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20일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루가 5,27-32)
I have not come to call the righteous
to repentance but sinner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형순신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는 예수님의 모습에 불편한 감정을 드러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투덜거리며 의문을 제기합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죄인의 회개가 바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의인이고 누가 죄인일까요?
에제키엘 예언서를 참고하면 구약에서 ‘의로운 인물’로 언급되는 이는 노아와 다니엘과 욥 세 명뿐이었습니다(에제 14,14.20 참조). 구약 성경 전체에서 의인으로 칭송받은 인물이 이 세 명뿐이라면, 예수님 시대에도 의인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에서 죄인으로 주로 언급되는 세리와 창녀와 병자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의인이 아닌 죄인의 범주에 들어감을 알 수 있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을 세리, 죄인들과 철저하게 구별합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의인이며, 세리 같은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강한 자의식과 확신은 그들을 오만함으로 이끌어 예수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불평과 불만을 일으키고, 결국에는 예수님을 죽음에 이르게 만듭니다. 그들이 오히려 죄인이 됩니다.
내가 누구보다 낫다는 교만한 판단으로 타인과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타인과 비교해서 좀 더 의로워 보이면 기분이야 좋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구원을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구원의 보장은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몸과 마음을 돌리는 회개에서 시작됩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한 2~3년 전이었던 것 같습니다. 텔레비전에서 봤던 한 장면이 기억납니다. 전체 자영업 중 폐업 1위가 식당이라고 하지요. 하루 평균 3,000명이 식당을 시작하고, 2,000명이 식당을 폐업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 유명 요식업 대표가 문제의 식당을 찾아가서 해결 방안을 제시하는 프로그램을 봤습니다.
23년간 떡볶이를 만들어 온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할머니의 목표는 ‘떡볶이 하루 한 판’이라고 말합니다. 오랫동안 장사를 했지만, 사람들이 자신이 만든 떡볶이를 찾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찾기 위해 먼저 요식업 대표가 이 떡볶이를 먹어본 후에 이렇게 말합니다.
“사장님, 충격받지 마세요. 제가 여태까지 먹었던 떡볶이 중에서 제일 맛없는 떡볶이!!”
여러 양념을 넣은 양념장을 직접 만들어 쓰는데 이 양념장이 문제였습니다. 요식업 대표는 기존 고추장에 이 앙념장을 조금만 넣어 완전히 다른 떡볶이를 만듭니다. 이곳 사장님은 이 떡볶이를 먹어본 뒤에, 매일 오전을 한결같이 떡볶이 만들기에 쏟은 모든 정성이 헛수고였다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정성이 중요하다 했지만, 엉뚱한 곳에 정성을 쏟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많지 않을까요? 정성을 다했다고 하지만, 헛수고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문제는 틀렸다는 것을 알아도 자신의 잘못을 고치는 용기를 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떡볶이집 사장님이 폐업하지 않기 위해서는 23년간 지킨 자신의 양념 조리법을 내려놓아야만 했습니다. 우리도 지금을 살면서 내려놓아야 할 것이 많지 않습니까?
우리의 섣부른 판단과 단죄는 절대로 금해야 합니다. 특히 나는 맞고 남은 틀렸다는 생각으로, 얼마나 많은 이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기라는 틀에 갇혀 있으면 절대로 남을 받아들이는 넓은 마음도 갖지 못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종교지도자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율법에 기초해서 전혀 오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세리와 창녀는 절대로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했고 그래서 구원도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레위라는 세리를 부르시면서 “나를 따라라.”고 하십니다. 그 뒤에 레위의 집에 가서 먹고 마십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라고 투덜거립니다. 절대로 용서받지 못할 죄인과 함께 하는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레위야 말로 구원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구원받기 위해서는 이제까지 가지고 있었던 인간적인 고정관념을 모두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한 번의 커다란 행복과 그 행복의 절반 크기의 행복 두 개가 있다면, 어떤 행복을 선택하겠습니까? 선택하기가 쉽지 않겠지요? 그때 더 큰 행복은 작은 행복 두 개라고 합니다.
