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5일 연중 제23주일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마르코 7,31-37)
People brought to him a deaf man
who had a speech impediment
and begged him to lay his hand on him.
He took him off by himself away from the crowd.
He put his finger into the man’s ears
and, spitting, touched his tongue;
then he looked up to heaven and groaned, and said to him,
“Ephphatha!” -. that is, “Be opened!” --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믿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바오로 사도는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10,17)라고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느님을 찾습니다. 하느님을 찾는 인간의 열정은 우리가 희미하게나마 하느님을 알 수 있게 합니다. 당신을 계시하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으로 믿음을 키워 가며,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갑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말하듯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길이 곧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의탁하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유한한 존재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귀먹고 말 더듬는 이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시며 그의 귀를 열어 주시고 묶인 혀를 풀어 주십니다. 인간의 유한함을 넘어 세상 것에 마음이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막는 길은,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고 믿음을 키워 올바른 말을 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 말씀을 가로막는 것들에서 벗어나, 주님의 말씀을 귀여겨들음으로써 믿음을 키워 하느님께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여 귀로는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입으로는 긍정적이고 좋은 말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을 드러내야 하겠습니다.
영혼의 귀머거리와 벙어리에서 벗어나십시오
-키엣대주교-
이브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위험한 독사에게 마음을 열고 달콤한 아첨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죄악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죄악의 길로 들어서며 부끄러움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과의 소통의 문을 닫고 악의 세계로 들어가는 순간 은총의 문도 닫혔습니다. 아버지와의 사랑을 끊고 부끄러운 자신을 가리고 하느님과 사람들로부터 도망쳤습니다. 소통의 문이 열려있을 때 그녀는 자유로왔습니다. 많은 은총으로 점점 아름답고 풍요로와져 하느님과 사람들을 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닫은 후 그녀는 자신의 나약함과 추악함, 죄책감으로 덤불 속에 숨었습니다. 진실이 없기에 숨겨야 했습니다.
솔로몬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 그리고 백성들과 마음을 열고 지낼때 그는 날로 풍요로와짐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과의 문을 닫으면서 그의 영혼은 빈곤에 시달렸습니다. 소유할수록 커지는 욕망에 그의 영혼은 마치 찢어진 옷자락처럼 비참해지고 끝내 나라도 잃고 백성도 잃었습니다.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헤매일 때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의 마음의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에파타 (열려라!)’ 그리고 악의 문을 닫아주셨습니다. 하느님과의 친교를 위해, 사람과의 소통을 위해 악령과 욕망의 문을 닫아주셨습니다.
듣고 말하는 것은 소통의 문입니다.
말은 외부 세계와의 소통을 위해 자신의 영혼을 여는 문입니다. 듣는 것은 외부의 정보를 받아들이는 문입니다. 듣지 않고 말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이해 받을 수도 없습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귀머거리와 벙어리가 있습니다.
문화와 언어의 차이로 인한 귀머거리, 편견의 귀머거리, 세상과의 단절을 위해 귀를 틀어막고 듣지않는 귀머거리, 마지막으로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영혼의 귀머거리입니다.
믿음이 부족하여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마음을 굳게 닫아버려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귀를 열고 마음을 열어야 하지만 너무 오래 닫고있어 참회와 위안의 말씀도 깨닫지 못하고 행복의 길로 인도하는 주님의 말씀에도 깨어나지 못합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욕망만을 추구하고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했는지 이제 하느님 말씀 앞에 귀머거리가 되었습니다.
말을 못하는 경우도 다양합니다.
언어와 문화의 차이로 인한 벙어리, 이기심의 벙어리, 두려움으로 인한 벙어리입니다. 권력과 명예를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잃을 까 두려워 침묵하고 침묵하여 끝내는 말 못하는 벙어리가 됩니다. 안일함과 무관심으로 말 못하는 벙어리, 이웃에게 무관심하여 격려도 모르고, 다른 사람이 슬픔에 잠겼을 때 위로의 말조차 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기쁠 때 같이 기쁨조차 나누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가장 불행한 것은 게을러서 신앙 고백도 안하고 하느님을 찬양하지도 못하는 벙어리입니다.
욕망과 이기심, 게으름으로 혀를 묶어 아무 말도 못하고 많은 벽들에 가로막혀 듣지 못합니다. 마음의 귀를 열어 나와 다른 소리를 들으십시오. 신앙의 귀를 열고 주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이기심의 장벽을 허물고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형제의 말을 들으십시오.
주님과 형제에게 가까이 갈 수 있도록 입을 여십시오.
이기심의 줄을 끊고 내가 먼저 다가가십시오.
두려움의 사슬을 끊고 용감하게 진실을 말하십시오.
나태함에서 벗어나 이웃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고,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주님, 저희가 영혼의 귀머거리와 벙어리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1. 친구를 만날 때 이야기를 듣는 편입니까? 아니면 말하는 편입니까? 아니면 듣기도 말하기도 싫습니까?
2. 말을 할 수 있어 행복하다는 것을 느껴보았습니까?
