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6월 26일 연중 제12주간 토요일

Margaret K 2021. 6. 26. 07:05

2021 6 26일 연중 제12주간 토요일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 
(마태오 8,5-17)

 

 

"Lord, I am not worthy to have you enter under my roof;
only say the word and my servant will be heale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형순신부-

 

 ‘웃음’에 관한 표현이 오늘 독서에서 네 차례 등장합니다. 모두 사라의 웃음과 관련됩니다. 물론 이 웃음은 나중에 ‘그가 웃다.’라는 뜻의 이름인 ‘이사악’의 탄생을 위한 복선입니다. 그러나 사라의 마음으로 사라의 웃음을 읽어 본다면 기뻐서 짓는 웃음이라고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사라가 젊은 여인이었다면, 그의 웃음은 아기를 잉태하게 된다는 기쁨의 웃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사라가 나이가 많고, 가임기가 지났음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도 자신의 상황을 잘 알고 있습니다. 상식적으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사라는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의 웃음이 아닌 씁쓸한 웃음을 짓게 됩니다.

아울러 사라의 웃음은 하느님을 향한 부족한 믿음을 보여 줍니다.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의 나이가 여든아홉 살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흔아홉 살이었습니다. 그의 상식과 판단에 따르면, 임신과 출산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비록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아들의 출생 예고를 들었을 때, 사라는 신앙의 응답이 아닌 현실적 판단에 따른 응답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사라가 웃었다는 사실만 우리에게 알려 줄 뿐, 그가 하느님의 말씀을 믿었다고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믿기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생각과 상식을 뛰어넘기 때문입니다. 내가 알고 있거나 생각한 대로 또 예측 가능한 대로 흘러간다면, 믿음이란 참으로 쉬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눈에는 불가능한 것이 당신께는 가능하다고, 당신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으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언제나 감사와 찬미를 드리고 있는지, 아니면 우리의 생각과 판단에 따라 쓴웃음을 짓고 있는지 돌아봅시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바닷가재, 대아, 새우, 게…. 이런 동물을 우리는 ‘갑각류’라고 부릅니다. 이 갑각류의 특징은 외골격, 즉 딱딱한 껍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갑각류 동물은 언제 성장할까요? 바로 딱딱한 껍질에서 탈피할 때라고 합니다.


딱딱한 껍질을 가지고 있어야 다른 동물들의 공격을 막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껍질을 벗어던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공격받기 쉬운 가장 위험한 순간에 놓여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장 약하다고 할 수 있는 이 위험한 순간을 받아들여야 갑각류는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갑각류 동물만 그럴까요?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인 것을 깨닫습니다. 인간 역시 고통과 시련으로 약해졌을 때 성장합니다. 물론 고통과 시련을 받아들이기가 힘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장하기를 바란다면 고통과 시련은 우리에게 필수 사항이었습니다.

공부를 전혀 하지 않고 높은 성적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운동 연습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운동 경기에서 1등 한다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기도와 묵상을 전혀 하지 않은 상태에서 주님을 알게 되고 주님 안에서 커다란 행복을 얻는다는 것 역시 말도 안 됩니다. 고통과 시련을 통한 성장이 있음을 기억하면서 다시 한번 힘을 내고, 더 노력해야 합니다. 이렇게 힘을 내고 노력하다 보면 고통과 시련이 오히려 고맙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또 더 이상 고통과 시련을 무서워하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게 된 백인대장도 사랑하는 종이 아픔으로 힘들어할 때였습니다. 베드로의 장모는 열병으로 드러누워 있을 때였습니다. 마귀 들린 사람들도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이렇게 모두가 어렵고 힘든 고통과 시련의 순간이었습니다.

복음은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그는 우리의 병고를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졌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마태 8,9)라고 전해 줍니다. 고통과 시련의 순간에 함께 하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주님을 알았던 백인대장의 믿음을 우리는 보고 배워야 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라는 그의 말은 미사 때마다 영성체 전에 우리가 고백하는 기도가 되었습니다. 그는 고통과 시련을 힘으로 이기려고 하지 않습니다. 대신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함께 하면서 이겨냅니다.

한 말씀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믿음, 우리는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나요?
고통은 삶의 일부이기도 하다. 고통을 대하는 방식은 우리가 결정할 수 있다(댄 토마슬로).

사랑이 인생이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천재 물리학자인 스티븐 호킹. 그는 21살에 루게릭병 진단을 받았고, 이때 2년밖에 못 산다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러나 병과 투쟁해서 병마를 이겨냈고 이론 물리학의 중요한 업적들을 담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시간의 역사’(1,000만 부 이상 판매)를 출판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2년이 아닌 50년 넘게 더 살 수 있었던 것은 물리학에 대한 남다른 열정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박사님에게는 물리학이 인생이죠?”라고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그러자 호킹 박사는 코를 찡그립니다. 루게릭병으로 의사 표현이 어려웠던 그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렇게 코를 찡그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컴퓨터로 이렇게 썼습니다.

