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 9일 부활 제6주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
그러니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요한 15,9-17)
"As the Father loves me,
so I also love you.
Remain in my lov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사랑은 말이나 혀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하는’(1요한 3,18 참조)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오늘 제2독서는 이 사랑이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에, 인간을 위하여 모든 것을 내어 주신 주님의 사랑은 하느님을 알게 하고 하느님과 하나 되게 하는 것임을 알려 줍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사랑은 수동적이지 않고, 매우 역동적이며 능동적입니다. 어떤 이가 사랑을 얻기 위한 기도만을 부지런히 하며 정작 실천이 없다면, 그 사람의 사랑은 탁상공론일 따름입니다. 자신이 가진 것이 충분하다 해도 남을 돕는 데 인색하고 더 가지려고만 하는 탐욕스러운 사람 안에서 사랑을 찾기란 어렵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에게 참생명을 주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계명인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당신과 친구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친구가 되고, 사랑의 실천은 우리를 참생명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사랑의 계명을 잘 지키려면 우리는 ‘혀’와 ‘배’를 잘 다스려야 합니다. 곧 혀로 교만하지 않고, 모든 것을 소유하여 자신의 배를 채우려는 탐욕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혀를 잘못 사용하여 애덕을 거스르고 다른 이에게 상처를 주며, 또한 애덕의 실천을 부풀려 자랑함으로써 교만에 빠질 수 있습니다. 또한 자신만을 위하여 모든 것을 채우려는 탐욕은 마치 배가 부른지도 모르고 계속해서 음식을 먹어 치우며, 남의 것마저 가로채서 배를 채우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실천은 우리에게 교만과 탐욕과의 전쟁을 끊임없이 치르게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서로 사랑한다면 우리가 치르는 이 전쟁은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해 줄 것입니다.
용서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키엣대주교-
인간을 위해 목숨을 내 놓으시며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라는 말을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모든 사랑의 근원은 오직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된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온 세상에 널리 퍼진다면 세상은 천국이 될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좋아하고 사랑하지만 미워하는 사람은 같이 미워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사랑은 외면하고 쉬운 사랑, 지극히 본성에 충실한 인간적인 사랑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선과 악을 구별하지 않고 그 누구도 차별하거나 배재하지 않는 관대한 사랑입니다.
용서는 바로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랑에 빠지면 기꺼이 용서합니다. 복음에는 아버지 하느님의 용서의 사랑에 대해 여러 번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중 가장 감동적인 것은 ‘인자한 아버지’일 것입니다.
아버지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막내아들은 아버지에게 재산을 받은 후 집을 나가 방탕한 생활을 하다 모든 돈을 탕진한 후에야 후회를 하고 집을 그리워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소식도 없는 아들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며 매일같이 골목끝까지 나가 기다리던 끝에 드디어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뛰어가 아들을 다정하게 포옹합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좋은 옷과 반지, 신발을 가져다 주고 잔치를 베풉니다.
아버지는 바로 수많은 잘못을 저지르고 죄짓는 우리를 용서해주시는 주님십니다. 이런 주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요? 그 만큼 어려운 용서의 사랑이지만 그래도 용서는 나를 위한 것이고 이웃을 위한 것이고 세상의 평화를 위한 사랑입니다.
주님께서 죄 많은 우리를 차별없이 대하셨듯이 우리도 차별없는 사랑으로 이웃을 바라봐야합니다. 나보다 나약하고 불행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을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실수를 용서하고 다른 사람의 부족한 사랑을 받아들이고 희생을 주저하지 말아야합니다.
용서와 배려, 포용, 모두 사랑하는 마음이 시작입니다. 주님의 진실한 사랑은 그 모든 것을 포함하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실천해보십시오. 주님의 사랑만이 행복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주님, 저희가 주님을 닮고 주님의 사랑을 알고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 주소서. 아멘

1. 주님의 사랑은 무엇입니까?
2. 용서와 포용, 배려는 사랑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 모두를 포함하는 주님의 사랑을 실천해보십시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렸을 때 어른들에게 건네는 인사는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였습니다. 어렸을 때 이미 최고의 덕목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요? 하긴 지금도 건강에 좋다는 음식이 있으면 얼른 챙겨 먹으려는 우리입니다. 건강 보조제품도 얼마나 많이 판매되고 있습니까? 그런데 요즘 들어 더 중요한 것은 ‘관계’가 아닐까 싶습니다. 내 몸이 튼튼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관계가 깨어져서 너무 힘들어하는 사람을 자주 보기 때문입니다.
건강에 관한 많은 논문과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통해 건강한 노년을 위해 챙겨야 할 것은 ‘사회적 관계’라고 합니다. 사회적 관계를 맺을 때 활성화되는 호르몬 중 대표적인 옥시토신이 신경세포 생성을 촉진할 뿐 아니라 통증을 줄이고, 뼈의 성장을 도와 골다공증을 예방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주변에 많은 사람이 있을 때, 장수할 확률의 90% 이상 올라간다고 합니다.
