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9월 8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신 축일

Margaret K 2021. 9. 8. 06:29

2021 9월 8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신 축일 


성경에 동정 마리아의 탄생에 대한 내용은 없다. 그러나 초대 교회 때부터 성모 신심이 계속되면서 동방 교회에서 먼저 이 축일을 지내기 시작하였다. 로마 교회에서는 7세기 무렵부터 이 축일을 지내 오고 있는데, 예루살렘에 세워진 ‘마리아 성당’의 봉헌일(9월 8일)을 동정 마리아의 탄생 축일로 정한 것이다.

☆☆☆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마태오 1,1-16.18-23)

 

 Behold, 
the virgin shall be with child and bear a son,
and they shall name him Emmanuel,
which means “God is with u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성경에 동정 마리아의 탄생에 대한 내용은 없지만 성모 신심은 초대 교회 때부터 이어져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미카 예언자는 한 여인에게 태어날 메시아의 탄생에 대해서 전하고 있습니다. 고통 속에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메시아의 탄생은 기다림의 정점이었습니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언급한 여인이 성모님이심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성모님을 통한 예수님의 탄생은 하느님의 오랜 계획(로마 8,28-29 참조) 안에 있는 일이었습니다.

오늘은 우리의 어머니이시고 위로이시며 피난처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탄생 축일입니다. 복음은 하느님의 구원 경륜이 인간의 역사 안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 예수님의 족보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을 실현하시고자 하느님께서는 마리아를 선택하시어 우리 어머니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시고 전구하시는 우리 신앙의 어머니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에, 우리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크신 섭리를 깨닫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의 탄생은 소중합니다. 이를 마음에 새기며 우리 모두 저마다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뜻을 찾아 기쁘게 살아갑시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11개 직업군의 최근 10년간의 평균수명을 어느 기관에서 조사했습니다. 평균수명이 가장 낮은 직업군은 연예인, 체육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가장 높은 직업군은 어떻게 될까요? ‘종교인’이었습니다. 10년 전쯤에도 비슷한 조사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때 역시 종교인이 압도적인 1위를 했습니다.


종교인이 1위를 차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종교인이 믿는 신이 보살펴주는 것일까요? 그것보다 더 큰 진실은 영적인 이상을 추구하다 보니 세상의 것에 대한 스트레스가 그만큼 적어서라고 합니다. 종교인 중에서도 세상의 것에 집착하면서 세속적인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은 그렇게 오래 살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 말에 힘이 있음을 평균수명이 낮은 직업군이 연예인과 체육인들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세상 안에서 보이는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세상의 것을 모두 내려놓고 살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 안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여주기 위한 삶에서는 진정한 자유로움이 없습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영적인 가치를 찾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가치 안에서 스트레스를 줄이고 세상의 것들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됩니다.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는 길입니다.

오늘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을 맞이하면서, 성모님의 모습을 함께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잉태하셨습니다. 아직 혼인하기 전에 이루어진 일이기에 복음에 나오듯이 요셉 성인께서는 파혼하기로 작정도 하셨습니다. 바로 이때 천사가 개입해서 성모님을 아내로 맞이할 수 있도록 합니다. 그리고 잉태된 아기가 어떤 분인지를 이야기해줍니다.

성모님과 요셉 성인 모두가 세상의 규칙에 집중하지 않으십니다. 그보다는 하느님의 뜻에 집중하면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필요했던 것이 믿음과 사랑입니다.

성모님께서 믿음이 없었다면, 예수님 잉태를 거절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구원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요셉 성인께서 사랑이 없었다면, 파혼하고 성모님께서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수가 없었을 것이고 우리의 구원도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 성인은 성모님을 사랑하셨기에, 꿈에서 받은 계시를 그대로 따를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속적인 것에 대한 집중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영적 육적 건강은 물론이고, 지금을 더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먼저 자신을 비웃어라. 다른 사람이 당신을 비웃기 전에(엘사 맥스웰).

장 도미니크 보비를 아십니까?

‘잠수종과 나비’라는 책을 쓴 프랑스의 장 도미니크 보비를 아십니까? 그가 세계적인 패션 잡지 ‘엘르’의 편집장으로 있던 1995년, 운전 중에 뇌출혈로 쓰러져 락트-인 증후군(locked-in syndrome)이라고 불리는 전신 마비 상태에 빠집니다.

