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3일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은 540년 무렵 로마의 부유하고 신심 깊은 가문에서 태어났다. 법학을 비롯한 귀족 계층의 고등 교육을 받은 그는 로마의 고위 공직자를 지낼 정도였으나 모든 재산을 교회에 기증하고 수도원에 들어가 사제가 되었다. 590년에 교황으로 뽑힌 그레고리오 성인은 교황을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라고 표현한 최초의 교황이다. 교황권을 ‘지배하는 특권’이 아니라 ‘봉사하는 특전’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레고리오 성가’도 그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듯이, 그레고리오 교황은 전례 음악뿐 아니라 신앙과 윤리에 관한 저서를 많이 남기고 604년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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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내어 헌 옷을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새 옷을 못 쓰게 만들 뿐만 아니라
새 옷 조각이 헌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
(루가 5,33-39)
“No one tears a piece
from a new cloak to patch an old one.
Otherwise, he will tear the new
and the piece from it will not match the old cloak.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오늘 독서 말씀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찬가’로 잘 알려진 부분입니다. 요한 복음의 서문과도 비슷한 이 찬가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되었다는 ‘그리스도의 선재(先在) 사상’을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또한 그분의 ‘십자가 죽음’은, 시작이시며 마침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느님과 창조물 사이를 화해시키시는 구원자이심을 알려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신앙인들은 하느님을 알아 갑니다. 또한 세례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분 ‘안에서’ 살아갑니다(콜로 2,6 참조). 초대 교회 신자들에게 회개와 세례를 통한 희망은, 세상이 아닌 그리스도에 대한 강한 믿음을 통하여 그분과 함께하는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을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는 비유와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는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을 통하여, 그분과 함께, 그분 안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옛 생활을 버리고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복음의 가치에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언제나 그렇게 해 왔다며 행동하는, 고정 관념에 사로잡힌 그리스도인이 되지 말기”(2016년 1월 18일 성녀 마르타의 집 미사 강론)를 우리에게 부탁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 난 신자들은 ‘성령의 새로움’에 마음을 열고 그분의 은총으로 진리를 찾아 나아가야 합니다. 진리의 충만함으로 가득 차 있는 신자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을 얻습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부모님께 제대로 효도하지 못했다면서 눈물을 흘리는 분을 만났습니다. 문제는 이제 하늘나라에 가셔서 못다 한 효도를 더는 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만약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후회하지 않는 효도를 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다시 과거로 돌아가면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지만, 만약 되돌아가도 똑같이 불효의 삶을 살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불효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원하는 최고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자녀가 행복하게 잘 사는 것입니다. 자녀가 과거를 후회하며 지금을 힘들게 살고 있다면 이는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불효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즉, 자신의 불효를 탓하며 힘들게 사는 삶 자체가 불효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싶다면 스스로 행복하게 잘 살아야 합니다. 부모가 원하는 모습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본의 철학자 미키 기요시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가 행복해지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을 해줄 수 있겠는가?”
지금을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후회하는 과거의 삶이 아닌, 행복한 현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계약을 들고 오셨습니다. 따라서 과거의 옛 계약을 집어 던져버리고 새 계약을 취해야 옳습니다. 지금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것을 지금 당장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옛 계약에 여전히 매여 있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자주 단식하며 기도하는데,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냐면서 꾸짖음의 말을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그만큼 구원에 가까워졌다는 의미이고 그래서 기뻐 즐기는 혼인 잔치와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먹고 마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 당연한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은 과거의 율법에 매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혼인 잔치에 왔지만 비통한 표정을 짓고 단식하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옛 계약을 고집하는 자들은 새로운 창조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다시금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행복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의 사랑을 기억한다면, 분명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지금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것보다 더 큰 효도가 없음을 기억하면서, 지금 행복한 삶을 위한 노력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예전에는 이런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신부님!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것이 힘들지 않으세요? 정말로 대단하세요.”
요즘에는 이런 말을 전혀 들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혼자 사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어느 자매님이 자기 딸 걱정을 하며 말씀해주신 것이 기억납니다.
