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 8일 부활 제5주간 토요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다.
(요한 15,18-21)
You do not belong to the world,
and I have chosen you out of the worl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오늘 복음 환호송을 통하여 바오로 사도는 “너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증인으로 온 세상에 주님의 복음을 전합니다. 그들은 주님께 선택된 사람들로서 예수님의 운명에 동참하게 됩니다. 이러한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세상에 속하여 세상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행하신 것을 기준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들도 당신처럼 적대자들로부터 박해와 고통을 받을 수 있음을 암시하시는 대목입니다. 예수님께서 적대자들에게 받으신 고통과 어려움은 당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내어놓으시고, 세상의 고통과 죄를 대신 짊어지셨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자신들을 뽑으신 예수님께 받은 사명을 그분과의 지속적인 관계 속에서 수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제자들은 자신의 삶 안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 또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야 할까요?
예수님의 제자로서 녹록하지 않은 세상의 많은 어려움 속에 살면서 그분을 따르는 힘은 ‘주님과 하나 됨’입니다. 그래서 오늘 영성체송을 통하여 전해 주시는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에게 큰 힘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약한 우리를 위하여 삼위일체 하느님과 하나가 되시어 그분 안에서 믿음이 충만하고, 희망을 넘어 희망하며,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을 위하여 비오니, 이들이 우리 안에 하나가 되게 하시고, 아버지가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소서.”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인 이덕무(1741~1793)는 박학다식하고 문장이 뛰어났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출세에 제약이 많은 세자 출신이었지만, 정조대왕에게 발탁되어 규장각 검서관이 되기도 합니다. 그의 학문은 훗날 정약용, 김정희 등에 영향을 미치게 되지요.
이런 학문적 깊이를 갖게 된 것은 그가 엄청난 독서광이었기 때문입니다. 온종일 책만 읽어도 될 정도로 책에 대한 그의 사랑은 대단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책 읽은 곳은 어떤 곳이었을까요?
많은 이가 책 읽는 분위기를 신경 씁니다. 조용해서 책에 집중할 수 있는 곳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집에서 주로 책을 읽었고, 그의 집은 당시 가장 번화한 거리였던 종로 사거리였습니다. 사람이 가장 많은 곳이었고, 가장 시끄러운 곳이었지만 책 읽는 데 걸림돌이 되지 않았습니다.
책을 읽는 것만 그러할까요? 사실 많은 상황에서 안 되는 이유를 찾는데 익숙한 우리입니다. 기도가 잘 안 되는 이유, 공부 안 되는 이유,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 취업이 안 되는 이유…. 이런 식으로 안 되는 이유를 얼마나 많이 찾고 있습니까? 앞서 말씀드린 실학자 이덕무처럼, 위대한 위인들은 모두 안 되는 이유에 집중한 것이 아니라 되는 이유를 찾았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잘 생각해보면 되는 이유가 참 많았습니다. ‘안 한다, 못한다.’ 등의 결론을 미리 내리고 보니, 되는 이유가 보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주님께서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나햐면 세상이 주님을 먼저 미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주님을 미워하면서 받아들이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세상에 있으면서 세상의 것을 좋아하고 또 세상의 눈으로만 보고 있으니, 하느님의 뜻을 볼 수도 없고 하느님의 일을 좋아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놀라운 표징과 하늘나라의 말씀을 전해주셔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미움’이라는 감정으로만 마주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앞에 계시는데도 미움으로 가득 찼던 이스라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눈앞에 직접 보이지도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을 수도 없는 우리는 어떠할까요? 우리가 더 ‘미움’이라는 부정적인 감정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힘을 넣어주셨습니다.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이유를 찾아서, 세상이 미워해도 사랑하는 힘을 주셨습니다.
어떤 이유를 말하며 사는 나 자신인지를 온전히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되는 이유를 찾고 있는 나 자신일 때, 주님을 발견하고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우편물 하나를 받았는데, 그 안에 ‘금가락지’가 담겨 있었습니다. ‘이게 뭐야?’ 하면서 동봉해 있는 편지를 읽어보니, 저를 아들로 삼고 싶다면서 ‘엄마가 아들에게 물려주는 유품’으로 받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금가락지를 다시 그분께 보내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편지 한 통을 남겼습니다.
