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2월 18일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Margaret K 2021. 2. 18. 08:13

2021년 2월 18일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루가 9,22-25)

 

 Whoever loses his life 
for my sake will save i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형순신부-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행복하신가요? “그렇습니다!”라고 쉽게 대답할 수 있다면 우리는 성숙한 신앙인일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행복합니다!”라고 대답할 수 없는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주일은 주님의 날이 아니라 일요일입니다. 쉬는 날이었지요. 그런데 예수님을 알고 난 뒤에는 일요일이 주일이 되고, 동시에 주일의 의무가 생겼습니다. 미사 참례를 못 하면 다음 주일에 성체를 모시지 못하고, 성체를 모시려면 고해성사를 보아야 하는, 불편한 과정이 생겨납니다. 자연스레 피로도가 올라갑니다. 그뿐만이 아니지요. 성당에 오랜 기간 나가지 않고, 정기적으로 판공성사를 보지 않으면, 가혹하게 들리는 ‘냉담 교우’라는 주홍글씨가 부여되는 것만 같습니다. 불편합니다. 게다가 이웃과 사이가 나빠지기라도 하면 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행복해지고 싶은 마음에 성당에 나오기 시작하였는데, 지치고 힘든 마음을 예수님께 의지하고자 성당에 나왔는데, 짐과 멍에가 더 부과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시는 행복을 얻으려면 거기에 어울리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일요일을 쉬는 날이 아닌 주님의 날, 곧 주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미사를 의무가 아닌, 예수님께서 거저 마련하신 잔치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미운 사람을 불편하게만 생각하지 않고, 그도 예수님께서 소중하게 여기시는 사람으로 바라보는 새로운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예수님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앙은 예수님 때문에 내 기준과 생각을 내려놓고, 주님의 눈과 마음으로 세상을 보겠다는 결심입니다. 이 결심을 실천하는 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됩니다. 노력하는 그 여정은 쉽지 않겠지만, 세상이 주는 것과는 다른 행복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코로나19 장기화로 하던 사업을 접게 된 친구가 있습니다. 어느 날 너무 힘들다면서 제 목소리를 듣고 싶다고 전화를 했더군요. 한참 동안 이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줬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리고 지금의 어려움도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며칠 뒤에 이 친구로부터 또 전화가 왔습니다. 힘들어서 다시 전화를 한 줄 알았는데, 제가 걱정하고 있을까 봐 전화했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사업을 그만둔 것에 대해 분노를 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다시 힘을 내서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커다란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제까지 느끼지 못했는데, 자기에게는 가족이라는 큰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내와 아들, 딸이 있는데, 실패한 것에 계속 매여 있어 봐야 뭐하냐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지금은 아는 선배 밑에서 일을 배우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거의 평생을 사장으로만 있었던 친구가 누구 밑에서 직원으로 사는 것입니다. 가족이 있어서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행복하여지려면 회복 탄력성이 좋아야 한다고 합니다. 힘든 일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인데, 이를 경험한 뒤에 다시 회복하는 힘이 얼마냐에 따라 그 사람의 행복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회복 탄력성이 높은 사람은 의미를 부여하는 힘이 높다고 합니다. 즉, 자신의 가치와 목적에 근거해 희망을 품는 것입니다.

우리의 회복 탄력성을 높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 의미 찾게 온 힘을 기울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의미는 내 가족이 될 수도 있고, 친구도 될 수 있으며, 내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그마한 어떤 것도 의미가 될 수 있다면, 삶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의미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십니다. 부활이라는 것은 영광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지만, 수난이라는 고통의 시간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주님께서는 제자가 되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이야 십자가가 주님을 따르는 길임을 알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커다란 중죄인이 당하는 사형 형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형 형벌을 당해야 한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가 있었겠습니까? 제자들은 이 말씀이 그저 하나의 은유 정도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십자가를 져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를 위해 죽을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드러내는 삶이 아닌 주님을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이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삶이 아닌 주님의 사랑을 채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의미 있는 모든 행동이 나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이라는 커다란 선물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옳은 행동을 하고 남보다 먼저 모범을 보이는 것이 교육이라는 것이다(순자).

