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20일 대림 제4주간 일요일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가 1, 26-38)
“Behold,
I am the handmaid of the Lord.
May it be done to me according to your wor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기석신부-
오늘 복음은 가브리엘 대천사와 마리아의 대화를 들려줍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로 시작되는 가브리엘의 인사에 마리아는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답합니다. 이 응답은 세상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겸손되이 받아들이고 응답한 마리아의 순종은 세상 구원의 새벽을 알렸습니다.
지난 12월 8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미사의 제1독서로 우리는 창세기의 말씀을 들은 바 있습니다.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창세 3,15). 교부들은 세상에 대한 심판으로 하느님께서 뱀에게 내리신 이 판결을 오히려 세상 구원의 첫 복음으로 식별합니다. 하와의 불순종으로 막혔던 세상 구원이 마리아의 순명으로 다시 열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순종은 구체적으로 성령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온 세상의 구원은 마리아의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응답에서 시작하여, 그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 하신 기도로 완성됩니다. 곧 이어질 주님 성탄을 준비하면서 우리도 세상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마리아와 같은 기도를 바쳐야 하겠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기에
-함승수신부-
인생에 대한 격언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인생은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 10%, 그리고 그 일에 대한 나의 반응이 90%를 차지한다.”
삶을 대하는 태도가 어떤가에 따라 ‘좋은 날’과 ‘나쁜 날’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부정적인 태도로 불평불만을 잔뜩 늘어놓는 사람은 자기 삶을 불행으로 가득 채웁니다. 반면 긍정적인 태도로 매사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자기 삶을 행복으로 가득 채우게 됩니다. 삶을 긍정적인 태도로 바라보려면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을 지녀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마리아가 지녔던 ‘믿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를 찾아가, 그녀가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잉태하게 되리라고 알려줍니다. 마리아가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라는 점에서, 예수님의 잉태는 인간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평범한 일이 아니라, 인간의 능력으로는 이룰 수 없는 ‘불가능의 영역’에 하느님의 은총과 섭리가 작용한 놀라운 사건임이 드러납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당신의 뜻’을 이루고자 인간 역사 안에 직접 개입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부족한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고, 인간의 약하고 부족한 의지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버거운 ‘신비’입니다. 마리아도 그 점을 분명히 느끼고 있었기에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지’ 조심스레 묻습니다. 그러자 가브리엘 천사는 단호하고도 분명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하며 마리아를 안심시키지요.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하느님은 불가능을 모르시는 ‘전능하신’ 분이시므로, 그분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을지 없을지를 인간의 부족한 이성으로 감히 판단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인간의 부족함과 약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서 그 부분을 알아서 채워주실 테니, 자신이 하느님께 받은 소명을 잘해낼 수 있을지에 대해 ‘인간적인’ 두려움이나 불안함을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말에 위로와 확신을 얻은 마리아는 자신의 전 존재를 하느님께 적극적으로 내어 맡기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자신을 하느님의 겸손한 ‘종’으로써 이 세상에서 그분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쓰이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순종으로, 이 세상은 하느님 나라를 얻었고, 인간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존재가 됐습니다.또한 마리아 자신은 가브리엘 천사가 선포한 대로 사람이 되신 하느님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분의 뜻이 이뤄지는 모습을 목격하고 체험한 “은총이 가득한 여인”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부족한 인간이 그분의 뜻에 순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각자 지닌 약점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따를 때 비로소 이 세상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참된 기쁨과 행복이 넘치는 ‘하느님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불임’인 여인들의 몸에서, 심지어 ‘처녀’인 여인의 몸에서도 생명의 싹을 틔우시는, ‘불가능을 모르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그분의 뜻을따를 기회가 있을 때, 그분께서 맡겨주신 소명을 실행할 때가 닥쳤을 때, ‘난 능력이 없어서 안 된다’, ‘난 시간 여유가 없어서 못 한다’며 뒷걸음질을 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불신하는 일이겠지요.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의 뜻이 나를 통해 이루어지도록 자기 자신을, 내 재물과 능력과 시간을 하느님께 기꺼이 봉헌하는 것. 그것이 ‘사랑으로 하느님을 잉태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며, 내 삶을 참된 기쁨과 행복으로 채우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김창선-
대림 촛불을 모두 밝히고 기쁜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 제4주일입니다. 옛 계약에 숨겨져 있는 주님 강생의 신비가 드러납니다. 동정 마리아는 ‘성령의 힘’으로 구세주의 탄생과 하느님 나라의 시작에 중심인물입니다.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을 새롭게 하고 믿음 안에서 주님 말씀을 경청하고 받아들여 저희에게 이루어지기를 갈망합니다.
