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3월 13일 사순 제3주간 토요일

Margaret K 2021. 3. 13. 09:03

2021년 3월 13일 사순 제3주간 토요일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루카 18,9-14)


Everyone who exalts himself will be humbled,
and the one who humbles himself will be exalte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최종훈신부-


내비게이션에서 길을 잘못 들어섰다고 하며 유턴하라는 말이 계속하여 들려옵니다. 자주 다녔던 길이고, 이 시간이면 내비게이션이 가라는 방향은 차가 막혀 더 늦을 것 같아 이를 무시하고 자신의 길로 들어섭니다. 그러나 선택한 길도 이내 주차장처럼 막힙니다.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따르지 않은 것을 괜히 후회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선택은 언제나 똑같습니다. 자신의 잘못과 실수를 인정하지 않으면 쉽게 그 선택을 바꾸지 않습니다. 지금 잘 살고 있다고, 자신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느끼지 못하면 지금의 인생 방향도 되돌리지 않습니다. 지금의 선택에서 방향을 바꾸어 유턴하는 것을 우리는 ‘회개’라고 합니다. 세상의 가치로 삶을 살아가다가 어느 순간, 어떤 기회에 자신의 삶이 잘못되고 있음을 깨닫고 하느님의 가치로, 예수님의 신념으로 방향을 돌리는 것, 그래서 그 가치가 구원으로 이끄는 힘임을 믿는 것, 그것이 우리의 회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강도들이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 세리와 같이 살고 있지 않다고 자신하며 자신의 삶이 최선이라 자부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언제나 옳은 판단과 행동만을 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런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부터가 오만이고 교만일 따름입니다.
하느님과 눈을 맞추고 예수님을 따르는 방향을 자신의 목표로 삼는 회개의 시작은 먼저 자신의 나약함을 알고 오만과 교만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리는 이제 회개를 시작합니다. 자신을 낮추고 잘못을 인정합니다. 유턴을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매 순간 하느님을 바라보며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회개의 출발선에 서려면 자신의 나약함과 죄스러움을 바라보는 것이 선행되어야 함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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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새벽마다 샤워합니다. 만약 샤워하지 않으면 괜히 몸에서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찝찝한 기분이 듭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새벽, 그날도 새벽 운동을 하고서 샤워를 하는데 문득 어렸을 때가 생각났습니다.


그때는 샤워를 잘 하지 않았습니다. 학교에서 신체검사가 있을 때만 목욕탕에 가서 목욕했고, 겨울에는 뜨거운 물이 아깝다고 커다란 빨간색 고무 다라(‘다라이’가 일본말이지만, 이렇게 써야 더 쉽게 이해될까 봐 그냥 씁니다)에 받아놓은 뜨거운 물에 나이순으로 온 식구가 목욕하곤 했습니다.

늘 마지막 차례였던 제가 목욕했던 물을 깨끗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그때에는 더럽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한 달에 한두 번 목욕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지금 사람들은 대부분 매일 샤워를 합니다. 그래서 늘 깨끗한 몸을 유지합니다. 하지만 마음이 깨끗하기 위한 노력은 얼마나 하고 있을까요? 어렸을 때 연중행사로 목욕하는 것처럼, 일 년에 두 번 판공성사 하는 것으로 깨끗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요?

분명히 깨끗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깨끗하다고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자신은 옳고 남은 틀렸다며 너무나 많이 판단과 단죄를 반복하는 우리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가 바로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스스로 아주 잘난 줄 아는 바리사이는 오만과 자만에 빠져서 자기가 가장 큰 죄인인 줄 모르고 터무니없이 남만 비난하고 있었지요.

이 바리사이는 찬양 제물로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이 빠지기 쉬운 교만의 위험을 잘 보여줍니다. 그는 참회라는 유익한 치료제를 통해 자기 병을 고백하는 대신, 자신은 건강하고 다른 사람들은 병든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그에 반해서 세리는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오히려 가슴을 치며 자신의 죄가 많음을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그의 기도하는 자세는 커다란 겸손을 보여줍니다. 그는 자비를 간청했고 의로움을 인정받았습니다. 그는 남과 견주어 자기가 더 낫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가 가장 비천한 죄인임을 알고 고백합니다.

자신의 의로움을 고백하기보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가 더 어려운 법입니다. 이렇게 용기 있게 자신을 낮추어 죄를 고백하는 사람에게 이런 원칙의 말씀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누가 더러운 물속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이 물에서 나올 생각은 하지 않고 계속 그 안에 있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볼까요? 그렇다면 지금 내 마음은 어디에 있는지 보십시오. 혹시 더러운 죄와 악에 빠진 것은 아닐까요? 당장 빠져나와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것처럼 행복한 일은 없다(도스토예프스키).


나도 잘못할 수 있습니다.

어느 고속버스 기사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어가면서 안내 방송을 합니다.

“잠시 후, 이 차는 여러분의 목적지인 부산을 향하기 전에 잠시 쉬어 가도록 하겠습니다.”

이 안내 방송에 승객들은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납니다. 그들은 부산이 아니라, 광주로 가야만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승객 자신들은 스스로 잘못 탔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버스 기사가 잘못 탄 것이었습니다. 버스에는 분명히 ‘광주행’이라는 행선지가 적혀 있었습니다.

