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8월 11일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Margaret K 2021. 8. 11. 06:39

2021년 8월 11일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클라라 성녀는 1194년 이탈리아 아시시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복음적 생활에 감명을 받은 그는 수도 생활에 대한 열망으로 클라라 수도회를 세웠다. 수도 생활에 대한 집안의 반대도 심하였으나, 오히려 동생 아녜스마저 언니의 뒤를 따라 수도자가 되었다. 클라라 성녀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본받아 철저하게 가난하고 겸손한 삶을 계속하였다. 1253년 선종한 그녀를 2년 뒤 알렉산데르 4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마태오 18,15-20)

 

For where two or three are gathered 
together in my name,
there am I in the midst of the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서철신부-


 클라라 성녀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복음적 삶에 감동받아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바치고, 사부인 프란치스코 성인을 본받아 가난의 삶을 살고자 합니다. 지금도 아시시의 산 다미아노 수도원에 가보면 당시 수도 생활이 얼마나 단순 소박하며 가난과 기도로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클라라 성녀의 침실은 맨바닥에 약간의 풀을 모아 침대로 사용한 흔적이 남아 있는데, 성녀가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의 가난함을 얼마나 닮고자 노력하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녀가 숨을 거둔 자리에 있는 장식 없는 십자가는 그녀가 한평생 얼마나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닮고자 노력하였는지 엿볼 수 있게 해 줍니다.

이 십자가를 바탕으로 한 예수님에 대한 관상은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 이어집니다. 1240-1241년 사라센 대군이 아시시에 쳐들어왔을 때, 심한 병 중에 있던 클라라는 무방비 상태에 놓인 아시시 시민들과 수도원을 구하고자 성광에 성체를 모시고 나가 적군 앞에 섭니다. 성녀가 기도를 마치자 성광에서 강한 빛이 흘러 나와 사라센 군대는 그만 두려움에 도망치고 맙니다.
무엇보다도 성녀의 가장 큰 미덕은 겸손한 생활입니다. 40년을 수도원장으로 지낸 그녀가 가장 좋아한 일은,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동료 수녀들의 발을 씻어 주고 식사 시중을 드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이신 그리스도의 거울을 매일 들여다보고 그 안에 있는 당신의 얼굴을 단장하십시오.” 매일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라는 거울에 비추어 보라는 성녀의 말씀입니다.
창조주 하느님의 피조물인 인간이 되시어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지극히 놀라운 겸손과 비할 수 없는 가난을 배웁니다. 십자가 위에서 고통을 당하시고,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시기를 바라신 그분의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을 거울 삼아 우리를 비추어 보아야겠습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몇 달 전에, 하나의 영상이 인터넷에서 화제였습니다. 달리는 지하철 안에서 한 남성이 담배를 피우자, 한 시민이 담배를 피우면 어떻게 하냐면서 말렸습니다. 그래도 계속 담배를 피우자, 손에 든 담배를 빼앗았습니다. 이제는 주변 사람들이 모두 나서서 말립니다. 그 뒤, 이 남성이 했던 말들입니다.


“그건 제 마음이잖아요.”, “솔직히 연기 마신다고 피해 많이 가요?”, “** 꼰대 같아.”….

술에 취해서 했던 행동도 아니었습니다. 맨정신에 자기 마음대로 하겠다는 생각에 그러한 행동을 했고 또 떳떳하다고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 자기 혼자만 살고 있다면, 이렇게 말하고 행동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자기 혼자가 아닌 함께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함께 살아야 해서 당연히 공동의 선을 지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함께 살 수 없으며, 세상은 혼란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종종 착각하는 경우가 있기는 합니다. 자기 혼자서 모든 것을 다하면서 사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러나 함께 살기에 그 많은 것을 누리는 것입니다. 지금 머무는 집을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기 혼자서 만들 수 있나요? 아마 많은 이가 누가 만들어 준 집에서 살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 먹고 있는 모든 것을 자신이 직접 생산해서 만든 것일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누군가가 생산한 것을 가지고 또 누가 요리해준 것을 먹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식으로 따져봐도 공동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마 주님께서도 이 사실을 잘 아셨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많이 들어본 구절 같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마태 16,19에 나오는 베드로에게 주어진 ‘열쇠의 권한’이었습니다. 그 구절과 이 구절이 똑같습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베드로에게 주어졌었던 권한이 이 말씀을 듣는 청중, 곧 공동체에게 부여된다는 것입니다.

