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4일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사람의 아들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다.”
(루가 6:1.5)
“Why are you doing what is unlawful on the sabbath?”
“The Son of Man is lord of the sabbath.”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바오로 사도는 율법을 엄격히 지키는 바리사이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사도 22,3; 26,5 참조). 그러나 다마스쿠스 사건을 체험한 뒤(사도 9,1-19 참조) 그는 자신이 받은 모든 종교적 특권과 윤리적 노력이 하찮다고 말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율법이 다만 옛것이기에 버린 것이 아닙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하느님의 계명과 율법을 자신들의 위선으로 왜곡하여 하느님께 가는 구원의 길을 막았고 그들의 행동은 ‘육적인 것에 대한 신뢰’, ‘물질적인 것에 대한 믿음’에서 나왔으므로 하느님 계명의 본질적인 의미와 전혀 상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은 것”(갈라 1,12)이기에 복음을 전하고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을 통하여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안식일 법을 어겼다며 예수님과 제자들을 비난합니다.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는 것이 율법을 어기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참된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안식일 법도 중요하고, 그 정신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손수 만드신 ‘우리’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몸소 오시어 구원하시고자 한 대상인, 바로 우리 ‘사람’인 것입니다.
혹시 사람보다 일을, 돈을, 명예를 그리고 또 다른 세상의 어떤 것을 주인으로 섬기고 있지는 않나요?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곧 사라져 버릴 것에 믿음을 두지 말고, 영원하신 하느님 그리고 그분께서 만드신 우리 주변의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며 살아야 합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갑곶성지에 살다 보면 ‘죽음’과 가까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지 안에 봉안당이 있어서, 거의 매일 안치되는 고인을 위한 안치 예식을 진행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더 가까이에서 생각하게 됩니다.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언젠가 죽을 것이 확실하지만, 그때가 언제인지 명확하게 알지 못하기에 늘 불안한 미래로 바라보는 우리입니다.
우선 이 세상 안에서 나의 시간은 얼마나 남아 있을까요? 많이 남든, 얼마 남지 않든 이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미래에 대해 불안함을 품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만 계속해서 생각하면 오늘이란 하루가 공허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공허한 오늘을 만들지 않으려면 미래를 오늘과 철저하게 분리해야 합니다.
미래는 행복으로 가득 찬, 희망의 미래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미래가 없을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분명히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희망이 있습니다. 이 하느님 나라라는 미래를 살기 위해서는 지금을 잘 살아야 합니다. 부정적 생각을 버리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지금을 살아야 합니다. 주저하고 전전긍긍하는 모습으로 미래를 바라봐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 몇 사람과의 안식일 논쟁은 앞으로 이루어질 모든 안식일 논쟁의 첫 번째였습니다. 아직 예수님을 향해 적대적이지 않았을 때 벌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어서 안식일 법을 위반했다고 보는 것은 억지가 아니라, 당시에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편협된 사고를 하면서 안식일을 만드신 하느님을 속 좁으신 분으로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있었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너무나 존경하는 다윗 왕의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다윗 왕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서 사제가 아니면 아무도 먹어서 안 되는 제사 빵을 집어서 먹고 자기 일행에게도 주었습니다.
율법에 분명하게 어긋나는 행동이었지만, 다윗을 사랑했던 하느님은 이를 잘못되었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사람들도 이런 그의 행동을 참성자요 예언자로 행동했기 때문에, 옳고 바르며 칭송받을 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물며 성자이신 예수님은 어떨까요?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 안에 하느님 나라라는 미래를 계속해서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반드시 희망을 두어야 하는 미래, 또 우리가 반드시 가야 할 미래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부정적인 생각으로 그 미래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임을 선포하십니다. 즉, 종이 주인의 말을 철저하게 듣고 따르듯이, 주님의 말을 믿고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희망찬 미래가 펼쳐집니다.


약속 장소에 늦게 도착했습니다. 이때 어떤 말을 해야 할까요? 대부분 “미안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상대방은 이 사과가 그렇게 기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히려 지난 약속에도 늦은 것이 기억나면서 ‘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떤 말이 효과적이고 기다린 사람에게 기쁨도 가져다줄 수 있을까요? 다음의 말이 최고의 정답이라고 합니다.
“기다려줘서 고마워.”
감사의 표시입니다. 이 감사의 말을 들은 사람은 자신이 상대에게 했던 공헌감을 느끼면서, 먼저 나와 기다린 것이 결코 시간 낭비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다고 합니다.