의대에 들어간 딸은 정말로 정신없이 살았습니다. 전문의가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전문의가 되고 나서는 ‘결혼은 꼭 해야 하나?’라는 생각으로 바뀐 것입니다. ‘조건이 맞고 때가 되면 하는 거지, 그렇지 않으면 혼자 살지.’라는 마음으로 산다고 합니다. 누구는 손주 보느라 시간이 없다는데, 자신은 손주 한번 보고 싶다고 말씀하십니다.
시대가 생각 자체를 바꿔 놓았습니다. 독신이 힘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 편하게 사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함께의 소중함은 혼자의 삶보다 분명히 큽니다.
실제로 혼자 사시는 분은 자주 공허함과 고독감을 많이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혼자 살더라도 함께 하겠다는 마음을 버려서는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주님과 함께, 이웃과 함께, 그 ‘함께’를 절대 버려서는 안 됩니다.

네 생각과 행동이 옳을 수는 있다. 그러나 너는 옳을 수 없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것을 비난합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그러나 예수님은 혼인 잔치에서 먹고 마시지 않는 것은 오히려 실례를 범하는 것이라고 하시며, 그들이 헌 옷을 꿰매기 위해 새 옷을 찢거나 새 술을 헌 부대에 담으려 하며 옛것만 좋다고 고집하는 이들이라고 비판하십니다.
단식은 분명 좋은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광야에서 기도하실 때 40일 동안이나 단식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먹고 마시는 제자들을 두둔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매년 한 번씩 사탄은 자신의 졸개들에게 상을 주어 더 완벽한 방법으로 인간이 지옥에 떨어지게 만드는 모델을 제시하려 했습니다.
마귀들은 서로 미움과 사기, 방탕과 무절제, 그리고 무기력과 열등감 등을 일으켜 사람들을 지옥에 떨어지게 했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그해의 대상을 탄 마귀는 이런 말을 한 늙은 마귀였습니다.
“나는 내가 맡은 사람들에게 항상 바른 생각만 심어주었다오.”
다른 마귀들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사탄은 무릎을 ‘탁’ 치며 이것이 현대에 꼭 필요한 방법이라고 앞으로 모두 그 마귀를 따라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마귀가 한 영혼에 했던 일을 보여주었습니다.
대한민국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 아이는 8남매 중 맞이가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대학 대신 자신을 도와 농사를 지을 것을 권했습니다. 학비를 내줄 수 없는 형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마귀는 그의 마음에 속삭였습니다.
“너의 인생은 너의 것이야. 네가 열심히 노력만 하면 스스로의 힘으로 대학을 나올 수 있어. 그러면 동생들에게 더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야.”
그는 불가능은 없다고 몇 번이나 되뇌이며 주경야독하여 서울 소재 일류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아르바이트하며 좋은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외국계 회사에 들어가 빠른 승진을 거듭한 끝에 젊은 나이에 임원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아내와 가족에게 신경 써 줄 시간은 갖지 못했습니다. 이때 마귀는 또 속삭였습니다.
“괜찮아. 아버지의 의무는 가족이 돈 걱정 안 하게 하는 데 있어. 그럴려면 넌 열심히 일해야지. 언젠가는 아내와 자녀들이 다 알아줄 날이 있을 거야.”
그는 자신의 의지대로 열심히 일했고, 그의 기준에 미달하는 사람은 아랫사람이건 아내건 자녀들이건 더 잘할 수 있다고 다그쳤습니다. 자신이 했으니 그들도 할 수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그의 주위에는 사람이 없어졌습니다. 심지어 아내도, 자녀들도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사회에서는 성공한 사람이 되었지만 50대 중반에 신장암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의사는 3년간 노력한 끝에 더는 손을 쓸 방법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마귀의 속삭임에 따라 그는 눈을 부릅뜨며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뉴스에서는 좋은 약이 많이 나오고 있다던데 그게 말이나 됩니까? 지금 나보고 그냥 이렇게 죽으란 말입니까? 그게 의사라는 사람이 할 소리입니까? 돈은 상관없으니 예전에 썼던 항암제를 다시 써 주세요.”