3. 나는 어떤 귀머거리, 벙어리가 되고 있는지 묵상해봅시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떤 사람이 식당에서 식사하고 있는데 종업원이 물을 자신에게 쏟았습니다. 날벼락 맞은 기분이었고, 기분이 영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화를 전혀 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환하게 웃으면서 물을 쏟은 종업원을 향해 “괜찮아요. 놀라지 않았어요?”라며 오히려 배려하는 모습까지 보이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런 경우 일반적으로 화부터 내지 않나요?
이분은 성당에 열심히 다니는 신앙인도 아니었습니다. 평소에 남을 배려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는 분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행동을 했을까요?
글쎄, 그 종업원이 자신의 이상형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그런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즉, ‘이만한 일에 격분하지 않고 신사적으로 행동할 줄 아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한 목적이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호감 가는 사람에게는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소위 갑질하는 사람의 모습이 종종 인터넷에 나옵니다. 괜찮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줄 수 없습니다. 그와 반대로 상대방에게 잘 보이기 위한 모습은 그 마음이 어떤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외적으로는 보기에 분명히 좋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중요한 질문 하나, 주님께 우리는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고 있습니까? 주님께 잘 보이기 위해서는 우선 주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절대로 대충 살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오늘 복음에서 잘 드러납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오자, 여러 과정을 걸친 행동을 하십니다.
우선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그리고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고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십니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에파타!”라고 하십니다.
당신의 전지전능한 힘으로 그냥 치료해주실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그에게는 이런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스스로 느껴야 했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를 보면 얼마나 예쁜지 모릅니다. 그래서 계속 대화를 나누고 싶고, 깨물어 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런 좋아하는 마음을 아이도 느낍니다. 어떻게 보면 귀찮게 하는 것인데 싫어하지 않습니다.
주님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이런 과정을 통해서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병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했던 그에게 이렇게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 인해 용기를 내어 힘차게 살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일상 삶 안에서 느껴보십시오. 함부로 살 수 없습니다. 주님께 잘 보여야 하니까요.


어떤 분이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관상동맥 우회술을 받았습니다. 주치의는 이 방법이 완벽한 치료 방법이 아니라면서 10년 후쯤에는 재수술해야 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10년이 넘었지만, 그는 재수술을 받지 않았습니다. 상태가 지금까지 괜찮아서 굳이 수술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를 주치의에게서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에 크게 기뻤지만, 사실 이분은 이제까지 늘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10년 후’라는 의사의 말이 계속 마음에 남아 있던 것입니다. ‘재발할까? 재발하지 않을까? 만약 재발한다면 언제가 될까?’ 등의 생각으로 늘 불안했던 것이지요.
말 한마디가 이렇게 영향을 미칩니다. 말에 신경 쓰지 않으면 되겠다 싶지만, 자신의 생명과 관계되는 것인데 어떻게 이 말을 무시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지금 하는 나의 말도 또 나의 행동도 누군가의 삶 전체를 흔들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생각해서 하는 나의 말과 행동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로 얻는 세가지: 손가락, 숨, 혀
-전삼용신부-
우리는 무엇을 얻기 위해 기도할까요?
오늘 복음에서는 기도를 통해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세 가지가 나옵니다.
오늘 예수님은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의 귀와 혀를 치유하십니다. 그런데 이 치유 사화는 단순한 육체적 장애의 치유를 넘어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를 치유하기 위해 하시는 모든 행위가 상징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그를 ‘군중 밖으로’ 따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이는 ‘세상 밖으로’와 같은 의미입니다.
세상의 소리가 우리 귀를 먹게 만듭니다. 옛날에 경찰이 허위 진술을 하도록 유도할 때 잠을 며칠 동안 재우지 않아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자신들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진술하도록 했습니다.
그리스도와 머묾은 그런 세상에서의 탈출을 의미합니다. 이를 ‘광야’라고 합니다. 하느님은 광야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다음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십니다. 손가락으로 본인의 귀를 막고 잠시 있어 보십시오. 무슨 소리가 들릴까요? 마치 물속에 있는 것처럼 세상과 단절되고 자신 안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들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남은 바깥세상에서가 아니라 ‘자기 내면’에서 이뤄집니다. 자기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는 것은 바깥세상만이 아니라 ‘자기 생각’입니다.
나와의 대화에서도 귀를 막고 내면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주님은 내 가장 깊은 곳에 계십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하늘을 향해 ‘한숨을 내쉬십니다.’ 왜 그를 향해 숨을 내쉬지 않고 하늘을 향해 내쉴까요? 온 공기 안에 당신의 숨이 머물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동양에서는 이를 ‘기’(氣)라 표현하고 호흡을 통해 이 기를 자신 안에 모으는 명상이 발달했습니다.
물론 ‘숨’은 그리스도교에서 ‘성령’에 해당하는 단어와 일치합니다. 세상을 끊고 생각을 끊고 자기 내면 안으로 들어온 사람에게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말씀하십니다.
귀를 막았을 때 결국 나에게 들리게 되는 것은 ‘본인의 호흡 소리’입니다.
모든 명상에서 호흡을 가장 중요하게 여깁니다. 여러 호흡법이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호흡을 마치 성령을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목소리처럼 듣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손에 ‘침을 발라 그의 혀에 대시고’ 그에게 “에파타!”(열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그 사람은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예수님의 ‘침’은 또한 ‘성령’을 의미합니다. ‘숨’이 성령의 진리 말씀을 나에게 전하는 역할이라면, ‘침’은 그 말씀이 입 밖으로 나오게 만드는 힘입니다.
