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9일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시몬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서 관세나 세금을 거두느냐?
자기 자녀들에게서냐,
아니면 남들에게서냐?” 하고 물으셨다.
(마태오 17,22-27)
“What is your opinion, Simon?
From whom do the kings of the earth
take tolls or census tax?
From their subjects or from foreigner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서철신부-
오늘 복음은 수난과 부활에 대한 두 번째 예고와 성전 세를 바치는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교회는 왜 별로 상관없어 보이는 이 두 가지 이야기를 오늘 우리에게 함께 들려줄까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지만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첫 번째 수난 예고에서는 베드로가 납득할 수 없다며 강하게 반발하지만(마태 16,21-23 참조), 두 번째 수난 예고 때에는 제자들이 몹시 슬퍼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가져올 부활과, 그로 말미암은 인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이 슬퍼합니다.
성전 세는 스무 살 이상의 모든 유다인 남자가 주님께 드리던 예물입니다. 성전은 유다인들의 삶과 신앙의 중심이었고, 그 성전을 유지 관리, 보수하고 전반적인 운용을 하는 데에 성전 세가 쓰였습니다. 그런데 서기 70년 8월 29일 로마군의 공격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서기 80-90년 무렵 복음을 쓸 때, 성전이 파괴된 것에 대하여 잘 알고 있으면서 왜 성전 세 이야기를 할까요? 유다인의 삶과 신앙의 중심인 성전이 여러 상품을 사고파는 장사의 소굴이 되고, 종교 지도자들은 사람들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성전 세를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장사의 소굴이 된 성전을 정화하시고,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고 하십니다(마태 21,12; 26,61; 27,40 참조). 마태오 복음사가는 ‘여러분이 믿고 의지하는 그 성전은 허물어졌지만,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심으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라고 강조합니다. 목숨까지 다 바치신 그 사랑은 영원하며,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다줍니다.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눈에 보이는 물건이나 세상의 것을 기대할 것인지 아니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영원한 사랑, 곧 목숨까지 바치신 그 험난하고 지극한 사랑을 믿을 것인지를 말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비행기 사고가 나면 많은 인명 피해를 볼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어떤 교통수단보다 가장 사고가 적은 것이 바로 비행기라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사고가 나면 워낙 피해가 크다 보니, 더 꼼꼼하게 정비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비행기 이륙 전에 확인하는 검사 항목이 너무 많고 귀찮다면서 확인하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사고가 끊이지 않을 것이고, 아마 비행기를 이용하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은 코로나19로 인해 비행기 이용하는 사람이 적지만, 그래도 많은 이가 비행기라는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이유는 그만큼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특히 사랑 실천에 대해 하지 못할 이유를 붙이며 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나의 말과 행동은 하느님 나라로 안전하게 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던 것이고, 당신의 십자가 죽음으로 그 모범을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남들도 다 그렇게 한다면서 사랑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너무 힘들다면서 사랑을 미뤄서도 안 됩니다. 사랑은 지금 당장, 그리고 나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세에 대해 말씀을 하십니다. 스무 살 이상 된 모든 이스라엘 남자는 나라 안에 살든지 밖에 살든지 간에, 예루살렘 성전유지를 위해 일 년에 성전 세로 ‘반 세켈’(복음에 나오는 스타테르 한 닢은 그리스 은화로 두 사람 몫의 성전 세에 해당합니다)을 내게 되어 있었습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성전 세를 내셔야 하냐는 것이었지요.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성전의 주인이십니다. 그래서 성전 세를 굳이 내지 않으셔도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기적과 같은 행동을 통해 성전 세를 베드로의 몫과 함께 내게 하십니다.
이 역시 커다란 배려입니다. 성전 세를 내지 않으면, ‘네가 뭔데?’라는 생각으로 주님을 함부로 판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오해해서 죄짓지 않게 하려고 예수님께서 직접 성전 세를 마련해서 내십니다.
이렇게 배려하는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을 믿고 따른다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 역시 나의 이웃에 대한 배려하는 사랑을 갖춰야 합니다. 어떻게든 실천하는 사랑을 통해 우리는 멋진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미사 후 성당 입구에서 신자들에게 인사를 하다 보면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을 종종 만납니다.
“신부님, 묵상 글 잘 보고 있어요. 늘 고맙습니다.”
묵상 글에 대한 감사 인사를 많이 받지만, 그때마다 어색합니다. 그렇게 잘 쓴 묵상 글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너무 급하게 써서 내용이 형편없었을 때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들로 어색해하면서도 감사한 마음입니다. 이런 부족한 묵상 글을 계속 봐주심에 대한 감사입니다.
