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12일 사순 제3주간 금요일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마르코 12,28ㄱㄷ-34 )
You shall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with all your soul,
with all your mind,
and with all your strength.
The second is this:
You shall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There is no other commandment greater than thes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최종훈신부-
사랑이 무엇일까요?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일까요? 이 질문처럼 정답을 알 수 없는 질문도 없을 것입니다. 또한 이 질문처럼 모든 대답이 정답인 질문도 없을 것입니다. 각자 가진 사랑에 대한 정의와 방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사랑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사랑법은 목숨을 다하는 사랑법입니다. 희생하는 사랑법입니다. 자신을 희생하면서도 모든 것을 내어놓고 싶은 사랑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온전히 모든 것을 내어놓을 수 없습니다. 때로는 어려움과 걱정 때문에, 지켜야 하고 함께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그렇게 모든 것을 다 내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내어놓고 희생하는 사랑법이란 맡기고 수용하는 사랑법일 것입니다. 없음의 두려움을, 빼앗김의 아픔을 바라보지 않고 하느님께 내어놓은 것을 다시 희망과 믿음으로 채워 나가는 사랑법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사랑법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끔 자신을 어떻게 사랑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웃을 사랑하면서도 왜곡된 방식으로 사랑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랑법만 옳다며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사랑법만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너를 사랑하는데 그 사랑을 몰라준다며 서운해하기도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려면 먼저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그 방법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사랑법이 옳은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방법만이 옳다는 교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사랑하려면 상대의 사랑법을 알고 그 사랑법으로 표현하며 다가가야 합니다. 더 많이 사랑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독일의 문호 괴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모두 무언가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무언가가 되려고 노력하지는 않는다.”
어렸을 때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합니다. 하지 말라는 것을 많이 듣는 어린이의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되고 싶다고 해서 곧바로 어른이 되지 않습니다. 괴테의 말처럼 되고 싶은 것을 위한 노력이 있어야만 합니다. 학교에 다니며 열심히 공부해야 하고, 어른으로서 해야 할 일을 배워 나가야 합니다. 무엇보다 책임 있는 행동들을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공부도 곧바로 대학교에 들어가 어려운 학문을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의 과정을 밟아야 전문 학문을 배워 익힐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노력 없이 저절로 되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지금의 상황에서 자신이 할 노력을 찾고 또 행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길을 가는 것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을 진정으로 바란다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을 실천하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런 노력을 통해 자신을 성장시키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은 듯합니다.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첫째로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라고 하시고, 둘째로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라고 하십니다. 이 둘은 서로 다른 것 같지만, 사실은 깊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를 모른 척하지 않습니다. 또 돈을 자기 지체보다 더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둘을 구분한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예수님께서는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 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조그만큼의 갈라짐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쉽지 않은 길입니다. 그래서 율법 학자가 슬기롭게 대답했지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아직도 떨어져 있다는 것이지요.
하느님을 사랑하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계속된 노력으로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냥 입으로만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이웃 사랑을 계속 실천하면서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초등학생 3학년 때 부끄러운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복사를 서고 있었는데 미사 시작과 동시에 소변이 마려운 것입니다. 복사를 선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미사 중간에 화장실에 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요. 그래서 꾹 참고 있었지만, 그날따라 강론도 참 길었습니다. 결국, 참지 못하고 미사 중간에 바지에 실례를 하고 말았습니다. 너무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도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 같이 복사했던 친구와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옛날이야기를 하면서 추억을 떠올리던 중에, 제가 복사를 서다가 실례를 했던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의 사고(?)는 친구들 사이에서 큰 놀림감이었거든요. 그래서 모든 친구가 그때의 일을 다 기억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내 실패나 아픔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기억할 것이 많습니까? 자기 일에 집중하느라 남의 아픔을 챙겨가면서 기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당당하게 살 수 있습니다.

죽을 때 후회하지 않으려면 '사랑을 꿈으로 삼으라'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우리가 무엇을 삶의 첫째 자리에 놓고 살아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바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내가 이것을 삶의 첫째 목표로 삼고 살고 있다면 그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우리 인생 목표입니다. 잘 살고 지옥 간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생을 마감한 죽기 직전인 이들이 가장 후회하는 것들을 우리가 살펴보면 이생에서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야 할지 답이 나옵니다. 바로 ‘사랑’을 가장 중요한 꿈으로 삼고 사는 것입니다.
