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22일 대림 제4주간 화요일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루가 1,46-56)
“My soul proclaims the greatness of the Lord;
my spirit rejoices in God my savior.
for he has looked upon his lowly servan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기석신부-
오늘 독서와 복음은 하느님의 선물이 가져다준 기쁨과 놀라운 믿음을 지닌 여인들의 찬미가를 들려줍니다. 우선 루카 복음서는 엘리사벳을 만난 마리아가 부른 ‘마리아의 노래’를 전합니다. 이 노래는 성령으로 가득 찬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여인들 가운데에 가장 복되시며”(1,42) “주님의 어머니”(1,43)라고 기쁘게 칭한 데에 대한 마리아의 답이었습니다. 게다가 엘리사벳은 하느님의 선물을 조건 없이 받아들인 마리아의 믿음을 선언하며 마리아의 찬미를 유도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1,45)
자신이 ‘주님의 어머니’가 됨을 기리는 마리아의 말은 엘리사벳에 대한 답례를 넘어 하느님께 바치는 찬미가였습니다. 사실 이 노래는 상황과 주제 그리고 작성법의 세 가지 측면에서 ‘한나의 노래’(1사무 2,1-10 참조)와 비슷합니다. 오늘 독서는 이 찬미가를 부르기 직전, 한나가 주님께 기도하여 얻은 아들 사무엘을 약속대로 주님께 바치려 엘리 사제를 찾아가 예배를 드린 장면입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하느님께서 마리아에게 베푸신 수직적인 자비와, 비천한 이들과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 속에 이루어지는 주님의 수평적인 자비를 찬양하며, 마지막 구절에서 하느님의 구원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권능으로 동정녀가 지극히 거룩하신 분의 아들을 잉태하게 하시지만 그것은 세상의 구원을 위한 보편적인 사건으로서의 의미를 지녔던 것입니다. 간절한 기다림 속 회개의 시간인 대림 시기의 막바지에 ‘마리아의 노래’를 다시 불러 봅니다. 우리가 더욱 겸손해지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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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이 되면서 부모님께 더는 청하지 않게 됩니다. 이제는 부모님을 이해하며 그분들의 뜻을 헤아리고 그 뜻을 이루어 드리는 관계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 더 부모님과 가까운 관계가 됩니다.
우리의 영성 단계도 이렇지 않을까요? 어린이와 같은 영성의 단계에서는 계속 청할 수밖에 없습니다. 때로는 공갈, 협박, 거짓말까지 섞으면서 청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영성 단계가 되면 청하기보다는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 뜻을 실천하는 데 집중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 주님과 아주 가까운 친밀한 관계를 이룰 수 있게 됩니다.
지금 내 영성의 단계를 점검해 보았으면 합니다. 어떤 식으로도 주님 앞에 나아가는 방법을 찾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면서 바치는 찬양의 노래인 마리아의 노래를 묵상하게 됩니다. 성모님께서는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에, 자신의 비천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믿었으며, 그래서 찬미의 노래를 부르고픈 마음이 강하게 일었을 것 같습니다.
성모님과 엘리사벳, 그리고 태중의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만남. 이 만남만으로도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구원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을 굳게 믿었으며, 하느님의 일은 항상 옳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성모님의 모습은 단순히 청하기만 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이제는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 뜻을 실천하는 단계, 그래서 아주 가까운 친밀한 관계임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찬미의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했을까요? 우리는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늘 의심했으며, 너무나 이른 판단으로 불평불만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청하는 것을 절대로 멈추지 않습니다. 찬미의 노래보다 슬픔의 노래를 더 많이 부르면서 주님께서 원하지 않는 모습으로 나아갔습니다.
내 영성의 단계를 높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린이와 같은 영성 단계가 아닌, 수준을 높일 수 있는 성인과 같은 영성 단계로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역시 성모님처럼 찬미의 노래를 큰 기쁨을 담아서 부를 수 있습니다.

옛날에 적어 놓은 글들을 보다가, 우연히 라디오에서 들은 말을 적어 놓은 것이 있었습니다.
“남이 하는 비방을 옷에 묻은 진흙으로 여겨라.”
그 밑에는 ‘진흙이 마르기 전에 만지면 옷은 물론 손도 지저분해지지만, 마른 후에 툭툭 털어버리면 쉽게 털려 깨끗해진다.’라고 메모가 되어 있었습니다.
