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 6일 부활 제5주간 목요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요한 15,9-11)
If you keep my commandments,
you will remain in my love,
just as I have kept my Father’s commandments
and remain in his lov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서 당신 삶의 마지막 순간에 제자들과 만찬을 드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는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하느님의 사랑에 자신을 열고, 하느님께 속하는 데 있다.”(제27차 청소년 주일 담화문)라고 하셨습니다.
길 가는 아무개를 사랑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잘 모르는 사람, 나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방송이나 여러 매체를 통하여 전쟁과 재해, 기아와 무관심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가난하고 취약한 이들을 돕기도 합니다. 그러나 도움의 손길이 가장 절실한 사람은 어쩌면 나의 가족, 친구 또는 성당 교우나 직장 동료 가운데 한 사람일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따금 익명의 타인에게는 선행을 베풀며 돕고 애덕을 실천하면서도, 정작 가장 친밀한 가족과 형제, 친구들에게는 가깝고 편하다는 이유로 사랑과 도움을 주기는커녕 상처를 주고 미워하며 벽과 담을 쌓아 삶을 지옥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이 지옥에서 어떻게 탈출할 수 있습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내가 쌓아 올린 미움이라는 벽과 담을 부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고 때로는 아픔을 인내하고, 용서하며 용서를 청해야 합니다. 이러한 행동들은 우리를 천국의 삶으로 이끕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있고, 또 우리 기쁨이 충만해지게 합니다. 기쁨은 사랑과 밀접하게 이어져 있습니다. 기쁨과 사랑은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는 성령의 두 열매이기 때문입니다(갈라 5,22-23 참조). 하느님 안에서 기쁠 때 우리는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 머물러 사랑의 기쁨을 누리며 그 사랑 안에 만족하지 말고 다른 이들을 위하여 애덕을 실천할 때, 우리는 ‘주님 계명을 지켜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게 됩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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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남자 친구가 전화를 안 했다.
생각: 그가 예전만큼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게 분명하다.
감정: 불안하고 화가 난다.
신체감각: 쿵쾅대는 가슴, 달아오르는 얼굴.
행동 충동: 당장 헤어지자고 말해야겠다.
남자 친구가 전화하지 않은 게 사랑이 식어서라고 단정할 수 없는데도, 생각과 감정은 그것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감정과 생각을 사실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더군다나 신체감각과 행동 충동을 보고 분명한 것처럼 믿습니다. 그러나 이 패턴은 내가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가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뿐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긍정적인 감정의 패턴을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긍정적인 마음을 가질수록 나의 삶 자체를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안에 머물 것을 그리고 당신을 믿음과 사랑으로 바라볼 것을 명령하십니다. 이는 앞선 긍정적인 감정의 패턴을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부정적인 마음을 간직하고서는 믿음과 사랑을 가질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의심하면서 사랑할 수 있을까요? 미워한다면서 믿을 수 있을까요? 믿음과 사랑은 절대로 분리되지 않으며, 우리를 부정적인 삶의 반대편에 서게 합니다.
사랑 자체이신 주님이시기에, 그분께 대한 굳은 믿음과 뜨거운 사랑을 갖춘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며 그분처럼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셨듯이 우리도 영광을 받게 되며, 주님께서 이 세상을 이긴 것처럼 우리도 이 세상을 이기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충만한 기쁨입니다.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우리가 기쁨 안에 있기를 바라십니다. 따라서 기쁨의 생활을 벗어나는 생각과 말과 행동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긍정적인 사랑으로 우리와 일치하시는 주님에게 머무르면서, 그분의 생각으로 또 그분의 말로 또 그분의 행동으로 이 세상을 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행복할지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는 분이 있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다루는 뇌의 영역인 변연계가 활성화되지 못할 때 그런 모습을 보인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변연계를 자극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될까요? 두피 마사지를 하면 될까요? 가장 좋은 방법은 소설책 읽기와 음악 듣기라고 합니다.
소설책에는 감정을 다루는 다양한 어휘가 등장하기에, 그런 어휘를 읽는 것만으로도 변연계가 활성화됩니다. 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 음악을 들으면 다양한 감정이 풍부하게 일어납니다.
