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9일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루가 6,27-38)
Be merciful,
just as also your Father is merciful.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우리는 하느님께 얼마나 많은 것을 받았는지 자주 잊고 삽니다. 또한 지극히 단순하게 나만의 하느님이 되어 주십사 청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우리에게 우리는 모두 하나이고 한 공동체이며, 이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손해를 끼치고, 고통이라는 감옥에 가두고 많은 것을 앗아간 원수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씀은 실천하기에 너무 가혹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실은 하느님의 끝없는 자비의 표현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루카 6,36 참조).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가 원수를 미워해서 생기는 더 큰 고통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구원을 받고, 거저 의롭게 되었으며(로마 3,24 참조), 신앙의 신비를 몸소 체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를 사랑함으로써 나 자신의 본모습을 찾아 기쁨 속에서 살아가게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라고 합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소명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선으로 악을 이겨 하느님 사랑 안에서 평화를 누리고 진정 자유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미국은 인종차별이 심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1980년대에는 그 차별이 더 대단했습니다. 심지어 성당도 백인이 다니는 성당, 흑인이 성당으로 따로 있을 정도였습니다.
어느 날 흑인 아주머니가 시내 근교에 있는 결혼식장에 갔다가 근처의 성당에 들어가 주일미사에 참석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성당은 백인이 다니는 성당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백인 신자가 다가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주머니, 이곳은 백인들을 위한 전용 성당입니다. 빨리 나가주시기를 바랍니다.”
쫓겨난 이 흑인 아주머니는 너무나 서러웠습니다. 주님께서도 차별한다는 생각에 펑펑 울었지요. 바로 그때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딸아, 나도 안 가는 그 성당에는 왜 가서 그런 꼴을 당하느냐? 앞으로 다시는 그런 성당에 가지 마라.”
차별하는 사랑이 있는 곳에 과연 하느님이 계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차별을 하시겠다면 2,000년 전 그렇게 낮은 자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하신 그분의 말씀은 “사랑하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고통을 겪으시는 동안에도 당신을 중상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황금률이 크게 와 닿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루카 6,31)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보복하려는 마음을 잠재우고, 이웃에게 자비를 어떻게 베풀 것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보복하는 마음, 차별하는 마음, 사랑 없는 마음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과 함께하겠다고 기도하시는 분은 무엇보다 먼저 나의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를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계실 수 있는 마음일까요? 하느님께서 계실 수 없는 마음일까요?


치매 시어머니를 모시며 간호했던 며느리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장남도 아니었는데도 다른 가족의 부탁과 권유로 시어머니를 모셨다고 합니다. 치매 환자인 어머니와 함께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남들에게 소리를 듣지 않을 정도로 최선을 다해 모셨습니다.
시간이 지나 갑자기 시어머니께서 하늘 나라에 가셨습니다. 조금 더 최선을 다해 모시지 못한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형님 부부가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간호했으면 훨씬 더 잘 모셨을 텐데….”
10년 넘게 어머니를 모시는 동안 가끔 와서 어머니와 대화 좀 나누다가 돌아간 것 외에는 어떤 도움도 주지 않았는데도 이런 말을 하니 너무 서운했습니다.
자신은 옳고 남은 틀렸다는 생각으로는 분쟁이 절대 끝나지 않습니다. 형님 부부의 말도 잘못이지만, 또 자신 역시 형님 부부에 대해 틀렸다고 생각한 것 역시 잘못입니다.
판단 자체의 오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 자체를 인정할 수 있을 때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종교지도자들의 판단 역시 잘못된 판단이었습니다. 이 판단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위선자”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흐르는 물엔 녹조가 끼지 않는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용서에 관한 주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까지 용서하라고 하시며 결국엔 달라는 대로 다 내어주라고 하십니다. 물질적인 내어줌이 미운 사람까지 용서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집착하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다 흘려보낼 줄 아는 사람은 용서도 쉽습니다. 어차피 흘러갈 것이기에 잃어도 많이 고통스럽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그 사람을 용서하려고 하는 데서 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나를 아프게 한 것을 내려놓는 데서 저절로 되는 것입니다. 흐르는 물엔 녹조가 끼지 않습니다. 흐르게 하지 않았기에 미움이 끼게 된 것입니다.