공동체에게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열쇠를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공동체에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만 사는 것처럼, 나의 욕심과 이기심만을 내세워야 할까요? 아닙니다. 나의 구원이 공동체에 주어졌기 때문에, 이 공동체를 위한 나의 모습 자체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시지요.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바로 교회의 최소 구성원입니다. 모든 공동체 안에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공동체를 위해 내가 해야 할 것에 충실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산을 이김으로써 자신을 양성시킵니다. 자신과 싸움은 반드시 존재하고 거에서 이겨야 한다(에드워드 기번).

행복한 방법

사람들은 자신의 소원으로 ‘행복해지고 싶다’라고 말합니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지금은 행복하지 않다’라는 것입니다. 아직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행복해지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 삶에서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려 보십시오. 솔직히 더 많은 것을 갖고, 더 높은 곳에 올라야 행복할 것 같지만 이는 늘 순간의 행복일 뿐이었습니다. 결국 원하는 것을 얻는다고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순간의 만족일 뿐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그래서 영속적이고 자신과 필연적인 관계를 맺고 있어 자신을 비난하지도 않고, 누가 훔쳐 갈 수 없는 그런 대상을 원해야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바로 그 대상이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을 소유해야 진정한 의미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소유하려면 내면의 일치가 필요합니다.

사랑이 그 해답입니다. 하느님께서 가장 강조하신 사랑의 실천을 통해 우리는 내면의 일치를 이룰 수 있습니다.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사랑의 공동체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 사귐에 원한이 없기 위해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형제가 나에게 죄를 지으면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이르라고 하십니다. 그래도 안 되면 둘이나 셋, 그것도 안 되면 교회에 알리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개인적으로는 말할 자신이 없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잘못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것은 쉽습니다. 그래서 죄가 됩니다. 개인적으로 말해줄 용기가 없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이 왜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개인적으로 만나서 그 잘못을 이야기해주는 것을 두려워할까요?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서 그렇습니다. 상대와의 감정이 상하는 것을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내면에는 나의 감정도 다치기 싫고 상대도 잃기 싫은 복합적인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의 잘못을 개인적으로 이야기해 줄 용기가 없다면 어차피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집착이고 무관심입니다. 

 

    집착과 무관심은 반대 같지만 실상 같은 심리입니다. 애인이 없을 때는 결혼 안 하겠다고 했던 사람이 애인이 생기면 그 사람에게 목을 맵니다. 그러나 나밖에 모르는 사람이 좋습니까? 매우 무섭습니다. 내가 떠나려고 할 때 어떤 일을 할지 모릅니다. 그런 사람은 상대가 자신을 떠날까 봐 나에게 잘못을 해도 그 잘못을 절대 말하지 못합니다.

     

    이렇듯 사람에게 지나치게 집착하거나 상처 입지 않기 위해 상대가 나에게 잘못하는데도 그냥 참아내고 있는 것은 다 한 가지 원인에서 비롯됩니다. 바로 내가 속한 ‘공동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삼위일체 하느님 공동체의 모습으로 창조되었기에 공동체가 아니면 인간의 존엄성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만약 가족이 없는 아이라고 생각해봅시다.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 밑에서 살 수 없다고 집을 뛰쳐나왔습니다. 그러면 두 가지 극단적인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또 상처받기 싫어서 아예 사람들을 멀리하거나, 혹은 한 사람에게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입니다.