35년생 이근후 정신과 박사가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에게 “다시 태어나면 어떻게 살고 싶은가?”에 대한 오픈 테스트 설문 조사를 상위 세 가지로 종합한 내용이 있습니다.
첫째는 ‘내 맘대로 살고 싶다.’입니다.
죽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이 자유롭지 못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에게, 자라면서는 친구들에게, 더 자라서는 회사에, 그다음엔 가장과 자녀의 눈치를 보며 살았지, 정작 자신의 인생은 산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 맘대로 사는 것은 무엇일까요? 내 ‘꿈’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이근후 박사가 아내와 함께 브루나이란 나라에 머물다 온 적이 있다고 합니다. 워낙 수입은 많고 인구가 적고 복지가 잘 된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 나라 대통령이 가장 바라는 것이 ‘젊은이들이 꿈을 갖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모두가 부자로 살 수 있어서 공짜로 유학을 보내준다고 해도 젊은이들이 공부하러 나가지를 않는다고 합니다. 조금 과장된 말이기는 하겠으나 아무도 땀을 흘리려 하지 않기 때문에 나라에 축구팀도 없다고 합니다.
‘생각하지 않고 살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며 사는 것 같지만 그냥 살아가는 것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요셉이 ‘꿈’을 가지고 살았던 것처럼 꿈이 없는 삶은 반드시 후회를 남기게 됩니다.
이근후 박사는 현재 87세이신데, 작년부터 새로운 꿈을 찾았다고 하며 유튜버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지금 꿈이 고파요.”라고 말씀하십니다.
둘째는 ‘인간관계에서 맺힌 것을 풀고 싶다.’라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나쁜 감정을 가진 것을 풀고 싶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미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가 갑자기 죽게 된다면 큰일입니다. 죽기 직전에는 주님 앞에 그런 마음은 절대 가지고 가서는 안 됨을 직감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이근후 박사가 당시 수련의 생활을 할 때는 월급이 없었다고 합니다. 참으로 가난하게 살아야 했습니다. 자신을 가르쳐 주는 의사에게 명절에 선물이라도 해야 했는데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천호동 근방에 과수원이 많았는데, 주인에게 부탁하여 사과를 몇 개 따서 대나무로 만든 상자에 넣어서 들고 갔습니다. 그렇게 인사를 잘 마치고 나왔습니다.
한 달 뒤에 다시 인사하러 갈 일이 있어서 그 집을 다시 찾았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선물한 사과가 그대로 있는 것이었습니다. 사모님이 이근후 박사가 가져왔던 것임을 잊어버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즘에도 촌스럽게 이런 선물을 가져오는 사람이 있어. 아휴!”
아주 오랫동안 가슴에 맺혀서 그 집에 선물을 들고 간 적이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맺혀있는 이런 것들을 풀지 못하고 죽어가는 것이 가장 한이 된다는 뜻입니다.
셋째는 ‘나누고 살고 싶다.’입니다. 나누지 못한 삶을 가장 후회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본래 이기적이기 때문에 나누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죽기 전에는 나누지 못한 것이 그렇게 후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근후 박사 말에 의하면 대부분 사람은 자신은 신세 진 것도 없고 신세 질 것도 없이 산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이 당연한 자신의 노력 덕분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보니 숨을 쉴 수 있는 것도, 음식을 씹고 맛을 볼 수 있는 것도, 버스를 내 돈 내고라도 탈 수 있는 것도 다 감사한 일뿐이라고 말합니다. 너무 많은 신세를 지고 살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젊었을 때는 감사할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기에 내어놓아야 할 마음도 갖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어차피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데 나누며 살지 못한 것에 후회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박사님이 지금 연세에도 책을 쓰시고 유튜브를 시작하여 당신의 지혜를 나누고 싶어 하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출처: ‘삶의 마지막에 후회하는 3가지’(35년생 이근후 정신과 박사), 유튜브 채널, ‘신사임당’]
첫째는 나에게 자유가 있는데 쓰지 못했다는 후회이고, 둘째는 그 자유를 용서하는 데 사용하지 못했다는 말이며, 셋째는 더 나누며 사랑할 수 있었는데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율법학자처럼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라는 말을 들으려면 이런 분들의 가르침을 귀여겨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후회를 한 칼에 날려버릴 비책이 있습니다. ‘사랑을 꿈으로 삼고 사는 것’입니다. 꿈을 가져야 나의 자유가 발휘됩니다. 그리고 그 꿈이 용서와 나눔일 때 이웃 사랑이 완성됩니다. 사랑이 꿈이 아닌 인생은 하늘 나라와 먼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일본 방송에서 어떤 76세 할아버지가 나왔습니다. 방송의 내용은 젊었을 때의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의 촬영입니다. 히데오 할아버지는 24세의 자신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어이, 히데오! 76살이 된 너다. 너는 직장에서 알게 된 귀여운 하나 씨와 사귀게 된다. 별로 인기가 없던 너는 ‘이런 나 따위가!’라며 결혼을 고민하지만, 마음을 결심하면 바로 실행해라. 왜냐하면, 얼굴이 작고 귀여운 하나 씨는 2년 뒤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니까. 너는 엄청나게 후회하고 슬퍼하고 계속 잊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76살인 지금도 독신으로 산다. 24살일 때의 나, 그녀에게 이 말을 좀 전해 줘. 나의 76년 인생 중에서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 하나 씨라고!”