분명히 당시에는 감명을 받아서 얼른 메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망각의 동물답게 잊어버린 것이지요. 그런데 그때보다도 더 큰 위로를 받게 되는 글이었습니다. 남이 하는 비방에 흔들리고 있었던 참이었기 때문입니다.
고통스럽게 너무 집착해봐야 문제 해결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더 문제가 복잡하면서 고민이 새로운 고민을 만들곤 했지요. 따라서 진흙이 마르기까지 기다리는 것처럼, 내게 주어지는 비방에 대해서도 침묵 안에서 기다릴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저절로 문제 해결의 길이 열릴 것입니다.

나는 왜 기쁜가? 나의 완성됨으로 부르는 노래, 마니피캇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성모님께서 ‘마티피캇’을 노래하시는 장면입니다. 진정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하느님을 찬미하는 이 노래는 성모님 생애에 가장 행복한 시간일 것입니다. 사람은 행복을 위해 삽니다. 그런데 오늘 성모 찬송은 인간이 어떤 때 궁극적 기쁨을 누리는지 잘 보여줍니다.
우리 각자가 행복하고 기쁘게 살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궁극적 기쁨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인생을 허비하고 맙니다. 어떤 사람은 돈 많이 벌어 빨리 은퇴하여 슬슬 여행이나 다니고 싶다고 합니다. 그것이 궁극적 행복일까요? 돈이나 쾌락, 명예는 당연히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것들입니다. 몸은 행복할 수 있으나 성령께서 함께하실 수 없기에 마음은 공허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언제 가장 행복하도록 창조되었을까요? 분명 제대로 뛰고 있다면 결승전을 통과하는 것처럼 인간의 창조 목적이 완성되는 때는 인간 창조가 완성되는 때일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미완성의 행복만을 누립니다.
오늘 성모님께서 주님을 찬송할 때 우리는 무언가 새로운 인간의 완성 시점을 봅니다. 하느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실 때 지향하신 무언가가 성취되고 있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완성은 바로 이 창조된 우리 자신이 성취되는 때이고 이때 참 기쁨을 누리고 참 찬미가 솟아나게 됩니다. 그것이 언제일까요? 주님을 만나는 때? 그것보다 더 가야 합니다.
유튜브 채널 ‘ODG; 입양 가족의 과거 사진 같이 보기’에 입양된 아이와 엄마가 현재 사진부터 시작하여 입양할 당시의 과거 사진까지 함께 보며 이야기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인용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엄마랑 오늘 함께 동하(7세)와 지금까지 찍은 사진들 같이 볼 거야. 엄마는 집에서 주로 뭐 하는 거 같아?”
“밥하고 우리 씻기고 우리 재우고 영어 공부하고 ... ”
“그럼 이제 함께 사진 볼까? 이거 기억나?”
2020년 초밥 식당에서 엄마와 남동생 동주(4세)와 함께 먹는 사진이 나옵니다.
“어!”
바나나 인형을 입은 엄마와 동하와 동주.
“웃기지?”
조금 더 어린 동하가 아빠 자동차 세차하는 거 도와주는 사진.
“동하 세차 엄청나게 잘하는데. 엄마 이거 동영상 찍어놓은 것도 있어. 어땠어?”
“그때 아빠 도와주어서 기분이 좋았어!”
동하가 유치원에서 공연하는 모습.
“엄마는 저 때 동하밖에 안 보였어. 너무 예뻐서.”
아빠가 두 아이를 함께 업고 있는 사진.
“너희 둘이 합치면 거의 40kg이야. 아빠 무겁겠다.”
사진이 점점 뒤로 가면서 동하와 동주는 계속 어려짐.
“동하, 동주 기어 다니기 시작하면서 엄청나게 싸웠지? 동주가 동하 장난감 다 가지고 싶어 했지. 그래서 동하가 진짜 양보 많이 했는데. 그치?”
2017년 둘째(동주) 입양 사진.
“동하, 혹시 동주 만났을 때 기억나니? 어떤 것들이 기억나?”
“동주 얼굴 봤을 때랑 동주가 나 안아주었을 때. 가장 기뻤어.”
