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칸 영성

성 다미아노 십자가 앞에서 드리신 기도와 형제회에 보내신 편지의 기도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Margaret K 2021. 3. 4. 23:43




하느님께 이르는 여정의 기도
-성 다미아노 십자가 앞에서 드리신 기도와 형제회에 보내신 편지의 기도-

김찬선 레오나르도 형제


지극히 높으시고 영광스러운 하느님이시여.
내 마음의 어두움을 밝혀 주소서.

주여, 당신의 거룩하고 진실한 뜻을 실행하도록
올바른 신앙과 확고한 희망과 완전한 사랑을 주시며
지각과 인식을 주소서. 아멘. (성 다미아노 십자가 앞에서 드리신 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시며 의로우시고 자비하신 하느님, 당신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불쌍한 우리로 하여금 실천케 하시고,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을 항상 원하게 하시어, 내적으로 깨끗해지고 내적으로 빛을 받고 성령에 불타, 당신이 사랑하시는 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를 수 있게 하소서.
그리고 오로지 당신의 은총으로만 지존하신 당신께 이르게 하소서. 당신은 완전한 삼위이시고 순수한 일체를 이루시며, 그 안에서 생활하시고 다스리시며, 세세 대대로 전능하신 하느님의 영광을 받으시나이다. 아멘. (형제회에 보내신 편지)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아우구스띠노), “넋의 호흡”(아우구스띠노), “마음을 하느님께 드리는 것”(다마스코스의 요한), “마음을 들어올림”(니싸의 그레고리오), “하느님과의 우정 관계(아빌라의 데레사)라는 여러 정의가 있다.

프란치스코가 기도에 대한 정의를 내린 적은 없지만, 기도란 “우주적인 하느님과의 전 존재적인 대면”이라고 프란치스칸적인 기도의 정의를 넓게 내린다면 어떨까? 아니면 우주적인 하느님과의 전 존재적인 대면 중에 하느님께 대하여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라고 좀 더 구체적으로 정의를 내리면 어떨까? 왜냐하면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의 특징은 언제, 어디서나 , 어떤 식으로든 하느님을 자신 앞에 불러내고 자신은 전 존재로 그분 앞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프란치스코는 자신을 전 존재적으로 하느님 앞에 놓는다. 이에 대해 첼라노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실로 자기 자신의 전 존재를 여러 면으로 번제물이 되게 하기 위하여 그는 자기 눈앞에 어느 모로 보나 지극히 단순화된 자기의 모습을 놓곤 하였다. 그는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마음속으로 자주 관상을 하곤 하였고, 외적인 사물들을 마음속으로 그려봄으로써 자기의 영혼을 더 높은 경지로 끌어올리곤 하였다. 기도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스스로가 곧 기도였던 그가 주님께 빌어 얻고자 하였던 그 하나를 향하여 그는 그의 전 존재를 바쳐 자신의 모든 집중과 열정을 이끌어갔다.”(2첼 945).
하느님과 대면하여 때로는 입술로, 때로는 동작으로 그리고 때로는 마음으로 기도를 하였지만 근심과 안심, 슬픔과 기쁨, 마음의 어두움과 환희, 즐거움과 괴로움, - 괴로움도 육체적 괴로움까지-을 지닌 전 존재로서, 하느님 앞에 놓여 지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기를 그리고 발자취를 따르는 여정의 끝에는 마침내 하느님께 바쳐지기를 갈망하였다.
이제 이러한 갈망이 담긴 프란치스코의 두 개의 기도를 고찰하여 보자. 프란치스코가 직접 지은 것으로 우리에게 남아 있는 기도 중에 무언가를 청원하는 기도는 그의 회개 생활 시초에 지은 “ 성 다미아노 십자가 앞에서 드리신 기도”와 그의 회개 생활 거의 말년에 지은 “형제회에 보내신 편지의 기도” 두 개뿐이다. 나머지 그의 기도는 모두 찬미와 감사와 경배의 기도이다.

1. 두 기도의 시대적•상황적 배경

“성 다미아노 십자가 앞에서 드리신 기도”가 지어진 시점은 주님의 인도로 나환자와의 만남을 통하여 마음은 이미 세속을 떠났지만, 몸은 아직 세상에 머물러 있을 때이다. 성 다미아노 성당의 십자가로부터 “프란치스코야, 가서, 나의 집을 고쳐라”라는 음성을 듣기 전인지, 아니면 후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 무렵인 것은 거의 분명하다. 음성 즉, “가서 나의 집을 고쳐라”는 명령을 들은 후일지라도 주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파견하는 복음을 듣기 전이기에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던 때이다. 즉, 자기의 인생에 개입하시고 좌우하시는 하느님의 현존은 분명히 체험했지만,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자신을 어디로 이끄실지 아직 모르는 영적 여정의 시작에 해당되는 시점이다.