소설책 읽는 것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더군요. 그러나 자신의 정신 건강을 위해 너무나 중요합니다. 음악 역시 자신의 정신 건강을 위해 반드시 들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보니,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자궁에서는 항상 부모와 같은 존재가 만들어진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도 역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포도나무를 통해 가지에 전달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에 따르면 ‘사랑과 계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아버지 ‘사랑’ 안에 머무시는 것처럼 우리도 당신 사랑 안에 머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머물기 위해서는 당신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사랑과 계명은 하나인 듯 둘이고, 둘인 듯 하나입니다.
우선 ‘사랑’에 대해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사랑은 에너지이고 양식이고 생명입니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말은 생존을 보장받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영화 ‘알리타’(2019)는 버려진 기계 인간에게 한 과학자가 자신의 딸을 위해 준비한 몸을 붙여주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뇌만 살아있던 그 기계 인간은 박사 딸의 몸을 입고 다시 살게 됩니다.
허황한 이야기 같지만 사실 우리가 모두 부모의 태중에서 그렇게 태어납니다. 어디에서 온 지 모르는 영혼을 받아 부모는 자녀에게 몸을 주고 자라면서 세상에 살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됩니다. 자녀가 생명을 보장받으려면 부모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곳에 머물려면 그곳을 만든 이의 법칙을 따라야 합니다. 자녀도 부모의 법을 따라야 부모 안에 머물며 사랑, 즉 생명의 양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부모의 법은 항상 부모처럼 생명을 내어주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쫓겨납니다.
예전에 ‘에일리언’이란 영화가 유행했었습니다.
에일리언은 부모에게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자신의 숙주로 삼아 인간을 먹으며 성장하는 놈입니다. 인간은 자신 안에 들어온 에일리언을 빨리 제거하지 않으면 생명을 잃게 됩니다. 요즘 코로나바이러스도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 몸 안에는 많은 박테리아와 바이러스가 공존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생명을 위협할 정도가 되면 인간을 그것들이 죽이는 방법을 선택합니다.
이런 사건이 에덴동산에서 일어났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주님의 태중에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지만, 주님의 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법은 주는 사랑만 받으면 되지 그분의 생명까지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에까지 손을 댄 것은 물론 그런 일은 없겠지만 아기가 탯줄과 부모의 살까지 먹으려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상태라면 그에게 더는 사랑이, 곧 생명이 공급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느님 아버지도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부모입니다. 에덴동산은 하느님의 자궁과 같습니다. 그곳에서 하느님과 같은 자녀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쫓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 품에서 살아야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기쁨입니다. 그러나 만약 부모가 원하는, 또 부모가 되라는 법을 어긴다면 어떻게 될까요? 에일리언처럼 바이러스처럼, 혹은 아담과 하와처럼 그분 품에서 쫓겨나 생명의 양식을 얻지 못하고 죽고 맙니다.
영화 ‘터미널’(2004)은 오갈 데 없게 된 이란인 ‘메르한 카리미 나세리’의 실화를 영화화한 것입니다.
영화에서는 공항에 도착한 주인공의 나라가 내전으로 지구상에서 사라져버리는 설정입니다. 오갈 데가 없어진 나세리는 1988년부터 2006년까지 무려 18년 동안이나 프랑스 드 골 국제공항 안에서 살았습니다. 1999년에 프랑스 당국이 난민용 여권을 내주어 정식 이민자로 받아 주었지만, 공항 생활이 익숙해져서 미친 척을 하며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해야 할 2006년까지 공항에 머물렀습니다.
나세리는 매일 아침 5시 첫 비행기가 도착하는 시간에 공항 화장실에서 머리를 감고 항상 몸가짐을 바르게 했습니다. 매우 당당하게 행동하고 구걸이라든지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카트 안에 넣어진 동전으로 먹을 것을 사고 주변 청소를 깨끗이 하였습니다. 그래서 공항 직원들에게 호감을 샀습니다.직원들도 친절하게 대해주고 나세리의 옷을 무상으로 세탁해 주었습니다.