‘저는 누구 한 사람의 사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사제입니다. 따라서 저를 아들로 삼고 싶으셔도 개인적인 감정을 가지고 자매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금가락지를 돌려드립니다. 본인에게 필요 없다고 생각하시면 좋은 곳에 쓰시길 바랍니다.’
솔직히 자기만의 사제가 되기를 바라는 분이 많습니다. 저는 그때마다 차갑게 대하고 그 자리를 도망칩니다. 그렇게 친한 관계를 만들면 저부터가 사제로 온전히 살아가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께서 주님 곁으로 가시고, 종종 “신부님, 제가 신부님 엄마 해 줄게요.”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고마운 마음이지만 솔직히 자기만의 사제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서 경계심을 갖게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모두 한 형제, 자매입니다. 소유하겠다는 마음에서는 불편과 어려움이 가득해질 뿐입니다.

아무도 나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두려워하라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도 역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는 그리스도로부터 성령을 받기 때문에 사랑이 열매를 맺습니다. 하느님의 뜻, 즉 하느님 본성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와 세상, 이 둘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원수지간입니다. 요한의 세계관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이고 온 세상은 악마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압니다.”(1요한 5,19)
그러나 악마는 교묘하게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과 세상에 속한 사람들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고 허물려는 시도를 벌입니다. 그래서 이원론은 나쁘다고 하며 통합을 강조합니다.
저도 처음엔 다른 사람들이 저를 미워한다고 하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사람이 저를 사랑할 수 있도록 모든 에너지를 쏟았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저를 미워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어떤 이들이 나를 미워하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무언가 허전했습니다. 이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미움받지 못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내가 참 복음을 전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실 미움받지 않는 것을 두려워했어야 합니다. 세상이 나를 사랑하면 나는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악마가 지배하는 세상에 속한 사람이란 뜻이기 때문입니다.
사막에서 거칠게 살아가는 전갈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있는 독침은 다른 동물들에게는 참으로 위협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별히 자신의 머리를 짓밟는 이들에게는 더욱 위협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날 전갈 한 마리가 개구리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개구리들은 모두 전갈을 피해 달아났습니다. 그러나 워낙 착한 전갈처럼 보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개구리들은 전갈이 자기 꼬리의 독침을 사용하지 못하는 정신 나간 존재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고을의 개구리들과의 싸움에서 승기를 잡기 위해 그 전갈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곧 다른 고을과의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그 고을과의 사이에는 개울이 흐르고 있었는데 개구리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무기인 그 전갈을 자신들의 등에 태우고 개울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갈은 수영도 못하는 자기가 개구리들과 어울리는 것은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단 한 순간이라도 자기 본성대로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태운 개구리를 독침으로 찔러 자신도 죽고 개구리도 죽였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마치 이런 전갈처럼 오셨습니다. 그리고 등에 업은 사람을 당신 십자가에서 흐르는 피로 죽이십니다. 그러니 세상이 자신의 지배 아래에 있는 백성을 빼앗아가는 예수님을 사랑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세상은 악의 욕망, 즉 세속-육신-마귀의 지배 아래에 사는 사람들이고,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본성, 즉 사랑의 본성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랑의 본성으로 사는 사람들은 그 본성과 반대되는 세속-육신-마귀의 욕구를 죽입니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은 세상에서 미움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아무도 나를 미워하지 않으면 두려워하십시오.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입니다.
영화 ‘그린 존’(2010)은 2003년에 발생한 이라크 전쟁을 배경으로 합니다.
미국은 이라크가 생화학무기를 만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것을 포기하지 않는 이라크를 무력침공합니다. 미군 해병대 팀장 ‘맷 데이먼’은 해병대원들과 화학무기가 있다는 지역을 타격합니다. 그런데 매번 화학무기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이에 의문을 품은 팀장은 한 집을 습격하던 중 그곳에 이라크 장군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그를 추격합니다. 그 이라크 장군이 미국에 잘못된 정보를 주는 대상임을 알아낸 것입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장군을 찾아내어 왜 잘못된 정보를 주느냐고 하지만 사실 그는 미국에서도 이라크에서도 쫓기는 신세였습니다. 그가 처음 미국에 주었던 정보는 이라크에 생화학무기가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원전을 자신들 소유로 만들고 싶었던 미국에게는 이 정보는 쓸모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화학무기가 있다는 정보를 주었다고 속이고 일단 이라크를 침공한 것입니다. 그리고 특공대원들을 시켜 그를 찾아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린 상태였습니다.