“사랑이 인생이에요.”

사랑을 간직했기에 오랫동안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의 것이 아닌, 하느님의 것을 간직해야 합니다.

' 나는 다르다' 라는 생각을 버리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믿음이 강한 백인 대장이 나옵니다. 일반적으로 병을 고쳐 달라는 믿음은 있었지만 백인 대장의 믿음은 예수님까지 감동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종을 치유해 주겠으니 함께 가자고 할 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런 믿음은 이스라엘에서도 본 적이 없다고 하시며 그를 칭찬해 주십니다.

     

    도대체 백인 대장은 어떻게 그러한 믿음에 다다를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의 대답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과 예수님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자신에게는 지위와 힘이 있으니 하인들에게 무언가를 시켜 원하는 일을 이루어지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병을 고치는 힘이 있으신 분은 엄청난 지위가 있으신 분이 확실하니 자신은 그분을 집에 모실 자격이 없고 그런 힘이 있으신 분은 또한 누군가를 시켜 그 일을 하실 수 있으니 굳이 직접 집에 오지 않으셔도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는 이 세상 것으로 하늘의 법칙을 깨달아 믿음을 증가시킨 사람입니다. 이것이 믿음을 증가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이 세상의 법칙을 통해 하늘의 법칙에 다다르는 것입니다.

     

    2018년 1월 20일 새벽 일본 시가현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의사가 되라는 엄마의 성화에 9년간 재수하던 딸이 엄마를 잔인하게 살해하여 시체까지 훼손하고 유기한 것입니다. 그는 트위터에 이렇게 썼습니다.

    “괴물을 처단했다. 이걸로 한시름 놓았다.”

  

    노조미는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의사가 돼라.’라는 엄마의 말을 듣고 자랐습니다. 그러나 성적이 모자란 그는 9년이나 재수해야 했습니다. 엄마는 지인들에게 딸이 이미 의대에 진학했다고 거짓말까지 하고 다녔습니다. 딸의 부담은 더 커져만 갔습니다. 엄마는 휴대전화까지 빼앗고 딸의 방에 CCTV까지 설치해 딸이 공부하는 것을 감시했고 심지어 샤워도 엄마와 함께해야 했습니다.

  

    다행히 의사와 비슷한 모습인 ‘조산사’가 되겠다고 간호학과에 입학했는데 조산사가 아닌 간호사가 되겠다는 딸을 향해 “불행의 구렁텅이. 배신자!”라는 말을 쏟아냈습니다. 엄마는 대학을 나오지 않은 학벌 콤플렉스가 있었습니다. 노조미는 처음에 징역 15년 형을 받았다가 사실을 참작해 10년 형을 받았습니다. 딸은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한 일을 후회합니다. 하지만 포로 같았던 당시보다 지금 구치소 생활이 더 편합니다.”    

[출처: ‘의대 강요에 9년 재수한 딸’, 유튜브 채널, ‘엠빅뉴스’]

     

    왜 믿음 이야기를 하다 이런 잔인한 사례를 드는 것일까요? 이런 사례들이 세계 곳곳에서 ‘똑같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도 고3 우등생이 어머니를 살해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어머니도 ‘똑같이’ 아들에게 공부를 강요했고, 그 어머니도 열등감에 시달리던 사람이었습니다. 

 

    영국에서도 있었습니다. 아들이 여러 일류대에 합격했지만, 어머니는 아들이 여자를 사귀는 것을 허락할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더 나아지기만을 바랐습니다. 그러며 장애 되는 것은 다 없애버려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아들에게 제거당했습니다. 아들은 어머니가 시킨 대로 걸림돌이 된 어머니를 제거한 것뿐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례가 세계 곳곳에서 ‘똑같이’ 일어나고 왜 계속 같은 일들이 반복되는 것일까요?

