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10일 사순 제3주간 수요일
가장 작은 계명 중에
하나라도 스스로 어기거나,
어기도록 남을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다.
(마태 5,17-19)
Whoever breaks one of the least of these commandments
and teaches others to do so
will be called least in the Kingdom of heave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최종훈신부-
고해소에 앉아서 누군가의 고백을 들을 때면 저 자신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평소에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도 못한 일들을 죄라고 생각하여 깊이 성찰하고 용서를 청하기 때문입니다. 고해 사제로서 그런 이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자격이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듭니다. 그래서 참 많이 부끄럽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 시대에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이유는 율법대로 살려고 노력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을 위선자라고 꾸짖으십니다(마태 23,1-36 참조). 율법에 적힌 규정들을 정확히 지킬 뿐 그들의 마음과 생각에는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율법을 지키면서는 살아갑니다. 자신들이 가진 삶의 의향과 의도와는 별개로 하느님의 법에 충실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노력이라도 하고 있을까요? 예수님께 위선자라는 말이라도 들어 볼 정도로 하느님의 법에 따라 살아가고 있나요? 자신의 편의에 따라 하느님의 법과 기준의 범위를 넓혔다 좁혔다 하지는 않는가요?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이라고 말하며 자신을 합리화하고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리고 있지는 않나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주신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우리 스스로 그 율법을 폐지하며 살아가지 않았으면 합니다. 최소한 위선자라고 불리는 그 사람들만큼이라도 하느님의 법을 따라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그 노력에 못 미치는 자신을 보며 부끄러워하고 죄책감을 느끼며 살아갔으면 합니다. 그래야만 한 번이라도 더 하느님의 법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뇌의 젊음을 되찾는 법’이라는 글(대니얼 J.레비틴, ‘석세스 에이징’ 중에서)을 읽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은퇴하지 마라. 계속해서 의미 있는 일에 참여하라.
2. 앞을 보라. 뒤돌아보지 마라(회상은 건강에 도움이 안 된다).
3. 운동하라. 심장 박동을 울려라. 자연에서 하면 더 좋다.
4. 건강한 습관으로 절제된 생활 방식을 실천하라.
5. 흥미롭게 신선한 사교 관계를 유지하라.
6. 자기보다 젊은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라.
7. 의사에게 정기적으로 진찰을 받되, 집착하지 마라.
8. 스스로 늙었다고 생각하지 마라(신중한 예방조치는 예외다).
9. 패턴 인지, 결정 지능, 지혜, 축적한 지식 등 자신의 인지력을 높이 평가하라.
10. 여행, 손주들과 시간 보내기, 새로운 활동과 상황에 몰두하기 등 경험학습을 통해 인지 건강을 촉진하라. 새로운 일을 하라.
어떻습니까? 도움이 되는 10가지 방법이 아닐까요? 그런데 전혀 모르는 새로운 방법이 아닙니다. 알지만 어느 순간 소홀히 하는 부분이었습니다. 결국 필요한 것은 성실성이 아닐까 싶습니다. 삶에 성실한 사람은 이 10가지 방법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 성실한 사람도 그렇지 않을까요? 주님께 성실한 사람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평소 충실하게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성실하지 않은 사람은 세상의 편법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저자는 누구일까요? 하느님의 영감을 받아적은 글이니 하느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하느님께서 이 율법과 예언서를 폐지하러 오실 리가 없지요. 오히려 완성하러 오신 것이었습니다. 즉, 주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서에 쓰인 당신에 관한 말씀들이 실제로 일어나도록 하심으로써 율법과 예언서를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작은 계명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 성실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주님의 뜻에 맞춰서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다른 이에게도 그 사랑의 길을 성실하게 가르쳐서 하늘 나라의 영광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때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됩니다.


어느 청년이 지혜롭다는 사람을 찾아가 어떻게 성공할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세 가지 실패를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실패를 알아야 성공할 수 있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래서 그 세 가지 실패를 물었습니다.