미국은 맷 데이먼이 그를 찾게 만들어 그 뒤를 쫓아 장군을 살해하려고 합니다. 맷 데이먼은 미군으로부터 그를 보호해 주려고 하지만 결국엔 자기 나라 사람에게 사살당하고 맙니다. 그 사람들도 장군이 미국에 정보를 주어 미국이 자신들을 침공하게 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맷 데이먼은 미국이 승리한 후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내각을 구성하여 이익을 챙기는 정치인들에게 맞서려고 하지만 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화학무기도 없는데 그것을 빌미로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다는 사실을 인터넷에 흘리고 그렇게 전 세계가 미국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무고한 이라크를 침공한 사실을 알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것은 진실을 말하는 이는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는 진실을 말하는 이들이 미움을 받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은 진실을 싫어합니다. 돈을 좋아하고 권력을 좋아하고 편안함만을 찾습니다. 그러니 돈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곧 진실하지 못한 사람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도 나를 미워하지 않으면 두려워하십시오. 하느님 나라에 속하지 않았음이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믿고 증거하면 개구리 마을의 전갈처럼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이리 떼 가운데 양을 보내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 백성과 세상 백성은 그 본성상 통합될 수 없습니다. 하늘 나라 백성은 세상을 미워하지 않지만, 세상은 하늘 나라 백성을 미워합니다.
우리가 사는 교회 안에도 세상에 속한 이들이 속해있습니다. 그들을 구별하는 법은 쉽습니다. 성당에 다니면서도 돈과 먹고 마시는 것과 권위와 교만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 사람은 실제로 세상 사람입니다. 이 경계선을 통과하는 것이 저는 ‘십일조’라고 생각합니다. 재물에 얽매이지 않고 하느님을 주님으로 인정한다는 신앙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들에게 미움을 받지 않는다면 경계하십시오. 나도 교회에 속한 척하며 실제로는 세상에 속해있을 수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처음으로 성지순례를 갔던 것은 1982년 여름입니다. 당시 성소국에서는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도보성지순례를 기획하였습니다. 신학생들은 절두산 성지에서 함께 기도를 한 후에 대부분의 성지를 도보로 순례하였습니다. 미리내, 양지, 솔뫼, 해미, 갈매못, 나바위, 치명자 산까지 다녀왔습니다. 지금은 모두 순례자들을 맞이할 수 있는 성지로 조성이 되어있지만 40년 전에는 대부분 빈 공간에 성지라는 안내표시만 있었습니다. 본당신부로 있으면서 기차로 떠나는 성지순례를 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영등포 역에서 기차를 타고 구학 역에서 내렸습니다. 구학 역에서 베론 성지까지는 도보로 순례하였습니다. 성지는 순례하는 사람이 없으면 잊혀지게 됩니다. 신앙의 선조들이 박해를 받아 순교하였던 곳, 신앙의 선조들이 순교하여 묻혔던 곳을 찾아 순례하는 것은 우리들 또한 신앙의 선조들을 따라 충실하게 살아가려는 다짐입니다.
올해는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한분은 순교로 신앙을 증거했습니다. 다른 한분은 길 위에서 신앙을 증거했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주춧돌을 놓았고, 최양업 신부님은 주춧돌 위에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유럽과 이스라엘로 성지순례를 가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상해와 연길로 성지순례를 가는 것도 좋습니다. 상해에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 서품을 받은 성당이 있습니다. 연길에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최양업 신부님이 부제품을 받은 성당이 있습니다. 두 신부님은 만주벌판을 지나서 그리운 조선으로 오는 길을 찾았습니다. 프랑스 파리 외방선교회 신부님들도 만주벌판을 지나서 조선으로 입국했습니다. 말이 좋아 만주벌판이지 크기가 조선의 8배라고 합니다. 도중에 사나운 짐승도 있고, 도적 때도 있고, 살을 에는 추위도 있었습니다. 선교사들은 압록강물이 어는 추운 겨울에 조선으로 와야 했습니다. 순례의 여정에 백두산 천지를 바라보며 민족의 통일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좋습니다.
