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7월 30일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Margaret K 2021. 7. 30. 06:49

2021년 7월 30일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마태오 13,54-58)
 

 

Taught the people in their synagogue.

They were astonished and said,
Where did this man get 
such wisdom and mighty deeds?
Is he not the carpenter’s so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최종훈신부-

 

 우리는 모두 예언자가 되어야 합니다. 국어사전의 정의와는 차이가 있지만, 예언자는 미래의 일을 미리 알려 주는 사람(미리 예: 豫)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사람들에게 전하고(맡길 예: 預) 그 뜻에 따라 살아가면서 그것이 행복임을 주위에 보여 주는 사람입니다.

예언자로서 살아가려면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과 만나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만나려고 기도하고 성사 생활을 하며, 이를 추억하고 점차 깊은 관계를 맺어 갑니다. 성경과 교리의 말씀을 통하여 하느님의 방법과 하느님의 뜻을 깨달으려고 노력합니다. 이처럼 예언자로서 하느님과 만나고 그분의 뜻을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그것으로 예언 직무를 완성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언자는 현실의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지금 이 시대에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적용하고 설명해야 할지를 정확하게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특히 하느님의 뜻에 반대되는 문제들을 바르게 지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불의함과 불공정, 인권 침해와 하느님을 섬기지 않는 오만함을 용기 있게 지적해야 합니다. 이 일은 예언자로서 선택이 아닌 의무입니다.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특히 사제로서 예언자의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첫 번째 역할만을 요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도와 성사 생활만 열심히 하면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는 일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제는 예언자로서 세상의 정의와 공정, 평화와 평등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때로는 시대에 대한 비판과 쓴소리를 해야 하고,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외면하며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언자로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시대의 징표를 바라보고, 그 징표를 하느님의 뜻과 가치로 해석하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자신의 이익 때문에, 자신의 것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느님의 뜻을 멀리하고 외면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자신의 안위만을 바라보는, 그래서 마침내 예수님을 외면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나자렛 사람들이며 유다인들입니다. 때로는 고향 사람들이나 친한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면서도 “예.”가 아닌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있는 예언자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신부 생활을 20년 넘게 하다 보니, 어느새 후배의 숫자가 많이 늘었고 그러다 보니 이름을 잘 모르는 후배 신부님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피부의 주름과 흰 머리카락을 보면서, 오십이 넘는 중년의 나이라는 것을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논어 위정편에 보면, 나이 오십을 하늘의 명을 알았다는 ‘지천명’으로 비유하지요. 그런데 저의 모습을 보면, 겸손보다는 교만의 모습이 더 많지 않았나 반성하게 됩니다. 대접받고 인정받으려는 모습은 분명히 ‘지천명’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고등학교 동창 중에 지금도 변함없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주변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친구가 있습니다. 어느 날 동창들과 함께 식사하던 중에, 한 친구가 주변을 즐겁게 해주는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제 너도 나이 먹을 만큼 먹었어. 그렇게 경박하게 굴다가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면 어쩌려고 그래? 이제 체통 좀 지켜라.”

이 말에 별일 아니란 듯 이렇게 말합니다.

“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그들의 문제일 뿐이지. 나와는 상관없어. 게다가 남들의 웃음거리를 면한다고 해서 내가 고상해지는 것도 아니잖아.”

자신의 삶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친구의 모습입니다. 남의 말과 행동에 흔들리지 않는 삶이 자기 고유의 모습으로 사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고향을 방문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떤 말을 했나요? 사람들은 당시에 많은 사람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예수님을 보면서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라고 부정적인 말을 하면서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사람은 누구나 고향을 사랑하는 법입니다. 왜냐하면 어렸을 때의 추억이 간직된 곳이 고향이니까요. 따라서 예수님도 고향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간직하고 계셨을 것이고, 이러한 사랑을 가지고 더 좋은 말씀과 놀라운 행적으로 고향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끌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기들이 예수님보다 더 낫다면서 드러내려는 욕심과 이기심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게 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의 기적을 직접 체험하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은 대접받고 인정받는 삶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며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만이 주님의 모습 역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어떤 일에 가장 중요한 순간은 바로 자신이 그 일에 관하여 생각하고 있는 습관이다(대니얼 카너먼).

죽음에 대한 준비

“당신의 수명이 1년밖에 남지 않았다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이 질문은 실제 미국의 한 신문에 실린 것입니다. 이에 사람들은 어떻게 응답했을까요?

부동산, 주식 투자 등으로 돈을 더 벌겠다는 물질적인 희망에 관한 내용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대신 이런 응답이 대다수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겠습니다.
그동안 못 해본 일들을 도전해보고 싶어요.
안타까운 이웃에게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우리는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물질적 희망에 중심을 두는 것이 아닌, 하늘 나라에서의 희망을 채워줄 것에 중심을 맞혀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합니다.

