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7월 31일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Margaret K 2021. 7. 31. 07:33

2021 7 31일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이냐시오 데 로욜라 성인은 1491년 스페인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군인이 된 그는 전쟁에서 입은 부상을 치료받다가 현세의 허무함을 깨닫고 깊은 신앙 체험을 하였다. 늦은 나이에 신학 공부를 시작한 이냐시오는 마흔여섯 살에 사제가 되었고, 이후 동료들과 함께 예수회를 설립하여 오랫동안 총장을 맡았다. 그는 『영신 수련』 등 많은 저술과 교육으로 사도직을 수행하였으며, 교회 개혁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1556년 로마에서 선종하였고, 1622년에 시성되었다.


★★★

그 사람이 바로 세례자 요한이다.

죽은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능력이

어디서 솟아나겠느냐?
(마태오 14,1-12)


"This man is John the Baptist.
He has been raised from the dead;
that is why mighty powers are at work in hi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최종훈신부-

 

 모든 사람의 생각이 내 생각과 같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생각 가운데 언제나 내 생각이 옳은 것은 아님을 인정하는 데에도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은, 많은 사람의 다양한 의견을 듣고 그 의견들을 절충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서로 자신의 생각만을 주장하다 보면 다툼도 있고, 공동체에 분열도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양보하고 한 발 물러서서 서로 타협하고 절충점을 찾아가는 것은 어렵지만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하는 모습입니다.

타협은 그렇게 각자의 것을 내어놓는 데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타협하지 말아야 할 것도 있습니다. 절대 양보하지도, 물러서지도 말아야 하는 것이지요. 바로 하느님의 뜻이며 예수님의 가치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는 타협하는 헤로데 임금과 타협하지 않는 세례자 요한이 등장합니다. 인륜과 가족에 대한 사랑 앞에서 헤로데는 타협합니다. 또한 요한의 목숨 앞에서 자신의 체면과 자존심, 힘과 권력에 타협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말씀과 가치, 신념과 믿음 앞에서 자신에 대한 사랑과 세상의 가치와 타협합니다. 그렇지만 세례자 요한은 결코 타협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목숨과 타협하지 않았고 국가의 절대 권력이나 무력과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인기나 부와 명예와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생각에서 벗어나 다른 이들의 말을 경청하고 나와 다른 생각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게 오만과 독선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각을 양보하고 절충하면서 타협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만은 타협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통 앞에 중립이 없듯이 가장 가난하고 가장 아파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타협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의 권력, 돈과 경제적 원리 앞에서 하느님의 뜻을 양보하고 타협할 수 없습니다. 지금 무엇인가에 타협하고 있습니까? 스스로에게 “이 정도는 괜찮아!”라고 말하면서 타협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보았으면 합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영국의 심리학자 브레이저 박사는 자신의 삶이 불행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주로 다음과 같은 형식으로 말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나한테 1억만 생긴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 아이도 남들처럼 공부를 잘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잘 사는 사람과 결혼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미남(미녀)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들은 주로 ‘~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가정형 질문에 매달려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행복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에 부닥친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브레이저 박사는 ‘나는 ~라서(~가 아니라서) 다행이야.’라는 문장을 매일 4개씩 만들어 보라고 했습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두 다리로 걸을 수 있어서 다행이야.”

“나는 오늘도 먹을 수 있고, 잠잘 곳이 있어서 다행이야.”

“나는 두 눈으로 볼 수 있어 다행이야.”

결국 살아 있음 자체가 다행인 것을 깨닫게 되었고, 사람들은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말은 어떤 형식으로 하고 있습니까?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헤로데는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죄 없는 세례자 요한을 죽였는데, 세례자 요한과 같이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 사람은 놀라운 기적까지 행한다지요. 따라서 헤로데는 바로 이 사람, 예수라는 사람은 분명히 세례자 요한이 살아난 것으로 생각합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없는 것은 당연한데도 왜 이런 생각에서 벗어내지 못했을까요? 죄 때문입니다. 죄에 대한 벌만 생각하고 있기에 그는 편안함이 아닌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과거로 돌아가서 다시 상황을 바꿀 수만 얼마나 좋을까를 계속 소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복수하는 분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하는 분입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이제부터 죄를 짓지 않으면 사랑 실천에 힘쓸 수 있다면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두려움에 힘들어할 뿐입니다.

