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24일 대림 제4주간 목요일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루가 1,67-79)
In the tender compassion of our God
the dawn from on high shall break upon us,
to shine on those who dwell in darkness
and the shadow of death,
and to guide our feet into the way of peac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기석신부-
주님 성탄 전날인 12월 24일의 독서와 복음은 대림 시기를 마무리하면서 곧 시작할 새로운 기쁨의 때를 준비하기에 꼭 맞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우선 오늘 독서는 하느님께서 나탄 예언자를 통하여 다윗 임금에게 전하신 약속입니다.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임금인 사울의 죽음으로 끝맺으며 한 시대가 종결되었음을 보여 주는 사무엘기 상권과 달리 하권에서는 다윗의 왕권에 그 초점을 둡니다. 특별히 오늘 독서인 7장은 다윗에게 영원한 왕권이 약속되고, 이 약속이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지기에 사무엘기의 절정이고,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역할을 합니다.
약속된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님을 맞이하는 길을 닦으려 앞서 온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아들의 탄생을 지켜보며 하느님께 찬미를 드립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 …… 그분께서는 우리 조상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당신의 거룩한 계약을 기억하셨습니다.”
즈카르야처럼 하느님의 크신 자애를 영원히 노래하고픈 마음이 오늘 화답송 시편에도 담겨 있습니다. “주님의 자애를 영원히 노래하오리다. 나는 내가 뽑은 이와 계약을 맺고, 나의 종 다윗에게 맹세하였노라. ‘영원토록 네 후손을 굳건히 하고, 대대로 이어 갈 네 왕좌를 세우노라.’ 영원토록 그에게 내 자애를 베풀리니, 그와 맺은 내 계약 변함이 없으리라.”
그렇다면 오늘 밤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별’은 의심의 여지없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심은 물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 확실합니다. 오늘 하루는 떠오르는 별, 영원한 빛이신 주님을 기다리는 날입니다. “주님, 어서 오소서!”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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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 아웃(Burn Out)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전적 의미는 ‘어떤 활동이 끝난 후 심신이 지친 상태. 과도한 훈련에 의하거나 경기가 원하는대로 풀리지 않아 쌓인 스트레스를 해결하지 못하여 심리적, 생리적으로 지친 상태’라고 정의합니다. 즉, 힘도 의욕도 없는 무기력한 상태가 지속되는 것을 말합니다.
삶 안에서 ‘완전히 지쳤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요즘 특히 많은 것 같습니다. 그들 스스로가 ‘나는 지금 번 아웃 상태인가 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습관적으로 내뱉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은 아닐까요? “피곤해”라는 말을 초등학생들도 하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말만 내뱉다 보니 실제로 무기력해지는 피곤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피곤함은 자신을 잃게 만들고, 더 나아가 인생이 잘 풀리지 않습니다.
피곤함이 잠을 잔다고 해결될까요? 실제로 피곤함을 느끼는 사람은 많이 잡니다. 그러나 자도 자도 피곤하다고 말하지요. 육체적인 피곤함을 해결하더라도 정신적 피곤함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피곤한 상태에서도 반드시 하셨던 모습이 있습니다. 늘 홀로이 외딴곳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영적 피곤함이 사라지면 육체적 피곤함도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피곤하고 지친 사람들은 주님께 대한 모든 것을 뒤로 미룹니다. 믿음까지 사라지게 됩니다. 삶에 대한 믿음도 사라져서 모든 열정도 없어집니다. 따라서 습관적이라도 나쁜 말, 부정적인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좋은 말, 긍정적인 말을 할 때 믿음도 커지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인 즈카르야는 요한의 잉태 소식을 듣고는 의심을 하고 부정적인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 결과는 그의 입을 아예 닫아버리시지요.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을 때 비로소 혀가 풀려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때 바쳤던 노래가,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즈카르야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과거에 하느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구원 행위와 그 행위를 요한과 예수가 어떻게 완성할 것인지 서술함으로써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모두 망라합니다. 그리고 이 노래의 핵심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과 약속을 기억하시며, 따라서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약속을 믿어도 된다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은 당신 백성을 찾아오시어 그들을 모든 육적, 영적 원수들로부터 구해 주시리라는 당신의 약속에 충실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의심과 부정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찬미와 찬양의 노래가 바로 우리의 입에서 나와야 하는 이유를 깨닫게 됩니다. 이런 말과 행동을 갖출 때, 오늘 밤 이 땅에 강생하시는 아기 예수님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라는 로버트 스티븐슨의 소설입니다. 워낙 인상적인 소설이기에, 1931년에 처음 영화로 만들어진 이후 계속해서 영화, 뮤지컬로 등장했습니다.