“첫 번째 실패는 하기 싫은 일에서 성공하는 것이야. 성공의 대가는 얻겠지만, 삶의 의미나 즐거움을 얻기는 어렵지. 두 번째는 하고 싶은 일에서 실패하는 것이야. 계속하면 진정한 성공을 얻을 수 있지. 이때 실패는 성공으로 가는 실험일 뿐이란다. 마지막 세 번째 실패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야. 당연히 실패도 성공도 없지. 그러나 인생을 낭비한 책임을 져야 해. 가장 치명적인 실패지.”
큰 공감이 가는 내용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우리가 흔히 ‘실패’라고 여기는 것은 하고 싶은 일에서 실패하는 것을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이때의 실패란 단련하는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성공으로 가는 길에서 지불하는 하나의 수업료일 뿐이었습니다.
실패를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호랑이가 되고 싶은가 군고구마가 되고 싶은가?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는 말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 만들러 오셨다는 말과 같습니다.
오늘 복음 바로 밑에 오늘 복음의 핵심구절이 나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율법을 지키면 의로워지고 지키지 않으면 불의한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바리사이들이 율법을 지키려는 행위와 당신을 통해 율법이 완성되는 하느님 백성의 의로움을 대조하고 계십니다.
그러며 바리사이들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려 하지만 믿음의 백성은 형제에게 화를 내지 않는 이들이라고 하시고, 또 바리사이들은 간음하지 않으려 하지만 참 하느님 백성은 음탕한 마음까지도 품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만약 예수님을 만났다면 바리사이들이 율법을 실천하려는 것과 믿음의 백성이 율법을 지키는 것과의 차이를 명확히 알 것입니다. 그 차이란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지키려는 사람들이고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이 되려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우선 율법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왜 결국엔 율법을 지킬 수 없게 되는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20세기 최고의 여배우가 있습니다. 미국의 심리학 박사요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을 네 번씩이나 수상하고 여우 주연상 후보에는 무려 열두 차례나 선정된 캐서린 헵번입니다.
그녀는 무슨 일을 맡아도 결코 남에게 뒤지지 않는 실적을 올린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학교에선 박사학위를 땄고 연기에서는 최고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런데 사랑에서만큼은 완전에 도달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남달리 모든 면에서 완벽했던 그녀는 84세에 자서전 “나”라는 책을 출간합니다. 자서전을 통하여 그녀의 사랑관의 변화에 대해 간단히 훑어볼 수 있습니다.
헵번은 나이 20세에 필라델피아의 사업가 러들로 오그던 스미스와 결혼했습니다. 하지만 6년 후에 서로 갈라섰는데 그녀는 이 결혼생활을 한마디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루디는 나를 사랑했지만, 나는 나 자신만을 사랑했다.”
첫 결혼이 파경에 이른 다음에도 그녀는 자기 위주의 사랑을 이어갑니다.
대표적인 몇 가지 사례를 들면 이혼한 그해부터 제작자 그랜드 헤이워드와 4년을 사귀었고, 그 후엔 억만장자 하워드 휴스와 3년 동안 정을 나누었습니다.
이런 생활을 하던 햅번이 33세가 되던 1941년 “그 해의 여인”이라는 영화를 함께 출연한 스펜서 트레이시와 사랑에 빠집니다. 그 이후 그녀는 27년 동안 오직 그 사람만 사랑했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들어보겠습니다.
“우리는 그가 좋아하는 것을 먹었다. 우리는 그가 좋아하는 일을 했다. 우린 그가 좋아하는 삶을 살았다. 이것이 내겐 크나큰 기쁨이었다. 그이의 관심, 그이의 요구가 언제나 최우선이었다.”
우리는 그녀의 애정관 변화를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엔 자기중심적인 사랑을 했고, 다음엔 상대 중심적인 사랑을 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자기를 사랑하는 이기적 마음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하려고 하는 것 안에 내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입니다. 모기가 아무리 사랑하려고 해도 사랑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나에게 잘해 주어도 왠지 부담스럽습니다. 이전에 말씀드렸던, 아들을 사랑했지만 결국 며느리를 자살하게 만든 시어머니와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떠난 아들에게 “내가 평생 너만을 위해 살았는데, 네가 나에게 이럴 수 있니?”라고 말합니다. 내가 죽지 않으면 사랑도 남의 피를 빨아먹는 행위가 됩니다.