    집착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 아니면 더는 갈 곳이 없기 때문이고, 자기 안에 고립되는 이유는 더는 아프기 싫어서입니다. 두 가지 이유를 누군가가 자신에게 잘못해도 그냥 혼자 끙끙 앓던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던가를 선택합니다.

     

    김창옥 강사가 ‘어쩌다 어른’에 나와서 ‘학창시절 많이 놀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강의한 것을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왜 학교 다닐 때 놀던 여자들이 시집을 잘 갈까요? 시집을 잘 간다는 것을 세속적으로 표현해 볼게요.

첫째 남편의 경제력이 매우 좋습니다. 둘째 남편과 너무 사랑하는 사이입니다.

셋째 그 여성은 이제 놀지 않습니다. 교회 권사님이 되셨습니다. 모든 어둠을 물리치고 회개했습니다. 많이 놀아봐서 원이 없습니다. 오빠들도 너무 많이 만나봤습니다. 그러니 더는 한이 없습니다. 이제 만날 오빠는 주님밖에 없습니다.

넷째 항상 감사합니다. 이것을 자족(自足)이라 합니다. 스스로 만족하는 사람들이 행복합니다. 이 사람들은 원(願)이 없습니다.

  

    놀아봤다는 것은 무엇이냐면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무엇에 반응하고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 알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원(願)이 한(恨)으로 바뀝니다. 원과 한의 합성어가 무엇입니까? 원 + 한 = 원한. 원한이 있는 귀신은 어디를 떠돕니까? 구천! 현대 사회의 구천이 어디예요. 백화점. 아무것도 안 사면서 그냥 걸어 다닙니다.”

  

    웃긴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사람은 언제 원한이 쌓일까요? 사랑받지 못할 때입니다. 다시 말해 사랑의 공동체에 속하지 못할 때입니다. 그 원한으로 귀신처럼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안에 고립되거나 사람들에게 두려워 말도 못 하는 집착으로 휘둘리는 사람이 되는 길입니다. 마치 어디에도 안주하지 못하고 물건도 사지 않으면서 백화점을 계속 걷는 사람의 모습과 같고 구천을 떠도는 귀신의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이별의 아픔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요? 더 나은 사람을 사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전의 아픔이 감사함이 됩니다. 그 사람과 계속 사귀었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누군가 사귀고 있는 사람이 매력적인 이유는 그 사람이 돌아갈 공동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무슨 자신감 때문인지 자신에게 잘못된 것을 말해주고 충고도 해 줍니다. 왜냐하면, 상대가 자신을 떠나도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쁜 남자가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 가톨릭교회 공동체가 이런 역할을 해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는 하느님 나라의 표상입니다. 그 안에 머물면 더는 누군가가 자신을 미워하거나 상처를 주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원도 없고 한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공동체에 꼭 속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이 세상에서 개인적으로 용기 있게 사람을 회개시키기 위해서는 꼭 교회 공동체에 머물러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둘이나 셋이 당신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항상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공동체에 머무는 사람은 세상에서도 용기 있고 당당하고 또 이타적인 사랑을 하며 살 수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행복은 조건이 아니라 선택입니다행복은 추구의 대상이 아니라 발견의 대상입니다.’라는 글을 읽었습니다우리는 행복을 조건을 채우는 것으로 생각하곤 합니다채울 수 없는 조건 때문에 행복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외모학력재산능력명예를 행복의 조건으로 생각하면 행복한 사람은 소수일 수밖에 없습니다그것들을 얻기 위해서는 땀을 흘려야 하고노력해야 합니다땀을 흘린다 해도노력한다 해도 그것들은 모두에게 주어질 수 없습니다얻으려는 사람은 많지만 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나보다 더 많은 조건을 채운 사람 앞에 서면 나의 행복은 사라지게 됩니다조건은 비교하게 되고비교를 통해서는 행복에 도달하기 어렵습니다. 1등이라는 자리는 언제나 하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더 큰 아파트에서 살고더 좋은 차를 타고더 비싼 보석으로 치장하고더 많은 곳을 여행해도 행복하지 못한 사람이 많습니다. ‘라는 것은 늘 비교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지금도 결코 채워지지 않는 조건을 찾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먼 길을 떠나고 있습니다그러나 그것은 사막의 신기루와 같아서 결국 방향을 바꾸어야합니다소금물을 마시는 것과 같아서 채울수록 더욱 심한 갈증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볼리비아의 가난한 지역에서 선교사로 있는 신부님을 보았습니다조건으로 보면 결코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그러나 신부님의 모습은 언제나 행복해 보였습니다선교사가 되고 싶어 했고선교사의 길을 선택하였기 때문입니다비포장 길을 낡고 오래된 차를 몰고 덜컹거리면서 달려도 행복했다고 합니다선교사를 기다리는 공소의 신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해맑게 웃으면서 선교사를 환영하는 신자들을 생각하면 비포장의 덜컹거리는 길도 놀이공원의 청룡열차를 타는 것과 같은 기쁨이었다고 합니다신문사의 일을 비롯해서부르클린 한인 성당의 미사를 해 주고 있습니다신문사 옆에 있는 퀸즈 성당의 미사도 해 주고 있습니다몸은 피곤 하지만 저는 행복합니다제가 선택한 일이기 때문입니다사제의 강론을 듣기 위해서 미사에 참례한 신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그렇습니다행복은 어느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행복은 내가 선택하고내가 발견하는 것입니다흘러가는 구름들에 핀 꽃흐르는 시냇물에서도 행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지난봄에 심었던 코스모스가 하얗고빨간 꽃망울을 피우고 있습니다이제 바람이 불면 예쁜 꽃잎이 나를 위해서 춤을 출 것입니다그것을 보는 것도 행복입니다.