‘존 캘러핸’(1951-2010)은 세상을 풍자하는 만화를 그리는 인물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인생은 세상을 비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아일랜드의 정통 가톨릭에서는 혼외로 태어난 아기를 키우기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존의 어머니는 그를 버렸고 그는 수녀원이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자라 한 가정에 입양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정에서도 그는 그들을 가족이라 여길 수 없었습니다. 양부모가 친자녀를 더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세상을 비꼬는 사람이 되었고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덱스터라는 친구와 술을 진탕 먹고 덱스터가 운전하는 차를 함께 타고 집으로 오던 중이었습니다. 덱스터는 신호등이 출구인 줄 알고 시속 140km로 들이받았고 그 사고로 덱스터는 가벼운 찰과상, 존은 전신 마비가 됩니다. 그 결과 당연히 덱스터는 미안하고 두려운 나머지 존을 찾아오지 못합니다.
재활 중에도 존은 여전히 술을 마십니다. 자신을 막 대하는 사람들을 볼 때도, 이런 상황이 되게 만든 엄마가 생각날 때도, 졸음운전으로 자기를 이렇게 만들어놓고 도망간 덱스터를 생각할 때도, 자기를 물건처럼 다루는 간병인을 볼 때도 술을 찾습니다.
그러던 때 운명처럼 그를 특별한 사람으로 믿어주는 한 여인을 만납니다. 처음엔 병원 자원봉사자로 만났지만, 나중엔 도서관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고 둘은 사랑에 빠집니다. 아누는 비행기 승무원입니다. 아누는 존에게 믿음을 줍니다. 그리고 존은 아누를 잃지 않기 위해 금주 단체에 가입합니다.
그 금주 단체를 이끄는 사람은 도니라는 인물입니다. 둘은 친구가 되어 많은 이야기를 나눕니다. 누구나 다 그렇듯이 존도 자신이 술을 마실 수밖에 없는 처지를 말합니다. 어렸을 때 버려졌고,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했고, 자기를 이렇게 만든 놈은 나타나지도 않고 등등.
그러나 그것을 듣는 사람들의 표정은 그의 말에 동조하지 않습니다. 별거 아닌 것처럼 듣습니다. 그는 자기를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화가 납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합니다. 자기 연민에서 벗어나라고.
도니는 에이즈 환자로 죽을 날이 머지않았고 어떤 사람은 말기 암 환자이며 또 어떤 사람은 그보다 더 어려운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들은 술을 끊기 위해서는 이전의 삶을 흘려보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방법이 ‘용서’입니다. 존은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들을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도니는 말합니다. 그걸 할 수 없다면 당신이 죽는다고.
존은 살기 위해 용서를 시작합니다. 자신에게 쌀쌀맞게 대한 사람들, 자기를 키워준 양부모, 그리고 죄책감에 삶이 망가져 있는 덱스터까지. 다 자기 잘못으로 이렇게 된 것이라고 하며 오히려 용서를 청합니다.
어머니를 찾을 수 없자 그는 어머니의 얼굴을 그려놓고 어머니를 용서합니다. 그리고 자신도 어머니를 창녀라 부른 것을 용서해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온 자기 자신까지 용서합니다.
그는 그림을 다시 시작합니다. 처음엔 신문에 실린 풍자만화를 보고 여기저기서 불만의 목소리가 쇄도합니다. 만약 이것을 이겨내지 못하고 또 술을 마셨다면 그의 인생은 끝이 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흘려보내는 것을 배웠습니다. 흐르는 물에는 녹조가 끼지 않습니다. 그는 그런 모든 상황을 잘 받아들이며 발전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 앞에서 연설하는 성공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영화 ‘돈 워리’(2019)의 내용입니다. 영화이지만 실화이고, 그냥 한 사람의 인생 여정 극복기가 아닌 많은 말을 하는 영화입니다.