성지순례를 다니면서 가장 기억에 남은 글이 있습니다. 베들레헴 성당 입구에 있던 글입니다. “만일 여행객으로 왔다면 순례가가 되어서 돌아가십시오. 만일 순례자로 왔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돌아가십시오.” 어쩌면 우리의 삶은 하느님께로 나가는 순례의 길인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 온 이유를 알지 못하고, 세상의 것들에 취해서 여행객으로 머물다가 떠나갑니다.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 온 이유를 알아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가지만 유혹이 다가오면 이겨내지 못하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고 맙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의 선조들이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된 것처럼 세상의 것들을 버리고, 하느님의 영광을 찾아서 길을 떠납니다. 비록 순례의 길에 고난과 유혹이 찾아오지만 성모님의 도우심을 청하며 거룩한 사람이 되어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천상의 영광을 추구합니다.
오늘 제1 독서는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비록 많은 고통과 박해가 있었지만 당당하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만큼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디모테오와 같은 좋은 협조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마케도니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신앙인들은 이 세상에서 살지만 천상에서의 삶을 희망하는 순례자가 되어야 합니다. 비록 가난할지라도, 비록 병고에 시달릴지라도, 비록 일찍 죽을지라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알렐루야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여라. 거기에는 그리스도가 하느님 오른쪽에 앉아 계신다.”

주님, 지금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어서 일어나 도와주십시오!
-양승국신부-
‘오늘 우리가 소속되어 있는 교회 공동체의 정의, 본질, 의미는 무엇인가?’ 묻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인듯 합니다.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확한 답을 알고 있어야, 구성원으로서 합당한 가치관이나 지향점을 지니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우리가 기대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웬만한 파도 앞에서는 미동도 하지 않는 크고 안전한 배? 그 안에서 누리는 잔잔한 마음의 평화? 건강과 안전? 가화만사성? 끝도 없는 승승장구?
일정 부분 그런 부분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습니다. 존경하는 헨리 나우웬 신부님의 교회에 대한 정의는 참으로 인간적이고 따뜻하며, 동시에 설득력이 있습니다.
“교회는 모자라고 나약한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비틀거리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주님을 만나게 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교회 공동체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 교부의 정의도 매력적입니다.
“하느님의 위로와 세상의 박해 사이를 걸어가는 양떼들의 모임.”
하느님 나라를 향한 순례 여정에 하느님께서 분명히 우리 한 가운데 굳게 현존하심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동시에 세상과 적대자들로부터 받게 되는 멸시와 수모 역시 기정 사실입니다. 고통과 시련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인 것이지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요한 복음 15장 18~19절)
결국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지상 여정을 나아가는 동안 겪게 될 다양한 고통과 시련 앞에서 너무 괴로워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박해와 미움 앞에서 너무 분노하거나 집착하지 말아야겠습니다.
한쪽에서는 역동적인 성령의 활동에 힘입어 우리 교회는 순풍에 돛단듯이 앞으로 전진하며 성장해나가지만, 다른 한편에는 언제나 교회를 분열시키고 파괴시키려는 악의 세력이 존재합니다.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언제나 두 세력의 투쟁이 계속 되어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 교회가 적대자들과 세속의 권력자들로부터 받은 박해와 고통은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마다 하느님의 더 큰 위로와 격려가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은총과 구원이 있었습니다.
교회 공동체라는 배 위에 승선한 우리가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할 진리가 한 가지 있습니다. 교회라는 배는 세상이라는 배와는 근본적으로 결이 다른 집단, 철저하게 차별화된 집단입니다. 교회가 추구하는 가치와 세속적 가치의 충돌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로인해 발생하는 고통과 박해 역시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참으로 아이러니 한 공동체입니다. 거룩함과 공동선을 지향하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언제나 흔들리며 틈만 나면 표류합니다. 근본적으로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인 우리 인간들의 집합체여서 그렇습니다.
쉼없이 흔들리고 표류함에도 불구하고 선장이신 주님께서 교회 공동체 안에 변함없이 현존하고 계심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때로 아니 계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때는 잠시 휴식을 취하시거나 잠드셨을 때일 것입니다.
