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17일 재의 수요일
재 의 수요일’은 사순 시기를 시작하는 날이다. 교회가 이날 참회의 상징으로 재를 축복하여 신자들의 머리에 얹는 예식을 거행하는 데에서 ‘재의 수요일’이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이 재의 예식에서는 지난해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축복한 나뭇가지를 태워 만든 재를 신자들의 이마나 머리에 얹음으로써, ‘사람은 흙에서 왔고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창세 3,19 참조)는 가르침을 깨닫게 해 준다.
오늘은 단식과 금육을 함께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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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마태오 6,1-6.16-18)
"Take care not to perform righteous deeds
in order that people may see the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형순신부-
사순 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면서 주님의 부활을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순 시기를 시작하면서, 재를 머리에 얹으며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하시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사순 시기는 회개의 시기입니다.
회개란 무엇일까요? 회개의 사전적 정의는, 죄나 잘못을 뉘우치고 마음을 고쳐먹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뜻입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우리가 저지른 죄를 뉘우치고 반성하여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뜻이 더해집니다. 하느님을 따르는 방향이 추가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회개는 단순한 뉘우침과 마음을 고쳐먹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느님께 되돌아감을 뜻합니다.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죄며 잘못입니다. 반대로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려는 노력이 회개입니다. 따라서 참된 회개는 우리와 하느님의 거리를 생각하고, 다시 하느님과 가까워지려는 모든 영적인 활동을 뜻합니다.
단식, 기도, 자선은 회개의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느님을 향하지 않고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올바른 회개가 아니겠지요. 하느님께서 눈에 명확하게 보이시면 참 좋겠는데, 아쉽게도 하느님께서는 숨어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사실을 거듭 들려주십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숨어 계신 것이지, 안 계신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쉽지 않은 여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가만히 숨어 계시지만 않으시고, 숨은 일도 보십니다. 보이는 것만이 전부라고 여겨지는 오늘날에 회개는 더욱 어려운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숨어 계신 하느님을 향하는 오늘이 바로 “은혜로운 때”이며 “구원의 날”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느 수녀원에 입회자가 없어지면서 이제 나이 많은 수녀님들만 남았습니다. 이 수녀원에서는 매일 저녁 성무일도를 성가로 바치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제 모두 할머니 수녀님들이라서 거친 목소리와 음도 높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도하다가 어이가 없어서 웃기도 하고 또 한숨을 내쉬는 수녀님들도 많아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 수녀님께서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딱 한 번만이라도 아름답게 기도를 했으면 합니다. 돈을 주고서라도 목소리가 고운 젊은 여성을 모시면 어떨까요?”
모두 한목소리로 찬성을 했고, 얼마 뒤에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젊은 여성을 모셔와 성무일도를 노래로 하게 했습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기도 시간이었습니다. 몇몇 수녀님은 성무일도의 노랫소리에 감동해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이 수녀원의 원장 수녀님은 만족스러운 성무일도 시간을 마치고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려고 했습니다. 바로 그때 하느님께서 이렇게 묻는 것이 아닙니까?
“수녀야! 오늘은 왜 기도를 안 하느냐?”
“하느님! 아까 정말 아름답게 노래로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하느님께서는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 그 노래? 그건 노래지. 기도가 아니잖느냐?”
아름다운 목소리만이 아름다운 기도를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감동적인 기도 내용만이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도 아닙니다. 투박하고 별 내용이 없어도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과 사랑으로 바치는 기도만을 하느님을 기쁘게 합니다.
오늘 ‘재의 수요일’을 시작으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는 사순시기를 보냅니다. 이 사순시기를 잘 보내도록 복음은 올바른 자선과 올바른 기도, 그리고 올바른 단식에 관해 이야기해줍니다. 단순히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행동이 아닌,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행동이 되어야 한다고 하지요.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선, 기도, 단식은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들이지 않는 가짜 행동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으신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깊은 참회와 보속의 시간을 갖게 되는 사순시기입니다. 이번 사순시기는 ‘나’에 초점을 맞추는 삶이 아닌, ‘하느님’께 초점을 맞추는 시간이 될 것을 계속해서 제시합니다.
이 모습이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생각하시는 진짜 자선이고, 기도이며, 단식입니다. 이를 통해서 하느님께 큰 기쁨을 전해드릴 수 있음을 기억하면서, 이번 사순시기는 오로지 하느님께 초점을 맞출 수 있었으면 합니다.


요즘 너무나 부부싸움을 심하게 하는 부부가 본당 신부님을 찾아갔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좋은 약이 있다면서 어떤 약을 가져와 주면서 말합니다.
“만약 화가 치솟거든 이 약을 물에 타서 드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반드시 입안에서 1분이 지난 후에 삼켜야 합니다. 삼킨 다음에도 1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으면 큰 효과를 볼 것입니다.”
신부님이 주신 약을 화가 날 때 물에 타서 먹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마음이 가라앉는 것입니다. 놀라운 약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러면서 부부싸움도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서로 화를 내지 않으니 싸움이 어떻게 생기겠습니까?
얼마 후에 약이 떨어졌습니다. 이 부부는 다시 신부님을 찾아가서 그 약을 다시 얻을 수 있겠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신부님은 놀라운 말씀을 하세요.