그가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왼쪽 눈꺼풀 밖에 없었습니다. 이 왼쪽 눈꺼풀로 이십만 번 이상 눈을 깜박여 15개월에 걸쳐 쓴 책이 그의 회고록인 ‘잠수종과 나비’입니다. 얼마나 여기에 집중했는지 책을 출판한 지 8일 후 심장마비와 폐렴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이십만 번의 눈깜빡임으로 글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답답할 정도로 느릴까요? 그러나 이 느림이 세상에 하나의 책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고통과 시련으로 멈춰서는 안 됩니다. 느리더라도 앞으로 나아갈 때 주님께서는 부족한 나를 통해 커다란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무소의 뿔과 같으신 분

-전삼용신부-


오늘은 성모 마리아의 지상 탄일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라는 오늘 복음 말씀대로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을 도우셨기 때문에 구원의 또 다른 협력자가 되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태오는 족보로 시작하며 성모님을 통한 그리스도의 탄생이 처음부터 계획되었음을 시사합니다. 이 족보 안에 들려면 그에 합당한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성모님은 어떻게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시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셨을까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큰일을 한 사람일까요?

『숫타니파타』라는 불교 경전에서는 깨달은 이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저 광야를 가고 있는 코뿔소의 외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렇게 깨달은 분은 우리 주위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요?

서울대병원 종양내과 의사 김범석 씨가 자신이 본 죽음 중에 ‘특별하고 위대한 마지막’이란 제목으로 쓴 글이 있습니다. 수많은 죽음을 본 그가 어떤 죽음을 가장 특별하고 위대하다고 보았을까요?    

 

    그는 폐암 말기 어머니를 돌보던 딸의 편지를 인용합니다.

“엄마가 폐암 진단을 받고 많이 힘들어하셨는데 이제는 많이 다잡으셨어요. 선생님을 믿고 따르면서 저희 정말 열심히 치료받겠습니다. 우리 엄마 꼭 낫게 해주세요.”

     

    수술은 할 수 없는 상태라 생명 연장 수단으로 항암치료를 받자고 무미건조한 목소리를 말할 때 수많은 반응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편지 속의 ‘우리 엄마’는 3주에 한 번씩 항암을 하면서도 다른 의견을 제시하지도 않고 싫은 기색도 없이 시키는 대로 순종적으로 움직였습니다.    

 

    마지막을 딸과 함께 지내기 위해 딸의 아파트 옆으로 이사와 손주들을 돌봐주고 손주들과 놀아주고 맞벌이하는 딸 가족을 위해 밑반찬도 해주고 주말엔 김밥을 싸서 북한산 등산을 하고 하산 길에 사우나에 들르는 등 다른 할머니들과 다를 바 없는 매우 일상적인 삶을 사셨습니다.    

 

    길어야 1년이고 매우 고통스럽다는 폐암 말기였는데도 어머니는 아픈 기색 하나 없이 일상을 사셨던 것입니다. 딸은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엄마는 치료 의지가 매우 강해서 힘든 내색 안 하고 열심히 잘 치료받고 계세요. 일상생활도 아주 많이 잘하고 계시고요. 다른 분들도 잘 견디시는 건가요? 힘든데 저희 때문에 내색 안 하고 혼자서 참고 있으신 것은 아닌지 걱정도 됩니다.”    

 

    그렇게 암은 머리까지 전이되었고 더는 손쓸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때 “방사선치료를 했는데 효과가 좋지 못하네요….”라고 말하면 환자들은 수많은 반응을 보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괜찮아요. 선생님이 잘 치료해주려고 이렇게 애썼는데 미안해요.”    

 

    할머니는 오히려 말하기 주저하는 의사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자신의 관리를 잘하지 못해서 상태가 나빠졌다면 자기 탓으로 모든 것을 돌렸습니다.

    그때 의사는 알게 되었습니다. 중간에 항암제를 몇 번 바꿔야 하는 적도 있었는데 그런 때도 할머니는 화를 내거나 마음의 동요를 일으켰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해서도 할머니는 마치 남의 일인 양 자기 죽음에 대해 아무런 동요가 없었습니다. 무척이나 평온했고 담담했습니다.

    한 가지 손주들이 자신 없이도 잘 클 수 있을까가 걱정이지만 어차피 한 번 겪어야 하는 일이니 자녀들도 씩씩하게 잘 헤쳐나갈 것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얼마 후 담배도 피운 적 없는 할머니는 폐암에 걸려 딸 옆에 살며 1년 동안 남과 다를 게 없는 일상을 사시다 할머니는 그렇게 평온하게 돌아가셨습니다.    