    ‘나는 달라!’ 라는 이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법칙에서 자신은 예외일 수 있다고 생각하니 법칙조차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 법칙을 깨닫게 되면 그 법칙을 말씀하신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먼저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것이 인간을 인격적으로 대하시는 자세입니다. 그러나 그 자유를 부모가 빼앗고 있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대우와 존경을 받지 못할 때 무엇이 오겠습니까? 뿌린 대로 거둘 뿐입니다. 이것은 법칙입니다. 
    하지만 자신은 다르다는 생각이 이 법칙도 보지 못하게 만들고 그런 법칙을 만드신 하느님도 믿지 못하게 하여 결국 안 좋은 굴레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안 좋게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와 반대되는 사례도 많습니다. 위인들은 말할 것도 없이 유태인들만 보아도 그렇게 자녀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자녀에게도 부모에게도 모두 유익하다는 것이 법칙으로 증명이 됩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을 일찌감치 주님께 봉헌하고 자신들은 노후 준비를 열심히 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노인 빈곤율이 세계 최하위입니다. 계속 자식을 통해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하려 하다가 돈도 다 쓰고 결국엔 자식에게 안 좋은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이 세상을 지배하는 법칙이 있습니다. 어디에나 법칙이 있습니다. 그 변함없는 법칙이 존재함을 볼 수 있다면 그 법칙을 말씀하시는 주님을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백인 대장이 그렇게 믿음을 성장시켰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백인 대장처럼 ‘나는 달라.’, 혹은 ‘나는 특별해.’란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나서 서로 판단을 하면서 그들은 특별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포도밭의 한 그루 무화과나무의 비유처럼 하느님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후손들이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잘 지키는 것으로 다른 이들과 자신들은 구별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 똑같습니다. 우린 특별하지 않습니다. 이웃이 나도 모르게 판단이 된다면 그 판단하는 잘못이 무엇인지 찾고 그것이 내 안에도 있음을 발견해야 합니다. 내 안에 있기 때문에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웃의 단점으로 나의 단점을 고치려 할 때 비로소 사람은 다 똑같고 나는 특별한 존재가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세상에 존재하는 법칙들이 보이게 되고 그 법칙을 예수님께서 다 알려주셨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그분을 믿게 됩니다. 우선 내가 다른 이들과 다르다는 생각부터 버려야 합니다. 하느님 외에 인간은 누구도 특별할 수 없습니다.

 -조재형신부-

 

후배 신부님이 강의 중에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받는 것이 더 좋은가요주는 것이 더 좋은가요?” 저를 포함해서 많은 분들이 받는 것이 더 좋다고 손을 들었습니다어떤 분들은 주는 것이 더 좋다고 손을 들었습니다후배 신부님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받는 것이 더 좋다고 하신 분들은 솔직하시네요주는 것이 더 좋다고 하신 분들은 체험이 있나봅니다.” 후배신부님도 받는 것이 더 좋았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생일 선물을 받을 때부모님께 용돈을 받을 때 좋았다고 합니다신자들의 기도와 사랑을 받으면서 잘 지낸다고 하였습니다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어라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니 너희에게 누르고 흔들어 넘치게 부어 주실 것이다너희가 남에게 되어 주는 것만큼 되돌려 받을 것이다.(루가 6, 38)”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모든 면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그렇게 애써 일하며 약한 이들을 거두어 주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친히 이르신 주 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사도 20, 35)” 받는 즐거움이 감성적이라면 주는 즐거움은 영성적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는 것이 행복하다고 하셨는데 돌아보니 줌으로써 행복했던 체험이 있었다고 합니다고등학교 때 꽃동네로 봉사활동을 갔었답니다음식을 나르기도 했고청소를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하루는 뇌성마비 어르신과 대화하는 시간이 있었다고 합니다어르신은 턱과 눈으로만 의사표현이 가능했다고 합니다어머니가 아이에게 모든 것을 물어보고아이가 원하는 것을 해 주듯이어르신에게 모든 것을 물어보면서 대화하였다고 합니다어르신은 탁자 옆에 있는 가방을 바라보았고가방을 가져다 드렸다고 합니다어르신은 가방을 열어보기를 원하셨고가방 안에 있는 공책을 열어보기를 원하셨습니다공책에는 그동안 어르신에게 다녀간 분들의 주소가 적혀있었다고 합니다주소를 적어드리기를 원하셨고주소를 적어드렸다고 합니다편지를 한 통 써주기를 원하셨고매번 물어보면서 어르신을 위해서 편지를 써드렸다고 합니다매번 물어보고원하는 것을 해 드렸는데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다고 합니다한 달 후에 집으로 편지가 왔는데 어르신이 보낸 편지였습니다어르신을 위해서 봉사오신 분이 같은 방식으로 편지를 써드렸다고 합니다.

 