이것이 죽음에 대한 준비입니다.

 믿음 대신 챙기는 자존심, 그 가치는 얼마일까?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여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는 복음 내용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안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에 관해 증언하는 것을 무시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이 말씀대로라면 기적은 믿음이 있는 곳에서 일어납니다. 일단 믿고 기도를 할 줄 아는 사람에게 기적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자렛 사람들은 처음부터 마음의 문을 닫고 믿어보려고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기적이나 해 보라는 식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단 한 번 믿어보려는 열린 마음, 이것이 구원의 첫걸음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이 ‘믿음’ 대신 지키려 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자존심’입니다.

만약 예수님을 믿었는데 소문대로 예수님께서 사기꾼으로 드러나게 되면 사기꾼을 메시아로 여긴 자신들의 자존심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지만 자존심이 얼마나 가치가 큰 것이기에 영원한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모험까지 감행하며 지키는 것일까요?

  

    어떤 무신론자인 기자가 봉쇄 수도원에 와서 원장과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봉쇄 수도원에서 밖에도 못 나가고 고생만 하는 것 같은 수도자들을 안쓰럽게 여기며 원장에서 말했습니다.

    “만약 죽었는데 하느님이 없다면 여러분들이 하는 고생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수도원 원장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행복해서 여기 있는 것입니다. 믿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억지로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밖에서 사는 것보다 더 좋아서 여기 머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 이후에 하느님이 없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때 하느님이 계신다면 진짜 놀랄 사람은 당신일 것입니다.”

 

무신론자 기자는 정말 말도 안 되는 모험을 하는 것입니다. 그 고귀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정말 자존심의 가치는 얼마일까요? 영화 ‘친구’에서 보면 자신이 친구를 죽이지 않았음에도 건달이 건달다워야 한다며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무기징역을 선택합니다. 영화 ‘책 읽어주는 남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문맹이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 무기징역을 선택합니다.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파스칼은 아무리 계산해도 이 세상에서 주님을 믿고 사는 것이 훨씬 더 이익임을 밝혀냈습니다. 이 세상에서 믿고 사는데도 별 지장이 없지만, 만약 믿는 분이 계실 때는 믿지 않은 사람은 지옥이고 믿은 사람은 천국이 됩니다.

 

    쉽게 이해하자면 이렇습니다. 한 사람이 차도를 건너려고 하는데 하도 차가 쌩쌩 다녀서 무단횡단을 하다가는 사고 날 확률이 50%나 됩니다. 그러나 무단횡단을 하면 10초면 끝나지만, 육교로 건너면 10분은 걸립니다. 여러분은 무단횡단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육교를 선택하시겠습니까?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존재하실 확률은 50%입니다. 그러나 지옥 갈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존심을 세우며 믿지 않으려 하는 것이 정상적인 사고일까요? 도대체 우리가 목숨까지 내걸며 지키려는 자존심의 값은 얼마일까요?

     

    항우라는 사나이는 초나라의 명장이었습니다. 그는 7년 동안 70여 차례의 전투를 벌여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대군을 몰고 오는 한나라의 유방에겐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수십 명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강에 도착합니다. 배를 준비하고 있던 부하가 말합니다.

    “어서 강을 건너십시오. 강동 땅이 비록 좁다지만, 땅이 사방 천 리나 되며 백성은 수십만입니다. 그곳도 왕 노릇 하기에는 충분합니다.”

 

항우는 껄껄 웃으며 말합니다.

    “나는 강동의 8천여 장정들을 데리고 강을 건너왔는데, 지금은 한 사람도 남지 않았다. 설령 강동의 백성들이 나를 왕으로 추대할지라도 내가 무슨 면목으로 그들을 보겠는가?”

  

    항우의 이런 콧대 높은 자존심은 일생에 단 한 번의 패배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게 했습니다. 70전 1패의 1패가 그를 죽음으로 몰았고, 유방은 맨날 패하다 이 1승으로 한나라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때 항우의 오른팔이 ‘한신’이란 장수였습니다. 한신은 가난한 천민 출신이라 지방 불량배 가랑이로 기어 다녀야 했습니다. 물론 실력이 안 되어서가 아니라 지금 살인을 저지르면 그의 꿈이 물거품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를 본 구경꾼들의 조롱은 대단했습니다. 한때 귀족 출신인 항우에게 갔지만, 천민 출신인 자신을 무시하는 바람에 유방에게 갔던 것이고 결국 자신이 모셨던 전쟁의 신과 같은 사람이 자결하게 만드는 장수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 항우의 나이는 31세였습니다.    