행복은 크기가 아니라 빈도라는 말도 있지요. 그래서 커다란 행복 한 번이 아니라, 행복의 빈도가 많아야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해서, 불행의 빈도가 많으면 불행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행복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작은 행복을 많이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커다란 행복만을 찾습니다. 남보다 더 많은 것을 얻는 것, 남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 남보다 더 여유 있는 삶을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남보다 더 나은 큰 행복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작은 행복을 찾지 못한 사람은 큰 행복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작은 행복을 많이 만들어야 합니다. 행복은 크기가 아니라 빈도입니다.

남을 질책하려면 거울처럼 질책하라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의 핵심 구절은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회개시키는 의사이십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그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보고 비판합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처럼 죄인들을 회개시킬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를 위한 마음으로 비난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위한 마음으로 감싸주십니다.
일단 질책을 당해 기분이 나쁘면 나의 죄를 보기보다는 방어하기 바빠집니다. 회개는 스스로 나의 죄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만드는 사람이 예수님을 닮은 의사입니다.
“사람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장애인 학교 선생질했다더니, 우리까지 장애인 취급하면서 사람을 무시하고 말이야! 당장 저 시건방진 사람 좀 다른 병실로 옮겨줘요! 6인실 쓰면서 코 골았다고 난리 치고, 창문은 자기 마음대로 열었다 닫았다 하고, 물건도 못 놓게 하고, 그렇게 하려면 자기가 1인실로 옮기던가!”
베드로 수녀님은 간호사와 환자 모두에게 원성이 자자한 그 형제에게 다가갔습니다. 그 형제는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가진 신자였고 아직 자신이 위중한 간암에 걸렸음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토마스 형제는 자신의 병명을 가르쳐주지 않는다고 의사에게까지도 큰 불만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며 수녀님께 꼭 병명을 알아달라 부탁했습니다.
형제님 자리에는 성경책과 기도서가 있었습니다. 7년간 냉담하다가 병을 얻어 다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노트에는 장애인 학교 은퇴 후에 영종도에 집을 짓겠다며 땅도 사 놓았고 기도방도 갖춘 자신이 그린 집 설계도도 있었습니다. 아내는 병명을 알고 있었지만 한 달도 못 산다는 말을 불같은 성격의 남편에게 해 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수녀님이 병명을 말해주겠다고 했습니다.
수녀님은 간이 좀 안 좋다고 말을 꺼냈습니다. 토마스 형제는 간이 안 좋은데 왜 다리가 아프냐고 물었습니다. 수녀님은 간암이고 그러면 다리가 붓는다고 말해주었습니다. 형제님은 그대로 굳어버렸습니다.
“간암이라고, 내가…? 내가 간암이라고?”
수녀님은 그래도 희망을 잃지 말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날 오후 형제님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병실을 소란스럽게 하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토마스 형제님, 점심 식사는 하셨어요?”라고 물어도 대꾸하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 11시쯤 토마스 형제는 수녀님을 찾았습니다.
“수녀님, 계속 생각을 해 봤는데요. 제가 제 몸은 잘 알거든요. 아무래도 가망이 없는 거 같아요. 그래서 말인데요. 제가 암이라는 것은 당분간 제 아내에게 비밀로 해 주셨으면 합니다. 울고불고 난리를 칠 텐데, 저 조용히 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수녀님. 제가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할까요?”
수녀님은 후회되는 일이 있거나 용서하지 못한 사람, 혹은 용서를 구해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을 푸는 것이 좋겠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글쎄요, 전 누구한테 잘못한 일이 별로 없습니다.”
토마스 형제는 용서를 청할 사람이 있다면 용서를 청해야 한다는 말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항상 타인의 잘못만을 지적하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다음 날 밤새 생각을 했다며 딱 세 명에게 잘못한 게 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한 명은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처음엔 자상한 분이셨지만 재혼하고는 새어머니와 의붓동생과 갈등을 겪는 일이 많아졌고, 그래서 자신에게 회초리를 드는 일이 많았습니다. 이후 토마스 형제는 결혼해서 16년 동안 아버지를 찾아뵌 적이 없었습니다.