친절하고 인정 많은 헨리 지킬 박사는 인간에게 선과 악의 두 가지 본능이 있는데 이를 화학약품을 이용해서 분리하는 데 성공합니다. 지킬 박사는 무서운 범죄를 저지르는 하이드를 조절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결국 하이드를 통제할 수 없게 됩니다.
인간에 대해 너무나도 정확하게 묘사한 소설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충분히 통제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의 어두운 면을 드러낼 때, 우리 안의 가장 선한 면은 완전히 가려지고 맙니다.
독재자를 떠올려 보십시오. 처음에는 모두 훌륭한 의도로 시작합니다. 선이라 생각하는 일을 실행하기 위해 어쩔 수 없다고 말이지요. 그러면서 이 모든 것을 해결하고 나면 훌훌 털고 그 자리에서 벗어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이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독재자로 인간의 포악성을 드러내곤 했습니다. 선한 면은 완전히 가려지고 포악한 악만 남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악을 통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늘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는 데 모든 노력을 쏟아부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만나는 이들의 미래를 예언한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즈카르야의 노래입니다. 즈카르야는 입이 풀리자 성령으로 가득 차 ‘예언’을 합니다. 즈카르야는 요한을 바라보며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가 그분의 길을 준비”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리고 요한은 아버지의 예언대로 위대한 예언자가 됩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요한의 아버지보고 요한의 미래를 예언하도록 하셨던 것일까요? 아버지의 예언이 없다면 예언자가 되지 않을까요? 물론 되기야 하겠지만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믿어주는 사람들 안에서 더 쉽게 그렇게 됩니다. 사람은 서로에게 영향을 줍니다. 아버지가 의심하면 아들도 의심하기 쉽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가장 큰 힘은 ‘자기 정체성’입니다. 그런데 그 정체성은 바로 자신이 누구냐는 ‘믿음’에 의해 생깁니다. 만약 부모님이 자녀들의 미래를 의심하면 자녀들도 자신들의 미래를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즈카르야가 의심할 때는 입을 다물도록 벙어리가 되게 하였다가 믿음이 생기자 입이 열리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만나 영향을 줄 수 있는 모든 이들에게 그 정체성을 예언하는 예언자들입니다.
뭔가 유치한 구석이 많은 영화 한 편을 소개해 드립니다. ‘허큘리스’(2014)입니다. 헤라클레스는 제우스의 아들로 신적인 힘을 가진 인간이었습니다. 허큘리스는 이 신화적 인물 헤라클레스를 재해석한 영화입니다.
신화에서는 네메안의 사자와 지옥의 개들을 물리친 괴력의 소유자입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그저 평범한 인물로 나옵니다. 평범하지만 물론 힘은 좀 셉니다. 그가 평범한 인물로 살아가는 이유는 자신이 헤라클레스임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내와 자식들이 죽임을 당하는 데 아무 힘도 쓰지 못했습니다. 가족도 지키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헤라클레스일 수 있겠습니까? 그는 그저 돈을 위해서 싸워주는 평범한 용병에 불과합니다.
어느 날 헤라클레스의 소문을 들은 이웃 나라 트라키아 공주가 찾아와 레수스라는 왕국과 전쟁을 벌이는데 도와주면 충분한 보수를 주겠다고 말합니다. 헤라클레스는 돈을 벌기 위해 트라키아 군대들을 훈련하고 전쟁에 나가 트라키아 왕을 위해 싸워줍니다. 하지만 사실 트라키아 왕 코티스는 진짜 왕을 죽이고 남은 반란군들을 제압한 후 자신이 왕이 되려고 헤라클레스를 돈으로 이용한 것입니다.
헤라클레스는 좋은 이들을 자신이 죽게 만들고 악한 사람을 도와준 것에 분하여 그들에게 대항하려 하지만 그들의 덫에 걸려 갇히고 맙니다. 그리고 그와 그의 동료들이 죽음 직전에 처하게 됩니다. 이때 그의 아내와 자녀들이 죽은 이유가 아테네 왕이 그를 시기하였기 때문임을 알게 됩니다. 그가 힘을 쓸 수 없었던 이유는 자기보다 유명해진 아테네 왕이 그의 술잔에 약을 탔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절체절명의 순간 이 모든 사실을 아는 동료는 그에게 소리칩니다.