의사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하도 막무가내여서 몇 달 동안 그 약을 투여했습니다. 그러나 고통만 가중될 뿐이었습니다. 이 3년 동안 마귀는 또 속삭였습니다.
“넌 할 수 있어. 지금 회사를 그만두면 모든 게 무너지는 거야. 넌 이겨낼 수 있어.”
이렇게 항암 치료를 받는 중에 야근도 하고 외국 출장도 다니며 건강한 사람보다 더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그러나 의사는 이미 뼈까지 전이된 암세포로 고생하지 말고 호스피스 병동에 들어가 통증을 좀 줄이며 죽음을 준비하는 편이 낫겠다고 제의했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또 속삭였습니다.
“넌 이대로 죽을 수 없어. 아직 할 일이 많아. 빨리 주식 시세를 한 번 봐봐. 네가 투자한 회사의 주가가 급상승하고 있어.”
그는 그렇게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도 30여 년 그와 함께 살면서 너무 힘들었고, 아내로서 의무를 다한다는 마음으로 마지막 임종을 지켰지만 실제로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서울대 종양내과 전문의 김범석 교수의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에서 나온 사례를 마귀를 개입시켜 조금 각색해 보았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외롭게 죽어간 그 사람은 틀린 생각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을 수 있습니다. 다 자기 인생은 자기의 것이고 열심히 살아서 가족에게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엔 그의 주위에 아무도 없이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런 사람이 현대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입니다. 그들이 지킨 율법은 틀린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틀렸습니다. 옳은 법을 지키면 다 옳을까요?
만약 개가 밥상에서 인간과 함께 식사하려 한다면 옳은 일일까요? 본인이 개인데 사람처럼 행동하려 한다고 해서 그것이 옳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사람이 개에게 어떤 일을 시킬 때, 그것이 땅에 떨어진 음식을 주워 먹는 것일지라도 그것이 옳은 일입니다. 옳고 그름은 내가 하는 행위에 달리지 않고 내가 누구의 명령을 따르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율법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내가 옳다고 믿고 행하는 모든 것은 옳아 보여도 틀렸습니다. 주인의 뜻을 물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집안에 주인과 개가 있다면 개는 주인의 뜻을 따를 때만 옳게 행동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주님으로 여기지 않고 자기 자아를 주님으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마귀의 속삭임을 따른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행동이 옳았더라도 하느님의 의도와 어긋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이 ‘진리’이고 나는 ‘악’이며 ‘거짓’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다면 우리는 길도 모르고 진리도 없으며 죽음이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 안에 옳은 것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진리라고 하시는 아무 의미도 없어집니다. 나도 진리인데 뭐하러 오셨느냐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의 삶의 옳고 그름은 어떤 옳은 일을 했느냐가 아닌, 매 순간 주님의 뜻을 묻고 실천했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으면서까지 “난 죄 없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마귀의 가장 악랄한 계책입니다.
내 행동이 옳습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내 생각이 옳습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뜻이 옳을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대치되기 때문입니다.
옳은 것은 하느님 뜻밖에 없습니다. 내 생각과 행위가 하느님 뜻 안에 있을 때만 내가 옳게 됩니다. 어차피 주님만이 빛이시고 진리이십니다.