 

생각해 보니 예수님께서도 행복은 선택이라고 하셨습니다행복은 발견이라고 하셨습니다그렇습니다마음이 가난한 사람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정의를 위해 일하는 사람자비를 베푸는 사람온유한 사람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하늘나라가 그 사람들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예수님의 행복은 선택에서 오는 행복입니다하느님의 아들이 말구유에서 사람으로 오신 것도하느님의 아들이 조롱과 모욕을 받으면서 십자가를 지는 것도 행복입니다예수님께서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율법과 계명을 지키는 것에서는 행복을 찾기 어렵다고 하셨습니다나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남에게 베푸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서 행복은 발견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행복은 밭에 묻혀있는 보물과 같다고 하셨습니다행복은 아주 작은 겨자씨와 같다고 하셨습니다행복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행복은 어린아이의 마음을 갖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서 많은 행복을 발견하셨고그것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도 거저 받았으니기쁜 마음으로 나누어 주십시오.’

 

오늘 축일로 지내는 클라라 성녀는 1194년 이탈리아 아시시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프란치스코 성인의 복음적 생활에 감명을 받은 클라라는 수도 생활에 대한 열망으로 클라라 수도회를 세웠습니다수도 생활에 대한 집안의 반대도 심하였으나오히려 동생 아녜스마저 언니의 뒤를 따라 수도자가 되었습니다클라라 성녀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본받아 철저하게 가난하고 겸손한 삶을 계속하였습니다클라라 성녀는 행복했다고 생각합니다본인이 가난정결순명의 삶을 선택하였기 때문입니다그런 삶에서 행복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오늘 하루 내가 선택한 일에서 행복을 느끼면 좋겠습니다오늘 하루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에서 행복을 발견하면 좋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그대의 마음을 영원의 거울 앞에 놓으십시오. 그대의 영원을 영광의 광채 속에 두십시오!