노력의 문

일생을 문밖에서 서성이며 기다린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단 한 번도 문 안으로 들어가 보지 못하다가 죽을 무렵이 돼서야 문지기에게 “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나요?”라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문지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문은 당신이 먼저 열어 달라고 해야 열리는 당신의 문입니다.”

문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만 있었지, 열어 달라고 부탁을 하지 않아서 또 열려고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 안에 들어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모습을 취하고 있는 우리가 아닐까요? 어떤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또 어떤 시도도 하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우리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던 것이지요.

시도도 안 해보고 후회하는 것보다 시도라도 해보는 것이 인생의 가치를 높이지 않을까요?

 십자가 "세 개의 못"의 의미

-전삼용신부-


사순절은 자기를 죽이는 시간입니다. 자기를 버려야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도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야 하는 것처럼,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기를 죽이는 십자가의 삶이 어떠한 방법으로 이뤄지는지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집니다. 답은 뻔한 것이지만, 이영숙 베드로 수녀님이 만난 또 한 명의 사례를 통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대건 안드레아 형제님은 간암으로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하고 있었습니다. 이분의 특징은 5분마다 진통제를 놔 달라고 찾는 것입니다. 방금 진통제를 놓았는데도 5분도 안 되어서 한 시간이 지났다며 매우 고통스러워하였습니다.

 

      수녀님은 형제의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물었습니다. 대건 안드레아 형제는 일 때문에 춘천에 내려가 살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시골 성당이지만 잘 다녔습니다. 그런데 워낙 봉사할 사람이 없어서 본당 신부님이 총회장 좀 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하지만 학력이 떨어지는 노인분들만 있는 곳에서 봉사하다가는 고생만 할 것 같아서 끝까지 거부하다 그것도 힘들어 오랜 시간 냉담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초등학교 나온 총회장과 글도 제대로 모르는 사무장이 있는 시골 성당을 조금은 무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과 어울려 골프, 테니스, 등산 등을 즐겼습니다. 암이 찾아오기까지 그의 삶은 행복 자체였습니다.

 

      수녀님은 그 형제가 수없이 돌아다닌 즐거웠던 여행 기억들을 기쁘게 들어주었습니다. 그러자 형제는 자신도 모르게 몇 시간을 아픈 줄 모르고 여행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진통제도 없는데 아픔을 잊은 것에 깜짝 놀랐습니다. 형제는 설악산도 못 가본 수녀님에게 꼭 좋은 곳을 구경시켜 드리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수녀님은 형제가 묵주기도라도 할 수 있게 묵주반지 하나를 끼워주었습니다. 냉담하며 기도하는 법을 다 잊은 그 형제에게 묵주기도 하는 방법을 알려주고는 병실에서 나왔습니다. 방문할 때마다 자신이 갔던 아름다운 곳의 이야기를 수녀님에게 해 주며 고통을 잊었고 그렇게 며칠이 흘렀습니다.

 

      수녀님 침실에서는 호스피스 병동이 다 보였습니다. 늦게까지 불이 꺼지지 않는 병실은 분명 고통 때문에 잠을 못 이루는 환자들 방이었습니다. 가족이 춘천에 살아서 그 형제에게 아내는 주말에만 찾아왔습니다. 수녀님은 참 안타까워서 밤에 일어나 그 형제 방을 찾아갔습니다. 형제는 아픔을 잊기 위해 손가락에 낀 묵주를 돌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손가락이 까맣게 죽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수녀님은 묵주반지를 빼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단호히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요, 수녀님. 손가락이 끊어져도 저 이거 안 뺍니다. 제가 그동안 기도를 건성으로 했었습니다. 남을 위한 기도도 안 해 봤고, 부모님 연도도 진심이 아니라 형식적으로 했습니다. 수녀님이 부모님을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나한테 상처 준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라고 하셨으니 한번 해 보자, 해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비몽사몽 성모송을 하는데, 제 뒤에서 누군가 어깨를 안아주는 걸 느꼈습니다. 꿈인가 생시인가 해서 돌아보는데 꼭 어머니가 저를 품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처음에는 ‘우리 어머니인가? 마누라인가? 누가 나를 안아주지?’ 했는데, 나중에 보니 성모님이셨습니다. 그때 밤새 아프던 고통이 다 사라지더라고요. 그렇게 제가 대여섯 번은 성모님께 안기는 느낌을 받고 통증에서 벗어났습니다.”