“아, 진짜? 엄마는 그게 동주한테 좀 슬픈 순간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동하 처음에, 동주 오고 나서, 동주가 너무 아기니까 동주만 막 안아야 하고 동주만 챙겼었잖아. 그래서 동하가 질투가 났을 것 같은데 어땠어?”
“마음이 조금 속상했어.”
“그런데 동하가 동주 안아준 이유가 뭘까?”
“동주 좋아서.”
“조금 속상하지만, 동주 좋아?”
“응!”
“동하는 왜 동주만 좋아해 주냐고 그랬잖아. 근데 동하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동하가 있을 때는 동하한테만 잘해줬어. 동하만 데려 다니고 동하만 예뻐해 주고 동하만 재워주고. 왜냐하면, 동주가 없었을 때는 동하 혼자만 있었으니까. 할아버지, 할머니 모시고 해변에 밥 먹으러 가는 사진이야. 동주가 사랑 독차지할 때. 저거는 디즈니랜드 갔을 때야. 동하가 이거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 혹시 동하가 기억 못하더라도 이런 사진 보면서 엄마 아빠가 동하만 엄청나게 사랑했던 때가 있었다는 거 기억하라고 사진 찍어놓은 거야.”
2014년 동하 처음 만났을 때의 사진.
“동하 아빠, 엄마 처음 만났을 때 기억 안 나지? 엄마가 어떻게 만났는지 좀 설명을 해 줄게. 엄마가 제일 기억나는 거는. 동하 위탁 어머니가 동하를 건네주기에 엄마가 동하를 안았는데 동하가 엄청나게 울었었던 거 같아(엄마 약간 그때 기억하며 훌쩍임). ... 엄마는 그때 동하가 우는 것도 예쁘다고 했던 것 같아. 엄마가 갑자기 엄마가 되어서 아기를 볼 줄 몰라서 할머니 집에 아빠랑 같이 3개월 살았었는데, 할머니가 뭐라 그랬느냐면 ‘네가 아이를 낳아도 동하보다 예쁜 아이는 못 낳는다’라고 하셨어. 이거는 동하 돌 때 사진. 이거는 동하 오고 나서 첫눈 올 때 찍은 사진. 동하한테 첫눈 보여주고 싶어서 옷 둘둘 싸매서 밖으로 나갔던 거야. 끝났어. 뭐 하고 싶은 말 없어?”
“음…. 엄마가 나 이렇게 잘 키워줘서 고마워! 엄마 좋아!”
엄마 너무 행복해서 눈물을 흘림. 서로 안아 줌.
“엄마는 동하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동하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시간이 없어.”
“엄마랑 오래오래 함께 잘 살고 싶어.”
“엄마도. 엄마 건강해야겠네.”
엄마의 눈물은 동하의 행복과 감사에서 나왔습니다. 이는 마치 성모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행복하게 해 주고 또 엘리사벳의 감사를 받았을 때와 같습니다. 행복은 하느님을 만나는 것을 넘어서서 타인을 행복하게 해 줄 때 참으로 찾아옵니다.
아담은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라고 창조하셨고, 하와는 아담의 도움이 되라고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때 창조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죄는 자신을 위해 살기 때문에 타인에게 오히려 해가 되는 존재가 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찬미하게 되는 이유는 원죄에서 회복되어 내 존재 자체가 이웃을 행복하게 해 주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주님을 찬미할 때는 하느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잉태 순간이 아니었습니다. 엘리사벳을 행복하게 해 주고 그것에 감사를 받았을 때입니다. 인간의 충만한 완성의 순간이기에 행복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진짜 행복과 찬미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이웃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존재가 되었을 때 저절로 나옵니다. 그때 성모님과 함께 참으로 마니피캇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2019년 8월 21일에 뉴욕으로 왔습니다. 반갑게도 신부님들이 신문사를 찾아 주었습니다. 시카고에서 사목하고 있는 후배신부님이 왔습니다. 달라스에서 사목하였던 동창신부님도 왔습니다. 서울에서 사목하였던 선배와 후배신부님이 안식년을 얻어서 왔습니다. 작년 10월부터 올해 2월까지 손님 신부님들이 있었습니다. 코로나가 아니었으면 올해에도 많은 신부님들이 왔을 겁니다. 뉴욕이 가지는 도시로서의 매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 좋아하는 저는 신부님들과 함께 있는 시간들이 좋았습니다. 멀리 타향에서 만나는 감회가 있습니다. 비록 누추하지만 형제들이 함께 지내는 것도 즐거웠습니다. 신학생 때의 이야기를 나누어도 좋고, 사목의 경험을 나누어도 좋고, 교회의 미래를 이야기해도 좋습니다. 성지순례 갔던 이야기, 문학이야기도 좋습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도 삶의 커다란 기쁨입니다. 백신과 치료제가 곧 나온다니 내년에는 반가운 손님들이 오면 좋겠습니다.