그의 일기가 『The Terminal Man』으로 출간되고 영화 제작이 확정되었을 때, 그는 드림웍스로부터 30만 달러를 개런티로 받았고 공항 직원들에게 한턱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공항에서 살기도 했지만, 공항을 위해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나세리 씨가 18년 동안이나 공항이라는 환경 안에서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오히려 공항이 깨끗하도록 도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할 수 있다면 공항 직원들에게 좋은 일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먹고 입고 자고 할 수 있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세리 씨만큼 공항이라는 본성과 가까운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곳에 머물며 그곳의 법칙을 따르다보니 그곳의 본성을 닮게 된 것입니다.
내가 살려고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다면 그 사람은 더는 생명을 보장받지 못합니다. 모든 생명은 부모로부터 옵니다. 부모가 자신의 자녀를 해치는 어떤 것을 발견했다면 그것을 집에 가만히 놓아둘 리가 없습니다. 부모의 법은 생명을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법 테두리 안에 머물러야 부모 안에 머물 수 있고 계속 양식을 먹으며 생명을 보존하고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중략)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0.12)
사랑하라는 말은 생명을 내어주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신 다음 생명을 내어주는 것만큼 큰 사랑은 없다고 하십니다.
사랑과 생명과 양식은 하나입니다. 그리고 부모만이 사랑의 법을 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창조자시고 우리 생명을 보장해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은 그분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계명이, 부모가 자녀에게 요구하는 계명과 같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주는 부모의 계명이란 생명을 주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그분 안에 머물 수 있고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그분의 본성을 닮아 우리 또한 새로운 창조자가 되어 생명을 내어주는 사람이 됩니다. 생명을 내어주는 사람만이 생명을 보장받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계명 안에서 성장하여 그분이 주시는 생명의 양식을 통해 새로운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성경의 땅 이집트’라는 다큐를 보았습니다. 이집트는 상당한 문화와 역사를 지닌 나라입니다. 나일 강은 이집트 문명의 젖줄이었습니다. 이집트의 나일 강은 남쪽에서 시작되어서 북쪽으로 흐릅니다. 나일 강은 남쪽이 상류가 되고, 북쪽이 하류가 됩니다. 성경에서 이집트는 풍요의 땅입니다. 아브라함이 고난을 피해 머물던 곳입니다. 야곱과 가족이 가뭄을 피해 머물던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 머물던 곳입니다. 아브라함은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야곱의 가족은 큰 부족이 되어 모세의 인도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다시금 나자렛으로 돌아왔습니다. 모든 것이 풍요롭고, 풍족했던 이집트에서의 생활을 뒤로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곳으로 가야했습니다.
이집트에서 약속의 땅으로 가기위해서는 거칠고 황량한 시나이 반도를 지나야 합니다. 거칠고 황량한 광야는 세상의 것들을 떨궈내는 정화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광야는 악의 유혹을 견디어내는 인내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광야는 부활을 향해 나가는 십자가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의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금 풍요로웠던 이집트로 돌아가고 싶어 했습니다. 하느님을 섬기지 못하고 금송아지를 섬기려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구리 뱀을 만들게 하였습니다. 구리 뱀을 보는 사람은 다시금 하느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가 만든 구리 뱀을 보고서 치유되었듯이, 하느님의 아들도 십자가에서 높이 들려져야 합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인도하는 구원의 표징입니다.”
