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24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세례자 요한은 사제였던 즈카르야와 성모님의 친척인 엘리사벳 사이에서 태어났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 예수님의 이 말씀처럼, 세례자 요한은 주님에 앞서서 그분의 길을 닦은, 구약과 신약을 이어 주는 위대한 예언자이다. 그는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라고 고백하는 겸손한 사람이었다.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 임금의 비윤리적 생활을 책망하다가 헤로데의 아내의 간계로 순교하였다. 그는 ‘말씀’이신 주님의 길을 준비한 ‘광야의 소리’였다.
★★★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루가 1,57-66.80 )
He asked for a tablet and wrote,
“John is his name,”
and all were amazed.
Immediately his mouth was opened,
his tongue freed,
and he spoke blessing Go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형순신부-
세례자 요한이 탄생합니다. 우여곡절을 거쳐 세상에 탄생합니다. 복음서에는 그의 탄생이 매우 놀라운 일로 묘사됩니다. 먼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이 그 이유입니다. 이웃과 친척들에게,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 엘리사벳이 출산하였다는 사실은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셨음을 뜻하기에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그의 아버지 즈카르야입니다. 요한의 탄생은 가브리엘 천사를 통한 예고부터 시작됩니다. 탄생 예고 이후에 천사가 예고한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즈카르야는 벙어리가 됩니다. 요한이 태어나고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기록되고서야 그의 입이 열리고 혀가 풀리면서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하면서 이 이야기를 화제로 삼습니다. 만일 이야기가 여기에서 끝나면 요한의 탄생이 놀라운 것은 그의 부모 엘리사벳과 즈카르야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의 탄생이 놀라운 마지막 이유가 등장합니다. 그의 탄생과 관련된 소문과 함께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이 던져지면서, 엘리사벳도, 즈카르야도 아닌 요한이 특별함의 이유가 됩니다. 복음사가는 그의 탄생이 특별한 이유가 바로 요한 자신임을 알려 줍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자비와 기적을 통해서 세상에 태어난 특별한 인물,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런데 그는 더 큰 특별함과 놀라움을 위하여 자신을 낮추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마르 1,7). 자신이 지닌 특별함에도 예수님 때문에 모든 것을 스스로 낮춘 겸손한 세례자 요한입니다. 우리도 요한만큼은 아니지만 매우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탄생도 특별하고 놀라웠습니다. 그런 우리가 예수님을 위하여 겸손하게 우리 자신을 낮추고자 노력한다면, 세례자 요한을 닮아 가는 한 걸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사회생활에서 가장 힘든 일은 남이 나를 이해하지 못할 때일 것입니다. 그런데 나를 온전히 이해해 준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이해하지 못할 때, 상대는 ‘나’를 ‘오해’하게 됩니다.
오해는 다음과 같은 경로로 생깁니다. 첫째, 남이 이해 못 하는 말이나 행동을 내가 별 뜻 없이 해서 생깁니다. 둘째, 남이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나의 것과 다른 경우입니다. 셋째, 남이 내 모습에서 과거의 누군가를 무의식적으로 떠올려서 오해했을 가능성입니다.
이해를 받는다면 상관없지만, 오해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오해를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분명 오해는 화나고 속상함을 가져오게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무서워서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한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됩니다.
우리가 쓰고 있는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도 한문을 숭상하는 학자들의 오해를 받았었습니다.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 장군도 무능력한 조정의 오해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도 오해를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요한 세례자는 어떻습니까? 그 역시 사람들의 오해를 받았습니다. 광야에 나가서 비참한 생활을 하는 모습에서 얼마나 많은 오해를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오해’에 흔들리지 않았기에 ‘지금’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자신은 어떤 것 같습니까?
오늘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을 보내면서, 복음은 요한 세례자의 명명식 장면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요한’이라고 이름을 정한 아기 어머니의 말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지요.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거나 친척의 이름을 따라 하는 관습에서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을 할 수 없었던 즈카르야가 글 쓰는 판에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씁니다.
당시의 사람들에게 오해를 가져오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사람의 오해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뜻에만 집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계속된 오해에 흔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곳은 하느님 한 분뿐이십니다. 하느님의 뜻에 집중하는 사람은 오해에 흔들리지 않으면서, 하느님의 일을 충실하게 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하나의 커다란 획을 긋게 될 것입니다.


어느 자매님에게 고민이 생겨서 본당 신부님을 찾아갔습니다. 자기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는 이유에서였지요. 신부님께서는 남편과 대화를 나눠봤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심증은 가는데 물증이 없다고 합니다.
바람피운 것을 직접 본 것도 아니고, 스마트폰으로 받은 메시지로 증거가 생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전과는 다른 남편의 행동을 보면서 “바람피우고 있어.”라고 확신하는 것이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바람피우는 것이 아닐 수도 있지 않나요?”라고 물으니, “제가 이 사람과 함께 산 시간이 몇 년인데 그걸 모르겠어요?”라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물론 사실일 수도 있지만, 현재 상태는 100% 사실이라 할 수 없는 단순한 예측일 뿐입니다.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은 사실과 예측을 철저하게 분리해서 사실만을 쫓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예측이 사실인 것처럼 착각합니다. 진리에 벗어나게 됩니다.