[출처: ‘사람들이 죽기 전에 가장 후회했던 것들 3가지’, 유튜브 채널, ‘인생 수업’]
인생을 후회하지 맙시다. 사랑을 꿈으로 삼고 사랑만을 생각하며 삽시다. 신앙인이라면 그것만을 주님께 청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주님께 청하는 기도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가 하느님 자녀의 기도인 것은 이 때문입니다.
하지만 만약 내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삶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놓지 않았다면 분명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다른 생각을 할 것입니다. 다른 것에 관심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내가 관심 있는 것을 더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항상 주님의 기도를 깊이 묵상하며 바치고 하루를 산다면 사랑이 목표이고 꿈인 후회 없는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리차드 도킨스의 ‘신 만들어진 위험’과 크리스토퍼 라이언의 ‘문명의 역습’을 읽고 있습니다. 두 책은 상반된 주장을 이야기합니다. ‘신 만들어진 위험’은 현대의 과학이론으로 종교와 신의 허구성을 드러내려고 시도합니다. 과거의 신화, 종교, 신은 허구라고 주장합니다. 초자연적인 존재와 표징은 없다고 단언합니다. 현대의 과학, 기술, 문명이 가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우주와 자연은 일정한 법칙과 진화에 의해서 여기까지 왔다고 이야기합니다. ‘문명의 역습’은 현대의 문명이 과거의 문명보다 발전하였고, 진보하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현대의 과학, 기술, 문명은 풍요롭지만 다른 생명의 희생을 강요한다고 주장합니다. 자연과 환경을 파괴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과거의 수렵 문화가 훨씬 인간다운 삶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계급도 없었고, 노예도 없었고, 갈등도 적었고, 싸움도 없었고, 나눔과 연대의 삶이었다고 합니다. 남자와 여자의 차별도 적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수렵 채집 생활을 하는 공동체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합니다.