“넌 누구지? 무고한 사람들에게 등을 돌린 돈 받고 싸워주는 용병? 아니면 그 전설 속의 진짜 영웅이야? 너 자신을 믿어. 네가 누구인지 기억해. 어서 말해. 넌 대체 누구야?”
“나는 헤.라.클.레.스.다!”
그 이후엔 어떻게 되었는지 뻔합니다. 좀 닭살이 돋는 전개가 되는 영화이지만, 이 대목이 마음에 들어 소개한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지 못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내가 그 믿음에 합당하게 살지 못함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위에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에 의해 그 믿음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나의 예언자가 되는 것입니다.
로버트 기요사키의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에도 아버지의 예언이 자녀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 잘 보여줍니다. 가난한 아빠가 로버트 기요사키의 친부입니다. 박사학위까지 있지만, 항상 가난했고 자녀에게도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지 않으면 가난할 수밖에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이것도 하나의 예언입니다. 공무원인 아버지는 아들도 직장인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기요사키는 그 아버지를 믿지 않았습니다. 다행인지 키요사키는 부자들만 다니는 학교에 다니게 되었고 그들과 그들의 아버지들에게 영향을 받습니다. 믿음으로는 다른 아버지를 선택합니다. 친구의 사업가 아버지였습니다. 그의 친구 아버지는 학위도 없는 사업가였지만 돈에 대해 가르쳐주었습니다. 돈이 돈을 벌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절대 월급쟁이가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기요사키는 상반되는 두 아빠 중 누구의 말을 믿었을까요? 부자 아빠의 말을 믿었습니다. 자신 주위에는 부자 아빠들이 더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본인도 엄청난 부자가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예언자가 되고 있습니다. 그 사람에 대한 나의 믿음이 그 사람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선택은 그 사람이 하겠지만 그래도 그 사람을 그렇게 믿어주는 사람들이 주위에 많다면 그 사람은 그 믿음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 그런 사람이 되고야 맙니다. 어떤 사람은 “당신과 가까운 다섯 사람을 말해보세요. 내가 당신이 누구인지 알려드리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주위 사람들의 믿음이 그의 미래를 결정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위 사람에게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믿고 말해주지 못할 바에야 즈카르야처럼 벙어리가 되는 편이 낫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 입을 여셔서 우리가 우리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무엇이든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해줄 수 있는 예언자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의 예언자, 내가 만나는 이들의 예언자임을 잊지 맙시다. 나의 모든 말은 누군가에게 예언이 됩니다. 그래서 상대의 정체성에 대해 좋은 예언을 하지 않을 것이면 차라리 침묵하는 편이 낫습니다.

-조재형신부-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캐나다 토론토에 있었습니다. 토론토에 있는 레지스 컬리지에서 이냐시오 영신수련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대학에서 운영하는 사목연수 프로그램도 신청해서 참여했습니다. 40일간의 이냐시오 영신수련 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동네 공원을 산책하면서 하늘 높이 떠가는 비행기를 보곤 했습니다. 지치고 힘들 때면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가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토론토의 겨울은 상당히 추웠습니다. 그때 이어폰을 통해서 들리던 노래가 생각납니다. ‘California Dreaming'입니다. 경쾌한 멜로디가 좋았고, 노래도 좋았습니다. 가사의 내용은 단순했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뉴욕에 있었는데 나뭇잎은 갈색이고, 구름은 회색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성당에 들어가 기도하려고 했는데 사제가 추운 것도 좋다고 합니다. 당신들은 아마 여기 머물 거라고 합니다. 그러나 캘리포니아에 있었으면 좋았을 거라고 노래합니다. 만일 그녀에게 말하지 않았다면 캘리포니아로 떠날 수 있었을 거라고 노래합니다. 캘리포니아는 어떤 의미였을까요? 태평양의 바다를 볼 수 있고, 따듯한 날씨가 있고, 아마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 아니었을까요? 제가 당시에 그 노래를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하는 것은 제가 살았던 고향, 함께 시간을 보냈던 동창, 힘든 시간 함께 했던 분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가 봅니다. 하지만 저 역시도 이곳 뉴욕에 머물러야 합니다. 제게 주어진 업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곳 뉴욕에도 마음이 따뜻한 이웃이 있고, 같은 길을 가는 사제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에게 ‘California Dreaming'은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2000년 전 베들레헴의 구유에서 태어난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의 역사는 예수님 탄생 전(Before Christ)과 예수님 탄생(Anno Domini)으로 구분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난 4주 동안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렸습니다. 현재의 권력에 취해있던 헤로데 왕에게 예수님의 탄생은 새로운 경쟁자였습니다. 그래서 헤로데는 거짓으로 경배하겠다고 동방박사에게 예수님께서 태어나시는 장소를 알려달라고 하였습니다. 