모든 관계가 어긋나는 것은 사실과 예측을 철저하게 구분하지 못해서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자녀가 사춘기 겪지 않게 하는 유일한 방법
-전삼용신부-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입니다. 요한이란 이름은 태어나고 할례를 받을 때 받은 이름입니다. 보통은 가족의 전통적인 이름을 따르지만, 완전히 새로운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할례를 받습니다.
할례는 지금으로 말하면 세례입니다. 따라서 요한이라는 이름은 그 집안의 전통을 따름이 아닌 하느님 자녀로서의 정체성과 소명을 알려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살게 되는데 하느님의 현존 안에 머물게 된다는 뜻입니다. ‘도시’가 세속-육신-마귀를 추구하는 곳이라면 ‘광야’는 그런 것 없이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는 곳입니다. 기도하는 장소라 할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하느님에게서 왔고 또 하느님의 소명을 따라야 한다고 정해진 요한. 그는 사춘기를 겪었을까요? 저는 안 겪었다고 확신합니다. 물론 사춘기를 겪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안 겪은 것처럼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사춘기의 자녀를 둔 부모들은 그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지, 아이도 키워보지 못한 저에게 많은 것을 물어옵니다. 물론 그들도 제가 어떻게 대답할지 뻔하게 알면서도 그저 답답해서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춘기 아이들을 잘 이해하는지부터 살펴보아야겠습니다.
요즘은 아이들의 성장이 빨라져 중2병이라 하지 않고 초4병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그저 엄마가 무슨 말만 하면 짜증이 나서 문이 부서지라 닫아버리고 자꾸 야동을 보고 게임에 중독되며 공부, 진로, 관계에 대한 고민으로 항상 우울해하며 혼자만의 세계로 빠져버리는 질풍노도의 시기가 사춘기의 특징일까요?
‘이유 없는 반항?’ 이유 없는 것은 없습니다. 이유를 모를 뿐입니다. 그리고 이유를 몰라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를 뿐입니다.
이런 실험이 있습니다. 사춘기를 겪고 있는 10대, 사춘기가 지난 20대 대학생, 그리고 30대 직장인이 실험에 참여했습니다. 자동차 운전게임입니다. 결승전에 일찍 도착할수록 보상이 커지는 게임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중간에 노랑 신호등이 나옵니다. 노랑 신호등은 멈추어야 할지 빨리 지나가야 할지 애매한 상황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교통법상 노랑 신호등은 멈추라는 의미입니다. 노랑 신호등에 멈추면 3초가 더 걸리고 만약 무시하고 지나다가 사고가 나면 6초가 더 걸리게 해 놓았습니다.
과연 이 게임에서 사춘기 아이들이 결승점에 더 빨리 들어가려고 신호등을 무시하였을까요? 결과는 예상 밖입니다. 노랑 신호등을 가장 잘 지킨 사람들은 10대 사춘기였고 그다음이 20대 대학생, 그리고 가장 지키지 않은 사람이 30대 직장인이었습니다. 통념과는 달리 사춘기 청소년들은 지킬 것은 지켜가고 싶은 마음이 가장 큰 아이들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사춘기 아이들이 제멋대로일 것이라고 여기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다음 실험에서 증명됩니다. 이번에는 각 또래가 지켜보는 가운데 같은 게임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10대가 노랑 신호등을 무시하는 경우가 20% 증가했습니다. 친구들이 지켜볼 때는 위험한 것을 알면서도 무모한 행동을 한 것입니다.
이 실험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춘기 아이들은 어떤 결정을 할 때 주위 관계에 따라 휘둘린다는 사실입니다.
무엇이 없다는 말일까요? 정체성이 약하다는 뜻입니다. 내가 사제라는 정체성이 명확하면 주위의 유혹이 있더라도 쉽게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가장이요, 엄마라는 정체성이 명확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 피츠버그, 버클리, 하버드 대가 공동으로 벌인 한 실험에서 사춘기 아이들에게 어떤 소리를 30초간 들려주었더니, 아이들의 뇌가 멈춰버리는 현상을 발견했습니다. 부정적인 영역은 활성화되고 공감 능력을 담당하는 긍정적인 영역은 축소해버리는 그야말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겪게 만드는 그 소리는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부모의 목소리’였습니다.
[참조: ‘청소년 사춘기, 반항의 이유’, 유튜브 채널, ‘EBSCulture’]
사춘기 때 부모의 목소리는 극도로 싫어하지만, 자신이 누구의 목소리를 따라야 하는지 몰라 친구에게 휘둘리고, 게임이나 야동, 혹은 자기 속에 파묻히는 등, 자신이 누구인지 몰라 겪는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시기입니다.