이 사회적 관계에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많은 사람 곁에는 늘 사람이 가득합니다. 부정적인 말과 행동을 표현하는 사람 곁에 같이 있고 싶은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말과 행동으로 사랑이 보이는 사람 곁에는 늘 같이 있고 싶습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계명은 곧 우리의 바람인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는 비결이었습니다. 따라서 사랑 그 자체이신 주님 안에 머무르는 것은 건강을 위해서도 필요하고, 그렇게 주님께 머물러 있기에 저절로 사랑을 실천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신앙인의 최종 목적지는 하느님 나라일 것입니다. 이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지금을 사는 이 세상은 고통과 시련으로 가득 찬 지옥과 같은 곳일까요?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이미 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 분명하게 이야기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앞서 말씀드렸듯이, 사랑의 관계를 통해 건강해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 안에서 우리가 모두 건강하게 잘 살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이미 온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면서 기쁘게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종종 사랑을 실천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런데 ‘좋은 약은 쓰다’라고 했습니다. 정말로 좋은 약이기에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을 실천하는데 아픔과 상처를 겪는 경우도 자주 생기는 것입니다.
약이 너무 쓰다고 약을 먹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약이 자신을 살리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너무 쓰다고 사랑을 실천하지 않겠다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이 사랑이 나를 살리고, 나를 잘살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장을 보러 대형 마트에 갑니다. 올해부터 식복사 자매 없이 살게 되어서, 저도 먹고살려면 이렇게 마트에 가야 합니다.
성지 근처에는 마트가 몇 군데 있는데, 모든 계산원의 모습이 똑같습니다.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계산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돈과 관계되는 일을 하는 것이라 집중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밝은 분위기를 보여주면 더 좋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언젠가 성지에서 제일 먼 마트를 간 적이 있었는데, 이곳 계산원은 달랐습니다. “어서 오세요!”라며 인사를 하고는 계산해줍니다. 그리고 지갑을 찾느라 당황해도 웃으며 기다려 주셨습니다. 그 뒤 저는 어떤 마트를 찾아가게 되었을까요?
이 마트만 갑니다. 문제는 그때의 직원을 다시 만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다른 직원들은 역시 무표정이었습니다. 그래도 ‘혹시’ 다시 만나지 않을까 싶어서 그 마트만 가고 있습니다.
저 역시 반성을 많이 합니다. 사람들과 사랑이 아닌 일로만 만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사랑 때문에 죽어도 되는 이유: 사랑은 사랑이 죽는 것을 보지 못한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포도나무와 가지’ 의 비유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포도나무는 가지에 생명을 줍니다. 나무에서 떨어져 나온 가지는 아무 열매도 맺을 수 없을뿐더러 말라버리고 불에 태워집니다. 하지만 포도나무인 그리스도로부터 성령의 수액을 받으면 그 사랑의 열매 때문에 영원히 살게 됩니다.
사랑하면 살게 됩니다. 따라서 ‘사랑’과 ‘생명’은 동의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40일을 굶어도 살지만 4일만 사랑을 받지 못해도 죽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합니다. 사랑하면 살고 싶고, 사랑하지 않으면 살 의욕을 잃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나무에서 가지로 사랑의 성령께서 저절로 흘러들어오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라면 더는 성령의 수액이 공급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해야만 사랑, 즉 생명을 공급받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사랑의 본성입니다. 사랑은 생명이지만 또한 죽음입니다. 사랑하면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와 자녀를 사랑하면 먹고 살 수 있도록 자신이 힘들게 번 돈을 다 내어주어야 합니다. 또 아내도 남편과 아이를 사랑한다면 자신의 생존보다는 피를 흘리면서까지 자녀를 낳고 키웁니다.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점점 부모를 사랑하게 되면서 부모의 뜻을 따라 순종하고 자신을 죽여갑니다. 자신을 죽이지 않는 사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사랑의 열매를 맺는 사람에게 저절로 생명이 흘러들어옴을, 그래서 부활할 수 있음을 믿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적은 사람들도 죽어가는 것에 연민을 느껴 살리려는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안다면 사랑 자체이신 분에게서 사랑하는 이에게 부활이 꼭 올 것을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67년 오리건주립대학교의 찰스 괴칭거 교수는 ‘설득의 과학’이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했습니다.
그런데 학생들은 첫날 강의실에 들어서면서 깜짝 놀랄 만한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강의실 맨 앞줄에 커다란 검은색 가방을 뒤집어쓴 사람이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가방 아래 두 구멍으로는 맨발이 비죽 나와 있었습니다.
괴칭거는 학생들에게 앞으로 이 학생이 검은 가방을 뒤집어쓰고 강의를 들을 것이며, 철저하게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싶어 한다고 일러두었습니다.
그날 이후 학생들은 얼굴도 모르는 그 친구를 ‘블랙 백’(Black Bag)이라 불렀습니다. 일주일에 세 번, 블랙 백은 강의 시간마다 똑같은 모습으로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설득을 주제로 3분 발표를 하는 시간에 블랙 백은 학생들 앞에서 아무 말 없이 서 있다가 그냥 들어갔습니다.