그러면 사랑이 된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예전에 개신교의 고구마 선교왕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선교할 때 사람들이 두려웠는데 사람들을 고구마로 생각하니까 길거리 선교를 통해 수천 명을 선교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고구마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냥 익었는지 젓가락으로 찔러보고 안 익었으면 나중에 또 찔러보면 그만입니다.
어째서 사람을 고구마로 볼 줄 아는 것이 사랑이 되었다는 말일까요? 자신이 고구마이기 때문입니다. 다 자기 자신처럼 사람을 보게 되어있습니다. 호랑이인 사람은 다른 사람들도 호랑이로 보고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자기가 고구마인 사람은 다른 사람도 고구마로 봅니다. 그러면 두려움이 없습니다. 고구마의 일은 먹히는 데 있지 남을 먹는데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호랑이가 아니라 고구마가 됩니다. 호랑이는 아무리 나에게 잘해 주어도 왠지 부담스럽습니다. 하지만 잘 익은 군고구마는 누구나 좋아합니다. 자신을 죽였기 때문에 나에게 영양분을 주고 맛도 좋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되게 하시기 위해 쓰시는 방법은 당신처럼 우리도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서 생명의 양식이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랑하려고 하지 맙시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군고구마처럼 사랑이 됩시다. 모기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체는 그 자체가 사랑입니다.

-조재형신부-
세종대왕이 창제한 ‘훈민정음’에 대한 강의를 유튜브를 통해서 보았습니다. 세종대왕은 당시에 사용하던 한문을 ‘동국정운’을 통해서 한글로 발음을 적도록 했습니다. 글자는 지역에 따라서, 사람에 따라서 발음이 다르게 됩니다. 우리는 지역에 따라서 다른 발음을 사투리라고 합니다. 사람에 따라서 발음이 다르게 되는데 중국 사람은 느린 기질이 있어서 탁한 소리, 된 소리를 발음한다고 합니다. 반면에 한국 사람은 빠른 기질이 있어서 고운 소리, 약한 소리를 발음하다고 합니다. 동국정운은 지역과 사람에 따라 달랐던 한자의 발음을 통일한 것이라고 합니다. 동국정운의 체계에 따라서 발음하면 중국의 발음과 비슷하다고 합니다. 동국정운은 당시에 중국의 표준 발음 체계였던 ‘홍무정운’과 유사했기 때문입니다. 홍무정운은 당시 북경에서 한문을 발음하던 체계를 표준으로 지역과 사람에 따라 달랐던 한문의 발음을 통일했던 발음 체계라고 합니다.
이태리어, 불어, 스페인어, 영어는 서로 배우기 쉽다고 합니다. 이는 뿌리가 되는 라틴어에서 유래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단어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까지 중국의 말과 한국의 말은 50%가 넘게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고 합니다. 다만 중국의 말과 한국의 말이 발음이 다르기 때문에 이해하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훈민정음의 글자와 동국정운의 발음체계를 충실하게 따르면 우리는 좀 더 쉽게 중국말을 이해하고, 배울 수 있다고 합니다. 50%의 단어를 같이 발음할 수 있다면 사투리를 배우는 정도의 수준으로 언어를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강의는 몇 가지 아쉬운 점을 말하였습니다. 하나는 연산군 10년에 조선은 한글의 사용을 탄압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양반들과 정부의 공식문서는 대부분 한문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갑오개혁이 일어나면서 한글을 국문으로 정했다고 합니다. 다른 하나는 잃어버린 소리입니다. 원래 세종대왕이 만든 글자는 28개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이 한국을 통치하면서 소리 하나가 없어졌고, 조선어 학회에서 한글을 새롭게 정립하면서 소리 3개가 없어졌다고 합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소리를 복원하면 영어 ‘R과 L'의 발음을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다고 합니다. 'V와 B'의 발음도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빌로니아로 유배를 갔을 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겪고 있는 고통과 고난의 이유를 성찰하였습니다. 성전에서 제사지내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바빌로니아의 군대가 강한 것도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하느님의 계명과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르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말씀을 정리하였습니다.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모세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주 나의 하느님께서 나에게 명령하신 대로 규정과 법규들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었다. 너희는 그것들을 잘 지키고 실천하여라. 