“사실 그 약은 비타민이에요. 싸움을 안 하게 된 것은, 그 비타민을 먹고 기다리는 동안 분노를 삭였기 때문입니다.”
‘'참을 인(忍)' 자 셋이면 살인도 피한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 참을 인(忍)자를 보면, 마음 심(心)자 위에 칼 도(刀)자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에 칼을 올려놓고 있습니다. 따라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참아야 합니다. 움직이면 칼에 의해 마음에 상처가 날 수 있으니까요. 이 참는 것이 바로 기다림입니다. 그리고 그 기다림이 소통의 시작입니다

혼자 있을 때 충전되는 사람, 사람 만나며 충전되는 사람
-전삼용신부-
오늘은 재의 수요일입니다. 사순절이 시작하는 날입니다.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며 머리에 재를 얹습니다. 우리 생의 목적지는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늘나라임을 상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이 세상 것에 집착하게 만드는 세 욕구를 끊을 것을 결심합니다. 그 방법으로 사순절에는 ‘자선-단식-기도’를 권장합니다. ‘세속-육신-마귀’를 끊는 전통적으로 권장하는 방법입니다. 복음 말씀도 이에 따라 자선과 기도와 단식을 하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가 특별히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자선할 때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고, 기도할 때도 골방에 숨어서 하고, 단식할 때도 머리에 기름을 바르라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나를 끊고 세상을 끊기 위함인데, 오히려 세상의 칭찬을 받아 나의 교만이 커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처럼 위선적인 신앙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뉩니다. 제가 나누는 방식은 ‘모기와 예수’입니다. 모기는 삼구에 빠져 생존 욕구에만 집착하며 남에게서 에너지를 찾는 사람이고, 예수는 나에게 있는 피를 남에게 나누어주며 타인에게 에너지를 주는 사람입니다.
첫 번째 부류는 세상 사람들을 만나며 에너지를 얻는 타입이고, 두 번째는 혼자 있을 때 에너지를 얻는 타입입니다. 첫 번째 부류는 혼자 있을 때 매우 힘들어하고 두 번째는 사람들과 있는 것이 힘이 듭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첫 번째 부류를 사람들은 원하지 않고 두 번째 부류를 더 좋아합니다. 첫 번째 부류는 부담스럽고 두 번째 부류는 자신들에게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두 번째 부류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 힘들고 에너지가 빼앗기고 혼자 있을 때 되살아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단식과 기도와 자선을 남모르게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혼자 있을 때 에너지를 얻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만나는 것으로 삶의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착각입니다. 물론 예수님과 같은 분을 만나면 그분의 피를 마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모기처럼 나의 피를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칭찬을 받아봐야 더 외로워질 뿐입니다.
영국의 문인 부르크가 미국여행을 떠나게 되었는데 부두에는 전송객으로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렸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한 전송객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서운함을 느낀 부르크는 부두에서 놀고 있는 한 어린아이에게 “얘야! 내가 네게 6실링을 줄 테니 내가 저 배를 타고 떠날 때 나를 보고 손을 흔들어 주렴.”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6실링을 받은 아이는 정말 열심히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부르크는 “돈 받고 흔드는 손을 보고 나는 더욱 고독을 느끼게 되었다.”는 고백을 했습니다.
외롭지 않으려 사람을 찾는 사람들의 운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외로움이 사람들을 통해 더욱 가중될 뿐입니다.
그러나 고독과 외로움을 직면하고 심지어 즐길 수 있다면 세상에 참으로 좋은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프랑스의 공학자였던 페르디낭 드 레셉이 지중해를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함께 여행 중이던 동료 한 사람이 갑자기 전염병을 앓게 되어 그들이 탄 배가 격리 조치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드레셉은 그 격리 상태로 인해 심한 좌절감과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홍해와 지중해를 잇는 운하 건설 가능성에 관해 연구인 찰스 레페레의 ‘회고록’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수에즈 운하 건설에 대한 세부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37년 만에 그 유명한 수에즈 운하가 완공되었습니다.
억지로라도 홀로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스마트폰을 끄고 촛불을 켜고 주님 앞에 앉으면 가장 좋습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세상과 나를 단절시키는 것만으로도 큰 이득을 얻습니다. 세상에 머무는 것 자체가 실제로는 나를 소진하는 행위입니다.
제가 군대 있을 때 사고를 크게 낸 적이 있습니다. 군용 트럭을 모는 운전병이었는데 전방에 있다가 춘천에서 군견과 군견병을 싣고 오는 길에 승용차를 들이받았습니다. 철책에서만 있다가 거의 8개월 만에 내려오니 너무 좋았습니다. 여자 선생님과 유치원 아이들이 노란 옷을 입고 걷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며 정신이 팔려있을 때 신호등이 바뀐 것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승용차는 폐차 당했고 타고 있던 사람은 타박상을 입어 병원에 2주 입원해 있어야 했습니다. 게다가 제가 운전하는 차에 탄 군견과 군견병은 상처를 입었고 괜히 저의 선탑자가 된 상관은 저와 함께 찻값을 물어주어야 했습니다.
