다.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밖에 다른 은총은 여분의 주님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은총, 특히 세속적인 욕심만을 추구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튼튼한 기초를 다지고서 집을 짓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우리의 욕심과 이기심이 들어가는 순간, 기초 없이 맨땅에 집을 짓는 모습이 되고 맙니다.

주님의 뜻을 철저하게 따르는 사람은 좋은 나무로 좋은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뜻을 외면하면서 나쁜 나무로 나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참 행복의 길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행복의 길로 잘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억지로 끌고서 그 길로 들어가시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그 길이 어떤 길인지만을 가르쳐주셨고, 그 실천의 몫을 우리에게 남겨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그 길로 직접 걸어가고 있나요?

지금의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나’ 뿐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그 행복의 길로 힘차게 발걸음을 내딛으시길 바랍니다.
작은 것에 감사하지 않는 자는 큰 것에도 감사하지 않는다(에스토니아).

자기만의 삶을 떳떳하게 삽시다.

20대에는 대학 졸업과 군 생활, 그리고 곧바로 취업에 들어갑니다. 여기에 능력이 되면 결혼까지 해야한다고 했습니다. 30대가 되면 직장 생활과 자녀를 낳고 양육하는 것, 4~50대가 되면 직장에서 어느 정도의 지위를 가지고 있고, 자녀의 교육 문제가 끝나 가는 시기를 갖게 됩니다. 60대 이후 나와 사랑하는 아내와의 행복한 삶을 누리는 것.

저야 신부라서 조금 다르지만, 보통 사람들은 이런 공식에 맞춰서 살아야만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제 주변의 사람을 보면 대부분 이 공식에 맞춰서 살아야 잘 적응하며 사는 사람이고 그렇지 못하면 힘든 삶을 사는 사람으로 평가되곤 했습니다.

종종 옛 친구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지금 신나게 사는 친구들은 남처럼 사는 친구가 아니라 자기만의 삶을 사는 친구였습니다. 취업 준비를 하지 않고 노는 데 더 집중했던 친구, 30세에 들어서며 다시 공부를 시작한 친구, 자신이 잘하던 것을 그만두고 이제까지 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길을 시작했던 친구….

남들처럼 사는 것이 정답 같지만, 실제 세상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자기만의 삶을 떳떳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당신이 누구라고 믿건 당신의 믿음은 옳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본성’에 관한 내용입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습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가 열릴 수 없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거둘 수 없습니다. 본성이 선한 사람은 선한 마음에서 선한 행동을 내어놓고 본성이 악한 사람은 악한 행동을 내어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따라서 마음, 곧 본성을 변화시키려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고 생각이나 행동을 변화시키려 하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같습니다.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처럼 “예수님이 이렇게 가르치셨으니 그것을 실천하자.”라는 식의 가르침은 신자들을 금방 무너질 집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마음, 곧 본성은 오직 ‘믿음’으로만 변화됩니다.

마음 안에 자리 잡는 것이 셋 있는데 믿음, 희망, 사랑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본인이 늑대라 믿으면 사람이면서도 늑대의 행동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까치도 자기가 개라고 믿으면 개처럼 짖어댑니다. 사람이라도 본인이 개라고 믿으면 개의 소리를 내며 마치 먹을 것을 빼앗길 것처럼 자녀들을 학교에 못 가게 방안에 가둡니다. 사람은 자신이 믿는 자신의 본성대로 밖에 살 수 없습니다.

     

    내가 먼저 본성이 그리스도가 되었음을 믿어야 하는 이유는 같은 본성끼리여야만 완전한 친교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본인이 자격 미달이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관계를 맺으려 하더라도 그 열등하다고 믿는 수준만큼밖에 친교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건 겸손이 아닙니다. 믿음이 부족한 것입니다. 본인이 늑대라고 믿는 사람과 인간이라고 믿는 사람이 어떻게 온전한 친교와 사랑이 이뤄지겠습니까?    

 

    “이방에 들지 않겠어요.”

켈리 여사가 호텔 보이에게 거세게 항의했습니다.

    “가구 하나 없는 이 게딱지만한 벽장에 들면서 그렇게 많은 방값을 지불하진 않을 겁니다. 당신은 내가 촌에서 올라왔다고 깔보는 모양인데….”

    “부인 일단 타세요.”