저도 신학생 때 한 가지 체험이 있었습니다늦은 밤입니다술에 취한 사람이 길에 쓰러져 있었습니다추운 겨울인지라 잘못하면 큰 일이 날 것 같았습니다잠시 고민했습니다늦었고다음 날 새벽미사도 가야하는데 그냥 지나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안 보았으면 모르지만 보았으니 도와주자는 마음도 있었습니다택시를 잡고 술에 취한 사람을 집에까지 모셔다 드렸습니다집에는 애타게 아빠와 남편을 기다리는 가족이 있었습니다저는 사정을 설명하였고감사하다는 가족의 인사를 받으며 돌아왔습니다돌아오는 길에 하늘에서는 눈이 내렸습니다. 35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선명합니다전신주전화박스양복점이 기억납니다옷에 묻었던 흙도 생각납니다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아니었지만 순수하고 착했던 신학생이었던 기억입니다생각하니 주는 것의 기쁨을 아는 분들이 주변에 많았습니다산행 중에 힘든 친구의 가방을 들어주었던 분어질러진 짐을 늘 정리하던 분이 있었습니다성당에는 주는 것의 기쁨을 아는 많은 봉사자들이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아브라함은 처음 보는 손님을 정성껏 모셨습니다발을 씻을 수 있도록 해 드렸고먹을 것을 드렸고편히 쉴 수 있도록 해 드렸습니다아브라함이 정성껏 모신 분은 하느님이셨습니다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이 가장 간절히 원하는 것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아브라함은 아흔아홉 살아내 사라는 여든아홉 살이었습니다하느님께서는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헐벗고가장 가난하고가장 굶주린 이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입니다.” 이렇게 선행을 베푼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이라는 말이 있습니다선을 행하는 집에는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긴다는 뜻입니다오늘 복음에서 백인대장은 예수님께 종을 고쳐달라고 청하였습니다예수님께서는 종을 아끼는 백인대장의 마음을 칭찬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습니다.” 받는 것이 더 좋으신가요주는 것이 더 좋으신가요?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이영근신부-

 

여러 만남이 이어지는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두 개의 결정적 만남에 주목합니다.

"그는 그들을 보자 천막 어귀에서 달려 나가 그들을 맞으면서 땅에 엎으려 말하였다."(창세 18,2-3)
"한 백인 대장이 다가와 도움을 청하였다."(마태 8,5)

천사들을 환대하는 아브라함과, 고통받는 종의 치유를 청하기 위해 예수님께 다가온 백인대장의 모습이 겹칩니다. 둘 다 매우 겸손하고 진실된 태도의 영접으로 보입니다.

"나리, 제가 나리 눈에 든다면, 부디 이 종을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창세 18,3)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 8,8)

고대 중동 사막 지역에서 나그네를 귀하게 대접하는 일은 축복을 부르는 관습입니다. 아브라함은 한창 더운 대낮에 길을 지나는 이들을 나무 아래로 모셔 물과 음식과 쉼을 제공하지요. 그는 나그네들이 하느님의 천사인 줄 꿈에도 몰랐을 겁니다. 믿음으로써의 행동이라기보다 선하고 관대한 인류애적 견지에서 그들을 섬긴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인 백인대장은 예수님의 능력에 대해 굳은 믿음을 가지고 다가와 청합니다. 심지어 직접 종에게 가 주시겠다는 예수님을 자기의 비천함을 들어 만류하지요. 정복국의 군사 장교가 식민지 백성의 예언자(로 보이는  청년)에게 이토록 예우를 갖추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이는 그저 좋은 소양이나 성정을 넘어서 "믿음"에 근거하는 겸손과 확신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그렇게 해 주십시오."(창세 18,5)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마태 8,13)

천사들은 아브라함의 섬김을 받아들입니다. 영적 존재인 그들에게 딱히 필요하지 않은 서비스일지도 모르지만 아브라함의 지향과 의지, 말이 실현되도록 자신들을 그의 손에 맡기지요.

예수님은 백인대장의 말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해 주십니다. 그의 겸손한 신앙고백이 그대로 이루어져 열매를 맺도록 해 주시는 겁니다. 그가 간절히 바라고 굳게 믿은 그대로 종은 치유될 것입니다.

제1독서의 뒷 부분에서는 아브라함에게 후손이 태어날 것이라는 주님의 약속과, 이에 대해 의혹을 품는 사라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생물학적으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기 때문이지요.

지금 아브라함과 사라는 믿음의 조상이 되기까지의 여정 중에 있는 것입니다. 온 이스라엘이 공경하고 자부심을 갖는 선조지만, 그 믿음이 형성되기까지의 생생한 민낯은 우리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고, 성경은 이를 감추지 않고 기록한 것이지요.

복음 대목의 후반부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 주변으로 모여든 이들과 예수님의 만남이 이어집니다. 병들고 약하고 고통을 겪는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손길로 구마와 치유를 받아 온전함을 회복하는 역동적인 장면이지요.

물론 오늘 간절히 주님을 찾는 그들의 믿음은 언젠가 십자가형의 외침으로 변하고 말 나약하고 기복적인 믿음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주님은 오늘 제1독서 속의 아브라함 부부처럼 그들 역시 아직 과정 중에 있음을 아시기에, 기꺼이 그들을 맞아 각자의 필요를 채워주신 것이지요. 아주 적극적으로 혼신을 다해 그들의 질병과 병고를 떠맡으십니다.(복음 환호송 참조)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마태 8,10)
예수님의 기쁨에 찬 감탄이 들리는 듯합니다. 이 감탄은 백인대장을 넘어 우리를 향하고 있지요. 존재 전체로 주님을 맞아들여, 말씀으로 고백하고, 실천으로 섬기는 믿음은 그저 인간적으로 잘 형성된 인성의 차원을 넘어섭니다. 아직 과정 중이라 여전히 흔들리고 동요하는 섬약한 믿음일지라도 주님은 우리의 말인 신앙고백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 주님께서 우리 곁을 그저 지나쳐 가시지 않도록 신앙의 눈을 크게 뜨고 주님을 맞이하는 날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청한 바가 들어 허락되고, 우리의 겸손한 환대와 믿음에 그분이 감탄하시기를 빕니다. 반드시 우리가 믿는 대로 될 것입니다. 아멘.