신앙은 세상의 것과 하느님의 뜻 사이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식별의 과정입니다. 어제 이야기 한 것처럼 초대교회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점차 늘어나는 이방인 공동체들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방인 공동체는 유대인 공동체와는 다른 문화와 전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언어가 달랐고, 음식이 달랐습니다. 그들의 사고와 철학도 달랐습니다. 유대인 공동체는 이방인 공동체들도 유대인들의 문화와 전통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 공동체는 자신들의 문화와 전통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한국교회에서 초기에 박해의 단초가 되었던 ‘제사논쟁’도 비슷한 문제입니다. 사도들은 예루살렘에 모여서 첫 번째 공의회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명학하게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방인 공동체의 문화와 전통을 그대로 인정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신앙의 토착화’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전해지는 지역의 풍토와 전통에 맞게 토착화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도들은 이렇게 결정하였습니다.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하느님께 돌아선 이들에게 어려움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선배 사제들은 이런 말씀을 하곤 하셨습니다. ‘새로운 곳에 가게 되면 먼저 6개월 동안 그곳의 전례와 그곳의 사람들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먼저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문제점이 있다면 천천히 고쳐나가야 합니다. 새로운 곳에 가서 전임자들이 하였던 일들은 한꺼번에 바꾸려 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보지 않고 성급하게 자신의 뜻대로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을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삶의 기준을 제시해 줍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남들에게 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오늘은 교부이신 그레고리오 교황님의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는 신앙을 통해서 잉태됩니다. 세례를 통해서 태어납니다. 교회의 가르침과 교훈으로 젖을 먹습니다. 성체성사로 자라납니다. 거룩한 생활로 어른이 됩니다. 지혜와 결합하여 혼인을 합니다. 우리의 자녀는 희망입니다. 우리의 집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우리의 유산과 재산은 낙원의 기쁜 삶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어두운 죽음이 아니라 지복의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들 신앙의 여정을 잘 표현해 주는 가르침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영근신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요한 15,9)
이는 우리가 이미 사랑을 받았다는 선포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기원이 아버지께 있다는 선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분명, 이미 사랑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아버지께로부터 왔습니다. 사실, 우리는 그 사랑을 받을만한 아무런 자격이 없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 호의와 자애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곧 선사된 사랑이 베풀어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 사랑 안에 머무르기를 초대하십니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여기에는 ‘먼저’ 당신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이 전제됩니다. 곧 선사되는 당신의 사랑을 먼저 받아들여 그 안에 머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당신의 사랑이 우리 자신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먼저 자신을 허용하고 승복하는 일입니다. 그래야 다른 사랑이 아니라, 선사받은 바로 그 사랑 안에 머물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랑 안에 머무는 방법도 함께 가르쳐주십니다.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10)
이미 당신께 선사받은 그 사랑을 지키는 것이 곧 당신 사랑 안에 머무는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그 어떤 사랑이 아니라, 선사받은 그 사랑을 간직하고 준수하는 것입니다. 이는 당신의 사랑은 말이나 생각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사랑하기를 실행할 때 그 실행 안에 머문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당신의 이 사랑을 실행하는 것이 ‘새 계명’으로 선포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5,12)
그리고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1) 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무르게 되면 당신의 기쁨이 우리 안에 들고 우리 또한 기쁨으로 차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 기쁨은 예수님께로부터 선사받은 신적인 기쁨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쁨은 결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사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의 만족, 나의 성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의 실현으로부터 오는 까닭입니다. 오늘 하루 그 기쁨이 가득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받은 사랑을 기억하라
-김찬선신부-
무슨 일을 하든 억지로 마지못해 의무감으로 하면 기쁨을 갖지 못합니다. 그러나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자발적으로 하면 보람과 기쁨이 큽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명령이나 의무에 의해 한다면 진정한 사랑을 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기쁨이 없습니다. 그러나 계명을 내리는 분의 뜻을 알기 위해 또 그분과 하나가 되기 위해 지킨다면 그 의미가 풍요로워집니다. 사실 진정한 사랑을 한다는 것은 그만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자기를 먼저 생각하는 부족한 사랑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많은 사랑을 받아야 하고 이미 받은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 안에 머물게 되면 기쁨이 충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사랑 안에 머물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무조건 ‘머물러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그들을 위한 당신의 사랑이 선행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신 것과 같은 사랑으로 제자들을 사랑하였습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아버지께 받은 사랑은 제자들을 위한 사랑의 기초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아들 예수님께서 받으셨고, 예수님의 사랑을 제자들이 받았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제자들 간에 사랑하는 것에 머물지 말고 이웃 사람에게로 사랑의 손길을 펴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13,35).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 사랑 안에서, 그분의 말씀 안에서 머무르도록 성모님의 도움을 청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랑 안에 머물라고 당부하는 것은 당신의 기쁨을 제자들에게 전해 주고 그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쁨은 주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사람만이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 기쁨은 다른 사람들과 사랑을 나눔으로써 솟아나는 기쁨입니다. 오늘 우리도 충만한 기쁨을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에서 얻게 될 것입니다. 혹 사랑이 순수하지 못하고, 어떤 기대심리나 보상심리가 포함되어있다면 사랑이 말라버릴 것이고, 또 계명을 억지로 지키는 사람은 헛고생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사랑 안에 머무르면서 아버지의 사랑을 주려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아버지와 일치를 이루었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사랑의 원천인 하느님아버지를 향할 때 결코 사랑이 시들지 않을 것입니다. “마음속 깊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도 그를 아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채비가 갖추어져 있는 만큼 그는 하느님을 사랑합니다”(디아도쿠스주교). 그리고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더 사랑받는 존재가 됩니다”(작은 거인들에서). 망설이지 말고 사랑을 위한 사랑을 함으로써 주님의 계명을 지켜야 하겠습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송영진신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9-11).”