그 수업을 듣던 학생들은 처음에 블랙 백에 대해 적대감을 드러냈습니다. 어떤 학생은 우산으로 그를 찔러보기도 했고, 다른 학생은 ‘걷어차세요.’라고 쓴 종이를 등에 붙여주기도 했으며, 다른 학생은 주먹을 휘두르며 위협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지역 언론들이 블랙 백의 괴이한 행동에 관심을 보이면서 그 이야기가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미국 전역의 기자들이 괴칭거의 강의실로 몰려들었고, CBS의 전설적 인물인 월터 크롱카이트까지 가방 속 학생과 인터뷰를 하고자 했습니다. ‘라이프’(Life)는 블랙 백에 대한 기사를 여러 면에 걸쳐 보도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수업 시작 후 몇 주가 지나자 블랙 백이 누군지,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알지 못한 상태에서 주먹을 휘두르고 우산으로 찔러댄 학생들의 공격적인 태도가 서서히 공감과 애정으로 바뀌어갔습니다.
따돌림이 인정으로 변화하면서 학생들은 이름도 모르는 그 친구를 좋아하게 되었고, 함께 어울리면서 그의 정체성을 지켜주고자 노력했습니다. 괴칭거가 블랙 백이 자신의 정체를 밝혀야 하는지를 놓고 투표를 제안했을 때, 대다수의 학생들은 그 생각에 반대했습니다.
마지막 강의가 끝나갈 무렵, 강의실 밖에는 수많은 카메라들이 블랙 백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며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학생들은 사전에 아무런 이야기도 안했지만 인간 벽을 만들어 블랙 백이 몰려든 기자들을 뚫고 안전하게 강의실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보호했습니다. 친구들의 선의에 고마워하며 블랙 백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가방 속에 든 한 사람일 뿐입니다.”
언론과 대중은 괴칭거의 학생들이 얼굴도 모르는 친구를 좋아하게 된 이유에 대해 심리학자들의 설명을 듣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이 실험에 대해 누구도 속 시원한 해답을 내놓지 못했습니다.
[출처: 『지금 바로 써먹는 심리학』, 2. 최고의 사랑을 위한 심리학의 조언, 리처드 와이즈먼, 웅진 지식하우스]
학생들은 자신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블랙 백을 왜 사랑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사랑을 지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다면 죽어가는 것에게 연민을 가지고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주려고 합니다.
뉴스에서 사람이 박스에 넣고 밀봉을 해 죽어가고있는 새끼 고양이들을 어떤 개가 모두 물어와 살리려고 한 이야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자신이 낳은 새끼도 아닌 고양이를 살리기 위한 본능이 개에게도 있는 것입니다. 분명 살아있는 것은 죽어가는 것에게 연민을 느끼고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줍니다.
덴젤 워싱턴 주연의 ‘존 큐’란 영화가 있습니다.
여기에 나온 아들이 심장 이식을 하지 않으면 곧 죽게 되어 있었습니다. 가난한 직장에 다니는 아버지의 보험이 제대로 적용되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아버지가 병원을 점거하고 자신의 심장으로 아이를 살리려고 합니다. 아들은 아무 생산능력도 없는 어린아이입니다. 다만 자신이 창조한 생명이기에 자신의 심장을 내어주고라도 아이를 살리려는 노력이 공감될 수 있습니다. 짐승도 그렇고 사람도 이러할진데 하느님께서 어찌 그러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사랑은 받아야만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는 절대 남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사랑하는 존재들, 즉 동물들이나 인간들이 생기기 이전에 이 생명들에게 사랑할 수 있게 만들 사랑이 먼저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그 사랑이 생명을 만드는 것입니다. 사랑과 생명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죽어가는 것에 연민을 느낍니다. 히틀러나 빈 라덴과 같이 남을 해치려는 열매가 아닌 사랑의 열매를 맺으며 죽어가는 것에게 반드시 다시 사랑과 생명을 넣어줄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것이 사랑하다 죽은 이들의 부활의 이유입니다.