 믿음이 구원의 문을 열게 한다

 -반영억시부-

 

오래도록 위암으로 고통을 받고 계신 형제님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언제나 맑고 밝은 웃음을 가지고 미사참례를 하고 구역모임에도 빠지지 않으시려 애를 쓰셨습니다. 근황을 여쭈며 어떤 생각을 하시느냐? 고 했더니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자유를 누릴 때가 곧 오겠구나!” 생각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꿈 얘기를 해 주셨습니다. 좋은 꿈도 있고, 그렇지 않은 꿈도 있는데 요즘은 아주 나를 옴싹달싹 못하게 하는 꿈에 시달리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좋은 꿈이란 것을 가톨릭 성가29번 ‘주 예수 따르기로” 1절에 비유해 주셨습니다. “주 예수 따르기로 나 약속했으니 내 친구되신 주여, 늘 함께하소서. 주 함께 계시오면 나 든든 하옵고 주 나를 이끄시면 바른길 가리다.” 그리고 좋지 않은 꿈은 2절 “이 세상 온갖 유혹 내 맘을 흔들고 내 모든 원수들이 늘 괴롭히오니 주 나를 돌아보사 내 방패 되시고 내 옆에 계시옴을 깨닫게 하소서.”에 빗대시며 3절은 주님께 맡기고 또 주님의 고유권한이시라고…. “저 영광 빛나는 곳 주 내게 보이니 그 아름다운 곳을 사모합니다. 주 예수 섬기기로 나 약속했으니 끝까지 따라가게 용기를 주소서.”

 

‘성가로 하는 기도는 2배로 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냥 입으로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사랑의 마음을 담아 간절히 기도하시는 모습에 감사했습니다. 내용 하나하나가 나의 미래를 비춰주고 유혹을 극복하는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성가를 부를 때 가슴으로, 온 마음으로 불러야 하겠습니다.

 

꿈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씀드립니다. 꿈은 꿈입니다. 아무리 좋아도 꿈이고, 아무리 나빠도 꿈입니다. 그러나 그 꿈을 주님의 눈으로 보고, 더 큰 주님의 은총 안에 머물 수 있도록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꿈에 휘둘릴 것이 아니라 신앙의 눈으로 보고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마음이 귀합니다. 꿈을 통해 메시지가 주어지기도 하지만 모든 것은 주님의 섭리 안에 있고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마음으로 해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 백인 대장이 예수님께 자기 하인이 중풍으로 누워 몹시 괴로워하고 있다고 말씀 드리며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마’하셨습니다. 이에 백인대장은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 하시며 백인대장의 종을 고쳐 주셨습니다. 참으로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이방인 군인이 보여주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라는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유다인들에게는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입으로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하느님을 주님으로 모시지 않는 이들이 많고 이들은 훗날 반드시 깜짝 놀라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바깥 어둠 속으로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가르침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둠은 빛이 없어서가 아니라 빛을 거부하는 데서 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위의 높고 낮음이나 세례를 먼저 받고 나중에 받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래된 신자, 새 신자를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직 주님을 바라보고 얼마나 의탁하느냐가 관건입니다. 세례를 받은 지 오래 되었다고 저절로 믿음이 생기는 것도, 더 많은 은총을 체험하는 것도 아닙니다. 새로 영세를 받은 신자가 훨씬 더 큰 믿음의 소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을 시기 질투하지 마십시오.“믿음은 세상을 충만케 하시는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을 뜻합니다”(까롤로 까레또). 매 순간 하느님을 향한 시선을 놓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실제로 사는 믿음이 구원의 문을 열게 합니다.

 

확고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자기가 구하는 바를 넘치게 받고 또 다른 것도 더 받을 것이지만 믿음이 부족한 사람은 감히 청하지도 못하고 그럼으로써 얻지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믿음에 믿음을 더하여 믿는 대로 이루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예수님의 자비> 

 -송영진신부-

 

6월 30일의 복음 말씀은,

'백인대장의 병든 종을 고치시다(마태 8,5-13).',

'베드로의 병든 장모를 고치시다(마태 8,14-15).',

'많은 병자를 고치시다(마태 8,16-17).'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치유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이런 내용을 설명할 때,

흔히 믿음을 강조하면서 '믿음이 기적을 일으킨다.'

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적절한 표현이 아닙니다.