이 감사에 보답하는 길은 더 좋은 묵상 글을 쓰는 것인데 솔직히 어려운 일입니다. 단순히 지식만 전하는 것이라면 열심히 공부하면 되겠지만, 묵상 글은 깊은 묵상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닌 ‘나’만 할 수 있는 것이라 부담감도 큽니다.
그런데 이를 벌써 20년 넘게 해오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해주시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더 큰 감사의 대상은 주님이십니다. 저는 그저 주님의 도구일 뿐입니다.

열등감, 불완전한 겸손, 완전한 겸손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성전세’에 관한 내용이 이어집니다. 이 둘은 서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당시 한 사람당 두 드라크마를 성전세로 바쳐야 했는데, 이는 이틀 치 노동 품삯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성전세를 내느냐고 베드로에게 따지자 베드로는 내신다 말하고 집에 들어왔는데, 예수님께서 당신은 성전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안 내도 되지만 물고기를 잡아 그냥 내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집에 오셨는데 그 하인들에게 집세를 내고 당신 일을 함께하는 동료인 베드로에게도 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신 것도 큰 겸손입니다. 인간이 개가 되어 개들에게 인사하고 그들을 위해 잡아먹혀 죽는 것보다 더한 겸손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참다운 겸손이 무엇인지 깨우쳐주십니다. 오늘은 겸손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겸손처럼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열등감’입니다. 겉으로는 겸손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열등감일 수 있습니다.
성당에서 봉사하라고 하면 “저는 능력이 없어서 못 해요.”라고 하던가, 큰 꿈을 가지라고 할 때 “제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어요?”라고 말합니다. 그 사람 안에는 하느님이 사시지 않습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이 큰일을 하려고 할 때, “당신은 교만합니다. 당신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어요?”라고 말합니다. 자신도 그렇고 남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열등감은 믿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의 능력을 보며 인정하지 않으려 한 것과 같습니다.
저도 괜히 위대한 신학자들이 한 말을 반박하다가 이런 말을 듣기도 합니다.
“당신은 교만합니다. 그분들은 고위 성직자이시고 위대한 학자신데 나이도 어린 당신이 어떻게 틀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
하지만 이런 말들은 다 열등감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열두 살 때 예루살렘 학자들과 토론을 하셨습니다. 그건 예수님이니까 가능했을까요? 아닙니다. 우리 안에도 예수님이 계십니다. 성모님께서 “제가 어떻게 하느님의 어머니가 돼요. 말도 안 돼요.”라고 대답하셨다면 그건 겸손이 아니라 열등감이었을 것입니다. 겸손하다고 결코 위대한 일을 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두 번째는 ‘불완전한 겸손’입니다. 위대한 업적을 달성하고 큰 상을 받을 때 이렇게 말하는 경우입니다.
“이것은 다 주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이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립니다.”
이것이 왜 불완전한 겸손이냐면 ‘나’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자녀가 아버지가 다른 형제에게는 많은 것을 해 주며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해 주지 않는다고 느낄 때, 겸손하게 ‘저는요?’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도움이 아니면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여겨 무엇을 청하는 것은 물론 겸손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나’가 살아있어서 자신의 영광을 통해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경우 내가 목표로 하는 것이 달성되지 않는다면 조금이라도 주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완전한 겸손’은 무엇일까요? 오늘 베드로가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더는 내려가실 곳이 없습니다. 마치 물고기와 같은 신세가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물고기를 잡아 그 입에서 나온 한 스타테르를 예수님과 자신을 위한 성전세로 봉헌합니다. 한 스타테르는 네 드라크마와 같은 액수인데 곧 두 명의 성전세입니다. 이는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겸손에 하나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즉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뜻입니다. 내가 그리스도가 되고 그리스도의 겸손이 나의 겸손이 된 것입니다. 나를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지 않으면 이 겸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씨름을 배운지 3개월 만에 전국 대회에서 1위를 휩쓸어 ‘영재발굴단’에 나왔던 이신이란 아이가 있습니다. 그는 탈북자 2세입니다. 엄마가 임신한 채 탈북하여 중국에서 갖은 고난을 겪으며 결국엔 한국으로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신이는 종일 고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도 허리가 아픈 엄마를 위해 밥을 하고 청소하고 빨래를 합니다. 정말 중학생답지 않은 모습입니다.