버스 기사가 잘못 탔던 것입니다. 다행히 휴게소에 가느라 잘못된 점을 알게 된 것이지, 안 그랬으면 모두가 광주가 아닌 부산에 갈 뻔했던 것이지요.

우리는 모두 실수할 수 있고, 또 잘못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늘 겸손한 모습으로 이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실수와 잘못을 인정하면서 살아갈 때, 우리가 가야 할 목적지인 하느님 나라에 서로서로 고쳐 주며 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면 모든 사람에게 친절할 수 있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바리사이와 세리가 성전에서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바리사이는 자신을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을 세리와 비교하는 것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과 만남은 그냥 자신이 이미 내린 결론을 확증 받는 것일 뿐입니다.

하지만 세리는 자신의 의로움은 하느님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자신이 믿는 바대로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남과 비교해 이미 자신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하느님 앞에 나올 이유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심판관이시고 그 사람을 의롭게 만드는 구원자이심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의롭게 된 사람은 하느님이 필요 없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 기도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그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는 왜 사람들과 비교하며 자신을 비교우위에 놓으려고 했을까요? ‘열등감’ 때문입니다.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남을 심판하는 버릇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남과 비교해 올라가고 싶다는 말은 자신이 아래 있다는 뜻입니다.

 

      열등감은 ‘자존감’이 부족한 데서 옵니다. 스스로 자존감을 키우려고 하면 남과 비교하게 됩니다. 이것이 자존심입니다. 남과 비교하려다 보면 옳고 그름을 많이 따지게 됩니다. 자신이 옳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바리사이-율법학자가 됩니다. 그들은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당대는 그르다고 말합니다.

 

      영화 ‘원더’(2017)는 부모의 사랑이 자녀의 자존감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그리고 그 자존감이 없는 사람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어떠한 단절을 경험하는지 잘 보여 줍니다.

‘어기’는 특별한 외모로 안면에 장애를 지니고 태어나 27번의 성형수술을 받아 겨우 눈, 코, 입을 알아볼 수 있는 모습이 됩니다. 부모는 아이가 상처받을까 봐 학교에 보내지 않습니다. 하지만 평생 그렇게 살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 과감하게 학교에 입학시킵니다.

      물론 어기를 좋아해 주는 ‘잭’이란 친구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도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 자기가 어기처럼 태어났으면 자살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 친구도 교장 선생님의 부탁으로 힘겹게 어기와 친해지려 했던 것입니다. 어기는 그 말에 상처받지만, 그가 이전의 친구 집단에서 소외되지 않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고 서로 화해합니다. 잭도 자신이 속해 있던 친구들과 싸우며 어기 편을 들어줍니다. 그리고 그를 싫어하는 친구들도 점점 그의 편이 되어갑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지쳐도 부모만은 어기편이 되어 줍니다. 그리고 누나인 ‘비아’도 항상 어기편입니다. 그래서 어기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누나 비아가 오히려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습니다. 절친 ‘미란다’로부터 갑자기 따돌림을 당하며 힘들어합니다. 그러면서도 부모의 관심을 위해 힘들어하는 어기를 챙겨야 합니다. 하지만 비아에게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할머니가 계십니다. 할머니는 힘들어하는 비아를 안아줍니다.

 

      비아의 절친인 미란다는 어기에게 헬멧을 선물한 사람입니다. 이것은 미란다가 어떤 사람인지 잘 보여 줍니다. 미란다는 좋지 못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비아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항상 부러워했고 질투까지 했습니다. 이 열등감이 어기에게 헬멧을 선물하게 했습니다. 자신과 같은 처지인 어기는 사람들 앞에서 헬멧을 쓰고 다녀야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하지만 헬멧을 쓰고 다니던 사람은 미란다 자신이었습니다. 그 열등감이 남에게도 헬멧을 씌워 움츠러들게 만들고 비아도 따돌리며 열등감을 느끼게 했습니다.

 

      하지만 미란다도 연극부에서 인정을 받고 또한 비아 부모의 사랑도 받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해주는 부모의 딸인 비아의 마음을 슬프게 한 것이 아파서 연극에서 자신의 주인공 역할을 일부러 비아에게 돌려줍니다. 그렇게 모두가 행복하게 영화는 마무리됩니다.

 

      어기에게는 잭이 있고, 비아에게는 미란다가 있습니다. 잭과 미란다는 어기와 비아의 친구이지만 열등감이 있는 친구들입니다. 잭은 그 열등감을 이전의 친구 집단에서 극복하려 했고, 미란다는 연극에서 능력으로 비아를 이기려 했습니다. 이런 상황이 바리사이가 세리에게 헬멧을 씌우려 하는 오늘 복음의 모습과 같습니다.

 

      하지만 세리는 굴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도 하느님 자녀의 자격을 갖췄음을 믿었고 그 자격은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남을 끌어내려 자신을 높이려는 마음은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 것에 기인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하느님 아버지가 계십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자주 말하십시오. 특별히 “아빠!”라고 해 보십시오. 아빠라는 말은 친자녀라는 뜻입니다. 아버지는 세상에서 연세 많으신 분들에게 붙일 수 있는 말이지만, 아빠라는 말은 친아버지에게만 쓸 수 있는 말입니다. 친아버지와 함께라면 그 자존감 때문에 굳이 자신을 남들과 비교해 자신을 들어 높이려 하지 않습니다.