호텔 보이가 그녀의 말을 자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건 부인의 방이 아닙니다. 엘리베이터라고요!”

     

    자존감은 내가 누구냐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없으면 누구와도 온전한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본인 스스로 그럴 자격이 없다고 판단해버렸기 때문입니다.

관계를 맺는다고 하더라도 상대는 다 내 열등감의 희생양이 됩니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작은 것에도 무시당하는 것 같아 상처받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와 만날 때 먼저 가져야 하는 것은 나도 저 사람에게 꿀릴 게 하나도 없다는 자신감입니다. 이 자신감이 준비되지 않았다면 누구도 만나지 마십시오. 어쨌거나 그 관계는 비극으로 끝날 것입니다.

     

    대학을 갓 졸업한 한 여학생이 입사 지원서를 냈지만 면접에서 탈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녀가 지원한 분야는 회계업무부서였는데, 회사는 경력자를 선호하는데 그녀는 이제 겨우 첫발을 내디디려는 사회 초년생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좌절하지 않고 다른 부서에 다시 입사 지원서를 제출했습니다. 이번에 그녀는 “면접이라도 치를 수 있게 꼭 기회를 달라.”라고 사정했고 면접관은 그녀의 적극적인 의욕을 높이 샀습니다. 결국, 그녀는 필기시험까지 무사히 통과하여 인사경리부서에서 면접을 보게 되었습니다.

    인사경리부서의 책임자는 입사시험 성적이 뛰어난 그녀에게 높은 점수를 주고 싶었으나 이렇다 할 경력이 없는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회사 규정상 자격 미달이었습니다. 다른 부서와 마찬가지로 인사경리부서 역시 경력 사원을 찾고 있었습니다.

  

    면접을 보러 온 여학생에게 그는 예의상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은 그만 돌아가도 좋습니다. 좋은 소식이 있으면 다시 전화로 연락을 드리지요.”

    분위기가 냉담해진 것을 알아차린 여학생은 갑자기 1달러를 꺼내어 면접관에 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합격이든 불합격이든 좋으니 꼭 제게 연락해 주세요.”

  

    면접관은 이렇게 황당한 경우는 처음이라 잠시 멍하니 있었습니다.그는 여학생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전화하지 않을 것을 어떻게 알았지요?”

    여학생이 말했습니다.

    “아까 분명히 좋은 소식이 있으면 연락하겠다고 하셨는데, 그 말씀의 의미는 합격하지 못하면 전화하지 않겠다는 뜻이잖아요.”

  

    면접관은 점차 호기심이 발동하여 다시 물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당신을 채용하지 않기로 했다면, 당신이 알고 싶은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요?”

    “저의 어떤 점이 귀사의 채용 기준에 부적합한지 알려주시면 앞으로 고치겠습니다.”

    “그럼 아까 내게 준 이 1달러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여학생이 말했습니다.

    “회사 규정상 불합격자에게 연락하지 않는다는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전화 요금을 따로 드린 거예요. 그러니 떨어졌더라도 연락 부탁드립니다.”

    면접관의 얼굴에 가벼운 미소가 번졌습니다.

    “1달러를 돌려주겠어요. 당신에게 전화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당신을 채용하기로 했거든요.”

    여학생은 단돈 1달러와 재치 있는 행동으로 인생의 첫 관문을 무사히 통과했습니다. 

[출처: 『좋은 생각이 행복을 부른다』, 커쥔, 프라임]

     

    이렇듯 자신이 만나는 무엇과 관계를 맺기에 나는 합당한 존재라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그 믿음을 사제가 거행하는 성체성사를 통해 주십니다. 따라서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죄인이라고 합당하지 않다고 하지 맙시다. 그 마음을 없애주기 위해 성체 성혈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치 야곱이 에사우의 옷을 입고 자신이 에사우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처럼, 성체를 영한 우리는 그리스도라 믿고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사람들에게 이런 믿음을 주는 레베카와 같은 사제들입니다. 사제는 먼저 자신이 그리스도가 되었음을 믿고, 다른 이들도 그리스도임을 믿게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행동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본성을 변화시켜주는 것입니다.    