내가 바깥에서 힘을 얻으려 할 때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나의 에너지는 내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바깥을 향하는 것들을 먼저 끊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께서 기도 안에서 오십니다. 단식이 그런 것입니다. 세상맛을 끊는 것입니다. 세상맛을 좋아하며 성령의 에너지를 얻을 수는 없습니다. 영과 육은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단식하며 기도하면 성령께서 나에게 내려오셔서 영적 에너지로 가득 찹니다. 그것을 이웃에게 쏟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보이기 위해 자선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을 수 없어서 하게 됩니다.
이번 사순절은 진정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며 삶의 에너지를 얻는 사람이 아니라 홀로 있으며 에너지를 얻고 사람을 만날 때는 그 에너지를 소진하는 사람으로 바뀌려고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 두 가지 타입이 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 신앙인이 선택해야 할 타입은 ‘홀로 있을 때 힘을 얻고 사람을 만날 때 그 에너지를 내어주는 타입’의 삶입니다.
누구나 결국은 혼자 있을 시간과 직면하게 됩니다. 그걸 두렵다고 세상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고독이 친구가 될 때 세상은 내가 필요하게 될 것입니다. 그 광야의 고독 안에서 주님께서 성령을 부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재형신부-
오늘은 재의 수요일입니다. 오늘부터 사순시기가 시작됩니다. 교회는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일상의 분주함 때문에, 세상의 일들 때문에 분주한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정말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삶의 길은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죄를 지은 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으며, 나의 구원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치셨음을 기억하는 시간입니다. 쾌락과 욕망과 시기와 질투의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자선과 단식과 기도와 나눔의 시간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오늘부터 40일 동안 ‘사순시기’를 지내게 됩니다. 1주일도 아니고, 10일도 아니고 40일 동안 준비를 하였습니다. 왜 40이라는 숫자일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성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성서에서 40이라는 숫자는 ‘정화와 단련’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40이라는 숫자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기도와 침묵’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하였을 때에 비를 내려서 벌하셨습니다. 노아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큰 배를 만들었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을 배에 태웠습니다. 그리고 비는 40일 동안 내렸습니다. 이때 40이라는 숫자는 하느님의 정화를 의미합니다.
모세는 40일 동안 기도하면서 하느님께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지냈습니다. 이때 40이라는 숫자는 기도의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 단식하면서 기도하였습니다. 이때 40이라는 숫자의 의미는 새로운 일을 하기 위한 준비의 시간입니다. 교회는 성서의 이와 같은 40이라는 숫자가 가지는 의미를 받아들여서 주님의 부활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40일을 마련하였습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40일 동안 주님의 수난과 고통을 묵상하면서 지내게 됩니다. 주님의 수난과 고통은 바로 죄를 지어서 하느님과 멀어진 우리들을 구원하기 위한 것임을 묵상하면서 주님의 크신 자비를 감사드리며, 주님의 수난과 고통의 길에 동참하도록 다짐하는 것입니다.
사순시기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2020년 3월 27일입니다. 로마의 바티칸 광장에서 교황님은 홀로 기도하였습니다. 코로나19로 고통 중에 있는 모든 이를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어두운 밤, 비가 내리는 바티칸 광장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홀로 기도하셨듯이, 교황님은 홀로 기도하였습니다. 폭풍에 흔들리는 배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하였듯이, 교황님은 코로나19로 흔들리는 지구라는 배에서 예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약한 제자들을 책망하시면서 폭풍을 잠재우셨습니다. 교황님은 믿음이 약한 우리가 코로나19의 폭풍을 이겨낼 수 있도록 기도하였습니다. 사순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청하면서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2000년 5월의 어느 날입니다. 한 형제님이 본당의 사무실로 찾아왔습니다. 10년 전에 본당은 공소였다고 합니다. 군 생활이 힘들 때면 공소에 와서 기도했다고 합니다. 다행히 군 생활을 잘 마치고 무사히 제대했다고 합니다. 사회에 나가서 작은 사업을 시작하였고, 조금 성공했다고 합니다. 힘들 때 위로가 되었던 공소를 찾아왔는데 본당이 되었다고 기뻐하였습니다. 후원금을 주고 갔습니다. 당시 아이들을 위해서 컴퓨터 교실을 만들려고 했는데, 후원금으로 컴퓨터 교실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 손이 모르게 후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름도 모르는 형제님이 생각납니다. 사순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내가 가진 것을 이웃에게 나누면 좋겠습니다.
1983년 5월 18일입니다. 당시 야당 대표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단식을 시작하였습니다. 단식은 23일간 계속되었습니다. 단식의 이유는 “언론 통제의 전면 해제, 정치범 석방, 해직 인사들의 복직, 정치활동 규제의 해제, 대통령 직선제를 통한 개헌”이었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단식은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단식은 민주화를 향한 대중의 잠자던 저항의식을 깨우는데 일조했습니다. 단식투쟁은 정치군인들에 의해 무참히 짓밟힌 민주화의 열망을 다시금 불러일으키게 만든 촉매제 역할을 하였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의 말씀이다. 이제라도 너희는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사순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단식을 통해서 가난한 사람, 배고픈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들을 도와주면 좋겠습니다.
사순시기가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입니다. 소중한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잠시 꺼주셔도 좋다는 휴대폰 광고가 기억납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예수님과 함께하는 사순시기에는 다른 것들은 잠시 멈추는 것도 좋겠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의 잘못을 뉘우치며, 자선과 기도와 단식을 통해서 사순시기를 지내면 좋겠습니다.