율법학자와 사제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빼앗을지 모르는 위험인물이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태어날리 없다고 단언합니다. 진리라는 달은 보지 않고, 율법이라는 손가락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오심을 깨어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천사의 말을 듣고 하느님의 뜻에 순명한 요셉과 마리아, 즈카리야아 엘리사벳’이 있었습니다. 평생 기도 중에 주님의 탄생을 기다렸던 ‘시메온과 한나’가 있었습니다. 어린 양들을 돌보던 목동들이 있었습니다. 목동들은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 위에서는 마음이 착한 사람들에게 평화’라고 노래하였습니다. 동방박사들은 멀리서 주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서 길을 떠났습니다. 그들의 손에는 ‘황금, 유향, 몰약’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탄생이라는 드라마는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많은 이들이 참여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한 사람,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 오랜 시간 성전에서 기도하는 사람, 진리를 위해서 먼 길을 떠나는 사람에게 예수님의 탄생은 ‘California Dreaming'입니다.
2020년 성탄이 곧 다가옵니다. 마리아의 노래와 함께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아름다운 노래가 오늘 복음에서 읽은 ‘즈카리야의 노래’입니다. 매일 아침 성무일도에서 묵상하는 노래입니다. 오늘 하루 이 노래를 마음에 담았으면 좋겠습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 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 당신의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예로부터 말씀하신 대로, 우리 원수들에게서,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조상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당신의 거룩한 계약을 기억하셨습니다. 이 계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로, 원수들 손에서 구원된 우리가 두려움 없이, 한평생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당신을 섬기도록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입니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가득한 기쁜 성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성탄(聖誕)은 오늘 우리 한 가운데,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슬프고 고통스런 현실 안에서 시작됩니다!
-양승국신부-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과 시련의 길고 긴 터널을 지나고 있는 우리지만, 올해도 어김없이 성탄은 다가왔습니다. 힘겹게 견뎌내고 있는 전 세계 살레시오 가족들과 교우들을 위해 저희 살레시오회 앙헬 페르난데스 총장님께서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를 보내주셨습니다.
“나는 희망이 되게 하는 믿음에 매료되었습니다.”
베트남 공산화 즉시 13년간 감금되셨고, 9년간 독방에서 생활하셨던 베트남의 가경자 구엔 반 투안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928~2002)의 말씀입니다. 추기경님의 간략한 말씀 안에는 힘겨운 한 해를 잘 견뎌낸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2020년을 마무리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답이 들어있습니다.
올 한해 우리는 엄청난 고통과 상실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 팬데믹 시대를 살아가면서 가정적,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어 왔습니다. 그리고 언제까지 계속될지 기약도 없습니다.
이토록 어려운 시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기 예수님의 성탄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난감하고 곤혹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성탄의 의미는 오늘 이 시대에 맞춰 계속 재해석되어야 하고 성찰되어야 합니다.
성탄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만나로 오시는 은혜로운 대 사건입니다. 오늘 이 순간도 하느님께서는 지속적으로 사람이 되시고, 특별히 오늘 성탄절 날 갓난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 각자에게 다가오십니다.
오늘의 어둠이 아무리 짙다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항상 당신 백성과 동행하시며 아픔과 상실, 고통의 순간에도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다는 가장 강력한 표현이 곧 아기 예수님의 성탄입니다.
때로 고통은 우리를 더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게 만들고, 더 진지한 신앙 여정 속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이토록 혹독한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는 현실을 긍정적으로 바라봐야겠습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님을 잊지 알아야겠습니다.
새해에는 모든 피조물을 훨씬 더 진지하게 받아들여야겠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고통 속에 있는 수많은 청소년들의 외침, 6천8백만명의 난민들의 안타까운 처지를 기억해야하겠습니다. 우리는 다른 곳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탄생하시는 아기 예수님을 경배해야겠습니다.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가 각별히 주의해야 할 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성탄절 하면 우선 떠오르는 이미지는 어떤 것들입니까? 성탄절의 아름다운 추억입니다. 마음에 드는 성탄 선물, 잘 차려진 성탄 파티, 달콤하고 로맨틱한 성탄 구유와 전례 등등... 성탄과 관련된 아름다운 추억들입니다.