2020년 세계의 종교 인구를 보면 기독교, 이슬람, 힌두교, 불교 신자가 50억 명 정도 됩니다. 기타 종교 인구가 10억 명 정도 됩니다. 무신론과 불가지론으로 종교가 없는 사람은 10억 명 정도 됩니다. 종교를 가진 사람은 86% 정도 되고, 종교가 없는 사람은 14% 정도 됩니다. 과학이 발전하였고, 진화론이 생명의 신비를 푸는 열쇠라고 생각하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사람은 종교, 신화, 신에 의지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축구와 야구는 게임의 규칙이 다릅니다. 축구게임에 야구의 규칙을 적용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야구 게임에 축구의 규칙을 적용하지 않습니다. 축구와 야구는 게임의 규칙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축구는 축구인의 시각에서 봐야 합니다. 야구 역시 야구인의 관점에서 봐야 합니다. 과학과 종교는 축구와 야구만큼이나 차이가 있습니다. 과학의 방법론과 종교의 방법론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축구와 야구가 조화롭게 공존하듯이, 과학과 종교 역시 조화롭게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윤리가 없는 과학은 사람과 자연을 파괴하는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근대의 역사를 통해서 보았습니다. 지금도 인류가 만든 무기는 모든 인류를 죽일 수 있을 만큼 파괴력이 있습니다. 이성이 없는 종교는 광신과 광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종교는 합리적인 이성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벌어진 잘못이 있었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던 잘못에 대해서 인류와 역사 앞에 용서를 구하였습니다. 과학은 앞으로도 분석과 관찰을 통해서 새로운 규칙과 법칙을 찾거나 만들어 낼 것입니다. 이 또한 인류의 발전을 위해서 유용한 학문입니다. 종교는 과학으로 채워지지 않는 인간의 번뇌와 고통을 위로하고, 인간의 품격을 한 차원 높이는 길을 갈 것입니다. 이 또한 인류가 쌓아온 삶의 지혜입니다. 과학으로 멋진 도시를 만들 수 있습니다. 종교는 멋진 도시에 사랑의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우주에 있는 모든 것들을 구성하는 원자들을 연구하였습니다. 이 원자들은 모여서 분자가 되고, 분자들은 또 모여서 우리 주변의 모든 것들이 됩니다. 어떤 것들은 생명체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변화하고, 우리 눈에는 사라지는 것 같지만 우리의 몸을 구성했던 모든 분자, 원자들은 없어지지 않고, 또 다른 형태를 이루게 된다고 합니다. 현재까지 밝혀진 100여개의 원자들이 모여서 형태를 이루고, 생명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가능하게 하는 분을 우리는 하느님이라고 합니다. 불교는 살아 있는 생명체는 그 행위에 따라서 또 다른 생명체로 태어난다고 말을 합니다. 그것을 ‘윤회’라고 합니다. 교회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이야기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는 삶을 이야기 합니다. ‘온 마음과 온 정성과 온 열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유한한 몸은 변화하고, 생명의 불꽃은 꺼지는 것 같아 보이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준다고 믿습니다.
형제를 사랑하십니까?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고 있습니까?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이미 하느님나라를 살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고 있습니다.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가고,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립니다.”

그리스도교에서 강조하는 사랑은 보편적이고 광범위한 것이며 무제한적입니다!
-양승국신부-
예수님 시대 율법학자라고 해서 다 위선자들, 날나리들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밤에 몰래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라든지, 바오로 사도의 스승이자 온 백성들로부터 존경받던 가말리엘 같은 율법학자들도 있었습니다.
신앙심이 깊고 열린 마음을 지닌 율법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서 질문을 던집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을 무엇입니까?”(마르코 복음 12장 28절)
당시 유다 사회 안에서 율법 계명은 총 613개였습니다. 그 중에 248개의 계명은 적극적인 계명이었고, 나머지 365개는 소극적인 계명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어떤 것은 절대적, 강제적인 것, 무거운 계명이었는가 하면 어떤 것은 권유적이고 경미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율법학자들이 목숨처럼 중요시 여겼으며 앞자리에 두고 싶었던 계명은 안식일과 관련된 계명이나 할례에 관한 계명, 정결례와 관련된 계명, 단식에 관한 계명, 제례와 관련된 계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토록 목숨 걸고 강조했고 이를 어겼을 경우 가차 없는 잣대를 들이대곤 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 질문을 던진 율법학자는 613개의 율법 가운데 가장 중요도가 높은 계명, 그래서 우선적으로 강조해야 하는 계명, 즉 가치나 등급이 가장 높은 계명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묻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당연히 예수님께서 안식일 계명이나 할례나 정결례와 관련된 계명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웬걸 예수님께서는 신명기 6장 4절과 레위기 19장 18절을 복합적으로 인용하며 ‘사랑의 계명’을 제1계명으로 선포하십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코 복음 12장 29~30절)
하느님을 사랑하는데 그냥 말로만, 입술로만, 기도문 만으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함에 있어 적당히, 부분적으로가 아니라 혼신의 힘을 다해, 모든 에너지를 다 투자해서 성심성의껏 사랑하라는 당부 말씀입니다.
사랑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다음 말씀으로 마무리됩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코 복음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이웃을 향한 사랑도 종래 유다인들이 그려왔던 사랑과는 차별화됩니다. 유다인들에게 있어 이웃은 ‘절친’, 나에게 호의적인 사람들을 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웃의 개념은 보다 포괄적이고 광범위합니다.