옷이 아니라 마음을 찢으십시오. 주 하느님께로 돌아오십시오!
-양승국신부-
불충실한 이스라엘을 향한 하느님의 진노는 다양한 방법으로 전달되었습니다. 전쟁이나 대학살, 계속되는 가뭄과 그로 인한 대기근 등등. 재앙 중에 특별한 재앙이 한 가지 있었는데, 엄청난 메뚜기떼의 급습이었습니다. 그들이 한번 휩쓸고 지나가면 남아나는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요엘 예언자의 경고입니다.
“셀 수 없이 많고 힘센 족속이 내 땅을 쳐 올라왔다. 그들의 이빨은 사자 이빨 같고 암사자의 엄니 같다. 그들이 내 포도나무를 망쳐 놓고 내 무화과나무를 쪼개어 껍질을 벗기고 내던져 버리니 가지들이 하얗게 드러났다.(요엘서 1장 6~7절)
요엘 예언자도 참 못할 일이었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에게서 달콤한 하느님 위로의 말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격려나 칭찬, 해방의 기쁜 소식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의 입에서 흘러 나온 말은 섬뜩하기 그지 없는 메시지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에 대한 신랄한 고발과 강력한 경고, 공포로 가득한 멸망의 예고였습니다. 그러면서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가슴을 쥐어 뜯으면서 울부짖으라고 외쳤습니다.
“사제들아, 자루옷을 두르고 슬피 울어라. 제단의 봉사자들아, 울부짖어라. 내 하느님의 봉사자들아, 와서 자루옷을 두르고 밤을 새워라. 너희 하느님의 집에 곡식 제물과 제주가 떨어졌다.”(요엘서 1장 13절)
다행스럽게도 요엘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계속해서 코너로 몰아넣지만은 않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정성있는 회개와 참된 단식을 통해 하느님의 자비가 베풀어질 것임을 선포합니다.
“이제라도 너희는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옷이 아니라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 그는 너그럽고 자비로운 이, 분노에 더디고 자애가 큰 이, 재앙을 내리다가도 후회하는 이다.”(요엘서 2장 12~13절)
요엘 예언자는 이스라엘에게 닥친 대재앙, 그로 인한 시련의 원인이 바로 자신의 죄와 부족함이라는 것을 인식하라고 가르칩니다. 또한 옷만 찢지 말고 마음을 찢어라고 강조합니다.
형식적이고 외적인 회개가 아니라 진정성 있는 내적 회개를 촉구합니다. 또한 요엘은 특정한 한 사람이나 집단의 회개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모두의 범국민적, 범국가적 회개를 요청했습니다.
또 다시 재의 수요일입니다. 재를 머리에 얹으며 생각해보니, 우리 모두는 영원하신 하느님 앞에, 너나 할 것 없이 손톱만한 도토리들입니다. 티격태격, 아옹다옹하면서 ‘내가 더 높네. 내가 더 크네. 내가 더 대단하네.’ 외치지만, 하느님 눈에는 모두가 그놈이 그놈입니다. 결국 우리 모두는 잠시 떠다니다가 하느님 자비의 품을 향해 사라질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광대무변하시고 영원하신 주님,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하신 주님 앞에 우리는, 너무나 작고 미약한 존재라는 진리를 잊지않고 살아간다면, 우리 공동체의 삶이 한결 부드러워질 것입니다. 내가 선배인데, 내가 연장자인데, 내가 원장인데, 내가 회장인데, 하며 어깨에 힘줄 이유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인간 존재의 영원한 결핍성과 티끌보다 작음을 잊지 않는다면, 서로를 향한 날카로운 시선도 조금은 부드러워 질 것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남는 것은 이웃을 향한 측은지심이요, 진한 동지의식일 것입니다.
크신 주님의 바람에 우리를 내맡겨야겠습니다. 주님께서 한 줄기 작은 연기같은 우리를 당신 크신 사랑과 자비의 바람에 합류시켜 주실 것입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않도록 조심하여라
-이영근신부-
오늘은 재의 수요일입니다.
사순시기가 시작되는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를 ‘회개’에로 초대합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주 너희 하느님께로 돌아오너라.”(요엘 2,13)는 말씀으로 요약됩니다.
<제1독서>에서 예언자 요엘은 ‘옷이 아니라 마음을 찢고, 단식하고, 울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라’고 합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과 화해하고 은혜로운 구원의 날을 맞이하라’고 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위선자들처럼 자신의 의로움을 보이려고 자선과 기도와 단식하지 말고, 숨어계신 하느님의 의로움으로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회개는 몸과 옷을 찢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찢는 뉘우침이며, 자신을 드러내는 의로움이 아니라 하느님에게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의 회칙 <신앙의 빛>에서는 ‘회개’를 “주님을 향해 거듭 되돌아가는”(13항)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회개가 지속적이어야 함을 말합니다.
곧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에 우리 자신을 맡기며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 거듭해서 기꺼이 변모되려”(13항) 하는 것입니다. 수도승들은 이 지속적인 회개의 삶을 생활방식으로 채택하고 ‘제2서원’으로 삼아 살아갑니다.
이처럼, ‘회개’는 뉘우침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옴이라는 실행을 요청합니다.