 

    수많은 죽음을 지켜본 김범석 의사 선생님은 이렇게 글을 마무리합니다.

    “할머니가 실제로 돈이 많았는지 대학은 나왔는지 그런 것들은 알지 못한다. 짐작하건대 가방 끈이 길지도 않았던 것 같고 넘치게 부유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역사책에 나올 법한 위인도 아니고 언론에서 칭송받을 만한 이력이 있는 분도 아니었다. 우리 주위에서 흔히 마주칠 법한 평범한 분이었다.

    

    하지만 나는 할머니가 누구보다 어려운 일을 해냈다고 생각했다.

마지막까지 평범한 일상을 살아내는 일, 느닷없이 찾아온 운명을 받아들이고 본인 몫의 남은 삶을 평소처럼 살아내는 일.

 

    누군가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지켜본 그 노년의 환자는 평범함 속에서 행복을 발견하는 분이었다. (중략)

할머니는 그 어떤 사람보다도 특별했고 보통 사람이지만 위대한 사람이었다.”

     

    위대한 성인은 큰 업적을 낸 인물이 아니라 자기를 버리고 집착 없이 순리에 따를 줄 아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버리니 두려움도 없고 집착도 없고 모든 것에 ‘순응’(아멘!)합니다.

     

    진정 할머니는 암이라는 사형 선고에 놀라지 않았고, 세상 집착에 걸리지 않았으며, 분노와 원망을 하며 진흙에 자신을 더럽히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무소의 뿔처럼 혼자 죽음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성모님은 그렇지 않을까요? 성모님도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은 분이셨습니다.

    사자는 소리에 놀라지 않습니다. 어떤 소리건 자신을 위협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자신을 놀라게 한 것을 공격합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지만, 요셉에게 성령으로 잉태된 사실을 알리며 설득하지 않습니다.    

 

    또 성모님은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은 분이십니다. 거침이 없으십니다. 즈카르야가 천사의 말을 듣고는 늙은 자신이 어떻게 아이를 갖느냐고 했지만 성모님은 당신은 주님의 종이니까 그냥 말씀대로 이루어지라고 하십니다. 두려움이 없으니 거침도 없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다 도망갔어도 성모님은 골고타 끝까지 예수님과 동행하십니다.

     

    성모님이 그렇게 두려움도, 거침도 없는 분이신 이유는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은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연꽃은 진흙에서 피지만 그 더러움이 연꽃에 물들지 못합니다. 성모님은 죄가 없으시기에, 자신을 봉헌하셨기에 죄에 물들지 않으신 분이십니다.    

 

    안나와 요아킴은 성모님이 어렸을 때 성전에 봉헌하였습니다. 하느님께 맡겨진 사람은 죄에 물들지 않습니다. 죄에 물들지 않는다는 말은 자신이 죽었다는 뜻입니다. 죽은 사람을 죄에 물들게 만들 수 있는 유혹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에 반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광야를 달리는 코뿔소의 외뿔처럼 혼자서 가는” 성모님의 모습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다른 이들과 친교를 맺지 않고 독단적이라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자신이 봉헌되고 자아가 죽어 두려움도 없고 거칠 것도 없고 죄도 짓지 않는 사람이라면 마치 코뿔소로 상징되는 주님의 ‘도구’가 되어 주님 뜻대로 달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코뿔소의 ‘외뿔’은 코뿔소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외뿔처럼 ‘코뿔소의 도구’가 되려면 자신을 주님께 봉헌한 사람이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소리에 깜짝깜짝 놀라고 이런저런 상황에 좌절하며 세상 죄에 물든 사람은 누구도 코뿔소의 외뿔이 될 수 없게 됩니다. 코뿔소가 썩은 외뿔을 굳이 장착하고 달릴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코뿔소가 주님이라면 외뿔은 성모님이셨습니다.    

 

    성모님이 엘리사벳을 찾아가실 때 그분을 그쪽으로 달리게 만든 것은 태중에 잉태된 코뿔소인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코뿔소는 또한 세상에서 외뿔이 없으면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합니다.

     성모 마리아는 코뿔소라는 주님께 온전히 순종하여 장착된 외뿔이십니다. 성모님은 우리도 그렇게 무소의 뿔처럼 가라고 어머니로서 모범으로 보여주고 계십니다.