"형제회에 보낸 편지의 기도“가 지어진 1223-1225년에는 이미 프란치스코가 총 봉사직에서 물러나 있을 때이며, 오상을 받기 전인지 후인지 모르지만, 병고로 인해 총회도 참석할 수 없을 때이다. 이 때 쯤에는 그를 따르는 형제들의 수가 너무 불어났을 뿐 아니라 지역적으로도 이미 독일, 영국 모로코 등 이태리 밖에까지 퍼져 있었기에 프란치스코의 직접적인 감화와 영향을 받지 못한 형제들 가운데서 그의 이상에서 벗어난 삶을 사는 형제들이 적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가톨릭 전통에 어긋나는 삶을 사는 형제들도 있었다. 형제회가 조직화하면서 그의 이상에서 멀어져 가는 데 따른 극심한 고통을 겪은 후 이미 하느님께 형제회를 맡겼지만 그는 여전히 형제회와 형제들으 걱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기도가 형제회에 보내신 편지의 마무리 기도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런 형제회에 대한 염려 때문에 ”성 다미아노 십자가 앞에서 드리신 기도“가 1인칭 단수 기도인데 비해 이 기도는 1인칭 복수 기도이다.

2. 하느님 호칭과 하느님을 불러냄

앞서 프란치스칸 기도를 “우주적인 하느님과의 전 존재적인 대면”이라고 나름대로 정의한 바 있다. 하느님과의 존재적인 대면을 위해 먼저 하느님을 우리 앞에 불러내야 하고, 그리고 우리는 그 앞에 놓여 져야 한다고도 이미 얘기한 바 있다. 기도의 정의가 무엇이건 간에, 그리고 기도 중에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하건 간에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대면이 없이는 대화도, 호흡도, 바라봄도, 합일도 애초부터 불가능하다는 측면에서 호칭을 가지고 하느님을 불러내는 것은 기도의 첫 단계이며 가장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호칭을 가지고 하느님을 부르는 것은 앞서 보았듯이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대면케 한다. 그리스도교의 기도는 분명 인도의 명상이나 불교의 면벽좌선(面壁坐禪)과 다르다. 비록 구약이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 하였지만, 예수님 이후 우리는 성령을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마 8,16)라 부른다. 즉 우리는 성 프란치스코가 영적인 권고 1번 “그리스도의 몸”에서 얘기하듯이 성령에 힘입어 “내재적 하느님”, 즉 예수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만나 뵙는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하느님을 부름으로 성령에 힘입어 “초월적 하느님”을 내재적 또는 인격적으로 체험케 되는 것이다.

하느님을 부르는 것, 특히 불러내는 것은 매우 건방진 행위가 아닐까? 특히 어른들의 이름을 댈 때도 죽 이어서 대지 못하고 따로 떼어 대고 어른을 부를 때는 이름을 사용하여 부르기보다는 그저 “어르신”, “할아버지”, “아저씨”, “아줌마”등 관계나 위치나 관직을 나타내는 일반적 호칭으로 부르는 한국의 정서에서는 더더욱 건방진 행위가 아닐까? 같은 이유, 같은 정서 때문일까? 성 프란치스코는 기도를 들리 때 “하느님”, “주님”외에는 다른 식으로 부르지 않는다. “성자님”, “성령님”으로 하느님을 부른 적도 없고 더욱이 “예수님”하고 부르는 법이 없다. 태양의 찬가에서 하느님을 “지존이시여”라고 부르고, 수난 성무일도에서 자신을 비롯한 인간이 성자가 되어 하느님을 부르는 경우, “거룩하신 아버지시여”라고 부른 것 외에는 몇 차례 우리 인간과의 관계를 나타내주는 호칭으로써 “주님”하고 부르지만 대부분의 경우 “하느님”하고 부른다. 그런데 프란치스코는 이 하느님 앞에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나타내는 말을 수다스러울 정도로 붙인다.
이상을 놓고 볼 때 우리는 세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하느님을 부르는 것은 건방진 행위이기보다는 “사람은 누구도 그분의 이름을 부르기조차 부당하다”(태양의 노래2)고 생각하지만 “사람이 가까이 갈 수 없는 빛 가운데 계신(영적 권고1,5)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능력이 없는 인간이 하느님께 다가갈 수는 없기에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내려오실 수밖에 없다고 프란치스코는 생각했다는 점이고, 둘째는 하느님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쪼개어 대면하지 않고 하느님을 전체로서 대면하려 했다는 점이며, 셋째는 한 분 하느님으로서 다가오시지만 그에게 인식되어지고 인격적으로 체험되어진 하느님을, 그래서 억제 할 수 없이 어떤 분이라고 토로할 수밖에 없는 하느님을 한 마디 말로 표현할 수 없어 했다는 점이 이 호칭들 안에 담겨 있다는 것이다.