하느님은 창조자이시기 때문에 행복하십니다. 빈센트 반 고흐가 한 점도 팔리지 않는 그림을 하루에도 몇 점씩 멈추지 않고 그릴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그 창조에서 느끼는 행복감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자녀를 낳고 키우는 것이 고통스러워도 또 낳는 것은 창조의 기쁨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가지이고 그리스도께서는 나무이십니다. 우리 가지에서 사랑의 열매가 많이 맺힙니다. 그렇다면 농부는 그 가지가 손상되지 않게 잘 가꾸며 생명을 유지시켜 줍니다. 이것이 창조자의 기쁨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살리시며 기쁘신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하기 위해 죽읍시다. 마음껏 죽어도 됩니다. 사랑은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창조자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에 사랑하여 죽을 수 있다면 그분께서 다시 살려주실 것도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창조자는 사랑 자체이시므로 창조하고 살리고 부활시키는 행복으로 존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조재형신부-
게리 채프만의 5가지 사랑의 언어를 읽었습니다. 책에서는 ‘감정의 탱크’를 이야기합니다. 자동차에 기름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차일지라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휘발유 차는 기름을 채우면 움직일 수 있지만 경유 차는 엔진을 점검해야만 움직일 수 있습니다. 경유 차에는 경유를 넣어야 합니다. 휘발유 차에는 휘발유를 넣어야 합니다. 기름을 바꾸어 넣으면 차가 고장 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감정의 탱크가 있습니다. 서로 채워주지 않으면 사랑이 메마르게 됩니다. 같이 있어도 외롭고, 같이 있어서 괴롭고, 같이 있는 것이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사랑하는 사람은 서로에게 필요한 감정을 채워주어야 합니다. 사랑은 선택이며, 행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이 바라는 대로 이웃에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셨습니다. 합당한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해 주십시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다리가 가려운 사람에게 등을 긁어 주면 고마워하지 않습니다. 회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기를 사주면 감동이 덜하기 마련입니다. 게리 채프만은 사람에게는 5가지 사랑의 언어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인정하는 언어, 함께하는 언어, 봉사하는 언어, 선물하는 언어, 몸으로 하는 언어’입니다. 저는 인정하는 언어를 좋아합니다. 칭찬은 돼지도 나무에 오르게 한다고 합니다.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합니다. 누가 제게 칭찬하는 말을 하면, 격려의 말을 하면, 용기를 주는 말을 하면 저는 기분이 좋습니다.
어떤 분은 함께하는 언어를 좋아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대화하고, 여행가고, 식사하고, 영화를 함께 보는 것이 좋습니다. 어떤 분은 봉사하는 언어를 좋아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정원을 정리해 주고, 서재를 정리해 주고, 청소를 도와주는 것이 좋습니다. 어떤 분은 선물하는 언어를 좋아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정성껏 쓴 카드를 주고, 장미꽃을 한 다발 주면 좋습니다. 선물을 준비하는 동안 상대방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몸으로 하는 언어를 좋아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수고했다고 말하면서 어깨를 만져 주는 것도 좋습니다. 산보하면서 손을 잡아 주는 것도 좋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감정 탱크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이 원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언어는 무엇인지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정하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갈릴래아의 어부였던 제자들에게 ‘이제부터 여러분은 사람 낚는 어부가 될 것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이 강한 백인대장에게는 ‘참으로 믿음이 강한 사람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는 ‘여러분에게 평화를 빕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부정한 여인에게는 ‘나도 당신을 죄를 묻지 않겠습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마시오.’라고 하셨습니다. 두 세 사람이라도 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나도 함께 있겠다고 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다 마련해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먼저 하느님의 뜻과 의로움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함께하는 언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안드레아와 요한이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말을 하시지 않고 ‘와서 보시오’라고 하셨습니다. 안드레아와 요한은 예수님과 함께 머물면서 세례자 요한이 말한 ‘그리스도’가 예수님임을 알아보았습니다. 12명의 제자들은 늘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표징을 보았습니다. 자캐오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회개한 자캐오에게 ‘오늘 이 집은 구원받았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성체성사는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 사랑의 성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봉사의 언어를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언제나 봉사를 강조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기 위해서 왔다고 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선물의 언어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종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을 벗이라고 하셨습니다. 종은 주인이 아는 일을 모르지만 친구는 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귀를 쫓는 권한, 병자를 고치는 권한과 복음을 전하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협조자인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거저 받았으니, 여러분도 거저 주십시오.’ 사도행전은 초대교회 공동체를 이렇게 전하였습니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예수님께서는 몸으로 하는 언어를 하셨습니다. 물에 빠진 베드로 사도의 손을 잡아 주셨고,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물위를 걸어서 배에 올랐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여러분의 발을 씻어준 것은 여러분도 그렇게 하라고 본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귀가 먼 사람의 귀를 만지시면서 ‘에파타’라고 하셨습니다. 귀가 먼 사람은 들을 수 있었습니다. 죽은 소녀를 어루만지시면서 ‘탈리타쿰’이라고 하셨습니다. 소녀는 죽음에서 일어났고,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고, 세상 속으로 오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먹고 마시면서, 우리와 함께 머무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가 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상대방이 원하는 사랑의 언어를 통해서 사랑하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깊은 애정과 관심이 필요합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입니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이야기합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내가 너의 하느님이니 겁내지 마라. 내가 너의 힘을 북돋아주고 너를 도와주리라!
-양승국신부-
구약 성경 안에서 하느님께서 한 인간 존재에게 친구라고 말씀하신 적은 거의 없습니다. 오직 단 한번 하느님께서 성조(聖祖) 아브라함에게 벗이라고 칭한 적이 있습니다.