 -조재형신부-


미국에 이민 오신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모두 사연이 있습니다특히 오래 전에 이민 오신 분들의 이야기는 감동의 드라마와 같습니다한 형제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약은 청지기가 생각났습니다어려서 아일랜드 신부님께 영어를 배웠다고 합니다유학을 간 적도 없고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한 것도 아니었습니다신부님 심부름을 다니면서 배운 영어였습니다. 70년대 말에 사우디로 일하러 갔다고 합니다건설현장의 통역으로 갔다고 합니다건설현장의 용어를 잘 몰랐고전문적인 영어를 몰랐기 때문에 3개월 만에 해고될 상황이 되었다고 합니다한국으로 조기귀국하면 가족들의 생계도 막막하고당장 먹고 살 일이 걱정이었다고 합니다영국인 감독관에게 술을 한 병 가지고 갔다고 합니다술을 먹으면서 사정을 이야기하였고잘 모르지만 열심히 일하겠다고 하였습니다감독관은 한국에서 회장과 간부들이 왔을 때 형제님을 불렀다고 합니다이 사람이 다른 사람들 보다 일을 잘 하니 이곳에서 같이 일 할 수 있도록 협조를 부탁했다고 합니다감독관의 부탁을 들은 회장님은 간부들에게 그 사람이 계속 일 할 수 있도록 지시했다고 합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던 형제님이 사우디에서 일을 마칠 무렵에 감독관은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물었다고 합니다형제님은 가족들을 위해서 돈을 버는 것과 미국에서 일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감독관은 형제님이 미국에서 일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고형제님은 미국에 와서 40년 동안 열심히 일하였다고 합니다. 35년 동안 같은 가게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집 주인은 더 좋은 조건으로 가게를 얻으려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형제님에게 35년 동안 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다고 합니다미국의 명절에는 주인에게 작은 선물을 드렸다고 합니다어머니날에는 부인에게 꽃을 드렸다고 합니다그렇게 맺어진 관계이기에 더 좋은 조건으로 가게를 얻으려는 사람이 나타나도 형제님이 일 할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합니다이민자의 사회에서낯선 미국에서 잘 지낼 수 있는 방법은 성실하게 일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마음과 마음이 통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였다고 합니다신문사의 일을 하는 제게도 도움이 되는 이야기였습니다신앙은 일의 결과와 성과를 보기 전에 마음과 정성을 먼저 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탄생 축일입니다교회가 성모님에 대한 특별한 존경과 사랑을 드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성모님은 시천주(侍天主)하였기 때문입니다성모님은 하느님을 태중에 모셨기 때문입니다성모님은 양천주(養天主)하였기 때문입니다성모님은 하느님을 기르셨기 때문입니다성모님은 신앙인으로서도 모범을 보였기 때문입니다하느님의 뜻을 전한 가브리엘 천사의 말에 이렇게 응답하였습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성모님은 신앙인이 가야할 길을예수님께서 선포하실 하느님 나라를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복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오늘은 성모님의 탄생 축일입니다우리는 생일을 맞이하는 분들에게 선물하곤 합니다선물은 주는 분이나받는 분이나 모두 즐거운 법입니다성모님께서 원하시는 선물은 무엇일까 생각합니다우리들의 기도우리들의 선행우리들의 나눔을 성모님께서는 생일 선물로 받고 싶으시리라 생각합니다오늘 성모님의 탄생 축일을 지내면서 성모님께서 원하시는 선물을 드리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천주의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참으로 완전한 사람은 자아에 죽고 주님께 사로잡혀 오로지 주님의 뜻만을 따릅니다!

 -양승국신부-

 

오늘 우리는 성모님의 여러 축일들 가운데 탄생일을 경축하고 있습니다. 성모님의 아버지 요아킴은 나자렛 출신으로 존경받는 부자였습니다. 어머니 안나는 베들레헴 출신의 신심 깊은 여인이었습니다. 두 분은 열심한 신앙인이었지만 연세가 들도록 자녀가 없었습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던 요아킴은 자녀를 청하기 위해 광야로 들어갔고, 40일간 단식하며 기도를 했습니다. 안나 역시 집에 남아서 탄식하며 기도를 바쳤습니다. 두 분의 기도가 얼마나 간절했던지 마침내 주님께서 응답을 들어주셨습니다.