곧 마음만 찢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행동을 요구합니다.
여기에는 자신을 낮추는 ‘겸손’이 요청되고, “용기를 요구”(14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 6,1)
이는 의로움의 본질이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임을 말해줍니다.
곧 의로움이란 하느님 앞에 놓인 처지임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사람들 앞에 드러난 행동이나 결과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 생각을 보십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의로운 생활의 중심은 ‘자선’과 ‘기도’와 ‘단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의로움을 통하여 하느님과의 올바로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의로움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인정받고 칭찬받고 보상 받고자 했습니다.
혹 우리도 그러고 있지는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기도나 봉사나 사랑을 통해서도 그럴 수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나의 경건함을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도구가 되고 있다면 말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께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자신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있다면 말입니다.
그러니 늘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마태 6,6)의 현전을 마주하고 있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 6,1)
주님!
선을 과시하지 않고, 악을 거짓으로 치장하지 않게 하소서!
마음의 단식으로 당신을 섬기게 하시고, 제 마음이 당신 사랑에 씻기게 하소서!
사람들 앞에서 의로움을 드러내지 않게 하시고, 기도로 마음이 순결하게 하소서!
당신 앞에 머무르게 하시고, 당신의 영으로 차오르게 하소서. 아멘.

기쁨을 준비하라
-반영억신부-
부활의 기쁨을 준비하는 사순절입니다. 사순이라는 말은 40일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중대한 사건을 두고 그를 준비하는 기간을 상징합니다. 모세는 십계명을 받기 전 40일간 재를 지켰고, 엘리야도 호렙산에 갈 때 천사가 주는 음식만 먹으며 40일을 걸었으며, 예수님께서도 공생활 전 40일 동안 단식과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사건인 부활을 제대로 준비하기 위해 40일간의 기간을 정하여 기도와 희생으로 재를 지키는 것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부활의 영광이 없다면 그 믿음은 헛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몸소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에게 부활의 희망을 안겨주셨습니다. 따라서 부활의 기쁨이 큰 만큼 거기에 걸 맞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은 그것을 자선과 기도, 단식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단식은 자신에 대한 절제와 극기의 상징입니다. 그냥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한 부분입니다. 단식을 함으로써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겪으신 배고픔의 의미를 깨닫게 되고 그 순간부터 배고픈 이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애정을 느끼며 온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돕는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내가 허기져봐야 굶주린 이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게 됩니다. 단식을 통해 나 자신과의 관계를 회복합니다.
기도는 내 삶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알게 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함으로써 하느님과 통교하게 됩니다. 마치 전등이 발전기와 연결됨으로써 빛을 발하듯 기도는 우리를 하느님과 연결시켜 줍니다(구엔 반 투안 대주교). “기도는 심장과 심장의 만남입니다.” 사실 기도는 사람들이 들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안에 살려면 호흡을 하듯이 기도해야 합니다. 왜 호흡을 해야 합니까? 하지 않으면 이미 죽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기도하지 않으면 이미 신앙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수록 그만큼 더 가치가 있습니다(샤를 드 푸코).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합니다.
자선은 단식과 기도의 자연스런 결과입니다. 기도의 열매는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풀어야 합니다. 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마지못해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하고 또 민첩하게 해야 합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누가 보든 그렇지 않든 자선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바치는 좋은 예물입니다. “자선으로 씨를 뿌리면 열매는 천국에서 넘치도록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저함이 없이 베푸십시오. 주님께서는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 하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자선을 통해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합니다.
기도와 단식, 그리고 자선은 서로를 보완해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이웃, 나 자신과의 관계를 말해 줍니다. 어느 하나가 빠지면 다른 것이 불완전 해 집니다. 그러므로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재의 수요일을 맞으면서 기도하고 단식을 지켰는가? 그렇게 하셨다면 그 희생을 무엇을 위해 사용하려고 마음먹었는가? 사실 아침을 굶고 나니 배가 고파요. 그래서 점심을 평소보다 더 많이 잡수셨어요. 그렇게 한다면 알맹이가 빠진 것이지요. 평소에는 굶어도 굶었다는 생각도 없이 지나치는데 사순절이 되면 유난히 배가 고파 옵니다. 합동 판공성사에 다니다 보면 알게 모르게 살이 올라요. 가는 곳마다 오랜만에 오신 신부님 대접한다고 고기에, 회에 넘치도록 챙겨주시거든요. 마음을 먹고 무엇인가 하려고 할 때 유혹의 빌미는 항상 생기게 마련입니다. 핑계거리는 늘 있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해요. 그러면서 하루세끼 식사는 꼭 챙겨 드시려고 하거든요. 오히려 너무 바빠서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도록, 바빠서 제 길을 걷지 못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내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리고 자선은 베풀면 베풀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아쉽고 아까운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시면 하실수록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나중에 한꺼번에 좋은 일을 하겠다고 하시는 분은 평생 아무 일도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일상생활의 작은 일에서부터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순절을 맞이하여 외적인 기도와 단식, 자선에 앞서 마음의 단식과 자선, 그리고 기도에도 소홀함이 없기를 바라며 하루하루를 은혜로운 때, 구원의 날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 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회 개
-송영진신부-
‘회개’는 여러 단계로 구분됩니다.