그러나 2천년전 예수님께서 탄생하셨던 베들레헴의 마굿간에는 달콤하고 로맨틱한 분위기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현실은 냉정했습니다. 예수님 탄생의 분위기는 비참하고 서글펐습니다. 예수님 탄생 당시 사회적 상황 역시 암울했습니다.
하느님의 이 세상 육화강생은 태평성대 때가 아니라, 가장 암울하고 어려운 시대, 로마 식민 통치 시대, 가장 불안한 헤로데 왕정 시기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 세상 안으로 들어오셨던 최초의 모습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로마 황제처럼 강력한 모습으로 오지 않으셨습니다. 지혜로 똘똘 뭉친 현자의 모습으로도 오지 않으셨습니다. 탁월한 능력을 지닌 해결사의 모습도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힘으로는 머리 조차 옆으로 돌릴 수 없는 갓난 아기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느님 인류 구원의 역사는 바로 오늘 우리 한 가운데,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슬프고 고통스런 현실 안에서 시작됩니다. 아기 예수님의 성탄 역시 이 어려운 시대, 큰 고통을 겪고 있는 우리 각자 안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 환호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더오르는 별, 영원한 빛, 정의의 태양이신 주님, 어서 오소서.
어둠 속 죽음의 그늘 아래 앉아있는 이들을 비추소서.”
즈카르야의 노래에서 따온 이 구절은 바로 이 시대의 희망이요, 바로 우리의 기도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도 여전히 어둠과 질곡이 판을 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둠이 짙기에 우리는 빛을 더더욱 기다립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다윗 가문에 영원한 왕좌가 약속되고, <복음>에서는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가 성령으로 가득 차 노래합니다. 우리가 매일 <아침기도> 때 드리고 있는 이 찬가(Benedictus, 찬미받으소서)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전반부>(1,68-75)는 하느님께 드리는 찬양의 노래로 선조들과 예언자들에게 약속하시고 예언한 구원을, 아기 예수님을 통해 실현하심을 찬미합니다. 곧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셨음을 노래합니다. 특히 여기에서는 구원받은 인간이 하느님을 섬기는 데 지녀야 할 두 가지 덕목을 ‘거룩함’과 ‘의로움을’으로 노래합니다.
“우리가 두려움 없이 한평생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당신을 섬기도록 해주시려는 것입니다.”(루카 1,75)
<후반부>(1,76-79)는 어제 <복음>의 “이 아이가 대체 무엇일 될 것인가?”(루카 1,66)에 대한 답변으로 태어날 아기, 곧 세례자 요한이 장차 어떤 일을 할 것인가를 노래입니다. 여기에서는 “지극히 높으신 분”은 하느님을,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은 예수님을, 그리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로 세례자 요한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곧 세례자 요한을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의 선구자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 노래의 ‘끝부분’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1,78-79)
여기서 “크신 자비”라는 말의 직역은 ‘자비의 내장으로’ 입니다. 곧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그 크고 깊으심에서 그리스도 오시어, 어둠과 죽음에 앉아있는 이들, 곧 이방인들을 비추고 평화로 이끌 것입니다. 결국, 빛이 오면, 어둠은 물러날 것입니다. 아무리 어둠이 기승을 부려도 어둠이 짙으면 새벽이 멀지 않듯, 빛은 막을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힘으로 오십니다.
그렇습니다. 이미 타오르는 빛이 우리의 발길을 밝히고 있습니다. 구세주께서 이 어두운 이 세상에 곧 오시어, 참 빛을 밝히실 것입니다. 어둠 속 우리를 당신 빛 속, 평화의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오늘 밤 우리는 그 빛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은 등불을 밝혀들고 참 빛을 맞이할 태세를 갖추어야 할 때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되어 우리를 찾아오시어~”(루카 1,78)
주님!
제 안에 오신 빛, 자비시여. 저를 비추소서.
당신 마음으로 저를 채우소서. 제가 자비로워지겠나이다.
당신 얼굴로 저를 비추소서. 제가 평화로워지겠나이다.
제 안에 오신 별, 빛이시여. 밝히소서. 제가 환해지리이다.
그 크고 깊으심으로 저를 어루만지소서. 제가 새로워지겠나이다. 아멘.