신이는 자신을 데리고 살아온 엄마의 고달픈 삶을 잘 압니다. 쌍둥이를 임신한 몸으로 목숨을 걸고 탈북했지만 그 이후의 삶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하루에 두 시간밖에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기름을 짜는 일을 종일 하였고 기름을 짜고 남은 것으로는 돼지 사료를 끓여 주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밤에 하는 일이었고 낮에는 고물을 주워 고물상을 하며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니 몸이 성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간신히 한국에 들어온 지 두 달 만에 몸이 안 좋아 여러 번 수술해야만 했고 이후에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신이는 한국에 들어와서 한국 아이들에게 많은 차별을 받았습니다. 욕도 많이 들었고 북한으로 돌아가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 때문에 비뚤어질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씨름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눈 뜨고 눈 감을 때까지 운동하였습니다. 그래서 석 달 만에 중학교 씨름 1위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전국 체전에서 발목을 다쳤습니다. 재활하며 보디빌딩도 겸해서 하게 되었는데 그것에 집중하여 4개월 만에 고등부 1위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가 이렇게 자신을 몰아붙인 이유는 오로지 어머니의 고생에 자신도 참여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참다운 겸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겸손입니다. 나도 그리스도의 뜻에 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 그리스도의 겸손에 참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성전세를 위해 돈을 직접 주셨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순종하게 하셨습니다. 당신 뜻에 따르게 하신 것입니다.
물고기를 잡아 입을 벌리면 돈이 나온다는 말에 순종하는 게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순종하시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모습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것은 나를 죽인다는 뜻입니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의 뜻이 내 안에서 실현되게 하는 것. 그리스도의 십자가, 곧 그리스도의 겸손과 하나 되는 것, 이것이 완전한 겸손입니다.

-조재형신부-
미국의 하버드 대학교에서 75년간 724명에 대해서 조사를 하였다고 합니다. 한 그룹은 하버드 대학교 2학년 재학생들이었고, 다른 한 그룹은 당시 보스턴에 사는 가난한 젊은이들이었다고 합니다. 1935년부터 시작했고, 2000명이 넘는 자식들이 생겼다고 합니다. 90이 넘은 나이로 지금까지 생존하는 사람도 6명이 있다고 합니다. 대학에서 조사한 결과 행복한 사람, 건강한 사람, 성공한 사람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고 합니다. 학력, 능력, 재력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무엇이 사람을 성공하게 했을까요? 무엇이 사람을 행복하게 했을까요? 무엇이 사람을 건강하게 했을까요? 그것은 좋은 ‘인간관계’입니다.
좋은 인간관계는 3가지 유익한 점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건강에 도움이 됩니다. 반면에 고독한 사람은 재산이 많아도, 능력이 있어도 쉽게 좌절하고, 아팠다고 합니다. 인간관계가 좋으면 비록 가난해도, 고통이 있어도 희망을 잃지 않으며 쉽게 건강을 회복했다고 합니다. 둘째는 인간관계의 양보다는 깊이였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을 아는 것이 중요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가족과 친구와 깊은 인간관계를 맺는 사람은 더욱 건강했다고 합니다. 50대에 인간관계가 좋았던 사람은 80이 되어도 건강했다고 합니다. 셋째는 인간관계가 좋으면 기억력도 좋아진다고 합니다. 고독한 사람이 치매에 걸릴 확률이 훨씬 높았다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미국인 5명 중에 1명은 고독을 느낀다고 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좋은 인간관계를 맺는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모든 길을 따라 걸으며 그분을 사랑하고,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섬기는 것, 그리고 너희가 잘되도록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님의 계명과 규정들을 지키는 것이다. 그분은 고아와 과부의 권리를 되찾아 주시고, 이방인을 사랑하시어 그에게 음식과 옷을 주시는 분이시다. 너희는 이방인을 사랑해야 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 맞습니다. 하느님을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사랑하고, 이웃을 같은 마음과 정성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첫 제자인 안드레아와 요한에게도 ‘와서 보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드레아와 요한은 예수님 곁에 머물면서 예수님이 ‘구세주’임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나는 착한 목자이고, 여러분은 양 때라고 하셨습니다. 목자는 양들의 목소리를 알고, 양들도 목자의 목소리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는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으면 좋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성체성사’를 통해서 성체로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모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관계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아셨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언젠가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너는 네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았느냐?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느냐?” 가을을 기다리며 예전에 읽었던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사람을 사랑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며 살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었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기쁘게 대답할 수 있도록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꾸어 가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도록
내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 놓아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행복한 한 주간되시기 바랍니다.

언제나 대자유를 만끽하시는 주님, 마치 한 줄기 바람 같이 자유로우신 주님!