 

      운동회 날 장애를 지니고 태어난 친구를 위해 함께 손을 잡고 걸어서 결승선까지 들어온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이 친구들은 자신들의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장애가 있는 친구를 이길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고 있었습니다. 굳이 친구를 이기면서 극복해야 할 열등감이 없었던 것입니다.

 

      영화에서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하는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너희들이 옳음과 친절함, 둘 중의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친절함을 선택하라.”

      옳고 그름을 따지는 사람은 열등감이 강한 사람입니다. 상대가 그르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만들기 위해 항상 남에게 씌워줄 헬멧을 들고 다닙니다. 하지만 “아빠, 아버지!”가 있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누구에게나 친절합니다. 자신들에게 함부로 대한 사람들에게까지 친절합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하느님을 부모로 인정하지 않는 바리사이의 몫이라면, 친절함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하느님 자녀라는 자존감을 가진 이들의 몫입니다.

 -조재형신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조선은 일본에 사절단을 보냈습니다일본의 상황을 직접보고 판단하기 위해서였습니다그런데 사절단의 의견이 달랐습니다한쪽은 일본의 지도자가 야망이 있다고 보고했습니다군인들의 사기가 높다고 했습니다그러니 일본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그러나 다른 쪽은 일본의 지도자가 눈이 작고키가 작다고 하였습니다오랜 내전이 끝난 뒤라서 조선을 침략할 여유가 없다고 하였습니다똑같은 상황을 보았지만 전혀 다른 내용으로 보고하였습니다당시 조선은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었고전쟁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결과는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일본의 침략이 있었고조선의 왕은 피난을 가야했습니다많은 백성이 일본군에 의해서 죽었습니다.

 

비슷한 이야기를 성서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 전에 정탐꾼을 보냈습니다그런데 정탐꾼의 보고는 달랐습니다한쪽은 가나안 땅에 사는 사람들이 강하다고 보고하였습니다그러기에 가나안 땅을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그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은 마치 메뚜기처럼 보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은 실망하였습니다그러나 다른 쪽은 하느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신다고 보고하였습니다주님 마음에 들기만 하면그분께서는 가나안 땅으로 데려가셔서 그곳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라고 보고하였습니다가나안 땅에 사는 사람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하느님의 이끄심에 따라서 용기를 내었던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코로나19에 대해서도 판단이 달랐습니다한국은 메르스를 경험했기 때문에 코로나19의 심각성을 알았고철저하게 대비하였습니다마스크 착용이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확산의 방지를 위해서는 진단키트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였고진단키트의 생산을 긴급 승인하였습니다확산을 방지하기 위해서 역학조사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검사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중환자를 위한 병상을 미리 확보하였습니다코로나19에 대한 방역의 모범국가가 되었습니다그러나 일부 국가는 코로나19의 심각성을 몰랐습니다당연히 거리두기를 소홀히 했습니다마스크 착용도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코로나19는 소리 없이 확산되었고엄청난 피해를 감수해야 했습니다코로나19와 같은 바이러스에 의한 감염병은 국제적인 연대가 중요합니다백신과 치료제는 공공재로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기도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하나는 바리사이파의 기도이고다른 하나는 세리의 기도입니다바리사이파는 기도할 때자신이 무엇을 하였는지를 이야기 하였습니다단식을 하였고봉사를 하였고십일조를 충실하게 바쳤고율법을 잘 지켰고죄인들과 함께 하지 않았다고 하느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이렇게만 살아도 그다지 나쁜 것 같지 않습니다사실 그렇게 살기도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다른 하나는 세리의 기도입니다세리는 자신이 무엇을 하였는지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무엇을 얼마나 잘 하였는지무엇을 얼마나 잘못했는지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모든 것을 아시고판단하시는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였습니다나의 행위로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하느님의 자비하심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세리의 기도를 더 높게 보셨습니다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봉헌을 하느님께서는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세리의 겸손한 기도를 잘 들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예수님을 봅니다묵묵히 그분의 십자가를 지고 갔던 시몬을 봅니다예수님 얼굴에 흐르던 피와 땀을 닦아 드리던 베로니카를 봅니다십자가에 매달려 주님 저를 기억해 주세요.’라고 했던 죄인을 봅니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신의입니다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입니다.” 

 주님 앞에 언제나 부당한 죄인인 우리들이 눈만 뜨면 드려야 할 기도는 세리의 기도입니다!

 -양승국신부-

 

누군가와 대화를 할때 마음이 상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대화가 진솔하거나 순수하지 않고 권모술수나 잔머리 굴리는 냄새가 풀풀 풍길 때입니다. 마음 속 깊은 곳 생각과는 전혀 다른 대화, 겉도는 대화를 나눌 때입니다.

  

하느님과의 대화인 기도 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을 꽤뚫어보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속마음과는 전혀 다른 기도를 장황하게 늘어놓을때, 하느님께서도 결코 달가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가감없는 진솔한 대화를 좋아하실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차라리 반항적인 예언자 예레미야의 기도가 돋보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를 예언자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은 저를 아주 바보로 만드셨습니다.”