“나의 벗 아브라함의 후손들아! 내가 너를 땅 끝에서 데려오고 그 가장자리에서 불러와 너에게 말하였다. 너는 나의 종 내가 너를 선택하였고 너를 내치지 않았다. 나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니 겁내지 마라. 내가 너의 힘을 북돋아주고 너를 도와주리라. 내 의로운 팔로 너를 붙들어 주리라.”(이사야서 41장 8~10절)
또 다른 구절을 애써 찾아보자면 하느님께서 모세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꼽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말하듯, 모세와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하시곤 하였다.”(탈출기 33장 11절)
그만큼 구약 시대 배경 안에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존재하여, 감히 친구라는 개념을 적용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을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하겠다는 것은 엄청난 가치관의 대변혁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주었기 때문이다.”(요한 복음 15장 15절)
신앙의 아버지 아브라함이나 이스라엘 민족의 영도자 모세 정도 되야 겨우 하느님과 친구 맺기를 할 수 있는데, 놀랍게도 우리를 직접 찾아와주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친구를 맺자고 하십니다. 이보다 더 큰 은총과 축복이 또 다시 있을까 싶습니다.
이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통해 그 크신 하느님과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은혜롭게도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계시와 인류 구원사업에 참여하게 됩니다.
친구란 말처럼 듣기 좋고 편안한 단어가 다시 또 있을까요? 인디언들은 친구에 대한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기로 유명합니다. ‘친구는 내 슬픔을 자신의 등에 짊어지고 가는 사람.’
여러 유명인사들 역시 각자 나름대로 친구에 대한 멋진 정의를 내렸습니다. ‘친구란 내 기쁨을 두 배로, 내 슬픔을 반으로 줄여주는 마술사입니다.’ ‘마음이 통하는 친구를 하나 사귄다는 것은 또 하나의 세상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친구란 존재, 정말 생각만 해도 든든하고 고마운 사람입니다. 때로 가족에게 하지 못할 말들도 친구이기에 속 시원히 털어놓습니다. 매일의 삶이 지옥같을지라도 친구가 있기에 그래도 견디며 살아갑니다. 이 냉혹한 세상 친구마저 없다면 과연 무슨 낙으로 살아가겠습니까?
그런데 세월이 하도 팍팍해지다보니 진정한 친구를 사귀기가 힘들어집니다.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가 나보다 더 나를 챙겨주는 친구, 내 슬픔을 자신의 등에 짊어지고 갈 친구를 찾기 힘들게 만듭니다.
사는 게 점점 더 외로워집니다. ‘이 세상에 오직 나밖에 없구나!’하면서 홀로 쓸쓸히 돌아서서 눈물 흘립니다.
이런 우리들 앞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당신께서 친히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시겠다고.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송영진신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요한 15,14-15).”
1)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이 말씀은 앞의 14장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요한 14,21).”
여기서 ‘친구’ 라는 말은,
‘하느님의 자녀, 예수님의 형제’를 뜻하는 말로 해석됩니다.
(이 말씀 바로 앞에 있는 13절의 ‘친구’는
사랑 실천의 대상으로서 ‘모든 사람’을 뜻하는 말로 해석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뒤에는 사도들을 ‘형제’ 라고 부르셨습니다(요한 20,17).
사도들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인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예수님의 형제입니다.
그런데 사실 하느님 쪽에서 생각하면, 신앙인이 아닌 사람들도,
즉 ‘모든 사람’이 전부 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르거나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을(계명을) 실천하는 것은, 하느님과 예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방법이고, 예수님의 형제로서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따라서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또 나의 형제로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기를 바란다면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여라.”로 해석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마태오복음 7장에 있는 다음 말씀과 뜻이 같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2)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이 말씀은 뜻으로는,
“너희는 더 이상 종으로서 살지 말고 자녀로서 살아라.”입니다.
“더 이상 ... 부르지 않는다.” 라는 표현은, 전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신앙인들을) 종이라고 불렀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들 쪽에서 자신들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모르거나 의식하지 않고서
종처럼 살았음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루카복음에 있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루카 15,29).”
아버지는 큰아들을 아들로서 사랑했지만,
큰아들은 자기 자신을 종으로 전락시켰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마음속에 원망과 미움만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라는 말은, 마치 종이 주인의 뜻에 복종하듯이
주님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겸손한 응답의 말입니다.
마리아가 자기 자신을 종이라고 의식하고서 한 말도 아니고,
자신을 종으로 전락시킨 말도 아닙니다.>
3)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자녀’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모든 사람의 구원’입니다(요한 6,39-40).
여기서 ‘종’은 하느님의 뜻을 외면하고 자기 욕망대로 살면서
구원의 반대쪽으로 가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른다는 예수님 말씀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요한 8,34-35).”
<‘주인의 종’과 ‘죄의 종’은 다릅니다.
자녀인데도 종처럼 살고 있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스스로 ‘죄의 종’이 되어서 살고 있는 것은 ‘악한 일’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작은아들이 그런 경우입니다.
그가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먼 고장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고
모든 것을 탕진하는 모습은(루카 15,13-14),
아버지의 뜻을 외면하고 자기 욕망대로 살아가는 ‘죄의 종’의 모습입니다.