-양승국신부-
오늘 복음은 봉독할 때 마다 꽤나 쌩뚱맞은 내용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카파르나움에 도착했을 때, 세금 징수원이 수제자 베드로 사도에게 성전세를 요구합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아주 특별하고 기이한 명령을 내리십니다.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한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
공생활 기간 동안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은 대체로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백성들을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자비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중병이나 고질병에 걸린 사람들을 치유시켜 주신다든지,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신다든지...
그런데 오늘 보여주시는 기적은 대체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독특한 이적 사화는 아마도 후대에 가필(加筆)된 것으로 추정됩니다만,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제정해놓은 편협하고 제한된 제도나 관습으로부터 철저하게 자유로운 분이심을 강조하는 기적. 국경에 인접한 도시 마다 세관을 설치해놓고 엄청 중요한 일처럼 세금을 걷어 들이는데, 사실 그거 아무것도 아님을 넘어 웃기는 일이라는 한 표현
카파르나움 세금 징수원은 예수님께 성전세를 요구했는데, 사실 이것처럼 천부당만부당한 일이 다시 또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그분은 이스라엘의 주님이신 하느님 아버지의 외아드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리도 애지중지하는 성전의 주인이십니다.
그렇다면 백성들이 바치는 성전세를 수령하실 분은 사제나 랍비들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성전세 징수원은 기가 막히게도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님께 성전세를 바치라고 하였습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했겠는지,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서글프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셨던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명하신 것이 갈릴래아 호수에 가서 낚시를 하라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낚인 고기의 입을 열면 은전이 나올텐데, 그걸로 성전세를 바치던지 말던지 알아서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세를 바치셔야 할 분이 아니라 성전세를 받으셔야 할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굳이 까칠한 유다인들의 비유를 건드릴 필요가 없으니 베드로 사도에게 꽤나 웃기는 방법으로 돈을 마련해 성전세를 바치라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이 특별한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진리가 한 가지 있습니다. 사실 세상 모든 것은 예수님의 소유입니다. 따라서 그분은 철저하게도 세금으로부터 자유로운 분이십니다. 그분은 그 어떤 사람, 그 어떤 제도에도 묶여있지 않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그 어떤 인간적 관습에 얽매일 분이 아니십니다. 물고기 입 속에 든 동전은 그분의 초월적 자유를 의미합니다. 주님께서는 언제 어디서든, 어떤 방법으로든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그 무엇이든 자유롭게 얻을 수 있습니다.
언제나 대자유를 만끽하시는 분, 마치 한 줄기 바람 같이 자유로운 분, 우리가 인위적으로 만든 틀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고 해서는 안 되는 분,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의 전반부는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 예고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인간들이 예수님을 죽일 것이지만, 결국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일으키실 것이라는 사실이 명확히 제시되고 있습니다.
곧 하느님의 계획, 하느님의 승리가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선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미리 알려주심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이 그저 우연히 발생한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미리 계획하신 섭리임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당신께서 하느님의 그 계획에 기꺼이 동의하시고 함께 하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제자들에게 수난에 대한 준비와 부활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시는 제자교육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는 예수님께서 ‘성전세’를 내시는 장면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당신께서 성전의 주인이심, 그리고 당신의 자녀들도 성전세로부터 자유로움을 밝히십니다.
그렇게 하시면서도 성전세를 내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 이유를 밝히십니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배려와 사랑입니다.
자신이 옳긴 하지만, 무모한 분쟁을 가질 필요가 없기에,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지혜롭게 처신하십니다.
우리는 이처럼, 슬기롭고 순박한 사랑을 성전세로 바치는 또 하나의 모범을 막시밀리아노 꼴베 성인에게서 봅니다.
그는 천주교 신부라는 이유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히게 되어, 혹독한 중노동과 갖은 형벌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의연함을 잃지 않았고, 주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는 나치 병사들로부터 더 많은 고통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람이 감옥을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수용소 책임자는 다른 사람들의 탈출을 막으려고, 남아있는 사람 중에 열 사람을 골라 아사형을 내리는데, 그들 가운데 한사람이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을 부르며 괴로움에 울부짖었습니다.
이에, 꼴베 수사님은 그 사람 대신에 아사감방으로 가겠다고 나섰고, 그리하여 굶주림의 고통을 겪다가 독극물 주사에 의해 죽음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 감방에서는 마지막 죽음의 순간까지도 찬미의 노래와 기도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그는 미움을 사랑으로, 저주를 기도로, 절망을 희망으로, 패배를 승리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는 성체성사의 삶을 몸소 몸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에페 5,2)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 온몸을 사랑의 성전세로 기꺼이 봉헌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도 온몸을 불살라 예수님께 바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마태 17,27)
주님!
저는 당신 생명의 호수를 헤엄쳐 다니는
한 마리의 물고기입니다.