  

하느님께 건넨 욥의 대화는 더 솔직합니다. “저는 너무나 비참해서 주님께서 저를 만든 날을 저주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조차도 하느님 아버지께 솔직한 내면의 심정을 가감없이 말씀하셨는데, 이 보다 더 진솔한 기도는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오늘 복음에서 비교대조의 달인이신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러 성전으로 올라간 두 사람의 기도 자세를 소개하고 계십니다. 두 기도자의 태도는 극명하게 구분됩니다.

  

바리사이의 기도를 보십시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 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루카 복음 18장 11~12절)

  

교만과 자만으로 똘똘 뭉쳐진, 기가 차지도 않은 바리사이의 기도입니다. 그가 바친 기도의 가장 큰 문제점은 겸손의 결핍입니다. 성찰과 자기 인식의 부족입니다.

  

바리사이의 마음속에는 자신이 ‘무익한 종’이라는 의식보다 ‘유익한 종’이라는 의식이 강했습니다. 하느님께서 큰 자비와 은총을 베푸셔서 티끌 같은 자신을 축복하셨음을 까마득히 잊고 순전히 자신의 힘으로 오늘 여기 있다는 그릇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바리사이처럼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고 자신이 대단하다고 믿는 사람은 하느님 은총을 통한 의화(義化)가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느님은 필요 없으며 결핍과 한계와 모순투성이의 인간인 자신에게만 의존하므로 그 길의 끝은 결국 멸망이요 죽음인 것입니다.

  

‘바리사이’란 말 마디 자체가 ‘~으로부터 분리되다’란 의미를 지닙니다. 바리사이들의 머릿 속에는 언제나 자신들이 거룩하다는 의식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불결한 사람들, 죄인들, 세리들, 이방인들과는 달리 자신들은 깨끗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거룩한 사람들이라는 선민사상과 우월감이 대단했는데, 그런 바리사이들의 모습이 예수님 보기에 웃기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아직 갈길이 까마득한 바리사이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모범으로 세리의 기도를 소개하십니다.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습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 복음 18장 13절)

  

자비하신 주님 앞에 언제나 부당한 죄인인 우리들이 눈만 뜨면 드려야 할 기도가 세리의 기도입니다. 언제나 죄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가 틈만 나면 쏘아올려야 할 화살 기도가 세리의 기도입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를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에는 대조를 이루는 두 인물, 곧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여기는 죄인인 바리사이와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여기는 의인인 세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보는 ‘눈’이 서로 달랐습니다.

첫째는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서로 달랐습니다.

바리사이의 눈은 자신을 의롭다고 보는 눈이고, 세리의 눈은 자신을 죄인이라고 보는 눈입니다.

곧 한편에는 자신을 높이는 눈이 있고, 다른 편에는 자신을 낮추는 눈이 있습니다.

둘째는 타인을 보는 눈이 서로 달랐습니다.

바리사이의 눈은 타인을 업신여기는 눈이고, 세리의 눈은 타인을 중히 여기는 눈입니다.

곧 한편에는 꼿꼿이 서서 하늘을 향하는 눈이 있고, 다른 편에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눈이 있습니다.

그래서 타인의 가슴을 치는 이가 있고, 자신의 가슴을 치는 이가 있습니다.

셋째는 눈이 누구를 향하여 있는지가 서로 달랐습니다.

바리사이의 눈은 자신을 향하여 있고, 세리의 눈은 하느님을 향하여 있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는 스스로 의롭다 자신하고 혼자말로 기도하지만, 세리는 자신의 가슴을 치며 하느님을 향해 기도합니다.

그렇습니다. “바리사이는 혼자말로 기도했습니다.”

이 말의 원어를 직역하면, “자신을 향해 기도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루카 18,11)라고 말하지만, 실은 긴 독백으로 하느님께 설교하려 들었습니다.

그러니, 그는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자신을 위해 있어야 했습니다.

곧 하느님이 자신의 가치 확인과 자화자찬을 위해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우러르기보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자신을 앞세웁니다.

그러나 세리는 하느님을 향하여 있으며, 자신과 하느님의 거리를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그분을 감히 올려다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분 앞에서 자신이 진실로 누구인지를, 곧 죄인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가슴을 치고. 회개의 마음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에 자신을 맡깁니다.

시나이의 성 이사악은 말합니다.

“자신의 죄를 아는 이가 기도로 죽은 이를 살리는 이보다 위대하다.

~자기 자신 때문에 한 시간 동안 우는 이가 온 세상을 통치하는 이보다 위대하다.

자신의 나약함을 아는 이가 천사들을 보는 이보다 더 위대하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겸손은 하느님 앞에 있기에, 자기를 비하하거나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자비가 필요함을 알고 그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낮추되, 결코 자신을 하잖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을 중히 여기고 자비를 구하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도 귀중하게 여기고 중시합니다.

그러기에, 겸손은 자신을 낮추기만 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우러르며 존경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실은,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중시 여기지 않는 사람은 오히려 교만한 사람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마치신 다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8,14)

 

그러니 언제나 주님 앞에 서 있고, 주님을 향하여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분의 자비를 입고서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자비가 아니면 살 수가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필요한 것은 당신의 자비, 그 외엔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가슴을 치며 하느님을 향해 기도합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루카 18,13)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8,14)

 

주님!