그러니 견디기 힘들때, 감당하기 벅찬 파도가 밀려올 때면 목청껏 선장이신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겠습니다. 그분을 흔들어 깨워야겠습니다. 사도들처럼 말입니다. “주님, 지금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어서 일어나 도와주십시오.”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세상에서 택한 사람들이기 때문
-이영근신부-
우리는 이번 주 내내, 관계 안에서의 ‘사랑의 계명’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곧 아버지와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에서, 제자들과 제자들이 관계에서의 사랑이었습니다.
이제 오늘 <복음>은 제자들과 세상의 관계에서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당하게 될 것에 대한 예고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한편으로는 제자들의 신원과 사명으로부터,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 사람들의 몰이해로부터 오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결국, 세상과 제자들의 관계에서도 제자들의 사명 역시 사랑임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당하는 이유를,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세상에서 택한 사람들이기 때문”(15,19)이며, 또한 “내 이름 때문”(15, 21), 곧 “내 제자라 해서” 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예수님께 속한다.’는 것과, ‘예수님께로부터 선택받았다.’는 것과, ‘예수님 이름’, 이 세 가지가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받게 되는 <제자들 편>에서의 이유입니다.
사실, 이는 우리 존재의 의미요, 우리 삶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세상 편>에서의 이유는 “그들 곧 세상이 예수님을 보내신 분을 모르기”(15,21)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결국, 오늘 <복음>은 세상이 아무리 제자들을 미워하고 박해한다 하더라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자신들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 누구에게 선택받았는지? 제자로서의 신분을 잃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곧 세상의 미움과 박해 속에서도, 오직 예수님께 믿음을 두고, 꿋꿋이 복음을 선포하라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입니다.
나아가서, 비록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받을지라도 당신께서 하셨던 것처럼, 당신을 보내신 분을 알게 하여야 하는 소명을 일깨워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 예수님께 속해 있다면, 미움과 박해는 당연한 것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특권에 해당한 것입니다. 이 특권에 대해,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필립 1,29)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명과 함께 고난의 특권도 부여받았습니다.
한스 큉은 말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고난을 없애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사랑하신다.”
따라서 오늘 말씀은 세상이 아무리 제자들을 미워하고 박해한다 하더라도, 오직 당신을 보내신 분인 아버지께만 믿음을 두셨던 주님이요 스승이신 예수님을 따라서, 믿음으로 복음을 선포하라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요한 15,19)
주님!
세상에 속하지 않기에, 세상의 사랑을 구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께 속하니, 당신의 사랑에 목마르게 하소서!
고난을 겪는 특권을 받았으니, 그 속에서 당신을 만나 뵙게 하소서!
그 어떤 미움과 배척에서도 사랑을 배우게 하소서! 아멘

더 큰 사랑으로
-반영억시부-
꿈은 크게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룰 수 있는 꿈을 가져야 합니다. 바라는 것에 걸맞은 노력과 정성이 함께한다면 꿈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원대한 꿈을 지니되 선 안에서 열매를 맺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분수에 맞지 않거나 선에 대치되는 꿈과 희망은 결코 현실화 될 수 없습니다.”
오래전 일이지만 모 그룹 재벌회장이 술집에서 폭행을 당한 아들을 보고 너무 화가 나서 조직 폭력배를 동원하여 보복을 하였다는 얘기가 떠들썩하였습니다. 결국 그 아버지는 구속되었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고귀한 마음은 나무랄 수 없지만, 선에 대치되는 방법을 선택하였기에 그는 너무 많은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자식을 사랑한다는 빌미로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선생님을 폭행한 학부모도 있습니다. 폭행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자녀 교육에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 자녀는 아버지의 전철을 밟을 것입니다. 스승을 존경하지 않는 부모의 자녀에게는 바른 인성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자녀는 부모를 보고 자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은 세상의 방법을 좋아하고 그것으로 자신을 내세우며 권력을 행사합니다. 그리고 그에 동조하는 사람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그것을 즐깁니다. 옳고 그렇지 않고는 상관없이, 좋고 싫고에 관심을 둡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속한 사람은 그것에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들에만 가치를 두지만, 하느님께 속한 사람은 저 멀리 하늘의 가치를 봅니다. 그래서 결국 미움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이 나를 미워한다고 해도 두려워할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곧 내가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것이 증거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미움을 당하는 것은 악에 대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해야 할 소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사실 사악한 세상의 미움을 받지 않고 그들과 더불어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조직폭력배와 공생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믿는 이들은 누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구애 없이 선을 선택하여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세상에서 뽑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삶을 산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삶이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이라는 것을 일깨우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극복해야 할 것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유로움과 영원함을 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살아있는 표지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세상은 우리의 발판이고 세상을 회피할 수 없기에 끝까지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힘을 주시는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가톨릭 신자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공동선을 추구하는 데 있어 '가장 뛰어난 형태의 자선'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온갖 부정부패로 얼룩진 정치에 참여하기란 쉽지 않다는 현실에 공감하시고 "매일 공동선이라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은 일종의 순교와 같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지저분하게 되거나 지치게 되더라도 우리는 현실 안에서 다시 선을 선택해야 합니다. 누가 나를 미워하면 더 큰 사랑으로 갚아 주길 다짐하며……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복음: 요한 15,18-21: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다.