다시 말해 사춘기는 부모의 자녀로서 부모의 말만 따르면 된다고 믿다가 이젠 부모가 자신의 원천이 아님을 깨닫고는 다시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의 목소리를 따라야 하는가?’의 혼돈에 빠지는 시기입니다.
이때 어차피 먹히지도 않는 부모의 충고는 아이들에게 반항심만 유발할 뿐입니다. 아이의 통제권이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솔직히 인정하고 이제 주님께 돌려드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세례이고 유태인들처럼 정식적으로 첫영성체 때 이뤄져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는 부모가 어떻게 아이들의 사춘기를 지나게 할 수 있는지 알려주는 가장 중요한 정보가 들어있습니다. 바로 ‘세례’를 주며 ‘새로운 이름’을 주는 것입니다. 새로운 정체성을 준다는 뜻입니다. 만약 부모가 자녀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데 마치 자신의 피조물처럼 놓아주지 않는다면 자녀는 언젠가는 사춘기를 크게 한 번 겪게 됩니다.
부모에게 절대 순종만 하던 착한 딸이 대학교에 들어가서 갑자기 아침에 걸을 수 없게되어 휠체어를 타야 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하고, 이름 모를 병이 생기기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자신을 놓아주지 않은 부모에 대한 반항입니다. 혹은 결혼해서도 성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늦게서야 동성애자로 변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이것은 정체성의 혼란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춘기를 겪지 않으면 한 번은 이렇게 크게 겪게 됩니다. 모양새만 다를 뿐 정체성 혼란의 사춘기를 겪는 것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다행히’ 저를 놓아주셨기에 저는 사춘기라는 것을 눈에 보이게는 겪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머니께서 7살까지만 키워주는 것이라는 말씀을 해 주셨기에 7살 때부터 사춘기를 조금씩 겪었습니다.
‘그럼 나는 어디에서 왔고 나는 누구인가?’
이런 생각을 할 때, TV에서 ‘슈퍼맨’이 나왔습니다.
‘그래, 나도 그럼 슈퍼맨처럼 외계에서 온 것이 확실해!’
그때는 하늘을 나는 슈퍼맨 꿈만 꾸었고 실제로 날아보려 하다가 배가 바닥에 갈려 까진 적도 있었습니다. 지금 내가 날지 못하는 것은 슈퍼맨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방법을 아직 모르기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성당에 처음 나가서 세례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는 슈퍼맨 놀이를 그만두었습니다. 나의 원천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나는 누구인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저는 사춘기를 겪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사춘기는 분명 있습니다. 작게 겪느냐, 크게 겪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차이는 부모가 얼마나 빨리 아이의 이름, 곧 본성이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왔음을 자녀들에게 고백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춘기를 겪었을까요?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바로 어머니와 아버지가 요한이라는 이름을 지어주며 주님의 것임을 인정해 주었기 때문입니다.사춘기는 한순간에 오는 것이 아니므로 자주 이것을 상기시켜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빠르게 사춘기는 지나가겠지만 이 작업이 늦어지면 모두에게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아이들이 하느님을 만나는 ‘광야’에서 살게 해 주어야 합니다. 광야까지 인도해주지 않은 부모는 도시에 사는 아이의 고통을 함께 겪어야만 할 수밖에 없습니다.세례자 요한처럼 광야에서 자녀를 광야로 이끄는 부모가 됩시다. 주님과 1대1로 사는 곳이 광야입니다.

-조재형신부-
2012년입니다. 5년간의 본당사목을 마치고 중견사제연수를 신청하였습니다. 연수는 11월에 끝나고, 새로운 곳으로 가기 전까지 3달간의 여유가 있었습니다. 마침 미국에 있는 동창신부님이 대림특강을 부탁하였습니다. 미국여행도 가고, 대림특강도 하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순풍에 돛을 달면 배는 가볍게 파도를 헤치고 나갈 수 있습니다. 5년간의 수고를 하느님께서 알아주시고, 제게 특별한 시간을 마련해 주셨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생각은 다른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중견사제연수를 마치기 10일 전에 그만 ‘발목골절’이라는 사고를 당하였습니다. 앰뷸런스를 타고 병원으로 가면서 동창신부님에게 전화하였습니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갈 수 없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동창신부님도 잘 치료받으라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여행을 가는 대신에 병원에서 깁스를 하면서 지내도록 해 주셨습니다. 병원에 있으면서 어머니와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1년 전에 홀로되신 어머니에게 효도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습니다. 휠체어를 타고, 목발에 의지하면서 고통을 묵상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습니다. 성탄 전날에 깁스를 풀 수 있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성탄을 지낼 수 있었습니다. 성지순례 가기 전에 목발을 내려놓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제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6년이 흐른 뒤입니다. 2018년입니다. 저는 교구 성소국장의 소임을 마치고 동창신부님이 있는 본당으로 갔습니다. 동창신부님이 강의를 부탁하였습니다. 저는 2달 동안 머물면서 강의도하고, 미사도 하면서 지냈습니다. 맞습니다. “인간이 마음으로 앞길을 계획하여도 그의 발걸음을 이끄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잠언 16,9)”
오늘 축일로 지내는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삶을 살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나는 점점 작아질 것입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습니다.’ 참으로 겸손한 삶의 태도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축일도 그런 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축일은 여름이 긴 하지에 가깝습니다. 하지가 지나면 여름은 점차 짧아집니다. 예수님의 축일은 겨울이 가장 긴 동지에 가깝습니다. 동지가 지나면 낮은 점점 길어집니다. 슬픈 눈으로 바라보면 세상은 한 없이 슬플 수 있습니다. 구약을 마치고, 신약을 시작하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도 그렇습니다. 사람의 몸에서 태어난 이들 중에는 가장 위대하다는 말을 들었던 세례자 요한은 ‘살로메’의 춤 값으로 목숨을 잃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사람의 몸에서 태어난 이들 중에 가장 위대한 세례자 요한을 기억하고 있으며, 사랑과 공경을 드리고 있습니다.