당신 형상이 새겨진 고귀한 동전을 입에 물고
당신 파도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적절한 순서와 아량
-반영억신부-
성전세를 거두는 이가 베드로에게 다가와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세를 내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세금은 로마 총독이 로마제국을 위해 거둬들이던 세금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자체적으로 징수하던 인두세였습니다. 스무 살 이상 성인 유다인 남자라면 누구나 해마다 영혼의 속죄를 위해서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의 임금들은 관세나 인두세를 남에게서 받아내지 자기 가족에게 부여하지는 않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세금을 내셔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성전의 참 주인이시며 “성전보다 더 큰 분”(마태12,6)이시기 때문에 당연히 속죄받을 필요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세도 바치셨습니다(마태17,27). 성전의 참 주인이신 분께서 성전세를 내신 까닭이 어디 있을까요? 그야말로 요즘 표현으로 스캔들이 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세금을 바치십니다. 그런데 예기치 않았던 돈으로 성전 세를 내십니다. 호수의 고기를 잡아 그 입안에 있던 돈으로 베드로의 몫과 주님의 몫으로 주도록 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신다.’는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시며 우리의 구원자이시라는 모습에는 손상을 입지 않으시면서, 하느님께는 영광이 드려지며 인간의 비위는 조금도 건드리지 않는 모습에 참 지혜를 만날 수 있습니다. 마음이 꼬인 사람에게는 우선은 한발 물러서는 것이 좋습니다. 원리(原理)는 소중합니다. 그러나 실천하며 살아가는 데는 적절한 순서와 아량이 필요합니다. 오늘 하루, 우리의 마음을 어디에 두고 살아야 할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일상 안에서 많은 일들을 접하면서 그때 마다 다른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고 있지 않은지 신중히 고려해야 할 상황들이 있습니다. 아주 분명하고 명확하게 말하거나 일관되게 행동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그릇이 되지 않는데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더욱 비굴하게 물러서는 것 같이 보이는 때 정말 참 지혜가 필요함을 절감합니다.
때로는 비유를 들고, 때로는 비유를 해설해 주시던 예수님, 손가락에 침을 발라 눈을 닦아주시고, 귀 구멍을 열어주시던 예수님, 일어서라고 하시며 손을 잡아주시던 예수님,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리라 하시던 사랑의 예수님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내 생각을 앞세우지 않고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넉넉한 마음으로 지혜를 갈망하는 날 될 수 있길 희망하며 눈높이를 맞춰가는 가운데 기쁨과 평화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성전 세를 바치시다.>
-송영진신부-
“그들이 카파르나움으로 갔을 때,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이 베드로에게 다가와,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었다.
베드로가 ‘내십니다.’ 하고는 집에 들어갔더니 예수님께서 먼저,
‘시몬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서 관세나 세금을
거두느냐? 자기 자녀들에게서냐, 아니면 남들에게서냐?’ 하고 물으셨다.
베드로가 ‘남들에게서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마태 17,24-27)”
스무 살 이상의 유대인 남자들은 누구나
매년 한 차례 ‘반 세켈’의 세금을 성전에 바쳐야 했습니다.
“인구 조사를 받는 이는 누구나 성소 세켈로 반 세켈을 내야 한다.
한 세켈은 스무 게라이다. 그 반 세켈은 주님에게 올리는 예물이다.
인구 조사를 받는 스무 살 이상의 남자는 누구나 주님에게 예물을 올려야 한다.
너희 목숨에 대한 속죄로 주님에게 이 예물을 바칠 때, 부자라고 반 세켈보다
더 많이 내도 안 되고, 가난한 이라고 이보다 덜 내도 안 된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서 속전을 받아, 만남의 천막 예식 비용으로
쓰도록 내주어라. 이것이 주님 앞에서 너희 목숨에 대한
속죄의 기념이 될 것이다(탈출 30,13-16).”
계산 방식에 따라 차이가 있긴 한데, ‘반 세켈’은 노동자의 이틀 품삯 정도입니다.
27절에 언급되어 있는 ‘스타테르 한 닢’은 ‘한 세켈’과 같습니다.
성전 세는 로마제국의 세금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성전 유지를 위해서 자체적으로 징수하던 세금이었습니다.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이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
라고 물은 것은 성전 세를 빨리 내라고 독촉한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과 제자들은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어서
성전 세를 바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성전보다 더 크신 분이고(마태 12,6),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입니다(마태 17,5).
따라서 예수님에게는 성전 세를 바칠 의무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를 원문대로 직역하면,
“우리가 그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면 안 되니”입니다.