과거를 놓지 못하고 있으면 미움이 끼게 되고 그러면 삶이 망가집니다. 자신의 삶을 망가뜨리는 사람을 사랑해 줄 사람은 없습니다. 지금 누군가와 새로운 좋은 관계를 맺고 싶다면 내가 흘려보내지 못해 잔뜩 끼어버린 녹조를 흘려보내야 합니다. 그것이 용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용서하기 위해 용서가 된 것이 아니라 알코올을 끊으려다 용서까지 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미움은 알코올과 맥락을 같이 했습니다. 용서 먼저 하려고 하면 막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알코올을 끊는 것이 용서하는 것과 다를 게 없었습니다. 용서하는 것이 알코올을 끊게 했지만, 그 용서는 알코올을 끊으려고 하는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용서 이야기를 하시며 달라는 대로 내어주라고 하십니다. 지금 내가 집착하는 것을 놓아버리면, 곧 술을 끊으려고 노력하면 용서까지 할 수 있게 됩니다. 지금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흘려보내지 못하기 때문에 용서를 시작도 못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내가 돈을 좋아해서 돈을 갚지 못하는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차피 다 사라질 것이라 여기고 가난한 사람을 돕다 보면 돈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고 그러면 그 돈을 갚지 않은 사람이 덜 미워집니다.
세상 집착을 먼저 흘려보냅시다. 이는 마치 흐르는 강물과 같습니다. 그 흐르는 강물에는 과거의 상처나 미움이 머물러 있으려고 해도 내 집착과 함께 흘러갑니다. 흐르는 물에는 녹조가 끼지 않습니다. 용서보다 집착에서 먼저 벗어납시다.

-조재형신부-
한국은 내년 3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통령 후보들이 출마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검찰총장을 하셨던 분, 감사원장을 하시던 분, 도지사를 하는 분, 전직 총리였던 분, 국회의원이었던 분, 국회의원이신 분들이 출마선언을 하였습니다. 대통령은 한국이라는 배를 운항하는 선장과 같습니다. 선장에게는 냉철한 판단력이 있어야 합니다. 국민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을 지도력이 있어야 합니다. 코로나19와 같은 재난의 상황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국민을 화합할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수도자와 같은 고결함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국가와 국민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언론은 후보자들이 하였던 말과 행동이 사실인지 검증하려고 합니다. 토론을 통해서 후보자들의 능력과 지도력을 검증하려고 합니다. 후보자들은 지지자들과 국민들로부터 선택을 받을 수 있도록 선거운동을 할 것입니다.
국민들은 대한민국이라는 배를 운전할 수 있는 선장을 선택할 것이고, 내년 3월 대통령 선거는 한바탕 축제가 될 것입니다. 선출된 대통령에게는 축하의 박수를 보낼 것이고, 낙선한 후보들에게는 위로의 박수를 보낼 것입니다. 이것이 지난 1987년부터 이어온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의 전통과 결과입니다. 저는 7번 대통령 선거에서 투표를 하였습니다. 제가 투표한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는 기뻤고, 낙선하였을 때는 아쉬웠습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대한민국이라는 배는 전진하였습니다. 배를 운전하는 것은 선장이지만 노를 젓는 것은 국민이기 때문입니다. 지혜와 열정 그리고 겸손과 정직을 겸비한 후보를 선택하는 것도 국민의 몫입니다. 이런 후보를 선택할 수 있는 국가는 위기의 순간을 기회로 만들어 도약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상과 꿈이 없는 후보, 개인의 욕심을 먼저 챙기려는 후보를 선택하는 국가는 위기의 순간이 다가오면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선택 받을 수 있는 길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바오로 사도는 용서를 이야기합니다. 감사를 이야기합니다. 동정과 호의 그리고 겸손과 온유를 이야기합니다. 그 모든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하느님께 선택받는 길은 업적과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 선택받는 길은 성공과 재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노력하면 이룰 수 있는 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선택받는 또 다른 길을 이야기하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라고 하십니다.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라고 하십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하십니다. 이 길은 우리의 노력만으로는 이루기 힘든 길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러기에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이룰 수 없는 길입니다.