3. 호칭을 통하여 본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프란치스코의 인식

가. 지극히 높으시고 영광스러운 하느님과 심연의 어두움 중에 있는 인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이라는 하느님께 대한 그의 인식은 그의 회개 생활 시초부터 끝까지 그의 거의 모든 기도에서 정확하게 똑같은 어휘로 또는 비슷한 어휘로 나타난다. 이를 통해서 볼 때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을 우선 높으신 분으로 인식하는 것 같다. 이 말은 “전능한”, “영원한” 등과 함께 하느님의 초월성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전능”과 “영원”이 절대적, 배타적으로 하느님께만 쓰여지는 말인데 비해 “높다”라는 말은 다른 존재나 사물에게도 쓰여질 수 있는 말이기에 프란치스코는 여기에 “지극히”라는 최상 부사를 같이 상용함으로써 초월적 하느님을 지칭하는 말로 쓰고 있다. 그리고 이 말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있음을 나타내는 말로써 하느님은 인간이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멀리 계시며 감히 범접할 수도 없는 분인데 반하여 인간은 지극히 낮고 미천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스스로 보여주시지 않으면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계시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처럼, 하느님과의 대면도, 앞서 보았듯이, 하느님께서 스스로 내려오시고 다가오시지 않으면 원천적으로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깨달음이 하느님을 하느님으로서 대면키 위한 첫째가는 조건이다. 뒤집어 얘기해서 이러한 깨달음도 없고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도 없다며 하느님을 하느님으로서 만날 수 없다는 것이다. 친구로서 만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문예 부흥기 이후 인본주의와 더불어 내재적 하느님을 강조케 되었는데, 초월적 하느님께 대한 인식과 경외심이 없이 내재적 하느님만을 추구한 결과는 오히려 하느님의 실종이었다는 점을 우리는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하느님은 삼위일체의 하느님으로서 초월적이며 동시에 내재적인 하느님이시기에 이에 상응하여 인간인 우리는 초월적인 하느님에 대해서는 경외심을, 내재적 하느님에 대해서는 무한한 감사와 사랑의 자세를 동시에 지녀야만 하느님과의 만남, 대면이 가능하다.


“영광스러운”이란 말은 “높으신”이란 말과 마찬가지로 하느님 이외의 존재에게도 사용되는 말이지만 하느님과 관련하여서는 일반적으로 하느님의 힘, 하느님의 아름다움, 빛이신 하느님을 나타내고 명성, 칭찬(찬미), 좋은 평판 등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다라서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을 당신의 전능과 아름다우심으로 높은 곳에서 광채를 발하시는 분으로서 칭송과 찬미를 받으시고, 받으셔야 할 분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 비해서 영광스러운 하느님을 대면하고 있는 자신을 비롯한 인간은 마음에 어두움을 지닌 존재이다. 성 다미아노 십자가 앞에서 드리신 기도에서 프란치스코가 얘기하는 “마음의 어두움”에 대하여 영성가들은 마음이란 모든 것이 그곳으로부터 나오고 그곳으로 모이는 인간 존재의 중심을 의미한다고 얘기하고, 마음이 왜 어두운지에 대해서는 하느님 앞에 있는 참 자아에 대한 무지, 악과 죄의 어두움, 하느님의 부르심에 어떤 길을 따라 응답해야 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이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 하신 것처럼 ‘그러하도록 맡기며’, ‘거부를 포기하고’, ‘일들이 되어 지게 하는’, ‘능력의 없음’때문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프란치스코의 기도들 중에서 성 다미아노 십자가 앞에서 드리신 기도는 다른 기도들에 비해, 특히 우리가 지금 같이 보고 있는 형제회에 보내신 편지의 기도와 비교할 때 그 분위기가 어둡고 청원의 내용도 부정적이고 소극적이다. 그것은 비록 이 기도의 후반부가 밝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내용과 분위기가 바뀌지만 전반부에서 자신의 어두움을 얘기하고 있고, 어둠의 심연에서 허우적거리는 자신을 꺼내 주시길 바라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프란치스코의 어두움이 하느님과 하느님의 뜻을 거역함에서 비롯된, 즉 죄의 어두움일 것이라고 추측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어두움은 아마 “가까이 갈 수 없는 하느님의 빛과 마주칠 때 인간이 고백할 수밖에 없는 바로 그 어두움일 것이며, 이 기도를 지을 당시의 그의 상황과 이 기도 후반부의 내용과 관련지어 고찰할 대 어떤 길을 가야할 지 모르는 어두움, 자신이 어떤 길을 가기를 주님께서 원하시는지 그 뜻을 모르는 어두움일 것이다. 그런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