여기서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입니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것과 같은 말씀입니다.)
그 사랑은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사랑입니다.
즉 ‘하느님의 사랑’과 ‘같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제자들(신앙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은 ‘같은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사랑하신 것처럼’이라는 말은,
두 사랑의 방식만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라, 두 사랑의 방식도 같고,
성격도 같고, 본질도 같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은 사실상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 ‘예수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3,35-36ㄱ).”
그리고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아드님 손에 내주셨고,
그리고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드님을 내주셨습니다.
이 두 가지 일을 합해서 생각하면,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내주셨습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모든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이,
즉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이 바로 그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내주신 일이기도 하고,
아버지께서 당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내주신 일이기도 합니다.
<그 사랑은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사랑’입니다(요한 15,13).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신 일은,
사실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모든 것을 내놓으신 일입니다.>
그 일을 사도 요한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1요한 4,9-10).”
(여기서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라는 말은,
“우리가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기도 전에” 라는 뜻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는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어”입니다.)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그토록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라는 말씀은,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라는
고백과 같은 말씀이고,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라는 말씀은,
“나의 사랑을 받아다오.” 라는 호소와 같은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방법이기도 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사랑 안에 머무른다는 말은, 사랑으로 하나가 된다, 일치를 이룬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방법’은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10절).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신다는 말씀은,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심으로써 아버지와 당신이
하나로 일치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인류 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은 전부 다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의 계명을 지켜서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은,
즉 예수님과 사랑으로 일치를 이루고 하나가 되는 것은
우리 자신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라는 말씀은,
“내 계명을 지켜서 내가 주는 구원을 받아라.” 라는 뜻이 됩니다.
<‘하느님의 뜻’도, ‘예수님의 뜻’도 ‘나의 구원’입니다.
그러면 ‘나의 뜻’은?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것은 단 하나, 내가 구원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것뿐인데, 나 자신은 그것을 바라지 않고
다른 것만 원하고, 다른 것만 찾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랑을
‘헛일’로 만들어버리는 일이 되고, 그 사랑을 배반하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유를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유는?
사랑 외에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구원의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뭔가 대단한 제물을(물질적인 것을) 바치기를 바라시는 것도 아니고,
또 뭔가 거창한 일을 하기를 바라시는 것도 아닙니다.
나의 기쁨이 곧 하느님과 예수님의 기쁨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내가 구원받지 못해서, 하느님 나라의 ‘밖에서’ 후회하고
절망한다면, 그 모습을 보시는 하느님과 예수님께서는 크게 슬퍼하실 것입니다.
지금 내가 회개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막 살면서, 멸망을 향해서 간다면,
그 모습을 보시는 하느님과 예수님께서는
몹시 안타까워하면서 슬퍼하실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서 멸망을 향해 가는 것은 아니더라도,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을 받기만을 바라면서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기쁨에 대해서는 관심 갖지 않고 살고 있다면,
그것도 역시 하느님과 예수님께 큰 슬픔을 드리는 일이 됩니다.