다른 한 명은 장애인 학교 학생이었는데 “아버지, 어머니”라는 말도 제대로 못 해서 그래서 어떻게 자녀라고 할 수 있느냐며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때린 적이 있었습니다. 학생이 아무리 장애인이라도 자신은 유능한 선생이니까 꼭 가르치고 말겠다는 교만함이 아이에게 회초리를 들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수녀님은 11살 된 학생을 불러 선생님이 용서를 빌 시간을 주었습니다. 아이도 선생님을 보자 쑥스러운 미소로 반가워했고, 선생님은 3일 동안 아이를 침대에 올려놓고 놀아주면서 맛있는 것도 먹여주었습니다. 아이도 돌아갈 시간이 되자 선생님과 떨어지지 않겠다며 엉엉 울었습니다. 아이가 돌아가자 돌덩어리 하나가 가슴에서 내려진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이번엔 아버지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습니다. 형제님은 하루를 꼬박 새워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과 용서를 청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답장만 기다리던 일주일 후, 병실 문이 열리고 아버지가 들어오셨습니다. 편지를 받자마자 삼천포에서 인천까지 한걸음에 달려온 것이었습니다. 형제님은 16년 만에 본 아버지의 모습이 너무 야위어서 마음이 저렸습니다. 자신을 때리던 손이 그렇게 작아져 있었고 학교에 데려다주시던 그 손이 떠올라 왈칵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버지도 토마스 형제의 손을 잡고 조용히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서로 용서를 청하며 회한의 눈물을 쏟아내고 서로 발을 주물러 주면서 정도 나누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한 명이 남았습니다. 토마스 형제는 그 한 명이 ‘하느님’이라고 했습니다. 하느님께 잘못한 것만 생각나고 빚진 것만 생각이 안다고 했습니다. 하느님께는 해 드릴 수 있는 게 없어서 장기기증을 하면 어떨지 생각 중이었습니다. 이전에 병원의 유명한 말썽꾸러기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수녀님. 제가 간암이란 걸 이제 아내에게도 이야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 입으로는 차마 못 하겠어요. 수녀님 부탁드립니다.”
아내도 남편이 참 대단하다며 칭찬해주었고 자신도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간암 환자는 장기기증을 할 수 없어서 결국 시신 기증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학생을 가르칠 때의 양복을 입고 백묵 한 통을 가지고 편히 가셨습니다.
백묵을 넣어달라고 한 이유는 이것이었습니다.
“수녀님, 23년 동안 백묵은 제 삶의 도구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저를 먹고살게 해 준 도구였죠. 그리고 제가 백묵을 들었을 때는 죄를 안 지었더라고요. 제가 칠판에 ‘악’(惡)을 쓸 때도 ‘선’(善)을 가르치기 위해서였으니까요. 백묵이 제가 가진 것 중에 가장 깨끗한 것이니 하느님께 선물로 가져가려고 하는 겁니다.”
[출처: 『내 가슴에 살아있는 선물』, 이영숙 베드로 수녀, 비움]
토마스 형제를 비판하던 같은 병실의 사람들은 토마스 형제를 절대 회개시킬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남의 비판에 기분이 나쁘면 상대를 비판하여 자신을 정당화하느라고 자신의 죄를 볼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수녀님을 만나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만약 간암이란 소리를 다른 사람에게 들었다면 그렇게 바뀔 수 있었을까요? 그렇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수녀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발견했기에 죄인인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수녀님이 사랑이 없는 분이셨다면 그분을 치워버리려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사실마저 부정하고 죽지 않으려 발버둥 쳤을지도 모릅니다.
그리스도를 모신 우리도 같습니다.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은 사랑이 없이 비난합니다. 그 비난하는 사람이 싫으니 그 비난도 듣기 싫습니다. 그러나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께서 우리 죄를 말씀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잘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나의 모습을 성찰하고 그분께 나아가기 위해 고쳐야 할 것을 고치게 됩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거울과 같으신 분이십니다. 거울을 보면서 완벽하게 자신에 대해 만족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조금은 개선되어야 할 부분이 보입니다. 그것이 몸이든, 옷이든, 피부든, 표정이든 간에 말입니다. 만약 내가 누군가의 무엇을 바라보려 할 때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 사이에 거울처럼 서 계십니다. 그러며 “너는?”이라고 물으십니다. 거울을 보며 기분 나빠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군가를 회개시키려면 거울처럼 다가가야 합니다.