성령 강림 때 제자들이 불 혀와 같은 형상의 성령을 받고 복음을 전하게 된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렇듯 ‘세상과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도록 귀를 막으심’ - ‘당신의 목소리를 듣게 하심’ - '들은 말씀을 세상에 전하게 하심’.
이렇게 세 단계로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이 과정을 적용해 볼까요?
한 자매님이 귀를 막고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듣고 그 말씀을 전하는 기도의 체험을 말씀하신 것을 옮겨봅니다.
“그때 제 나이가 47세이고 3남 2녀 중고등학생의 엄마였습니다.
남편은 대학병원 의사로 근무하다가 막 개업해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게 되어 집을 이탈리아 가구들로 장식하고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어 혈안이 되어 살았습니다.
손님들을 초대하여 그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줄도 모르고 교만과 자만심으로 살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노하셨는지 병원에 의료 사고가 생겼습니다. 환자가 주사를 맞다 다리 신경이 마비되었습니다. 그 환자는 준재벌에 속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자기 다리를 제대로 해 놓지 않으면 병원을 망하게 만들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그때 제가 가장 두려웠던 것은 망하게 되었을 때 친구들에게 창피당하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세례는 받았지만, 하느님을 찾기보단 유명한 점쟁이를 찾아다니고 부적이란 부적은 다 써서 붙였습니다. 심지어 점쟁이 말대로 보따리를 싸서 피신까지 했었습니다.
2~3개월 후에 정신을 차리고 하느님께 매달렸습니다. 성지로 매일 미사를 다니고 심혈을 다해 기도했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할 때는 두 시간 넘게 걸렸습니다. ‘하늘의 계신 우리 아버지’ 하면 아버지가 진정 내 아버지로 여겨질 때까지 다음으로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하면 아버지의 영광만을 위하는 마음이 들 때까지 다음으로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주님을 만났습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이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이 저의 본성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하느님의 본성이 된 것 같았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이제 의료 사고가 해결되게 해달라는 기도는 완전히 사라지고 그 큰 두려움도 사라져 우리 집이 거지가 된다 해도 주님만 있으면 된다는 마음으로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를 두렵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참 평화와 행복, 참 자유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께 보답하기 위해 성당에서 갖은 봉사를 다 했습니다. 남들이 꺼리는 일들부터 땀 흘리며 했습니다.
몇 달 후에 그 환자가 스스로 연락을 줘서 조건 없이 합의서에 도장을 찍어주었습니다. 그 분의 완고하던 마음을 주님께서 돌려주셨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 이후에도 힘든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그 목소리만 생각하면 지금도 모든 것에 감사하고 행복할 뿐입니다.”
하느님은 이렇게 한 사람의 귀를 막으시고, 그 사람에게 당신 목소리를 들려주시며, 그 사람을 통해 당신 사랑이 드러나게 하십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내가 세상과 나 자신에게 죽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그분의 사랑이 나를 통해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태풍 아이다의 영향으로 뉴욕에 엄청난 비가 내렸습니다. 제가 있는 신문사도 지하에 물이 들어왔습니다. 아침에 미사에 가니 퀸즈 성당도 지하에 물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제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너무 낙담하지 말아라, 내가 머무는 집도 이렇게 물이 들어왔단다.” 아무쪼록 피해를 입은 모든 분들이 이런 어려움을 이겨내면 좋겠습니다. 비가 온 뒤에 밝은 태양이 비추듯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함께 하시리라 믿습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친구 따라 갔는데 좋은 일이 생기는 경우입니다. 친구의 결혼식에 축하해주러 갔다가 거기서 신랑 측 친구와 인연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친구 따라 갔다가 평생의 배우자를 만나는 기쁨을 얻게 됩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허리가 아프다는 신부님을 차로 물리치료 받는 곳까지 함께 갔습니다. 기다리면서 저도 같이 치료를 받으면 좋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친절하게 엑스레이까지 찍어 주셨습니다. 처음으로 저의 허리와 목의 사진을 보았습니다. 아직은 큰 이상은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스트레칭을 자주하라는 말을 들었고, 덤으로 목과 허리에 물리치료를 받았습니다. 친구 따라 우연히 갔는데도 정성껏 치료해 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가게는 몫이 좋아야 하고, 집도 학군이 좋아야 하듯이 좋은 친구가 있으면 덤으로 주어지는 것도 많습니다.