선은 죽지 않습니다. 승리는 언제나 하느님 편에 있습니다!
-양승국신부-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원수 사랑’, 때로 백번 천 번 생각해도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인간 세상에서 그게 대체 가능하기나 한 일이냐는 의구심도 듭니다.
그런데 우리보다 앞서 사셨던 신앙의 선배들은 그 어렵다는 원수 사랑을 기쁘게 실천했습니다. 특히 위로부터 내려오는 사랑의 빛에 언제나 깨어있던 사람들에게 원수 사랑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웠습니다.
제2차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시절 유다인들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서품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새 사제 잉겔마르 운차이티크 신부(1910~1944)는 다카우 나치 수용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그에게는 나치 수용소가 첫 번째 소임지가 된 것입니다. 그는 수용소를 자신의 첫 본당이요 거룩함을 배우는 장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비밀리에 누나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감동적인 메시지가 적혀있었습니다.
“때때로 불운이라고 여겨지는 것이 가장 큰 행운일 때가 많습니다. 삶의 학교에서 겪게 되는 체험을 통해 참으로 많은 것을 배우게 되지요. 우리는 세상 사람들을 위해 이 세상에 평화가 얼마나 부족한지 느끼고 경험하면서 그들이 참 평화를 얻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가져가신다 해도 놀라지 않을 것입니다.”
1944년 12월 수용소에 장티푸스가 발병하게 됩니다. 한 달도 지나지 않았는데, 2천명이 넘는 수용자들이 죽어나갔습니다. 전염된 사람들은 비위생적인 막사에 격리되어 소리 없이 죽어나갔습니다.
수용소장은 죽어 나가는 병자들을 운반하는 자원봉사자를 모집했는데, 운차이티크 신부는 20명의 동료 사제들과 함께 지원했습니다. 사실 그곳에서 자원봉사를 한다는 것은 100퍼센트 죽음과 같은 말이었습니다.
그는 동료 사제들과 의기투합해서 생지옥 같은 병동을 사랑과 친교의 공동체로 탈바꿈시켰습니다. 죽어가는 사람들의 머리맡에 앉아 그들은 따뜻이 위로했고 격려하며 마지막 길을 잘 동반했습니다.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기쁘게 고백성사와 병자성사를 집전했습니다.
봉사를 시작한 지 몇 주 후 운차이티크 신부는 고열에 시달리다가 1945년 3월 2일 34세의 나이로 선종했습니다. 연합군이 수용소에 진군하기 불과 몇주 전이었습니다. 그는 죽기 전에 이런 편지를 남겼습니다.
“선은 죽지 않습니다. 승리는 언제나 하느님 편에 있습니다. 때때로 사랑을 전하는 일이 쓸모없게 여겨진다 해도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사랑에 깨어 있고 그 사랑이 피조물이 아닌 하느님께 향해 있다면 그 힘은 영원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과 평화가 다시 이 세상을 다스리는 날이 올 때까지 모든 것을 바칠 것입니다.”(로버트 엘스버그,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성인들, 바오로딸)
그 혹독하고 비참한 환경 속에서 그 누구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고, 늘 감사하고 기도하고, 봉사하고 희생하면서 당당하게 죽어간 운차이티크 신부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원수 사랑이 결코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다시 한 번 확인 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그 어려운 원수 사랑에 기쁘게 도전하는 오늘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죄인들도 그만큼은 한다
-반영억신부-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슴속에 담아봅니다. 주님의 말씀은 단순히 좋은 말씀이 아니라 내가 행할 때 살아있고 힘 있는 말씀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아무리 살아있는 말씀이라 하더라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혹시라도 누군가에게 서운함이 있다면 이 말씀을 되새기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발 더 나가십니다.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충고를 듣는 것도 힘이 드는데 누가 나의 뺨을 때린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나도 상대방을 한 방 먹여야 속이 후련해질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뺨을 내주라고 하십니다. 겉옷뿐만이 아니라 속옷까지 내주라고 하십니다. 간 쓸개 다 빼주라고 하십니다. 신앙인은 그렇게 행하는 사람입니다. 희생 없는 신앙은 없습니다.