 -양승국신부-

 

언젠가 아시시에 들렀을 때의 경건하면서도 아늑한 느낌이 아직도 손에 잡힐 듯 생생합니다. 특히 클라라 성녀와 동료 수도자들이 기거했던 다미아노 성당에 들렀을 때, 그 가난하고 소박한 분위기가 눈에 선합니다.

  

그 좁디좁은 공간에서, 처참할 정도의 청빈한 생활 가운데서도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는 얼굴로 자매들과 함께 찬미가를 불렀던 그녀였습니다. 가난이라고 다 똑같은 가난이 아니라는 것을 그때 느꼈습니다. 웬일인지 그녀의 가난은 우리들의 옹색하고 남루한 가난과는 달리 찬란하고 영롱했습니다.

  

클라라 성녀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한 분 계십니다. 가난과 겸손의 성인이자 제2의 예수 그리스도라 불리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십니다. 그가 지녔던 인간적 성품, 그가 추구했던 가치관, 그가 소유했던 신앙과 삶이 얼마나 매력적이었던지 당대 수많은 청년들이 그와 같은 길을 걷고자 세상을 등졌습니다.

  

그녀 역시 그들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스승이 주도한 가난을 통한 영적 쇄신 운동에 흠뻑 매료된 그녀 역시 뭇 남성들의 시선을 뒤로 하고 세상을 등졌습니다. 귀족 가정 출신 자녀로서의 풍요와 특권도 더 이상 의미가 없었습니다. 깜짝 놀랄만한 상속 재산도 자발적으로 포기했습니다. 

 

출가 이후 클라라는 프란치스코가 제시한 영적 여정을 단 한 치 오차도 없이 충실히 따랐습니다. 클라라의 영성은 프란치스코의 영성과 동일합니다. 가난과 겸손과 사랑입니다. 그녀가 자주 강조한 것은 그냥 가난이 아니라 겸손과 함께 하는 가난, 그리고 동시에 가난과 함께 하는 겸손이었습니다. 그녀의 생애 안에서 가난과 겸손은 다정하게 손을 잡았습니다. 그녀 안에서 이루어진 철저한 가난과 겸손의 실천은 자연스럽게 그녀를 그리스도의 뜨거운 사랑에로 나아가게 만들었습니다.

  

클라라의 삶이 스승 프란치스코와 다른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녀는 봉쇄구역 내에서 프란치스코 영성에 따라 관상 수도생활을 해나간 것입니다. 그녀가 평생토록 관상 수녀회 안에서 끊임없이 바라본 것은 프란치스코가 바라본 것과 동일입니다. 곧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동시에 성체 안에 머물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이런 그녀에게 사람들은 ‘복사판 프란치스코’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또는 ‘제2의 프란치스코’, ‘프란치스코의 영혼에서 나온 여인’, ‘프란치스코의 거울’, ‘프란치스코의 여성적 얼굴’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녀 자신도 스스로를 일컬어 ‘복되신 스승 프란치스코의 작은 나무’라고 즐겨 불렀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클라라는 지극히 겸손했습니다. 다미아노 성당에서 수도생활을 시작한 지 3년째 되던 해, 당시 아시시의 교구장이셨던 귀도 주교님께서는 극구 사양하는 그녀를 수녀원장에 임명하였습니다. 그녀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그 직책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수녀원장인 그녀였지만 수녀원의 허드렛일은 당연히 자신의 일이려니 생각하고 언제나 콧노래를 부르며 기쁘게 해나갔습니다. 그녀가 유독 좋아하던 일이 한 가지 있었는데, 동료 수녀들이 식사할 때 ‘서빙’하는 일이었습니다. 또한 밭일을 끝내고 흙 먼지투성이의 발로 들어오는 동료 수녀들의 발을 정성껏 씻어주는 일이었습니다. 발을 다 씻긴 그녀는 예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재빨리 수녀들의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클라라의 잠자리는 아무것도 깔지 않은 맨바닥이었습니다. 냇가에서 주워온 돌이 베개였습니다. 작디작은 빵 한조각과 물 한잔이 매끼니 식사였습니다. 실내장식이나 난방은 고사하고 아무런 설비도 안 갖춰진 누추한 거처에서 한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녀는 가난이 무엇인지, 추위에 떤다는 것이 무엇인지, 배고픔이 무엇인지, 피로에 지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실제로, 온 몸과 마음으로 깊이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모든 것을 더할 나위없는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성 보나벤투라는 그녀에 대해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클라라는 프란치스코의 정원에 핀 첫 꽃송이로서 마치 빛나는 별처럼 반짝였으며, 희고도 순수한 봄꽃과도 같이 향기로웠습니다. 그녀는 그리스도 안에 프란치스코의 딸이었으며 가난한 클라라회의 창설자였습니다.”