  

천사가 안나에게 나타나 온 세상에 이름을 떨칠 아기를 낳을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안나는 아기가 태어나면 하느님께 봉헌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광야에서 기도하던 요아킴 역시 안나와 비슷한 환시를 받고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요아킴이 집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안나는 성문 앞까지 마중을 나갔습니다. 두 분은 서로 부둥켜 않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드디어 출산 날이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막상 아이를 출산하고 보니, 결과는? 기대했던 아들이 아니라 딸이었습니다. 남아선호 사상이 강하던 당시 딸이다 보니 많이 두분의 실망이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었지만, 즉시 마음을 바꿔먹었습니다. 하느님께 깊이 감사드리면서, 아기에게 마리아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또 하느님께 봉헌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마리아가 세살이 되었을 때, 예루살렘 성전에 데려가서 그곳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맡겼습니다.

  

성모님의 고향인 나자렛은 낙후된 지역 갈릴래아에서도 아주 후미진 곳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전체 인구를 다 합해봐야 4백 명 정도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로마 제국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우리 민족도 일제 강점기를 체험해봤기에, 당시 유다인들이 얼마나 힘겹게 살았는지, 나자렛의 마리아 역시 얼마나 팍팍한 삶을 살았었는지에 대해서는 즉시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이 보잘 것 없는 산골 소녀 마리아를 총애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 내려오실 당신의 통로이자 사다리로서 나자렛의 마리아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나자렛 마리아에게 전해진 특별한 소식,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는 소식은 마리아 개인에게 있어 너무나 영광스럽고 황송스러운 것이었지만, 동시에 두렵고 부담스런 소식이었습니다.

  

하느님의 크신 초대에 응답함으로 인해 포기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자신의 의지를 기꺼이 내려놓음으로 인해 완전한 시온의 딸, 하느님의 딸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중세기 신비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이러한 성모님의 충만하고 역동적인 신앙을 명문장으로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완전한 사람은 자아에 죽고 주님께 사로잡혀 오로지 주님의 뜻만을 따릅니다. 자신과 자아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는 데서 참 행복을 느낍니다. 그는 언제나 하느님의 뜻과 진리만을 알고자 합니다.”

<임마누엘이신 분의 어머니>

 -송영진신부-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다(마태 1,22-23).”

 

성경에 성모 마리아 탄생에 관한 이야기가 없어서

예수님 탄생에 관한 이야기를 성모 마리아 탄생 축일 미사의 복음 말씀으로

읽고 있는데, 그래도 신학적으로는 성모 마리아 탄생과 예수님 탄생은

하나로 이어져 있는 일이고, 사실상 하나의 일이기 때문에,

예수님 탄생 이야기를 복음 말씀으로 읽고 묵상해도 상관없습니다.

메시아 강생은(예수님 탄생은) 어느 날 갑자기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한처음’부터 하느님께서 계획하셨던 일이고, 하느님께서 정하신 시간에,

하느님께서 정하신 장소에서, 하느님의 계획대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 탄생은 메시아 강생에 포함되어 있는 일입니다.

 

여기서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라는 말은, 예수님의 이름을

‘임마누엘’로 짓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은 ‘임마누엘이신 분’이

되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임마누엘이신 분”이라는 말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것도 중요하고,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그 전에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고 떨어져 계셨는가?

하느님은 인간들에게서 떠나신 적이 없는 분이고, 언제나 항상

인간들과 함께 계시는 분인데, 인간들이 하느님에게서 떠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에게서 떠나 있는 인간들을 회개시켜서

하느님에게로 다시 데려가려고 오신 분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임마누엘이신 분의 어머니’로서, 또 언제나 항상 하느님과 함께

사셨던 분으로서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 되시는 분입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처음에 성모 마리아를 찾아왔을 때,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라고 인사했습니다(루카 1,28).

이 인사말은 하느님께서 일방적으로 성모 마리아와 함께 계신다는 말이 아니라,

성모 마리아 쪽에서도 하느님과 함께 살고 있음을 찬양하는 말입니다.

 

메시아 강생은 한처음부터 하느님께서 계획하셨던 일이고

그 계획대로 이루어진 일이라는 말은, 모든 사람의 인생에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메시아 강생은 하느님의 구원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일이고,

구원 사업은 모든 사람을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에페 1,3ㄴ-5).”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선행을 하며

살아가도록 그 선행을 미리 준비하셨습니다(에페 2,10).”