감사의 인사는 그냥 인사치레가 아닙니다. 상대를 존중하는 것이며, 상대의 말과 행동에 큰 의미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주님께도 감사의 기도를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주님을 존중하기에 또 주님의 일에 큰 의미가 있기에 당연히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세 부류: 바리사이-율법학자-제자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도 어제의 복음과 맥락을 같이합니다. 어제 복음은 단식에 대한 원칙주의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율법만 잘 지키면 되는 줄 압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안식일 법에 관해 물고 늘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일에 남의 밭에서 밀이삭을 훔쳐 먹은 당신의 제자들을 두둔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이 말은 크게 두 의미로 해석해 볼 수 있겠는데, 예수님은 모든 율법의 주인이시기에 율법을 지배하는 분이시지, 그것에 매이는 분이 아니라는 것과 율법을 그 주인을 위해 지킨다면 그것이 바로 참다운 안식이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가 예수님의 제자들과 대치되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이 세 부류 모두 율법에 충실해지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율법을 지켜 안식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당신 제자들뿐이라고 하십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먼저 바리사이는 율법적인 ‘행위’에 집중하는 이들입니다.
외적으로 드러나는 율법의 행위가 자신이라고 여기는 이들입니다. 남들에게 그렇게 보이면 그리스도인이라 믿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남들의 시선과 평가에 집중합니다. 이들은 ‘위선자’라 불립니다.
그다음 율법학자는 ‘원칙주의자’입니다.
자신의 위치에서 꼭 해야 하는 의무만 철저히 수행하면 된다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율법 조항에 집중’합니다. 그러나 독선적일 수 있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율법에 어긋나는 삶을 살지 않지만, 자신처럼 살지 않는 타인을 심판합니다. 물론 바리사이도 그렇습니다. 그렇게 참다운 율법의 정신을 잃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제자들’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뜻에 집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머물며 그리스도께서 허락하시는 것은 하고 허락하지 않는 것은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볼 때 이 부류의 사람들은 너무 자유분방하고 제멋대로라 예측 불가입니다. 심지어는 율법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진정 마음의 안식을 누리는 이들입니다.
이제 소설 하나를 소개시켜 드릴 텐데 누가 바리사이고 누가 율법학자이며 누가 주님의 제자인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너대니얼 호손’의 『주홍글씨』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여주인공 헤스터 프린은 아버지의 강요로 돈도 많고 나이도 많은 의사 칠링워드와 결혼합니다. 헤스터는 남편의 권유로 먼저 영국을 떠나 미국 보스턴의 한 작은 마을에 도착합니다. 그러나 곧 뒤따라오겠다던 남편이 세월이 꽤 흘러도 오지 않자 그 마을의 인기 있는 목사인 딤스데일과 불륜을 맺고 딸 펄을 낳습니다.
남편이 없는 여자가 아기를 낳자 동네 사람들은 그녀의 가슴에 붉은 ‘A’를 새기고 3시간 동안 교수대 위에서 딸을 안고 만인의 구경거리가 되게 합니다. ‘A’는 ‘간통’을 의미하는 ‘Adultery’의 약자입니다. 그 마을에 사는 동안 그녀는 항상 가슴에 붉은 ‘A’를 붙이고 다녀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절대 자기 불륜의 상대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A’를 ‘Able’(능력 있는)로 읽을 정도로 뛰어난 바느질 솜씨로 돈을 벌어가며 딸 펄을 잘 키웁니다.
그러던 중 헤스터의 남편 칠링워드가 도착합니다. 하지만 아무도 칠링워드가 헤스터의 남편인 줄 모릅니다. 칠링워드는 헤스터의 불륜을 파헤쳐 결국엔 그 상대가 존경받는 딤스데일임을 알아냅니다. 그리고 그를 끊임없이 괴롭힙니다. 스스로 사람들 앞에서 죄를 고백하기 전까지 그는 그 괴롭힘을 끝내지 않을 것이라 말합니다. 그 말에 딤스데일은 속이 썩어들어갑니다.
7년이 지난 뒤 헤스터는 딤스데일에게 함께 도망치자는 제안을 합니다. 그러나 딤스데일은 이미 죄책감에 속이 문드러져서 육신까지도 망가졌습니다. 죽음을 직감한 딤스데일은 헤스터가 섰던 그 교수대에 올라 설교를 마치고는 자신이 헤스터의 내연남이었음을 밝히고 죽습니다. 그의 옷 속에도 붉은 ‘A’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 소설에서 바리사이는 누구일까요?