돌아보니 저의 사제성소도 친구의 영향이 컸습니다. 할아버지의 유언으로 형제 중에 한명은 사제가 되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제가 사제가 돼야 한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습니다. 저는 집안 형편상 공고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려고 했습니다. 다른 직업을 갖는다면 교사나 군인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1978년 성당 주일학교에서 3박4일 여름 산간학교를 열었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권유로 산간학교에 참석하였습니다. 거기서 운명처럼 성당친구들을 만났습니다. 친구 중에 몇 명은 신학교에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당시 본당 주임신부님도 학생들을 무척 아껴 주셨습니다. 저는 자연스럽게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신학교에 가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어머니에게 말씀드렸더니 어머니는 열심히 하라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그때 만난 친구 중에 저를 포함해서 3명이 사제가 되었습니다. 한 친구는 서울에 저는 뉴욕에 그리고 또 한 친구는 시애틀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언제나 힘이 되어주는 친구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아는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묻습니다. ‘선생님이 메시아입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와서 보시오.’ 안드레아는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형 시몬에게 가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그리고 시몬을 예수님께 데리고 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을 보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너는 앞으로 게파라고 불릴 것이다.’ 게파는 베드로라는 뜻입니다. 시몬 베드로는 동생 안드레아를 따라갔다가 반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필립보도 친구 나타나엘에게 메시아를 만났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리고 나타나엘을 예수님께 데리고 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나타나엘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선생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나타나엘은 친구 덕분에 하느님의 아드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종은 그의 주인이 무엇을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전해 주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오늘 제1독서는 하느님 나라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뜨겁게 타오르던 땅은 늪이 되고, 바싹 마른 땅은 샘터가 되리라.”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신앙인의 길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영광스러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하느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예전에 읽은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눈 쌓인 길을 걸어갈 때는 발걸음을 함부로 하지 마시오. 그 길은 뒷사람이 따라오는 이정표가 되기 때문이랍니다.” 신앙인은 친구가 되어주신 예수님 따라서 하느님 나라로 가는 사람입니다. 내가 가는 길이 이웃에게 하느님 나라로 가는 이정표가 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부드럽고 따뜻한 손길이 한 인간을 변화시키고 구원합니다!
-양승국신부-
공평하고 관대하신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을 고루 다 사랑하시만, 또 다른 한편으로 각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접근하십니다. 내게 다가오시는 모습이 얼마나 다정다감하신지, 나를 얼마나 지극정성으로 대하시는지, 마치 이 세상에서 나만 사랑하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오늘 복음에 등장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귀먹고 말 더듬는’ 한 사람을 치유하시는데,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치유하십니다.
이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환자의 치유에만 전념하겠다는 예수님의 적극적인 의지의 표현입니다. 비록 지나가다 만난 한 사람이지만, 지금은 오직 이 사람과만 개별적으로 만나겠다, 이 사람에게만 정성을 기울이겠다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환자를 위한 참으로 각별한 배려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일련의 치유과정도 동일한 맥락에서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말씀 한 마디면 모든 것이 치유되는 능력의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몇 가지 단계를 거치십니다. 당신 손가락을 환자의 두 귀에 넣으십니다.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십니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 숨까지 내쉬십니다. 이윽고 “에파타!”하고 외치십니다.
비록 간단한 접촉이지만, 환자 입장에서는 너무나 과분한 은총입니다. 비참한 한 인생길을 불쌍히 여겨주시는 것만도 감사한 일인데, 그 크신 하느님께서 직접 당신 손을 펼치시어 부당한 한 인간의 신체에 접촉하십니다.
어떻게 해서든 우리 가까이 다가오시려는 하느님, 어떻게 해서든 우리와 접촉하시려는 하느님의 애틋한 사랑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결국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이 환자를 치유시킵니다. 결국 하느님의 부드럽고 따뜻한 손길이 한 인간을 변화시킵니다. 결국 하느님의 다정다감한 마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치유과정은 우리가 봉헌하는 매일 미사 때 마다 다시금 반복됩니다. 말씀의 전례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친히 당신 손가락을 우리 귀에 넣으시어, 말씀 안에서 당신을 알아 뵙게 하십니다. 성찬의 전례 가운데 예수님의 몸과 피는 친히 우리의 오장육부 깊숙한 곳까지 찾아오십니다.
따지고 보니 우리가 매일 거행하는 미사는 치유의 성사입니다. 우리가 매일 봉헌하는 미사는 기적의 성사입니다. 우리가 매일 거행하는 미사는 사랑의 성사입니다. 이 미사를 통해 우리 역시 치유의 기적을 계속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생명의 말씀을 모시는 이유>
-반영억신부-
같은 말이라도 사람을 살리는 말이 있는가 하면 무미건조하거나 혹은 사람을 해치는 말도 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같은 말을 들어도 듣는 사람이 느끼는 것이 다를 수 있습니다. 한 예를 들어봅니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장님입니다”
이런 팻말을 목에 걸고 프랑스 파리의 미라보 다리 위에서 구걸을 하고 있는 한 장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곁을 지나가던 어떤 사람이 그 걸인에게 당신이 이렇게 해서 구걸하는 액수가 하루에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걸인은 침통한 목소리로 겨우 10프랑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행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걸인의 목에 걸려있는 팻말을 뒤집어 놓으며 다른 어떤 말을 적어놓았습니다.
그로부터 약 한달 후, 그 행인이 그 곳에 다시 나타났을 때 걸인은 행인의 손을 붙잡고 감격해 하며 물었습니다.
“참으로 고맙습니다. 선생님께서 다녀가신 뒤 요사이는 50프랑까지 수입이 오르니 대체 어떻게 된 연유인지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무슨 글을 써 놓았기에 이런 놀라운 일이 생기는 겁니까?”
그러자 행인은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별다른 게 아닙니다. 원래 당신의 팻말에 쓰여 있는 글 ‘저는 때어날 때부터 장님입니다’라는 말 대신에 ‘봄이 오건만 저는 그것을 볼 수 없답니다’라고 써 놓았을 뿐이죠.”