피조물 가운데 그 어떤 것도 의미 없이 태어난 것은 없고,

우연히 태어난 것도 없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누구 하나 예외 없이, 한 사람 한 사람이 전부 다

하느님의 어떤 계획에 의해서, 하느님께서 세상에 보내신 ‘귀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세상 창조 이전’부터 하느님의 선택과 사랑을 받은 존재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선택과 사랑을 받고 있는 존재입니다.)

 

만일에 자기 자신을 ‘우연히’ 태어난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입니다.

스스로 자기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연히 생긴 존재라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그렇게 하찮은 존재라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실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숨을 바쳐서 구원할 정도로 귀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 가운데에는 다른 사람의 인생과 자신의 인생을 비교하면서

너무 불공평하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 사람에게는 좋은 것만 주고, 나에게는 나쁜 것만 주었다.” 라는 식으로......)

그런 불평을 하는 사람들에게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 인간이여! 하느님께 말대답을 하는 그대는 정녕 누구인가?

작품이 제작자에게 ‘나를 왜 이렇게 만들었소?’ 하고 말할 수 있습니까?

또는, 옹기장이가 진흙을 가지고 한 덩이는 귀한 데 쓰는 그릇으로,

한 덩이는 천한 데 쓰는 그릇으로 만들 권한이 없습니까?(로마 9,20-21)”

인간은 하느님의 ‘깊은 뜻’을 모릅니다.

그 뜻을 모르지만, 그래도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시고,

똑같이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여기서 ‘귀한 데 쓰는 그릇’이라는 말과 ‘천한 데 쓰는 그릇’이라는 말은,

그릇의 ‘용도의 다양성’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 말은, 사람마다 다른 탈렌트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탈렌트에는 많거나 적은 차이도 없고, 귀하고 천한 차이도 없습니다.

따라서 직책과 직분이 다르다고 해서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세속의 눈으로 보면, 또 인간의 눈으로 보면,

불공평하게 보이는 일들이 많고, 또 실제로 그런 일들이 많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하느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은 모든 사람이 똑같이 구원을 받아서,

모든 사람이 똑같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자신의 처지와 위치를 남과 비교하면서 열등감에 빠지거나,

억울해 하거나, 다른 사람을 시기 질투할 이유가 없습니다.

반대로, 세속적으로나 인간적으로 남보다 더 좋게 보이는 인생을

살고 있다고 해서 잘난 체 하면 안 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 1,51-53).”

우리가 할 일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것은 무엇인가?”를 묵상하면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좋은 인생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복음: 마태 1,1-16,18-23: 그의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조욱현신부-


오늘은 성모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축일이다. 교회가 성모님의 성탄을 축일로 지내는 것은 구원의 역사적 측면에서 마리아의 위치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마리아에 관한 구약의 예언, 즉 창세기의 원복음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뿐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분명히 하려는 그런 의미가 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의 시작이다. 마태오는 복음을 예수님의 족보(1,1-7)로 시작한다. 그것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는데, 첫째, ‘다윗의 후손,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이스라엘 백성과 관련된 인물이라는 점, 둘째,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로서의 합법성, 셋째, 구원 역사의 정점이며 종합이신 예수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마태오의 이 족보는 우선 우리나라의 족보가 장자 중심으로 되어있는 것과도 다르지만, 당시의 유다이즘에서도 여인들의 명단이 열거되는 것은 특이한 일이다. 그들은 다말, 라합, 룻 그리고 우리아의 아내 바쎄바이다. 또 하나는 요셉과 관계없이 오직 마리아로부터의 예수님의 탄생이다. ‘요셉이 마리아에게서 예수를 낳았다’가 아니라,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마태 1,16)라고 기록하고 있다.

 

우선 네 여인은 죄인들이며, 예수께서는 그러한 죄인들까지도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며, 둘째로 그들은 이방인들이다. 즉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백성을 구원하시고자 한다는 의미이다. 셋째로는 이 여인들이 다윗 가문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며, 넷째로 이 여인들의 결혼이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한 결혼이 아니었다. 마리아도 요셉과 관계없이 예수님을 잉태하고 출산하였다.