언젠가 읽은 ‘수도자란?’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높이지 않고 떠벌이지 않으며
앞세우지 않고 다투지 않으며
얕보지 않고 굽히지 않으며
숨길 것 없으며
탐할 것 없으며
불 꺼진 곳에 한 점 빛이다.
밀알처럼 썩는 아픔과
기쁨을 누리고자
오직 이름 없이 살기를 원한다.
진실로 죄지은 이의 짐을 지고 가는
지게이고자.
남을 복되게 해 놓고
맨 나중에 행복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끝에
자신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떠나간다.”
우리는 이 세상의 순례자입니다. 오늘 수도자라는 이름 대신에 세례명을 넣어보면 좋겠습니다. “가브리엘 너는 밀알처럼 썩는 아픔과 기쁨을 누리고자 오직 이름 없이 살기를 원하는가! 가브리엘 너는 진실로 죄지은 이의 짐을 지고 가는 지게가 되길 원하는가! 가브리엘 너는 남을 복되게 해 놓고 맨 나중에 행복하기를 원하는가! 그리고 끝에 자신의 이름마저 지워버리고 떠날 수 있는가?”

수도자들의 모델이요 이정표 세례자 요한!
-양승국신부-
좀 의아스럽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성인(聖人)들에게도 등급이 있습니다. 어떤 성인은 대성인(大聖人)으로 분류되어 교회 전례 안에서 대축일로 경축합니다. 축일을 앞두고 9일기도까지 바칩니다. 그러나 어떤 성인은 전례 안에서 이름만 기억할 정도입니다.
보통 성인들은 세상을 떠나신 날, 다시 말해서 하늘나라에 입국하신 날을 축일로 정해 한번만 기억합니다. 그러나 어떤 성인은 여러 번에 걸쳐 축일을 경축합니다. 성모님이나 수제자 베드로 사도, 바오로 사도, 그리고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세례자 요한이 그렇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수난과 죽음도 축일로 정해 기억하지만, 오늘같이 그의 탄생도 경축합니다. 그만큼 세례자 요한은 교회 안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대성인이었습니다. 구약과 신약을 연결시키는 다리 역할에 충실했는가 하면,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길을 닦는 선구자로서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복음서에 드러난 세례자 요한의 행적을 통해 우리는 그가 얼마나 예언자로서 충실한 삶을 살았는지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오로지 주님의 길을 닦는데 온 힘을 다하기 위해 그는 결혼조차 포기하고 홀로 살았습니다. 지극히 겸손했으며 철저히 순명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세례자 요한은 오시는 주님을 재빠르게 알아보기 위해 늘 깨어 있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술이나 산해진미나 세상의 좋은 것들을 철저히 멀리하고 광야 깊숙한 곳에서 극단적 청빈 생활을 해나갔습니다. 오늘날 우리 수도자들의 모델이요 이정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세례자 요한의 삶에서 두드러지는 측면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는 거대한 불의와 구조적인 악 앞에서 절대 침묵하거나 뒤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단호하게 예! 라고 할 것은 예! 라고 하고, 아니오! 라고 할 것은 아니오! 라고 말했습니다.
예언자로서의 삶, 말만 들어도 왠지 그럴 듯 해보입니다. ‘있어’보입니다. ‘나도 그렇게 한번 살아봤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멋있어 보입니다.