복음: 요한 15,9-11: 너희의 기쁨이 충만하도록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조욱현신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9절) 주님께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즉 사랑의 관계에서 아들에게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시고 아들은 아버지께 모든 것을 드리는 그러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 아버지의 말씀을, 아버지의 뜻을 행함으로써, 우리도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에 참여하라고 하신다.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른다는 것은 바로 그 사랑을 우리도 실천하며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하라는 초대이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10절) 계명을 지키고 실천하는 것이 사랑의 가장 중요한 표지라면, 사랑이 없을 때는, 우리를 완전하게 하는 믿음과 계명들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랑이 없다면 계명을 지키고 의로운 행위를 하더라도 또한 은총의 놀라운 기적을 행하더라도 그 일들은 단지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 되고 만다. 우리가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가 바로 그리스도를 닮으며, 그분과 같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분을 닮으려 노력하는 사람은 교만도 자랑도 없이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에서 참된 영광을 굳게 지키며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순명을 변함없이 드리며 항상 감사한다. 이런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으로부터 더 큰 영광을 받을 것이다. 당신이 가시는 것은 그들을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포도나무와 가지처럼 그들과 결합하여 있음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게을러지지 않도록 항상 깨어있어야 축복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다. 그래서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8절)고 하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11절) 이 말씀은 당신께 힘이 되는 기쁨이 우리에게도 힘을 줄 것이라는 말씀이다. 당신의 기쁨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 때문에 기뻐하신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충만하게 하시려 한다는 것은 이 기쁨이 그분과 우리의 나눔이다. 우리 안에 있는 그분의 기쁨은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이며, 그것은 또한 우리의 기쁨이기도 하다.
그분께서는 영원으로부터, 즉 “세상 창조 이전에 우리를 선택”(에페 1,4)하실 때에도 이 기쁨을 두고 즐거워하셨다. 그것은 우리가 생겨나기 전에 이미 당신의 지혜로 우리를 보고 기뻐하셨다는 것이다. 당신의 예지 안에서 우리가 그분의 즐거움이었고 그 기쁨은 이미 충만했다는 것이다. 이제는 우리가 기쁨으로 충만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언제나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기쁨을 차지하고 충만히 누리기 위해서는 나 자신과의 싸움을 끝까지 해야 얻을 수 있다. 항상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있도록 나 자신과 끊임없는 싸움을 하여야 한다. 언제나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너희는 내 사랑안에 머물러라."(요한 15, 9)
-한상우신부-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기쁨을
날마다
우리에게
넘치도록
부어주신다.
예수님의
성체성사가
그렇고
살아계신
말씀이 그렇고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순간순간이
그러하다.
사랑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사랑은
뜨거운
확신이며
사랑은
지금 이순간
주님과
함께하는
가슴 뛰는
현존이다.
하느님께서
함께하신다.
하느님께서
주시고
하느님께서
하신다.
걱정을 내려놓는
기쁨이며
하느님만을
바라보는
기쁨이다.
사랑의
기쁨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기쁨의
주님이시다.
주님 사랑안에
머무는 사람은
기쁨의 사람으로
변화된다.
복음은
기쁨이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뜻이
기쁨이다.
하느님의
기쁨을 닮은
우리들이다.
기쁨은
현실이다.
우리의
현실안에
기쁨의 주님이
함께 계신다.
기쁨이
우리를
향해 있다.
기쁨을
진실로
믿는다.
더 이상
바랄 것 없는
주님 기쁨에
오늘 이순간도
함께 머무른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우리는 사랑을 배웁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10)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당부하시는 사랑은 어디서 갑자기 툭 튀어나온 생경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신 성부 하느님과 성자 예수님 사이에 흐르는 유대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지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주님 사랑에 머무르는 이는 사랑에 흠뻑 젖어들어 사랑에 물들어 갑니다. 사랑이신 주님을 닮아가다가 그 자신이 사랑이 되지요. 인위적으로 억지로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사랑이 그에게서 자연스레 흘러나옵니다. 사랑 안에 있는 영혼은 사랑밖에 내놓을 것이 없습니다.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1)
기쁨은 사랑의 증거입니다. 누군가 사랑하고 있다면 침울하거나 부정적이기 어렵지요. 진짜 사랑이라면 그렇습니다. 혹 자기중심적이거나 계산적인 욕정을 사랑이라 착각할 수도 있지만 그건 사랑의 허울만 그럴듯하게 흉내낸 것일 뿐이어서 진정한 기쁨을 자아낼 수 없습니다.