이 말씀은,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의 정당한 직무 수행을
방해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라고 번역되어 있어서,
예수님께서 그들의 비위를 맞춰 주려고 성전 세를 내신 것으로,
또는 세속의 법질서와 타협하신 것으로 오해하기가 쉬운데,
예수님께서 성전 세를 내신 것은,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일도 아니고,
현실과 타협한 일도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정하신 율법을 모범적으로 지키신 일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7-19).”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로 예수님과 바리사이들이 충돌한 일이 많은데,
그 일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 율법을 무시하신 일이 아니라,
안식일을 완전하게 지키는 방법을 가르치신 일입니다.)
<신앙인은 세상 안에서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는 않은 사람입니다(요한 15,19).
그런데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말을,
세상의 법질서와 상관없이 사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법만 지키면 된다고 주장하면서,
세상의 법에 대해서는 ‘무법자’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있습니다.
(성전 건축을 하면서 ‘건축법’을 지키지 않고,
운전을 하면서 ‘도로교통법’을 무시하고......
요즘에는 ‘방역법’에 대해서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의 자유’ 운운하면서......)
그런 행동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는 일이고,
예수님과 교회를 욕되게 하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주님을 생각하여, 모든 인간 제도에 복종하십시오.
...... 여러분이 선을 행하여 어리석은 자들의 무지한 입을 막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1베드 2,13-15).”
예수님께서는 성전 세를 바치기 위해서 작은 기적을 행하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어부 출신이기 때문에
물고기를 잡는 일은 쉽게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물고기를 팔아서 돈을 마련한 것이 아니라,
물고기의 입에서 돈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그렇게 하셨을까?
그것은 하느님께 헌금을 바치는 일은 ‘나의 것’을 하느님께 드리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하느님께 돌려 드리는 일이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해석됩니다.
<‘세금’으로 표현되어 있긴 하지만, 성전 세는 인간에게 내는 세금이 아니라
하느님께 바치는 헌금이었습니다(탈출 30,13).>
사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은 전부 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고,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주 그것을 잊어버리고 ‘나의 것’이라고 착각하고,
무엇인가를 하느님께 바칠 때,
‘나의 것’을 바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생색내는 일이 많습니다.

복음: 마태 17,22-27: 성전 세
-조욱현신부-
예수께서는 또다시 당신의 수난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베드로가 주님을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고백하였고,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그 수난을 영광이라고 했으며, 아버지께서 하늘에서 말씀하셨다. 또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다는 말씀을 하셨지만, 제자들은 그 말씀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기 때문에 “몹시 슬퍼하였다.”(23절) 제자들은 그 사건이 어떤 것인지 깨닫지 못했다.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24절) 유대인들은 모두가 똑같이 이 성전 세를 반 세켈을 바쳤다(탈출 30,13 참조). 여기서 반 세켈을 내는 것은 자신을 바치는 것을 상징하며 세켈은 구원받은 사람을 상징한다. 주님께서도 성전 세를 내라는 요구를 받으신다. 성전 세를 바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서약한 우리가 하느님의 참 성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바치는 것이다.
복음에서 한 세금 징수원이 베드로에게 와서 예수께서 성전 세를 냈는지를 물었을 때 베드로는 내겠다고 대답하고서는 예수께 그 상황을 보고하였다. 베드로의 말을 들으신 예수께서는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왕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므로 다른 사람은 세금을 내어도 우리는 세금을 면제받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내가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루카 2,49)라는 말씀에서처럼 어떻게 아들이 아버지의 집을 위한 세금을 낼 수 있겠는가 하고 반문하셨다.
그런데도 예수께서는 세금을 내야 한다고 하신다. 그것은 자신의 의무이기도 하지만 그 이상인 것으로서 신앙인은 타인에게 표양을 보여 주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세금 낼 돈은 어디서 구할 것인가? 복음에서 보면 낚시를 해서 첫 번째 잡히는 물고기의 입을 벌리면 은전이 들어있을 테니 그것으로 예수님과 베드로의 세금을 내라고 하셨다.
물고기는 교회의 모습이다. 이 물고기는 한때, 불신앙과 미신의 물속 깊은 곳에 사로잡혀 세속적 쾌락이라는 폭풍과 불행에 싸여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 물고기는 말씀의 가르침이라는 사도들의 낚싯바늘과 우리를 “어둠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1베드 2,9) 주시는 말씀의 낚시 그물에 의해 하느님께로 높이 들어 올려진다. 그 물고기 입에서 동전을 취하여 세금으로 내도록 하셨다.