 

믿음이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대한 응답으로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정권은 우리의 믿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믿기만 하면

'무조건'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셔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기적을 행하실 것인지 여부는 예수님께서 결정하신다는 것입니다.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는

예수님께서 빨리 오셔서 병든 라자로를 고쳐 주시기를 원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죽은 다음에 가셨습니다(요한 11장).

 

바오로 사도가 자기 몸의 병을 고쳐 달라고 주님께 간청했을 때,

주님께서는 그의 청을 거절하셨습니다(2코린 12,9).

 

또 예수님께서 전혀 믿음이 없는 사람을 고쳐 주신 적도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의 '벳자타 못 가의 병자'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 이야기에서의 치유 기적은

병자의 믿음과 상관없이 예수님의 자비심만으로 행하신 기적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기적을 일으킨다.' 라든지,

'기적의 힘은 믿음에서 나온다.' 같은 표현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기적은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행하시고,

기적의 힘은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실 때 먼저 믿음을 확인하실 때가 많고,

믿음을 칭찬하실 때도 많지만,

모든 병자에게 다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닙니다.

 

수많은 병자들이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고,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병이 나았다는(마태 14,36) 내용은

글자 그대로 무차별로, 무제한으로 병자를 고쳐 주시는 모습입니다.

(그 병자들이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의 옷자락 술을 믿었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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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말씀의 백인대장의 모습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 백인대장은 겸손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신분과 지위를 버리고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또 그가 자기 종의 상태만 이야기하고

고쳐 달라는 말을 하지 않은 것도 겸손한 태도인데,

물론 고쳐 달라는 뜻으로 종의 상태를 이야기한 것이지만,

고쳐 달라는 말을 하지 않은 것은 예수님의 결정권에 따르겠다는 뜻입니다.

(고쳐 주시든지 안 고쳐 주시든지 간에.)

 

둘째, 백인대장은 예수님을 '병을 잘 고치는 분'이 아니라

'병을 지배하시는 분'(하느님)으로 믿었습니다.

한 말씀만 해 달라고 하면서

자기 밑의 부하들이 자기의 명령대로 움직인다는 말을 한 것이

바로 그 믿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병'이라는 것에게 떠나라고 명령하신다면

그 '병'이라는 것이 명령에 복종하고 떠날 것이라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이스라엘에서는 본 일이 없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아직까지는 그 어떤 유대인도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은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셋째, 그는 자기 자신이나 가족이 아니라 종을 위해서 간청했습니다.

그 종이 백인대장과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지만

당시 사회제도에서 노예를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로 보입니다.

 

넷째, 병들어 누워 있던 백인대장의 종은

아마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고,

아예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몰랐을 가능성이 큰데,

백인대장의 간청으로 그 종이 낫게 되었다는 것도 중요한 교훈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때,

그 사람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든지 없든지 간에, 믿음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예수님께서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그 사람에게 기적을 행하신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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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없는 사람들 중에는

'믿고 기도해서 다 병이 낫는다면 세상의 병원들과 의사들은 모두 망하겠네.'

라고 빈정거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의 병원들과 의사들을 망하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뜻은 아닙니다.

(사람들을 고통에서 해방시키는 일, 그것이 예수님의 뜻입니다.)

사실 의사, 간호사, 약사들은 예수님의 협력자들입니다.

의술의 힘으로 치료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해서 치료하되,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은 겸손하게 예수님께 맡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신다면'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예수님의 권능과 자비심을 믿고, 호소하고 간청할 뿐입니다.

복음: 마태 8,5-17: 백인대장의 종, 베드로 장모의 치유

 -조욱현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백인대장의 종과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해주신다. 백인대장은 자기 종을 데려오지 않았다. 이것을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내고 환자를 예수님 앞으로 내려보낸(루카 5,19 참조) 일보다 더 큰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백인대장은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면 종이 일어나고도 남는다고 확신했기에 종을 데려올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가서 그를 고쳐주마.”(7절) 예수님은 종을 치유해주시는 것은 물론이고 그의 집으로 가시겠다고 하신다. 이 말씀 때문에 우리는 백인대장의 훌륭한 믿음을 알게 되었다. 백인대장은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8절) 라고 대답하였다. 이러한 믿음이 예수님을 감동하게 했고 한 인간에 대한 백인대장의 관심과 사랑이 예수님이 그 요구를 기꺼이 들어주시도록 하였다.

 

백인대장은 자신을 자격 없는 사람으로 여김으로써 그리스도를 자신의 집뿐 아니라 마음에도 모실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자임을 보여준다. 그가 그의 집에 들어오신 분을 마음으로도 이미 맞아들이지 않았다면 그런 큰 믿음과 겸손을 보여주는 말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집에 가시겠다는 것은 단순히 그의 집이 아니라, 그의 마음 안에 들어가시겠다는 뜻이다.