 

    내가 농사를 짓는다고 생각해봅시다. 사과나무를 심었는데 썩은 사과가 맺혔습니다. 이는 내가 주님께 합당하지 않다는 믿음입니다. 계속 썩은 열매만 맺는 그 나무는 어떻게 될까요? 내가 하느님과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합당한 사람이라는 자존감이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에 합당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내가 예수 그리스도라 믿는 그 믿음이 바로 좋은 열매입니다. 그래야 내가 잘리지 않습니다.

 

성체를 영한 뒤 여러분 안에서 이런 음성이 들려올 것입니다.

    “나는 예수다!”

그러면 여러분은 응답하십시오.

    “아멘!”

이것이 하느님과 동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열매를 맺었다는 뜻입니다.

 -조재형신부-


마음도 진화하는가?’라는 강의를 들었습니다우리는 몸의 진화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눈으로 볼 수 있는 증거가 있기 때문입니다그러나 마음이 진화한다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지는 못합니다동물이나 식물에게는 마음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인간만이 감정이성공감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그러나 동물들에게도식물들에게도 감정이 있다고 합니다물론 동물도 공감의 능력이 있다고 합니다그러니 마음도 진화하는 것이 아닐까요학자들은 감정에는 6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기쁨분노두려움혐오슬픔고통의 감정입니다동양에서도 ‘47을 이야기합니다. ‘측은지심수오지심사양지심시비지심이 4단입니다. ‘희노애구애오욕이 칠정입니다. 4단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부끄러움을 아는 마음겸손한 마음옳고 그름을 식별하는 마음입니다. 7정은 기쁨분노슬픔두려움사랑미움욕망의 감정입니다.

 

인간의 감정은 주변의 상황에 적응하면서 진화하였다고 합니다두려움을 모르면 용감하겠지만 일찍 죽을 수 있다고 합니다혐오를 모르면 위생상태가 안 좋아져서 감염될 우려가 있다고 합니다고통을 모르면 상처 나고부러질 수 있다고 합니다늘 기쁘면 잘못을 성찰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야생마는 잘 달리지만 길들이기 어렵다고 합니다그러나 야생마를 길들일 수 있다면 능히 천리를 달릴 수 있는 명마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우리의 감정은 선하거나 악한 것이 아닙니다그것을 잘 다스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더럽게 하는 것은 밖에서 들어와 도로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우리를 더럽게 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마음에서 나오는 것들로는 불륜도둑질살인간음탐욕악의사기방탕시기중상교만어리석음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힙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잔의 겉은 잘 닦지만잔의 속은 잘 닦지 않습니다.’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라고 합니다인류는 이성적으로 살았다고 생각하지만 역사는 비이성적인 삶을 살았던 인류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현실의 삶에서도 우리는 비이성적인 판단을 경험합니다노량진 수산시장에는 200개가 넘는 횟집이 있습니다이성적으로 판단하면 가장 저렴하면서 가장 신선한 가게를 찾아야 합니다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2달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대부분의 사람은 적당히 둘러보고 또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회를 사먹습니다. 15,000원 짜리 책을 사는 대신 30분 걸어가서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지만, 30,000,000원이 넘는 차를 사면서 15,000원을 아끼려고 30분을 걸어가지는 않습니다사랑하고 결혼할 때도 그렇습니다결혼해도 좋은 이유와 결혼하지 않아도 좋은 이유를 따지면서 결혼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사랑은 이성적이지만은 않기 때문입니다예수님께서도 이성적인 판단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죽은 이의 장사는 죽은 이에게 맡기고 지금 당장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하루 종일 일한 사람오후에 일한 사람저녁에 일한 사람에게도 똑같은 돈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예수님은 믿음을 보셨습니다자비를 이야기하셨습니다.

 