어떤 말과 행동으로 주님을 마주하고 있습니까? ‘~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가정형 질문에서 벗어나, ‘나는 ~라서(~가 아니라서) 다행이야.’라는 문장으로 지금의 순간을 행복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같이 모이는 것은 시작을 의미한다. 같이 협력해서 일하는 것은 성공을 의미한다(헨리포드).

일등석을 선택하신 이유

평생 가난한 자들의 행복을 위해 헌신하며 살아서 ‘가난한 사람들의 어머니’라고 불리움.

1975년 알버트 슈바이처상 수상, 1979년 노벨평화상 수상.

자신을 하느님의 연필, 특히 작은 몽당연필로 표현함.

누구일까요? 마더 데레사 성녀이십니다. 성녀는 평생 가난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을 하나 책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글쎄 비행기를 탈 때, 늘 일등석을 이용하셨다는 것입니다.

항공사에서 수녀님을 배려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은인의 도움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원래 편안한 삶을 사셨던 분이었을까요? 이코노믹석과 일등석의 가격 차이가 엄청나기에 사람들은 오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성녀의 큰 계산이 있었다고 하네요.

비행기 일등석에는 그녀에게 필요한 부자가 많았습니다. 그녀는 이 공간에서 그들과 소통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그들에게 돈을 가장 값지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비행기 안에서 많은 기부를 받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쓸 수 있었습니다. 일등석 타시는 이유를 알 수 있겠지요?

만약 성녀께서 다른 사람의 눈치를 봤다면 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을 위해 수녀님은 일등석을 선택하셨습니다.

 나쁜 사람 안되는 법: 사랑은 '나'를 포기하게 만든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 왕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자기가 죽인 헤로데가 되살아난 것이라 여깁니다. 두려움에 머리가 이상해진 것입니다.
    그는 동생의 아내와 살기 위해 그것을 비판하는 요한을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군중이 두려워 죽이지는 못하고 있었는데,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잘 추자 그녀의 뜻대로 요한을 처형하였습니다.

 

    헤로데는 왕이면서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정상적이지 않은 생각을 하고 군중과 가족들에게 휘둘립니다. 그리고 결국 예언자를 죽이는 나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 자신의 주인공으로 살다가는 나뿐인 사람, 곧 나쁜 사람이 됩니다. 나뿐인 사람은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나 자신의 주인공으로 삽시다.’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됩니다. 남에게 휘둘리지 말고 자기 주관대로 살자는 말입니다.
    책 제목들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야 나』,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 산다는 것』, 『잊지마, 내 삶의 주인공은 나라는 걸』 등의 제목으로 책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말은 그럴싸하지만 ‘나’로 산다는 것의 깊은 의미를 성찰하지 못한 말들입니다.

 

    헤로데도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노예가 되어버렸고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나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내가 나의 주인공이 되어 살려는 사람들의 결과입니다.
    ‘나’라는 말은 나의 정체성과 내가 사는 세상과 내가 사귈 사람을 규정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영화 ‘트와일라잇’은 ‘벨라’란 한 인간 여인을 사랑한 뱀파이어 ‘에드워드’와 늑대인간 ‘제이콥’ 사이의 이야기입니다.
    현실에서는 말도 안 되는 판타지 영화이지만 ‘나’라는 정체성이 어느 세계에 속하게 만들고 누구와 사귀게 되느냐를 말해주는 좋은 영화이기도 합니다.

 

    처음에 벨라가 뱀파이어 에드워드와 사랑에 빠집니다. 뱀파이어지만 착한 뱀파이어입니다. 동물들의 피만 먹고 사람의 피는 먹지 않습니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기로 작정한 몇 안 되는 뱀파이어 가족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사랑하는 벨라 옆에는 사람의 피를 먹는 뱀파이어들도 득실댑니다. 자신을 사랑하다가는 그녀의 목숨이 위태로운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녀를 위해 그녀를 떠납니다.

 

    이때 늑대 인간 제이콥이 그녀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녀는 뱀파이어가 아닌 한 보통 인간을 사랑하고 싶어 조금씩 그에게 의지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처음에 사랑했던 뱀파이어 에드워드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제이콥은 벨라가 걱정돼 전화를 건 에드워드에게 벨라가 죽었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에드워드는 살 의욕을 잃고 햇빛에 자신을 노출시켜 자살하려 합니다.