-조재형신부-
영어 시간에 ‘가정법’을 배웠습니다. 가정법은 동기를 부여하고, 조건이 채워지면 보상이 주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도 우리는 가정법을 볼 수 있습니다.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본당 사목에서도 가정법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성경 필사를 하면 선물을 주기도 합니다. 예비자 교리에 개근을 하면 선물을 주기도 합니다. 복사들이 새벽 미사에 빠지지 않고 오면 스키장에 데려가기도 합니다. 선교를 많이 한 분에게도 선물을 주기도 합니다. 저도 경험이 있습니다. 중학교 때입니다. 반에서 10등 안에 들면 자전거를 사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정말 힘든 일이지만 기적처럼 10등 안에 들었고, 기분 좋게 자전거를 탈 수 있었습니다.
세상은 동기를 부여하고, 보상을 주는 방법을 많이 사용합니다. 실적이 오르면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 줍니다. 성과급을 주기도 하고, 승진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방법은 때로 부작용이 따르기도 합니다. 실적과 그에 따른 보상에 눈이 멀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결여되고, 정의를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인격과 가치를 보지 않고 실적이라는 숫자에 매달리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고, 실적순이 아닌데 우리는 마치 성적과 실적이 행복의 기준인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 지구의 허파인 아마존의 숲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바다에 거대한 쓰레기 섬이 떠다니고 있습니다. 미세 먼지가 우리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살아가야하는 많은 생명이 터전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복음의 기쁨, 찬미 받으소서. 모든 형제들’이라는 문헌을 통해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연대와 협력, 공존과 화합의 삶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Even though, even if'라는 표현입니다. 동기에 대한 조건이 채워지지 않았어도 변함없이 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반했음에도 평화를 빌어 주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일곱 번 뿐만이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눠주겠다고 했던 자캐오를 칭찬하셨고, 자캐오의 가정이 구원받았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강도당한 이웃을 치료해주고, 여관으로 데리고 갔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가장 첫째가는 계명을 지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사건도, 하느님의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죽어야 했던 사건도 아무런 조건 없는 사랑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실적과 보상의 문제가 아닙니다. 신앙은 조건 없는 나눔과 사랑입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하는 예수님이 못 마땅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는 것처럼 일등만 기억하는 세상을 원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계급과 신분 사이의 벽을 완전히 허무시며, 격식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예수님!
-양승국신부-
언젠가 지방에 출장을 갔다가 한적한 오전 시간 동네 목욕탕에 들어간 적이 있었습니다. 매표소 아주머님께서 대뜸 제게 물었습니다. “협회 회원이신가요?” “네? 무슨 협회요?” “아, 아니면 말고요. 협회 회원이면 천원 할인해 드리거든요.”
‘협회? 무슨 협회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욕탕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저는 화들짝 놀랐습니다. 탕속에는 커다랗게 용 문신 하신 분, 호랑이 문신 하신 분 등등이 떡하니 앉아들 계셨습니다. 저는 서둘러 샤워만 하고 신속히 그곳을 빠져나왔습니다.
사실 저는 조직원들과 별로 안좋은 경험이 있었습니다. 혈기왕성하던 시절, 돈보스코를 따라한다고, 역근처에 가출 청소년들 수용시설 만든다고, 서울역이나 영등포역 주변 집 보러 많이도 돌아다녔습니다.
결국 허름하나마 시장 안에 전셋집을 하나 구해서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과정에서 ‘그분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한때 유행했던 조폭 미화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기대하시면 큰 오산입니다. 그들에게는 의리고 뭐고 없었습니다. 그저 협박과 폭력, 갈취와 공갈이 전부 다였습니다.
“왜 우리 애들 데리고 가냐? 데리고 가려면 한명당 천만원씩 내놔라! 이거 허가 받고 하는거냐? 확 쓸어버린다!”