바로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 솔직할 수 없었던 딤스데일 목사입니다. 율법을 어겼지만, 그 책임을 사람들만 모르면 된다고 여겼습니다. 물론 소설에서는 설교 중에 간간이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기는 하지만 오히려 이것이 더 겸손하게 보이게 만들어 인기를 더 얻게 됩니다. 남이 볼 수 있는 행위에만 치중하는 이는 절대 마음의 안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또 딤스데일이 마지막에 자신의 죄를 사람들 앞에 고백하기는 하지만 그 이전에는 자신의 명성에 흠이 가지 않게 하려고 주홍글씨를 헤스터만 달고 살게 만듭니다. 이것이 바리사이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바리사이는 솔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시선이 가장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소설에서 율법학자는 누구일까요? 헤스터의 남편인 칠링워드입니다.
그는 자신의 아내와 목사인 딤스데일의 불륜관계를 알아채고는 목사를 계속 괴롭힙니다. 그래서 그가 죄책감으로 쓰러지게 만듭니다.
그는 원칙주의자이기 때문에 원칙에 어긋나는 것은 봐 줄 수 없고 그래서 주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자기가 정의를 실현하려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은 아내와 딤스데일을 용서하고 다시 잘 살아나가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제자는 헤스터일 수 있습니다. 이미 벌어진 일이고 딸을 잘 키워야 했기에 그녀는 죄인이라는 명패를 가슴에 달고 열심히 일하여 현 상황에서의 최선을 찾습니다.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은 지금 이 상황에서의 최선은 남에게 잘 보이는 것이고 원칙을 바꾸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상황에 발 빠르게 자신을 적응시키지 못합니다.
헤스터와 같이 지금, 이 순간 주님의 뜻을 찾는 사람이 참 주님의 종입니다.
성당에서도 이런 세 부류의 신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신부님이 볼 때만 열심히 봉사하는 척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행동이 달라지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 사람은 어느 부류에 속할까요? 당연히 바리사이입니다. 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한 목적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반면 누가 보든 말든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문제는 융통성이 없습니다. 자신처럼 하지 않는 사람들을 비판합니다. 그렇게 열심히 함으로써 자신이 타인들보다 더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 믿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율법학자입니다.
성모 마리아처럼 본인이 죄인으로 찍힐 것을 알면서도 바로 그 순간 해야 할 일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율법이고 뭐고 없습니다. 율법의 주인은 하느님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몸 – 이성 – 마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몸에 집중하는 사람은 바리사이입니다. 사람은 몸이 다인 줄로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의 시선에 집중하는 삶을 삽니다.
이성에 집중하는 사람들은 자기 생각을 믿습니다. 이들이 율법주의자입니다. 율법을 신봉하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자신에게 잘 보이려는 행위입니다.
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뜻’에 집중합니다. 뜻은 행위의 의도와 목적에 해당하는데
그 행위가 누구의 뜻, 누구를 위한 것인지에 집중합니다.
아무리 선한 행위를 했더라도 그것이 자기를 위한 것이거나 혹은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일 때 그런 행위는 하느님께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를 당신 자녀로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만약 어떤 아이가 공부를 참 잘하고 왔을 때, 선생님에게 잘 보이기 위해 공부를 했다고 하거나, 그냥 자기만족을 위해 공부했다고 하면 아버지 마음은 어떨까요?
기껏 먹여주고 키워주었더니 자기만 알고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만 한다면 계속 잘해주고 싶은 마음은 별로 안 생길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신에게 보답하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할 때 자녀가 사랑스럽습니다.
바리사이는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신앙 생활하는 사람과 같고,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은 율법학자요 원칙주의자이며, 아버지를 위해 공부한 아이는 주님의 종이요 제자입니다.
매 순간 주님의 뜻을 찾고 순종하는 자세가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가 누구도 판단하면 안 되겠지만 굳이 판단해야 할 경우가 생긴다면 이 세 기준으로 하면 됩니다.

-조재형신부-
인터넷을 보면 실시간으로 알려주는 것들이 있습니다. 일기예보가 있습니다. 주식정보가 있습니다. 작년부터 전 세계 코로나 현황을 보고 있습니다. 9월 3일 현재 상황은 이렇습니다. 220,129,238 명은 확진자입니다. 4,559,948 명은 사망자입니다. 195,049,002 명은 완치자입니다. 미국은 40,513,018명의 확진자가 있습니다. 662,853 명의 사망자가 있습니다. 31,199,835 명의 완치자가 있습니다. 한국은 257,110 명의 확진자가 있습니다. 2,308 명의 사망자가 있습니다. 228,618 명의 완치자가 있습니다. 한국은 실시간으로 백신 접종현황도 알려주고 있습니다. 9월 3일 현재 상황은 이렇습니다. 29,644,464 명은 1회 접종자입니다. 16,783,832 명은 2회까지 접종받은 사람입니다. 교황님께서 이야기한 것처럼 가난한 지역의 사람들에게도 백신의 접종이 이루어지면 좋겠습니다. 치료제가 개발되어 중증의 환자들이 건강을 회복하면 좋겠습니다.