 

    결국, 이 사실을 알게 된 벨라는 자살하려는 에드워드를 구해주고 자신도 뱀파이어가 되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에드워드는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 뱀파이어로 만드는 것이 얼마나 큰 위험인지 알면서도 그 청을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인간들 안에서 숨어 살며 인간을 해치지 않고 모든 위협을 참아내며 살아가야 하는 뱀파이어의 삶은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벨라는 이것을 다 받아들입니다. 둘의 사랑이 너무 강렬했기에 뱀파이어는 그녀를 뱀파이어로 만듭니다.

 

    여기서 ‘나’는 늑대, 인간, 뱀파이어로 나뉩니다. 그리고 뱀파이어도 좋은 뱀파이어와 나쁜 뱀파이어로 나뉩니다. 이 모든 것을 나누는 것은 ‘나’라는 정체성입니다.
    내가 뱀파이어를 사랑하고 뱀파이어의 세상에서 뱀파이어를 사랑하려면 ‘나’가 뱀파이어가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에드워드는 뱀파이어지만 인간을 사랑하는 배신자로 낙인찍히고, 인간은 뱀파이어가 되기 위해 인간의 삶을 포기합니다.

 

    헤로데는 이 세상에 살며 이 세상 사람들과의 친교를 위해 예언자 요한을 죽였습니다. 나를 바꾸지 않기 위해 나를 바꾸기를 원하는 이를 죽인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믿는 ‘나’가 ‘사람’이라는 인간들이 세상에 속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요한은 이 친교를 넘어서는 더 높은 수준의 친교가 있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우리가 새장이나 어항에 머물며 그 안에서 아웅다웅 살아가는 것이 아닌 바다와 창공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고 그들과 친교를 나눌 수 있음을 예언한 것입니다. 

 

    우리가 자유로워지는 길은 나를 이 세상에 가둬놓는 ‘나’라는 정체성을 더 큰 ‘나’와 교환하는 것입니다. 벨라가 인간이라는 협소한 세상을 벗어나 영원히 죽지 않는 뱀파이어의 사랑을 하기를 원해 한 일은 인간이라는 정체성을 포기한 것입니다.그녀는 이제 “나는 뱀파이어입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상대를 위해 ‘나’를 내어주어 교환하는 행위입니다.

    나뿐인 사람은 나를 지키기 위해 누구와도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타인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고 죽이는 나쁜 사람이 됩니다.

 

    인간인 ‘나’를 포기하고 ‘나는 나다!’라고 하시는 그리스도를 ‘나’로 삼으면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의 법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나’로 살면 나를 살리기 위해 ‘나’가 속은 세상의 법칙대로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세상의 노예가 됩니다. 헤로데처럼 괜히 삶의 주체가 ‘나’가 됨으로써 세상의 노예이면서도 자기가 왕이라고 착각하며 세상의 노예로 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겐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른다는 말은 우리 전 존재의 정체성이 이제 세상 사람이 아니라 하늘 나라의 하느님 자녀들이라 믿는다는 뜻입니다. “나는 사람이야!”라고 말하면 그 사람은 세상에 속한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위선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른다면 나도 그리스도요 하느님께 속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나뿐인 사람, 곧 나쁜 사람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입니다. 자신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나’를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조재형신부-


가톨릭평화신문에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의 한 장면이 연재되고 있습니다작가는 그림을 설명하면서 당시 교회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저는 그림도 감상하면서 당시 교회의 모습을 이해 할 수 있기에 꼭 챙겨 읽습니다오늘은 지난 7월 4일에 연재된 환자를 돌보는 성 가밀로라는 그림과 설명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1500년대 초가 혼돈의 시대였다면, 1500년대 후반은 성인(聖人)들의 시대라고 합니다난세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이 있듯이혼돈의 시대에 많은 성인이 등장했습니다당시에는 경직된 교회제도유럽을 초토화 시킨 전염병교회의 타락새로운 계급(상인)의 등장이 있었습니다르네상스와 인문주의는 교회의 가르침과 권위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지 질문하였습니다종교개혁의 불꽃이 교회를 갈라놓았습니다.