가는 곳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내 예언을 들으려고 몰려 들었겠지요. 모여든 사람들 앞에서 품위 있고 장엄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할 것입니다. 사람들의 환호는 하늘을 찌르겠지요. 추종자들은 늘 나를 큰 스승으로 떠받들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예언자들의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모습과도 거리가 멀었습니다. 전해야할 하느님의 말씀에 담긴 ‘진의’(眞意)를 파악하기 위해 밤샘기도를 해야 했습니다. 하느님 말씀의 참전달자로 계속 존재하기 위해 부단히 화려한 도시를 떠났습니다. 황량하고 고독한 광야로 계속 깊이 들어갔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보십시오. 그의 나날은 그야말로 ‘초근목피’의 삶이었습니다. 그의 주식은 날아다니는 메뚜기였습니다. 음료수는 전혀 가공되지 않은 들꿀이었습니다. 그가 걸치고 있었던 의상을 보면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습니다. 무슨 원시인입니까? 낙타털옷에 가죽띠입니다.
왜 그렇게 살았을까요? 맑은 정신으로 깨어있기 위해서였습니다. 맑은 정신으로 계속 기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고결한 영혼을 계속 소유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정확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온통 만연해 있는 세상의 죄악과 타락 앞에 당당히 맞서기 위해서였습니다.
결국 끝도 없는 자기 비움의 삶, 뼈를 깎는 자기 통제의 연속, 자아 포기, 자기 연마, 자기 부정의 나날이 세례자 요한의 삶이었습니다. 이런 세례자 요한이었기에 죽기까지 하느님의 뜻에 충실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사명에 목숨 걸고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끝까지 철저한 겸손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 탄생 대축일
-이영근신부-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입니다. 탄생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신비롭습니다. 참으로, 세상에서 탄생이야기만큼 놀랍고 경이로운 이야기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이 세상에 스스로 태어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세상에 태어날 수 없다는 이 사실은 선물로 준 생명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아무렇게나 될 대로 막살라고 주어진 생명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생명에는 살아야 할 생명의 질서가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화답송>은 그 경이로움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오묘하게 지어주신 이 몸, 당신을 찬송하나이다.”(시 139,4)
또한, 오늘 <제1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말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어,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
그분께서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시고, 당신의 손 그늘에 나를 숨겨 주셨다.
나를 날카로운 화살처럼 만드시어 당신의 화살 통 속에 감추셨다.(이사 49,1-2)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이사 49,5)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저 세상에 그냥 무의미하게 던져진 존재가 아닙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의 말이 생각납니다.
“인간은 세상 안에 과업(소명)을 지고 던져진 존재이다.”
진정, 우리는 세상에 던져져 있되, 그 신원과 사명이라는 과업을 짊어진 존재들임에 틀림없습니다. 곧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의 구원과 사랑을 이루어야 하는 과업(소명)을 짊어진 이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구세주의 탄생에 앞서, 요한의 탄생을 전해줍니다. 이 탄생 이야기 역시 그의 신원과 사명을 밝혀줍니다.
엘리사벳은 자녀를 낳을 수 없었던 불임의 여인으로 이미 늙었는데도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이웃들과 친척들도 그녀의 해산 소식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습니다.”(루카 1,58). 사실, 그들은 늙은 엘리사벳의 아기 잉태와 더불어 벙어리가 되어버린 즈카리아를 통해, 감추어진 무언가가 실현되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드레째 되는 날, 아기는 할례를 받고 그의 이름을 “요한”이라 명하게 되자, 그 순간 즈카리아의 묶였던 혀가 풀렸습니다.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루카 1,65). 그들은 하느님의 관여(개입)와 현존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루카 1,66), 아기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수행할 사명이 무엇일지 궁금해 하였습니다.
<제2독서>에서, 그의 사명을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자를 보내주시기 전에,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미리 선포’(사도 13,23-24)하는 것이었다고 증언합니다. 이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이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 주어진 것임을 밝혀줍니다. 만약,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분리해 버린다면, 요한의 탄생 의미는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원과 사명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원과 사명도 결코 예수님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우리에게 존재의 의미요 가치를 부여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의 구원과 사랑을 “마음에 새기며”, 소명을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손길이 요한을 보살피고 계셨던 것”(루카 1,66)처럼, 우리에게도 역시 주님의 손길이 보살피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 자신을 묻고, 자신의 신원과 소명을 찬미하며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그의 이름은 요한”(루카 1,63)
주님!
제 마음의 불신을 무너뜨리고,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으소서.
닫힌 태를 풀고, 제 몸에 당신 소유의 이름을 새기소서.
당신이 주신 이름을 제 삶의 서판 위에 새기게 하소서.
당싱이 주신 소명을 살게 하시고,
당신이 뜻하신 바가 제게서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열매
-반영억신부-
과일이나 채소에 이르기까지 잘 익어 열매를 수확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또한 햇빛과 비, 그리고 밑거름이 충분하게 있어야 합니다. 좋은 열매를 보면 필요한 것들을 제대로 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의 행동거지를 보면서 그 사람을 알게 됩니다. 그 사람이 큰 사람이었는지는 입술로 하는 말에서가 아니라 그의 삶의 여정을 통해서 드러나게 됩니다. 지금 당장은 어리석어 보이는 사람도 그 끝을 보면 놀라워할 사람도 있습니다. 또 그 반대의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때를 기다리며 햇빛과 비를 감당하고, 거름을 주는 일에 게을러서는 안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든 이리들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외견상으로는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여도 속으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겉만 보아서는 그 사람이 사심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위선적으로 사는 사람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속이 훤히 드러나게 됩니다. 거짓 예언자가 맺는 열매는 시기, 질투, 미움, 증오, 적개심, 다툼, 분열과 같은 것입니다. 더군다나“사람은 속여도 하늘은 못 속입니다.”