이는 우리가 쓰는 말 한마디에 따라 얼마든지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준 프랑스의 시인인 로제 카이유의 일화입니다.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도 있듯이 말이라고 다 같은 말은 아닌 것입니다. 옳은 말을 하더라도 어떤 사람에겐 잔소리처럼 들릴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겐 한 인생을 바꾸는 계기를 만들기도 합니다. 박지성도 축구를 포기하려고 할 때 히딩크 감독의 격려 한 마디로 유명한 선수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누구나가 생명을 주는 말을 하고 싶지만 모두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미국의 아틀랜타 5번가 한 모퉁이에 고무풍선 장수가 있었습니다. 그 고무풍선 장수는 하도 장사가 안 되어 궁리 끝에 파란 색의 풍선을 하늘로 날려 봤습니다. 그랬더니 아이들의 관심이 하늘로 날아가는 풍선에 쏠렸습니다. 풍선 장수는 이번엔 노란 풍선을 날렸습니다. 아이들은 신기해하며 풍선 장수 앞으로 모여왔습니다. 풍선 장수는 이번엔 녹색 풍선을 날렸습니다. 아이들은 재미있어하며 저마다 주머니를 털어 풍선을 샀습니다. 그런데 그 광경을 처음부터 지켜보던 흑인 아이 하나가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아저씨, 저기 있는 검은 풍선들은 날 수 없나요?”
풍선 장수는 흑인 꼬마아이를 유심히 바라본 후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검은 풍선을 하늘로 날려 보냈습니다. 아이는 신기한 듯이 하늘로 솟아오르는 검은 풍선을 쳐다보았습니다. 아저씨는 아이의 어깨를 감싸며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아이야, 풍선을 날게 하는 것은 색깔이 아니란다. 그 안에 들어있는 그 무엇이지.”
흑인소년은 크게 감동을 받아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한 결과 세계적인 위대한 흑인 지도자가 되었는데 이 분이 바로 노벨 평화상을 받은 마틴루터 킹 목사였다고 합니다.
생명의 말씀은 노력한다고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풍선 안에 헬륨이 있으면 풍선이 당연히 하늘로 날 수 있는 것처럼 자신 안에 생명을 간직해야합니다. 그 생명이란 성령님입니다. 그분 없이는 아무리 노력해도 풍선은 날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은 어떻게 우리 안에 들어오실까요?
‘TV 동화 아름다운 세상’에 ‘20억년의 사랑’이란 제목으로 실린 글입니다.
한 십대 딸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가 하는 모든 말은 부정적이고 짜증 섞인 말이고 남을 판단하는 내용들이었습니다. 아이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그것이 엄마의 책임인양 반항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밤 늦도록 집에 돌아오지 않는 날이 부지기수였고 툭하면 사고를 쳐서 엄마의 애간장을 태우는 딸, 엄마의 주름은 늘어만 가고 딸이 빠진 수렁은 깊어만 갔습니다. 어느 날은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소란을 피웠다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왜 그러느냐고 다그쳤지만 아이는 자신의 인생에 끼어들지 말라고 도리어 큰 소리를 쳤습니다.
그 딸이 열여덟 살이 되던 생일날이었습니다. 새벽같이 나간 딸은 한밤중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딸아이의 어릴 적 사진을 보며 눈시울을 적시는 엄마는 시간을 되돌려 놓고 싶었습니다.
그날 밤 엄마는 딸아이를 위해 선물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편지를 써 내려갔습니다. 그 날도 12시가 다 되어서야 돌아온 딸은 책상위에 놓인 선물상자를 발견했습니다.
상자에는 편지와 함께 작은 돌멩이 하나가 들어있었습니다.
“이게 뭐야?”
또 뻔한 잔소리려니 하고 심드렁하게 편지를 읽던 딸의 눈에 눈물이 고였습니다.
“이 돌의 나이는 20억 년이란다. 내가 널 포기하려면 아마 그만큼의 시간이 걸리겠지...”
딸은 곤히 잠든 엄마의 머리맡에 앉아 조용히 속삭였습니다.
“20억 년은 너무 길다. 그러니까 엄마... 나 포기하지 마.”
딸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습니다.
아이는 비로소 생명을 주는 언어를 되찾았습니다. 사랑이 생명입니다. 생명의 말이 나오려면 생명의 말을 듣는 수밖에 없습니다. 귀가 들려야 말을 할 수 있듯이 사랑도 들어가는 구멍이 있어야 나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아야 손으로 그릴 수 있는 것처럼, 사랑의 목소리는 귀로 들어간 사랑이 있어야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귀머거리이며 말더듬이를 치유해 주시는 장면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말더듬이는 생명의 말을 건넬 줄 모르는 우리 모두를 상징합니다. 생명의 말을 건넬 줄 모르는 이유는 그 생명이 깃든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고 다시 침을 발라 그의 혀에 댑니다. 그리고 ‘에파타(열려라)’라고 외치십니다. 막혀있는데 무엇이 흘러들어가겠으며 흘러들어가는 것이 없는데 무엇이 입으로 나올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손가락이나 침은 모두 성령님을 상징합니다. 엄마의 편지는 비록 글로 되어 있지만 그 안에 사랑이 스며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사랑이 스며든 무언가를 받아들일 때 우리 안에 함께 성령이 쌓여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비로소 사랑이 섞인 말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들어 우리 안에 간직하면 우리가 하는 모든 말들이 사람을 살리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말씀은 지금 우리가 미사 중에 말씀과 성체로 우리 안에 모시고 있습니다. 말씀을 모시는 모든 이들은 귀가 열리고 마음이 열려 자신도 모르게 다른 이들을 살리는 말을 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입이 열리려면 먼저 귀가 열려야합니다. 생명의 말씀을 받아들이는데 게으르면 우리는 영원한 말더듬이로 남게 될 것입니다

<에파타!>
-송영진신부-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다.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하였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마르 7,32-37)”
여기서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를 원문대로 번역하면,
“저분은 모든 것을 좋게 하시는구나!”입니다.