 

이 모든 것은 이방인이건, 죄인이건, 또 평범하지 못한 결혼을 한 사람이건 상관없이, 인간적인 결함이나 부족하지만, 하느님의 선택은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리아 역시 특별한 방법으로 하느님 구원계획의 도구로 선택되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인간이 예기치 못한 방법으로 인간이 지닌 어떤 결함에도 상관없이 당신의 주도로서 이루어진다. 즉 선택된 마리아는 인간적 장애를 극복하고 승리하는 하느님 섭리의 표징이 되고 있다.

 

둘째, 예수의 족보는 아버지와 아들로서 요셉과 예수 사이에 모종의 단절이 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마태 1,16). 여기서 예수의 출생에 초월적인 하느님의 개입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예수의 진정한 아버지가 신비롭게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이 족보는 예수를 다윗 가문에서 태어난 메시아로 제시하면서도, ‘예수의 어머니’로서 마리아의 역할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임을 보증하는 요셉의 기능도 등한시하고 있지 않지만,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 더욱 중심이 되는 것은 마리아의 역할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다.

 

또 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을 전하면서 마리아에게서 동정으로 잉태되고 태어난 사실을 명확히 한다. 요셉은 예수님의 탄생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 점은 약혼녀 마리아의 임신에 그가 당황스러워하고 파혼까지도 생각하며 고민했던 모든 상황을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 그 탄생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했던 임마누엘로서(이사 7,14),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에서 예언되었던 메시아라는 사실과 더불어 마리아는 일찍부터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오늘 지내는 마리아의 탄생은 우리 구원의 여명으로 이해되고 있다. 즉 구세주를 준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에 있어서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가기 위한 준비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마리아의 탄생으로 구원이 이제 시작되었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제 역시 작은 마리아로서 그리스도를 낳아 주어 세상이 구원을 얻게 하는 모습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삶을 우리가 잘살 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여야 한다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 1, 20)

-한상우신부-


마음을
따뜻하게
밝히는

마리아의
새로운
탄생이 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은총의
탄생이다.

탄생은
하느님을
닮아 있다.

탄생은
새로운 역사의
창조이다.

이와같이
탄생의 시선은
하느님을
향해 있다.

탄생은
신비이다.

깊어지는
사랑의
신비이다.

가파른 삶의
오르막도
오르게 하는
사랑의 놀라운
힘이다.

동정 마리아의
탄생은 하느님
사랑의 힘을
뚜렷이 보여준다.

하느님 사랑은
영원하다.

가장 좋은
사랑을
우리에게
주신다.

매순간이
탄생이고
매순간이
사랑이다.

이제는
모든 것을
사랑에
맡길 때이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탄생으로
살아있는 희망을
보게되었다.

탄생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넘치는
마음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구약과 신약의 구원사적 일치를 보여 주십니다.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미카 5,1)
예언자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고 전하였습니다. 구약 성경에 기록된 이 말씀이 근거가 되어 아기 예수님 출생 당시 베들레헴의 어린 사내아이들이 살해당한 비극이 일어났지요. 

"해산하는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까지 주님은 그들을 내버려 두시리라."(미카 5,2)
모든 인간의 탄생이 그러하듯 메시아 역시 한 여인의 잉태와 산고를 통해 이 세상에 올 것입니다. 그때까지 세상은 어둠과 고통 속에서 인고의 시간을 보내며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고대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마태 1,1)
복음사가는 먼저 베들레헴의 다윗 가문 족보를 보여 줍니다. 일찌기 주님께서 선지자 사무엘에게 사울 대신 새로이 임금이 될 다윗을 소개하실 때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사이에게 보낸다. 내가 친히 그의 아들 가운데에서 임금이 될 사람을 하나 보아 두었다."(1사무 16,1) 하신 바 있습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이 태어나셨다."(마태 1,16)
그 족보는 마리아의 남편이 될 목수 요셉에게까지 이어집니다. 마리아는 그와 약혼했던 나자렛의 처녀였지요. 마리아는 요셉과 함께 살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하여 관습적으로 몹시 난감한 상황에 처하지만, 천사를 보내신 주님의 개입으로 메시아를 낳게 될 구약 예언 속 여인의 소명을 완수합니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마태 1,23)
복음사가는 이사야의 예언을 직접 인용하여, 예수님이야말로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그 어머니 마리아 역시 메시아를 이 세상에 낳아 주신 "동정녀"이심을 확증합니다.

말씀은 이렇듯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옛 계약의 내용이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계약으로 완성됨을 보여 주십니다. 이 구원 계획 안에서 마리아는 지혜와 용기, 순명으로 구원자를 이 세상에 오시게 한 탁월한 구원의 도구요 협력자이십니다.