 

    자존심 내려놓고 일단 한 번 믿어서 속으면 어떻습니까? 왜 자존심을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길까요?

    그러면 우리가 영원한 생명까지 걸고 지키려는 자존심의 가치는 얼마일까요? 가치는 누가 그것을 알아주고 사줘야 정해지는 것입니다. 금도 너무 흔해서 사주지 않는다면 그냥 돌에 불과합니다.

    나의 자존심은 다른 사람에게 얼마에 팔 수 있을까요? 아무도 안 사줍니다. 자존심을 지켰다고 아무도 안 알아줍니다. 왜냐하면, 각자의 자존심은 각자의 뱀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우리 자아를 귀하게 여겨 사주겠습니까? 혼자만 귀하다 여기는 것입니다. 빵 하나를 가진 거지에게 100만 원 수표를 주려고 하는데 그 빵을 놓지 못해서 그 수표를 못 받는 것과 같습니다. 자아가 자존심이 귀한 것으로 믿게 하여 이런 일을 벌이는 것입니다.

  

    저도 어머니와 찜질방에서 누가 늦게 나가는지 시합을 해 보았습니다. 힘든데도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더 오래 있으려 하는 것은, 주님께 무릎을 꿇느니 지옥을 선택하려는 자세와 같습니다.

    자존심을 쓰레기로 여기십시오. 이것이 결국 믿지도 못하게 만들고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자존심이 쓰레기가 될수록 자존감은 더 높아집니다. 그래도 되는 존재가 되게 해주시는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

 -조재형신부-

 

어릴 때의 기억입니다어머니께서는 집안의 대소사(大小事)를 기록하고기억하셨습니다아버지와 자식들의 생일을 기억하셨습니다음력이라서 양력으로 다시 계산하셨습니다특히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은 할아버지 할머니의 기일이었습니다그분들의 기일에는 시골에서 친척들도 오셨습니다어머니는 음식도 장만하였고잠자리도 새롭게 준비하였습니다꼭 잊지 않고 챙기는 것은 성당에 연미사를 신청하는 것입니다부활과 성탄은 가족들에게는 큰 축일이었습니다사순시기와 대림시기에는 판공성사를 보아야 했습니다어머니 생활의 중심은 신앙이었습니다성무일도를 빠짐없이 하였고늘 묵주기도를 하였습니다시간이 나면 대녀들과 연락하였고대녀들 모임에는 항상 갔습니다어머니는 저에게도 대녀가 아프면 기도를 부탁하였고대녀의 자식들의 혼배성사를 부탁하기도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의 성공과 재물 그리고 명예를 얻기 위해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기러기 엄마와 아빠라는 말이 있습니다자식의 공부를 위해서는 기꺼이 부부가 떨어져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학교공부만으로는 불안하기에 좋은 학원을 찾아서 아이들을 데리고 가기도 합니다한 가지 악기는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생일에는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 생일 축하를 해 주기도 합니다아이가 대학을 가기 위해서 준비하는 것 이상으로 부모님들도 함께 노력하고 준비합니다. ‘45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4시간 자고 공부하면 합격하고, 5시간 자고 공부하면 떨어진다는 의미입니다열심히 노력하고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졸업해서 좋은 직장에 취직해서 부유하게 사는 것도 축복입니다그렇게 되기 위해서 부모와 자식이 혼연일체가 되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그러나 삶의 의미와 가치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도 필요합니다좋은 책을 읽고 그 속에 묻혀있는 보물을 발견하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축제와 축일을 이야기 하셨습니다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약속의 땅으로 이끄신 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축제와 축일을 지키면서 하느님께 찬미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세상의 기준과 가치로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삶이 되었습니다그러한 삶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었고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하셨습니다한국의 초대교회 신자들도 첨례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첨례표를 따라서 축일을 지킬 수 있었고함께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첨례표의 기준은 예수님의 성탄과 부활입니다성탄 앞에는 대림시기가 있고부활 앞에는 사순시기가 있습니다주일 미사가 있고의무 대축일이 있습니다첨례표는 바로 전례력입니다신앙인들은 세상의 기준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교회의 전례력을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표징과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세상의 기준으로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예수님의 가문예수님의 학력예수님의 재산은 세상의 기준으로는 성공했다고 보기 어려웠습니다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예수님께서 그들의 위선을 비판하셨기 때문입니다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시메온과 한나는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매일 성전에서 기도하면서 신앙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자캐오는 예수님을 집으로 모셨고식사를 대접하였습니다신앙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우리는 예수님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까요?