 

      형제님은 그렇게 아버지 임종도 지켜드리지 못한 죄책감을 덜어냈고 지금까지 앙금이 있던 모든 사람을 기도로 용서했습니다. 그리고 병자성사를 통해 그동안의 모든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신부님의 안수를 받으면서는 자신만을 위해 살아온 삶이 후회되었는지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습니다. 그리고 편안한 모습으로 선종하였습니다.

 

      장지는 용인이었습니다. 인천에서 출발하여 용인까지 가는데 도착시각은 넉넉잡아 오후 1시 30분이었습니다. 버스 운전기사는 자주 다니던 길이었는데도 몇 번을 길을 잃었고 5시나 되어서야 장지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리고 길을 잃을 때마다 봄꽃들이 아름답게 피고 개울물이 맑은 곳을 지나쳤습니다. 수녀님은 형제님이 해 준 약속이 기억났습니다.

 

“수녀님, 안 가보신 데가 너무 많네요. 좋아요! 제가 이 두 다리만 나으면 수녀님 모시고 꼭 꽃구경 시켜드리겠습니다. 약속드리죠. 전 한 번 약속하면 꼭 지키는 사람이거든요.”

[출처: 『내 가슴속에 살아있는 선물』, 이영숙 베드로 수녀, 비움]


      대건 안드레아 형제가 살려고 할 때는 사실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성당에서 봉사하며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 시간 낭비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러다 아버지 임종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물론 기도도 잊어버릴 정도로 신앙생활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리고는 아주 작은 아픔도 참아낼 수 없는 사람으로 죽음만 기다리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 수녀님을 만나고는 반대 상황이 되었습니다. 베드로 수녀님에게 여행을 시켜드리고 싶은 마음도 생겼고 손가락이 죽어가면서도 묵주반지를 빼지 않으려 하며 기도에 매달렸습니다. 몸은 죽어도 기도는 멈추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 이유는 기도 안에서 여행하는 것에 비길 수 없는 성모님의 사랑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라고 하십니다. 대건 안드레아 형제가 자기 목숨을 구하려 할 때 목숨을 잃게 되었고, 자기 목숨을 잃어도 상관없다고 여길 때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교회는 자기를 죽이는 방법을 ‘기도-단식-자선’으로 제시합니다. 그렇게 봉사를 싫어했고, 그렇게 자기 몸만 챙겼고, 그렇게 기도를 거부했던 분이 죽음 앞에서 수녀님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고 싶어졌고, 몸이 썩어들어가도 기도만 할 수 있다면 만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기도-단식-자선’이 아니면 ‘마귀-육신-세속’이 나를 옭아매서 죽음으로 이끕니다.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방향은 단 두 개뿐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죽이지 않으면 당신을 절대 따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믿는다면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명확할 수밖에 없습니다. 살려면 죽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죽는 방법은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 개의 못이 필요한데 그것이 ‘기도-단식-자선’이라는 못입니다.