그러므로 눈속임으로 하지 않고 생각과 말과 행동의 일치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좋은 열매를 맺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는 수와 양으로 따져지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고, 예수님께서 지고가신 십자가를 나누어지는 참되고 선한 삶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함께야).
보면 볼수록 정감이 가고 괜찮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처음에는 멋있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매력이 없어지면 힘이 듭니다. 따라서 처음이나 끝이나 변함이 없어야겠지만 기왕이면 갈수록 깊어지는 멋을 담아야겠습니다. 속빈강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 그레고리오 주교는“우리의 전체 생활은 그리스도를 드러내야 합니다…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 이 세 가지 각각이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는지 또는 그분에게서 떨어져 나가 있는지 판단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하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할 때 좋은 열매는 당연합니다. 그러나‘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집니다.’결국 신앙과 사랑으로 무르익은 삶만이 심판의 불을 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 익은 좋은 열매가 되십시오! 혹 시들한 열매가 보이거든 햇빛을 보게 하고 비를 맞을 수 있게 하며 그리고 거름을 주십시오. “열매를 보면 나무도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그 자녀를 보면 부모를 짐작하여 알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아버지는 하느님이십니다. 아버지 하느님을 부끄럽게 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하느님의 시간표>
-송영진신부-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 때부터 본격적으로 인간들의 눈에 드러나게 된
하느님의 ‘인류 구원 의지’와 ‘인류 구원 사업’을 찬양하고 경축하는 날입니다.
(따라서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의 주인공은
세례자 요한이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인류 구원’은 처음부터 하느님의 계획이었고, 구약시대 내내 계속 예고되었지만,
구약시대 사람들은 그 일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질지 몰랐습니다.
그 일이 본격적으로 인간 세상에서 실현되기 시작한 시점은,
가브리엘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나타나서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예고한 때입니다.
그 예고에 대해서, “왜 그때였을까?”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신앙심과 신앙생활이 가장 좋았던 때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장 나빴던 때도 아니고,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기에 가장 좋은 때였다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다른 시기에는 없는, 어떤 특별한 점이 그 시기에 있었을 것 같은데,
우리는 그것을 모릅니다.
할 수 있는 대답은, “이유는 모르지만, 그 때는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이다.”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출생 예고 후 여섯째 달에 예수님의 탄생 예고가 있었고,
같은 시간 간격을 두고서 세례자 요한의 출생과 예수님의 탄생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정하신 때에 세례자 요한을 부르셨습니다(루카 3,2).
복음서의 내용을 보면, 세례자 요한의 활동의 마지막 시기와
예수님의 활동의 시작 시기가 약간 겹치는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로는 요한의 퇴장과 예수님의 등장이
자연스럽게 연결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께서 서른 살쯤에 활동을 시작하셨다고
기록했는데(루카 3,23), 그 일에 대해서도
“왜 그때였을까?”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서른 살’이라는 나이에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을까?”)
이 모든 일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잘 모르는,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하느님의 시간표’대로 인류 구원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시간표’는 종말의 날까지 계속 적용되고 실현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날이 언제인지는 ‘모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올리브산에 앉아 계실 때, 제자들이 따로 예수님께 다가와 여쭈었다.
‘저희에게 일러 주십시오.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스승님의 재림과
세상 종말의 표징은 어떤 것입니까?’ ......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로지 아버지만 아신다.’(마태 24,3.36)”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서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받으시고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0-21)”
“사도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에 예수님께 물었다.
‘주님, 지금이 주님께서 이스라엘에 다시 나라를 일으키실 때입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권한으로 정하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6-8)”
예수님 말씀을 모두 합해서, “그 날이 언제인지 알려고 하지 말고,
‘현재’에 충실하여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하느님께서 당신의 시간표를 사람들에게 공개하시면,
또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시간표를 모두 알게 되면, 어떤 일이 생길까?
그 시간표대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앙생활과 회개를 심판의 날 직전까지 미룰 가능성이 큽니다.
(‘평소에 충실하게 꾸준히’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은 보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심판의 날이 언제인지 알고서 그 직전까지 회개를 미루다가
마지막 순간에 회개한다면, 그것을 진정한 회개라고 인정할 수 있을까?