공감은 좋은 점이 있습니다함께 기뻐하고함께 슬퍼하고함께 아픔을 느끼면서 연대의식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동물에게는 페르몬이 있어서 쉽게 공감할 수 있다고 합니다그러나 잘못된 공감은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마녀사냥매카시즘왕따는 대표적인 잘못된 공감의 사례입니다예수님께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라며 공감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그러나 그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바라바를 풀어주시오.’라고 공감하기도 했습니다공감능력이 없다고 너무 자책할 것도 없고공감하지 않는다고 너무 서운해 할 것도 없습니다예수님께서는 부정한 여인을 앞에 놓고 돌을 던지려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지시오.’ 그리고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죄를 묻지 않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에 누가 여러분에게 보아라그리스도께서 여기 계시다!’, 또는 보아라저기 계시다!’ 하더라도 믿지 마시오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나할 수만 있으면 선택된 이들까지 속이려고 표징과 이적들을 일으킬 것입니다그러니 여러분은 깨어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어린이의 말을 하고 어린이의 생각을 하고 어린이의 판단을 했습니다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어렸을 때의 것들을 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우리의 마음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게 됩니다나이를 먹으면서 예전처럼 열정이 식었다고 자책할 필요도 없습니다해는 지면 다음날 또 뜨기 마련입니다수평선은 돌면 다시 만나기 마련입니다그러나 삶의 지평은 되돌아오지 않습니다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삶의 지평에 선 우리가 가야할 길을 알려 주십니다선한 마음으로 좋은 열매를 맺으라고 하십니다그런 사람은 반석위에 집을 지은 것과 같아서 풍랑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다고 하십니다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우리의 마음에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집을 만들면 좋겠습니다신앙의 집에 많은 사람들이 머물 수 있도록 문을 열어두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겸손한 죄인, 용서받았으니 용서할 줄 아는 건강하고 균형 잡힌 죄인을 사랑하십니다!

 -양승국신부-

 

회심 이후 흥미진진하게 펼쳐진 바오로 사도의 인생 여정 안에서 참으로 놀라운 모습 한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수제자 베드로 사도와 더불어 이방인의 사도로서, 초대교회를 떠받치던 양대 기둥 가운데 하나요, 탁월한 지도자로 거듭난 그였지만, 평생토록 한없는 겸손의 덕을 지속적으로 유지한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더 이상 잘난 체 하거나 허세를 떨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 공동체의 교계 구조 안에서 최고의 자리에 계시면서도, 언제나 자신을 공동체 내에서 끝자리에 두고 교우들을 섬겼습니다. 틈만 나면 참회하고 또 참회하면서 죄인들의 본보기가 되어 주셨습니다.

  

어제 강한 비바람에 수북이 떨어진 낙엽을 쓸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당 쓰는 일은 한번 하고 끝낼 일이 아니로구나. 낙엽이 쌓일 때 마다, 틈나는 대로 쓸고 또 쓸어줘야 되는구나.’

  

우리가 지난 시절 저지른 심각한 잘못, 그리고 일상적으로 짓는 죄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한번 참회했다고, 한번 고백성사 봤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죄를 지을 때 마다, 틈날 때 마다, 참회하고 또 고백하는 것이 맞는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그러하셨습니다. 그는 기회 닿는 대로 공개석상에서 자신의 허물과 흑역사를 솔직히 고백하셨습니다. 때로 너무 부끄럽고 참담해 감추고도 싶으셨을 텐데, 조금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있는 그대로, 조금의 가감도 없이 자신의 수치스런 지난날을 고백하며, 끝도 없이 성찰하고 참회했습니다.

  

그런 바오로 사도의 모습이 오늘 첫 번째 독서인 티모테오 1서에도 잘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티모테오 1서 1장 15~16절)

  

오늘 루카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사람, 폭풍우 속에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신앙의 소유자가 되는 가장 좋은 비결 역시 바오로 사도가 지니고 계셨던 한결같은 겸손의 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여러 유형의 죄인들이 있습니다. 너무 지나친 죄의식 속에 살아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머리칼보다 많은 죄 속에 파묻혀 살아가지만 손톱만큼의 죄의식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 죄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솔직하게 고백할 줄 아는 겸손한 죄인, 용서받았으니 용서할 줄 아는, 건강하고 균형 잡힌 죄인을 사랑하심을 잊지 말아야하겠습니다.

 실천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

 -반영억신부-


말에서 마음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속마음이 말이 되어 나옵니다. 그리고 행동하게 됩니다. 마음에 담아둔 것은 언젠가 밖으로 나오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조심하고 마음을 닫아걸고 있어도 마음이 한번 흔들리면 속에 있는 모든 것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러니 일상 안에서 마음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낭패를 보기 십상입니다. 마음 안에 좋은 것을 담아야 좋은 것이 나오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거를 건 거르고, 삭힐 건 삭히고 담아야 하겠습니다.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따르는 행동을 선한 행동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속마음보다 형식과 겉모양을 중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행동은 그 사람의 내적 태도가 선할 때 선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루카6,45). 안에서 나오는 것은 곧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사기, 방탕, 중상, 교만, 어리석음…같은 여러 가지 악한 생각들인데 이런 악한 것들이 사람들을 더럽힌다(마르7,21이하).