1979년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처음으로 혼자서 고향을 찾아갔습니다. 강남고속버스 터미널에서 동양고속버스를 탔고, 버스 안에서는 ‘곡예사의 첫사랑’이라는 애잔한 노래를 들었습니다. 고모님은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고, 고종사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하는 것은 사촌형님과 함께 고향 선산을 찾아갔을 때입니다. 눈이 내리는 날이었고, 모악산을 지나서 제가 태어났던 고향으로 갔습니다. 기꺼이 함께 가준 사촌형님도 사제가 되어서 같은 길을 가고 있습니다. 저는 친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묘소에, 사촌형은 외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묘소에 함께 절하였습니다. 아랫목에 이불을 펴놓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때는 모두가 아직 열매 맺지 않았던 순수의 시간이었습니다. 41년의 시간이 지났고, 학생이었던 사촌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자리를 만들어서 지내고 있습니다. 41년 전 순수했던 그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2,000년 전에 마리아는 친척인 엘리사벳을 찾아갔습니다. 엘리사벳은 나이가 많았음에도 아이를 가졌습니다. 마리아는 남자를 몰랐음에도 아이를 가졌습니다. 두 아이는 성령께서 함께 하신 아이였습니다. 성서는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대화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사제들의 대화와는 다른 대화였습니다. 제가 학생 때 고향을 방문해서 사촌들과 나눈 대화와도 달랐습니다. 먼저 엘리사벳은 이렇게 마리아를 맞이했습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주님께서 함께 하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또한 복되시나이다.”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축복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이 가야할 길을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두 아이가 가야할 길은 성공, 명예, 권력이 아니었습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길입니다. 진실과 평화가 만나는 길입니다. 사막에 샘이 넘쳐나고, 사자와 어린이가 함께 걷는 길입니다. 엘리사벳의 축복과 마리아의 응답 속에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은 태어날 것입니다.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내 마음이 내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당신 여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전삼용신부-
오늘 우리는 참으로 아름다운 노래를 듣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주님께 청을 드려 얻은 자식에 대한 감사의 예배노래요, <화답송>은 그때 드린 한나의 기도요, <복음>의 “마리아의 노래”는 자비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하느님께서 베푸신 자비를 크게 드러내는 노래요, 동시에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의 운명을 바꾼다는 노래입니다. 한편으로는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 안에 살아 있다는 찬미의 노래요, 또 한편으로는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의 삶을 바꾼다는 혁명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에서, 마리아는 당신 영혼이 주님 앞에서 용약하며 기뻐하는 이유를 참으로 아름답게 노래합니다.
“내 마음이 내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당신 여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8)
이는 마리아의 관상을 잘 드러내줍니다. 곧 마리아가 관상한 하느님은 작고 보잘 것 없고 비천하신 하느님입니다. 그래서 그런 자리로 즐겨 들어오십니다. 아니, 작고 비천한 자리에 들어오시기 위해, 더욱 더 작아지고 보잘 것 없고 비천해지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마리아는 ‘비천한 자신보다 더 작고 비천한 주님’을 만나셨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작고 보잘것없는 자기 안에 들어오시기 위해, 자기보다 더 작아지신 하느님의 놀라운 신비 앞에서 기뻐 용약합니다. 이는 마리아가 자신의 작고 비천함을 부끄러워하거나 부인하기는커녕, 오히려 바로 그 작고 비천함이야말로 하느님을 만나게 해주는 복된 자리임을 알게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바로 이것이 마리아의 기쁨의 진원지였던 것입니다.