복음: 루카 1,67-79: 즈가리야의 노래
-조욱현신부-
성령께서는 즈카르야를 사로잡으시어 아홉 달의 침묵을 깨고 요한이 할례 받던 날, 예언하게 하셨다. 즈카르야는 노래 첫머리에서 장차 요한이 준비할 그리스도의 구원에 관해 이야기한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68-69절)
주님께서는 당신에게서 멀리 떨어진 우리에게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오셔서 죄인인 우리를 찾아 의롭게 만들기로 하셨다. 그분은 우리의 뿌리 깊은 병인 교만을 치료하고자, 의사가 환자를 찾아가듯 우리를 찾아오셨고, 당신의 겸손을 그 본보기로 보여 주셨다. 그분은 당신의 피를 대가로 치르고 우리에게 자유를 찾아 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분은 “육으로는 다윗의 후손”(로마 1,3)이며, 다윗 집안에서 일어난 구원의 뿔이셨다.
그것은 “우리 원수들에게서,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71절) 그리스도는 자비요 정의이시다. 우리는 그분을 통해 자비를 입었고 의롭게 되었으며, 그분 안에서 믿음을 통해 사악함의 때를 씻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73절)는 어떤 일에 대한 보장이다. 반드시 당신 말씀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 맹세는 당신의 말씀을 따르는 이들 각자에게 당신의 약속이 틀림없이 이루어지리라는 확신을 심어주는 그분 자신의 말씀이다.
“원수들 손에서 구원된 우리”(74절) 이 원수들은 육체의 원수들이 아니다. 그들은 영의 원수들이다. “싸움에 용맹하신”(시편 24,8) 주 예수께서는 우리 원수를 멸망시키고 그들의 올가미에서, 즉 모든 원수의 손에서,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71절) 우리를 해방하고자 오셨다. “우리 조상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72절) 주님께서 오셨을 때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은 구원의 은혜를 입었다. 그들은 그분의 날을 미리 보고 즐거워하였다(요한 8,56 참조)
“그분께서는 우리 조상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당신의 거룩한 계약을 기억하셨습니다. 이 계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로, 원수들 손에서 구원된 우리가 두려움 없이 한평생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당신을 섬기도록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72-75절)라고 노래하고 있지 않은가?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76절) 여기서 지극히 높으신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모든 예언자의 하느님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길을 비추는 등불이었다. 유대인들은 잠시 그에게 모여들어 세례도 받고 그의 생활방식에 감탄도 했지만, 영원히 타오르는 등불을 끌려고 별짓을 다 하다 결국 그를 죽음의 잠자리에 들게 하였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78-79절)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을 알게 하는 참 빛을 우리에게 주셨고, 오류의 어둠을 거두어 가셨으며, 하늘로 가는 길을 열어주셨다. 그분은 우리의 발을 이끌어 당신이 보여 주신 진리의 길을 걷게 하셨고, 당신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평화의 거처로 들어가게 하셨다.
이제 우리는 “높은 곳에서 온 별”을 맞이하게 된다. 이런 복된 일이 어디 있는가? 우리를 위하여 아무런 명성도 떨치지 않으신 분, 하느님의 모습과 종의 모습을 함께 지니신 분, 그러나 어둠 속에 갇혀있던 우리 세상을 위해 빛처럼 해처럼 솟아오르시는 분, 우리는 그분께 무릎 꿇고 절하게 되었다.
이제 우리도 우리의 삶으로 구원을 체험하면서 하느님께 감사하고, 또한 주님께 매 순간 영광과 찬미를 드릴 수 있도록 주님의 은혜를 청하고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께 아름다운 예물로 바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얼마 남지 않은 이 순간들이 모두 감사와 찬미의 순간들이 되어, 주님께 영광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의 참모습이 아니겠는가?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셨다.(루카 1, 78)
-한상우신부-
가장 가까이
임박한
성탄이 있다.
눈빛과
별빛 사이에
우리들이 있다.
마침내
별이 되는
사람이 있다.
멀게만
느껴지는
별이
우리들 곁으로
오신다.
어두울수록
별은
빛난다.
어두운 밤길을
어루만지며
길을 터주신다.
별빛같은
사랑은
하나밖에 없는
사람이 되게한다.
별빛처럼
사랑처럼
오늘이 다시
빛난다.
언젠가는
오실 별이
가장 힘겨운
삶의 자리에
오신다.
잠든 우리의
삶을 깨운다.
기다림은
별이 된다.
우리를
만나러
오신다.
사랑이 없다면
별은 더이상
빛나는 별이
아닐 것이다.