-조재형신부-
오늘은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입니다. 590년에 교황으로 뽑힌 그레고리오 성인은 교황을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라고 표현한 최초의 교황입니다. 교황권을 ‘지배하는 특권’이 아니라 ‘봉사하는 특전’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레고리오 성가’도 교황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듯이, 그레고리오 교황은 전례 음악뿐 아니라 신앙과 윤리에 관한 저서를 많이 남겼습니다. 교회에 그레고리오 교황이 있다면 우리 역사에는 ‘세종대왕’이 있습니다. 세종대왕은 지금 우리가 쉽게 쓰고 있는 ‘한글’을 창제하였습니다. 한글은 목에서 내는 소리에 따라 모양이 변하는 입술, 이, 혀, 목구멍의 모습을 보고 만들었다고 합니다. 소리글자인 한글은 바람소리, 풀벌레 소리,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까지 모두 적을 수 있습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이유는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다른데 중국의 문자를 쓰면서 생기는 불편함을 없애기 위해서였습니다. 한문을 배울 수 없는 가난한 백성들에게 쉽게 배울 수 있는 글을 만들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백성이 쉽게 배울 수 있는 글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세종대왕의 ‘훈민정음’은 당시 집현전의 학자들과 대신들의 반대로 반포되지 못할 뻔했습니다. 반대를 했던 대신 중에 최만리는 몇 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하였습니다. 대국인 중국의 문자인 한문을 대신해서 우리의 문자를 만들면 대국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대국의 비위를 건들면 국가적인 어려움이 있을 거라고 하였습니다. 간악한 백성들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적을 수 있게 되면 국가의 질서가 무너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백성들이 법을 알면 법을 이용해서 죄를 지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중국과 다른 문자를 가진 나라는 모두 오랑캐인데 우리도 우리의 문자를 가지면 오랑캐가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종대왕은 글을 모르기 때문에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는 백성들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백성이 글을 알면 억울함을 표현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근본적으로 세종대왕은 백성들을 신뢰하였고, 사랑하였습니다. 백성들이 모두 글을 읽고, 쓸 수 있다면 나라의 품격이 높아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한글은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문자입니다. 그 만들어진 목적을 정확히 알 수 있는 문자입니다. 디지털 시대에 적합한 문자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백성을 사랑하는 세종대왕의 마음이 담긴 문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새 포도주와 새 부대는 시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가치와 의미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 이 역시 시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가치와 의미의 문제입니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생각을 가진다면,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한다면, 섬김을 받을 수 있지만 섬기는 삶을 산다면 그런 사람은 늘 새 포도주이고, 새 부대입니다.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하다면, 말은 많지만 행동하지 않는다면, 타성에 젖어 변화를 두려워한다면 그런 사람은 언제나 낡은 포도주이며, 낡은 부대입니다.
신앙은 우리를 억누르고, 우리를 구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신앙은 우리 안에 맺힌 것들을 풀어주는 것입니다. 오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에 관해서 판단을 내리고 있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냈다면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았다면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 가지고 제자들을 판단하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 학자들에게는 신앙은 삶을 구속하고, 죄의식을 심어주는 것들이었습니다. 이는 또한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부부가 갈등을 일으키는 많은 경우도 미리 판단하고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절친했던 친구가 갈라지는 경우도 충분히 듣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만 들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남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참된 신앙은 이해와 용서, 인내와 관용이라는 그릇에 담아야만 더욱 빛을 낼 것입니다.

불을 위하여 등잔이 있다
-반영억신부-
새것과 헌 것은 충돌하게 마련입니다. 헌 것이 다 나쁜 것도 아니고 새것이 다 좋은 것만도 아닙니다. 그것이 어떻게 쓰이느냐가 중요합니다. ‘등잔을 위하여 불이 있지 않고 불을 위하여 등잔이 필요한 이치’입니다. 단식은 슬픈 일이 있어서, 뜻이 있어서 합니다. 슬픈 일이 없는데, 오히려 기뻐해야 할 날에 단식을 하는 것은 그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단식은 단순히 밥을 굶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단식을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단식을 하셨듯이 하느님으로 가득 찬 나머지 하느님 외에는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기 위해 세상적인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느님으로 채울 수 있을 만큼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합니다. 단식은 하느님께로 가는 방법의 하나일 뿐 목적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차지하도록 준비시켜주고 함께 그 길을 걸어가는 수단입니다. 수단을 목적으로 정당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루카5,37-38).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자신들의 전통과 아집, 지식 때문에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하신 말씀입니다. 묵은 것은 익숙한 것이기에 편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편안함이 우리를 마비시키기도 합니다. 과거의 경험과 지식에 안주하여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마치 내 것이 전부인양 생각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묵은 것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새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는 항상 준비되어있어야 합니다.