이 말은, 창세기 1장에 반복해서 나오는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에서 온 말로서,
“예수님은 고장 난 세상을 고쳐서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던
천지창조 때의 세상’으로 복구하시는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이 말에는 “예수님은 새로운 창조자”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귀먹고 말 더듬는 이’는
‘듣지 못해서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 이야기를 겉으로만 보면, 예수님께서 장애자를 고쳐 주신 ‘평범한 이야기’인데,
상징적인 이야기로 생각하면,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복음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깨우쳐 주심으로써 사람들이 ‘말씀’과 ‘복음’을
알아듣게 되고, 또 믿게 되고, 그 다음에는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말씀’과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을 상징하는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듣지 못하다가 예수님 덕분에 듣게 되고 말하게 된 사람들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인물은 바오로 사도입니다.
바오로 사도가(박해자 사울이) 박해했던 스테파노 순교자는
순교 직전에 박해자들과 논쟁을 벌였고(사도 6,9)
최고의회에서 긴 설교를 했습니다(사도 7장).
그 논쟁과 설교는 사실상 ‘복음 선포’인데,
박해자 사울도 그 복음을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는 복음을 알아듣지 못했고, 그래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귀먹어서 듣지 못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을 체험하고서(사도 9,3-6),
‘박해자 사울’에서 ‘사도 바오로’로 변화되었습니다.
복음을 알아듣지도 못했던 그가 예수님을 체험한 뒤에는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여러 회당에서 선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사도 9,20).
‘박해자 사울’이 ‘사도 바오로’로 변화된 일은, 예수님께서 그의 귀와 입을
고쳐 주셔서 그가 제대로 듣고, 제대로 말할 수 있게 된 일입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의 ‘회심’은 저절로 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다 해 주신 일이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 자신의 능동적인 응답과 노력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사울은 예수님을 만난 뒤에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했고”,
그동안 그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사도 9,9).
아마도 사울은 그 사흘 동안 깊은 침묵 속에서 기도와 묵상을 했을 것입니다.
그 사흘은 회개와 보속을 하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에파타!’ 라는 단어의 뜻은 ‘열려라!’이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열어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습니다.
고장 난 귀와 입을 고치는 일은 예수님께서 해 주시는 일이지만,
말씀을 듣고 복음을 전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능동적으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를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마태 13,13).”
또 요한복음 9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9,39).”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41).”
자기 탓이 아닌 이유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눈이 있는데도 ‘예수님의 일’을 보지 않고, 귀가 있는데도
‘말씀’을 듣지 않고, 입이 있는데도 ‘복음’을 말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말한 일은(마르 14,66-71),
입이 있는데도 ‘진실’을 말하지 않은 ‘죄’입니다.
(그 일에 대해서, “너무 겁에 질려서 엉겁결에 그렇게 되었을 뿐이다.” 라고
변호해 줄 수도 있겠지만, 그때 베드로 사도가 “나는 예수님의 제자다.”
라고 분명하게 밝히지 않은 것은, 말을 못한 것이 아니라, 안 한 것입니다.)
박해 받는 것이 무서워서 자기의 신앙을 감추는 것은,
입이 있는데도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도 신앙을 부인하는 것보다는 덜 나쁜 일이다.” 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신앙을 감추는 일이나 부인하는 일이나 다 같은 일입니다.
등불을 켜서 함지 속에 감추는 것은(마태 5,15)
사실상 등불을 끄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말’에 관하여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거짓을 벗어 버리고 ‘저마다 이웃에게 진실을 말하십시오.’
우리는 서로 지체입니다(에페 4,25).”
(요즘 세상을 보면, ‘가짜 뉴스, 유언비어’ 등을
의도적으로 퍼뜨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십계명 제8계명을 거스르는 ‘대죄’가 될 뿐만 아니라, 거짓말로
사람들을 이간질하는 ‘사탄의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대죄’가 됩니다.)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 됩니다.
필요할 때에 다른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
그 말이 듣는 이들에게 은총을 가져다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에페 4,29).”
“성도들에게 걸맞게, 여러분 사이에서는 불륜이나 온갖 더러움이나 탐욕은
입에 올리는 일조차 없어야 합니다. 추잡한 말이나 어리석은 말이나
상스러운 농담처럼 온당치 못한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감사의 말만 해야 합니다(에페 5,3-4).”