이는 세상의 낮고 어둡고 보잘것없는 자리, 곧 ‘변방(邊方)’이야말로 하느님과 그분 영광의 자리라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반대로, 세상의 빛나고 높고 큰 자리, 곧 ‘중심(中心)’은 하느님의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내줍니다. 이처럼, 이 노래는 “변방”의 하느님의 현존을 우리 앞에 열어줍니다. 당신 자신을 낮추신 하느님의 현존, 곧 당신 자신의 ‘크심’을 아낌없이 내려놓으시고, 아주 작고 보잘것없고 허약한 모습으로 나타나신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십니다. 그것은 나보다 더 작은 모습으로 계신 하느님이요. 뿐만 아니라 있는지도 없는지도 그 존재를 잘 알아차릴 수도 없을 만큼, 마치 아무것도 아닌 모습으로 계시는 분으로서의 현존입니다.
우리가 이런 하느님을 만나게 되면, 우리도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어도 되는 충만한 기쁨을 맛볼 것입니다. 그것은 뭔가가 되거나 뭔가를 이루어 내서 존재의 가치를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있는 그대로의 사랑의 충만함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그것은 진정, ‘자신보다 작아진 주님’을 만나는 데서 오는 기쁨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루카 1,54)
주님!
제 안에서 활동하시는 당신을 찬미합니다.
제 안에 베푸신 측량할 수 없이 큰, 헤아릴 수 없이 놀라운 당신의 자비를 찬미합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여 찬미하는 일이 제 삶의 전부가 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자비의 노래 외엔 아무 것도 아니 되게 하소서. 아멘.

비천함을 돌보시는 하느님
-반영억신부-
마리아는 시골의 보잘것없는 여인이었습니다. 힘없고 가난하고 비천한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말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루카1,47-48). 비천함을 굽어보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기쁨이며 또 희망입니다. 우리의 비천함도 돌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주님을 믿고 순명하는 가운데 세상 사람들이 그를 복된 여인,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 분, 거룩하신 어머니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느님의 가르침을 믿고, 믿는 바를 행동으로 실천하게 될 때 비로소 복된 사람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때때로 자신의 처지나 여건, 환경을 비관합니다. 능력이나 성격을 상대와 비교하며 위축되어 힘들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1,51-53). 이 "성모님의 노래는 예수님을 통해 드러날 새로운 세상에 대한 찬미가입니다. 인간은 ‘남보다 무언가 내가 더 낫다’라는 교만으로 상대를 깔보고 무시하며 죄를 지었지만, 새로운 세상은 그야말로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이 더 이상 힘들게, 서럽게 살아가지 않는 세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한 사람도 버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고 지금 나의 처지를 인정해 주시며 그 안에서 구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지금은 보잘것없다고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면 빛나는 존재입니다.
젊은 날에 아이를 배지 못하는 돌계집이라고 손가락질을 받던 엘리사벳도 늙은 나이에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주셨구나”(루카1,25).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자신의 처지나 환경을 탓하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을 믿고 충실한 삶을 살았으며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당신의 도구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전능하신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나의 비천한 처지를 돌보시는 하느님을 기억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빈손'이 많을수록 세상엔 가난한 이들이 줄어듭니다. 움켜잡으려고 하는 이들이 많으면 힘들어하는 이들이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내려놓음의 신비 안에, '빈손' 의 신비 안에서 성탄의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코로나19’로 옴짝달싹 못 하는 한 가운데 아기예수님은 탄생하십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마리아의 노래
-송영진신부-
1) ‘마리아의 노래’는 하느님의 인류 구원사업을 찬양하는 찬미가인데,
내용을 보면 메시아께서 하시게 될 일에 대한 예언도 들어 있습니다.
2) ‘마리아의 노래’는 마리아 개인만의 찬미가가 아니라,
구원받기를 희망하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찬미가입니다.
3) ‘마리아의 노래’는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을 받을 것이다.” 라는
‘경고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 경고는 영혼 구원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그저 세속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향한 경고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6ㄴ-48ㄱ).”
1) 우리가 하느님의 구원사업을 기뻐하는 것은, 즉 메시아께서 세상에 오심으로써
구원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을 기뻐하는 것은,
간절하게 원했던 일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원하지 않은 일이라면 기뻐하지 않습니다.
(신앙인들이 예수님의 성탄을 기뻐하는 것은,
메시아께서 세상에 오시기를 간절하게 원했기 때문입니다.