낮추는 이가 되게 하소서.

타인의 평가나 꾸짖음을 물리치지 않게 하소서.

인정할 줄을 알고 굽힐 줄을 알게 하소서.

타인을 차별하지도, 업신여기지도 않게 하소서.

존중하고 존경하게 하소서.

언제나 당신 앞에 서 있는 자 되게 하소서!

제 자신을 내세우지도, 숨기지도 않게 하소서.

용서를 청하고 자비를 구하게 하소서.

, 주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아멘.

 겸손한 죄인 ♧♣

-반영억신부-


성직자가 좋아하는 신자는 우거지 신자이고 싫어하는 신자는 원불교신자랍니다. 우거지는 우아하고, 거룩하고, 지적인 신자를 말합니다. 원불교는 원망하고, 불평불만하고, 교만한 신자랍니다. 기왕이면 우거지 신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올바른 사람이다.’ ‘나는 아무개 보다 더 낫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해롭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산다고 하면서 자기만족에 빠져 남을 판단하거나 비난하게 된다면 알맹이를 놓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온갖 선을 행하고 신앙의 규정을 철저히 지켰더라도 하느님의 눈에 들 수는 없습니다. 사랑은 없고 오로지 냉혹한 비판만 있는 사람이 더 무서운 죄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에게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하고 가슴을 치는 세리와 “저는 세리와 같지 않고 일주일에 두 번씩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하고 자랑하는 바리사이를 비유로 들었습니다. 누가 하느님께 의롭게 인정받은 사람인가?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집니다.

자기만 옳은 줄 믿는 것은 무지에서 나오는 과오요, 남을 업신여기는 것은 교만에서 오는 죄입니다. 사람들은 겉모양을 보고 의인이다, 불의한 사람이다, 판단하지만 하느님은 속마음을 보십니다.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자신을 포장하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 주님의 눈에 들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의인처럼 살아도 내적으로 교만한 사람은 겸손한 죄인보다 못합니다.

루카 복음에 보면 베드로는 밤새 고기잡이에 실패하였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후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고 그것을 통해서 주님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깊은 곳에 그물을 치라는 한 말씀에 순명한 후 주님을 모시기에 너무도 부족한 자신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더 이상 고기가 보이지 않고 주님만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루카5,8)하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도 주님 안에서 자신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주님을 제대로 만나면 죄로 얼룩진 과거의 삶이 보이지 않고 주님께서 약속해 주신 미래의 삶이 보일 뿐입니다. 주님의 소명이 나를 재촉합니다. 나의 허물이 나의 발목을 잡을 수 없고 오로지 주님만이 나의 모두이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은 장애물이 밖에 있으면 쉽게 피해 다닙니다. 그러나 장애물이 자기 안에 있으면 그 장애물을 피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맙니다. 밖에 있는 큰 장애물보다 안에 있는 장애물이 더 무섭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장애를 거두어 주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나의 장애를 없애 주시고 나를 통하여 당신의 일을 하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뜻에 응답함에 있어서 주저함이 없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행여 자기만 옳다는 과오나 남을 무시하는 죄는 짓지 않기를 바랍니다. 모쪼록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하는 은총의 사순절이 되길 기원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라마크라슈나 우화
한 수도원에 유명한 수사님이 살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수도원 가까이에 매춘부의 집이 있었습니다. 수사님은 사내들이 매춘부의 집에 들어갈 때마다 뜰에 돌을 하나씩 주워 모았습니다. 날이 갈수록 돌무더기가 점점 커지자, 수사님은 매춘부를 불러 그 돌무더기를 보여주며 천벌을 받을 것이라고 호되게 꾸짖었습니다. 매춘부는 두려움에 떨며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그날 밤 죽음의 천사가 찾아와서 수사님도 매춘부도 함께 데려갔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매춘부는 천국으로 가고 수사님은 지옥으로 끌려가는 것이었습니다. 놀라서 수사님은 항의 하였습니다. 일생을 금욕과 절제 속에서 하느님을 흠승하며 살았는데 왜 지옥으로 가야 하느냐? 일생을 간음죄만 짖고 함부로 살았던 여인이 천국으로 가는 것이 말이 되느냐? 하느님의 천사가 말했습니다. “수사님, 하느님의 심판은 공정합니다. 수사님은 평생 수도자라는 자만심과 명예만을 지키며 살면서 죄만 가릴 줄 알았지 사랑을 베풀 줄은 몰랐습니다.”

사랑

 -송영진신부-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29-31).”

 

이 말씀은, 모든 계명들과 율법들의 근본정신은 ‘사랑’이라는

가르침입니다(마태 22,40).

(‘신앙생활의 근본정신은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계명들과 율법들을 아무리 잘 지킨다고 해도 사랑 없이 지키는 것이라면,

그것은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도 사랑 없이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1코린 13,1-3).

신앙생활은 사랑 안에서 사랑으로 하는 것, 즉 ‘사랑의 삶’입니다.