그랬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루카 15,18-19)”
이 말에서 죄를 지었다는 말과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는 말은
‘맞는 말’인데,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달라는 말은 ‘틀린 말’입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뜻을 모르고서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바라는 것은 ‘아들’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4)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너희는 아버지의 뜻을 잘 알고 있어야 하고,
그 뜻을 충실하게 실행하는 자녀로서 살아야 한다.”로 해석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친구라고(형제라고) 부르신다면,
우리 쪽에서는 그렇게 불릴 자격을 갖추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자기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믿는다면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버지의 뜻’이 ‘모든 사람의 구원’이라는 것을,
즉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고 계신다는 것을 알려 주셨고,
또 구원받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알려 주셨습니다.
신앙인은 그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고, 그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이들은 단죄를 받을 일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이
그대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로마 8,1-2).”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로마 8,14-15).”
<그런데 성령의 힘이 자동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쪽에서 충실한 삶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조욱현신부-
오늘 독서와 복음의 주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 나타나야 하는 형제적 사랑이다. 그 근거는 요한에 의한 서간에 있다. 하느님의 성령은 사람들이 하늘나라에 들어오는 데 있어서 어떤 차별을 두시지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대우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도 사람을 차별대우해서는 안 된다고 사도행전은 말하고 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그리고 인간은 하느님 모상을 닮았으므로 사랑의 모상이다. 이 사랑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니, 우리가 사랑한다면 우리는 삼위일체적 삶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고 하느님께로부터 태어난다(1요한 4,7). 바로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태어나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2베드 1,4) 사랑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그 사랑을 표현하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본 모습이다. 이 사랑의 계명은 주님의 "명령"이기 이전에 그리스도인의 "지침"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의 생활을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즉, 사랑이신(8절) 하느님께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이다.
복음: 요한 15,9-17: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오늘의 복음은 지난 주일의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더욱 발전시키고 있다. 즉 그리스도에 대한 결속과 공동체적 차원에서 그리스도께 일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9절) 하신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서로 사랑함으로써, 그분과 일치하고 그분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하신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10절) 우리가 사랑을 산다면 우리는 그분 안에 머무르는 것이다. 사랑이 없이는 은총도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비록 떠나시지만, 사랑으로 가지와 포도나무처럼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을 말씀하신다. 그러기에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살며, 그분과 튼튼히 연결되어 있어야 함을 말씀하신다.
이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11절) 우리 안에 있는 기쁨이란 그분과 친교를 나눈다는 의미이다. 우리 안에 있는 기쁨은 은총이다. 이 기쁨은 우리 신앙인 모두가 언제나 간직해야 할 기쁨이다. 우리의 기쁨은 하느님 안에서만 가질 수 있다. 그 기쁨을 가지려면 사랑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사랑하면서 가질 수 있기에 우리는 계속 나 자신과 싸워야 한다. 나를 이길 때 그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12절) 이것이 당신의 계명이라고 하신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 하였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께 대한 사랑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이 계명을 실천해야 한다. 그러면 다른 모든 계명도 지키게 될 것이다. 이 사랑의 계명 안에 모든 계명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라는 말씀은 바로 ‘서로를 위해 죽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분이 우리의 주님이시며 하느님이신 분이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13절) 그리스도께서는 친구들만이 아니라, 원수들을 위해서도 목숨을 내놓은 위대한 사랑을 보여 주셨다. 그러니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로마 5,8) 라고 한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14절) 주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그분과의 친교 관계라는 말이다. 친구만이 친교를 가질 수 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종에서 친구가 되게 해 주셨고 마지막으로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셨다. 그러기에 우리는 단계적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부름을 받았기에 우리의 삶이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여 그분과 아름다운 친교를 나눌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15절)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의 말씀으로 자유로워졌기 때문에 친구라고 하셨다. 그래서 제자들은 ‘하느님의 친구’가 되었다. 이것은 당신이 하느님의 ‘말씀’이심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 ‘말씀’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따랐던 ‘말씀’이며, 그가 “하느님의 벗”(야고 2,23)으로 불렸던 말씀이다. 지혜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지혜가 사랑에 도달하면, 그 지혜는 우리를 하느님의 친구로, 종이 아니라 자녀로 만든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17절) 사랑은 우리가 맺어야 하는 열매이다. 우리가 열매를 맺도록, 즉 우리가 서로 사랑하도록 그분께서 우리를 지명하셨다. 그것은 가지가 나무와 떨어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듯이, 우리가 그분과 떨어져서는 맺을 수 없는 열매이다. 이 사랑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이 두 사랑의 계명이 우리의 열매이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열매는 사랑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선택되었다는 것은 이런 친교가 그 이유이다. 우리가 당신을 따르기 때문에 당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따름으로써 우리가 영광스러워졌다는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열매를 맺는 삶이다. 우리의 행실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우리의 열매가 남아 있다면 우리는 확실히 남아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의 가지가 온 세상에 뻗어나가게 함으로써 열매를 맺게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기꺼이 나아가야 한다. 어떤 것을 행하고자 할 때는 이미 마음은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열매로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인도하여 그들을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만들고, 열매를 맺는 이가 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그때 우리는 참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여 새 계명을 실천하는 삶을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요한 15, 13)
-한상우신부-
목숨을
내놓는
사랑이
우리의
참된 희망이다.