-조욱현신부-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18절)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만드시려고 고난을 겪으셨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 하느님의 자녀로 계속 남아 있게 해 줄 고난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 우리가 세상의 미움 때문에 고난을 겪는다고 하지만, 주님께서 먼저 세상의 미움을 견디셨다. 우리가 이 세상의 비난을 받고 귀양을 가고 고문을 받지만, 주님께서는 이보다 더한 일을 겪으셨다. 저주받은 세상은 박해하고 하느님과 화해한 세상, 즉 교회는 박해를 당한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19절) 주님의 제자들은, 하느님의 자녀들은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현세에 살지만, 그것은 우리를 붙들어 놓을 수 없다. 세상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조금도 잘못된 일이 아니다. 같은 행동으로 하느님과 세상을 똑같이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진리에 복종하는 사람은 진리의 원수들과 싸워야 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20절) 이 말씀을 제자들이 온갖 종류의 박해를 당할 것을 말씀하신다. 주님께서도 사악한 자들이 방자한 말로 그분을 공격했고, 온갖 말로 당신을 모욕하였지만,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 그분이 받으신 모욕과 굴욕적인 상황을 부끄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을 닮으려 노력하는 사람들이 될 것이라고 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는 그분께 싸움을 걸더니, 그분이 하늘로 올라가시니까 제자들에게 싸움을 걸어왔다. 이미 제자들에 앞서 당신이 먼저 박해를 받으셨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 말도 지킬 것이다.”(20절) 우주의 창조주이시며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쥐고 계시는 그분이 당신을 박해하는 자들이 각자 자신의 행실을 선택하도록 허락하셨다. 그래서 그분은 박해를 받으셨다. 우리도 그분과 같은 길을 걸으려 한다면 박해를 당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는 길이다. 이것 모두가 역시 우리 자신과의 싸움이다.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을 때, 우리는 그분과 함께 다스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뜻을 행하고 열매를 맺는 일에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내 이름 때문에 너희에게 그 모든 일을 저지를 것이다. 그들이 나를 보내신 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21절) 여기서 ‘그 모든 일’은 세상이 당신의 이름 때문에 우리를 미워하고 박해하고 우리의 말을 업신여기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세상은 주님 대신 우리를 미워할 것이며, 주님 대신 우리를 박해할 것이고, 세상이 우리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그것이 당신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상에 속한 자들과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은 완전히 다르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어떠한 삶으로 주님을 닮아야 할지를 생각하며 노력하여야 하겠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다."(요한 15, 19)
-한상우신부-
어버이
날이다.
조건없는
부모님의
사랑에
머리숙여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은총이다.
필요한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역동적이다.
뒷걸음질칠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이다.
주님께서
직접
뽑으신
우리들이다.
우리를
뽑으신 분이
우리와
함께하신다.
신앙은
확신이다.
확신은
착각을
걷어낸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뽑으셨다.
하느님
사랑안에서
살아간다는
이 확신이
없으면
우리는
기쁠 수 없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우리를
뽑으신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분이시다.
미움과
두려움을
내려놓는다.
하느님의
사랑이
모든 것보다
더 크다.
하느님의 사랑은
하느님의 선하신
계획이다.
하느님의 계획은
우리 모두를
살리시는 것이다.
뽑힌 이들은
다름아닌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는
이들이다.
하느님의
가장 좋으신
사랑이
우리 모두를
더 좋은
사랑으로
이끌어 가고
있음을 믿는다.