당시 겉옷은 아주 중요했습니다. 사막 지역에서 겉옷은 낮에는 천막이요, 밤에는 이불입니다. 그래서 겉옷을 담보로 잡았다 해도, 해가 지기 전에는 돌려줘야 하는 법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속옷까지 내주라 하시니 한마디로 상대방을 위해 간, 쓸개 다 빼주고 덤까지 주라는 말씀입니다. 상대를 위한 희생과 사랑을 다하기 위해 나를 포기하라는 요구입니다.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하나가 되면 가능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면’(갈라2,20) 가능합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내 안에서 하시기 때문입니다. 해도 해도 다 할 수 없는 사랑의 의무에 충실하기를 희망합니다.
상대가 누구이든 가리지 않고 베풀고 사랑하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법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마음을 추슬러서 다시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사랑은 하느님 사랑으로 가는 징검다리여야 합니다. 사랑은 한결같이 주고 용서합니다. 사랑은 분별없이 마구 퍼주고 철없는 탕아처럼 다 내주고도 너무 적게 준 것이 아닌지 걱정합니다.
“성인은 착한 사람을 선하게 대하고 착하지 않은 사람 또한 선하게 대하니 덕(德)이 오직 선하기 때문”(노자).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사랑일 뿐, 상대에 따라 달라지거나, 있다가 없다가 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은 사랑자체가 보상입니다.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비를 내려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가슴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인간의 마음은 유리판과 같다.
쉽게 금이 가고
쉽게 깨지기에
그렇게 비유되기도 하지만
어느 한 부분만 충격을 받아도
전체가 금이 가거나 깨지기에
그렇게 비유한다. -익명-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연약함을 감싸는 큰 사랑이 우리를 지켜주기를 기도합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송영진신부-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루카 6,27-31).”
이 말씀은, 끝에 있는 ‘황금률’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해야 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라는 ‘황금률’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라고 말씀하십니다(마태 7,12).
(‘황금률’이 모든 계명들과 율법들의 ‘근본정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황금률’을 다음과 같이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준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우리가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것은 이미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또 이웃으로부터......
그렇다면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 다음에 있는 말씀들도
다음과 같이 바꿔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네가 그 사람을 미워하고 있는데도 그는 너에게 잘해 주고 있고 있으니, 너도
미움을 멈추고 그에게 잘해 주어라. 네가 그 사람을 저주하고 있는데도 그는
너를 축복하고 있으니, 너도 저주를 멈추고 그에게 축복하여라. 네가 그 사람을
학대하고 있는데도 그는 너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으니, 너도 학대를 멈추고 그를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 뒤에 있는 말씀도 다음과 같이 바꿔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네가 그의 뺨을 때릴 때 그는 너에게 다른 뺨을 내민다. 그때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네가 그의 겉옷을 가져갈 때 그는 속옷도 가져가라고 한다. 그때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네가 그에게 무엇인가를 달라고 할 때마다 그는 무엇이든지
다 주고, 그것을 되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면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그에게 ‘나는’ 원수인데, 그는 ‘나를’ 사랑으로 대한다.
나는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우리는 내가 실천해야 하는 사랑의 어려움만 생각하고,
내가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하거나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아니면 사랑받은 적 없다고 부정할 때도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내가’ 얼마나 큰 사랑을 받고 있는지를 깨닫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이미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이미 이웃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은
사실은 “이웃을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입니다.
“원수 같은 그 사람도 너를 사랑하는 너의 이웃이니 너도 그를 사랑하여라.”)
지금까지 한 말에 대해서, “그런 말은 이론일 뿐이다. 실제 현실은 다르다.”
라고 반박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고 박해하고 학대하는 ‘그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어떤 범죄와 관련되어서, 범죄의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일은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처럼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라면 주님께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용서와 사랑 실천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없어서 못하는 것이라면,
주님께서 그것을 탓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악인이 회개할 수 있도록 인도해 달라는 기도,
그리고 내가 이 악으로 인해 악해지지 않도록 도와달라는 기도,
용서와 사랑을 실천할 힘을 달라는 기도.