 -조재형신부-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요즘은 이가 없으면 임플란트로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최선이 아니면 차선을 택하는 것도 필요합니다그러나 때로는 차선이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기도 합니다이스라엘 역사에 유배라는 사건이 있었습니다그 사건 이전에는 성전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신앙의 중심이었습니다그런데 성전이 무너지면서 신앙의 구심점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이스라엘 백성들은 무너지지 않는 새로운 성전을 구축할 장소를 찾게 되었습니다이스라엘 백성이 찾은 장소는 마음이었습니다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과 정신을 무장시킬 대안으로 성경 본문 제작에 착수하게 됩니다이렇게 성전 중심의 예배 공동체는 말씀 중심의 공동체로 전환하게 되었습니다마치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여인아내 말을 믿어라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지금이 바로 그때다사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찾으신다하느님은 영이시다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미사를 드리는 것으로 신앙이 다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던 우리에게 미사 중단과 성전에 모일 수 없는 상황은 이스라엘 백성이 겪었던 유배의 상황과 비슷합니다텅 빈 성당에서 무력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매주 친교를 나누던 형제와 자매들을 만나지 못하면서 외로웠습니다단체 활동을 하지 못하면서 불안했습니다나의 신앙이 어디로 가는지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방향을 잡지 못하였습니다우리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씀 중심의 신앙생활로 전환해야 합니다우리가 말씀을 공부하는 지향과 목표는 성경을 아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삶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성경을 알기 위해서 읽는 것과 성경을 삶으로 실천하기 위해서 읽는 것은 다릅니다성경을 읽기 전에 먼저 기도하면 좋습니다고요한 물은 거울과 같아서 우리의 얼굴을 비춰줍니다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은 거울과 같아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입니다성령의 이끄심에 맡겨야 합니다나의 주장과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닙니다내가 하느님의 뜻과 의로움을 따르기 위해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성령께서는 우리를 하느님의 뜻으로 인도합니다교회의 가르침과 권고를 따라야 합니다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셨고교회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을 듣고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그분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를 지키면너희가 살고 번성 할 것이다.” 우리가 선택을 하면 하느님께서 도움을 주실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어떤 선택입니까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내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 해 주는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가난한 이굶주린 이아픈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 선택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저는 지난 역사를 통해서 희망을 봅니다우리는 오천년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시련과 고통이 있었지만 그것을 이겨낸 끈기와 저력도 있습니다흐르는 강물을 봅니다강물에 떠밀려 가는 것들은 거의 생명이 없는 죽은 것들입니다생명이 있는 것들은 떠밀려 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갑니다세상이라는 강물에 떠밀려서 사는 것도 자유입니다그러나 세상이라는 강물을 힘차게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더 큰 자유와 용기입니다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우리는 고민하고 성찰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이영근신부-


오늘, 재의 수요일을 지내고 맞이하는 첫 날의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첫 번째 수난을 예고하시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곧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카 9,20)라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이어,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이 땅에 오신 사명, 곧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실 분임을 밝혀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었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루카 9,22)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일어날 일 네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수난을 당하신다는 것이요,

<둘째>는 버림을 받으신다는 것이요,

<셋째>는 죽임을 당하신다는 것이요,

<넷째>는 죽은 후에 살아나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네 가지는 모두 수동형으로 표현되어 하느님의 권능이 개입할 것임을 시사해줍니다.

“반드시(이백주년 성서; “마땅히”)라는 단어는 이 모든 것이 필연성이나 당위성에 의해 다가오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이어서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당신을 따르는 길은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지만, 세 가지를 요구하십니다.

<첫째>는 자기 자신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요,

<둘째>는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이요,

<셋째>는 이를 지속적으로 날마다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버려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주권이 오직 하느님께만 있음을 믿고 오로지 하느님께만 신뢰를 둔다는 것이요,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서 지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애기를 가슴에 품듯 끌어안는다는 원어의 뜻대로 자발적으로 기꺼이 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버린다거나 자기 십자가를 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왜 지는가?’ 가 중요합니다.

곧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이것들을 행해야 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곧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행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4)

 

바로 여기에 우리의 결단이 요청됩니다.

<제1독서>에서도 생명과 죽음의 길에서 결단을 촉구합니다. 그리고 생명의 길을 이렇게 말해줍니다.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신명 30,20)

오늘, 우리가 자신을 버리더라도 예수님을 위하여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더라도 예수님을 사랑하여 사랑으로 짊어진다면, 생명의 길을 선택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주님!

십자가를 지고서야만 갈 수 있는 길을 갑니다.

어머니가 애기를 가슴에 품듯 죄와 허약함을 품는 일

가장 소중한 것을 끌어안듯 마음으로 끌어안는 일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일, 그것은 사랑입니다.

제 몸에 당신의 생명이 살아있음을 드러내는 일,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아멘.