아버지는 사랑 자체이시어서 기쁨의 존재십니다. 아드님도 마찬가지시지요. 그 사랑이 실패만 거듭하는 듯 보이고 번번이 배척과 거부를 당하는 외짝 사랑이어도 그분에게서 기쁨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사랑은 결과로 성취를 가늠하지 않고, 이미 사랑한 만큼이 성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부 하느님도 기쁘시고, 사랑이신 하느님 안에 머무르시는 성자 예수님도 늘 기쁘십니다.
제1독서는 사도들이 신앙의 길에 들어선 이민족들을 위해 어떻게 그 사랑을 반영하는지 보여줍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왜 우리 조상들도 우리도 다 감당할 수 없었던 멍에를 형제들의 목에 씌워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입니까?"(사도 15,10)
그리스도를 믿게 된 이방인들도 이스라엘 백성처럼 할례 등의 전통을 지키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베드로 사도가 담대히 질문을 던집니다. 이 말에는 놀라울 정도로 솔직한 개인적, 공동체적 성찰이 들어 있지요.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가 가르친 대로 열심히 하느라고 했지만 그것이 늘 버겁고 힘겨웠던 겁니다. 지키느라고 지켰지만 늘 부족과 미완의 불안, 그리고 죄의식을 안고 살았던 게지요. 베드로는 이를 포장하지 않고 자신의 심정에서 출발해 진솔히 토로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길을 받아들여 새롭게 성부, 성자, 성령과의 만남을 시작하는 이들이 굳이 길을 되짚어 죄의식과 불안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습니다. 하느님도 이를 원하시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하지요. 그 이유는 바로 사랑 때문입니다.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하느님께 돌아선 이들에게 어려움을 주지 말고"(사도 15,19)
이제 야고보 사도가 구약 예언에 비추어 하느님의 뜻을 정리합니다. 중요한 건 이론이나 전통보다 누구나 더 원활하고 기쁘게 하느님께 나아가도록 돕는 것입니다. 기존의 기득권이 텃세가 되지 않으려면 "우리와 그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도 두지 않으"(사도 17,9)신 하느님의 사랑의 의중을 존중하고 따라야 합니다.
"그리스도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네."(영성체송)
주님은 유다인만을 위한 신이 아니고, 구원 역시 한 민족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모든 이를 위한 것이고 구원을 위한 성자의 희생제사도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 출신과 인종, 배경과 지위, 가진 바가 우리와 다른 이들 역시 주님 사랑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진정 기쁘고 감사하다면, 우리는 사랑하고 있는 것 맞습니다. 이 기쁨은 사랑이신 주님과 닮아가는 이에게 베푸신 은총이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사랑이신 주님께 머물러 사랑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주님의 기쁨을 공유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아무리 작고 미소해 보이는 사랑이라도 모든 사랑은 하느님을 담고 하느님을 닮아가기에 더할 나위 없이 위대하답니다. 사랑이 되어 가는 벗님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클래스가 차이나도
-김찬선신부-
선택할 수 있다면 미국인과 한국인 중에서 나는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세계인과 한국인 중에서는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4-5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사람 중에 "헬 조선"이라며 이민 간 사람이
꽤 됐는데, 이는 우리나라를 지옥 같다고, 빌어먹을 조선이라고 한 거지요.
그런 상황이 이 정부 들어 획기적으로 좋아진 건 아니고 여전히 상존하지만
그래도 K-방역이니, 한류 문화 등으로 자긍심이 늘어난 것도 사실이고,
지금은 오히려 그 반대로 걱정을 해야 할 상황이 된 측면도 있습니다.
그것은 극우적인 사고가 강해진 점입니다.
이것은 우리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고
트럼프나 시진핑이나 아베나 푸틴 같은 이들이 정권을 잡으며 시작된
세계적인 현상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도 다른 나라나 민족에 대해
무조건적인 증오감과 적대감을 표시하고 그래서 우리나라에 와있는
이주민들과 우리 동포인 조선족들에게도 매우 적대감을 보입니다.
그러면서 아주 모순적인 것은 일본에서의 혐한이나 미국의 아시아계
테러에 대해서는 욕을 하는데 실은 우리도 똑같은 짓을 하는 거지요.
그런데 이것은 다른 나라나 민족에 대해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런 포용이 없는 적대적인 편 가르기는 우리 안에서도
다름과 차이를 존중하지 않고 나와 다르면 나의 반대자로 여기어
여혐이니 남혐이니 하고, 성 소수자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을
극단적으로 혐오하고 차별을 가합니다.