(예수님의 말씀은 악을 묵인하거나 조장하거나 방관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선으로 악을 물리치라는 뜻입니다.
경우에 따라서, 엄하게 꾸짖는 것이 사랑일 때도 있습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 너희가 도로 받을 가망이
있는 이들에게만 꾸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서로 꾸어 준다.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에게 잘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2-36).”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단 이기주의입니다.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라는 말씀은,
“그것은 사랑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그것을 ‘사랑 실천’으로 인정해 주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 라는 말씀은 “그것은 죄다.” 라는 뜻입니다.
사랑은 편 가르기를 하지 않는 것이고, 차별 대우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꾸어 주는 것”은 사랑 실천이 아니라, ‘대금업’입니다.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큰 상을 주실 것이라는
뜻인데, 조건 없는 사랑 실천이 인간 세상에서는 손해 보는 일이 될 수도 있지만,
하느님께서 갚아 주실 것이기 때문에
결코 손해 보는 일이 아니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라는 말씀에는
“바로 그런 사랑을 실천해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루카복음 10장에 있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사마리아인은
‘사랑 실천’의 대표적인 예인데,
그의 사랑 실천은 바로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을 실천한 일입니다.
비유에서, 강도당한 사람은 유대인으로 해석됩니다.
당시에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원수지간이었는데, 유대인들은 강자의 위치에,
사마리아인들은 약자의 위치에(학대받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실 때 일부러 사마리아인을 등장시킨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이 강도당한 사람을 도와준 일은, 미워하고 싫어하던 사람을
도와준 일이고, 대가를 바라지 않고 그냥 도와준 일이고,
하느님의 자비와 같은 자비를 실천한 일입니다.

복음: 루카 6,27-38: 원수를 사랑하여라.
-조욱현신부-
오늘 주님의 말씀은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대인관계 속에서 자신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자세를 일러주시는 말씀이며, 우리 믿음의 황금률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27-28절)
친구를 사랑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하는 관습이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 신앙인들만의 관습이다. 주님의 말씀은 적의를 품은 사람에게 사랑을, 미워하는 사람에게 자비를, 저주하는 사람에게 축복을, 박해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굶주리는 사람에겐 참을성을 주고 은총의 상을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하신 말씀을 몸으로 실천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루카 23,34)라고 기도하셨다.
“눈에는 눈.” 이것은 정의의 실현이다. 그러나 “이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29절) 이것은 자비의 극치를 말한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29절) 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자비를 우리는 스테파노에게서 볼 수 있다.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그는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 7,60) 라며 용서를 청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첫 번째 순교자는 그리스도를 닮았음을 알 수 있다.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신앙인인 우리가 그들과 다르다고 할 수가 없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30-31절) 우리 인간의 자비는 하느님의 모습을 갖고 있다. 이 자비는 더없이 훌륭한 덕으로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며, 우리 신앙인들에게 매우 잘 어울리는 덕목이다. 그래서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36절) 말씀하신다.
이 자비를 실천할 때, 우리는 복수심을 없애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37-38절)라는 말씀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37절)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이 말씀은 용서와 자비의 실천을 말하는데, 이 두 가지는 기도를 싣고 하느님께로 날아가는 두 날개라고 아우구스티노는 말하였다. 우리는 이 두 자선을 하여야 한다. 베풀고 용서하는 것이다. 우리도 주님께 좋은 것을 주시고 우리 악행을 갚지 말아 달라고 기도하기 때문이다. 나는 얼마나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과 나누고,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성찰해 보아야 한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 38)
-한상우신부-
아름다운
계절의
변화이다.
감사의
맑은
가을이다.
가을 햇살을
받으며
걸어가는
소중한
사람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너를 용서하는
것이 나를
용서하는 것이다.
마음의 되질은
서로가 같다.
미움은 미움으로
증오는 증오로
고스란히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마음을
달래어주시는
주님이시다.
마음을
아는 것이
삶을 아는
것이다.