예수께서는 땅에서도 동전을 취하실 수도 있었지만, 호수에서 그 기적을 이루신다. 우리는 모두 삶의 씁쓸한 혼돈으로부터 건져진 물고기이다. 우리는 사도들의 낚시 그물에 잡혀 온 물고기와 같다. 이 물고기들의 입에는 그리스도의 고귀한 동전이 물려있다. 이 동전은 우리 영혼의 빛과 육신의 빚을 갚는 데 사용되었다. 유대인들과 다른 민족들의 빚, 가난한 사람들과 부자들의 빚을 갚았다고 할 수 있다. 똑같이 세금을 내라고 했기 때문이다(탈출 30,13).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마태 17, 26)
-한상우신부-
세상의
가치와
신앙의
두 가치가
번번히
충돌하는
우리들 삶이다.
가치의
충돌을 통해
진짜 우리가
누군지를
제대로
알게하여
주시는 은총의
주님이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엄청난
이 사실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이다.
결핍을
채워주시는
분은 오직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용서받고
면제받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에서
삶의 의미와
삶의 방향성을
다시 찾게된다.
우리의
의무보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이
더 크다.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더욱
우리답게
살게하는
바탕이 된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우리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아내는
것이다.
가치의
회복이야말로
질서의 회복이며
참된 관계의
지혜이다.
면제와
공짜 사이에
살고있는
은총의
우리들이다.
면제가
은총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가 주님께 무엇을 되돌려 드려야 하는지 제시하십니다.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마태 17,24)
성전 세를 징수하는 이들이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성전 세는 예루살렘 성전의 유지를 위해 스무 살 이상 된 이스라엘 남자라면 누구나 내야 하는 돈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돈은 로마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화폐로는 지불할 수 없어서 환전상들이 성전 안에서 유다 돈으로 바꾸어 주었지요. 그 과정에서 성전의 책임자들과 장사꾼들 사이의 모종의 결탁과 잇권이 오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에 대해 철퇴를 가하신 것이 바로 성전 정화 사건입니다.
성전 세는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유형의 성전을 돌보고, 성전 일에 종사하는 이들의 삶을 보전해 줍니다. 또 예식에 필요한 비용에도 쓰이지요. 우리가 교무금이나 헌금을 통해 신자로서의 의무와 사랑을 표현하는 것과 같을 겁니다.
이렇게 성전을 위해서 외적으로는 성전 세가 요구되는데, 그렇다면 내적으로는 무엇이 요구되는지 제1독서가 들려 줍니다.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을 섬기며, 그분께만 매달리고 그분의 이름으로만 맹세해야 한다."(신명 10,20)
하느님께 대한 경외와 섬김, 의탁과 흠숭, 사랑의 마음이야말로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진정한 봉헌입니다. 그분께 선택되어 하느님 백성이 된 이스라엘은 외적인 세금이나 예물로만이 아니라 이러한 내적 봉헌으로 하느님과 관계를 맺어야 하지요.
그런데 세금은 주님께서 주신 것을 일부분 되돌려 드리는 것에 불과하고, 마찬가지로 내적인 사랑 또한 그 이상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하느님 마음에 아주 쬐끔 반응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말입니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이러한 내적 관계성이 정립이 되고 유지가 되면 사실 외적인 봉헌은 자연히 따라옵니다. 각자 형편에 따라 규모야 다르겠지만, 하지 말라고 해도 하게 되지요. 또 그분께 무엇이라도 더 바치고 싶은 마음에 성전을 위한 것뿐 아니라 그분의 모상인 형제와 이웃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눈을 돌리게 됩니다. 이쯤되면 성전 세는 의무가 아니라 사랑이 됩니다.
"너희는 이방인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10,19)
성경을 읽다 보면 특별히 이방인을 콕 짚어서 사랑하라는 명령을 자주 듣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굳이 "이방인"인지 주님의 마음에 머물러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입장에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동족과 이방인으로 나뉩니다. 자기네 민족이거나 민족이 아니거나 둘 중 하나지요.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만고의 진리로 어차피 동족은 사랑하고 보호하기 마련이니, "이방인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결국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존중하며 돌보라는 뜻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자기들을 특별히 선택하셨다는 선민사상에 집착해 이방인을 죄인 취급하고 무시하며 도외시했습니다. 온 세상 만물의 주인이시며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진정으로 바라시는 봉헌은 외형의 성전을 보전하는 성전 세만이 아니라, 바로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 드리는, 경계 없는 사랑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마태 17,27)
예수님께서 신비한 방식으로 성전 세를 마련해 주십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에게 먼저 요구되는 것은 외적 돈보다 마음이지만, 세금 징수관들의 비위를 건드려 세상 제도와 마찰을 빚고 싶지 않으신 까닭입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성전 세는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셨지요!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마태 17,27)
나와 네 몫. 문맥 안에서는 예수님과 베드로 몫의 성전 세를 가리키지만, 오늘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묵상의 흐름에서 보면, 나 자신과, 나 아닌 모든 이들의 몫이라는 의미도 캐낼 수 있습니니다.