사랑의 탄생이
있기에 오늘이
가장 좋은 날이다.
하느님과
사람이
하나가 된다.
하느님의
탄생으로
사람이
누군지를
알게된다.
우리를 찾아오신
별은 간절히
바라는 우리의
기쁜소식이다.
별이 오신
이유가
사랑이기에
사랑으로
밝히고
사랑으로 다시
빛나게 한다.
코로나의
어둠을 밝히는
빛나는 별이
오늘 오셨다.
성탄의 별을
진실로 믿는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늘을 쪼개고 내려오신 구원자를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이사 9,1)
먼저 제1독서에서 예언자는 주님께서 오시는 의미를 알려 줍니다. 오신 분은 "빛"이십니다. 인류는 죄와 악과 약함이라는 어둠에 짓눌려 살아왔지요. 이스라엘 백성은 그런 인류를 대변합니다. 우리 역시 그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암흑과 같은 어둠 속에 빛이 새어듭니다. 어쩌면 어둠은 실체라기보다 빛의 부재일 것이니, 빛은 아무리 작아도 어둠을 밀어냅니다. 빛이 있는 한 어둠은 힘을 쓰지 못합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 빛의 목적을 설명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티토 2,11)
그 빛은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당신 백성을 구원으로 이끄는 무상의 선물이지요. 먼 옛날 성조에게 약속하신 계약과 축복이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구원과 이어집니다.
복음은 주님의 성탄 이야기를 다룹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루카 2,7)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루카 2,8)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루카 2,12)
오늘의 복음이 제게 건네신 이 세 구절이 한 단어로 읽힙니다. 바로 "가난"이라는 말씀입니다.
임신한 여인이 자기를 받아 줄 안정적이고 정갈한 방 한 칸 구할 수 없는 여행 중에 몸을 푼다는 것은 참 난감한 일입니다. 당사자인 여성뿐 아니라 동행하는 보호자에게도 당혹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지요. 오로지 타인의 호의에 기대어 산모와 아기의 생명을 내맡겨야 합니다. 온전히 주님께 의탁하는 가난의 상황입니다.
밤에도 양 떼를 지키며 들에서 지낸다는 건 목자들이 늘 위험에 노출된 불안정하고 험한 일을 하는 가난한 존재들임을 가리킵니다. 광야에는 목자와 양들 뿐만 아니라 거친 날씨와 맹수와 도둑까지 공존하니까요. 그들에게는 맡겨진 양들의 안위가 우아한 교양이나 청결, 율법의 준수보다 앞설 것입니다.
갓 태어난 연약한 아기가 짐승의 여물 통 안에 눕혀집니다. 부모가 여행 중이었고, 해산할 방도 제대로 구하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었겠지요. 그나마 한데가 아니라 마구간이라도 구했으니 다행이다 싶은 상황이었을까요. 아기로 오신 주님은 이렇듯 가장 가난한 현실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주님은 가장 가난하고 비천한 이들도 서슴없이 다가갈 수 있는 곳에 당신을 놓으셨습니다. "빛"이 지금 삶의 무게에 짓눌려 울고 있는 이들 안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죄와 약함으로 삐걱대는 인간의 실존에서 우리를 일으켜 세우려 오신 것이지요.
우리의 가난이 그분을 알아봅니다 그리고 그분의 가난이 우리를 환대하지요. 인류의 대다수가 재물과 권력을 욕망하고 탐하는 현세를 살아가는데, 그중에서 삶의 밑바닥에 더 가깝다는 건, 주님의 현존과 가장 가까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뜻도 됩니다. 주님은 탄생부터 마지막 죽음의 자리까지 삶의 끝자리를 마다하지 않으셨으니까요. '여기가 끝인가 보다.' 싶어도 정신을 차리고 보면 주님께서 우리보다 더 아래, 더 끝에 계십니다.
성탄은 가난을 예찬하는 서곡입니다. 그 안에 하느님의 사랑에 찬 비움이 담겼기 때문이지요. 이렇듯 가난은 주님의 탄생을 통해 존엄성을 얻습니다. 훗날 고통마저도 주님의 죽음으로 존엄성을 얻게 되듯이 말입니다.
우리에게 오신 빛을 알아보고, 하느님의 은총이신 분께 주저없이 달려갈 수 있는 우리의 부족함과 비천함에 오히려 감사합시다. 주님은 바로 이 가난을 구원하러, 가장 가난한 이 되어 오셨고 그렇게 죽으셨습니다.