나이 든 사람들이 쉽게 노여움을 타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여러 이유가 있지만, 자신이 경험한 삶의 경륜과 지식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말에 동조하고 아첨하는 사람만 좋아하는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기도를 많이 하고 오래 단식한다는 이유로 스스로 성스럽다고 믿고 있지만 거룩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찾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찾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은총과 하느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거룩한 체하지 않았고,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성령으로 가득 차 있어서 거룩했습니다.
사목자들이 구교신자들이 많은 지역에서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그곳에는 성직자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남다르기도 하지만 아주 고집스런 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어느 신부도 알고, 어느 수녀도 알고, 누구는 예전에 어떻게 했는데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다는 등 말도 많고 아는 것도 많은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일수록 정작 본인은 새 영세자만도 못한 신심을 지니고 있고 자신의 틀 안에 갇혀서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의 경륜을 보아서는 모두를 품을 것 같은데 그 속이 밴댕이요, 좁쌀입니다.
우리는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은 분명히 달라야 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도 배려하면서 믿음의 쇄신을 이루어야 합니다. 성 아우구스띠노는 어머님께 말했습니다. “여인이여! 당신이 전에 부르던 아우구스띠노는 이미 죽었고, 지금의 나는 그리스도님과 함께 사는 아우구스띠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참 변화라는 것은 영적인 몸으로 변하는 것이고 그리스도님의 수난의 모습을 닮는 것이요, 영광으로 변하는 것입니다”(성 아타나시오).
새로운 가르침은 새로운 틀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모든 새로운 가르침은 “다시 근본으로 돌아가는 가르침”입니다. 시련과 역경, 모든 혼돈 속에서 다시금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실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밥을 굶기 위한 단식을 하지 말고 근본을 회복하는 단식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단식 논쟁 - 새것과 헌 것>
-송영진신부-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루카 5,33-35)”
여기서 예수님 말씀의 뜻은, “이미 메시아께서 오셨기 때문에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회개하는 단식은 할 필요가 없다.
지금은 메시아와 함께 기뻐할 때이다. 그러나 메시아를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회개의 단식을 하게 될 것이다.”입니다.
당시에 바리사이들의 단식은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기도의 한 방식이었고,
회개하면서 메시아를 기다리는 ‘슬픔의 단식’이었습니다.
그런데 메시아 예수님께서 이미 오셔서 복음을 선포하셨고,
사람들을 구원하는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따라서 바리사이들이 하는 것과 같은 단식은 더 이상 할 필요가 없게 되었고,
예수님과 함께 기뻐하는 생활을 하면 됩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의 단식에 대해서는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그들의 단식은 어떤 의미였을까?
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증언했는데,
그의 제자들은 요한의 증언을 알아듣지 못했을까? 아니면 그 증언을 거부했을까?
당시에 요한이 적극적으로 제자들을 모아서 가르친 것 같지는 않고,
요한을 예언자로 믿는 사람들이
마치 요한의 제자가 된 것처럼 그를 따라다녔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실제로 그랬다면 ‘제자들’이 아니라 ‘추종자들’입니다.)
안드레아 사도처럼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다가 요한의 증언을 듣고서
예수님을 따라가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도 있지만(요한 1,40),
그 수는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요한의 추종자들, 또는 제자들은 요한의 증언을 알아듣지 못하고,
자기들이 전부터 했던 방식대로(바리사이들의 방식대로)
메시아를 기다리는 단식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신랑을 빼앗길 날’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제자들에게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라고 물으셨을 때,
그들이 바로 먹을 것을 드린 것을 생각하면(루카 24,41-42),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때에 제자들이 단식을 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그때는 제자들이 그런 것을 생각할 틈도 없을 정도로
급박한 상황이어서 그랬을 것입니다.
(너무 놀라고 두려워서 제대로 음식을 먹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과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성금요일에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면서,
또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기 위해서 단식을 합니다.