안치환의 노래 중에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가 있습니다. 가사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꿈을 꾸다 밤이 깊을수록/ 말없이 서로를 쓰다듬으며/ 부둥켜안은 채 느긋하게/ 정들어 가는지를/ 지독한 외로움에 쩔쩔매본/ 사람은 알게 되지/ 그 슬픔에 굴하지 않고/ 비켜서지 않으며/ 어느 결에 반짝이는 꽃눈을 닫고/ 우렁우렁 잎들을 키우는/ 사랑이야말로/ 짙푸른 숲이 되고 산이 되어/ 메아리로 남는다는 것을/ 누가 뭐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이 모든 외로움 이겨낸/ 바로 그 사람/ 누가 뭐래도 그대는/ 꽃보다 아름다워” 시인 박노해는 ‘사람만이 희망이다.’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시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사람만이 희망이다/ 희망찬 사람은/ 그 자신이 희망이다./ 길 찾는 사람은/ 그 자신이 샛길이다/ 참 좋은 사람은/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 사람 속에 들어 있다/ 사람에서 시작 된다/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사람만이 희망인 것은 어째서일까요?
저는 사람은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면서 ‘숨’을 넣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숨을 받아서 바른 길을 갈 수 있는 종교를 만들었습니다. 아름다운 꽃을 그리며,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며,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우리는 가련한 이를 측은하게 여깁니다. 잘못한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옳고 그른 것을 식별합니다. 겸손하게 고개를 숙입니다.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벗어나 잘못된 길을 갈지라도 뉘우치고 하느님께 돌아가면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받아주신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다윗의 잘못을 용서하셨습니다. 다윗이 뉘우쳤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니네베 사람들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들이 회개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회개의 눈물을 흘린 베드로를 용서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뉘우치는 우리를 사랑으로 받아주시기에 비록 허물이 있을지라도, 비록 잘못하였을지라도 사람은 꽃보다 아름답습니다.
우리에게 벌어진 일들이 우리들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를 규정하는 법과 질서가 우리들의 주인이 아닙니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역사가 우리들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들 모두는 하느님을 닮은 소중한 존재들이고, 결국 이 모든 것들은 내가 마음먹기에 달린 것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에 기초를 두고 꿋꿋하게 견디어 내며 여러분이 들은 복음의 희망을 저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 복음은 하늘 아래 모든 피조물에게 선포되었고, 나 바오로는 그 복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진정한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며 율법을 바라봐야 합니다!
-양승국신부-
미풍이 불어오는 어느 봄날, 안식일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 파릇파릇한 밀밭 사이를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구원자 예수님의 동역자로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은 의기양양·사기충천한 얼굴로 씩씩하게 밀밭 사이를 걸어갔습니다.
그러나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큰 뜻을 품은 제자들이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뱃속에서 흘러나오는 ‘꼬로록’ 소리를 감출 수는 없었습니다. 자연스레 제자들의 눈길은 이제 막 열리기 시작한 부드러운 밀 이삭으로 향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덜 여문 부드러운 밀알은 비벼서 날 것으로 먹기도 했었습니다. 제자들의 손이 자기도 모르게 밀 이삭을 훑어 입으로 가져갔던 것입니다. 사실 신명기에 따르면, 굶주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웃의 밭에 들어가 밀 이삭을 자르는 것을 허용하고 있었습니다.