오늘 밤 우리는 각자의 집, 가정 교회 안에서 비대면으로 미사에 참례하며 아기 예수님을 맞이할 겁니다. 내외적 어둠의 현실 안에서 얼마나 간절히 주님을 기다려왔는지요! 오늘만큼은, 주님께 더 가까이 가라고 우리에게 지워진 약하고 허술한 가난의 실체와 상처와 훈장들을 토닥토닥 다독여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가난에 주님의 빛이 더해지면, 주님과 더 뜨겁게 사랑하고 일치하는 선물이 된답니다.
사랑하는 벗님! 가난으로 오시는 주님을 소박하고 진실된 마음으로 맞이하시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주님의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주님 은총 가득한 축제 되시길 축원합니다

묵묵히
-김찬선신부-
성탄을 코앞에 둔 오늘 드디어 즈카르야도 입이 열립니다.
열 달 막혔던 말문이 열리는 것인데 그래서일까 찬미가 터져 나옵니다.
이를 보면 찬미가 터져 나오는 건 자기 말문이 막혀야지 되는 것 같습니다.
자기 말문이 트여 있어 나불나불 얘기하던 입은 자기 얘기를 다 토해냈기에
답답한 것도 없을 것이고 그래서 말문이 트였을 때 기쁨도 없게 마련이지요.
저는 이번 성탄 대축일 강론의 주제를 '대전염병 시대의 성탄'으로
이미 주제를 잡았는데 내일 이 얘기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아직 모르지만
오늘 독서와 복음과 관련지어서는 이렇게 얘기하고 싶습니다.
며칠 전 티브이를 봤는데 울릉도에 가면 나리분지라는 곳이 있답니다.
그곳은 하도 눈이 많이 와서 겨울 몇 달은 아무 것도 못할 뿐 아니라
완전히 갇혀 지내야만 되는 곳이고 그래서 그곳을 완전히 떠나거나
한겨울만이라도 떠났다가 다시 오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남아서 그 혹독한 겨울 몇 달을 견뎌내는 분들도 있답니다.
그분들이 얘기하기를 육지 사람들은 좀 쉬었으면 하지만
자기들은 봄이 오면 일을 할 생각으로 설레는 맘으로 봄을 기다린다고,
혹독한 겨울이 없이 어떻게 설레는 봄을 맞이할 수 있겠냐고 말합니다.
아무튼, 이분들은 인고의 겨울을 견뎌낸 분들이고,
그래서 찬란한 봄을 맞이할 수 있는 사람들인데
견뎌낼 수 있는 힘은 혹독한 겨울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겨울이 싫어 봄의 나리분지를 떠난 사람들과 비교하면 이것을 알 수 있지요.
야성이 강한 고기나 동물은 수족관이나 우리에 갇히면
스트레스 때문에 바로 죽어버린다고 하지요.
그런데 스트레스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스트레스란 말 그대로 압박이란 뜻인데 같이 압박을 받지만
압박감을 느끼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가 있지요.
그러니까 압박과 압박감 사이에는 사람 편차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압박감 또는 스트레스를 더 받겠습니까?
예를 들어 강아지가 목줄에 매였는데 목줄이 싫다는 강아지,
목줄이 싫으니 벗어나야겠다고 발버둥 치는 강아지입니까,
아니면 목줄을 받아들이고 의식치 않는 강아지입니까?
이런 비유가 인간에게 적절하다고 할 수 없겠지만 이 관점에서 볼 때
오늘 즈카르야의 찬가가 즈카르야 입장에서는
열 달의 인고를 묵묵히 견뎌낸 뒤 터져나온 것이고,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다윗왕 때부터 몇백 년을 묵묵히 기다린 찬가가 터져나온 겁니다.
그렇습니다. '묵묵히'입니다.
'묵묵히'란 '아무 말없이'란 뜻이 아닙니까?
즈카르야는 열 달을 아무 말 할 수 없이 묵묵히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즈카르야의 불신과 의심의 말문을 막으셨습니다.
그리고 즈카르야는 왜 자기의 말문이 막힌 것인지
하느님의 뜻을 알기에 열 달을 묵묵히 참았습니다.
우리도 이 코로나의 긴 스트레스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안다면
묵묵히 견뎌낼 것이고, 그렇게 견뎌낸 뒤에는 즈카르야처럼
구원의 찬가를 토해내게 될 것임을 희망하며 이 답답함을 견뎌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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