 

1) 예수님께서 사랑을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라는 말씀부터 하신 것은,

‘하느님만’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다른 것들을 하느님과 함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재물, 권력, 명예, 그 어떤 것도 하느님과 같은 자리를 차지할 수 없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만 사랑하는 사람’,

즉 하느님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2) 그런데 도대체 사랑이란 무엇인가?

성경에는 사랑하라는 계명과 사랑하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은 있지만,

‘사랑이란 무엇이다.’ 라고 정의를 내린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의 계명’을 통해서 사랑이 무엇인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계명’을 ‘사랑에 대한 정의’로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자신의 온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모두 다, 즉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기를 원하는 소망”이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습니다.

(이 소망은 완전한 일치를 이루어서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소망입니다.)

반대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기를 원하는 소망이 없다면,

즉 그냥 좋아하는 것뿐이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사랑은 ‘좋아하는 감정’과는 다른 것입니다.)

미신을 믿거나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은 미신의 대상이나 우상에게 자기의 소원을

간절하게 비는 일을 잘하기는 하지만 그 대상을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사랑 없는 신앙은 미신일 뿐입니다.

 

3)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실천되고,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 안에서 완성됩니다.

‘하느님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방법은,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일입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

이웃 사랑 실천 없는 하느님 사랑은 위선입니다.

 

4) 그러면, 이웃 사랑 실천만 잘하면

여러 가지 신심 행위나 기도나 전례는 필요 없는가?

그것은 아닙니다.

신앙인으로서 기본적으로 실행해야 할

예배, 기도, 전례, 신심 행위 등을 실행하지 않고 이웃 사랑 실천만 한다면,

그것은 무신론자들의 이웃 사랑 실천과 다르지 않게 됩니다.

(무신론자들의 이웃 사랑 실천도 분명히 선한 일이긴 한데,

우리는 믿음 없이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우리가 함부로 판단할 일은 아니고,

하느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입니다.)

 

첫째가는 계명에 관해서 예수님께 질문했던 율법학자는 예수님 말씀을 듣고 나서,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라고 말했고, 예수님께서는 그를 칭찬하셨는데(마르 12,33-34),

‘제물보다 낫다.’는 말이 ‘제물 바치는 일은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랑이 제물 바치는 일보다 더 중요하고, 먼저 실행해야 할 일이라는 뜻입니다.

신앙인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기도와 사랑이 하나로 일치되어 있는 사람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5) 사랑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7-18).”

사랑한다는 말을 아무리 많이 해도 실제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 없다면,

그 말은 거짓말이거나 ‘빈말’입니다.

사랑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아무리 설명을 잘해도,

그래서 여기저기 다니면서 사랑에 대해서 강의를 많이 한다고 해도,

실제로 실천하는 것이 없다면, 그 이론은 죽은 이론일 뿐입니다.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5-17).”

말로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천이 없으면 그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그처럼 사랑에 실천이 없으면 그 사랑도 죽은 것입니다.

‘죽은 믿음’은 ‘생명력 없는 믿음’이고, ‘생명을 주지 못하는 믿음’이기 때문에,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죽은 사랑’은 ‘생명력 없는 사랑’이고,

‘생명을 주지 못하는 사랑’이기 때문에,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나를 살리고, 우리를 살리는 힘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시는 일은 사랑입니다.

신앙인은 그 사랑의 힘 안에서, 그 사랑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힘을 다시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사람입니다.

만일에 나누지 않고 자기 혼자 가지고 있기만 한다면,

그 힘은 서서히 약해지다가 결국 사라지게 됩니다.

 복음: 루카 18,9-14: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

 -조욱현신부-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깎아내리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이다. 내가 먼저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신학을 공부하여 교사가 되었기 때문에 이런 교만에 빠진 사람들이 염두에 두어야 할 말씀이다. 바리사이는 하느님께 기도하러 간 사람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가 하느님을 향하여 감사기도를 바친다고는 하지만 실은 자기 자신을 향하여 기도한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찬사를 하느님 앞에 올리러 간 사람이었다.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한다는 핑계로 허영에 빠져 교만하고 이기적인 사람이 된다면 단식이 그에게 무슨 득이 되며, 십일조를 바치면서 자랑하고 그것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는 남을 비난하고 단죄한다면 그 십일조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바리사이는 계속 ‘나는 다른 인간들과 다르다.’라고 칭찬하기에 바쁘다. 바리사이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 자신의 교만을 늘어놓고 있다.

 