 

그야말로 가시나무에서는 무화과를 따지 못하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거두어들이지 못하는 법입니다(루가6,44). 그러므로 닦고 가꾸어야 할 것은 말보다 먼저 마음입니다. 마음을 깨끗이 닦아야 고운 말도 나오고 바른 행동도 나옵니다.

 

어떤 사람은 개소리만 합니다. 자기 집 강아지가 얼마나 귀여운지 강아지 얘기만 합니다. 그 강아지에게 마음 쓰는 만큼 사람에게 정성과 사랑을 쏟으면 그 사람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할 터인데…. 동물 애호가나 반려동물과 함께 하는 분에게는 듣기 싫은 소리겠지만 그래도 사람이 먼저입니다. 마음속에 강아지로 가득 차 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이 보이겠습니까?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존재 자체가 사랑받아야 할 이유입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사람이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어떤 이는 남 얘기만 합니다. 자기 속을 보지 않고 남의 사생활을 속속들이‘콩 나라 팥 나라’합니다. 다른 사람의 부족한 점을 보고 도움을 주기는커녕 온통 남의 흉, 허물로 자기 마음을 가득 채워 놓는 이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지으라 하시는 데 남의 흉, 허물, 험담 위에 집을 짓고 있으니 그 집이 어찌 온전하겠습니까? 그 사람은 ‘기초도 없이 맨땅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습니다. 강물이 들이닥치자 그 집은 곧 무너져 버렸습니다. 완전히 허물어져 버렸습니다’(루가6,49).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 안에 성경말씀과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주 예수님을 잘 모셔야 합니다. 항상 주님을 마음에 품고 있으면 기쁘거나 위기가 닥칠 때나 어느 때이든 그분 것이 우리 마음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눈을 깨끗하게, 귀를 조용하게, 그리고 마음을 평온하게 지키십시오”(토마스 머튼). 잠언에서는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거기에서 생명의 샘이 흘러나온다”(잠언4,23).라고 말합니다.“네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신뢰하고 너의 예지에는 의지하지 마라. 어떠한 길을 걷든 그분을 알아 모셔라. 그분께서 네 앞길을 곧게 해 주시리라”(잠언3,5-6). 주님을 마음에 담는 하루를 축복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신앙은 매사에 예수님의 눈으로 보고 그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의 논리와 현실의 이해관계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부수적인 것으로 생각한다면 신앙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행동으로 옮깁니다. 성당 안에서뿐 아니라 일상 안에서 직접 몸을 움직입니다. 마음에 담긴 것을 마음껏 이웃을 향해 봉사합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실행하는 가운데 행복하시길 빕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실천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송영진신부-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루카 6,39-42).”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생각하면,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길은

너무나 좁고 험한 길이고(마태 7,14), 길 양쪽에는 한 번 빠지면 나올 수 없는

구덩이가 잔뜩 있는 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길을 걸어가려면, 정신을 바짝 차리고, 눈을 크게 뜨고,

한눈팔지 말고, 한 발 한 발 조심해서 걸어가야 합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라는 말씀에서,

앞의 ‘눈먼 이’는 ‘영적으로 눈먼 이’,

즉 신앙인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이고,

뒤의 ‘눈먼 이’는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길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세속 일만 신경 쓰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인도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도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길을 제대로 걸어가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데리고 갑니다.

이 말씀은 마태오복음에 있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마태 23,13).” 라는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잘못된 인도를 받은 사람은 심판 때에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겠지만,

다른 사람을 잘못된 길로 인도한 그 사람은 엄한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라는 말씀은,

마태오복음에 있는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마태 23,8).” 라는

말씀과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마태 23,10).”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 앞장서서 걸어가신 그 길이 아닌 다른 길로 사람들을

데리고 가는 일, 또 예수님께서 가르치시지 않은 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일은 모두 ‘이단’입니다.