오늘 예수님께서 레위를 당신 제자로 부르시는데, 예수님 시대 세리들은 오늘날 그분들과 비슷했습니다. 각종 이권에 개입하고, 자릿세 받고, 고리대금업에 손도 대고, 과도한 이자 부과로 사람들 괴롭히고...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레위는 말단 세리가 아니라 중간 보스 정도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큰 형님에게 거금을 상납해서 일정 담당 구역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그 담당구역을 돌며 마음껏 폭행과 갈취를 일삼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세리들의 악명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백성들을 그들을 두고 공공연하게 ‘도둑’이라고 칭했습니다. 상종하지 말아야 할 인간으로 첫손가락을 꼽았습니다. 얼마나 사람들을 들들 볶아대던지 ‘세리가 다가오면 집들이 공포에 떤다’는 말까지 돌았습니다.
더구나 유다 민족들은 징수된 세금이 식민지 지배자 로마로 흘러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세리들을 매국노, 배신자, 배교자로 칭했으며 재판정에 증인으로 서는 것조차 금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중간 레위를 당신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이 모습을 본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깜짝 놀랐습니다. 어부 출신 사도들도 마찬가지로 놀랐을 것입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어떻게 저 사람을 제자로 삼을 수가, 하며 다들 혀를 내둘렀습니다.
참으로 파격적인 예수님,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예수님의 인선이었습니다. 갈 때 까지 간 세리, 공공연한 도둑, 매국노 레위에게 당신 구원 사업의 한 축을 담당하도록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참으로 큰 위안을 받습니다.
더 놀랄 일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세리라는 직업을 떠나 예수님의 제자가 된 레위를 위한 송별식이 벌어졌습니다. 그야말로 조폭들의 파티였습니다. 그 잔치에는 당대 내놓으라는 지하 세계 인생들은 다 모였습니다.
참으로 부담스런 자리, 너무나 껄끄러운 자리가 분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태연히 그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으십니다. 완벽하게 그들과 동화되십니다. 한 가족이 되시고, ‘절친’이 되십니다.
계급과 신분 사이의 벽을 완전히 허무시는 예수님, 격식 따위는 안중에도 없으신 예수님, 우리의 죄와 허물보다는 미래와 가능성에 더 초점을 맞추시는 예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리인 레위를 부르시는 장면과 레위의 집에서 죄인들과 어울려 식사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루카 5,27)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발의 움직임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움직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발걸음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곧 앵무새처럼 입으로만 혹은 다람쥐처럼 몸짓으로만 예수님을 본받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삶의 자세와 태도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화답송>에서 말해주듯이, ‘진리 안에서 걷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세상을 바라보는 눈, 가치관, 방식에 있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어떤 사람이냐를 보기에 앞서, 바로 그러한 그를 사랑하는 눈입니다.
사실,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상징입니다.
그것은 서로 기쁨과 사랑을 나누는 행위요, 한 가족임을 나타내는 행위입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보내는 신의요, 자비요, 호의입니다.
그들을 단죄한 것이 아니라 용서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죄인들 속으로 들어와 그들을 당신의 가족으로 삼으십니다.
자신의 몸에 죄를 묻힘으로 죄인들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그것은 죄인을 ‘먼저’ 용서하십니다. 죄인들의 회개를 앞세우기보다, ‘먼저’ 자비를 베푸십니다.
흔히, 우리는 죄지은 이에게 ‘먼저’ 회개하라고 강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먼저’ 용서하시고, ‘먼저’ 함께 식사를 하시며, 당신과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십니다.
‘먼저’ 죄인을 찾아오시고, ‘먼저’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보다 ‘먼저’ 죽으시고, 우리보다 ‘먼저’ 당신을 건네주시고 자비를 베푸십니다.
오늘 우리 주님께서는 오늘도 그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루카 5,27).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32)
이는 우리가 죄인인 까닭에 부르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죄를 짓지 않은 의인들인 것이 아니라, 용서를 받아야 하는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지 죄인인 것이 아니라, 이미 용서받은 죄인인 까닭에, 용서해야 하는 일을 소명으로 받은 죄인들입니다.
곧 이미 사랑과 자비를 입었기에, 또한 그렇게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소명으로 받은 이들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나를 따라라”(루카 5,27) 하심은 우리 역시 죄지은 형제에게 ‘먼저’ 다가가고, ‘먼저’ 용서하고, ‘먼저’ 자비를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는 기도 -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루카 5,32)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당신은 죄인인 까닭에 저를 부르셨습니다.
찾기도 전에 먼저 부르시고, 청하기도 전에 먼저 용서하셨습니다.