 

백인대장은 상관이 있고 부하들이 있어서 마음대로 움직인다고 하면서 하느님으로부터 권한을 받으신 분이 이런 일을 하시는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한다. 예수께서는 백인대장의 모습에 감탄하신다. 종에 대한 백인대장의 사랑은 예수님께서 고통받고 소외된 사람들, 특히 병자들과 죄인들에 대해 가지신 사랑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신이 가지고 계신 사랑을 가지고 자기 종을 위하여 이방인인 예수님을 찾아온 그에게 그의 믿음을 보실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백인대장과 같은 많은 사람이 사방에서 모여와 하늘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것이라고 하시면서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들은 바깥 어둠 속으로 쫓겨날 것이라고 하신다. 바로 백인대장을 칭찬하시는 말씀이다. 그리고는 백인대장에게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종이 나았다. (13절)

 

또한,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해주시고 다른 많은 병자도 치유해주셨다. 많은 일 속에서 피곤하셨겠지만, 당신께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을 거절하지 않으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도움을 구하는 사람이 있는 한 예수님의 사랑의 손길이 쉴 틈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그 사랑을 우리도 실천하여야 하며, 그분께 은총을 받았으면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을 위한 봉사로 이어져야 한다. “부인은 일어나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15절) 라고 하고 있다. 사랑과 봉사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마태 8, 10)

-한상우신부-


믿음은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다.

믿음이란
믿는 것의
뜨거운
실천이다.

진실로
주님을 믿는
우리들 삶이
참된 믿음의
삶이다.

주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이
믿음의 삶이다.

믿음과 실천
이 모두는 사랑을
한뿌리로
두고있다.

믿음으로
소통하고
사랑으로
삶은 치유된다.

진실한 믿음은
서로를 살린다.

믿음이 열리는
순간이 아픔을
치유하는 치유의
순간이다.

백인대장은
믿었다.

믿는 사람이
신앙인이다.

가장 아픈
곳에서 믿음은
다시 밝아온다.

믿음으로
삶을 다시
건져 올리시는
주님이시다.

우리의 삶과
믿음은
분리될 수 없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향한
믿음을 만나고
싶어 하신다.

삶을 다시
살리는
믿음이다.

믿음으로
이 순간도
걸어가고 있는
우리들 삶이다.

 -오상선신부-

 

여러 만남이 이어지는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두 개의 결정적 만남에 주목합니다.

"그는 그들을 보자 천막 어귀에서 달려 나가 그들을 맞으면서 땅에 엎으려 말하였다."(창세 18,2-3)
"한 백인 대장이 다가와 도움을 청하였다."(마태 8,5)

천사들을 환대하는 아브라함과, 고통받는 종의 치유를 청하기 위해 예수님께 다가온 백인대장의 모습이 겹칩니다. 둘 다 매우 겸손하고 진실된 태도의 영접으로 보입니다.

"나리, 제가 나리 눈에 든다면, 부디 이 종을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창세 18,3)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 8,8)

고대 중동 사막 지역에서 나그네를 귀하게 대접하는 일은 축복을 부르는 관습입니다. 아브라함은 한창 더운 대낮에 길을 지나는 이들을 나무 아래로 모셔 물과 음식과 쉼을 제공하지요. 그는 나그네들이 하느님의 천사인 줄 꿈에도 몰랐을 겁니다. 믿음으로써의 행동이라기보다 선하고 관대한 인류애적 견지에서 그들을 섬긴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인 백인대장은 예수님의 능력에 대해 굳은 믿음을 가지고 다가와 청합니다. 심지어 직접 종에게 가 주시겠다는 예수님을 자기의 비천함을 들어 만류하지요. 정복국의 군사 장교가 식민지 백성의 예언자(로 보이는  청년)에게 이토록 예우를 갖추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이는 그저 좋은 소양이나 성정을 넘어서 "믿음"에 근거하는 겸손과 확신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그렇게 해 주십시오."(창세 18,5)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마태 8,13)

천사들은 아브라함의 섬김을 받아들입니다. 영적 존재인 그들에게 딱히 필요하지 않은 서비스일지도 모르지만 아브라함의 지향과 의지, 말이 실현되도록 자신들을 그의 손에 맡기지요.

예수님은 백인대장의 말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해 주십니다. 그의 겸손한 신앙고백이 그대로 이루어져 열매를 맺도록 해 주시는 겁니다. 그가 간절히 바라고 굳게 믿은 그대로 종은 치유될 것입니다.

제1독서의 뒷 부분에서는 아브라함에게 후손이 태어날 것이라는 주님의 약속과, 이에 대해 의혹을 품는 사라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생물학적으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기 때문이지요.

지금 아브라함과 사라는 믿음의 조상이 되기까지의 여정 중에 있는 것입니다. 온 이스라엘이 공경하고 자부심을 갖는 선조지만, 그 믿음이 형성되기까지의 생생한 민낯은 우리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고, 성경은 이를 감추지 않고 기록한 것이지요.