 

교회는 트리덴트 공의회를 소집하여 시대의 징표를 읽고식별하여 대안을 제시하였습니다트리덴트 공의회의 주된 결정은 복음의 가치를 삶으로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권위와 조직으로 굳어진 교회의 심장에 영성(靈性)의 바람을 불어 넣는 것이었습니다영성의 바람을 일으킨 성인세상 속에서 복음의 빛을 실천한 성인들이 흔들리는 교회를 바로 세웠습니다성 예로니모 에밀리아나성녀 안젤라 메리치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성 필립보 네리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성 가롤로 보로메오성 루이지 곤자가성 알렉산드로 사울리십자가의 성 요한성 베드로 가니시오오늘 축일을 지내는 성 이냐시오 로욜라가 있습니다유럽의 진흙탕 속에서 탄생한 성인들은 유럽 안에서는 물론세계로 나가 이전 시대에 발전한 유럽의 인문주의 휴머니즘을 삶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문득 500년 후에 우리의 후손들은 2000년대를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해 졌습니다두 번의 세계 대전이 있었습니다이념의 갈등으로 냉전이 있었습니다우리는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그러나 교회는 영적으로 빈곤해지고 있습니다유럽과 북미는 성소자가 급격하게 줄고 있습니다가난한 이들을 품어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영적으로 목말라하는 이들에게 희망의 빛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교회의 조직은 견고하지만 성령의 바람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자본과 물질의 거대한 흐름이 교회에도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어쩌면 우리는 1500년대보다 더 큰 혼돈의 시대를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요한 23세 교황님은 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하였습니다교회는 항상 쇄신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굳게 닫힌 교회의 창문을 열자고 하였습니다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전 세계를 다니면서 사목방문을 하였습니다교회가 인류와 역사 앞에 잘못한 것들에 대해서 겸허하게 용서를 청하였습니다이분들은 모두 성인이 되셨습니다마더 데레사 성녀는 가난한 이들에게 깊은 위로를 주었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고 하였습니다목자는 양 냄새가 나야 한다고 하였습니다아마도 혼돈의 시대에 희망은 있었다고 평가할 것 같습니다한국에도 103위 성인과 124위 복자가 탄생했습니다.

 

오늘 이냐시오 성인의 축일을 지내면서 영신수련 23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시대가 변해도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 주는 내비게이션과 같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태어난 목적은 하느님을 믿고 알아서 구원받는 것입니다하느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것을 사람을 위해서 창조하셨습니다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유익하면 사용할 것이고하느님을 찬미하는데 무익하면 버릴 것입니다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유한 것보다 가난을 택할 수 있고건강보다 아픈 것을 택할 수 있고오래 사는 것 보다 일찍 죽은 것을 택할 수 있습니다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내안에 약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강점도 있습니다. 추함만 있는 것도 아니고 아름다움도 남아있습니다!

 -양승국신부-

 

언젠가 짧게나마 맛봤던 영신수련의 추억이 아련하게 떠오릅니다.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1491~1556)가 우리 신앙의 후예들을 위해 선물로 남겨주신 소중한 유산입니다. 지도 신부님의 안내에 따른 집중 관상기도를 통해 제 자신의 적나라한 내면 상태를 뚜렷이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제 영혼 안에 웅크리고 있는 짙은 어둠과 무질서를 확인하며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구나!’하는 실망감도 컸습니다. 그러나 계속된 성찰작업은 저를 한 가지 특별한 깨달음에로 안내했습니다. 

 

‘내안에 약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강점도 있구나. 추함만 있는 것도 아니고 아름다움도 남아있구나. 결핍만 있는 것이 아니고 넘치는 부분도 있구나.’ 하는 깨달음 말입니다. ‘이토록 큰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항상 나를 지속적으로 사랑해주셨구나!’ 하는 깨달음, ‘이토록 부족하고 불충실함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나를 당신 눈동자처럼 소중히 여기시는구나!’ 하는 깨달음 말입니다.

  

스페인 로욜라에 있는 이냐시오 성인의 생가를 들렀을 때였습니다. 고풍스런 성채 안에는 그분께서 탐독했던 책들부터 시작해서 그의 가족들이 쓰던 식기, 가구, 입던 옷들이 잘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성 이냐시오 대성당 중앙 제대 뒤편에는 그분의 청동상이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인의 손은 어떤 글귀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 글귀는 예수회 회원들의 살아가는 이유이자 모토였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하여!(Ad Majorem Dei Gloriam)’ 

 

예수회 회원들은 창립자 이냐시오 성인의 영성과 정신에 따라 오직 하느님에게 영광을 돌릴 뿐 자신을 드러내지 않겠다고 서원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하여!’

  

창립자나 카리스마는 다르지만 ‘동종 업계 종사자’인 동료 수도자로서 생각할수록 멋진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오늘 과연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혹시라도 나는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이 아니라 내 영광을 위해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심각한 성찰을 하게 만듭니다.