 

 

주님의 말씀은 영원하시다바로 이 말씀이 너희에게 전해진 복음이다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특별한 기적을 청하지 않으시고, 매일 인내와 기도 속에 살아가신 우리의 성모님이십니다!

 -양승국신부-

 

성모님의 동정성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오늘 복음 구절을 즐겨 애용하곤 합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을 방문하신 후 회당으로 들어가셔서 감동적인 설교 말씀을 펼치시자, 듣고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라며 이렇게 외칩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마태오 복음 13장 55~56절) 

 

논리인즉슨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출산하신 후 4명의 형제들,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를 낳으셨고, 적어도 누이들 2명해서 총 7명을 출산하셨다는 황당한 주장입니다.

  

그들은 뭔가 착각해도 크게 착각한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유다 문학 안에서 ‘형제’란 용어는 무척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음을 간과한 것입니다. 친형제뿐만 아니라 사촌, 육촌, 팔촌까지 형제라는 용어 안에 포함시키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저희 수도자들 사이에서도 유사한 전통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저희는 서로를 향해 형제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복음을 바라본다면 충분이 이해가 가시리라 생각합니다.

  

성모신심, 특별히 성모님 발현에 대해서 깊이 연구한 적이 있습니다. 성모신심은 마치 깨지기 쉬운 보물 단지, 혹은 날카로운 양날의 검 같아서 신중 또 신중히 접근할 필요가 있더군요.

  

다른 무엇에 앞서 성모 신심은 철저하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둔 성모 신심이어야 마땅합니다. 혹시라도 과도한 성모 신심으로 인해 모든 그리스도 신심의 원천이자 기초이신 예수님을 향한 신앙에 누가 된다면, 그 신심은 100퍼센트 그릇된 신심입니다.

  

오랜 교회 역사 안에서 성모 신심은 부침을 거듭했습니다. 과도하게 남용될 때, 대혼란이 야기되었고, 수많은 여린 신앙인들이 고초를 겪었습니다. 성모 신심과 관련해 그릇된 지도자들로 인해 많은 신앙인들의 이단으로 빠지고 단죄를 받았습니다.

  

우리 가톨릭교회 교도권은 성모님 관련 사적 계시 앞에서 놀라울 정도로 냉정하고 차분합니다. 외적으로 드러나는 신비로운 현상 앞에서 절대로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을 두고 기도 안에서 이성적으로 접근합니다.

  

뿐만 아니라 보편 교회는 비록 공식적으로 공인된 성모 성지, 예를 들면 루르드나 파티마 성지라 할지라도 꼭 거기 가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가도 좋지만 굳이 막대한 돈과 시간을 투자해 순례하지 않아도 절대 야단치지 않습니다.

  

유명 성모 성지 순례를 가서 큰 은총과 축복을 체험하는 것도 좋지만, 매일의 삶 속에서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모범으로 남겨주신 위대한 신앙, 한결같은 겸손과 순명, 불굴의 인내와 극진한 이웃 사랑을 각자 삶의 자리에서 실천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찰라의 기적보다는 일상의 기적을 더 높이 평가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한국 가톨릭교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각 교구 주교님들께서 참여 즉시 자동 파문이라며, 그리도 강하게 당부하고 계시건만, 아직도 어떤 신자들은 보란 듯이 그곳을 드나들고 있습니다.

  

드나들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애꿎은 주변 사람들, 특히 성직자·수도자들에까지 접근해서 미끼를 던지고 있습니다. 대체 거기 가셔서 무엇을 보고자 하십니까? 거기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그토록 자랑하는 ‘황금향유’입니까? 입에 담기도 민망스러운‘성모님의 참젖’입니까? 유치찬란의 끝판왕인 ‘율신액’입니까? 끝도 없이 계속되는 치유와 기적입니까?

  

이런 어색한 신심은 성모님께서 가장 꺼려하시는 요소입니다. 이런 그릇된 신심을 추종하고 동조하는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보신다면 크게 진노하시리라 확신합니다.

  

우리의 성모님은 하느님의 어머니요 하늘의 여왕이시지만, 다른 한편으로 세상 따뜻하고 편안하신 자상한 어머니 같은 분이십니다. 구세주 하느님의 어머니가 됨으로 인해 겪으셔야 했던 그 숱한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특별한 기적을 청하지 않으시고, 매일 인내와 기도 속에 살아가신 우리의 성모님이십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에서하늘나라의 비유를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고향으로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그러자 사람들이 ‘놀라워했습니다.’(마태 13,54). 그러나 그분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아니오히려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마태 13,57).

        그런데 왜 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일까?