 십자가는 천국의 열쇠

 -반영억신부-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기도입니다. “나의 빈약하고 연약함을 생각하면 두렵습니다만 주님께 바라는 굳센 믿음으로 실망하지 않겠습니다. 원컨대 저 십자가의 능력이 내게 힘을 주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외에는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자가를 진다는 것은 주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믿음이 십자가를 감당하게 합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십자가는 당신의 사랑스런 자녀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십자가는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이며, 천당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성 요한 비안네).

예수님께서는“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9,24).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이 곧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사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자신을 버리면 모두를 잃어버리는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바라보면 답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 앞에서 당신의 뜻을 버렸기 때문에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었습니다. 아니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결국 십자가는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데서 오는 희생입니다. 알퐁소 성인은 “당신이 제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를 맞추겠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주님의 뜻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를 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은 힘들게 고생하면서 따라오라는 말씀이 아니라 매 순간마다 자신의 뜻을 비우면서 주님의 마음에 드는 것,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하라는 요구입니다. 그러나 막상 일상 안에서 주님의 십자가를 선택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주장, 뜻을 양보한다는 것이 정말 마음 같지 않습니다. ‘날마다’는 아니라면 오늘 하루만이라도 내 공로를 내세우지 말고 또 내 생각에 고집을 부리지도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십자가는 희생을 요구합니다.

신명기의 말씀은 우리가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를 알려줍니다.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 놓는다.”“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또한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신명11,26;30,19-21).

마땅히 생명과 행복을 선택해야 하지만 그것이 아주 사소한 일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양보하는 것 하나가 뭐 그리 대단하냐고 하겠지만 그 시작이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요까짓 것’ 하는 것이 정말 대단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고까짓 것’일 수 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매사에 신중한 선택을 하시기 바랍니다. 어렵고 힘든 것을 선택한다는 것이 지금은 십자가이지만 그 십자가가 더없이 큰 축복임을 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십자가는 언제나 하느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당신에게 증거 할 방법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고 순종하며 십자가를 지십시오! 그러면 마지막에는 그 십자가가 여러분을 져줄 것입니다”(성 토마스 아 켐퍼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십 자 가

 -송영진신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이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라오라는

‘명령’으로 보이지만, 뜻을 생각하면,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고 약속하시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내가 주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의 뒤를 따라오라는 예수님 말씀은 명령이 아니라 ‘권고’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라는 사람은 예수님 뒤를

따라갈 것이고, 바라지 않는 사람은 따라가지 않을 것입니다.

선택은 각 개인이 스스로 하는 일입니다.

 

자신을 버리라는 말씀과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도

명령이 아니라 ‘권고’입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예수님 뒤를 따라가는 일을 방해하는 것들을 모두 버린다는 뜻입니다.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예수님 뒤를 따르는 과정에서 겪는 고난과 시련들을 감수한다는 뜻입니다.)

구원과 영생을 얻기를 바라는 사람은 기꺼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질 것이고, 그것을 바라지 않는 사람은

자신을 버리는 일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선택도 역시 각 개인이 스스로 하는 일입니다.

 

1) “내가 날마다 지고 가야 할 나의 십자가는 무엇인가?”

우리는 십자가라는 말에서 고통과 죽음만 생각할 때가 많은데,

십자가는 고통과 죽음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부활승리생명사랑영광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하나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부활로 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는 예수님의 십자가처럼

“하느님의 선과 사랑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겪는 고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를 받아들입니다.

하느님의 선과 사랑의 실현은 곧 우리의 구원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겪는 고통들이 전부 다 십자가인 것은 아닙니다.

고통들 가운데에는 지은 죄에 대한 보속도 있고, 물리쳐야 할 악도 있습니다.)

 

2) 하느님께서는 각자 스스로 지고 갈 수 있을 만큼만 십자가를 주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하느님은 나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나에게 강요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할 수 있으니까 하라고 권고하시는 분입니다.

 

3) 그렇지만 혼자 힘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들 때가 있긴 합니다.

그런 때에 주님께 도와달라고 간청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필요한 일입니다.