용서받았으니 용서하게 하소서.
먼저 찾아가고 먼저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

사랑받는 죄인
-반영억신부-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5,31).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병자와 죄인에게는 큰 기쁨입니다. 왜냐하면 병자를 낫게 해주고 죄인을 구해준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인이 병자라고 알고 있는 환자가 있는가 하면 병자임을 모르고 있는 병자가 있습니다. 본인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죄인이 있는가 하면, 의인인체 하는 죄인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입는 사람은 자신이 병자요, 죄인임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은 본인이 병자이면서도 병자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결국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하고 말합니다. 자신들이 스스로 건강하며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것까지는 그렇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을 무시하지는 않았으면 좋으련만 남을 우습게 여겼습니다. 사실은 그것이 죄입니다. 정작 주님의 도움을 받아야 할 죄인은 주님의 도움을 외면하고 여전히 의인을 자처하였습니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이 있고,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무시당하고 비난 받으며 살았던 세리나 죄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큰 은총입니다. 더군다나 의인으로 자처하며 상종도 하지 않는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나를 따르라” 하시며 음식을 함께 나눌 수 있게 안배하시니 얼마나 큰 기쁨이겠습니까? 주님은 오늘도 병자를, 죄인을 부르십니다. 병자요, 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은 그분의 식탁에서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시게 될 것입니다.
교부 사르마타스는 말하였습니다. “죄를 짓지 않고서 자기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사람보다는 죄를 지었음을 깨닫고 뉘우친 죄인을 하느님께서는 더 사랑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느님께 마음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주님께 마음을 돌리는 회심의 노력이나 기간은 죽는 순간까지 항구해야 합니다. 결코 일회적으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따라서 은총의 사순절에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는 마음의 할례를 받고 회개의 눈물로 다시 태어나는 행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예레31,34).
주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요한12,47)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죄가 많은 곳에는 은총도 풍부하게 내렸다”는 말씀대로 하느님의 자비가 영원에서 영원까지 한결같음을 믿으며 하느님의 자비를 영원토록 노래하시기 바랍니다.(성 베르나르도)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면, 그분은 성실하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1요한1,9).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 이스라엘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했던 모세, 왕 중의 왕이라고 했던 다윗, 이방인의 사도 바오로, 주님의 으뜸제자인 베드로에 이르기까지 죄인이 아닌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허물을 인정하였기에 하느님의 자비를 입었으며 죄인이어서 행복하였습니다. 우리는 그야말로 사랑받는 죄인입니다. 우리도 그 행복을 차지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용서입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복음: 루카 5,27-32: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
-조욱현신부-
예수께서는 레위라는 세리를 부르신다. 그는 돈 욕심이 사납고, 소유욕으로 가득 차, 자기 것이 아니라도 그것을 소유할 욕심에 정의 따위는 관심도 없는 자였다. 세리는 본디 그런 사람들이었다. 돈 외에는 아무런 희망도 없던 그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구원을 받았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나를 따라라.”(27절) 하셨기 때문이다.
이제 레위는 예수님을 마음으로 따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한때 어부들이 위험한 일터에서 땀 흘려 번 것을 강제로 빼앗던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남의 재산을 착취하던 직업을 버렸다. 수치스러운 자리를 떠나 마음을 다하여 주님이 가시는 길을 따르기로 한 것이다. 그러고는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다. 누구든지 주님을 자기 안의 집에 맞아들이는 사람은 가장 맛난 음식인 가장 큰 기쁨을 맛보게 되어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주님을 바리사이들이 비난하고 있다. 그들은 주님께서 죄인들과 어울림으로 율법을 어긴다고 비난했지만,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는 것에 대해 시샘하고 꼬투리를 잡으려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이 재판관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의사로 오셨음을 보여주신다. 그분은 치료받아야 할 사람들 가운데 계시면서 의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신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32절) 그분은 하느님의 의로움을 따르지 않고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우려고 하는 자들(로마 10,3 참조)을 부르지 않으셨다는 말이다. 그분은 자신의 나약함을 알고 자기가 많은 잘못을 저질렀음을 고백하는(야고 3,2 참조) 사람들을 부르신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말은 그들 바리사이들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이다. 그분은 교만한 자들이 아니라 겸손한 자들을 부르신다. 그들은 끝까지 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께서 함께 해 주시지 않을 때 사람들은 굶주리며, 맛난 음식을 배불리 먹지 못한다. 참으로 자신의 덕행으로 즐거움을 맛볼 사람, 그리스도를 자기 집안에 모셔 들인 사람은 큰 잔치를 마련한다. 그 잔치는 선행들로 차린 영적인 잔치로, 교만한 사람들은 맨입으로 돌아가고 가난하고 겸손한 이들은 배부르게 먹는 그런 잔치이다. 레위는 잔치를 통해 자신의 기쁨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서 죄인들이 용서받을 희망을 품게 하시고자, 세리의 일을 하던 레위를 선택하시어 얼마나 의롭게 피어나도록 하셨는지를 생각하면, 나도 모르는 기쁨을 느낄 수 있다. 그가 일원이 된 사도단은 그가 어떤 사람으로 바뀌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은 인간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려고 오신 분이시다. 마땅히 우리의 마음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어, 그들을 사랑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함을 오늘 복음은 가르치고 있다.