그런데 세계지성은 이런 인종이니 민족이니 나라에 갇히지 않고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같이 행복할 길을 찾을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가 웬만한 지성을 가졌다면 미국인과 한국인 중에
어느 나라 사람이 될 것인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겠지만,
세계인과 한국인 중에서는 무조건 세계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성을 가진 사람이 이러해야 한다면
신앙을 가진 사람은 더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곧 종교인이 자기 나라와 민족을 사랑해야 하지만
자기 나라나 민족에 갇히지 말아야 하고,
다른 나라나 민족도 존중해야 하며 같은 맥락에서
종교가 토착화는 하되 태극기 부대처럼 되지는 말아야지요.
이와 관련하여 오늘 사도행전의 말씀은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가르침과 강력한 지침을 줍니다.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하신 것처럼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시어 그들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정화하시어,
우리와 그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도 두지 않으셨습니다."
이 말씀을 극단적으로 대비하면 우리가 악령을 소유한 자가 아니라면,
다시 말해서 성령을 받은 자라면 어떠한 차별도 자기와 공동체에
용납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고, 반대로 차별자는 악령적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성령은 다름을 인정하고 더 나아가 다름을 존중합니다.
그리고 각 사람에게 다른 은사를 주시지만
또한, 일치를 이루시는 분도 성령이십니다.
같은 사람끼리 일치하는 것은 대단하지도 별로 성령적이지도 않습니다.
다른 사람인데도,
심지어 클래스Class가 차이가 나는데도 차별하지 않고,
존중하고 사랑하기에 하나를 이룰 때 성령적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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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서 당신 삶의 마지막 순간에 제자들과 만찬을 드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는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하느님의 사랑에 자신을 열고, 하느님께 속하는 데 있다.”(제27차 청소년 주일 담화문)라고 하셨습니다.
기쁨은 사랑과 밀접하게 이어져 있습니다. 기쁨과 사랑은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는 성령의 두 열매이기 때문입니다(갈라 5,22-23 참조). 하느님 안에서 기쁠 때 우리는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 머물러 사랑의 기쁨을 누리며 그 사랑 안에 만족하지 말고 다른 이들을 위하여 애덕을 실천할 때, 우리는 ‘주님 계명을 지켜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게 됩니다
-신우식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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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에너지이고 양식이고 생명입니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말은 생존을 보장받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에덴동산은 하느님의 자궁과 같습니다. 그곳에서 하느님과 같은 자녀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쫓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 품에서 살아야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기쁨입니다. 그러나 만약 부모가 원하는, 또 부모가 되라는 법을 어긴다면 어떻게 될까요? 에일리언처럼 바이러스처럼, 혹은 아담과 하와처럼 그분 품에서 쫓겨나 생명의 양식을 얻지 못하고 죽고 맙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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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에서 약속의 땅으로 가기위해서는 거칠고 황량한 시나이 반도를 지나야 합니다.
거칠고 황량한 광야는 세상의 것들을 떨궈내는 정화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광야는 악의 유혹을 견디어내는 인내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광야는 부활을 향해 나가는 십자가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의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금 풍요로웠던 이집트로 돌아가고 싶어 했습니다.
하느님을 섬기지 못하고 금송아지를 섬기려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구리 뱀을 만들게 하였습니다.
구리 뱀을 보는 사람은 다시금 하느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가 만든 구리 뱀을 보고서 치유되었듯이,
하느님의 아들도 십자가에서 높이 들려져야 합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인도하는 구원의 표징입니다.”
신앙은 세상의 것과 하느님의 뜻 사이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식별의 과정입니다.
교부이신 그레고리오 교황님의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는 신앙을 통해서 잉태됩니다.
세례를 통해서 태어납니다.
교회의 가르침과 교훈으로 젖을 먹습니다.
성체성사로 자라납니다.
거룩한 생활로 어른이 됩니다.
지혜와 결합하여 혼인을 합니다.
우리의 자녀는 희망입니다.
우리의 집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우리의 유산과 재산은 낙원의 기쁜 삶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어두운 죽음이 아니라
지복의 영원한 생명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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