(성경과 신학을 잘 안다고 잘난 체 하는 사람들이 흔히 그런 잘못에 빠집니다.)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 하나뿐이고,

또 우리가 믿어야 할 진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그 진리 하나뿐이고,

그리고 우리가 얻어야 할 생명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그 생명 하나뿐입니다(요한 14,6).

어느 누구도 예수님보다 위에 설 수 없고, 예수님보다 앞에서 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교는 ‘공적 계시’는 예수님에서 끝났다고 믿는 종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후에 새로운 계시는 없습니다.

다른 계시는 모두 ‘사적 계시’이고, 예수님께서 주신 ‘공적 계시’를

설명하는 계시, 또는 신앙생활을 도와주는 참고 자료일 뿐입니다.

만일에 ‘사적 계시’의 내용에 예수님의 가르침과 다른 것이 있거나,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없는 것이 들어 있다면, 그것은 ‘사적 계시’로도 인정받지 못합니다.)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신앙생활의 최종 목표는 예수님처럼 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처럼 되는 것이라는 말은,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많이 공부해도, 또 신학을 아무리 깊이 연구해도,

또 아무리 도를 오래 닦아도 예수님을 능가할 수 없습니다.

(만일에 예수님을 능가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면,

그것을 목표로 삼는 그 순간 이미 그는 이단입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의 뒤만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이 말을, 앞의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라는 말씀에

연결해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지 않고,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을

신앙생활의 목표로 삼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할 수 없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라는 말씀을 앞의 ‘눈먼 이’에 관한 말씀에 연결해서,

“너는 어찌하여 눈을 감고 있으면서 형제를 인도하겠다고 나서느냐?”,

또는 “너는 어찌하여 형제가 똑바로 걷지 않는다고 꾸짖으면서, 너 자신은

아예 길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느냐?”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이 말씀은, 좁은 뜻으로는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고,

넓은 뜻으로는 ‘모든 신앙인’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신앙인은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고,

세상 사람들을 하느님 나라로 인도하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인 자신이 먼저 복음대로 살아야 하고,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잘 걸어가야 합니다.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네가 먼저 회개하여라.” 라는 뜻이 더 강조되어 있는 말씀이지만,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빼내는 일도 해야 한다는 뜻이 들어 있는 말씀입니다.

(세속의 잘못된 일들, 즉 악과 부정과 부패를 비판하기 전에

교회가 먼저 제대로, 올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우리부터 먼저 회개해야 한다.” 라는 말만

반복하면서 세상의 악한 일들에 대해서 계속 침묵을 지킨다면,

그것 또한 직무유기죄가 됩니다.

그 두 가지 일의 시간적인 순서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고

동시에 실천해야 합니다.)

이 말씀을, 산상설교에 있는 ‘빛’에 관한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4-16).”

교회와 신앙인은 존재 자체가 ‘세상의 빛’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 빛의 인도를 받아서 하느님에게로 가게 됩니다.

교회가 교회답게 살지 않고, 신앙인이 신앙인답게 살지 않는 것은,

자신의 빛을 감추거나 꺼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자신도 구원받지 못하고, 사람들을 구원하지도 못합니다.

(내가 나의 눈에서 들보를 빼내는 일은, 즉 내가 먼저 회개하는 일은,

나 자신을 위한 일이면서 동시에 형제를 인도하기 위한 일입니다.)

복음: 루카 6,43-49: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삶

 -조욱현신부-


오늘 복음에서 ‘좋은 나무’는 성령을 나타낸다. ‘나쁜 나무’는 악마와 그의 부하들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모신 사람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갈라 5,22-23) 이와 반대는 가시나무와 엉겅퀴, 즉 불명예스러운 욕정들이다.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44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나 포도 같은 달콤한 열매를 기대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위선자나 저속한 자들에게서 고상함을 기대한다면 참으로 우스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는다.”(45절) 이와 반대되는 자는 자기 속에 깊이 감추어졌던 것을 내놓는다.