  

이냐시오 성인의 생애는 풍파 많고 우여곡절 투성이인 우리네 삶에 큰 위안과 위로를 건네주고 계십니다. 하느님을 향해 걸어갔던 그의 여정은 참으로 파란만장했습니다. 젊은 시절 그는 기사(騎士)로서의 큰 성공을 꿈꾸었습니다. 투철한 군인정신으로 무장한 그는 왕에 대한 대단한 충성심을 드러내며 목숨까지 걸고 싸웠습니다.

  

그러나 그를 위한 하느님의 뜻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1521년 침략해온 프랑스군과 맞서 싸우던 그는 큰 부상을 입게 됩니다. 날아온 포탄에 맞아 한쪽 다리는 부러졌고, 다른 쪽 다리마저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얼마나 상황이 심각했던지 의사는 고개를 가로 저었고 병자성사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은혜롭게도 이냐시오는 그 시점에서 자신의 인생 여정 안에 중요한 터닝 포인트 하나를 마련합니다. 주님의 자비에 힘입어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지게 된 그는 회복과정에서 ‘그리스도의 생애’와 ‘성인열전’이란 영성서적을 손에 듭니다. 처음에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읽기 시작했던 그 책들이 그를 천천히 주님께로 안내했습니다.

  

그는 조금씩 세상의 덧없음과 허무함을 알아갔습니다. 그리고 보다 가치 있는 일, 보다 의미 있는 일, 보다 영양가 있는 인생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세속적인 성공하기 위해 아낌없이 쏟아 부었던 에너지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왕의 충직한 기사를 꿈꾸었던 그는 이제 하느님의 충성스런 군사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창하는데로 주겠다고 맹세하며 약속하였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전해줍니다.

세례자 요한은 엘리야가 아합 임금과 이제벨 여왕을 꾸짖었던 것처럼헤로데와 헤로디아를 무섭게 꾸짖었습니다

들의 결혼이 합법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헤로데를 억누르려고 그러한 것이 아니라그의 행실을 바로잡으려고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부도덕한 이들은 덕을 달가워하지 않고거룩함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사실더러운 이들은 정결함을 보면 참지 못하고방종한 이들은 자비를 보면 참지를 못합니다.

인정 없는 자들은 사랑과 진실을 참지 못하고불의한 이들은 정의를 참지 못합니다.

어둠이 빛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요한은 곤경에 빠집니다.

 

오늘 <복음>은 의인과 악인의 극한 대조를 보여줍니다.

한편에는 음모를 꾸미며 악의에 찬 헤로데와 헤로디아가 있습니다.

그 반대편에는 진실하고 강직하며어떤 거짓에도 굴하지 않는 세례자 요한이 있습니다.

한편에는 폭군이지만 나약한 헤로데가 있고그 반대편에는 참수당하지만 힘 있는 세례자 요한이 있습니다.

한편에는 혀를 다스리지 못한 헤로데가 있고그의 혀는 잔치에서 맹세하지만 결국 타인의 죽음을 부르고 불의를 가져오고그 반대편에는 혀가 곧은 요한이 있고그의 혀는 감옥에 갇히지만 자기 죽음을 허용하고 의로움을 이룹니다.

또 헤로데가 받은 것은 요한의 머리지만 두려움이 되고세례자 요한이 받은 것은 쟁반이지만 왕관이 됩니다.

헤로데와 헤로디아는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따르지만요한은 이스라엘 백성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따릅니다.

악인의 혀는 거짓을 꾸미며 속임수를 쓰지만 의인의 혀는 진실을 말하고악인의 혀는 불의를 증언하는 반면에의인의 혀는 의로움을 증언합니다.

악인의 혀는 자신을 위해 타인의 목숨을 침해하지만의인의 혀는 타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줍니다.

결국폭군의 혀는 의인의 피를 부르고의인의 혀는 의로움을 외칩니다.

감옥에 묶어 두어도 외치며죽어서 쟁반 위에서도 살아 외칩니다.

어찌 보면한 푼 춤 값으로 팔려버린 요한의 목숨은 참으로 억울한 죽음처럼 보입니다.

마치 은전 30냥에 팔려버린 예수님의 목숨처럼 말입니다.

헤로디아의 조정을 받은 소녀가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주기를” 요청하듯마침내는 사제들과 유대 원로들의 조정을 받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머리가 쟁반에 올려 지듯예수님의 온몸이 십자가 위에 올려 질 것입니다.