복음: 마르 7,31-37: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조욱현신부-
예수님께서 귀먹은 반벙어리를 고쳐주셨을 때, 군중들은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 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마르 7,37)라고 경탄한다. 소경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가 다시 듣게 된다는 사실들은 진짜 기적적인 사실들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들이 마침내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사실에 대해 놀란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진짜 기적이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구원하셔서 해방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자들이 예언했던 그 메시아로 알아듣고자 했다. 이것은 적어도 마르코가 자신의 복음을 쓰면서 가졌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귀먹은 반벙어리 치유의 의미는 누구든지 하느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경청하려고 한다면 결코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하고 말씀하셨다.”(33-34절) 예수님의 이 행위들은 마술사들이 행하는 그런 행위가 아니다. 이것은 당신의 구원 능력이 당신 인성을 통해 병든 이의 인성에 전달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모든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신다. 여기 나오는 한숨은 희랍어 원문으로 신음을 낸다는 뜻으로 예수님이 다른 사람의 고통에 동참하고 계심을 뜻하며, 하늘을 우러러라는 말은 당신의 기적의 힘이 바로 하늘에서 온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35절) 오늘의 귀먹은 반벙어리의 모습은 이것이다. 유다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막고 있으면 신앙을 통해 자신들 안에 이루어지는 구원의 놀라운 사실을 말할 수도, 선포할 수도 없음을 의미한다. 귀먹은 반벙어리가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35절)는 사실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을 때에 집전자가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세례자의 귀와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만지며 “귀머거리를 듣게 하시고 벙어리를 말하게 하신 주 예수님, 이 자녀가 오래지 아니하여 귀로 주의 말씀을 듣고 입으로 신앙을 고백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게 하소서.”하고 기도한다.
이렇게 신앙생활의 모든 의미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 “열려라!” 하는 그 행동과 말씀 속에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귀를 열어 놓고, 주님의 말씀을 자신을 변화되도록 주님께 자신을 맡기고, 우리의 생활로 다른 사람들에게 신앙을 전하는 것이 우리가 받은 세례에 충실한 것이다. 귀먹은 반벙어리의 사건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수없이 반복되는 사실이다. 귀먹은 것이 치유되어도 또다시 귀먹을 수 있고, 그래서 계속 언어장애인이 될 수 있다. 언어장애인은 귀가 먹었기 때문에 언어장애인이 되지 않는가? 즉 주님의 말씀을 깨어 들을 줄 모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선포할 말이 없는 것이다. 이같이 오늘 복음의 반벙어리 이야기는 영적인 면에서 볼 때, 복음에 대해 병들어있는 사람의 이중적인 불행의 상징적 의미가 있다. 먼저 복음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듣지 않는 신자는 그 복음을 말로 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게다가 생활로 전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울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하였다. “오늘날에는 비록 육체적인 눈이 주님의 기적을 통해서 뜨이는 일은 없을지라도 마음의 눈이 주님의 말씀을 통해 뜨이고 있다. 그리고 시체는 다시 살아나지 않으나 살아있는 시체의 죽어있는 영혼은 다시 살아난다. 또한 귀먹은 육체의 귀는 소리를 듣지 못하나 닫힌 마음의 귀는 하느님의 말씀에 활짝 열린다. 그래서 믿지 않던 사람들이 믿고 악하게 살던 사람들이 착하게 살고 순종하지 않던 사람들이 순종하게 된다.”(훈화 88)
어떤 환경에서든 주님의 말씀에 귀를 열어 놓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야고보서의 공동체는 귀먹은 공동체이다. 공동체 안에서 신자들이 부자들은 환대하고 아부하지만 가난한 이들은 업신여겼던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모두 형제들이다.”(마태 23,8)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을 선택하셨다. 그러니 그러한 신자들은 복음을 배반하는 것이다. 그러한 신앙은 거짓된 신앙이다.
마지막 구절을 보자.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세상에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야고보 2,5) 주님의 말씀을 잘 듣는다면, 잘 따른다면 그 말씀은 반그리스도적인 것을 분별하게 해주며 공동체 안에서 차별대우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해줄 것이다.
하느님 앞에 참된 부자는 믿음을 갖고 온전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가난한 이들이다. 그들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참된 상속자들이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가난한 이들을 선택해 주실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느님을 닮고자 하는 노력의 길이기 때문에 가야 할 길이 끝이 없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들어야 하며 우리의 귀먹음을 주님의 강하고도 부드러운 손길에 맡겨 항상 새롭게 치유되도록 해야 한다. 말씀을 삶으로써 이제는 그 말씀을 이웃에게 전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귀머거리가 되어도 다시 주님께 치유를 받고 다시 일어나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마르 7, 34)
-한상우신부-
청명한
가을이
열린다.
닫혀있는
아픔을 통해
우리를
치유로
초대하시는
주님이시다.
치유를 통해
우리가
누군지를
알게된다.
사랑받는
주님의
자녀들이다.
다시
예수님을
향하는
치유의
시간이다.
예수님의
치유는
지극히
인격적이고
과감하게
친밀하다.
닫혀있는
귀와 입을
열어주신다.
우리의
아픔을
주님께
숨기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치유의
시작이다.
주님께서는
치유를 통해
행복을
전달하신다.
주님께서는
자녀들의
행복을
원하신다.
행복은
병든 마음이
치유되는 것이다.