 

아무리 그리스도인으로 신앙을 가졌다 해도 지금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함을 말씀하고 계시다. 주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다고 하면서 입으로만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의 삶 속에 신앙이 부족함을 안타까워하신다. 덕이 있는 자는 그 품위에 맞는 말을 하고 사악한 사람은 은밀한 곳에 숨겨 둔 더러운 것들을 게워내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삶 속에 드러나는 행위를 통해 나타난다. 그래서 그 행위를 보면 진정으로 우리가 하느님을 섬기고 있는지, 아닌지, 그 자세가 어떤지 예를 들어주신다.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또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따지 못하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거두어들이지 못한다.”(43-44절). 하느님 앞에서는 마음자세에 따라 그 신앙생활도 진실한지 아닌지, 하느님을 향한, 하느님을 선택하는 삶인지 아닌지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항상 마음에 새기고 실생활에서 실천하는 삶이 튼튼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고 하신다. 이렇게 하는 사람이 입으로만 헛되이 주님을 찾는 사람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다. “나에게 와서 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가르쳐주겠다. 그 사람은 땅을 깊이 파고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47~48절)라고 하셨다. 이런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에 깊게 뿌리를 박고, 하느님의 말씀을 척도로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말씀 위에 굳건히 서 있을 때, 어떤 풍랑과 파도도 박해도 그를 쓰러뜨리지 못한다.

 

주님을 안다는 것은 성경에도 나와 있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 안에 있을 때만이 우리는 하느님을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사랑은 바로 이웃 사랑을 통해서 드러나는 사랑이어야 한다. 그래서 구체적인 삶을 통하여 사랑이 드러나고 그래서 사랑이신 하느님을 알아야 한다. 그 앎은 우리의 삶을 통하여, 즉 우리의 체험을 통하여 아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느님을 알면 알수록, 더 큰 체험을 원하게 되고 그 하느님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삶으로 하느님을 이 세상에 더욱 깊이 확산시켜야 할 것이다.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루카 6, 43)

-한상우신부-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지를
이 가을
묻게된다.

귀를
기울여야 할
주님의
말씀이시다.

말씀의 진리가
실행의 참된
열매가 된다.

날마다
생명의
말씀을 듣고

말씀을
실행하는 삶이
바로 복음의
참된 삶이다.

복음의 삶은
허물어지지
않는다.

복음의 삶은
좋은 실행의
발자국들로
넘쳐난다.

말씀은
우리에게
열매를
내어주듯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만을
선사한다.

말씀과 함께
이 시간을
견디고

말씀과 함께
이 시련을
통과한다.

말씀과
실행은
나무와
열매같이
이렇게 함께
이어진다.

말씀으로
시작하고
실행으로
완성된다.

말씀의
실행이란
주님께 바치고
주님께
내어드리는
삶이다.

우리의 삶이
좋은 열매가
되어야한다.

좋은 나무는
주님 말씀에
뿌리를 내리고
실행과 함께
자라난다.

주님을
떠나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또한
말씀과 함께
자라난다.

말씀을 품은
삶이 말씀을
실행한다.

말씀은
실행을 부르고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부른다.

주님께서
자녀들을
부르신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가 무엇에 의지해야 하는지 알려 주십니다.

"나에게 와서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실행하는 이 ... 그는 땅을 깊이 파서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루카 6,47-48)
나아오고, 듣고, 행하는 세 행위가 주님을 향하고 주님과 연관될 때 존재의 참 모습, 참 의미를 찾게 됩니다. 이는 세상에 널린 그럴듯해 보이는 것들, 그 때깔 좋고 현란한 허상들을 헤치고 저 깊이에 숨어 계시는 주님을 찾아 다가오는 이에게만 열리는 선물입니다.

주님께 나아오고, 그분의 말을 듣고, 들은 바를 행하는 이는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고 하십니다. 그의 방향성과 경청과 실행이 그를 나날이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 뿌리를 지탱하는 반석 또한 그가 흔들리지 않게 꽉 붙들어 주지요. 이 반석이 곧 주님이십니다.

그 반석에 뿌리를 둔 영혼은 삶의 어떤 파도가 들이닥쳐도 휩쓸리지 않고 버티어 냅니다. 또 그렇게 존재의 뿌리를 주님께 드리운 이는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의 양분을 빨아들인 만큼 세상에 좋은 열매를 내놓을 수 있지요. 좋은 나무에서는 좋은 열매가 맺히기 마련이니까요.