이 말을 각 개인의 임종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남은 시간이 너무 적다고 불평할 사람도 있을 것이고,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 있다고 방심할 사람도 있을 텐데, 어느 쪽이든 간에
자신의 인생의 마지막 시점을 미리 아는 것이 행복한 일이 될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행복해하기는커녕 그 날이 하루하루 다가오는 것을
의식하면서, 긴장, 불안, 초조감에 시달리고, 숨이 막힐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시간표를 사람들에게 알려주지 않으시는 것은
사람들을 위한 배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태어났을 때, 즈카르야는 아기에 관하여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루카 1,76-77).”
즈카르야는 예언을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하느님께서 요한을 통해서 하실 일과
요한이 하느님과 메시아를 위해서 하게 될 일들을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부터
자신의 사명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복음서 저자는 세례자 요한의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을 이렇게 전합니다.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루카 1,80).”
이 말은, 세례자 요한의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기다리면서 응답할 준비를 하는 시기였음을 나타냅니다.
물론 그는 하느님께서 ‘언제’ 부르실지, 그것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언제 부르시든지 간에
즉시 응답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하면서 살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그를 구원 사업의 도구로 뽑으셨습니다.
그러면 요한 자신의 구원은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확정되어 있었던 것일까?
만일에 태어나기 전부터 구원이 확정되어 있다면,
사는 동안의 신앙생활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렇게 구원이 확정된 채로 태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끝까지 충실하게 살았던 것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그 자신의 구원을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에는 어떤 특권도 없고, 특혜도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특별히 면제받는 사람도 없습니다.>

복음: 루카 1,57-66.80: 아기 이름은 요한이다
-조욱현신부-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이다. 탄생일을 축일로 지내는 성인은 성모님 외에 요한 세례자 한 분이다. 세례자 요한은 “여드레째 되는 날”(59절) 할례를 받는다. 여드레째 되는 날에 받은 할례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는 날 모든 피조물이 죽음에서 풀려나는 것을 예시한다. 요한이란 “하느님의 은총” 또는 “은총을 지닌 자”라는 뜻이다. 이 이름은 요한이 장차 선포할 복음의 은총, 그 은총을 세상에 내리실 주님을 가리킨다.
또한 즈카르야가 요한의 이름을 확인해 주고 입이 열려 말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한 것은 그 아기의 이름이 지닌 힘이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 아버지에게 목소리를 되찾아 주었고, 사제에게 말하는 능력을 회복시켜 주었다. 가브리엘이 잠근 것을 갓난아기가 열었다. 요한이 태어나 할례를 받았을 때, 그의 아버지는 예언자요 사제가 되었고, 말이 쓸모 있게 되었다.
아이를 못 낳는 태에 하느님의 은총으로 잉태된 기적 같은 출생은, 죽은 세상을 그리스도의 빛으로 깨우는, 회개를 외치는 요한의 설교를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요한이 할례를 받고 이름을 받았을 때,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65절) 한다. 그것은 가문에서는 사용하지도 않던 요한이라는 이름을 부부가 고집하는 것과 성전에 들어갔다가 나온 즈카르야가 언어장애인이 되었다가 요한이 할례를 받던 날, 입이 열려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삶이 “오시는 분”(묵시 1,4)을 위해 그 길을 닦고, 준비하는 것임을 공공연히 말하면서 사신 분이시다. 성인은 그 누구에게도 옳은 것을 말할 때는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주장한 분이다. 이 때문에 헤로데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그분은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성령을 가득히 받으셨다.
오늘 복음과 같이 요한은 많은 사람의 축하를 받으며 탄생했지만, 주님의 모습과 같이 십자가의 길을 가게 됨을 볼 수 있다. 결국에는 헤로데에게 죽임을 당하고 만다. 선구자로서 외롭고 힘든 삶이었음을 볼 수 있다. 우리의 삶은 다른 것이 아니라 세례자 요한의 삶이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삶이었음과 같이 우리의 삶도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어 다른 사람들에게 주님을 알게 해주는 삶이 되어야 한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 축일을 맞이하여, 우리 자신도 세상을 위하여 “하느님의 은총”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결심하며 그분과 같이 굳센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언제나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자.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이름과 소명의 관계를 알려 주십니다.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루카 1,60)
"그의 이름은 요한"(루카 1,63)
오랜 기간 아기를 갖지 못했던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부부가 주님의 은혜로 아들을 출산합니다. 그런데 아기 할례식에 모인 친척들이 아기를 즈카르야라 부르려 하지요. 아버지의 이름을 아들에게 주는 일은 이스라엘에서 흔한 관습이었습니다.
이때 노령의 산모인 엘리사벳이 강하게 반대합니다. 의아하게 여긴 친지들이 즈카르야에게 묻자 그 역시 글로써 아내의 의견에 동의하지요. 사실 "요한"이라는 이름은 아기의 탄생을 알린 천사의 명령이었음을 우리는 압니다.(루카 1,13 참조) 그 이름을 지키려는 부모의 적극적인 태도는 주님께 대한 순명이었던 것이죠.