물론 나에게 호의적으로 대하는 사람들도 포함되겠습니다. 그러나 동심원은 점점 확대 됩니다. 적대 관계에 있던 사마리아인을 비롯한 이방인들, 꼴 보기 싫은 세리와 죄인들, 생활이 문란했던 사람들, 더 나아가 나를 공격하는 적들, 원수들까지 이웃의 범위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얼마나 보편적이고 광범위한 것이며 무제한적인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첫 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
-이영근신부-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 신앙의 원천을 밝혀줍니다.
곧 우리 신앙의 근거가 되는 그 바탕이 무엇인가를 말해줍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호세 14,10)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화답송>에서는 “내가 주님, 너희 하느님이다.”(시 81,11)라고 노래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마르 12,29)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행동의 원리로서의 계명을 말씀하기 전에, 먼저 ‘존재의 원리’를 말씀하십니다.
곧 행동규범으로 사랑을 말씀하시기에 앞서, 왜 사랑을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밝히십니다.
곧 하느님께서 ‘한 분이신 우리 주님’이라는 그분의 존재차원을 밝히십니다.
동시에, 이는 우리의 존재의 차원도 밝혀주십니다. 곧 우리가 ‘그분의 것, 그의 소유’라는 것을 밝혀줍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슬기롭게 대답하는 율법학자에게 “너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마르 12,34)고 할뿐 ‘하느님 나라에 들어와 있다’고는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아마도 율법학자에게 있어서 아직 사랑의 실천이 남아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는 아직 더 확장되어야 할 사랑의 계명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곧 <구약>의 ‘사랑의 계명’은 <신약>의 ‘사랑의 새 계명’으로 완성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구약>에서는 ‘이웃 사랑’을 동포 사랑으로 한정하면서(레위 19,18) 함께 사는 이방인들까지를 포함(레위 19,34)시키고 있다면, <신약>에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루가 10,30-37)에서 보여주듯이 무제약적, 무차별적인 이웃에 대한 사랑을 말하고 있으며, 나아가서 원수까지도(마태 5,44) 포함하는 ‘완전한 사랑’을 말합니다(마태 5,48).
또 <구약>에서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레위 19,18)하여 ‘이웃 사랑’의 시금석으로 ‘자신에 대한 사랑’을 제시하고 있는 반면에, <신약>에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3,34;15,12)하여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웃사랑의 시금석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근본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신명기>(6,4-5)의 ‘하느님 사랑’과 <레위기>(19,18)의 ‘이웃 사랑’을 한데 묶으시면서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을 요구하십니다.
곧 새로운 변혁, 새로운 틀의 패러다임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는 관점입니다.
아니, 애시 당초 ‘남’이란 없다는 관점입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이 있을 뿐! 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자매가 있을 뿐이라는 관점입니다.
우리가 ‘한 몸’이라는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야, 이웃도 내 몸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은 흔히 생각하는 남에게 베푸는 시혜나 자선이 아니라, 바로 ‘한 몸’으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같아집니다.
물론, 이 때 ‘한 몸’이란 ‘너의 몸이 내의 몸이고 나의 몸이 너의 몸’이라는 혼합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요한 바오로 2세 교종께서 [새 천년기](24항)에서 표현한 대로, “나의 일부”인 형제들이란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곧 ‘한 몸의 지체’로서, 나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나의 일부이기에, 나의 일부인 형제의 아픔이 바로 나 자신의 아픔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형제가 나의 일부이듯 하느님의 일부가 되고, 형제 사랑이 곧 하느님 사랑이 되고, 하느님 사랑이 곧 형제 사랑이 됩니다. 더 나아가서는 형제가 곧 하느님이 됩니다.
이처럼 ‘사랑의 이중계명’은 새로운 관점, 새로운 틀을 요구합니다.
곧 ‘남’인 이웃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의 전환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소명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1)
주님!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게 하소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가 되게 하소서.
사랑이 남에게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한 몸인 내 자신에 대한 사랑이 되게 하소서.