마리아의 탄생을 경축하는 오늘, 주님께서는 모든 신자들에게 (여성 신자뿐 아니라 남성 신자들까지 모두) 각자 안에서 이 고귀하고 거룩한 "모성"을 살라고 초대하십니다. 마리아께서 육화하신 예수님을 잉태하고 출산하여 기르신 것처럼, 우리도 마음과 영으로 말씀을 잉태하여 이 세상에 낳아 기르는 모성을 살아가라고 부르시는 겁니다. 

말씀께서 머무르시도록 우리 마음과 영혼의 순결한 태를 간직하고, 해산의 고통을 인내하며, 이 세상에서 말씀이 걷는 고통스럽고 험난한 길을 묵묵히 동반하는 것이 바로 성모님께서 예수님과 일치하여 끝까지 지켜내신 모성을 살아가는 길입니다.           

우리 모두를 품으시고 기도로 동반해 주시는 성모님께 의탁하여 거룩한 모성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길 기원합니다. 이 세상에 말씀을 품는 태가 많아질수록 임마누엘 주님의 현존이 온 누리를 가득 채울 것입니다.

구세주의 어머니,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선택이 아니라 정해진 대로

 -김찬선신부-


오늘 성모 마리아의 탄생 축일에 복음은 예수님의 족보 얘기와

예수님의 탄생 경위를 들려주고 미카 예언서는 뿌리에 대한 얘기를 줍니다.

 

"그의 뿌리는 옛날로, 아득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런데 성모님의 탄생 축일에 성모님의 탄생에 대한 얘기는 들려주지 않고,

예수님의 탄생 얘기를 들려주는 것이 이상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왜냐면 성모님의 축일에 정작 성모님 탄생 얘기는 들려주지 않는 것이

성모님의 탄생에 관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고 그래서

성모닌 탄생 얘기 대신 예수님의 탄생 얘기를 들려준 것이기도 하지만

성모님의 탄생은 아들의 탄생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기에 그런 거지요.

 

이렇게 얘기하면 요즘 여성주의자들 중에 어떤 분은 여자가

애를 낳기 위한 존재냐고, 그것이 여자의 존재 의미일 뿐이냐고

반박할 것이고, 저도 엄마가 돼야지만 존재 의미가 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전례에서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이 축일을 지내지도 않고, 더더욱 거창하게 축일로 지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요즘은 여성주의자들이 아니더라도 여성에게 선택권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엄마가 될지, 엄마가 아니라 그저 한 여성으로서 경력 여성이 될지.

 

저도 선택의 권한이 여성에게 있고,

그래서 한 아이의 엄마가 되기보다는 한 여성으로서 멋지게 살고,

한 아이보다는 많은 이를 위해 의미 있는 삶을 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엄마가 되기를 선택했다면 요즘 아이를 낳고 쓰레기 통에 버리거나

낳고는 학대하는 엄마가 아니라 훌륭한 엄마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인간적인 차원에서는 진보적인 생각이고 또 마땅한 생각일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적인 차원에서는 그리고 성모 마리아의 경우는

인간에게 그리고 마리아게 엄마의 선택권이 있지 않고 하느님께 있으며

그래서 오늘 미카서는 그 뿌리가 아주 오래 전의 옛날로 올라간다고 합니다.

 

마리아가 엄마가 되는 것은 선택권이 마리아에게 있지 않고,

하느님에 의해 오래 전 그러니까 천지창조 이전에 정해진 거라는 얘기이고,

잘 아시듯 성모 마리아께 대한 모든 교리는 다 여기에 바탕을 두고 있지요.

 

이에 성모님의 몫은 '예스', 곧 순종입니다.

정해진 것을 거부하지 않고 '예스'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이 '예스'는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전달을 받고 난 뒤

"Fiat mihi voluntas Tua! 당신 뜻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할 때 뿐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것이고,

아니, 태어나기 전에 이미 '예스' 하도록 정해진 것입니다.

 

당신에게서 아들 예수가 태어날 때 "예스"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 태어날 때 이미 "예스"한 거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므로 선택이 아니라 정해진 것이 성소이고,

선택이 아니라 정해진 대로 살겠다는 것이 성소를 사는 것이라고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임을 이 축일에 다시 생각하는 우리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9월 8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신 축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