이처럼의인 요한의 죽음은 “야훼의 종”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보여줍니다.

사실올가미에 걸려 넘어진 이는 의인이 아니라폭군이었습니다.

그리하여거짓을 꾸미는 악인의 혀는 결국 자신이 쳐놓은 덫에 걸려 넘어지고진실한 의인의 혀는 영광의 관이 씌워졌습니다.

그렇습니다헤로데가 요한의 머리는 베었어도 그의 소리는 벨 수가 없었고혀는 잠잠하게 만들었지만 그 소리는 가라앉힐 수가 없었습니다.

세월이 흐를지라도 폭군의 죄악을 고발하는 의인의 외치는 소리는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니남을 위해 우는 법을 빼앗아 가버린 이 시대에프란치스코 교종께서 표현한 것처럼 무관심의 세계화가 팽배한 이 시대에남을 위해 우는 법을 배워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진리와 정의를 위해 우는 법을 배워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 혀가 의로움으로 울게 하소서!

진리를 밝히는 성령의 불혀가 되게 하소서! 진정으로 사랑하여 울게 하소서.

이 한 몸을 태워 세상의 어둠을 태우게 하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마태 14,4)

주님!

제 혀를 다스리게 하소서!

제 혀가 헛된 맹세와 거짓의 덫에 걸리지 않게 하소서.

거짓을 꾸미지 않고진실을 말하게 하소서.

불평과 비난이 아니라진리와 의로움을 증언하게 하소서.

 

제 혀를 말씀에 묶어 두고,

온 몸이 혀가 되어 삶으로 외치게 하고서.

온 몸으로 외치는 십자가의 말씀을 살게 하소서아멘.

 하느님 앞에서 당당하라

 -반영억신부-


한 사기꾼이 사회적으로 내로라하는 사람들을 무작위로 선택하여 전화를 하였습니다. “내가 당신의 잘못을 알고 있으니 이 계좌로 돈을 송금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사회에 공개하겠습니다.”그랬더니 거액의 돈을 보낸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답니다. 그래서 그는 수차례 같은 방법으로 못된 짓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돈을 보낸 사람들은 억울함을 호소할 수가 없었습니다. 드러낼 수 없는 과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잘못을 범하면,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마음이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의 마음, 양심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모든 권력을 쥐고 있었지만 불안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두고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 난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생일잔치에 흥을 돋구어준 헤로디아의 딸에게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헛된 약속을 하였고, 소녀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올 것”을 청했습니다. 헤로데는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이 보는 앞이라 그 부당한 요구를 들어주고 말았습니다. 왕으로서의 위신과 체면을 유지하려고 큰 잘못을 저질러 놓고는 평생 마음의 자유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큰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의 마음은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허영심에 함부로 내뱉은 말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닦은 분입니다. 자기보다 더 훌륭한 분이 오시는 데 자기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마르1,7).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자기는 작아져야 한다(요한3,30). 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철저히 주님을 앞세웠고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래서 왕인 헤로데에게도 할 말을 다했습니다. 사실,“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진리를 뜯어 고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진리를 추구하고 발견하며 진리에 봉사하는 일입니다”(막시 밀리안 콜베). 그러므로 참으로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불의하게 고난을 겪으면서도, 하느님을 생각하는 양심 때문에 그 괴로움을 참아 내면 그것이 바로 은총입니다"(1베드2,19).

 

자기를 포장하는 허세를 부려 위신, 체면을 지키려 한다면 결국은 그것뿐 아니라 마음의 자유를 잃게 되고 근심, 걱정, 불안의 나날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오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실 것이며 여러분은 주님께서 마련하신 위로의 때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회개한 죄인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복음: 마태 14,1-12: 헤로데가 요한의 목을 베어 오게 하였다