“너희가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경우, 손으로 이삭을 자를 수는 있지만 이웃의 곡식에 낫을 대서는 안 된다.”(신명기 23장 26절)
그러나 그날은 안식일! 바리사이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습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루카 복음 6장 2절)
바리사이들의 외침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침소봉대’(針小棒大)였습니다. 말마디 그대로, 바늘을 몽둥이라고 과장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본격적인 추수 행위나 노동 행위도 아니고, 지나가며 밀 이삭 한두 가지 잘라 먹은 것을 가지고 안식일 규정 운운하니, 참으로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쫀쫀하고 천박하기 이루 말할 데 없는 바리사이들 앞에 예수님의 지혜가 돋보입니다. 사무엘 상권 21장 1~7절을 인용하며 다윗과 그 일행이 겪은 사건을 소개하십니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한 일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아무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집어서 먹고 자기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루카 복음 6장 3~4절)
이스라엘 성전 성소에는 봉헌된 열두 개의 빵이 하느님께 바친 제물로서 일주일 동안 접시에 놓여 있었습니다. 일주일이 지나면 사제들만이 그 빵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과 그의 일행은 빵을 먹었습니다. 그들은 당시 굶주렸고 다른 빵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에게 빵을 준 사제 아히멜렉도, 율법학자들도, 성경조차도 다윗과 일행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필요에 따라 율법은 유연성 있게 적용될 수 있고, 예외적인 상황 앞에서는 면제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안식일 규정을 비롯한 제반 율법을 해석할 때는 자구 하나 하나에 연연할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며 율법을 바라봐야 합니다. 한 인간 존재가 처하고 있는 구체적인 현실을 고려하며 율법을 적용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 율법의 주인은, 안식일 제정의 원천은 바로 사람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 복음 6장 5절)

사랑을 막을 수는 없다
-반영억신부-
간혹 신자 분들이 ‘미사참례를 어디부터 해야 영성체를 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글쎄요? 병자 봉성체를 하게 되면 전례문은 짧지만 참회와 복음말씀 듣기, 그리고 주님의 기도 후 영성체 예식을 합니다. 준비된 마음으로 영성체를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주님을 모시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미사참례를 하러 왔는데 시간을 잘못 알고 온 거예요. 벌써 신부님 강론도 끝나고… 주님은 모시고 싶고…어쩌면 좋을까? 주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고 싶어서 준비하고 왔건만 …무슨 답을 원하십니까? 여러분 가슴 안에 답이 있습니다.
법은 함부로 어겨서는 안 됩니다. 법은 “공동선을 지향하면서 반포한 이성의 명령”(성 토마스 아퀴나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해하거나 억압을 할 경우는 어길 수 있습니다. 그래야 법의 의미를 지킬 수 있고 사람도 살기 때문입니다. 법의 자구에 매여 있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법의 해석방법을,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6,5).하시며 확실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로부터 모든 권한을 부여 받은 “사람의 아들”이십니다. 안식일의 휴식 규정과 해석에 관한 결정권을 지니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입니다(마태12,5-7). 자비를 거스르는 법은 어길 수밖에 없습니다.
안식일에 생명을 구해야 하는가? 아니면 파괴해야 하는가? 그 누구도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죽이는 것을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법의 자구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사람을 못살게 구는 법을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규정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사실 “우리는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되려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갈라2,16). 그리고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로마13,8). 그 어떤 법도 사랑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법을 무시해서도 안 되겠지만 법규에 옭아 매여 사랑하기를 멈춰서도 안 됩니다. 미사에 참례하시면 정성껏 준비하여 예수님을 믿음으로 모시기 바랍니다. "글자에 매인 학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거스르면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판단합니다. 그들은 예언적 말씀에 마음을 닫아걸고 다른 사람들의 삶은 중요하지 않으며 단지 말과 규율로 이루어진 그들의 틀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단식 논쟁 - 새것과 헌 것>
-송영진신부-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루카 5,33-35)”
여기서 예수님 말씀의 뜻은, “이미 메시아께서 오셨기 때문에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회개하는 단식은 할 필요가 없다.
지금은 메시아와 함께 기뻐할 때이다. 그러나 메시아를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회개의 단식을 하게 될 것이다.”입니다.
당시에 바리사이들의 단식은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기도의 한 방식이었고,
회개하면서 메시아를 기다리는 ‘슬픔의 단식’이었습니다.
그런데 메시아 예수님께서 이미 오셔서 복음을 선포하셨고,
사람들을 구원하는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따라서 바리사이들이 하는 것과 같은 단식은 더 이상 할 필요가 없게 되었고,
예수님과 함께 기뻐하는 생활을 하면 됩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의 단식에 대해서는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그들의 단식은 어떤 의미였을까?
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증언했는데,
그의 제자들은 요한의 증언을 알아듣지 못했을까? 아니면 그 증언을 거부했을까?
당시에 요한이 적극적으로 제자들을 모아서 가르친 것 같지는 않고,
요한을 예언자로 믿는 사람들이
마치 요한의 제자가 된 것처럼 그를 따라다녔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실제로 그랬다면 ‘제자들’이 아니라 ‘추종자들’입니다.)
안드레아 사도처럼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다가 요한의 증언을 듣고서
예수님을 따라가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도 있지만(요한 1,40),
그 수는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요한의 추종자들, 또는 제자들은 요한의 증언을 알아듣지 못하고,
자기들이 전부터 했던 방식대로(바리사이들의 방식대로)
메시아를 기다리는 단식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신랑을 빼앗길 날’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제자들에게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라고 물으셨을 때,
그들이 바로 먹을 것을 드린 것을 생각하면(루카 24,41-42),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때에 제자들이 단식을 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그때는 제자들이 그런 것을 생각할 틈도 없을 정도로
급박한 상황이어서 그랬을 것입니다.