또 구원받기를 간절하게 희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 또 구원받는 일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는 사람들에게는
성탄절은 기쁜 날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하루 쉬면서 즐기는 공휴일일 뿐입니다.
겉으로는 즐거워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것은 참된 기쁨이 아니라 세속적인 즐거움일 뿐입니다.)
2)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비천한’ 처지에 놓여 있는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비천함’이라는 말을 ‘비참함’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죄와 죽음의 억압’을 받고 있었고,
그 억압은 자신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비참한’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우리를 해방하려고 오셨습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먼저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깨달아야 하고,
그것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나는 비참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교만한 사람은
예수님의 강생을 기뻐하지도 않고, 예수님을 반기지도 않습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루카 1,48ㄴ-50).”
‘내가’ 구원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고,
구원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은, 나에게는 ‘큰일’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큰일’입니다.
즉 경이로운 일이고, 위대한 일입니다.
죄 속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으니......
그것을 믿고, 그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은총은 받기를 원하고, 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만 받게 됩니다.
여기서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라는 말은,
‘경외하는 이들에게만’ 차별적으로 자비를 베풀어주신다는 뜻이 아니라,
자비를(구원의 은총을) 받기를 원하고, 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만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주시는데도 안 받는 사람은 자기가 안 받아서 못 받게 됩니다.)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루카 1,52ㄴ-53ㄱ)”
이 말씀은 ‘참 행복 선언’에 연결됩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루카 6,20-21).”
메시아의 ‘구원’은 죄와 죽음의 억압을 받고 있는 비천한 위치에서 살던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을 직접 뵙는 영예로운 위치로 높여지는 일이고,
이 세상에서 굶주리다가 하느님 나라에서 배불리 먹는 일입니다.
(여기서 ‘굶주림’은 몸의 굶주림과 영혼의 굶주림을 모두 포함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하느님의 강한 손 아래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때가 되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맡기십시오.
그분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1베드 5,6-7).”
메시아의 자비를 받으려면 겸손하게 그 자비에 자기 자신을 모두 맡겨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루카 1,51-52ㄱ)”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 1,53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력과 재물 때문에 교만해져 있는 사람들은
그 교만을 버려야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교만의 원인이 되는 권력과 재물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나는 교만을 버렸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위선자’입니다.)
버려야 할 것들을 버리지 않고 그냥 가지고 있겠다고 고집을 부려도
그것들을 모두 잃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흩으셨다.’와 ‘내치셨다.’는 ‘쫓아내셨다.’ 라는 뜻입니다.)
이 경고 말씀은, 세속의 헛된 것들을 추구하고 그런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고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지금 실제로 가진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빈손’이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빈 마음’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루카 1,54-55).”
이 말씀은 당신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하느님의 ‘성실하심’과 ‘영원하심’을
찬양하는 말씀인데, 하느님의 ‘성실하심’과 ‘영원하심’을 믿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우리 쪽에서도 성실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자신은 불충실하게 살면서, 하느님께서 구원 약속을 성실하게 지키시기를
바라는 것은 대단히 오만 방자한 태도입니다.

마리아의 노래: 하느님 찬미가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1,46-56: 마리아의 노래-하느님 찬미가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뛰니”(47절) 마리아는 자기 자신의 모든 것, 영혼과 마음으로 주님이신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은 하느님 자체가 아니라, 하느님의 모습이다. 이 하느님의 모습은 우리의 일과 생각과 말로 키울 때, 우리는 올바로 주님께 찬미를 드릴 수 있다. 우리의 모습 안에서 그분은 더 우리의 삶을 지배하시게 된다는 것이다. 그분이 우리의 주체가 되신다는 말이다.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48절) 이 말은 마리아의 겸손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온갖 복을 받은 것은 은총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즉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49절)이라고 한다. 하느님께서 마리아의 겸손을 굽어보셨고, 전능하신 분께서 그 여인에게 큰일을 하셨고,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다.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50절)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는 주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들은 주님의 자비를 입을 것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대대로’라는 말은 유다인이건 이방인이건 그리스도를 믿게 될 모든 나라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베드로는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사도 10,34-35)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51절) “당신 팔로”는 “당신의 힘을 쓰시어”라는 말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힘으로 통치자들, 높은 자리에 앉으려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교만함을 흩으시고 그들이 율법의 포로로 만든 이들을 당신 나라에 받아들이셨다. 이 통치자들은 하느님의 힘이 필요하지 않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 4,13)라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 진정 힘 있는 자들이다.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53절) 굶주리는 이는 겸손하고, 가난한 이다. 부유한 자는 교만하고 자기가 남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을 보려면 성전에서 빈손으로 내쳐지는 부유한 자 바리사이와 좋은 것들로 배부르게 될 굶주린 이를 볼 수 있다. 자신을 남과 비교하며 교만의 악취를 내뿜는 부자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했던 그의 마음은 그가 눈을 두지 못한 바로 그곳에 있었다.(루카 18,10-14 참조)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54-55절) 여기서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보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구원받은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그분이 거두신 이스라엘은 허울뿐인 교만해진 육에 따른 이스라엘이 아니다. 그 이름의 참뜻대로 당신의 성령을 좇아 살아가는 이스라엘이다. 하느님을 바라보며 그분을 믿고, 약속과 말씀에 따라 하느님의 아드님을 통하여 그분의 자녀가 된 이들이다.