참된 희망이
참된 사랑이며
우리가 찾는
참된 생명이다.
하느님
사랑을
깨닫는 삶의
소중한
시간들이다.
함께
살기위해
하느님께서
이곳에 사는
우리들에게
오셨다.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를
당신 삶으로
친히
보여주셨다.
참된 사랑은
자기중심적인
사랑이 결코
아니다.
목숨을 내놓는
사랑이 가장
행복한
사랑이다.
서로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거기가
하느님 나라
참된 모습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의 실천이다.
실천이
참된
행복이다.
행복은
행복으로
이어진다.
행복은
십자가처럼
목숨을 내놓는
사랑으로
이루어진다.
그냥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목숨을
내놓으신다.
영원한 생명은
이것이다.
하느님께로부터
주어진 생명이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 목숨까지
내놓으시는
참사랑의
하느님이시다.
비울 때
채워지고
내놓을 때
얻게되는
사랑의 신비
생명의 완성이다.
무엇하나
내놓는 것이
없는 사랑의
아픈 사람들이다.
목숨을 내놓는
사랑으로
생명을
치유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시다.
사랑의
하느님께
우리의 비겁함과
우리의 이기심을
정직하게
맡겨드린다.
사랑은
목숨을 내놓는
가장 큰 행복이다.
하느님 나라
영원한
생명의 문이
활짝 열린다.
참사랑이
참생명이다.
다시 사랑이
시작되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요한 15,9)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랑이 어디서 온 것인지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아버지에게서 받은 그 사랑과 다르지 않지요. 사랑은 하나입니다. 모든 사랑은 사랑이신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흘러나옵니다.
사랑 자체이신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얼마나 사랑하셨을지 관상합니다. 어줍잖은 말이나 설익은 글로는 감히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리 쉽게 표현할 수 있다면 아직 그 사랑을 모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에게서 받은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을 우리에게 쏟아부으셨습니다. 사랑 앞에서 그분에게는 죽음도 깃털처럼 가벼웠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까지 전달된 아버지의 사랑을 어떻게 가늠할 수 있을까요? 다 알 수 없지만 굳이 머무르려 한다면, 그저 우리가 살면서 받은 모든 사랑의 총합보다 크고, 가장 기억나는 감사한 사랑보다 더 진할 거라고 짐작할 뿐입니다. 고작 그 정도에 머무를 뿐인데도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감동이 솟아납니다. 사랑이 사랑을 기억하고 머무르는 우리를 휘감아 점령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사랑은 아버지에게 예수님에게로 전달되어 멈춰버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에게서 받은 그 사랑으로 제자들을 사랑하셨지요. 제자들이 받은 사랑은 스승 예수님의 사랑이면서 동시에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어딘가에 멈추어 고인 채로 남아있어서는 안 되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본성상 흐르고 흘러 분출의 근원이신 아버지께 되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제2독서에서 요한 서간의 저자는 사랑의 본질을 이야기합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7-8)
우리가 주님에게서 사랑을 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사랑을 나눌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됨은 신분이나 지위, 재산이나 학식이 아니라 사랑으로 증명되는 실체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과 연결된 존재는 본성상 이미 존재 자체로 사랑입니다. 사랑이 그에게서 흘러나와 세상을 물들입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의 방식이 아니라 사랑의 근원이신 아버지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으로 물들입니다. 사랑의 존재 안에는 이미 자기 자신이 따로 남아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의 자아가 사랑이신 하느님과 하나가 되어 사랑이 되어 가는 까닭입니다.
제1독서는 인간의 관습과 관념을 뛰어넘는 사랑을 보여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사도 10,34-35)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이라는 이스라엘 민족의 선민사상이 베드로 사도의 입을 통해 새로운 지평으로 확장됩니다. 이방인과의 만남은 물론 세례와 구원 가능성은 당시 유다인들에게 엄청난 파격이 될 이야기지요.
"우리처럼 성령을 받은 이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는 일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사도 10,47)
인간이 사랑에 주저하니 하느님께서 직접 나서신 것이지요. 편견과 아집에 차 기존 전통과 관습에서 한 발자국도 못 내딛는 이들에게 하느님께서 성령을 보내시어 당신께서 친히 원하시고 허락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이제 인간에게는 순종만이 남습니다. 더 이상 "감히" 하느님의 사랑이 흐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과거에 별로 좋은 기억 없다고 씁쓸해하는 이라도 아직 의식하지 못할 뿐, 분명 삶의 구비구비마다 숨겨진 사랑의 보석들이 감춰져 있을 겁니다. 누구에게 어떤 식으로 사랑을 받았건 그 사랑의 근원은 아버지십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나를 사랑해준 모든 이가 아버지에게서 받은 사랑을 내게 전해준, 아버지의 선물이었다니 말입니다.