자신의 몸인 이웃을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열매 맺는 사랑
-반영억신부-
하느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기본이 되는 것은 믿는 사람은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계명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 그 계명에 근거하여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계명? 하면 십계명을 떠올립니다. 좀 더 요약하면, 사랑의 계명으로 말합니다. 과연 나에게 첫째가는 계명은 사랑인가요? 내가 무엇을 행하거나 판단할 때 하느님의 계명이 기준이 되고 있느냐에 따라 나의 신앙의 현주소가 드러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적대자들에게 지혜롭게 대답하시는 것을 보고 율법학자 한 사람이 와서 주님께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질문을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12,30).는 것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12,31). 는 이중계명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의도적으로 시험하였던 여러 부류의 종교지도자들과는 달리 악의가 전혀 없이 열린 마음으로 질문하고 그 계명에 대하여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 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보다 낫습니다”(마르12,32-33). 하며 동의를 표하는 율법학자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마르12,34). 하고 이르셨습니다. 예수님의 적대자들 중에는 이렇게 마음이 열린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고 하였지 아직 들어간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축구경기에서 골인을 한 것과 골인할 뻔한 것은 분명 다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자캐오 이야기(루카19,1-10)를 기억하시지요? 예수님께서 “오늘 이집에 구원이 내렸다.”고 하셨습니다. 율법학자에게 말씀하신 것과 다른 점이 무엇일까요? 율법학자는 학자답게 이론으로 알고 있었고, ‘훌륭하십니다. 과연 옳은 말씀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끝났지만 자캐오는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하며 즉시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그야말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2,17).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에 충실하여 하느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열매 맺는 삶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실천함으로써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이 이중계명의 사랑은 모세와 이스라엘백성에게 주어진 십계명의 핵심정신이고, 동시에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의 핵심정신이기도 합니다. 사실 예수님의 전 생애는 하느님 아버지와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리고 이웃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헌신으로 요약됩니다(손희송).
사랑은 사랑을 낳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한 그 사랑으로 사랑하여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더 많아진다면, 그리하여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만날 수 있다면 그것이 열매 맺는 삶입니다. 특별히 주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세례성사에로 인도되어 구원을 선물로 얻는다면 그보다 더 큰 열매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 많이 사랑하십시오.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1요한 3,18) 하십시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1요한4,12). 그러므로 실행함으로써 열매 맺는 사랑에 목말라 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머리로 알고 있는 것과 그 ‘앎’이 온몸 세포 하나하나에 배어 있는 것과는 분명 다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사랑
-송영진신부-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29-31).”
이 말씀은, 모든 계명들과 율법들의 근본정신은 ‘사랑’이라는
가르침입니다(마태 22,40).
(‘신앙생활의 근본정신은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계명들과 율법들을 아무리 잘 지킨다고 해도 사랑 없이 지키는 것이라면,
그것은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도 사랑 없이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1코린 13,1-3).
신앙생활은 사랑 안에서 사랑으로 하는 것, 즉 ‘사랑의 삶’입니다.
1) 예수님께서 사랑을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라는 말씀부터 하신 것은,
‘하느님만’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다른 것들을 하느님과 함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재물, 권력, 명예, 그 어떤 것도 하느님과 같은 자리를 차지할 수 없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만 사랑하는 사람’,
즉 하느님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2) 그런데 도대체 사랑이란 무엇인가?
성경에는 사랑하라는 계명과 사랑하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은 있지만,
‘사랑이란 무엇이다.’ 라고 정의를 내린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의 계명’을 통해서 사랑이 무엇인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계명’을 ‘사랑에 대한 정의’로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자신의 온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모두 다, 즉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기를 원하는 소망”이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습니다.
(이 소망은 완전한 일치를 이루어서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소망입니다.)
반대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기를 원하는 소망이 없다면,
즉 그냥 좋아하는 것뿐이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사랑은 ‘좋아하는 감정’과는 다른 것입니다.)
미신을 믿거나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은 미신의 대상이나 우상에게 자기의 소원을
간절하게 비는 일을 잘하기는 하지만 그 대상을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사랑 없는 신앙은 미신일 뿐입니다.
3)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실천되고,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 안에서 완성됩니다.
‘하느님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방법은,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일입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
이웃 사랑 실천 없는 하느님 사랑은 위선입니다.
4) 그러면, 이웃 사랑 실천만 잘하면
여러 가지 신심 행위나 기도나 전례는 필요 없는가?
그것은 아닙니다.
신앙인으로서 기본적으로 실행해야 할
예배, 기도, 전례, 신심 행위 등을 실행하지 않고 이웃 사랑 실천만 한다면,
그것은 무신론자들의 이웃 사랑 실천과 다르지 않게 됩니다.