(너무 놀라고 두려워서 제대로 음식을 먹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과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성금요일에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면서,
또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기 위해서 단식을 합니다.
(오늘날에는 우리가 신랑을 빼앗길 일은 없는데,
우리 스스로 신랑을 떠나는 일은 많습니다.
한 눈 팔다가, 딴 생각 하다가, 또는 죄를 지어서 그렇게 되는데,
그럴 때에 신랑이신 예수님에게로 돌아가기 위한 ‘회개의 단식’을 합니다.)
“아무도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만 아니라, 새 옷에서 찢어 낸 조각이
헌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루카 5,36-39).”
1) 이 말씀을 앞의 ‘단식에 관한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할 수도 있고,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연결해서 생각하면 이 말씀은,
메시아께서 언제 오실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슬픔 속에서 하염없이
기다리지 말고, ‘이미 오신’ 메시아와 함께 기뻐하는 생활을 하라는
가르침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기쁨의 종교’입니다.
‘마리아의 노래’의 첫 구절,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루카 1,46-47)”에
나오는 그 ‘기쁨’이 그리스도교의 기본 정신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있고,
메시아의 구원을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
(혹시라도 신앙생활에 기쁨이 없다면,
그것은 ‘삶’의 무엇인가가 고장 난 상태라는 뜻입니다.
고장 난 것을 고치려면 고해성사를 보아야 합니다.
영적 상담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2) ‘단식에 관한 말씀’과 따로 떼어서 생각하면,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라는 말씀은,
“옳지 않은 버리고 옳은 것만 지켜야 한다.” 라는 가르침입니다.
무조건 오래 된 것을 새것으로 바꾸라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계명들은 대단히 오래된 것이지만,
결코 ‘낡은 것’도 아니고, ‘헌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계명들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마태 5,18).
<우리를 멸망으로 이끄는 이단 사상들이나 세속의 풍조들은 언제나
새롭다는 것을 내세우면서 우리에게 접근하고 우리를 현혹시킵니다.
그 ‘새롭다는 점’에 홀려서 신앙을 잃는 경우가 실제로 많습니다.
(공산주의 사상도 그랬었고, 뉴에이지 사상도 그렇습니다.
요즘에는 이상한 사이비 심리학 이론을 동원해서
마치 대단한 영성 프로그램인 것처럼 가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들은 인간의 시간으로는 이천 여 년 전의 것이지만,
인간의 시간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시간으로는
언제나 우리를 ‘새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에페 4,24) ‘새 포도주’입니다.
우리가 그 가르침대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는 일입니다.>

복음: 루카 6,1-5: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
-조욱현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안식일을 잘못 알고 있음을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율법의 안식일이 아닌 은총의 안식일, 영원한 부활의 안식일을 주시는 분이시다. 바리사이들은 예수께서 처신하시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을 비난해 왔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밀밭을 지날 때 일어난 일을 전하고 있다.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다.”(1절)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2절) 주님께서는 율법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고 또 그렇게 훈련을 시키셨다. 그래서 제자들은 주님께서 율법을 어기셔도 놀라지 않았다. 그리고는 안식일에도 사람을 구원하시는 일에는 서슴없이 하시는 것을 늘 보았기 때문이다. 그분은 안식일에도 병자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고쳐주셨다.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데리고 가셨다는 것은 그들을 풍성하게 익은 곡식들 사이로 데리고 가시는 것이다. 안식일과 풍성한 결실을 본 이삭은 큰 신비를 의미한다. 땅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았고, 하늘 씨가 뿌려진 밭은 풍성한 결실을 보았다. 인간 구원에 굶주린 제자들이 놀라운 활동으로 밀 껍질을 벗기고 알곡을 거두듯이, 그 몸에서 믿음의 빛을 향한 마음의 열매를 거둔 것이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되는 줄 알았지만, 예수께서는 새로운 은총의 선물을 주셔서 율법의 나태를 은총의 수고로 바꾸셨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1사무 21,1-6을 인용하여 이에 대해 응답을 하신다. 그 내용은 다윗과 그 일행이 보통 사람들은 먹을 수 없는 지성소의 떡을 먹었지만, 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죄가 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다윗과 그 일행의 배고픈 상황은 율법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며, 그 관례에 매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율법의 준수보다도 현실적으로 더 절박한 인간적 요구를 채워주는 것이 우선이다. 인간이 있고 나서의 율법이지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율법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율법 때문에 정상적인 인간의 필요가 희생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율법 그 자체를 지킴으로써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고 하기보다, 그 율법에 담겨있는 근본정신을 잘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 율법의 근본정신은 우선 인간을 위한 사랑이 담겨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 양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양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다고 하자. 그러면 그것을 잡아 끌어내지 않겠느냐?”(마태 12,11)라고 책망하시면서 인간을 무시한 율법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지키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즉 법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안식일이 있고 율법이 있다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이 이미 “안식일의 주인이다.”(5절) 하신다. 율법의 근본정신을 올바로 실천하는 우리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 6, 5)
-한상우신부-
사람의 아들은
사람을
살리신다.