(오늘날에는 우리가 신랑을 빼앗길 일은 없는데,
우리 스스로 신랑을 떠나는 일은 많습니다.
한 눈 팔다가, 딴 생각 하다가, 또는 죄를 지어서 그렇게 되는데,
그럴 때에 신랑이신 예수님에게로 돌아가기 위한 ‘회개의 단식’을 합니다.)
“아무도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만 아니라, 새 옷에서 찢어 낸 조각이
헌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루카 5,36-39).”
1) 이 말씀을 앞의 ‘단식에 관한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할 수도 있고,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연결해서 생각하면 이 말씀은,
메시아께서 언제 오실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슬픔 속에서 하염없이
기다리지 말고, ‘이미 오신’ 메시아와 함께 기뻐하는 생활을 하라는
가르침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기쁨의 종교’입니다.
‘마리아의 노래’의 첫 구절,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루카 1,46-47)”에
나오는 그 ‘기쁨’이 그리스도교의 기본 정신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있고,
메시아의 구원을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
(혹시라도 신앙생활에 기쁨이 없다면,
그것은 ‘삶’의 무엇인가가 고장 난 상태라는 뜻입니다.
고장 난 것을 고치려면 고해성사를 보아야 합니다.
영적 상담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2) ‘단식에 관한 말씀’과 따로 떼어서 생각하면,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라는 말씀은,
“옳지 않은 버리고 옳은 것만 지켜야 한다.” 라는 가르침입니다.
무조건 오래 된 것을 새것으로 바꾸라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계명들은 대단히 오래된 것이지만,
결코 ‘낡은 것’도 아니고, ‘헌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계명들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마태 5,18).
<우리를 멸망으로 이끄는 이단 사상들이나 세속의 풍조들은 언제나
새롭다는 것을 내세우면서 우리에게 접근하고 우리를 현혹시킵니다.
그 ‘새롭다는 점’에 홀려서 신앙을 잃는 경우가 실제로 많습니다.
(공산주의 사상도 그랬었고, 뉴에이지 사상도 그렇습니다.
요즘에는 이상한 사이비 심리학 이론을 동원해서
마치 대단한 영성 프로그램인 것처럼 가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들은 인간의 시간으로는 이천 여 년 전의 것이지만,
인간의 시간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시간으로는
언제나 우리를 ‘새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에페 4,24) ‘새 포도주’입니다.
우리가 그 가르침대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는 일입니다.>

복음: 루카 5,33-39: 단식의 정신
-송영진신부-
자기들만이 하느님을 제대로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삶을 볼 때, 자기들과 같이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재도 지키지 않고, 예수님과 제자들의 삶을 보면서 그렇게 살면서도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겠느냐고 비난한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33절)
그들이 단식하고 기도하는 모습은 어떠했는가? 유대인 중에는 진정 열심히 단식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단식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월요일과 목요일에 단식하는데,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단식하고 그 외는 먹을 것을 다 먹었다. 재를 지키는 것을 모두 드러내어 남에게 과시했고, 또 그에 대한 대가를 하느님께서 주시리라고 믿는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희생과 단식이 하느님 앞에 죄에 대해 속죄하는 경건한 마음으로 하고 이웃을 이해하고 무엇인가 함께 하는 사랑의 정이 있었다면 별문제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 단식하는 의미가 그런 것이다.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완성되지 않는 재는 지키지 않은 것과도 같은 것이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34절) 예수께서는 세상에 계시는 동안을 혼인 잔치의 기간으로, 그리고 당신을 신랑으로 비유하신다. 제자들을 손님으로 표현하신 것은 그들이 교회의 구성원이며 잔치의 주관자들이고, 잔칫상에 앉을 이들을 부르는 사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단식을 할 수 없다.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배불리 먹기 때문이다(요한 6,53 참조).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35절) 신랑을 빼앗기는 날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서 떠나가신 날,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라고 하신 날,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요한 14, 18)라고 하신 날이다.