복음 대목의 후반부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 주변으로 모여든 이들과 예수님의 만남이 이어집니다. 병들고 약하고 고통을 겪는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손길로 구마와 치유를 받아 온전함을 회복하는 역동적인 장면이지요.

물론 오늘 간절히 주님을 찾는 그들의 믿음은 언젠가 십자가형의 외침으로 변하고 말 나약하고 기복적인 믿음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주님은 오늘 제1독서 속의 아브라함 부부처럼 그들 역시 아직 과정 중에 있음을 아시기에, 기꺼이 그들을 맞아 각자의 필요를 채워주신 것이지요. 아주 적극적으로 혼신을 다해 그들의 질병과 병고를 떠맡으십니다.(복음 환호송 참조)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마태 8,10)
예수님의 기쁨에 찬 감탄이 들리는 듯합니다. 이 감탄은 백인대장을 넘어 우리를 향하고 있지요. 존재 전체로 주님을 맞아들여, 말씀으로 고백하고, 실천으로 섬기는 믿음은 그저 인간적으로 잘 형성된 인성의 차원을 넘어섭니다. 아직 과정 중이라 여전히 흔들리고 동요하는 섬약한 믿음일지라도 주님은 우리의 말인 신앙고백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 주님께서 우리 곁을 그저 지나쳐 가시지 않도록 신앙의 눈을 크게 뜨고 주님을 맞이하는 날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청한 바가 들어 허락되고, 우리의 겸손한 환대와 믿음에 그분이 감탄하시기를 빕니다. 반드시 우리가 믿는 대로 될 것입니다. 아멘.

 나이를 생각지 말 것입니다.

 -김찬선신부-

오늘 창세기는 하느님께서 길손의 모습으로 아브라함과 하와를

찾아오시어 하와가 잉태하여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이에

하와가 "이렇게 늙어 버린 나에게 무슨 육정이 일어나랴?"하며 웃자

하느님께서 "너무 어려워 주님이 못 할 일이라도 있다는 말이냐?"며 

나무라시는 내용입니다.

 

이에 비해 오늘 복음은 자기 종의 병을 고쳐주십사고 청하는 백인 대장에게

주님께서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 하시자 백인 대장이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라는 그 유명한 대답을 하고 그러자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고 

칭찬하시는 내용, 아주 훈훈한 대화가 오가는 내용입니다.

 

참으로 불신과 믿음이 대조가 되는 사라와 백인 대장의 얘기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사라의 불신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고,

그렇게 비난받을 것도 아닙니다.

 

사라도 그렇게 얘기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알았다면,

하느님께서 직접 나타나시어 말씀하시는 것임을 알았다면 믿었을 겁니다.

 

사실 우리도 하느님께서 나타나시어 말씀하시면 다 믿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는 너무 어려워 못할 일이 없다는 것도 다 압니다.

성모 마리아의 예수님 잉태 때 가브리엘 천사가 한 말이 그렇지요.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그렇지요. 하느님은 전능하시고,

하느님에게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머리로 다 압니다.

그러나 믿음은 머리로 아는 것을 넘어서는 전 존재적인 것이지요.

 

사라가 믿지 못하는 또 다른 근본적인 이유는 체념했기 때문입니다.

체념이란 희망을 꺼버리는 것인데 이제 나이를 먹어 아이를 낳는 것은

다 글러 먹었다고 희망을 버렸기에 절실함도 믿을 일도 없게 됐던 것이지요.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고 하잖아요?

이성적으로는 지푸라기는 아무 소용없고 믿을 것이 못 되지만

절체절명의 순간에는 그 지푸라기에 일말의 희망을 걸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으니까 희망을 걸기도 하지만

희망을 두기에 믿는 것이기에 희망과 믿음은 이처럼 상호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희망과 믿음만 상호적인 것이 아닙니다.

사랑과 희망도 상호적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희망을 가지지도 않지요.

 

사랑하는 아들이 죽게 되었고 의사가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할 때 아버지는 

이제 아들을 보내주자고 하지만 엄마는 끝까지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데 그것은 아버지보다 엄마가 아들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듯

사랑이 희망을 하게 하고 사랑할수록 희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오늘 복음의 백인 대장은 종을 사랑했기에

종을 살릴 방법을 찾았고 살릴 수 있다는 희망을 꺾지 않았으며,

그래서 주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리고 이미 늙었다고 생각이 들 때 사라를 생각할 것입니다.

그가 이사악을 임신할 때 그의 나이는 89 세였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나이먹었다고 체념해서는 안 됩니다.

앞서 봤듯이 체념은 우리의 신망애 삼덕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희망은 우리가 희망을 포기하는 순간 날아가 버리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우린는 세월의 순종도 해야지만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는 나이를 생각지 말 것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7월 1일 연중 제12주간 토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