1) 자기가 지은 죄를 인정하고, 그 죄를 뉘우치는 것은 첫 번째 단계입니다.
그 단계는 ‘회개의 시작’입니다.
<배반자 유다는 자기 죄를 뉘우치긴 했는데(마태 27,3),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않고 자살해 버렸습니다(마태 27,5).
그래서 그는 회개하지 않은 채로 죽었고,
‘배반자’ 라는 말이 영원히 그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2) 죄를 뉘우친 다음에 주님의 자비를 믿고 용서를 청하는 것은
두 번째 단계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작은아들은 죄를 뉘우친 다음에
집으로 가서 아버지에게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루카 15,21).
이 말은 ‘벌’을 달라는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
용서해 달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3) 용서를 받은 다음에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보속입니다.
성실하게 보속을 하는 것이 회개의 세 번째 단계입니다.
보속은 죗값을 치르는 일이기도 하고,
잘못한 일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보속은 ‘벌’이 아닙니다.
회개하는 사람이 행동으로 회개를 실천하는 일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라는 말을 했습니다(마태 3,8).
이 말은, 행동으로 실천하는 회개를 하라는 뜻이고,
제대로 ‘보속’을 하라는 뜻입니다.
4) 회개는 보속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주님과 함께 살면서 주님의 뜻을 ‘온 삶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이것이 회개의 마지막 단계입니다.
그런데 주님과 함께 사는 것과 주님의 뜻을 ‘온 삶으로’ 실천하는 것은
한 번에 끝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끊임없이 계속해야 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은 회개하는 생활이고,
회개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죄’는 ‘구원의 길’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회개’는 ‘올바른 길’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그러나 돌아갔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길에서 다시 벗어나지 않도록 계속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고,
바로 그 노력도 회개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꾸짖으신 일이 많은데,
특히 그들의 ‘위선’을 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재의 수요일’마다 듣게 되는 복음 말씀은,
자선과 기도와 단식을 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하면 안 된다는 훈계 말씀입니다.)
‘위선’은 사람들을 속이고, 하느님도 속이려고 하는 큰 죄입니다.
회개할 때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위선’입니다.
‘위선자의 겉으로만 하는 회개’는 회개가 아니고, 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루카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사이는 대표적인 위선자입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8,10-14).”
이 비유에 나오는 바리사이는, “나는 죄인이 아니다.(나는 의인이다.)” 라고
자기 입으로 아주 당당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가 의인으로 인정받지 못했다고,
즉 하느님께서 그를 의인으로 인정하지 않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바리사이의 죄는 무엇일까?
그가 구체적으로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에(루카 18,9),
일단 이 바리사이의 죄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한 죄’, 즉 교만죄와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긴 죄(다른 사람들을 죄인 취급한 죄)’,
즉 이웃사랑을 거스른 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죄는 모두 하느님의 권한을 침해한 죄(신성모독죄)이기도 하고,
위선죄이기도 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나는 죄가 없으니 회개할 필요가 없다.” 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죄를 짓는 일입니다.
반면에, 비유에 나오는 세리는 자기가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있고,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고 겸손하게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기만 합니다.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서 집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의 회개를 진실한 것으로 인정해 주셨다는 뜻이고,
또 그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가 돌아가서 보속을 실천했을 것이고,
죄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인생을 살기 시작했을 것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라는 말씀은,
“누구든지 진실하고 겸손하게 회개하는 이는 하느님의 용서를 받지만,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이라고 스스로 자처하는 교만한 위선자들은
하느님의 용서를 받지 못한다.”로 해석됩니다.
(교만한 위선자들 경우에, 하느님께서 그들을 용서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안 받으려고 해서 못 받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것은 용서를 안 받으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재의 수요일’에 거행하는 ‘재를 머리에 얹는 예식’은,
“인간이란 주님께서 구원해 주시지 않으면 흙으로 돌아가야 할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창세 3,19) 깨우쳐 주는 예식이기도 하고,
“주님 뜻에 합당하게 회개하면 흙으로 돌아가는 허무에서 벗어나게 된다.”
는 것을 가르쳐 주는 예식이기도 합니다.
교만한 위선자들은 흙으로 돌아가서 먼지처럼 사라지는 길을 선택하는 자들이고,
진실하고 겸손하게 회개하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입니다.

복음: 마태 6,1-6.16-18: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이다
-조욱현신부-
오늘은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이다.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가리키는 숫자이다. 하느님께서는 노아 홍수 때 40주야 동안 폭우가 내리게 하여 심판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400년을 종살이하였으며,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전에 40 주야를 단식과 기도로 지냈고,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에 도착하기까지 40년이나 걸렸다. 예수께서도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40 주야를 광야에서 기도와 단식으로 준비하신 것을 알 수 있다. 오늘 시작되는 사순절도 오늘부터 시작하여 부활 때까지 주일을 제하고 세어보면 40일이 된다. 교회가 이렇게 사순절을 제정한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순절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으로 차지하신 영광스러운 부활의 기쁨을 누리고 그분의 영광에 우리도 참여하기 위하여 그분의 수난에 우리가 참여하는 시기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로 돌리는 회개와 보속의 시기이다. 이럼으로써 우리 자신이 진정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사랑받는 자녀들이 되어 그 영광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시기이다. 그래서 교회는 오늘 “재의 예절”을 거행한다. 이 재의 의미는 회개와 보속, 죽음과 겸손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머리에 재를 받는 것은 우리 죄로 인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및 부활에 참여하기 위하여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보속 하겠다는 약속의 표시이다.