“아무도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36.37절) 형식적인 율법에 매인 사람은 그리스도의 제도를 받아들일 수 없다.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하느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도 항상 새로운 자세로,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가난한 마음, 즉 이전의 내가 아닌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로서 자세를 가지고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묵은 나라고 하는 낡은 부대에는 하느님의 말씀을 담을 수가 없다. 이제 진정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으로 변화하여 그분의 말씀을 담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루카 5, 38)
-한상우신부-
신앙은
새 포도주와의
만남이다.
새 포도주와
새 부대의
만남이다.
포도주는
포도주다워야
한다.
좋은
포도주를
왜곡시키거나
좋은 포도주를
가짜로
만들었어는
안된다.
언제나
새로워지는
변화의 시작은
우리자신의
참된 회개이다.
회개의 마음이
새 포도주를
담는 참된
새 부대의
삶이다.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담아내는
삶의 기쁨이다.
담아내는
책임감있는
삶이다.
새 포도주
새 부대도
모두
새 삶을
지향한다.
삶이 변화되는
노력이 참된
노력이고
참된 부대이다.
우리의
마음이
새로워지길
기도드린다.
복음은
온통
새로워지는
마음의
잔치이다.
새로워지는
기쁨이
찬미이고
기도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맺은 계약을 어떻게 완성하시는지 들려 주십니다.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루카 5,33)
이번에는 단식 논쟁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끊임없이 자기들의 관습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비교해서 허점을 찾아내고 있습니다.
제도적 전통적 실천 면에서 다소 차이가 있었을지는 몰라도 실제로 예수님 일행이 먹고 마시기만 했을 리는 없겠지요. 이런 과장과 왜곡 안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 심저에 피어나는 분노와 조바심이 읽힙니다. 그들은 지켜 오던 것이 그저 안전하게 계속 지켜지고 또 잘 수호되어 전해지기를 바라며 그 역할에 자처하고 있습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루카 5,34)
예수님은 지금 당신께서 피조물 한가운데서 함께 하시는 이 순간을 혼인 잔치에 비유하십니다. 언젠가 세상 구원의 날이 오면, 모든 인류가 하느님 나라에서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영원하고 완전한 일치를 이루게 될 그 기쁨을 인류는 지금 앞당겨 맛보고 있는 것이지요. 다만 아직 아무도 그 사실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루카 5,38-39)
예수님은 헌 옷과 새 옷,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의 비유로 아버지께서 이 세상에서 이루실 결정적 구원 계획을 계시하시지만, 이 역시 모두가 다 알아듣는 건 아닌 듯합니다.
이 말씀에 묻어나는 예수님 목소리 톤에 가만히 머물러 봅니다. 분노나 질책, 실망의 세기가 아니라 어떤 미세한 아쉬움의 진동이 느껴집니다. 예수님은 묵은 포도주(옛 계약)에 깊이깊이 심취한 이들이 새 포도주(새 계약)에 맛을 들이기가 참 어렵다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계십니다.
선택은 강제할 수 없습니다. 강요한다면 선택이 아니니까요. 또 새로움을 거부하는 이들에게서 옛 것을 빼앗아서도 안 됩니다. 구원은 하느님의 사랑의 의지와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이 함께 이루어내는 합작품이니까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볼멘 소리를 들으시는 예수님의 마음에는 안타까움이 가득했을 겁니다.
제1독서에서는 참으로 아름다운 그리스도 찬가가 울려퍼집니다.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콜로 1,16)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만물에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콜로 1,16)
모든 피조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통해서 창조되었기에 본성적으로 그분을 향합니다. 비록 옛 포도주의 향기와 맛이 더 익숙하더라도, 예수님이 옛 계약의 주체이신 하느님과 같으신 분, 아버지께서 보내신 분이고 또 만물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구원의 순리에 마음을 열면 자연스레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지요.