그리하면 민족들이 너희의 지혜와 슬기를 보게 될 것이다.”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명령하신 규정과 법규를 충실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농부가 씨를 뿌린다고 결실을 맺는 것이 아닙니다. 농부는 밭에 거름을 주고, 잡초를 뽑아주어야 합니다. 가뭄에는 물을 주고, 장마에는 물길을 내 주어야 합니다. 한문으로 쌀은 ‘米’입니다. 이는 농부가 88번의 정성을 들여야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근대화와 산업화는 우리에게 풍요로운 삶을 주었지만 그 과정에서 아름다운 우리의 전통과 미덕이 사라지기도 했습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문득 생각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없을까?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탑을 쌓아가면서 나눔, 희생, 봉사를 잊고 사는 것은 아닐까?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으로 불릴 것이다
-이영근신부-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것으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이는 복음을 예표하고 있던 구약의 율법이, 이제 복음 안에서 완성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서에 쓰인 당신에 관한 말씀들이 일어나도록 하심으로써, 율법과 예언서를 완성하셨습니다. 곧 온몸으로 율법과 예언을 실행하셨습니다. 진정,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요한 19,30)고 말씀하심으로써, 이 모든 것이 이루어졌음을 분명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계명을 실행하는 이의 복됨을 말씀하십니다.
“이 계명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으로 불릴 것이다.”(마태 5,19)
이는 ‘먼저’ 계명을 ‘지키는 이’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알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또 안 것을 말로만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스스로 지킴으로써 계명을 실행하는 이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그렇게 실행으로 가르치는 이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 그레고리우스는 말한 바 있습니다.
“설교자에게는 법이 하나 있다. 설교하는 바를 실천해야 한다는 법이다”
유명한 설교가였던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도 말합니다.
“가르치는 바를 행동으로 파괴시킨다면,
사람이 법을 안다고 자랑하는 것이 쓸모없는 일이다”
그렇습니다. 율법은 지켜질 때라야, 비로소 그 행위 안에서 실현됩니다. 곧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 안에서 실현됩니다. 그러니 주님의 계명을 안 이는 먼저 계명을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실행하는 이라야 진정 가르치는 이가 됩니다. 그러나 “스스로” 자신의 의지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스로” 한다는 것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이가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계명을 주신 분을 사랑하는 일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사랑이 율법을 완성합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편지에서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됩니다.”(1요한 2,5)
그래서 그는 <복음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하오니, 주님!
제가 말씀의 계명을 스스로 지킴으로 당신을 사랑하는 이가 되게 하소서.
말이 아니라 행실로 사랑하게 하소서!
행실로 사랑하되,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비록 작은 것 하나에라도 깊은 사랑을 담고 행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주님!
말씀을 이루소서.
제 안에 뿌리신 말씀을 지키게 하소서.
제 삶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복된 땅이 되게 하시고, 크신 사랑을 이루소서.
이루어지지 못한 채 폐지되지 않게 하시고, 완성을 이루소서. 아멘.

스스로 지키고 가르치는 사람
-반영억신부-
시골 본당 신부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자동차를 운전하고 성당으로 가고 있는데 앞에 트럭이 길을 막고 있었습니다. 왕복 1차선 길에서 얼마나 천천히 가던지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추월해서는 안 되는 곳이지만 속도를 내어 추월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경찰에 잡히고 말았습니다. 면허증을 주면서 “죄송합니다.”하였더니 그분이 “신부님이시네요! 바쁘신가 보죠?” 하였습니다. 속이 상해서 “제가 잘못하였으니 딱지나 끊으시지요!” 말했더니 “그냥 가십시오. 다음부터는 천천히 다니십시오.” 하며 친절하게 보내주었습니다.