(무신론자들의 이웃 사랑 실천도 분명히 선한 일이긴 한데,
우리는 믿음 없이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우리가 함부로 판단할 일은 아니고,
하느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입니다.)
첫째가는 계명에 관해서 예수님께 질문했던 율법학자는 예수님 말씀을 듣고 나서,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라고 말했고, 예수님께서는 그를 칭찬하셨는데(마르 12,33-34),
‘제물보다 낫다.’는 말이 ‘제물 바치는 일은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랑이 제물 바치는 일보다 더 중요하고, 먼저 실행해야 할 일이라는 뜻입니다.
신앙인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기도와 사랑이 하나로 일치되어 있는 사람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5) 사랑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7-18).”
사랑한다는 말을 아무리 많이 해도 실제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 없다면,
그 말은 거짓말이거나 ‘빈말’입니다.
사랑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아무리 설명을 잘해도,
그래서 여기저기 다니면서 사랑에 대해서 강의를 많이 한다고 해도,
실제로 실천하는 것이 없다면, 그 이론은 죽은 이론일 뿐입니다.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5-17).”
말로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천이 없으면 그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그처럼 사랑에 실천이 없으면 그 사랑도 죽은 것입니다.
‘죽은 믿음’은 ‘생명력 없는 믿음’이고, ‘생명을 주지 못하는 믿음’이기 때문에,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죽은 사랑’은 ‘생명력 없는 사랑’이고,
‘생명을 주지 못하는 사랑’이기 때문에,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나를 살리고, 우리를 살리는 힘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시는 일은 사랑입니다.
신앙인은 그 사랑의 힘 안에서, 그 사랑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힘을 다시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사람입니다.
만일에 나누지 않고 자기 혼자 가지고 있기만 한다면,
그 힘은 서서히 약해지다가 결국 사라지게 됩니다.

복음: 마르 12,28-34: 우리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니 그분을 사랑하라
-조욱현신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28절) 예수님께서는 모든 율법서와 예언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두 계명에 달려있다고 하신다. 이 사랑의 계명은 어떻게든 선을 행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랑이 없이는 선을 행할 수 없다. 모든 계명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말하고 있는데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이러한 질문을 한 것이다.
예수님은 신명 6,4를 인용하면서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29절) 라고 대답해 주신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주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이다. 이 하느님은 살아있는 자들의 하느님이시며 인간을 지배하는 분이 아니라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30절) 하신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31절)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과 연결되어 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를 모른 체하지 않고, 돈을 자기 몸보다 더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만물의 주님께서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해 자비롭게 행한 것을 바로 당신께 해드린 것으로 여기심을 알고 있다. 그리고는 열심히 그 선행을 실천한다.
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함께 하는 것이 아니면 완전하게 표현될 수 없다. 이웃을 떠나서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고, 하느님을 떠나서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온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확증은 바로 우리 가운데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꾸준히 일하고 그들을 끊임없이 돌보아 주는 일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고 당신 계명을 지키는 것 외에 아무것도 우리에게 요구하시지 않는다고 하신다.
한 분이신 하느님에 대한 친밀한 사랑을 알고 이웃 사랑이 자기 사랑처럼 진실해야 한다고 고백하며,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다고 말한 율법학자의 대답은 주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우리도 자비를 가로막는 판단은 하지도 말고 듣지도 않아야 한다. 자비는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기 때문이다. 사순절의 모든 삶은 바로 이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어야 한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34절) 이 말씀은 율법학자가 하느님의 나라에서 아직도 떨어져 있음을 암시하는 말씀이다. 율법학자는 성경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 말씀을, 그 자비를 구체적으로 실행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아직 멀리 있는 것이다. 인간은 사랑하면서 상대를 닮아간다고 한다. 부부의 모습이 닮은 것도 서로의 사랑이 그렇게 만드는 것일 것이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갈 것이다. 이것이 사순시기의 삶이다.

첫째는 이것이다.(마르 12, 29)
-한상우신부-
사랑이
있다.
첫째는
사랑이다.
있는
그대로의
하느님을
만나는 사랑의
새아침이다.
온 마음을
다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이다.