        대체, 왜 예수님을 알아보고서 놀라워하면서도 오히려 못마땅하게 여긴 것일까?

 

사실그들은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마태 13,54) 하고“그분의 지혜와 기적의 힘”에는 놀라워했지만“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마태 13,56)라고 하며그 지혜와 힘이 어디에서 온지를 알지 못했습니다그래서 그 권위를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그들은 자신들이 그분에 대해 알고 있는 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고자신들의 모름곧 그분의 지혜와 힘의 원천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은가?”(마태 13,55-56)

 

이처럼그들은 ‘나는 그를 안다’는 자기 생각곧 자신들의 고정관념선입관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곧 자신들이 안다.’고 여기는 이 생각이 완고함과 불신을 불러오고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결국자신이 아는 것을 믿고 섬기고 따른 우상숭배에 빠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고집부리는 사울을 꾸짖을 때사무엘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1사무 15,23)

 

사실우리는 이 우상을 벗어나야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됩니다믿음은 자기에게서 빠져나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지하느님을 자기의 좁은 지식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곧 믿음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뛰어넘어 있는 그대로의 그분의 인격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비록 자신이 알고 있는 그러한 예수님이 아니라 할지라도그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앎에 대한 완고함곧 자신이 안다.’는 사실로부터 벗어나고또한 자신의 무지에 대한 어리석음곧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리지외의 데레사는 말합니다.

       “하느님 사랑을 위하여 저는 가장 낯선 생각들도 받아들입니다.”

 

그렇습니다완고함은 불신의 씨요믿음은 하느님을 끌어당기는 자석입니다그러기에타인에게 자신을 개방하는 일나아가 개방을 넘어서 타인을 수용하는 일수용을 넘어서 타인으로 하여 자신의 변형을 이루는 일그것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이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태 13,57)

주님!

스승을 곁에 두고도 존경하지 않은 저는

수술을 받아야 살 수 있는 데도 의사를 믿지 않아 수술을 받지 않는 어리석은 환자입니다.

제 앎을 뛰어넘는 당신을 믿지 못하는 저는

안다는 제 생각을 섬기고 따르는 우상숭배자입니다.

주님겸손으로 존경하고응답으로 믿음을 드러내게 하소서아멘.

 선입견과 편견의 벽을 넘어라 

 -반영억신부-

 

미움이 가득한 사람에게는 상대방에게서 꼬투리 잡을 허물만이 보이지만 사랑이 가득한 사람에게는 선한 것이 보이게 마련입니다. 사랑은 사랑을 낳는 법입니다. 사물이 구부러져 있으면 그 그림자도 구부러지게 마련이듯이 마음이 비딱하면 나오는 것도 비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통하여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굽은 마음을 바르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라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마태13,54)하고 말하였습니다. 지혜의 출처를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지혜는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는 겁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지혜는 너무나 풍요롭고 깊어서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로마11,3).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그 신비한 비밀을 믿는 이들에게 드러내셨습니다(1코린1,24.2,7).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나시어 하느님의 은총을 받으며 날로 지혜가 성장하였으며 당신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루카2,40.콜로2,3). 그리고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며 거룩한 분을 아는 것이 곧 예지”(잠언9,10).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나아간다는 말은 하느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모든 지혜의 근원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지혜는 인생의 종합적인 사리 판단력입니다. 선한 것과 악한 것, 바른 것과 그른 것,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에 해야 할 일을 아는 것, 어떤 상황 안에서 그때그때 무슨 말과 행동을 할지를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입니다.

 

지혜는 인생의 올바른 방향감각입니다. 한 번 뿐인 나의 인생여정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지인 하느님의 나라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도록 그 방향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지혜는 균형감각, 조화 감각입니다. 균형과 조화가 깨지면 불행해집니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면 불행합니다. 하느님과 세상,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의 조화,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이뤄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느님말씀 안에서 균형과 조화의 올바르고 절대적인 가르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세상은 스스로 똑똑하고 잘났다고 내세우는 지식의 소유자 보다는 주님의 말씀을 헤아리는 지혜로운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지혜로운 삶 안에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동네 사람들은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하면서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소위 가문도 별로이고 배움도 많지 않은, 엘리트도 아닌 사람이 어떻게 저런 가르침을? 잘난 척 하지마라! 하고 생각한 것입니다.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그들의 뿌리 깊은 선입견이 진실을 왜곡하고 예수님의 진면목을 볼 수 없게 만들었으며 결국은 믿음이 없는 그들에게 기적을 일으킬 수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삶의 여정에서 무엇을 못마땅하게 여기는지요? 혹 내 뜻에 맞지 않는다고 무조건 불평불만 하는 것은 아닌지요? 내 마음의 옹졸함이 불평을 키웁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방문에는 '불평금지' 스티커가 붙여있답니다. 내 삶의 여정에서 무엇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살펴야 하겠습니다.