그러니 가정과 공동체과 세상 안에서 사랑을 하는 우리도 아버지의 사랑의 메신저임이 분명합니다. 아무리 부족하고 모자란 죄인이어도 그렇습니다. 불결하고 미소한 겁쟁이여도 우리 눈길과 말과 손길, 그리고 기도는 아버지 사랑의 연장선입니다. 그 사랑을 받는 이도 우리처럼 하느님 사랑에 닿아 생명을 얻고 풍요로워지니, 온 세상은 그렇게 사랑으로 연결된 유기체입니다. 사랑이 우리모두를 엮어 하나가 되게 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5월은 사랑의 계절이고 사랑하기 딱 좋은 달입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감사하고 행복한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부활 주일이 깊어갈수록 우리 안의 사랑도 더 깊어지고 맑아질 겁니다. 아버지의 사랑 덕에 하나로 이어진 우리 모두를 축복합니다.

끼리 사랑은 안 돼!
-김찬선신부-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요한의 편지는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아주 중요한 언표를 합니다.
그런데 이것처럼 중요한 언표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저로 말하면 이 언표 덕분에 제 인생의 새로운 좌표를 찍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언표를 알기 전과 안 뒤의 제가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저도 오늘 이런 하느님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전혀 몰라도 안 되지만
사랑의 하느님이 아닌 다른 하느님으로 알아도 안 되겠습니다.
예를 들어 심판자요 벌주시는 하느님으로만 알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사실 하느님을 제대로 모르고 인간적으로 하느님을 믿었을 때는
사랑의 하느님을 모르고 정의의 하느님으로만 알았고,
그래서 나는 나를 사랑할 줄 몰랐고 미워하거나 단죄하였으며,
나를 미워하고 단죄하는 것이 너무 아프고 괴로우면
그 화살을 이웃에게 돌려 서로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하느님의 정의가 사랑 안에 있듯이 정의도 사랑 안에 있어야 하는데
우리의 정의는 종종 사랑 없는 정의가 되었기에 나와 너를 혹독하게
심판하고 단죄하고 미워하고 마는 것으로 끝나곤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하느님의 사랑을 안다면 나를 사랑하고 서로 사랑할 것인데,
서로 사랑하는 것이 끼리 사랑하는 것이 아니어야 함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끼리 사랑하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느님 빼놓고 자기들끼리만 사랑하는 것이 하나이고
좋아하는 사람끼리만 사랑하고 그외 사람은 배제하는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우리가 자주 사랑에 실패하는 것은 잘 아시다시피
하느님 사랑을 떠나서 사랑하기 때문인데
실패하는 것만큼 자주 우린 하느님 없이 우리끼리 서로 사랑하려고 합니다.
서로 사랑하려고 서로의 얼굴을 봤지만 보면 볼수록 미워지는 건데
내가 사랑하는 만큼 너도 사랑하기를 바라기 때문에도 그렇고
내가 바라는 만큼 아름답기를 바라는데 그렇지 않기에 그렇고,
아무튼, 서로 사랑하다가는 이내 바닥이 나고 미움으로 끝나기 십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모의 사랑에서 사랑을 배우고,
부모의 사랑에서 힘을 얻어 내 자녀를 내리사랑하듯
하느님 사랑에서 사랑을 배우고 힘을 얻어 사랑해야
고갈되지 않고 이웃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 사랑으로 사랑한다면
누구를 배제하거나 차별하는 끼리 사랑도 안 되겠습니다.
좋아하는 사람과 마음에 드는 사람끼리만 사랑하는 것은
보편적인 하느님 사랑을 믿는 사람의 사랑이 아닙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초대 교회의 유대 신자들은 이방인인
고르넬리오 가정에도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고 놀랍니다.
"베드로와 함께 왔던 할례 받은 신자들은
다른 민족들에게도 성령의 선물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런데 이것이 그렇게 깜짝 놀랄 일입니까?
자기들한테만 성령의 선물이 쏟아져내릴 거라고 생각한 유대인들이
너무 어처구니없이 착각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믿는다면서 그리고 사랑한다고 거창하게 말하면서
누구를 배제하거나 차별한다면 그것은 하느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님을 가르침받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 그러니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요한 15,9-17)
---
사랑은 상대방의 감정 탱크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이 원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
'오늘의 복음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1년 5월 11일 부활 제6주간 화요일 (0) | 2021.05.11 |
---|---|
2021년 5월 10일 부활 제6주간 월요일 (0) | 2021.05.10 |
2021년 5월 8일 부활 제5주간 토요일 (0) | 2021.05.08 |
2021년 5월 7일 부활 제5주간 금요일 (0) | 2021.05.07 |
2021년 5월 6일 부활 제5주간 목요일 (0) | 2021.05.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