주님의 이름을 고백하며 찬양의 제물을 하느님께 바치는 사람은 자신 안에 숨어있는 사악한 자를 경계해야 한다. 우리가 감사 찬양을 드리는 바로 그때 우리를 덮치려고 사탄이 몸을 숨기고 있다. 바리사이에게 한 것처럼 행실로 우쭐거리게 하지 않고 다른 교만으로 우리를 취하게 할 것이다. 아마 아직도 자신의 행위로 우쭐거리게 하는 것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세리는 감히 눈도 들지 못하고 ‘멀찍이 서서’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기죽은 태도가 보이는 것 같다. 하느님의 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방종한 삶을 살아온 자신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느님이 두려웠다. 우리는 그의 몸짓에서 자신의 악행을 책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어리석은 바리사이는 뻔뻔스럽게 눈을 치켜뜨고 꼿꼿이 서서 제 자랑을 했지만, 세리는 자신의 행동을 부끄럽게 여긴다. 자기 죄를 고백하고 의사에게 자신의 병을 알리며 자비를 간청한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주님께서는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14절) 바리사이가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다. 그는 교만하게 자기 자랑을 했고 세리는 겸손하게 자기 죄를 고백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바리사이의 자선보다 세리의 고백을 더 기꺼워하신 것이다.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돌아간 것은 그가 겸손했기 때문이다. 바리사이의 교만한 기도는 하느님의 진노를 불러일으켰고, 세리의 겸손한 기도는 더 큰 힘을 발휘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이웃과 비교하여서는 안 된다. 우리가 보고 또 비교하며 따라야 할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다. "내가 남들만큼 선한가?"가 아니라, "내가 하느님 앞에 선한가?"이다. 즉 우리들의 선행이나 신앙생활이나 그 기준, 척도는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마 우리가 우리의 삶을 예수님의 생과 비교할 때는 우리도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할 것이다. 이 사순절이 우리에게 큰 은총의 기간이 될 수 있도록 이런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루카 18, 14)


나의 기도는
어떤한지를
성찰하게 된다.

오늘 우리는
저마다의
삶에서
기도와 함께
살고있다.

자신을
제대로
알고있다는
착각과 교만을
치유하는
기도이다.

이 모든 것에
앞서
하느님을
생각하게 하는
은총의
사순시기이다.

하느님과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가장 큰
은총이며
행복이다.

하느님을 통해
우리자신을
제대로
보게된다.

제대로 보아야
제대로 사랑할
수 있다.

기도와 사랑
기도와 창조는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이다.

기도는
정직한
자기고백이다.

부족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참된
기도이다.

또한 기도는
비참함과
거짓속에
살고있는
거짓 자아와의
결별이다.

결별없이는
결단도 없다.

그래서
기도는
자기만족이
아니라

자신을
버리고
비워내는 것이
기도의 여정이다.

무너진 기도를
회복하는 것은
우리의
정직한 성찰이며
진실한 고백이다.

우리의 내면을
만나지 않고서는
기도는
깊어질 수 없다.

우리의
마음까지
모두
열어드리고
내어드리는
기도로

우리는
새로워진다.

진심어린
일상의 기도가
일상을 살리는
회개임을
믿는다.

정직하게
봄꽃이
피어난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진심을 아는지 물으십니다.
 

"아픈 데를 고쳐 주시고 ... 싸매 주시리라. ... 살려 주시고 ... 일으키시어 우리가 그분 앞에서 살게 되리라."(호세 6,1-2)

주님과 맺은 계약에 불충했던 이스라엘이 그분께 매를 맞아 몰락과 유배의 쓴 잔을 마시지만, 주님은 머지 않아 당신 계약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되돌려 주십니다. 주님은 벌을 위해 벌을 내리시는 게 아니라 그들을 주님 백성의 자리, 순결한 신부로 되돌리시려고 잠시의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이지요.
 

"주님을 알자. 주님을 알도록 힘쓰자."(호세 6,3)

그래서 호세아 예언자는 주님을 알자고 독려합니다.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가 무엇인지 알자고 말입니다. 그분은 작은 실수도 엄벌에 처하시는 무섭고 혹독한 하느님이 아니라 자비와 사랑이 넘치는 분이심을 인식할 때 백성과 주님와 관계는 크게 달라질 것이니까요.
 

"오, 하느님! 제가 ... 저 세리와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루카 18,11)

종교와 학문으로 백성의 윗자리를 차지하는 바리사이들은 실제로도 율법을 열성적으로 지키는 금욕적인 이들입니다. 그들은 당장 하느님 앞에 선다 해도 그다지 죄송하거나 두려울 일이 없는, 그래서 구원을 따논 당상처럼 여겨도 이상하지 않은 이들입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 18,14)

같은 기도의 현장에서 전혀 다른 고백이 들립니다.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주님께 아룁니다. 세상이 손가락질하는 자신의 부정함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지요. 세리는 율법상으로도 죄인일뿐 아니라 실제로도 가난한 이들을 등쳐 제 배를 채우는 탐욕스런 악인이니, 주님의 자비밖에는 기댈 곳이 없는 사람입니다.

바리사이와 세리, 성전 안에서 하느님 현존 앞에 선  이 두 사람의 기도가 이처럼 다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이 비유로 바리사이의 평소 열성을 비난하시거나 세리의 잘못을 두둔하시려는 게 아닐 겁니다. 사람의 기도에는 그들이 하느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또 알고 있는지가 드러나기 마련이니, 이 기도를 통해 진정한 의로움이 어디에 있는지 숙고하도록 초대하시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비유 속 바리사이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자신이 완벽하고 철저해야 하느님께서 보아주신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인간적인 힘을 총동원해 사람에게도 주님께도 인정받는 존재가 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요. 그리고, 의도만큼 자기 관리가 되면 스스로를 하느님의 도움이 필요치 않는 존재로 여깁니다. 그래서 그의 기도는 자기 업적과 공치사, 험담과 고발의 혼잣말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반면 세리와 같은 이는 하느님의 자비 밖에는 희망이 없는 존재입니다. 세상에도 고개를 들 수 없고 하느님께도 늘 송구한 죄악에서 벗어나려 해도 그때만 반짝하다가, 또다시 자기 죄의 웅덩이에 몸을 담그고 뒹구는 가련한 실존의 소유자입니다. 그런 주제에도 하느님을 영영 떠나지 못하고 부정하고 불결한 몸과 마음인 채로 자석에 끌리듯 다시 주님 앞에 섭니다. 그리고는 고개도 못 들고 가슴을 치며 통회하고 슬퍼하지요.