병든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루카 5, 31)
-한상우신부-
예수님께서는
모순으로 가득찬
여기 이곳
아픈 세상에
오셨다.
우리가
병들었다는 것을
아는 것에서
건강한 삶은
회복될 수 있다.
병든 이들을
치유하시고
죄인들을
부르시는
소명이
곧 교회의
소명이다.
아픈 이들을
구원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뜻은
거역할 수
없다.
하느님의 뜻은
사랑의 실천이다.
우리모두는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의사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병들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아픔이
문제가
아니라
치유가
문제이다.
아픔은 치유를
향해
나가야한다.
아픔과 죄를
탓하지
않으시며
우리를
위로하여
주신다.
스스로
의롭다고
스스로
건강하다는
착각의
기준을 바꾸는
사순시기이다.
절실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근본적인
치유와
용서이다.
다시금
누구를 위한
신앙이고
다시금
누구를 위한
교회인지를
묻게된다.
모두를
살게하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이다.
건강한
공동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병든 우리자신을
먼저 치유하여
주신다.
사순시기는
자연스레
우리자신에게로
안내한다.
병든 제 자신을
치유시켜 주시고
죄 많은 저를
용서하여 주소서!
여전히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우리들 삶이다.
한마디로
아픈 우리들
삶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회개한 이들과 아직 회개하지 않은 이들입니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루카 5,28)
간결한 부르심에 단순한 응답이 이어집니다. 세관에서 일하는 세리라면 잇속 밝고 탐욕스러우며 민족의 반역자라 불리는 이들인데, 그런 레위가 한 랍비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따른 건 놀라운 일입니다. 그래서 어떤 그림에는 그의 내적 어둠에 빛이 비추는 것으로 이 순간이 묘사되기도 했지요.
자기 이익을 위해 온갖 비리와 권모술수를 동원하고, 동포를 착취하며 율법은 신경도 쓰지 않는 그들이지만, 양심이 일으키는 물음이나 회의까지는 끊어내지 못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영혼에 각인된 하느님의 모상이 사람다움, 하느님 백성다움을 아주 잃게 내버려두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루카 5,30)
그런데 예수님이 그런 이들 가운데 하나를 제자로 부르시고 스스럼없이 그 무리와 어울리시는 상황이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겐 몹시 불편합니다. 부정한 이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이도 부정하니 아예 상종을 안 하는 것이 답이라 여겼으니까요.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32)
예수님은 율법이 죄인으로 분류한 이들에게 기회를 주시고 그들을 믿음으로 의롭게 하십니다. 율법이 아닌 믿음이 주는 의로움입니다. 레위를 비롯해 주님 식탁으로 모인 죄인과 세리들은 이제 회개하여 의롭게 된 하느님의 새 백성입니다.