이 재의 예절은 우리가 우리 자기 죽음을 미리 묵상하게 한다. “사람아,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라고 한다. 이것은 우리의 현세적인 삶의 종착점인 죽음을 생각하게 함으로써 이기적인 생활과 그럼으로써 하느님을 멀리 떠난 삶에서 회개와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으로 돌아서게 하는 데 있다. 죽음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어떤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그리고 어떻게 죽음을 맞을 것인가를 알며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재는 한 줌의 흙이다. 우리가 죽어 땅에 묻히면 한 줌의 흙이 된다. 그 자리에는 아무런 형체도, 권세도 명예도 볼 수 없다. 이러한 의미를 가진 재를 교만과 명예의 자리인 머리에 얹음으로써 인생무상과 자신의 나약함을 깨닫고 겸손하라고, 자신의 본 모습을 찾으라고 하는 것이다. 겸손하지 못하면 회개와 보속의 실천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선을 행하지 말라고 경고하시면서 자선과 기도, 단식에 관한 세 가지 본보기를 알려주신다. 자신의 덕을 내보임으로써 사람들의 칭찬을 얻으려 하지도 말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넘치게 기도하면서 자기의 신심을 자랑하지도 말라고 하신다.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2절) 내가 하는 일을 떠벌이지 말라는 뜻이다. 인간의 찬사를 얻으려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은 신심 깊은 마음의 자세가 아니기 때문이다. 친절한 행동은 그 자체가 나팔이다. 그러기에 숨겨야 할 것은 그런 행동이나 장소보다도 베풀려는 뜻이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3절) 이 말씀 역시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인데, 할 수 있으면 우리가 선을 베풀 때, 베푸는 손조차도 그 사실을 모르게 하라는 말씀이다. 또한 이 말씀은 오른손은 의인과 의로운 행위를 뜻하고 왼손은 죄인과 죄가 되는 행동을 의미한다. 그래서 어떤 일이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이루어지려면, 의인인 오른손은 왼손이 하는 일을 몰라야 한다. 즉 우리가 충실하고 신심 깊게 행하기 위해서는 죄안들 앞에서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6절) 우리의 기도는 인간에게 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어디에나 계시며 우리가 말하기도 전에 들으시고 마음의 비밀을 이미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그분께 기도하면 우리는 큰 상을 받을 것이다.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6절) 하시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서 상을 받으려 하는 자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또 다른 상을 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16절) 교회도 또한 이 시기에 극기와 절제를 통하여 이웃에게 선을 베풀어 그리스도를 닮고, 어느 때보다 기도를 많이 하여 은총을 받고자 마음을 모으는 때이며, 예수님의 부활 영광을 우리도 누리기 위해 속죄하도록 초대하고 있다. 이 사순시기를 통하여 우리가 더 하느님의 자녀로서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마태 6, 6)
-한상우신부-
재를 머리에
얹고
십자가를
바라본다.
더더욱
특별한
사순의
시작이다.
사람의
광야는
쓰리고
아프다.
사람에게는
사순의
여정이 있다.
사순의
여정은
하느님을
다시 찾는
회개의
여정을
동반한다.
사순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특별한
은총이다.
새 사람이
되는 여정은
십자가를
언제나
동반한다.
십자가처럼
재와 같이
죽지않고서는
부활이 있을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이 길을 몸소
걸으셨다.
수고로움과
열매
고통과 성장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데려다 놓는
은총이다.
밀알은 흙에
떨어져
죽어야 한다.
최고의 은총은
우리의 자아가
껍질을 벗고
죽는 변화의
은총이다.
십자가의
시간을 사는
우리들 삶이다.
삶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다시금 묻는
재의 수요일
아침이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참모습을
만나는
은총가득한
사순시기 되시길
기도드린다.
사순은
사랑이다.
사랑은
아프고
사랑은
기쁘다.
사순의 여정
이 사랑의
여정을
이제 떠나보자.
떠나지 않고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하느님 사랑이다.
예수님께서
이 길을 먼저
걸어가신다.
사순은
기도이며
회개이며
변화이다.

-오상선신부-
사순 시기를 시작하는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께로 더 가까이 오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마태 6,6.18)
자선과 기도와 단식은 하느님과 우리 관계를 돈독하게 해 주는 도구들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나누는 사랑이고, 자선은 기도의 열매를 이웃과 나누는 사랑입니다. 단식은 우리가 무례하게 탐닉하고 착취해온 피조물과의 관계를 잠시 멈춤으로써 모든 피조물에 대한 존중을 회복하는 사랑입니다.
기도와 자선과 단식은 인간의 기본 욕구와 욕망을 제어하는 수고와 희생, 인내가 따릅니다. 그래서 사랑과 절제와 거룩함의 척도가 되기도 하지요. 하지만 타인에게 그러저러한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하는 코스프레가 아니라 숨어 계신 아버지와 우리 자신 사이의 내밀한 사랑일 때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와 자선과 단식에 있어서 율법이 정한 격식을 공개적으로 행하면서 자신들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기존 종교 권력자들의 위선을 지적하십니다. 하느님은 죽은 문자의 엄수보다 우리의 진정한 마음을, 사랑을 원하시니까요.
