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칸 영성

관상기도의 선구자, 보는 것’의 화두를 품은 성녀 클라라

Margaret K 2021. 1. 8. 05:00

관상기도의 선구자 ‘보는 것’의 화두를 품은 성녀 클라라

 

“그분을 응시하고 깊이 생각하고 관상하십시오”

 

 

 

클라라 성녀는 프란치스칸 관상 삶의 표본이다.

 

 프라하의 아녜스 성녀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대의 구원을 위해 인간들 가운데 가장 비천한 자가 되시어

멸시받고 얻어맞고 온몸에 갖가지 방법으로

 매질 당하여 십자가의 참혹한 고뇌 가운데 죽어 가시는 

그대의 정배를 닮기를 갈망하면서,

 그분을 ‘응시하고’(intuere), 

그분을 깊이 ‘생각하고’(considera), 

그분을 ‘관상하십시오’(contemplare).

 

클라라가 사용하고 있는 이 세 개의 단어들은 

사실 모두가 ‘보다’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클라라는 우리가 그분을 참으로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우리도 내적, 외적으로 그분의 모습을 닮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성녀 클라라는 교회와 투쟁해야 했고

그녀의 자매들과 투쟁해야 했다

아마도 클라라는 이런 삶의 한가운데서 이런 질문들을 했을 것이다

“나는 왜 이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것인가

왜 이들은 함께 하지 못하고 자비를 베풀지 못하는가

왜 이들은 계속해서 분열해야 하는가?

 나는 볼 수 없다!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도대체 내 성소가 무엇이란 말인가?

 이 모든 것이 의미 없어 보인다!

 

악마의 가장 큰 유혹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을 볼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클라라가 그토록 보고 마음에 품고자 했던 

하느님이 보이지 않는 순간들이 있었다는 것은 가히 짐작할 만한 일이다.

 

클라라 전기는 그녀를 유혹하는 악마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것이 소명 전부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삶의 구체적인 환경에서 

복음을 살아가는 것을 그토록 힘겹게 만드는 그 무엇이다.

- 우리의 이웃, 교회, 우리 공동체, 그리고 그 약점

우리는 이런 유혹의 체험을 해왔다.

 이것이 고통의 문제이다. 문제는 사라지는가

늘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여기가 바로 우리가 하느님을 발견하는 곳이다.

-호명환신부의 평화의 신문 칼럼중에서-

 

또한 클라라 성녀는 프라하의 아녜스 성녀에게 보낸 세 번째 편지에서

그대의 마음을 영원의 거울 앞에 놓으십시오

그대의 영혼을 영광의 광채 속에 두십시오

그대의 마음을 신적 실체의 형상 가운데에 두고

그대의 전 존재를 관상을 통하여 하느님의 모습 안에서 변화시키십시오

그러면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태초부터 하느님 몸소 마련해 놓으신 숨겨진 감미로움을 맛보면서 

 

그대도 그분의 벗들이 느끼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복녀 아녜스에게 보내신 넷째 편지에서

 그리스도는 영원한 영광의 광채요 영원한 빛의 반사이며 티없는 거울이시니 

…… 거울 전체에는 복된 가난과 거룩한 겸손과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이 반사되어 있습니다.

 …먼저 거울의 맨 밑에서부터 보시고

말 구유 위에 강보에 싸여 누워 계시는 그 가난을 깊이 보십시오 

놀라운 겸손이여기막힌 가난이여 

천사들의 임금이시고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분이 구유에 누워 계시다니!

 

 다음으로 거울의 중간을 보시고 

그분께서 인류의 구속을 위하여 겪으신 무수한 수고와 고통 

그리고 그분께서 지니신 겸손과 함께 복된 가난을 깊이 바라보십시오.

 

이제 끝으로거울의 맨 위를 보시고 

십자가 나무 위에서 고통 당하시고 

거기에서 가장 수치스런 죽음을 맞이 하기를 원하신 

그분의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을 깊이 바라보십시오.

 

........그대가 이렇게 하신다면 

 

그대 안에 이 사랑의 불이 날로 더 활활 타오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