  

클라라는 한평생 봉쇄구역 안에서의 관상생활에 전념하였지만, 자신의 삶을 지상에서 가장 행복한 삶으로 확신하고 있었다는 것을 다음의 서한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나는 하늘 아래에서 내가 바랐던 아무도 훔쳐갈 수 없는 그 기쁨을 이미 소유하고 있기에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대도 주님 안에서 늘 즐거워하며, 슬픔이나 우울이 그대를 덮치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대의 마음을 영원의 거울 앞에 놓으십시오. 그대의 영원을 영광의 광채 속에 두십시오.”

 머릿수가 아니라 마음이다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사랑은 향기입니다. 아무리 숨겨도 멀리까지 퍼져갑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을 황홀하게 합니다”(이규경). 황홀한 사랑에로 열려있기를 바랍니다.

 

성무일도 기도에 보면,“겹겹이 둘러싸인 어두움 속에 내 마음 거짓으로 가득 하오나 하느님 전능으로 다스리시면 내 마음 백옥같이 희어지리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을 알면 빛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때로는 어둠 속에 있다는 사실조차 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누군가 그것을 일깨워줘야 합니다. 그래야 그가 바른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른 충고를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칭찬은 달지만, 충고는 한없이 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변의 머릿수가 아니라 마음입니다. 쓰지만 약이 되는 바른 충고를 해줄 수 있고 또 충고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소중합니다. 더더욱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고 하셨으니 한마음, 한 뜻을 이룰 수 있는 형제가 있다면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런 형제가 되어 주십시오. 인간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을 선호하지 말고 “주님의 이름으로” 모두를 품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실 믿는 이들에게 “충고는 하느님의 소리요, 하느님의 뜻”(성녀 안젤라 메리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충고를 한다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따라서 남을 충고하기 전에 자기 자신에게 충고해서 바꾸고 변화시키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또한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 그것에 대해서도 세심하게 생각해 보십시오”(프란치스코 교황). 공자께서도 “충언은 사람을 바로 서게 한다.”하였습니다. 먼저, 주님께서 내 마음을 다스리고 백옥같이 희게 만드시길 기도하면 주님은 그 마음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오늘은 나에게 주어진 쓴소리를 하느님의 소리로 듣기를 희망합니다.

 

깊은 산길을 가고 있는 사람에게 제일 무서운 것은 마주 오는 사람이랍니다. 그리고 산길을 가고 있는 사람에게 가장 반가운 것 역시 사람이랍니다. 사람이 제일 좋기도 하면서 제일 힘든 존재이기도 합니다. 좋을 때는 더없이 편하지만 틀어지면 그것만큼 불편한 것이 없습니다. 가장 친했던 사람이 가장 어렵고 힘든 사람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자기의 기대가 충족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됩니다. 내 기대와 상대의 바람, 그리고 허물조차 공유할 수 있는 마음이 커졌으면 좋겠습니다. 혹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위해 기도하는 날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진심을 주고받기까지 더 큰 사랑이 필요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복음: 마태 18,15-20: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조욱현신부-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15절) 어떤 사람이 나에게 잘못했을 때, 그래서 고통스러웠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힘으로써 자기 자신도 심한 상처를 입게 된다. 그런데 우리가 그 상처를 못 본 척할 수 있겠는가? 그가 넘어지는 것을 보고만 있겠는가? 그의 곤경을 못 본 척한다면 우리는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보다 더 나쁜 사람이다.