신앙생활은 나 혼자서 하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함께하시는 일이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일입니다.

<예수님도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것이 아니라,

중간에 키레네 사람 시몬의 도움을 받으셨습니다(루카 23,26).>

내 몫으로 받은 십자가이고, 내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이지만,

그래도 주님께서 나를 도와주시고 이웃도 도와준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 없이 방치되어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4).”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는 관심 갖지 않고 현세의 삶에 대해서만 집착하는 사람은,

그 나라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 라는 뜻입니다.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라면서

현세의 삶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목숨을 구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얻기를 희망하고, 얻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만 얻게 됩니다.

희망하지도 않고 노력하지도 않는 사람은 얻을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안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이 안 받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못 받는 것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루카 9,25)”

 

이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온 세상을 얻는다고 해도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면,

그것을 얻었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라는 말씀인데,

이 말씀을 반대로 생각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만 있다면,

세상의 모든 것을 원하는 대로 얻는 일은 좋은 일이다.”로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예수님 말씀의 진짜 뜻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 외에는,

전부 다 소용없는 일(가치가 없는 일)이다.”입니다.

여기서 ‘온 세상’은 먼지처럼 사라질 허무한 것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자신을 잃거나 해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는 사람은

그 생명 하나만을 추구하면서 온 세상을 버리는 사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 3,7-9ㄱ).”

 

(여기서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라는

말은, 뜻으로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겨서 버렸습니다.”입니다.

‘잃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버리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온 세상도 얻고, 영원한 생명도 얻으면 좋지 않은가?”(“현세에서는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누리면 좋지 않은가?”) 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둘 다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허무한 것’은 ‘영원한 것’과 양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것을 얻기를 바란다면 ‘허무한 것’을 버려야 합니다.

(먼지처럼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에 대한 집착과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복음: 루카 9,22-25: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조욱현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시면서 당신을 따르는 길이 어떤 길인지, 그리고 우리가 세상에서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가르쳐 주신다. 인간은 세상에서 더 많이 가지고 싶어 하고 무언가 더 누리려는 욕심이 있다. 그러나 온 천하를 얻을 수 있더라도 자기 목숨과 바꾸려고 하는 사람은 없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우선 내가 살아있고 나서야 가치가 있는 것이지, 내가 없으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라고 하신다. 당신을 닮는 것만이 우리에게 참된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 인간은 하느님 안에 있을 때만이 진정으로 행복과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즉 한마디로 한다면 우리 인간은 하느님을 떠난 삶으로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고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하느님 안에서만 자유로운 것이다.

 

이 행복과 자유를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느님의 모습이 된다. 하느님의 모습을 완성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하느님의 모습은 매일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잘 짐으로써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즉 주님의 말씀대로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면서, 주님을 닮아가면서 이룰 수 있다.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과거를 모두 잊고, 자신의 의지를 완전히 내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지고 가는 십자가는 다름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이기기 힘든 상대는 다른 사람이나, 환경이 아니고 바로 나 자신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나 자신이 가장 큰 십자가이며, 이 십자가는 다른 누구도 대신 져줄 수가 없는 나만이 지고 갈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인생을 누가 대신 살아줄 수 없는 것처럼, 나의 십자가도 꼭 나만이 질 수 있고, 그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을 완성해야 한다.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이다. 우리의 생명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다. 이 생명을 우리가 마음대로 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생명이 살아 있는 한 자신의 안일만을 위해 이기적인 삶을 살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시간과 능력을 그리고 가진 것을 나누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생명을 영원히 살릴 수 있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입으로만 주님을 부르고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마음이 주님으로부터 멀리 있다면 주님으로부터 우리도 외면을 당할 것이다. 주님께서 외면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마 우리가 그분을 외면하여 바라볼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 사순시기가 이제 진정으로 우리에게 은총의 때가 될 수 있도록, 즉 우리 자신이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시기가 될 수 있도록, 그래서 영광의 부활에 우리도 기쁘게 참여할 수 있도록 우리의 십자가를 잘 지고 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 23)

-한상우신부-


한 번도
자신을
버려본 적이
없는 우리들
삶이다.