 

자기정보가 다 인양, 그리고 확정적인 것으로 여기는 섣부른 앎이 병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차라리 모르는 게 약입니다. 사실 별것 아닌 것 같아도 부정적인 생각과 판단을 바꾸면 변화가 옵니다. 문제만 바라보고 부정적인 생각에 골몰하면 모두가 피곤하지만 그 생각을 바꾸면 자신도 바뀌고 세상도 바뀝니다. “뿌리 깊은 선입견은 대상을 왜곡되게 보게 하는 색안경이 되어 진실을 가립니다”(함께야). 내면을 모른 체 외면만을 보고 판단하고 평가하는 어리석음을 거두어 주시길 기도합니다. 선입견과 고정관념뿐 아니라 편견의 시선도 바로잡아주시길 청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나자렛에서 무시를 당하시다.>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마태 13,54-58).”

 

1)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집안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작은 시골 마을이었으니,

마을 사람들은 서로를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활동을 시작하시기 전에 고향 마을에 계실 때에는

목수 일을 하셨습니다.

마르코복음에 “저 사람은 목수로서” 라는 말이 나옵니다(마르 6,3).

당시 상황을 나자렛 사람들의 입장에서 이렇게 재구성해 볼 수 있습니다.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며 목수인 예수가

어느 날 갑자기 세례를 받겠다면서 세례자 요한에게 갔다.

그리고 몇 달 뒤에 랍비의 모습으로 제자들을 거느리고 고향에 나타났다.

나자렛 사람들은 목수 일을 하던 사람이 랍비 행세를 하는 것도 못마땅했고,

예수가 다른 랍비들보다 더 ‘권위 있는’ 설교를 하는 것도,

또 기적의 힘으로 병자들을 고쳐 주는 것도 못마땅했다.>

아마도 나자렛 사람들은 그 전부터(예수님의 어린 시절 때부터)

예수님과 예수님의 집안을 무시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목수라는 직업 때문에, 또 가난했기 때문에 무시했을 텐데,

요셉이 세상을 떠난 뒤에 젊은 과부 마리아와 그의 외아들만 남은 상황에서는

더욱 무시했을 것입니다.

 

2) 나자렛의 상황을 조선시대의 상황으로 바꿔서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기만 하던 가난한 목수 예수가 어느 날 갑자기

과거 시험에 장원급제를 하고 금의환향했다면, 고향 사람들은 놀라기도 하고

부러워하기도 하면서 예수를 열렬히 환영했을 텐데, 예수는 과거 시험을

본 적도 없으면서, 또 유명한 대학자 밑에서 공부한 적도 없으면서,

갑자기 고향에 돌아와서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를 무시하고 비웃고 못마땅하게 여겼다.

사람들 중에는 그를 미쳤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다.

(마르코복음 3장 21절에,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한 친척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러 나섰다는 말이 나옵니다.)>

춘향전에서, 장원급제를 하고 암행어사가 된 이몽룡은

거지 모습으로 남원에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겉모습만 보고 그를 거지로 대했습니다.

만일에 이몽룡이 처음부터 암행어사의 신분을 드러내고 포졸들을 거느리고

나타났다면, 변사또를 비롯한 탐관오리들은 자기들의 부정부패를 모두 감추고

이몽룡을 열렬히 환영하고 섬겼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이몽룡은 암행어사의 직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 이 말은, 예수님께서 일부러 당신의 신원을 감추셨다는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고, 어떤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서

그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사람들의 위선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3)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낮춤’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6-8).”

예수님의 ‘낮춤’은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신 일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마태 18,14).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과 같아지셨습니다.

(무시당하면서 살고 있는 사람들과 같아지셨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무시한 나자렛 사람들은, 평소에 ‘작은 이들’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교만한 자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만 무시한 것은 아니고,

자기들보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늘 무시하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회개하지 않고, 그런 교만을 끝까지 버리지 않는다면,

즉 ‘작은 이들’과 같은 위치에서 사랑을 실천하기를 끝까지 거부한다면,

최후의 심판 때에 ‘영원한 벌’을 선고받게 될 것입니다(마태 25,41-46).

 

4) 예수님께서 당하신 일을 사도들도 당했습니다.

유대 최고의회 의원들은 베드로 사도와 요한 사도를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들’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사도 4,13).

그들은 바로 그 생각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말이니 들을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편지를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사실 ‘그의 편지는 무게가 있고 힘차지만, 직접 대하면 그는 몸이 약하고

말도 보잘것없다.’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2코린 10,10).”