 

우리의 상처보다도 형제의 상처를 치료해 주어야 한다. 그래서 그가 수치심을 느끼지 않도록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야 한다. 그가 비난받는다고 느끼면 잘못해서 싸움이 될 수도 있다. 충고한다면서 몰아붙이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충고해 주질 않았다면 그는 파멸의 길에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충고할 때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그래서 말을 들으면 형제를 얻은 것이 된다.

 

그러나 그가 말을 듣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불러 타일러야 한다. 이는 공동체가 한 사람을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교회가 해결하도록 하라고 하신다. 그러나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17절) 하신다. 신앙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이교인처럼 행동하는 사람들과 속세의 이윤을 추구하며 사기와 거짓 맹세로 세금을 거두는 사람들처럼 대하라는 말씀이다. 그래도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여야 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18절) 교회의 말도 듣지 않는 사람이 단죄를 받으면, 이것은 하늘에 계신 어떤 분이 무효로 해 주시지 않는 한, 그는 매인 채로 있다. 훈계를 받아들이고 공동체로 돌아오는 것을 허락하면 그때는 풀리는 것이다. 매이는 사람은 충고를 한 사람이 아니라, 그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이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19). 하나가 되는 것은 생각과 의지의 일치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무엇을 청했는데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두 사람이 참으로 일치하지 못했거나 하느님의 뜻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의 탓이다. 하느님께서는 형제들의 평화와 일치와 화합보다 기뻐하시는 것은 없다.

 

“내 마음에 드는 것이 세 가지 있으니 그것들은 주님과 사람 앞에서 아름답다. 형제들끼리 일치하고 이웃과 우정을 나누며 남편과 아내가 서로 화목하게 사는 것이다.”(집회 25,1) 그러니 주님께서 둘이나 셋이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아버지께서 다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당연하다. 기도를 이루는 것은 사람의 수가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들의 신심과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크기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기꺼워하시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마태 18, 19)

-한상우신부-

가난 속에
참된 행복이
있고

가난 속에
참된
기쁨이 있다.

가난 안에서
이루어주시는
하느님이시다.

이루어주시는
하느님께
이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밖에 없는
우리들
가난이다.

가난이
회개의
삶이다.

가난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게된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받쳐주는
영적인
가난이다.

가난이
하늘이다.

가난하지
않고서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다.

가난하지
않고서는
열릴 수 없다.

가난하지
않고서는
십자가를
질 수 없다.

사랑한다는 것은
가난한 영혼이
된다는 것이다.

가난이
복음이다.

가난한
마음안에
탄생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우리모두는
하느님 안에서
가난한
인격들이다.

성녀 클라라는
하느님의
가난으로
십자가를
기쁘게
받아들이셨다.

온갖 기쁨은
가난으로부터
이루어지고
주어지는
선물이며
은총임을
믿는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형제애를 촉구하십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마태 18,15)
예수님께서 형제와 이웃 사이에서 흔히 일어나는 갈등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먼저 단둘이 만나 타이르고, 혹 화해에 이르지 못하면 증인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이야기하며, 그래도 안 될 경우 교회의 공적인 중재를 요청하라고 하십니다.