또한, 이스라엘은 혈통에 따른 이스라엘이기도 하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믿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자비를 기억하시고, 그의 후손으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복을 받으리라는(창세 22,18 참조) 약속을 이루어 주셨다. 이 약속은 아브라함의 후손(히브 2,16 참조)이며 그분을 통하여 이방인들이 복을 받게 되는 우리 구세주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완성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시어, 선조들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신 것이다.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56절) 마리아는 석 달 정도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며, 요한이 탄생한 다음 엘리사벳을 위해 봉사하시고 집으로 가셨다. 그리스도를 낳아주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었다. 성탄을 잘 준비한다는 것은 바로 마리아와 같이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다. 즉 사랑을 실천할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들에게 올바로 낳아줄 수 있다. 마리아와 같이!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 49)
-한상우신부-
큰일이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하는
기쁨이다.
다시금 우리
영혼을
설레게 한다.
사랑이
설레게 한다.
대림의 빛깔은
이와같이
사랑으로
맑고 기쁨으로
정갈하다.
춥고 어두운
마음을
비추어 준다.
본모습을
보게한다.
가득하고도
따사로운
은총이며
축복이다.
우리보다 먼저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한다.
하느님을
체험한 후
삶이
달라진다.
전능하신 분의
지극하고도
충만한
자비의 힘이다.
비참한
상황에서도
우리를
잡아 일으켜
세우시는
하느님의
전능함이다.
자비하신
하느님 안에
우리가 있다.
사랑으로
큰일을 하시는
그분께 우리의
마음을 드리는
대림이다.
대림은
하느님을 향한
뜨거운
가슴이며
사랑으로 설레는
영혼의 기쁨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는 구세사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두 여인이 등장합니다. 제1독서의 한나, 그리고 복음 속 마리아입니다.
"제가 여기 나리 앞에 서서 주님께 기도하던 바로 그 여자입니다."(1사무 1,26)
한나는 눈물의 기도로 아들을 얻습니다. 그리고 기도로써 얻은 그 아들을 주님께 기꺼이 바치지요. 오늘 독서가 바로 아들을 봉헌하는 대목입니다.
이 아이가 온 이스라엘에 "주님의 믿음직한 예언자"(1사무 3,20)로 알려질 사무엘입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이 신정체제에서 왕정체제로 건너가는 과정 중에, 주님과 백성 사이에 서서 예언자의 역할을 충실히 해낸 인물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첫 임금인 사울과 주님께서 선택하신 성왕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고, 정치와 종교 사이에서 이스라엘이 정체성과 균형을 잃지 않도록 혼신의 힘을 다해 봉사했습니다.
이 귀한 아이를 낳아 주님께 바친 뒤 한나는 주님께 찬미와 찬송을 올려드립니다. "한나의 노래"(1사무 2장 참조)는 복음 속 "마리아의 노래"에 영감이 되었다고 할 정도로 내용과 형식에서 공통점이 많습니다.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화답송이 "한나의 노래"를 담고 있지요.