다음날이었습니다. 지역 관할 경찰간부 소양교육에 제가 강사로 초빙된 날입니다. 경찰서장을 비롯하여 70여명이 모여 있었습니다. 저는 전날의 일을 서두로 꺼냈습니다. “제가 잘못을 범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냥 보내주셔서 부끄러움이 더 컸습니다. 정말 좋은 말을 하기는 쉽지만 말 한대로 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앞으로 제가 잘못을 범하거든 앞으로는 꼭 벌점을 주십시오!” 한바탕 웃고 나서야 강의를 할 수 있었습니다.
가르치는 대로 행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근본정신을 사랑으로 요약하셨습니다. 율법의 완성은 계명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데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계명 준수만으로는 율법이 완성될 수 없습니다. 교통법규를 지키는 것도 법이니까 지킨다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안전과 공공의 유익을 위해서 그리고 나의 생명을 지키는 차원에서 지킨다면 그것은 큰 사랑의 행위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에 더 신경을 쓰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지만 사소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부터 챙기는 모범을 보여야겠습니다. 어떤 모임을 가보면 과속을 한 것이나 음주운전을 한 것을 자랑삼아 얘기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5,19).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과연 언행일치의 삶을 살고 있는가? 지금 마음을 어디에 두고 사는가를 점검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 결정한 것은 미루지 말고 그분의 뜻대로 실천하시고 가장 사소한 것이 가장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구약성경의 말씀을 이루려고 오셨다'는 뜻입니다. 규정에 담긴 정신과 의미, 가르침은 세월의 흐름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현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율법의 완성자이십니다.
따라서 무슨 일을 하든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하십시오”(에페6,6). 여러분은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그리하여 율법을 완성하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율법의 완성
-송영진신부-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7-19).”
‘율법의 완성’에 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탐내서는 안 된다.’는 계명과
그 밖의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이 한마디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됩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8-10).”
여기서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라는 말은,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했습니다.”
라는 뜻입니다(공동번역성서).
십계명의 후반부, 제4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 라는 계명으로 요약됩니다.
<십계명의 전반부, 제1계명부터 제3계명까지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 라는 계명으로 요약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계명들은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 라는 ‘황금률’로 요약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신 분이기 때문에
사랑 실천은 하느님을 ‘아는’ 일입니다(1요한 4,8).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하느님과 일치를 이룬다는 뜻이고,
또 하느님을 닮는다는 뜻이기도 하고, 하느님의 선을 실현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결국 사랑은 ‘선의 실현’이고, 율법 실천의 완성입니다.
그렇지만 무턱대고 아무렇게나 사랑 실천만 하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완전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4-48).”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인데,
그것은 죄인들이나 하는 짓, 즉 죄를 짓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원수 같은 사람들도 사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방법이고,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입니다.
(사랑을 완성하는 방법입니다.)
여기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인간들에게 주시는 사랑과 같은
사랑을 실천해야 사랑이 완성된다.”로 해석됩니다.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 또는 사랑을 완성하는 방법에는, 원수 같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 외에도 ‘가장 작은 이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 있습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자기하고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게만 사랑을 주는 것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는 것’과 같은 일이고, 그래서 그것은 사랑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일입니다.
자기보다 더 작은 이들을 피하지 않고 형제로 대하면서 똑같은 사랑을 주어야
비로소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됩니다.
(사랑은 같아지는 것입니다.
나보다 낮은 쪽에 있는 사람에게로 내가 내려가든지,
아니면 그를 내가 있는 쪽으로 높여 주든지 간에 그와 내가 같아져야 하고,
동등한 위치에서 형제애를 실천해야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됩니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기만 하는 교만을 버리지 않는 상태에서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위선입니다.)
‘완전한 사랑’, 또는 ‘사랑의 완성’에 대해서 요한 1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되었다는 것은,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분처럼
살고 있기에 우리가 심판 날에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서 드러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1요한 4,17-18).”
사랑 없는 율법 실천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고,
그런 것으로는 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불완전하고 위선적인 사랑 실천은 사실상 죄를 짓는 일이고,
자기 죄를 점점 더 크게 키우는 일이 될 뿐입니다.)
그래서 심판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완전한 사랑을 실천한 사람은,
심판 날을 두려운 날이 아니라 기쁜 날로 맞이하게 됩니다.