더 소중한 것은
마음의 실천
사랑과 용서이다.
자기를 다스리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요즈음이다.
자신의 허물을
깨닫고 뉘우치는
것에서 우리
마음은
되살아난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주님의
마음
용서가 있다.
몸과 마음의
의지처가
되어주시는
주님이시다.
공허한 마음을
채워주는 것은
주님의
마음뿐이다.
마음을
새롭게
빚어내시는
주님께
단죄와
판단의
되질을
내려놓는다.
사랑과 존중
용서와 감사를
다시 배운다.
외롭고도
소중한
사람들이
함께 살고있다.
마음의 실천이
용서의 가을이며
사랑의 복음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독서와 복음 말씀은 참 좋은데, 혼자 먹기엔 너무 많은 음식이 차려진 밥상을 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너무 많은 지침과 권고들이 쏟아져 들어오니 좀 버겁게 느껴질 수도 있지요. 원수 사랑, 축복, 기도, 조건 없는 희사 등등 애써 결심하고 다짐해서 그중 하나만 실천해도 대단히 뿌듯할 일들이 줄줄이 나열되니, 과연 다 따를 수 있을지 걱정마저 들게 됩니다.
우리가 들은 조항 하나하나에 코를 박고 했는지 안 했는지 따지다 보면 세심증에 걸리기 십상이지요. 또 예수님 시대의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처럼 그 잣대로 자기와 타인을 난도질 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루카 6,31)
그래서 예수님은 그 모든 구체적 권고들을 이 말씀으로 묶어 주신 게 아닐까 싶습니다. 권고 하나하나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그 모두를 아우르는 중심 해류에 몸을 실으면 여러 방향에서 다양한 크기로 몰려오는 파도들을 자연스레 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타인이 나에게 어떻게 해 주면 좋을지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옵니다. 내가 좀 모자라도 감싸주기를, 잘못해도 용서해 주기를, 설령 나에게서 해를 입어도 너그럽게 이해해 주기를 바라지 않나요? 또 도움이 필요할 때 손을 내밀어 주고, 곤궁할 때 말없이 주머니를 채워주며, 실패했을 때 추궁을 삼키고 기다려 주길 바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바로 그것을 남에게 해주라고 하시는 겁니다. 구체적 지침들이 이미 그 안에 다 들어 있지요.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그런데 우리가 타인에게 바라는 걸 가만히 들여다 보면 그건 이미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해 주고 계신 것들입니다. 경험해 보지 못했다면 실천하기 불가능하겠지만, 이미 누리고 있는 것이니 마음의 방향만 바꾸면 영 못 할 일이 아닐 겁니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를 닮아 타인에게도 아버지가 하셨듯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차이는 엄청나겠지만, 각자가 할 수 있는 깜냥 안에서 최선을 다해 아버지의 자비를 따라하려 까치발을 들며 애써 노력해 보라고 독려하시는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 모든 실천을 한 단어에 뭉뚱그려 표현했습니다.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콜로 3,12)
바로 "다움" 곧 하느님의 사람다움입니다. 우리는 그분에게서 선택받았고 그분의 거룩함을 나누어 받았으며 그분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하느님의 사람들이지요.
그 많은 가르침들을 지킬 수 있는지 없는지 머리로 따지며 지레 겁먹고 고민하기보다, 내가 누구인지 인식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이라면 그 존재에 맞는 '다움'의 DNA는 이미 충분히 받았으니까요. 예수님이 바로 하느님을 구체적으로 반영하시는 모범이고, 그분을 닮아가는 여정은 세례로 축성된 우리 존재 안에 진즉에 프로그래밍되어 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콜로 3,15)
하느님의 자녀다움은 감사로 표현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존재의 어디를 눌러도 감사가 튀어나와야 합니다. 살아 숨 쉬는 생명에서 시작해 받아 누리는 모든 것의 주인이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가끔 내 것인 양 착각해서 헛발질을 하기도 하지만 정신 차리고 제자리로 돌아와보면 우리 존재의 안팎이 감사할 일들로 온통 둘러싸여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다움을 보여 주는 것은 두둑한 재물이나 현란한 지식, 거창한 인맥, 겉꾸민 외모가 아니라 "감사"입니다.