제1독서에서는 <주님의 종의 둘째 노래>가 울려 퍼집니다.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의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이사 49,1)
요한은 하느님께서 성자의 강생을 준비시키기 위해 선택하신 인물로, 그의 사명은 하느님 구원 계획에서 매우 중요한 자취를 남깁니다. 하느님께서 친히 마련하신 이름 "요한"은 ‘자비로우신 주님(야훼)’이라는 뜻의 성서 속 이름에서 유래한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은혜"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고 하네요. "요한"이라는 명명으로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아기의 정체성과 소명이 이렇게 확립됩니다.
제2독서는 사도 바오로의 입을 빌어 요한의 사명을 들려 줍니다.
"이분께서 오시기 전에 요한이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미리 선포하였습니다."(사도 13,24)
그의 사명은 구원자로 오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기에 종속적이고, 또 그분 오시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준비시키기 위함이라는 의미에서 일시적입니다.
"나는 그분이 아니다."(사도 13,25)
자신에 대해 안다는 것은 자신이 누구 혹은 무엇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망상이나 야망 속의 누구가 아닌, 자신만의 정체성과 사명으로 창조되고 불리운 실제의 자신에 대해 겸손하고도 책임 있게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지요.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을 메시아라 여길 때 그는 자신의 얼굴을 명백히 밝힙니다. 그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준비하는 이, 그분의 길을 닦는 이,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였지요. 그 소리에 담길 분은 말씀이신 성자 예수님이십니다.
자신에게 부여된 '이름값'을 하는 것은 혼자 힘으로는 어렵습니다. 오늘 요한의 이름이 확정되기 위해 그의 부모가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지켜냈듯, 모든 이는 서로의 정체성과 소명이 빛을 발하고 완성되도록 함께 협력하라고 초대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벗님의 이름과 본명을 불러 봅니다. 벗님을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이름 지어 주신 주님께서 벗님에게 어떤 꿈을 꾸고 계시는지 그분께 여쭙고 기도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 꿈이 삶 안에서 정체성과 소명으로 표현되는 것이니, 벗님도 이 세상을 위한 주님의 구원 계획 안에 미약하고 미소하나마 자리하고 있답니다. 주님의 꿈이 벗님의 꿈으로 완성되길 청하며 매일매일 충실히 응답하는 벗님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선 구 자
-김찬선신부-
저는 오늘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을 지내며
오늘 전례 독서와 감사송의 말씀을 가지고 나눔을 하고자 합니다.
"예수께서 오시기 전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미리 선포하였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복된 요한을 뽑으시어 주님을 준비하는 특별한 영예를
주셨으니, 그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위대하심을 찬송하나이다."
무릇 성인들의 축일을 지내는 이유가 그저 성인의 위대함을 기리기 위함이
아니라 성인의 삶을 본받고자 함이듯 오늘 세례자 요한의 축일을 지내는
것도 세례자 요한처럼 주님을 준비하는 삶을 우리도 특별한 영예로 삼고,
세레자 요한처럼 회개의 세례를 미리 선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세례자 요한처럼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회개의 세례를
오늘도 미리 선포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이천 년 전에 오신 것처럼
오늘도 주님께서 오시도록 우리가 준비하고 역할을 해야 한다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주님은 이천 년 전에 한 번 오신 것으로 끝이 아니고
오늘도 계속 다시 오셔야 하고, 그러시도록 우리가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가 주님을 준비하는 존재라는
정체성을 늘 인식하고 의식하며 살아야 하고
그런 존재라는 것을 특별한 영예로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런 뜻에서 오늘 감사송은 세례자 요한을 주님의 선구자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주님의 선구자라는 인식을 가져야 하는데
주님의 선구자라는 인식은 주님과 나를 떼어서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없이 어디 가지 않고,
주님 없이 무슨 계획을 세우지 않으며,
한 마디로 '당신은 당신이고, 저는 저입니다.'로 살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태어나기 전부터 주님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존재였다고,
"그리스도의 선구자 요한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인류 구원이 다가왔음을
기뻐하였고 태어날 때에 구원의 큰 기쁨을 알렸다."고 감사송은 노래하지요.
그렇긴 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오심만 준비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 오실 것을 준비하고 있다가 주님이 오시자
자기 집에만 모신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만약 그랬다면 주님께서 마을에 오셨는데 자기 집에 감금한 셈인데
그러지 않았고 사람들도 주님을 잘 맞이할 수 있도록 사람들도
준비하게 한 분이며 주님이 오시자 주님을 사람들에게 가리킨 분입니다.
이에 대해 요한 복음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요한이 이튿날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그곳에 다시 서 있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그러니까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선구자일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보다 주님을 먼저 알아 본 사람들의 선구자이고,
사람들에게 주님을 알려 준 증거자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세례자 요한은 주님과 자신을 떼어 생각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도 동떨어진 분이 아닙니다.
주님에 앞서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풀고,
사람들보다 앞서 주님을 알아보고 증거를 한,
주님의 선구자요 사람들의 선구자인 세례자 요한을 오늘 우리는 본받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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