사랑은
모두가
소중하며
모두를
철들게 한다.
하느님
사랑으로
성장하는
우리들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되, 세상에 속하지 않으면서 나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길을 알려 주십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요한 15,19)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세상"은 영의 세계와 구분되는 영역일 겁니다.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며 성령의 인도에 마음을 여는 이는 세상의 지배 아래 매여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세상과 별개로 살아갈 수는 없지요. 이천 년 전 제자들도 그랬고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타인보다 우월한 존재가 되려고 돈과 권력을 탐하며 불법과 불의도 마다 않고 달려가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는 이에 철저히 역행합니다. 가진 바를 나누고, 이웃을 섬기며, 약하고 가난한 이들 안에서 주님을 발견하고, 스스로 가난을 택하는 이들이 그리스도인이니까요.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이 여기에 계시니까요.
그러니 세상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나 신자들을 불편해 합니다. 세상에 살지만 세상과 발 맞추지 않으면서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이들을 의심과 무시의 눈초리로 보기도 하고 심지어 박해까지 일삼지요.
"그들이 나를 보내신 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요한 15,21)
예수님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에 대해 세상이 저지르는 미움과 증오의 이유를 "무지"라고 하십니다. 아버지 하느님도 모르고, 구원을 위해 아들을 보내신 사랑도 모르니 그런 것이라고 여기시지요. 만일 세상이 아버지와 그분의 사랑을 알았다면, 하느님의 모상을 지닌 고귀한 존재로서 응당 아버지를 섬기고 아드님을 사랑했을 것이라고, 예수님은 끝까지 그들이 지닌 하느님 모상으로서의 거룩함을 믿어주십니다.
제1독서에서는 바오로의 선교 여행이 어떤 원동력으로 이루어지는지가 드러납니다.
"그 고장에 사는 유다인들을 생각하여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베풀었다."(사도 16,3)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원로들이 정한 규정을 신자들에게 전해 주며 지키게 하였다."(사도 16,4)
사도행전 저자는 이방 지역에서 바오로가 행한 이 두 가지 상반된 모습을 가감 없이 전합니다. 전통이라는 예민한 쟁점에 대해, 그 고장의 유다인들이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누구에게는 할례를 베풀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무거운 짐을 지우지 않기로 한 예루살렘 회의의 규정을 알려 주지요.
이는 바오로의 사명이 단 하나의 목적, 구원을 향하기 때문에 가능한 모습일 겁니다. 바오로는 자신의 이러한 모순처럼 보이는 선교 방식에 대해 그의 서간에서 다음과 같이 피력합니다. "유다인들을 얻으려고 유다인들에게는 유다인처럼 되었습니다. ... 율법 밖에 있는 이들을 얻으려고 율법 밖에 있는 이들에게는 율법 밖에 있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1코린 9,19-23 참조)
사도 바오로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틀을 넘어섭니다. 그가 유다인이나 이방인이나 그들이 무지를 깨고 비로소 알게 된다면 그들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전통과 관습, 기득권과 평판이라는 세상의 틀을 과감히 뛰어넘는 그의 원동력은 복음이지요. 그렇다면 그는 저마다 상황이 다른 선교 현장에서 어떻게 식별을 하고 방향을 잡았을까요?
"성령께서 막으셨으므로"(사도 16,6)
"예수님의 영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사도 16,7)
사도 바오로와 그의 동료들은 철저히 성령께 의지해 나아갑니다. 그들은 모든 일을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의탁하고 순중하여 그것이 하느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식별하며 움직였습니다. 막으시면 멈추고 열어 주시면 담대히 발걸음을 옮겼지요.
세상의 방식으로 인간적 기대와 욕심이 앞섰다면 계획이 틀어진 것을 불편해하고 고집을 부려 강행했겠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순히 따릅니다. 그들은 복음 선포의 주도권을 오로지 성령께 일임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세상은, 하느님 보시기에 좋도록 잘 가꾸어 나가며 사랑하고 돌보아야 하는 터전임이 분명하지만, 우리를 끌어당기는 세상 논리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세상은 크고 강하고 높고 많은 것을 추구하느라 작고 약하고 낮고 미소한 것을 착취하고 무시하며 소외시키기 일쑤니까요. 거기 하느님이 계심을 모르기 때문이지요. "무지"한 세상이 하릴없이 지배당하고 있는 물질 논리와 힘의 논리는 선하고 좋으신 사랑의 하느님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세상 안에서 살아가더라도 세상과 야합하지 않고 성령께 이끌려 살아갈 때 유지됩니다. 물론 거센 세속의 물살을 역행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닐 거고요, 주위에서도 그런 우리가 불편해서 그냥 대충 살라고 끌어내리기도 할겁니다. 그래도 어쩝니까! 우리는 성령의 이끄심에 순종해 나아가는 영의 사람들인 것을요!