그런데 '나는 좋은 나무인가 나쁜 나무인가' 성찰하다 묵상이 자칫 반성과 체념의 기도로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지요. 이때는 제1독서 안에 드러난 사도 바오로의 고백이 힘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1티모 1,15-16)
여전히 제대로 된 열매를 맺지 못한 채 작은 바람에도 이리저리 휘청대는 수준일지라도, 사도는 그래도 괜찮다고 용기를 줍니다. 첫째가는 죄인이어도, 자신이 바로 그 때문에 구원되었음을 겸손히 믿고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먼저 나를 당신의 한없는 인내로 대해 주시어"(1티모 1,16)
반석이신 주님께서 마치 반석과 같은 강도의 인내로 우리를 든든히, 묵묵히, 변함없이 지탱해 주십니다. 결코 흔들리지 않으시는 그분께서 그렇게 기다려 주시니  아직 부족하고 모자라도 섣불리 자책하거나 조급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 기초를 둔 이는 이미 주님과 한 몸이니, 세상의 어떤 풍파와 악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설 수 있습니다. 쉽고 빠르고 효과 있어 보이는 세상의 돈과 권력과 쾌락의 모래톱에 발 들이지 않고, 단단한 반석이신 주님께 나아와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 열매로 세상의 어려움을 보살피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거룩한 죄인인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김찬선신부-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나는 그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원하러 이 세상에 오셨다는 말은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당연하다는 듯 쓰곤 하지만

사실은 논쟁의 소지가 있기에 새겨들어야 합니다.

 

이 말이 죄인 아닌 사람은 구원하러 오지 않으셨다는 말이나

인간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오시지 않으셨을 거라는 말로

알아들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이 말은 의인만을 구원하실 거라는 인간의 얕은 생각과 다른,

내 마음에 드는 선인만을 사랑하는 인간의 얕은 사랑과 다른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자비를 나타내는 말로 알아들어야지요.

 

실로 사람이 죄짓지 않을 리도 없고,

죄인이 아닌 사람도 없는데도

다른 사람은 죄인이고 나는 죄인이 아니라는 듯,

자기의 죄를 인정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더 큰 죄인이라는 듯

그렇게 사는데 그것은 큰 착각이고 자기 최면인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 비해 바오로 사도는

죄인들 중에 첫째가는 죄인이 자기라고 하고,

그럼에도 주님께서 자기에게 자비를 베푸셨으며,

그렇기에 주님께서 자기를 세상 구원의 도구로 삼으셨다고 합니다.

 

이런 말이 전에는 진심이 아닌 말처럼,

겸손을 가장한 말처럼 제게 들리곤 했습니다.

프란치스코도 같은 뜻의 말을 한 적이 있지요.

 

언젠가 기도를 마치고 나오는 프란치스코에게 맛세오 형제가

농담조로 “왜 당신을... 왜 당신을...왜 당신을”하고 말을 건네니

그것이 무슨 뜻이냐고 묻는 프란치스코에게 다시

귀족도, 미남도 아니고, 학식도 없는 당신을 왜 세상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고, 왜 당신 말을 들으려하냐고 묻지요.

 

이에 프란치스코는 이 세상 죄인들 가운데 자기보다

더 천하고, 더 부족하고, 더 큰 죄인을 보지 못하셨기에

하느님께서 자기를 뽑아 잘나고 지혜롭다는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만선만덕은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라고 답하지요.

 

이 일화를 들을 때마다 저는 프란치스코가 정말 이렇게 생각했을까,

내숭을 떠는 것, 겸손을 떠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곤 하였습니다.

지금도, 오늘도 저의 겸손의 수준으로는 이런 생각을 하지만

그러면서도 겸손이 바오로 사도나 프란치스코와 같은 경지에 도달하면

정말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합니다.

 

성인들의 겸손은 하느님 앞에 있는 겸손이지요.

성인들은 사람들 앞에 있지 않고 사람들과 비교도 하지 않으며

오로지 하느님 앞에 있고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바라볼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다.

하느님 앞에 있으면서 누가 눈을 옆으로 돌려 다른 사람을 보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내가 이 사람보다 낫다 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내 죄가 크지 않을 수 있지만

지극히 거룩하신 분 앞에서 죄인이 아닌 사람이 어디 있으며,

죄인일 뿐 아니라 내 죄 너무도 큼을 느끼지 않을 사람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 하느님 앞에 서고

그러나 하느님 자비 앞에 서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런 바람을 가져보는 오늘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9월 16일 연중 제23주간 토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