(그날이 되면, 어떤 사람은 무서워하는 모습으로 심판대로 끌려갈 것이고,
어떤 사람은 기뻐하면서 주님을 향해서 달려갈 것입니다.
그날 어떤 모습이 될지는 ‘바로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심판을 받기 전에 이미 우리가 스스로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뒤에 베드로 사도에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세 번이나 물으셨습니다(요한 21,15-17).
우리는 그 일이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일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이미 용서하셨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도 그 일에 대해서 곧바로 회개했습니다.
따라서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예수님께서 물으신 일은,
“사랑은 회개의 완성이며, 보속의 완성이다.” 라는 가르침으로 해석됩니다.
(회개도 보속도 사랑 없이는 완전하지 않고, 완성되지도 않습니다.)

복음: 마태 5,17-19: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남에게도 지키도록 가르쳐라
-조욱현신부-
예수님은 율법을 없애러 오지 아니하고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식사의 신비를 당신의 수난으로 완성하셨을 때 율법을 완성하셨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사람들이 건네준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 하심으로써 당신에 관해 쓰인 율법과 예언서의 말씀이 모두 이루어졌다고 분명히 보여주셨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의 파스카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기 때문입니다.”(1코린 5,7)라고 한다.
그러므로 거룩한 계명들은 어느 것 하나도 폐지해서도 고쳐서도 안 된다. 모든 것을 그대로 보존하며 잘 가르쳐 하늘나라의 영광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인간적으로 작고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하찮은 것이 아니라, 필요하게 여기신다. 주님께서는 그 계명들을 모두 가르치셨고 또 지키셨기 때문이다. 작은 것들도 하늘나라라는 위대한 미래를 가리킨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17절) 율법과 예언서는 둘 다 유효하다. 이 책들을 보면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들과 살아가는 일에 관한 법이 담겨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를 둘 다 완성하셨다.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갈 때, 그 율법을 완성하게 될 것이다. 말씀을 실천하며 우리는 주님의 계명을 완성해 갈 것이다.
우리에게는 주 하느님께서 만드실 새 하늘과 새 땅이 약속되어 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되면, 그에 따라 옛것은 사라질 것이다.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18절) 라는 말씀은 율법에서 가장 작다고 여겨지는 것조차도 영적 상징으로 가득 차 있으며, 이 모든 것이 복음서에 요약되어 있음을 알려 주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19절)는 곧바로 지옥과 벌을 떠 올려야 한다. 이 계명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마지막 날에 가장 작은 자, 내쳐진 자요, 말째가 되어 벌을 받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제쳐 놓는 이는 누구나 당신과 맞서는 자로 여겨 옆으로 제쳐 놓으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업신여김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지금 중요한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다. 부활을 향한 여정을 계속하고 있다. 이것이 단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행사로만 끝난다면, 우리가 맞는 부활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 부활은 우리 자신의 새로운 탄생을 촉구하고 있으며, 또한 영광스러운 나 자신의 하느님 안의 변화를 요청하고 있다. 여기에 우리가 부활을 축하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제 하느님 사랑의 계명을 통하여 우리 자신이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올바로 실천하여야 할 것이다.

지키고 가르치는 이는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 19)
-한상우신부-
하느님
사랑은
언제나
새롭다.
하느님을
받아들이려는
맑은 마음이
중요하다.
우리의 죄보다
더 큰 것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다.
삶의
길잡이가
되는 율법은
하느님 은총의
시작이다.
십자가의
사랑은
우리를
준비시키는
율법의
완성이다.
율법을 통해
죄의 본질을
다시금 절실히
깨닫게된다.
배신과 배반
원망과
어리석음의
우리를 다시
만나게한다.
율법을
완성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율법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시작과 끝은
언제나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이다.
참된 사랑은
우리의
어리석음을
치유한다.
참된 사랑은
율법 조항에
매이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의 법은
우리의 마음을
사랑으로
이끌어갑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사랑으로 더욱
깊어집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분명 이웃을
자기 몸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일 것이다.