또한
피할 수 없는
십자가의
삶이다.

자신을
버려야
날마다 길이
열림을 절실히
깨닫는다.

버려야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기쁘게
받을 수 있다.

어제는 분명
오늘과
다르다.

우리 삶 자체가
버리고 떠남의
연속이다.

새로운 삶은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버려야
얻는 것이다.

자신을 버려아
십자가를
질 수 있다.

버려야
하느님께
더욱
집중할 수
있다.

버려야
우리가
누군지를
진정
깨달을 수
있다.

자신을
버리는
삶이란

십자가를 통해
삶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는 것이다.

버려야
겸손해질 수
있다.

하느님께
내어드려야 할
겸손한 우리들
관계이다.

자신을 버려야
하느님 안에서
머무를 수 있다.

십자가를 질 때
죄를 멀리할 수
있고

내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다.

버리는 것이
열리는 것이며

십자가를
지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삶이란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우리
십자가를
지는 전적인
내어맡김의
여정이다.

자신을 버려야
내어맡길 수
있는 새로운
삶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을 따르는 이의 행복을 들려 줍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삶에 들어선 제자들에게 구체적으로 제시하시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형은 당시 가장 처참한 형벌 가운데 하나였으니 그 도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단순히 정치적 메시아의 성공과 영광을 꿈꾸며 부르심에 응답했던 그들을 불편하게 만들 겁니다.
 

"많은 고난, 배척, 죽임"(루카 9,22)

게다가 예수님이 "반드시" 일어나리라 예고하신 일들은 그들 출세 욕구의 허를 찌릅니다.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나타났다 스러진 참 예언자들의 운명이 스승에게도, 그리고 언젠가 자신들에게도 예외없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겠지요.

제자들의 근심과 두려움은 사실 우리 마음 저 밑바닥에도 숨어 있습니다. 지금 각자가 지고 가는 저마다의 고통의 십자가도 만만치 않은데, 혹 더 무거워질까, 다른 무엇이 더 얹어질까 지레 겁이 날 수도 있지요. 또 "날마다"라니 그럼 이 지긋지긋한 십자가는 영영 떼어낼 수 없는 천형이란 말인가 절망도 되고요.

십자가와 죽음의 고통을 아시는 예수님도 겟세마니에서 치열하게 투쟁을 하셨지요. 그러니 약하고 부족한 우리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어쩌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십자가와 친한 정도가 영적 성숙의 척도일지도 모릅니다.

제1독서는 모세를 통해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의 길을 제시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신명 30,20)

"십자가"라고 하면 더럭 겁부터 나지만, 사실 우리가 삶에서 십자가를 지고 차근히 걸어야 하는 구체적인 지침은 이렇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첫째가 하느님 사랑이지요. 이는 사실 의무가 아니라 특권이고, 그것도 매우 달콤한 자격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를 뜨겁고 열렬히 사랑해 다가오시는데, 외려 우리 쪽에서 피하고 거리를 두며 그분을 박제처럼 대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자의 타이틀은 유지하지만, 신앙이 생기면 이기심과 탐욕, 사치와 허영을 추구하던 삶이 불편해질까봐 그분이 자기 삶에 개입하는 것은 애초에 차단하려 합니다. "나는 나대로 살 테니 주님은 그냥 거기 계시라"고, "교회가 정한 의무는 이행하지만 하느님을 사랑하면 그분을 첫 자리에 모셔야 하니 자기는 이 정도만 하겠다"고 경계하는 모습이지요.

하지만 우리 인간이 가장 먼저, 그리고 온 힘을 다해 해야 할 바가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의무 이행과 교리 지식만으로 그리스도교는 영혼 없는 허식이고 삶의 악세사리나 지적 놀음 수준에 그칠 뿐입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들을 끊어내는 결단입니다.