삶의 문제는
놓쳐버린
정체성의
문제이다.
사람은
사랑을
먹고 사는
사랑의
존재이다.
사람을
사랑하지
않기에
수 많은
안식일의
율법조항이
마구 생겨난다.
사랑을
모르는 것은
사람을
모르는 것이다.
가장 바른 길은
생명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길이다.
하느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우리가
따라야 할
참된 진리이다.
참된 사랑만이
참된 열매를
맺는다.
안식일을
치유하시는
사람의
아들이신
주님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버리지
않으신다.
안식일은
구원을 향해
언제나
열려있어야 한다.
건강한
안식일의 삶이
간절히 필요한
우리들 삶이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사랑이 핵심이다.
사람의 기쁨이
안식일의
진정한 기쁨이다.
사람의
아들에게서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는 사랑의
시간이다.
안식일은
나자신과
이웃에게
참된 사랑을
실천하는 날이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사람은
규정과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다.
사랑의 주인이신
주님이시다.
사랑이
복음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인"이 어떤 존재인지 알려 주십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루카 6,2)
바리사이들이 묻습니다. 이번에는 안식일 논쟁입니다. 그런데 묻는 대상이 "당신의 제자들은~~?"이 아니라 "당신들은~~?"입니다. 이 경우에는 제자들과 예수님을 구분하지 않고 하나로 뭉뚱그려 덫을 놓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사실 무언가 알고 싶어 묻는 질문이 아니라 추궁과 공격의 의미가 더 큽니다. 바리사이들은 밀 이삭을 뜯어서 손으로 비벼 먹는 제자들의 행위를 추수에 준하는 노동으로 간주하고 안식일 법을 들이댑니다. 어떤 사실을 자기들의 의도에 맞춰 과장하고 왜곡하고 곡해하는 겁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 6,5)
예수님은 다윗이 했던 일을 예로 들어 그것이 하느님의 일이거나 인간의 기본적인 생명 유지를 위해서라면 이해와 사랑이 먼저임을 밝히십니다. 율법을 함부로 어겨도 무방한 사람은 없지만, 굳이 율법을 끄집어낼 필요가 없는 상황도 있는 법입니다.
"안식일의 주인"
안식일은 모든 이에게 평등히 쉼을 제공하는 날입니다. 하느님은 안식일을 통해 종들과 이방인, 짐승, 땅에게까지도 쉴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셨지요. 안식일법은 유한함을 운명처럼 안고 사는 모든 피조물의 생명을 증진하고 더욱 풍요롭게 해 주는 필수적인 회복 장치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계급 사회에서 "주인"은 자기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해 타인을 착취하고 목숨까지 사유화하기도 했지만, 그건 하느님의 시선에서 가장 주인답지 못한 모습이었습니다. 혹여 "주인"의 권리를 그렇게 쓰면서 그걸 당연히 여기는 이가 있다면, 그는 하느님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고 악을 주인으로 섬기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하느님의 "주인다움"은 어떤 의미일지 제1독서에 잘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그분의 육체로 여러분과 화해하시어, 여러분이 거룩하고 흠 없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콜로 1,22)
하느님은 "죽음"으로 주인의 최대 권리를 행사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사랑 때문에 목숨을 던지는 주인이지, 타인의 죽음을 양분 삼아 부와 권력을 쌓는 주인이 아닙니다.
원죄에 물들어 악의 어둠에 짓눌린 인류는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로 다시 거룩하고 흠 없고 나무랄 데 없는 모습, 즉 하느님의 모상성을 온전히 회복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주인이심을 말씀과 행위로 당당히 밝히십니다. 주인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종의 종이니까요. 그분 생애가 시작부터 마침까지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 일행의 범법을 찾아내려 핏대를 올리던 바리사이들 중에 단 한 번이라도 하느님의 이러한 주인다움을 실천해 본 이가 있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공감하며 이해했을 겁니다. 복음 안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그럴 가능성도 없지 않으리라 희망을 가져 봅니다.