우리의
이기심을
치유하는
사랑의 완성이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가 사랑을
지키고
가르치고
스스로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삶을 완성하는
십자가의
사랑으로
율법도 은총이
되었다.
이 사순시기는
사랑을 통해
율법을
완성하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은총의 시간이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죄를 뛰어넘는
가장 큰 은총임을
믿는다.
사랑이
은총이고
사랑이
모든 것의
완성이다.

-오상선신부-
제1독서에서는 율법을 지키도록 이스라엘 백성을 독려하는 모세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율법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이고 자랑이며 자부심이지요. 전능하신 창조주 하느님이 선택하신 백성이라는 선민사상에 더하여, 그 하느님의 정신이 깃든 경전을 소유한 민족이라는 우월감이 생생히 드러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자기 민족에게 그토록 중요하고 소중한 율법이 예수님의 행보 안에서 경시되고 훼손된다고 여기는 듯합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의 근본정신을 몸소 살고 계심에도, 율법의 문자에 집착한 그들이 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또 질투하기 때문에 생긴 오해와 왜곡이지요.
모든 율법과 예언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인류를 위해 이루실 희생 제사는 사랑의 극치이고 완성이지요.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사랑에 더하여 당신을 박해하고 죽이는 이들을 위해서까지 목숨을 바치는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것이니까요.
그들의 경계심을 모르시지 않는 예수님께서 이제는 율법이 완성의 시기에 이르렀음을 암시하십니다.
얼핏 그들을 안심시키는 말씀으로 들리지만, 좀 더 머물러 보면 그 안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립니다.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당연히 율법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이루어진 뒤에는 더 이상 율법이 필요하지 않은 때가 올 것이라는 의미기도 하니까요.
예레미야 예언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를 새 계약의 때로 묘사합니다. 남녀노소 모두가 주님을 알고 사랑하며 섬기는 그때에는 주님의 뜻과 가르침이 모든 존재와 삶 안에서 구현되어 누가 누구를 가르치거나 고발할 일이 없을 겁니다. 그때는 더 이상 문자에 집착하거나 율법서를 뒤적일 필요가 없는 때입니다. 그때에는 주님께서 인간의 가슴과 마음에 당신의 법을 새겨 주실 것이고, 인간은 자신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순히 살아갈 테니까요.
하지만 그전까지는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과 예수님께서 친히 보여 주신 계명의 완성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당신 피로 이루신 새 계약의 백성으로서, 예수님처럼 율법의 문자주의를 뛰어넘는 사랑의 실천가로 초대되었습니다.

열심히가 아니라 잘
-김찬선신부-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율법이나 예언서를 폐지하러 당신이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 모양입니다.
당대 율법과 예언서의 최고 권위자들을 사정없이 나무라시니
보통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지도자들도 율법과 예언서 자체를 부정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생각은 다릅니다.
율법과 예언서를 부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잘못된 실천을 부정하시는 것이고
당신의 완전한 실천으로 율법과 예언서를 완성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당시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율법과 예언서를 잘 지켰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율법과 예언서를 자기 나름으로 열심히 실천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열심히 하는 것과 잘하는 것은 다른 것 같습니다.
노를 열심히 젓지만 방향이 잘못되면
열심히 노를 저어 간 것이 잘한 것이 아니지요.
돈을 열심히 벌지만 사랑을 위해서는 한 푼도 쓰지 않는다면
열심히 돈을 버는 것이 잘한 것이 아니고요.
율법과 예언서의 준수도 딱 그러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얘기하듯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열성적인 율법과 예언서의 실천도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러니 사랑으로만 의미가 있습니다.
사랑에 의한, 사랑을 위한 율법과 예언서의 실천이라야 합니다.
하느님 사랑 때문에 하느님의 율법을 실천하고
이웃 사랑 때문에 예언서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때 율법과 예언서는 완성됩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가장 작은 계명 중에 하나라도 스스로 어기거나, 어기도록 남을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다. (마태 5,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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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 시대에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이유는 율법대로 살려고 노력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을 위선자라고 꾸짖으십니다(마태 23,1-36 참조).
율법에 적힌 규정들을 정확히 지킬 뿐 그들의 마음과 생각에는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최종훈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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