반면 여전히 율법에 묶여 있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여전히 매번 속죄 제물을 바쳐야 주님께 나아갈 수 있는 죄인들입니다. 제 아무리 완벽히 산다고 한들 수많은 율법의 금지 조항을 낱낱이 피하기는 쉽지 않으니까요. 게다가 그 율법의 죽은 문자로 타인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자체가 죄인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에서 그런 이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이사 58,9)
아무리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겨도, 율법으로 타인에게 멍에를 지우고 지적하며 악의에 찬 비방을 일삼는다면 주님 보시기에 회개가 필요한 상태입니다. 이야말로 율법의 정신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기 때문이지요.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이사 58,10)
오늘 부르심을 받아 빛 한가운데로 들어선 레위처럼, 아직 스스로 죄인인지도 모르면서 죄의 어둠 속에 갇힌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도 주님께로 돌아선다면 빛으로 나아올 수 있습니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다"는 예수님의 초대가 자신들을 향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면 말입니다.
제1독서에서 드러난 회개는 주님과의 관계와 사람 사이의 관계 모두를 가리킵니다. 주님 앞에 스스로 의롭다 여기는 이들, 곧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놓친 부분이 되겠지요.
"너는 주님 안에서 기쁨을 얻고, 나는 네가 세상 높은 곳 위를 달리게 하며"(이사 58,14)
'기쁨은 회개하는 이가 얻는 선물'입니다. 회개가 단죄와 심판의 칼날을 무디게 하고 서슬퍼런 비판과 오만한 무시를 잠재우니, 비로소 그의 눈에 모두가 형제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세상 모든 피조물이 형제인데(fratelli tutti)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이제 회개한 이는 제도 안의 지위나 세상 재물 때문에 높은 곳을 차지한 게 아니라, '부서지고 낮추어진 마음' 덕분에 주님 곁자리가 허락되어 높은 곳에 이릅니다. 회개는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 주님을 끌어안는 탁월한 길입니다.
원죄의 상처와 나약한 인간 실존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회개는 단 한 번의 결정적인 사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성찰하고 회개하는 겸손이 필요하지요. 자신에게 빛이 필요함을 알고 청하는 겸손, 자신이 어둠임을 인정하는 겸손이 주님의 부르심을 알아듣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레위와 함께 주님의 부르심에 흔쾌히 응답하고 따라나서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회개한 이의 기쁨이 여러분의 기쁨이 되길 축원합니다. 회개자인 벗님을 축복합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필요한 사람
-김찬선신부-
저는 필요한 사람입니다.
돈이 필요하고,
힘이 필요하고,
사랑이 필요하고,
위로가 필요하고,
구원이 필요하고,
영어로 얘기하면 The Person in Need이며
그래서 친구가 필요하고,
구원자 하느님이 필요한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저는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공동체를 위해 정말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고,
공동체에게까지 꼭 필요한 사람은 못되더라도
한 사람에게라도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아마 여러분도 저와 같을 것입니다.
공동체를 위해 아무 쓸모가 없는 불필요한 사람이기보다는
공동체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 말의 진정성과 가능성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은지.
필요한 사람이 될 수는 있는 것인지.
먼저 정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으십니까?
공동체에게나 한 사람에게나 꼭 필요한 사람이 되려면
나를 내어주어야 하는데 그래도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픕니까?
가난한 사람일수록 더 많은 도움이 필요로 하고,
그만큼 더 많은 도움을 줘야 하는데 그래도?
문제가 많은 사람일수록 더 많은 상담이 필요하고,
그만큼 더 많이 내 시간이 뺐길 텐데 그래도?
애정결핍이 심할수록 더 큰 사랑을 필요로 하고,
그만큼 그 한 사람에게 사랑이 쏠리게 되는데 그래도?
상처가 많은 사람일수록 더 세심한 사랑이 필요하고,
그만큼 더 많은 배려를 해야 하는데도 그래도?
더 말썽꾸러기일수록 나를 성가시게 하고 괴롭게 하고,
그만큼 더 많은 인내와 시간이 필요한데 그래도?
진정 이런 사랑의 바람과 의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제 이런 사랑을 할 수 있겠는가?
크고 깊고 넓고 높은 사랑,
세심하고 부드러우면서 강하고 끈질긴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능력 없는 사람은 필요 없습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의 의지도 소중하지만 사랑의 능력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다시 우리는 사랑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나눠줘도 부족함이 없도록 우리를 채워줄 사랑이 필요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며,
이웃 사랑을 위해서 부족함 없는 하느님 사랑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필요한 사람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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