하느님의 사람답게 우리가 마음속으로 바라는 바를 앞질러 행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자비를 얻고 싶으면 자비를 주고, 사랑을 얻고 싶으면 사랑을 주며, 위로받고 싶으면 위로하면서 하느님의 보폭을 힘껏 따라가 봅시다. 행하는 그대로 우리 역시 충만해 질 것이니 결국 우리가 드릴 것은 감사뿐일 겁니다. 오늘, 곳곳에서 우리가 행하는 이 작은 노력으로 이 세상이 좀 더 양선하고 따뜻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사랑도 체하지 않도록>
-김찬선신부-
오늘 콜로새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여덟 번이나 '하십시오'라고 권고합니다.
입으십시오. 서로 용서하십시오. 사랑을 입으십시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 지혜를 다하여 서로 가르치고
타이르십시오. 하느님께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를 불러 드리십시오.
이 여러 가지 권고를 들으며 얼마나 간절하면
이렇게 여러 번 바오로 사도가 권고를 할까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사도의 이 간절함에 비해 너무 많은 권고를 한꺼번에 쏟아부음으로 인해
우리 귀에는 오히려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거나 흘려 들을 수도 있지요.
배고프다고 또는 너무 맛 있다고 한꺼번에 많이 먹으면 목구멍이 막히고
사용한 휴지를 한꺼번에 많이 버리면 변기가 막히듯
우리가 자녀들에게 하는 소리도 한꺼번에 다 쏟아부으면
하나도 먹히지 않거나 잔소리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우리는 잔소리를 한 것이 아니고 중요한 말을 한 것인데
너무 많으면 그 크고 중요한 당부가 작은 것이 되고 잔소리가 되는 거지요.
그래서 내 말을 꼭 듣게 하고프면 중요한 것 한두 가지만 얘기해야 되지요.
같은 이유로 이 많은 권고중에 한두 가지를 추려서 듣는다면
우리는 어떤 것을 들어야 할까요?
사실, 오늘 바오로 사도의 권고는 다 얼마나 훌륭하고 아름다우며
그래서 다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것이지만, 그래도 추려야 한다면
'하느님께 감사'와 '이웃에게 사랑'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 감사하는 삶에 대해서는 그저께 이미 했기에
오늘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권고에 집중코자 하는데
바오로 사도는 사랑을 권고하면서 이렇게 얘기를 전개합니다.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이 말은 사랑의 겉옷 안에 속옷도 입으라는 말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겉옷이 있어도 속옷을 입지 않으면 안 되듯
사랑이라는 겉옷도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와 같은
속옷들이 없으면 안 된다는 말이겠습니다.
저도 예전에는 성급하게 사랑이라는 겉옷만 입고 나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추운 겨울 누가 도움을 청한다고 급하게 겉옷만 걸치고 나가면
찬 바람이 옷 속으로 들어와 이내 다시 안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듯이
우리의 사랑도 속옷들을 입지 않고 덤벼들다가는 이내 그만두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는 우리가 입어야 할 속옷들인데
이 속옷들 중에서 겸손이라는 속옷은 꼭 입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겸손이 제게 제일 부족했고, 그래서
사랑 실패를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겸손하게 사랑하지 않으면 사랑이 체하더라고요.
앞서 너무 사랑하기에 한꺼번에 너무 많은 권고를 하면 막히고 잔소리가
된다고 말씀드렸듯이 겸손하게 사랑하지 않으면 사랑도 체하는 것이지요.
겸손하지 않으면 내 사랑만 믿고,
다시 말해서 상대방의 처지를 생각지 않고 막 사랑을 퍼붓는데
그럴 때 그 사랑은 사랑 폭력이 되거나 사랑 오남용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천천히 꼭꼭 씹어 먹어야 하듯
사랑도 꼭꼭 씹어 체하지 않도록
상대가 먹는 것을 보며 줘야 함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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