복음에서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인사말에 화답하며 주님을 찬송합니다.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8)
주님은 눈물의 기도를 흘려듣지 않으십니다. 가난하고 굶주리고 비천한 이들이 주님께는 매우 귀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자비를 더축 충만하게 완성하는 이들입니다. 자비하신 분의 자비는 그들 때문에 최대치로 발휘되고 극대화되지요.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루카 1,50)
바로 그들이 주님을 경외하기 때문입니다. 경외는 두려움과 사랑, 우러름과 신뢰를 합한 정감일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만난 한나와 마리아, 이들은 진정으로 주님을 경외하는 작은 이들이었습니다.
사실 마리아의 노래는 가히 혁명적입니다. 그 안에서 신분의 전복이 역력히 드러납니다. 하지만 주님 권능으로 뒤집어지는 기존 질서는 세상 기준의 높낮이가 아니라 주님을 경외함이 기준입니다.
주님께서 흩으시고 끌어내리시고 내치시는 이들, 즉 교만한 자, 통치자, 부유한 자는 하느님을 경외하고 사람을 존중하라고 자기에게 맡겨진 힘과 재물을 제것으로 움켜쥐거나 함부로 남용한 이들을 가리킵니다.
반면 주님께서 굽어보시고 들어 높이시며 배불리시는 이들은 주님께 모든 것을 온전히 의탁하고 바라는 작고 가난한 이들입니다. 삶에서 허용되는 작은 공 하나도 주님께 돌리며 감사하는, 영의 사람들이지요.
하느님의 자녀로 불리움 받아 살아가는 우리는 저마다의 작음과 약함, 비천함을 지닌 존재들입니다. 주님께서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고 용서하셔서 오늘도 감사로이 삶을 이어가는 중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베푸신 놀라운 자비와 사랑에 대해 마리아와 함께 주님께 기쁨과 감사와 찬미의 노래를 바쳐드리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을 경외하며 겸손과 감사로 삶을 엮어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과정적인 고통과 불행
-김찬선신부-
오늘은 성모 마리아의 찬가를 묵상하면서
마리아가 체험한 하느님에 대해 묵상해봤습니다.
오늘 마리아는 하느님께 대해 다음과 같이 찬미합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 거룩하신 분, 자비하신 분이십니다.
이렇게만 보면 하느님은 좋으신 분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 좋으신 하느님이 비천한 자, 굶주리는 이들에게는 자비하시지만
그 반대의 사람들에게는 결코 자비하지 않고, 자리에서 내치는 분이십니다.
어젠 아침 성무 일도를 바치는데 늘 바치던 다음 구절이 마음에 꽂혔습니다.
"당신의 종들을 어여삐 여기소서. 새벽부터 넘치도록 자비를 베푸시어 *
우리 한생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우리를 괴롭히신 그 날수만큼
우리가 불행하던 그 햇수만큼 * 그만큼 우리를 즐겁게 해주소서"
여기서 하느님을 괴롭히신 하느님, 불행에 빠트린 하느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이 절대 이런 분이 아닐 거라고 믿고,
믿음이 약한 이들이 하느님은 우리를 단죄하시는 무서운 분이라고 하면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하느님을 변호하듯 제법 하느님을 변호하곤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전능하시고, 거룩하시고, 자비하신 분이시며
그래서 오늘 마리아가 찬미하듯 우리를 구원하시고, 행복하게 하시는
분인 것 맞지만 우리를 괴롭히시고, 불행케 하시는 분인 것도 맞습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하느님 체험은 오늘 화답송의 한나 찬가와 같아야 합니다.
"주님은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시며, 저승으로 내리기도 저승에서 올리기도
하신다. 주님은 가난하게도 가멸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높이기도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을 제대로 믿는다면
전능하시고, 거룩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괴롭히시고, 불행케 하시는 과정을 거쳐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을,
괴롭히심과 불행케 하심이 하느님의 구원 방법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괴로움과 불행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과정적인 괴로움과 불행이라는 얘기이고,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니만큼 그 괴로움과 불행도 자비라는 얘기지요.
우리 인간과 하느님의 차이가 있다면
우리 인간은 무자비하고 그래서 미움과 분노로 괴롭히고, 불행케 한다면
하느님은 자비로 우리를 괴롭히시고, 불행케 하시고
이것들을 통해 궁극적인 구원과 행복에 이끄신다는 점이지요.
이 하느님을 마리아와 한나와 함께 찬미하는 오늘 우리가 되십시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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