비록 율법을 지키지도 않고 신학도 모르는 죄인이지만 세리는 하느님이 무한히 자비하신 분이심을 압니다. 그래서 염치없지만 다시 돌아오길 반복하지요. 그렇다고 자비를 믿고 죄를 즐기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의 기도는 진정으로 통회하는 겸손한 영혼의 그것이니까요.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8,14)
예수님은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간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겉보기에 그럴듯하게 모범적인 바리사이의 독백보다 세리의 자비 청원이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적 질서를 제대로 담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하느님은 당신 앞에 나아와 기도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속삭이십니다. " 내 앞에서는 완벽하려 하지 않아도 된다. 부족하고 때 묻고 일그러지고 깨져 있어도 괜찮다. 보잘것없이 작아도 된단다. 아니, 작으면 더 좋다."

사랑하는 벗님! 주님 앞에 머무르는 우리 각자의 기도를 깨어 의식해 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인식하는지에 따라 기도의 색깔과 온도가 참 많이 다르겠지요. 주님이 작고 낮추어진 우리 영혼을 사랑으로 보듬는 분이심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기도 안에서 그분과 더 친밀해지고 뜨거워질 것입니다. 자비이신 분 앞에 엎드려 자비를 간청하는 이는 참으로 복됩니다. 벗님이 바로 그렇습니다!

 몰라도 너무 모르는

 -김찬선신부-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큰아들이 있었습니다.

부모는 집안의 장남이 잘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른 자식은 초등학교밖에 가르치지 못했음에도

큰아들은 대학까지 나올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부모가 바란 대로 큰아들은 높은 지위까지 올라갔고,

그래서 그런 자식이 부모는 아주 자랑스러웠습니다.

큰아들도 자기가 그렇게 된 것이 자랑스러웠고

부모 때문임을 알기에 부모님께 감사드렸습니다.

 

문제는 큰아들과 동생들과의 관계였습니다.

부모가 장남이 잘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동생들을 끌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큰아들은

자기 때문에 공부를 못한 동생들에게 미안해하기는커녕

같이 모이는 자리에서 동생들을 무식하다고 무시하거나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너무 으스대는 것이었습니다.

 

동생들은 그런 형이 꼴 보기가 싫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들과 비슷한 처지의 자기 자식들이

도시에서 형처럼 크는 형의 자식들과 비교되는 게 싫어서

명절이 되어도 부모님 뵈러 고향에 가지 않고 나중에 따로 갔습니다.

 

그러자 형은 자기 잘못은 생각지 않고 명절 때 고향에 오지 않는 동생들을

못된 놈들이라고 부모 앞에서 욕하고 자기만 효자인 양 자만하였습니다.

이런 큰아들이 부모님 보시기에 너무도 언짢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이렇게 되라고 모든 것을 다 큰 아들에게 준 것이 아닌데.

 

오늘 주님께서 비유로 든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를

제가 이렇게 각색을 해봤습니다.

 

정말 부모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리는 자식이라면

부모 앞에서 다른 자식을 깔아뭉개고,

다른 자식보다 자기가 잘난 양 으스댈 수는 없습니다.

 

자기만 사랑치 않고 다른 자식도 사랑하는 부모에게

동생들에 대한 형의 비난은 너무 가슴 아프게 하는 짓이며

무엇보다도 자식에 대한 모든 것이 원죄인 부모에게는

왜 그렇게 낳고 그렇게 키웠냐는 비난이 되기에 해서는 안 될 짓입니다.

 

그렇습니다. 큰아들은 부모의 마음, 부모의 사랑을 너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자기만 사랑치 않고 모든 자식을 다 사랑하고,

자기만 잘되기를 바라지 않고 다른 자식도 잘되기를 바라며,

다른 자식이 잘되도록 장남이 역할을 해주기를 바라는 그 마음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 교만한 사람이 보통 하는 짓이 이런 것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모르고, 특히 하느님의 사랑을 모릅니다.

그래서 호세아서는 이렇게 우리를 설득합니다.

“주님을 알자. 주님을 알도록 힘쓰자.”

 

그리고 비유의 바리사이처럼 스스로 자기만 의롭다고 하는 우리에게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은 하느님을 아는 예지이고,

<자처하는 의義로움>이 아니라 <신의信義>입니다.

<자처하는 의로움>은 말로 치면 독백이며

심리학적으로는 심각한 자기애自己愛 증상입니다.

 

하느님도 모르고, 자기도 모르며, 이웃은 안중에도 없는

심각한 자기도취와 착각을 나도 살고 있지는 않은지,

몰라도 너무 모르는 나는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3월 21일 사순 제3주간 토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