"주님은 내 생명을 떠받치는 분이시다."(화답송)
시편 작가는 안식일의 주인, 생명의 주인이신 분께서 죽음으로 우리의 생명을 떠받치고 계시다고 노래합니다. 우리는 주인이신 예수님의 생명을 먹고 나날이 생기를 얻어 누리는 행복한 종들입니다.
관습과 규범, 전통에 앞서 사랑을 우선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께서 "내가 막아 줄게." "내가 책임질게" 하며 부족하고 죄인인 우리를 떠받쳐 주고 계시니, 우리도 용기를 내고 사랑을 다해 그분을 따라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가정과 사회. 공동체 곳곳에서 '진정한 주인다움'을 살고 있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안식일에 해야 할 것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은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내던 제자들이 밀을 뜯어 먹어
안식일 규정을 어긴 것과 관련하여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라고 따지는 것이 발단이 되어 주님께서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씀으로 매듭짓는 내용입니다.
이 복음은 참으로 수없이 읽은 것인데 이번에는
안식에 해서는 안 되는 일만 있는가? 하는 생각에
안식일에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봤습니다.
그래서 모세오경에서 안식일과 관련한 규정들을 모두 조사해봤는데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대부분이고
율법에서 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은 39가지였습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에 하라는 것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한 마디로 안식일은 거룩한 날이니 거룩히 지내라는 것인데
몇 가지 인상적인 규정들을 꼽으면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안식일은 나 주님이 너희를 성별하는 이라는 것을 알게 하려고,
나와 너희 사이에 대대로 세운 표징이다. 그것은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다.
이날에 일을 하는 자는 누구나 제 백성 가운데에서 잘려나갈 것이다."
이 말씀을 제가 이해한 대로 풀이하면
안식일은 거룩한 날인데 왜 이날을 마련했냐 하면
이날을 거룩하게 지내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성별하기 위해서이고,
그래서 이날을 거룩하게 지내는 자는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 속하지만
이날에 일하는 자는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제외돼야 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경우 주일을 어떻게 지내는지 보면
진성 그리스도교 신자인지 무늬만 그리스도교 신자인지 대충 알 수 있지요.
우리 신자들 중 상당수가 주일도 지키지 않고,
주일을 지키는 사람도 주일 미사 빠지지 않는 정도이며
대부분은 거룩한 날이라기보다는 쉬는 날이거나 노는 날입니다.
쉬는데 하느님 안에서 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없이 쉬거나 노는 거지요.
안식일에 해야 할 것을 얘기하는 것 중에 특이한 것은 다음 말씀입니다.
"이날은 너희에게 안식일, 곧 안식의 날이다. 너희는 고행을 해야 한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안식의 날인데 고행을 해야 한다니.
그런데 이 말씀은 레위기 16장 속죄일과 관련한 규정으로서
거룩하신 하느님을 만나러 오면서 아무렇게 와서는 안 되고,
몸과 맘을 깨끗이 씻고, 죄를 씻기 위한 제물도 바쳐야 함을
얘기하면서 고행도 해야 한다는 맥락입니다.
제 생각에 공심재 또는 공복재와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요즘은 영성체 전 적어도 한 시간 아무것도 먹지 않지만,
옛날에는 영성체 전 하루를 아무것도 먹지 않았지요.
거룩한 주님을 모시기 위해 다른 무엇도 먹지 않는 것인데,안식일도
먹고 노는 날이 아니고 거룩한 날이니 욕망을 절제하라는 뜻일 겁니다.
또 다른 말씀은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고,
나의 성소를 경외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안식일 규정과 성소 규정을 떼어서 이 말씀을 이해해도 되지만
저는 오늘, 안식일에 성소를 경외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을 각자의 집에서 또는 혼자 거룩히 지킬 수도 있지만
주일을 성당에서 함께 전례를 하며 지내라는 뜻으로 이해해도 좋을 겁니다.
그리고 요즘처럼 함께 주일 미사를 봉헌할 수 없을 때 집에 가만히 있지
않고 성소를 방문하여 성체 조배나 말씀의 전례를 하며 지낼 수도 있겠지요.
어쨌거나 저는 오늘 안식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 자체가 중요하지 않고
거룩하신 하느님과 성소 안에서 주님 사랑 안에 잠기는 날이 되고,
하느님 사랑 안에서 이웃도 사랑하는 날이 되어야 함을 묵상해 봤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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