"그분은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콜로 1,20)
예수님께서 계약을 완성하신 방법은 "화해"입니다. 그것도 "기꺼이" 그렇게 하셨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희생 제사로 하늘과 땅, 유다인과 이방인, 구약과 신약, 율법과 성령이 하나를 이루어 완전한 구원으로 나아갑니다.
어쩌면 신랑과 함께 있는 혼인 잔치의 때는 옛 것과 새 것을 구분하고 따지고 공격하고 등질 때가 아니라, 열렬히 다가가고 뜨겁게 일치하고 새로운 통합을 잉태하여 낳는 화해의 때인 것이지요. "(그런데도) 묵은 것이 좋다."는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안타까움이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인지도 모릅니다.
내면에 낡고 굳어버린 부분이 게으름이나 두려움 때문에 행여 멈추어 있다면, 성령의 열기로 녹여 새로운 포도주로 빚어 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사실 구원의 역사 안에서 그 어느 것도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까요.
흘러간 것이든, 현재 마주한 것이든, 앞으로 다가올 것이든 우리는 그 무엇을 통해서도 그리스도를 향하게 되어 있답니다. 예수님 안에서 이 모두가 화해를 이루는 날, 우리는 정말로 진하게 그분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 아멘.

<우상이 아닌 모상들>
-김찬선신부-
오늘 우리가 듣는 콜로새서는 그 유명한 <그리스도 찬가>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말해 주는데 여기서 그리스도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는 하느님의 모상이시고,
피조물과의 관계에서는 모든 피조물의 맏이,
교회의 머리, 만물의 으뜸이라고 얘기됩니다.
우선 "그리스도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십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모상이라고 함은 볼 수 없는 하느님을
볼 수 있게 하는 모상이라는 뜻이며
우상이 아니라 모상이라는 뜻입니다.
우상은 하느님을 가리거나 오인하게 하는 것이라면
모상은 하느님을 가리키고 제대로 알게 하는 존재지요.
인간으로 치면 성인 그중에서도 세례자 요한인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지 않고 가리켰으며,
자신은 말씀이신 주님의 소리라고 자신을 자리 매김하고,
자기는 그분의 신발끈을 맬 자격조차 없을 정도로 그분은 크셔야 하고,
커지시는 만큼 자기는 작아져야 한다고 하며 주님을 옳게 증언하였지요.
그런데 우리 교리는 세례자 요한 뿐 아니라
사람은 모두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이라고 합니다.
원래는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말씀인데
그러나 실제의 경우 어떤 사람은 그러니까 천사와 성인과 같은 사람은
그 사람을 통해서 하느님을 보게 되지만 어떤 사람은
악마와 같아 그 사람을 통해서는 하느님을 도무지 떠올릴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통해서'라는 말을 돋을새김을 하게 됩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창조되었고",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고, 그분을 통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다."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라고 기도를 마무리하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과 우리 인간 사이를 잇는 길이요 중재자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모상이자 중재이신 것처럼
우리도 진정 하느님의 모상답기만 하면 이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인간 사이의 중재자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와 인간 사이의 중재자인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천지 창조 이전에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이고,
그리스도는 우리의 머리이시고 우리는 그분 몸의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이라면
몸에서 잘려 나가지 않는 한 다시 말해서
포도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인 한 우리는 한 몸 안에서
서로 연결되고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연결되기 마련이지요.
이것은 마치 모세 혈관이 대동맥/대정맥을 통해 심장과 연결되는 것과
같고 그래서 손 끝의 피가 머리까지 도달하는 것과 같습니다.
단, 모세 혈관이 대동맥/대정맥과 연결되어 있고 끊어져 있지만 않다면.
그러므로 오늘 그리스도 찬가를 깊이 묵상한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되어
전능하신 천주 성부 모든 영예와 영광을 영원히 받으소서"라는 소영광송을
매일 미사에서 바칠 때마다 그리스도론적인 찬미를 하느님께 드립시다.
그리고 한 몸을 이루는 같은 지체들끼리 그리스도 안에서 연대와 연합을
이루어야 함을 오늘 그리스도 찬가를 묵상하며 다시 한번 마음에 새깁시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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