바오로 사도의 외모는 별로 볼품이 없었던 것 같고,

직접 말로 하는 설교도 그렇게 잘하는 편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 가운에는 바오로 사도의 외모와 말주변만 보고

바오로 사도를 무시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메시아(구세주)로 믿지는 않고 그저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 정도로만 생각하거나, 자신의 종교를 세우려다가 실패하고

십자가형으로 처형당하고 죽은 불쌍한 사람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로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자기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실의 전부라고

착각하는 것은, 보아야 할 진리를 못 보고 있다는 점에서도 어리석은 일이고,

‘구원의 은총’을 받지 못한다는 점에서도 어리석은 일입니다.>

 

5)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을 모르고 살던 이방인들은 나의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데,

하느님을 알고 있고 믿고 있다는 너희는 왜 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느냐?”

라고 유대인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라는 말은,

대부분의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안 믿어서 병자 치유를 청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몇 명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 청해서

치유의 은총을 얻었음을 나타냅니다(마르 6,5).

 복음: 마태 13,54-58: 저 사람이 저런 지혜와 능력을 어디서 받았을까?

 -조욱현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고향에 가셔서 회당에서 가르치셨지만, 예수님을 고향 사람들은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 고향은 나자렛이나 베들레헴보다도 그분을 거절한 유다 전체를 의미한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57절)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1코린 1,23)로 박해를 받으셨지만, 계약과 무관했던(에페 2,12 참조) 다른 민족에게서는 존경을 받으신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이기까지 했던 것을 예수님도 당하게 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 회당은 악의에 찬 믿지 않는 사람들, 사랑이 아니라 미움으로 가득 찬, 못되고 버릇없는 사람들이 모였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54절) 그러자 그들은 놀랐다. 그들이 놀랐다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놀란 것이 아니라, 무시와 분노로 끓었기 때문이다. 그 놀람은 찬양하는 마음 때문이 아니라, 시샘 때문이었다.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54절)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지혜를 주시고 놀라운 일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이다. 솔로몬은 백성들을 잘 다스리기 위하여 하느님께 지혜를 청했고 그것을 받았다. 그것은 자기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오만이 아니라, 덕으로, 교만이 아니라, 지혜로,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다스리기 위해서였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55절) 이 말은 예수님을 헐뜯는 말이기도 하지만, 인간보다 더 거룩한 분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분의 가족들과 친척들을 보면서 그러한 능력이 나올만한 증거를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그분을 믿지 않고 못마땅해하기만 하였다. 또한, 그들의 불신은 진실을 보는 눈을 막아버렸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하느님께서 사람 안에서 이런 일을 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고향에서 기적에 그리 마음을 쓰지 않으신다. 그분은 기적만큼이나 놀라운 가르침을 주셨다. 그래서 나자렛 사람들은 그 말씀의 권능에 놀라고 감탄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를 안다는 이유로 그분을 무시했다. “개천에서 용 났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별 볼 일 없다고 여기는 가정에서 훌륭한 자녀가 나온 경우가 많지 않은가?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1) 나자렛에서도 그분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흠을 잡지 못하고 그분의 가족들만 들먹이며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기적을 행하시지 않는다. 가장 잘 안다고 하는 고향 사람들처럼 우리도 우리의 잘못된 삶으로 우리 이웃을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면서 우리 가운데 계시며 구원을 주시는 주님을 거절하고 몰아내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마태 13, 55)

-한상우신부-


목수의 아들이
부활할 것이다.

인신공격을
멈추고
삶의 존엄함을
되찾을 시간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의
문을 여시듯
편견의 문을
여신다.

너무나 쉽게
우리는 우리
이웃의 삶을
평가하며
살아왔다.

평가하는
이웃들을 통해
우리는
우리자신의
실체를 다시금
보게된다.

편견의 중심에는
우리의 이기적인
무지(無知)가 있다.

편견을 부수면
세상과 사람이
달리 보인다.

복음은
다름아닌
편견을
부수는
인격의 참된
기쁨이다.

인관관계의
재조명이
필요하다.

존중이
필요한
나와 너의
관계이다.

우리모두는
같은
사람들이다.

아무런
생각없이
받아들인
선입견에

많은 상처를
받는 우리들이다.

공동체는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살고있는
곳이다.

그러기에
존중과 배려
대화와 인정이
필요한 곳이다.

공동체는
편견에 의해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되어오신
하느님께서
이끌어가시는
선물이다.

낮아지신
하느님의
삶이

우리의 편견과
선입견을
존중과 감사로
바꾸어놓는다.