사랑하는 벗님!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영의 사람으로서 사랑과 겸손, 나눔을 통해 얻는 평화와 행복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선물입니다. 성령께 마음을 활짝 열고 순종하며, 복되고 복된 기쁨을 누리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소유한 영의 사람들인 벗님을 이렇게 만나고 함께 나아갈 수 있어 행복합니다.

<흙탕물 속의 연꽃같은>
-김찬선신부-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오래전에 저는 세속이라는 말을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이라는 바로 오늘 말씀 때문인데
세속世俗을 별생각 없이 세속世屬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한자어에서 속屬은 여러 가지 뜻이 있지만 어디에 속한다고 할 때의
속은 어떤 부류나 단체에 딸려 있다는 뜻이고,
그래서 다른 부류나 단체와는 무관하거나 적대적일 수도 있지요.
예를 들어, 옛날 이정재 파에 속한 깡패는 김두한 파와는
상종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적대적이기도 하지요.
아무튼, 저는 별생각 없이 세상에 속한다는 뜻으로
세속世俗을 세속世屬이라고 잘못 생각했던 것인데
그런데 이런 생각이 의미적으로는 그리 큰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왜냐면 세상에 속한다는 사람은 그저 세상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나라와 세상 중에서 세상을 선택하는 사람이며
하늘나라를 반대하거나 하느님 뜻에 따라 살기를 거부하는 사람이고,
하느님 없이 이 세상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 곧 무늬만 신자이고 말로만 신자인 사람은
우리 신앙인들 안에서도 얼마든지 많이 발견할 수 있고,
저는 이런 신앙인을 일컬어 실천적 무신론자라고 하지요.
실천적 무신론자란 하느님 존재를 부정하지 않지만, 굳이 논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있건 없건 자기와 상관이 없기에 굳이 열을 올리며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지 않고 하느님이 계신다고 해도
나와 상관없이 저기 하늘에 계시거나 딴 나라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께서 제자들을 이런 세상에서 뽑았다는 것은
제자들을 이 세상에서 빼어내어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사람으로 만드셨다는 뜻이 하나이고
당신 제자로 뽑으셨고 삼으셨다는 뜻이 다른 하나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제자로 뽑힌 사람은 이 세상을 떠나야 하는데
이때 세상을 떠나는 것이 엄밀한 의미에서는 세속을 떠나는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가 세상을 떠나지만, 그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고,
프란치스코가 회개한 뒤 마음은 세속을 떠났지만
몸은 오히려 세상 가운데로 들어간 것처럼 세상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이며
세상 가운데로 들어가되 복음을 들고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을 일컬어 우리는 <흙탕물 속의 연꽃 같은 사람>이라고 하지요.
불교에서 깨달은 사람 곧 부처는 연꽃처럼 흙탕물 속에 피고,
그 안에서 아름다움과 향기를 풍기지만
결코, 그 흙탕물에 잠기는 법이 없다고 하지요.
이런 사람을 우리 신앙은 세상에 살지만 세속화되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복음화하는 사람이라고 일컫고,
복음화되었기에 세상에 살아도 세속화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얘기하면 '아, 바로 나를 두고 얘기하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분이 되시길 비는 오늘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다.(요한 15,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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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가톨릭 신자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공동선을 추구하는 데 있어 '가장 뛰어난 형태의 자선'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온갖 부정부패로 얼룩진 정치에 참여하기란 쉽지 않다는 현실에 공감하시고 "매일 공동선이라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은 일종의 순교와 같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지저분하게 되거나 지치게 되더라도 우리는 현실 안에서 다시 선을 선택해야 합니다. 누가 나를 미워하면 더 큰 사랑으로 갚아 주길 다짐하며……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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