제1독서에서는 요엘 예언자의 입을 통해 주님의 바람이 선포됩니다.
"이제라도, 너희는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요엘 2,12)
주님은 사실 백성이 바치는 갖가지 재물에는 관심이 없으십니다. 세상 모든 것이 원래 당신의 것이니 무엇도 모자라고 갈급하실 리 없으시지요. 그분은 당신이 주신 것 중에서 무언가를 다시 되바치는 인간의 마음을 보시고, 또 기다리십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우리를 기다리시는 그분께 마주 나가야 하는 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강조합니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2코린 6,2)
주님은 교회의 전례주년을 통해 우리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고 또 좋은 지향을 품고 살면서 이웃의 어려움까지 헤아려 주지만, 번번이 죄에 걸려 넘어지는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는 겁니다.
"지금"은 우리 마음과 영혼을 다시 새롭게 정화해 주님 앞에 거룩히 설 수 있게 해 주는 선물입니다. 그리고 오늘 또 다시 그 "지금"이 우리 앞에 펼져졌습니다. 죄인인 우리가 뭐라고 만물의 주인이신 분께서 우리 마음을 얻고자 그토록 간절히 기다리시는지 놀랍습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우리가 뭐라고 엇나가고 빗나가도 용서와 자비를 베푸시며 새롭게 해 주시는지 송구할 따름이지요.
작년에 이어 팬데믹 상황에서 두 번째로 맞는 올해의 사순 시기는 주님과 더 내밀한 관계로 들어가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숨어 계신 아버지 앞에 나아가 온 마음으로 사랑을 고백하고, 그 사랑을 조용히 이웃과 나누며, 형제인 피조물 앞에서 겸손히 자신을 비우는 은총의 시간이 우리에게 허락되었으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매일 매 순간 다가오는 "지금"을 충실히 채워나가면서 고요히 신앙과 사랑의 내공을 쌓는 시간 되시길 축원합니다. 더 단단해지고 더 충만해진 영혼으로 십자가의 주님을 껴안는 그날까지 서로 격려하고 나아갑시다. 이 십자가의 길에 함께 동행하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은혜로운 사순절 되십시오!

영적 다이어트
-김찬선신부-
“주 너의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그는 너그럽고 자비로운 이.”
올해도 사순절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런데 수십 년을 지냈는데도
사순절을 맞이하는 것은 매번 부담스럽고 올해도 부담스럽습니다.
이렇게 사순절을 맞이하고 보내는 나를 하느님께서 좋아하실까요?
그런데 왜 부담스러울까 생각해보니
사순 시기가 단식이니 회개니 하는 잿빛 색깔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사순 시기 첫날이 재를 머리에 얹는 재의 수요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재계와 단식을 사순 시기의 목표로 삼지 말고
주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목표로 삼으면 어떨까요?
무엇의 실천이 아니라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
하기 싫은 무엇을 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하느님께 돌아가는 겁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하느님을 얼마나 사랑하느냐이겠습니다.
사랑하는 만큼 돌아가고픈 갈망이 클 겁니다.
사랑하는 만큼 돌아가는 길이 기쁘고 즐거울 겁니다.
사랑하는 님 만나기 위해서면 하던 일 그만두는 거 어렵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님 만나기 위해서라면 못할 게 뭐겠습니까?
얼마 전 젊은이들과 뷔페를 같이 먹었습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외식하러 가면 무엇을 먹을지 고르는 것이 괴롭고,
맛있는 것을 먹어도 예전처럼 그리 맛있지 않아
숫제 집에서 먹는 것이 편하고 좋은 저이다보니
맛을 그렇게 즐기는 그들의 싱싱하고 푸르름이 너무 아름답고,
왕성한 식욕과 엄청 먹을 수 있는 그들의 위대胃大함에 놀랐습니다.
그리고 젊은 사람들이 잘 먹는 것만 봐도 흐뭇해하시던
옛날 어르신들의 그 마음이 너무도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젊은이들이 연애를 하게 되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그 좋아하는 것을 절제합니다.
아니, 잘 보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사랑하는 사람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이지요.
아름답게 자신을 가꾸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부합하기 위한 사랑의 단장 말입니다.
사순 시기 재계와 단식도 하느님 사랑을 위한 영적 다이어트입니다.
시편과 성녀 글라라가 말씀하시듯 사랑하는 님에게 맞갖게
덕으로 자신을 가꾸고 치장하라는 것인데
그 덕행들 중의 하나가 재계와 단식입니다.
그러므로 단식, 그거 사랑입니다.
기도만 사랑이 아니고,
자선행위만 사랑이 아니고,
재계와 단식도 사랑입니다.
사순 시기에 우리가 실천하는,
그래서 사순 시기를 시작하는 오늘 복음에서 들은 세 가지 실천,
기도,
자선,
단식은 다 사랑입니다.
사랑 아니면 굳이 할 필요 없습니다.
억지로 하는 기도, 주님 원치 않으시고,
아까워하며 하는 자선, 주님 원치 않으시고,
인상 찌푸리고 하는 단식, 주님 원치 않으십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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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 14일 연중 제6주일 (0) | 2021.0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