우리의
본분이란
첫째도
마지막도
온 마음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는 것이
참된
회개이며
사랑이다.
회개와 사랑은
끊어질 수 없다.
하느님을 위해
살아가는 삶이
사랑의 참된
길이다.
사랑의 최종
목적지는
언제나
하느님이시다.
이 사랑의
관계가
사랑의 삶으로
이어진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일깨워주신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사는 삶이다.
하느님 체험은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우리가
체험하는 것이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를
치유한다.
하느님
사랑 안에
이웃사랑이
있다.
사랑은
나눔이다.
나누지
않고서는
풍요로울 수
없다.
하느님
사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사랑의
자녀들이다.
모든 것 중의
첫째는
하느님을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다.
사람의 역사는
사랑의 역사이다.
사순시기는
우선적으로
우리의 사랑을
회개하는 것이다.
사랑이
하느님을
향할 때
사랑은
기쁨이 되고
기도가 된다.
사랑의
원천으로
이끄는
십자가에서
다시 사랑을
배우는 은총의
시간이다.
더 사랑한
주님이시다.
사랑이
스승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가 선명히 드러납니다.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29-31)
첫째 가는 계명을 묻는 율법 학자에게 예수님께서 답하십니다. 이는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고 골자입니다.
사람에게 주어진 이 모든 의무는 그분이 한 분이신 하느님이심에서 출발합니다. 누구도 그분과 관계성에서 벗어나서는 생겨날 수도 존재할 수도 없지요. 이 세상과 사람을 창조하신 분, 양육하시고 돌보시는 분, 행복하라고 가르치시고 축복하시는 분, 그분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고 목적이십니다.
그런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 우리가 끌어모아야 하는 것들, 즉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은 한 존재의 전부를 가리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생명을 덜어내어 사람을 지으셨고, 사람은 온 존재의 힘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이끌립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의 모상이 영혼 깊이 새겨져 있으니, 하느님처럼 사람도 사랑하는 일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배반한 이스라엘과 주님 사이에 다시 화해의 분위기가 흐릅니다.
"저희 손으로 만든 것을 보고, 다시는 '우리 하느님!'이라 말하지 않으렵니다."(호세 14,4)
이야말로 주님께서 바라시는 고백입니다. 하느님을 뒤로 하고 다른 우상을 기웃거리며 유일신 야훼 신앙을 훼손했던 이들이 주님 앞에 돌아와 다시는 헛된 것에 한눈 팔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그들의 마음을 고쳐 주고, 기꺼이 그들을 사랑해 주리라."(호세 14,5)
주님은 그동안의 상처입고 분노한 마음을 잊고, 속없이 백성을 반기십니다. 그분은 백성이 언제라도 돌아오기만 하면 그것으로 족하십니다. 그분 본성이 자비이시고, 그분 존재가 곧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내 백성이 내 말을 듣기만 한다면, 이스라엘이 내 길을 걷기만 한다면, 내 백성에게 나는 기름진 참밀을 먹이고, 바위틈의 석청으로 배부르게 하리라."(화답송)
우리가 당신과의 관계 안에 다시 들어가기만 한다면, 주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양식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기름진 참밀"은 주님의 몸인 지극히 거룩한 성체를 가리키고, "바위틈의 석청"은 바위이신 주님께서 머금고 계신, 꿀보다도 더 달콤한 생명의 말씀입니다.
말씀과 성체. 이 둘은 새 하늘 새 땅이 이루어지고,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모든 이가 천상 예수살렘에서 혼인잔치 음식으로 배부를 때까지 이 지상의 광야 순례길에서 우리를 지탱해 줄 소중한 양식이 될 것입니다.
"나는 네 사랑으로 족하다."고 주님께서 속삭이십니다. 나중에 성공해서 교회와 사회에 기여하겠다고, 이담에 부자 되면 많이 봉헌하겠다고 주님을 마냥 문 밖에 서서 기다리게 하면서 우상에게서 눈을 못 떼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보여 주시는 속내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존재의 온 힘을 다 끌어모아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사랑은 우리를 하느님과 닮게 하고, 이웃과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는 영약입니다. 사랑이신 분 안에서 사랑이 되어 가고 있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선물로 드립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마르 12,34)

말씀 나누기 - 사순 3주 금요일-사랑을 방해하는 것들 (ofmkorea.org)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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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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