 -조욱현신부-


헤로데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자기가 목 베어 죽인 세례자 요한이 더 큰 권능을 가지고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 부활했다고 믿었다. 그는 요한이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들추어내며 비난을 퍼부을까 불안했다. 세례자 요한은 기적을 행한 일이 없는데, 요한의 힘이 예수께로 들어가 기적을 일으키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헤로데는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다.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취하지 말라고 간하였다. 헤로데의 동생 필리포스는 헤로디아와 결혼을 했으나, 처남과 다투는 바람에 장인은 딸을 데려갔고, 형인 헤로데가 그 여자와 결혼을 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율법에 따라 이방 민족들처럼 되지 말고 불신앙에 물들지 말라고 경고하였는데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다. 살아있는 형제의 아내를 취하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요한은 도덕적 훈계를 함으로써 헤로데를 자극하였다.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4절) 라고 말함으로써 요한은 즉시 곤경에 빠지게 된다. 사악한 사람을 훈계한다는 것은 상대에게 해를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요한은 율법이 말하는 것, 구원에 합당한 것, 사랑에 합당한 것을 이야기했지만, 그 대가는 감옥에 갇히는 것이며 죽음만이 남아 있다. 인간의 마음을 바로잡고 죄가 되는 행실을 물리치게 하는 힘을 주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뿐이다. 요한이 얼마나 강직한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

 

헤로데의 생일날,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고 있다. 사람들은 그 춤에 빠져들었다. 관능적 쾌락이 매우 잔인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은 죄와 세상의 쾌락에 빠져 영원한 생명의 선물을 팔아버렸다. 딸은 제 어머니의 부추김으로 율법의 영광을 상징하는 요한의 머리를 가져다 달라고 한다. 그리하여 요한의 머리가 쟁반에 담겨 소녀에게 주어졌다(11절 참조). 잔치는 살인 현장이 되고 생일은 장례 날이 되었으며 그 식탁은 원형경기장이 되었다.

 

헤로데는 괴로워했다고 하지만, 괴로워하는 척했을 뿐이다. 그는 이미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다.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하여 불법이라고 말한 요한을 죽이려고 했던 헤로데였다. 이렇게 그는 스스로 몰락의 길을 걷는다. 우선, 동생의 부인인 헤로디아를 유혹함으로써 불륜을, 그 여인에 의해 세례자 요한은 죽임을 당했으며, 또 얼마 안 가서 평판이 나빠져 자신도 폐위되고 유배지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봉사직은 나 자신뿐 아니라, 모두가 함께 성장하고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참된 권위는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진리를 전하는데 굴함이 없어야 함은 물론이고, 또한 참된 봉사의 삶을 통하여 하느님의 권능이 다른 사람들 앞에 더욱 드러날 수 있는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마태 14, 12)

-한상우신부-


모든 시간에
함께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사랑과 은총의
하느님이시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에게서

창조의 본질인
사랑을 배운다.

사랑의 길은
언제나
십자가를
동반한다.

십자가는
회개와
정화의
길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은
식별을 통한
신앙의 참된
실천으로
드러난다.

실천은
반성과
성찰을 통해
우리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더 뜨겁게
만나게한다.

하느님을
만난다는 것은
이해와 공감이
더욱
깊어져간다는
것이다.

판단과 심판의
하느님이 아니라
사랑의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다.

언제나
우리의 일상은
분별과 지혜를
필요로한다.

분별과
지혜를 통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삶으로
나아가야한다.

이길이 모두를
살리는
복음의 삶이다.

복음의 삶은
하느님께서
중심이 되는
삶이며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생명의 참된
봉사의 삶이다.

이와같이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묻고 찾아가는
기도의
사람이며
식별의
사람이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 수련을 통해
놀라우신
하느님 사랑을
만나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예수님께로
삶의 방향을
돌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삶을 껴안는
신앙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두려움에 대해 일러주십니다.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마태 14,4)
세례자 요한은 동생의 아내와 결혼한 헤로데에게 지치지 않고 진언을 합니다. 혼인 관계에 관한 하느님의 뜻을 두려움 없이 전한 것이지요. 무소불위의 힘과 세력을 지닌 이에게 진리를 일깨우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위험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예언자들이 박해받고 죽음을 당한 것이지요. 결국 요한은 감옥에 갇히고 맙니다.

"헤로데는 요한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마태 14,5)
헤로데라고 뭐가 옳은지 그른지 모를 리는 없지만 욕정이 눈을 가리운 데다 주위 사람들이 문제 제기를 하지 않으니 어느새 옳고 그름의 기준마저 모호해졌을 테지요. 그렇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넘어가고 싶은 마당에 요한이 계속 양심을 건드리니 불편하기 짝이 없었을 겁니다. 불의한 권력자 해로데의 해법은 진리의 숨을 막아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을 죽이려 했지요. (사실 병행구절인 마르코 복음에서는 헤로데의 나름 어쩔 수 없었던 입장을 비교적 긍정적으로 설명하기는 합니다만...)