자칫 이 절차는 둘 사이에 해결하고 끝낼 일을 괜히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알려 일을 크게 만들고, 교회 공동체까지 개입시켜 더 골이 깊어지는 게 아닐까 오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과정을 제시하시는 건, 둘 사이에서 어떤 내외적 충돌이 발생하더라도 감정에 휩싸여 충동적으로 행동하기보다, 차근히 객관적 시선 앞에 스스로를 놓고 최선을 다해 화해의 노력을 다하라는 뜻이 아닐까 싶습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8,18)
우리가 이 세상에서 참 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재 같아도, 우리가 땅에서 풀어 주고 탕감해 주는 마음씀씀이가 하늘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니 대단하지요. 그래서 더욱 힘을 다해 자신과 형제를 자유롭게 만들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풀어 주는 만큼 우리 자신이 먼저 자유와 평화를 얻는다는 점이 이 방식의 신비입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20)
우리가 저마다 서로 다르고, 각자 불완전한 만큼 상대에게 오해받을 소지도 많은 죄인들이지만, 예수님의 이름이 있는 곳에 그분께서 현존하십니다. 다수의 공동체여도, 두어 명의 소수여도 마찬가지이고, 친교 상태는 물론 갈등 상황이어도 다르지 않습니다.

제1독서는 모세의 죽음과, 그에 대한 성경 저자의 평가를 전합니다.

"이스라엘에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신명 34,10)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온 힘을 다해 이스라엘을 이끌었던 모세는 약속의 땅을 목전에 두고 지상의 삶을 마칩니다. 성경은 모세가 므리바에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그 탓을 모세에게 돌리지만(민수 20,2-13 참조), 이 안타까운 결함도 모세와 주님 사이의 사랑이나 모세의 존재적 가치를 희석시킬 수 없지요.

"그는 주님께서 얼굴을 마주 보고 사귀시던 사람이다."(신명 34,10)
창조주와 피조물이 얼굴을 마주 보고 사귄다는 건 참 놀랍고도 매혹적이지요. 하느님은 모세뿐 아니라, 피조물 중에서도 특별히 당신의 모상을 나눠주신 모든 인간과도 실상 이런 관계를 맺고 싶어하십니다. 주님과 모세가 나누었던 특별한 사랑은 그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열린 가능성인 셈이지요.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 얼굴을 보여 주고 싶어하시고, 당신 마음을 내어주고 싶어 우리 주변을 서성이십니다. 당신께 관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응답하는 영혼을 찾고 계시지요. 그분은 우리(나)의 얼굴을 마주 보며 사귀고 싶어하는 하느님이십니다.  성녀 클라라는 우리가 그렇게 되도록 축복문을 남겼지요.

"주께서 당신의 얼굴을 여러분에게 드러내 보이시고 자비를 베푸소서. 주께서 당신의 얼굴을 돌리시어 평화를 주소서..."

거기에 더해서 주님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서로서로 이러한 친밀한 유대가 이루어지길 바라십니다. 저마다 부족함을 안고 사는 사람들 사이에는 늘 말도 많고 탈도 많기 마련이지만 원래 사람은 서로에 대한 배려와 존중, 용서와 화해, 사랑과 일치를 이루라고 불리웠지요. 크고 작은 갈등과 부딪힘 속에서 답이 없는 듯 막막할 때가 더 많지만, 그건 아직 우리가 과정 중에서 헤매고 있기 때문이지 희망이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하느님이 ...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네."(복음 환호송)
예수님께서 형제를 위해 조금만 더 애써 보라고 우리를 다독이시는 듯합니다. 정성을 다해 조심스럽게 형제에게 다가가 경청하고 용서하여 그를 얻는 것은, 우리는 물론 주님께도 참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바로 그 자리에 당신께서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시니 희망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마음에 떠오르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를 주님께 봉헌하고 용기를 내어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가는 은총의 시간 되시길 기원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으니 그 자리에 계시는 예수님과 함께 반드시 화해가 이루어지리라 믿습니다. 사랑으로 용기를 내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성녀 클라라가 그 축복에 함께 하실 겁니다.

성녀 클라라,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말씀 나누기 - 성녀 클라라 축일-나뿐 아니라 모두가 주님 정배되도록 (ofmkorea.org)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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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8월 14일 수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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