저마다의 삶은
하느님 안에서
존중받아야 한다.

복음은
존중의
실천이다.

목수의 아들이
복음이 되셨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축제를 대하는 자세를 이야기하십니다.

"거룩한 모임을 열고, 생업으로 하는 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레위 23,7.8.35.36)
제1독서인 레위기의 대목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 할 거룩한 모임, 곧 주님의 축일들이 나열됩니다. 대부분의 축제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키시어 자유를 선사하시고 약속의 땅에 자리잡도록 이끄신 구체적 역사를 기억하고 경축하며 계승하려는 기능이 있습니다.

축제는 기쁨의 시간입니다. 일상성을 잠시 멈추고 역사적 의미를 지금 여기, 현재로 끌어와서 그 안에 들어가 즐기는 시간이지요. 평소에는 일상의 생활과 의무 등을 충실히 지켜나가는 것이 중요했다면, 축제의 시간에는 나름의 의미와 기억, 몰입과 참여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로는 일탈과 예외성의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축제의 시간에 들어서면 평범히 살아오던 시간과 공간 에서 분리되어 "거룩한 모임" 즉 거룩한 시공간으로 들어갑니다. 그 안에서는 일상성이 정지되고 의미 위주의 특수성이 지배하지요. 그래서 주님은 반복해서 누누히 "생업으로 하는 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것입니다.

평소에는 장려되는 노동이지만, 일정 시간 일손을 놓고 축제에 참여하면서 기억의 정화와 새로운 경험을 통해 구성원들 간의 결속과 소통이 강화되고 축제의 주인이신 하느님과도 더욱 친밀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축제는 기쁨의 시간이고 기쁨의 공간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고향 방문기를 들려 줍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마태 13,55) 
고향에 오셔서 회당에서 가르치신 예수님께 못마땅한 눈초리들이 꽂힙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과거를 너무 잘 알아서 그분 입에서 나오는 하느님의 말씀이 오히려 걸림돌이 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들이 일상성 안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출생부터 부모, 형제자매, 직업과 생활 형편, 학력과 자격, 가문과 신분 등 모든 걸 섭렵하고 있습니다. 기저귀 차던 시절, 코흘리개 시절, 성장기와 청년기 등 그들 눈에 감추어진 것은 하나도 없지요. 누군가의 일상적 정보를 다 안다고 착각할 때 사람은 편견의 늪에 빠져들기 쉽습니다. 모든 존재 안에는 일상성과 예외성(특수성)이 함께 혼재하기 때문에 본질을 놓칠 수 있는 까닭입니다.

오시기로 되어 있는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신원은 고향 사람들의 육적인 눈에 드러나지 않았지요. 그분은 죄악에 묶인 이들을 자유와 해방으로 이끄실 안식일의 주인이시며 하느님과 함께 모든 축제의 주인이시지만, 놀라운 예언과 기적의 능력조차 고향 사람들이 안다고 자부하는 일상성과 배치되면 받아들여질 수 없습니다. 편협하고 선입견에 지배를 받는 이들은 예외성과 특수성에 경탄하며 축제를 즐길 개방성이 고갈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미태 13,58)
기적은 일상성을 초월하는 대표적 표징입니다. 믿음 역시 논리와 계산으로 점철된 일상의 질서를 넘어서는 모험이며 투신이고요. 그러니 믿음이 없는 곳에 기적이 있기 어렵겠지요. 역으로, 예수님도 누차 말씀하셨듯이, 기적과 믿음은 서로 호응합니다.

우리에게는 주일과 축일, 대축일이라는 교회의  공적 축제의 시간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개별적으로는 각자의 생일과 영명 축일, 세례와 견진, 서원이나 서품, 혼인 등의 각종 기념일 또한 주어졌지요.

그러고 보니 우리는 영육으로 풍요로운 존재라는 걸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일상의 평범하고 단순한 순례길 구비마다 기쁨과 활력이 되는 축제의 장이 마련되어 있고 우리는 그때마다 각자의 파스카 구원 여정을 되새기며 주님과 한층 더 친밀하고 뜨거운 관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단, 축제를 즐기고 그 열매를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습니다. 일상에 매몰되어 다가오신 주님을 놓치지 않도록, "내가 다 아는데~, 원래~, 그럴 리 없지~" 하는 편협한 자의식을 훌훌 털어버려야 하지요. 열린 마음이 꼭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일상과 축제의 리듬 안에서 열린 믿음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축복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축제의 주인이신 주님을 더욱 신명나게 해드릴 것이고, 주님께서도 그 안에서 당신 사랑의 기적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은총 가득한 축제들을 마음껏 기뻐하며 즐기시길 기원합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8월 2일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