그래야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자유롭게
갈 수 있다.
정말이지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이시다.
진정한 치유는
주님과의
소통이다.
건강한
삶은
건강한
소통이다.
소통은
다시금
존재의 가치를
일깨운다.
사람의 삶이란
관계가
회복되는
귀가 열리고
혀가 풀리는
사랑의 소통이다.
건강한 소통을
성찰하는
은총의 주일이다.
소통의 여정이
치유의 여정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모두에게 쏟아지는 주님의 축복을 봅니다.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마르 7,32)
사람들이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이를 예수님 앞으로 데려 옵니다. 몸이 건강한 이웃들이 그를 위해 수고해 준 것입니다. 듣지 못하니 스스로 예수님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없었겠지요. 그는 누군가의 도움이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대셨다."(마르 7,33)
말씀 한 마디로도 충분히 그를 고쳐 주실 수 있으신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보다 구체적으로 치유 행위를 하십니다. 먼저 그를 따로 데리고 나가신 것은 지금 당신이 온전히 그에게 집중하고 있음을 느끼게 해 주시는 것 같아 보입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가난에 약함까지 겹친 상황에서 타인의 이목을 견디어야 하는 게 마냥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있으니까요.
예수님은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었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십니다. 마치 고대 주술사가 치료 행위를하는 느낌이지요. 만일 그가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단호한 목소리의 한 말씀으로도 당신의 사랑과 의지를 충분히 전달하셨을 겁니다. 예수님은 지금 귀와 입이 불편한 이에게 딱 알맞는 맞춤형 치유 행위를 해 주시는 겁니다.
그는 구체적으로 자기 앞에서 움직이시는 예수님의 행위를 통해, 그리고 귀와 혀끝으로 느껴지는 예수님의 손길을 통해 아주 실제적으로 예수님의 마음과 정성과 힘을 느낍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마르 7,34)
예수님은 이 치유를 홀로가 아니라 성삼위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행하십니다. 하늘을 우러러 성부 하느님과 통하시고, 한숨으로 성령의 숨과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지요. 이어서 말씀으로 치유 행위를 완성하십니다. "에파타!" 그리고 열립니다.
제1독서에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가 울려 퍼집니다.
"그분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이사 35,4)
마음이 불안한 이들, 눈멀고 귀먹고 말못하고 움직임이 불편한 이들, 결핍과 갈망으로 마음이 헤집어진 모든 이들을 위해 주님께서 오십니다. 주님은 그들이 겪어온 고통과 설움을 아시고 각자에 맞는 치유와 힘을 불어넣어 주실 겁니다.
제2독서의 저자는 재력이나 겉모습만 보고 가난한 이를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단호히 이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야고 2,5)
부자들이 이 세상에서 누린 복을 가난한 이들은 하느님 나라에서 상속받습니다. 부자들이 무얼 잘못해서라기보다 이미 이 세상에서 재물과 명예, 안락과 향락 등으로 "받을 상"을 다 받은 까닭이 아닐까 합니다. 반면 가난한 이들에게는 아직 열리지 않은 선물이 천상의 축복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공정하시고 정의를 사랑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겸손의 축복은 부자들보다 가난한 사람들이 더 쉽게 얻을 수 있다는 점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궁핍 가운데서 온유함과 친숙해지고 부유한 사람들은 풍요 가운데서 교만과 친숙해집니다."(성 대 레오 교황의 [참된 행복에 대한 강론]에서)
이 가르침은 물질적으로 가난한 이는 무조건 구원되고 부자들 무조건 멸망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만의 위험에 쉽게 노출되기 마련인 어떤 부자가 오만과 이기심을 버리고 관대하게 나눔을 실천하며 가난한 이들도 차별없이 존중한다면 그가 쌓은 겸손의 덕이 주님께 얼마나 큰 공로이고 기쁨이 되겠습니까! 반면 가난의 축복을 받은 이들이 불평불만으로 온유와 겸손의 덕을 획득하지 못하면 그 고통이 또한 얼마나 크겠습니까!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마르 7,37)
오늘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치유하신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이 경탄하며 말합니다. 가장 도움이 필요한 이의 결핍을 채워 주시면서 하느님께서 모든 피조물에게 부여하신 온전함을 회복시켜 주시니, "모두 훌륭할" 수밖에요!
이처럼 주님은 모든 이가 온전해지기를 바라십니다. 가난한 이들은 빈 곳이 채워져 더욱 신명나게 겸손해지기를, 그리고 부유한 이들은 과욕과 오만으로 넘치기 전에 행복하게 겸손을 배우기를 바라시는 겁니다. 그분이 하시는 일은 모두의 구원을 향하기에 모두 훌륨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현재 물질적으로 부유하건 가난하건 구원의 문은 모두에게 열려 있답니다. 분명한 건 하느님과 일치하여 누리는 영원한 행복이 온유하고 겸손한 영혼에게 허용된다는 점이지요. 그래야 온유하고 겸손하신 그분과 이질감 없이 하나가 될 수 있으니까요. 우리 각자가 지닌 부유함과 가난함을 성찰하고, 모든 부분이 구원의 자리가 되길 희망하며,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말씀 나누기 - 연중 제23주일-능력뿐 아니라 사랑까지 다 하시는 (ofmkorea.org)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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