우리는 "우리"의 범주 안에 넣은 이들과 "우리" 밖으로 밀어낸 이들 모두를 위해 하느님께 사랑의 의무를 바쳐야 합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이 사랑의 의무에서 예외일 수 없지요. 이것이 유형의 성전뿐만 아니라 성전 안에서 진정으로 사랑받고 찬양받으셔야 할 하느님께 드리라고 우리에게 요구되는 진정한 봉헌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하느님을 위해, 이웃과 형제를 위해 우리가 사심없이 바칠 것은 유형의 것이든 무형의 것이든 주님께서 친히 마련해 주십니다. 그분께서 마련해 주신 것에서 조금 떼어 다시 되돌려 드리는 것 뿐이지요. 인간이 자기 능력과 지식처럼 포장하고, 타이밍과 운수로 착각해서 그렇지 사실은 모두 주님께 받은 것이니까요.
우리는 성전 세를 바칩니까? 예, 그렇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과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세상의 모든 성전들을 가꾸며 사랑의 의무를 다하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사랑을 은총으로 받았다면>
-김찬선신부-
오늘 신명기의 모세는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마음의 할례를 행하고 더 이상 목을 뻣뻣하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백성 가운데에서도 너희만을 선택하셨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더 이상 목을 뻣뻣하게 하지 마라."
그런데 모세는 왜 굳이 이런 말을 합니까?
왜 마음의 할례를 얘기하는 것입니까?
더 이상 목을 뻣뻣하게 하지 말라는 것은 또 무슨 뜻입니까?
우리는 유대인들에게 선민 의식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선민 의식이란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의식인 것이지요.
여기에 자기들만 특별히 선택받았다는 의식도 있고요.
그런데 이것이 자기들은 특별하다는 의식으로,
그리고 자기들은 우월하다는 의식으로 발전하며
그래서 마침내 그들은 목이 뻣뻣한 사람들이 됩니다.
이렇게 된 그들에게 모세는 마음의 할례를 받으라고 하고,
'더 이상' 목이 뻣뻣한 사람이 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더 이상' 목이 뻣뻣한 사람이 되지 말라는 것은 지금까지
목이 뻣뻣했다는 얘기이고 그래서 마음의 할례를 받으라는 건데
그렇다면 마음의 할례란 또 무엇이고 어떤 것일까요?
제 생각에 마음의 할례를 받으라는 것도
육신의 할례만 받지 말고 마음의 할례를 받으라는 뜻이요,
겉의 할례만 받지 말고 속의 할례까지 받으라는 뜻입니다.
제 생각에 할례란 우리로 말하면 세례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 이제부터 하느님의 자녀로 살겠다는 것처럼
이들은 하느님 백성으로서 하느님과의 계약에 충실하겠다고 하는 거지요.
그런데 우리가 겉으로는 세례를 받았지만
속을 보면 아직 하느님의 자녀가 되지 못한 것처럼
이들도 겉으로는 할례를 받아 유대인이 되었지만
특권적인 선민 의식만 있고 전혀 유대인답지 않은 겁니다.
이런 그들에게 모세는 그래서 이렇게 또 얘기합니다.
"주 너희 하느님은 사람을 차별 대우하지 않으시고 뇌물도 받지 않으시는,
위대하고 힘세며 경외로우신 하느님이시다.
또한 그분은 고아와 과부의 권리를 되찾아 주시고, 이방인을 사랑하시어
그에게 음식과 옷을 주시는 분이시다. 너희는 이방인을 사랑해야 한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차별 대우하지 않으신다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뽑으신 이유도
이방인을 차별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똑같이 사랑하라는 것이요,
그들에게 우월감을 가질 것이 아니라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옛날에 맏아들에게 상속 재산을 많이 또는 다 준 것은
부모를 잘 모시라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재산을
다른 형제들과 잘 나누라는 뜻도 있는데 재산만 싹 챙기고
맏자식으로서 해야 할 본분은 하나도 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요.
그러므로 이웃을 사랑하지 않은 할례자나 세례자는
선택만 받고 본분은 하지 않는 사람이고,
특권만 받고 은총은 받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참으로 은총으로 받았다면
그 은총을 독점치 않고 이웃 사랑을 위해 쓰는 사람임을
오늘 신명기를 통해 가르침을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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