"그분 말씀을 들으며"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말씀 안에 녹아 계십니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결정체시지요. 매일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말씀을 듣고 작은 것 하나라도 실행하려는 노력에서 십자가를 질 힘이 솟아납니다. 말씀을 경청하고 머무르는 이에게 십자가는 매일의 선물이지요. 도전과 보람을 함께 품은 선물입니다.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십자가는 온전한 의탁을 요구합니다. 세속 안에서 스스로 많은 걸 성취했다고 여기는 이들은 하느님께 뭘 받았다고 여기기보다, 자신이 많은 걸 해드린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하느님을 자기 인생에 느닷없이 닥칠지도 모르는 불행의 파수꾼 정도로 세워놓고 나름의 대가를 지불하는 기복신앙이겠지요.

그분 없이는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며, 그분과 함께일 때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존재임을 아는 지혜로운 이는 잘났건 못났건, 부자건 가난하건, 배웠건 못 배웠건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고 매달립니다. 무얼 더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존재 자체로 그 질서 안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합니다. 십자가는 문득 이 질서를 점검하게 만들어 주는 알람(alarm)의 역할도 해 줍니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를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화답송)

맑은 물이 풍부한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를 관상합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생명이 넘치는지요!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의탁하는 영혼의 싱싱함과 푸르름이 느껴집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에 들어선 우리에게 십자가는, 겉으로는 우리를 아프고 우울하게 만드는 형틀의 모습을 띠고 있지만, 치열하게 뒤엉키며 그 속살을 들여다보면 하느님을 더 사랑하고 사람을 더 사랑하라고 재촉하는 선물인 경우가 많습니다. 저마다 다른 우리에게 저마다 다르게 다가오는 맞춤형 선물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선물하신 십자가가 무엇인지 곰곰이 머무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대단히 훌륭한 경지는 못되어도 그럭저럭 비틀거리면서도 십자가를 내팽개치지 않고 여전히 지고 가는 자신의 어깨를 다독다독 두드리며 '수고했다'고 격려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십자가를 짐으로써 생명의 나무를 품은, 영혼이 푸르른 여러분 모두를 축복하며 크게 십자가를 그어 강복합니다. 십자가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고(위아래)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가로) 관계회복을 통한 승리랍니다.

 보아라, 선택하라, 따르라

 -김찬선신부-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

 

생명을 살려면.

생명을 잘살려면.

 

진짜 그런지, 아니면 그럴듯하게 지어낸 얘기인지 모르지만

횟집까지 싱싱하게 살아있는 바다 생선을 날라다 주기 위해서는

잡아먹으려는 포식자를 같이 탱크에 넣어 수송을 해야 한다지요.

 

포식자는 잡아먹으려 하고

횟감으로 쓸 고기들은 살려고 기를 쓰는 바람에

죽지 않을 뿐 아니라 활력과 생기를 유지한다지요.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그럴 것 같습니다.

 

생명은 죽음이 옆에 도사리고 있어야만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명을 제일 잘 사는 사람은 시한부 인생을 사는 분들입니다.

 

죽음을 보면서 생명이 얼마나 귀한지를 알기 때문이고

죽음을 보면서 매번 생명을 선택하기 때문이고

죽음을 보면서 생명을 깊이 맛보기 때문이고

그래서 한순간의 생명에서도 희열을 강하게 느끼기 때문입니다.

 

도심의 찌든 공기에 숨막혀하던 사람이

숲 나들이 때 싱그런 숲 공기와 향기를 깊이 들이키듯이

그는 생명을 깊이 들이키고 생명에 그윽하게 젖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찌합니까?

 

우리는 죽음을 도무지 보지 않습니다.

얼치기 생명을 살아가면서

죽음도 보지 않고 생명도 보지 않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도 사는 것이라고 시시덕거리며 살아갑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인 양

사는 것에 대해서 묻지 않고

잘 사는 것에 대해서는 더더욱 묻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신명기는 우리보고 보라고 합니다.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생명을 제대로 바라보고

생명이신 주님을 똑바로 바라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생명에로 인도하는 그 주님을

놓치지 말고 따르라 하십니다.

 

그분의 황천길까지도 놓치지 말고 따르라 하십니다.

죽어서 가는 그 길까지도 끝까지 따라가라 하십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2월 27일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