여기서 헤로데가 요한을 없애는 데 단 하나 걸림돌이 있다면 군중입니다. 그들이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존경하기 때문에 후폭풍이 두려웠던 게지요. 천하의 헤로데도 두려운 존재가 있었던 겁니다. 안타까운 점은 그 두려움의 대상이 절대자 하느님이 아니라 인간이란 점이지요.

그는 인간의 눈에 들고 싶어하고, 인간에 의해 좌지우지되며, 인정받고 칭찬받는 데 많은 에너지를 쓰는 성향인 듯합니다. 그런 헤로데였기에 경솔하고 경박하게 맹세를 남발하다 결국 체면과 허세를 지키려 역사에 길이 남을 불의한 살인을 저지른 셈이지요.

여기서 세례자 요한과 헤로데, 하느님의 사람과 악인, 예언자와 박해자 사이의 극명한 차이가 드러납니다. 바로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이와 사람을 두려워하는 이라는 차이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희년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너희는 이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한 해로 선언하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주민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레위 25,10)
희년은 말 그대로 기쁨의 해입니다. 그동안 삶의 질곡에서 얽히고 섥히면서 잃기도 하고 빼앗기기도 했던 본래의 자리를 되찾아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공적으로 보장해 주는 장이라 할 수 있지요.

희년에는 어떤 이는 자기 소유지를 되돌려받고 자기 씨족에게 돌아가며, 또 어떤 이는 그동안 자기중심적으로 축적하며 달려온 탐욕의 질주를 멈추고 과잉으로 축적한 것을 돌려주어야 하지요. 가나안 정착 시절 하느님께서 땅을 고루 나누어주시면서 모두에게 공정한 기회를 부여해 주셨던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겁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백성이기에 가능한 제도일 겁니다. 사실 현대의 자본주의적 경제 관념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요. 가진 자는 세습을 통해 계속 부와 권력을 장악하고 싶어하고 오히려 제도가 이를 뒷받침해 주니까요.

"이 해는 희년이다. 그것은 너희에게 거룩한 해다. 너희는 밭에서 그냥 나는 것만을 먹어야 한다."(레위 25,12)
마치 일주일에 하루 있는 안식일처럼 그 해에는 파종이나 추수, 수확 등의 모든 생산활동이 금지됩니다. 이를 그저 게으르게 놀고 먹기만 하라는 뜻으로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에만 온전히 의탁하라는 의미일 겁니다.

노동과 경제활동은 생계 유지와 자아 계발, 공동체 발전 등의 긍정적 효과가 있는 반면, 빈부격차의 심화와 차별 등의 불합리한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악이 사람 안에 깃든 하느님의 모상성을 자기중심성으로 비틀어 이기심을 부채질하기 때문이지요. 사람은 어느새 하느님에게서 골고루 나누어받은 재화에 대한 감사를 잊고 자기와 가족의 부와 안위를 위해 내달립니다. 그게 타인을 억압하고 해치고 짓밟는 일이어도 그렇게 하지요.

"너희는 너희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이다."(레위 25,17)
안식일 법이나 희년 제도는 결국 하느님 경외를 알게 해주는 장치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잊고, 눈에 보이는 사람을 의식하며 얕은 체세술과 끝없는 탐욕으로 제 이익만 추구하던 사람에게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분이 누구신지 제대로 깨닫게 해 주는 시간이 곧 희년인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은 갑자기 새로 만들어내는 무엇이 아니라,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그동안 자기를 가려 주고 보호하던 장치들을 내려놓고 벌거벗게 되면 찾아오는 근원적 인식입니다. 하느님 백성이라면 어느 때건 반드시 맞게 되는 각성과 통찰의 때이기도 하지요. 그 때와 시간, 방법이 각자 다를 테지만 은총의 순간임은 분명합니다.

우리 각자는 누구를 두려워하는지 자신의 영혼을 잘 살펴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백성이고 자녀라면, 그리스도의 벗이고 성령의 거처라면 진정으로 두려워하고 사랑해야 하는 존재는 주님이시지요.

희년의 실천이 세속을 살아가는 머리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쁨의 해, 희년 정신의 근본은 하느님 경외와 사람에 대한 사랑이니, 탐욕스럽고 방만한 물질주의 세상 안에서 부족하고 미약하나마 그 정신으로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일으켜 세우려 애쓰는 우리 모두는 참으로 복됩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복음 환호송)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8월 5일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