사제, 판관, 예언자인 사무엘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하나로 통일한 왕정제도를 이룹니다. 자애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양치기하던 다윗을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으로 세우십니다. 주님께서는 나탄의 예언을 통해 다윗 가문의 후손을 영원한 주님 나라와 왕좌에 세워 구원하실 계획을 밝히십니다. 주님과 메시아와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입니다(제1독서).
하느님께서 오랜 세월 감추어두신 신비는 예언서의 글과 사도 바오로의 복음 선포로 밝혀집니다(제2독서).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주님(마태 5,17)은 모든 민족을 믿음과 순종으로 이끄십니다. 성령께서는 내적인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와 일치를 이루어 영원토록 하느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께서 가브리엘 천사를 나자렛 시골 마을에 소박한 처녀 마리아 방에 보내시어 강생의 신비를 알립니다. 주님의 총애를 받은 마리아의 모태에서 성령의 힘으로 신성이 충만한 성자가 인성을 취합니다. 이 소식에 놀란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에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천사의 설명을 듣고 부르심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응답합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Fiat, 루카 1,38).”
천사는 마리아에게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는 축하 인사를 건넵니다. 다윗의 후손인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의 잉태는 둘만의 문제가 아니라 양가가 깜짝 놀랄 가족 사건이기에 몹시 놀라 곰곰이 생각합니다. 천사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으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마리아를 안심시킵니다. 이제 잉태하여 낳을 아드님은 영원한 하느님의 나라를 다스릴 다윗의 왕좌인 메시아임을 밝힙니다.
성자의 모태로 삼으려고 선택받은 마리아는 원죄로부터 보호되었습니다. 참된 빛이신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함께 계십니다. 교황 비오 9세께서는 이 신앙의 진리(창세 3,15; 루카 1,28)를 교의로 선포(1854.12.8.)하십니다. 기적의 메달(1830, 파리)과 루르드에 성모 발현(1858)도 ‘원죄 없이 잉태되신 분’입니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 1,34)라는 마리아의 질문에, 천사는 성령의 힘이 작용하여 순결과 정결을 지킨 마리아의 수태를 예고합니다. 꿈에 주님의 천사를 만난 요셉은 성령의 힘으로 마리아가 잉태한 아들은 임마누엘 주님(마태 1,23; 이사 7,14)임을 알고 양부가 되어 성가정을 이룹니다.
천사는 한 처음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음(루카 1,37)”을 상기시킵니다. 하느님의 영이 심연의 물 위를 감도는 형상(창세 1,2)에서 보듯이 성령의 힘은 하느님의 창조와 생명의 근원입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의 친척으로 아이를 못 낳고 나이든 엘리사벳이 주님의 자비를 입어 세례자 요한을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음을 알립니다. 아인 카렘을 방문한 마리아에게 엘리사벳은 태중에 충만한 성령의 힘을 입어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에 아기도 복되십니다.”라고 축하 인사를 합니다. 마리아는 기쁜 마음으로 구세주 하느님의 은총에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마리아의 노래’를 부릅니다(루카 1,39 이하).
‘은총이 가득한’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시며, 모태는 신성과 인성을 겸비한 성자의 성전입니다. 자신을 비우고 종의 모습을 취한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강생의 신비에 봉헌한 ‘창조주의 어머니’(창세 3,20)십니다.
성모 마리아는 임마누엘 주님과 함께하신 신앙의 모범이십니다. 성령의 힘으로 태어나는 하느님의 자녀는 인간적인 혈통, 육욕, 남자의 욕망에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요한 1,13). 아담의 후손인 인류는 원죄에 물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우리 안에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우리의 삶이 하느님께 ‘예’가 되게 하소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주님 말씀을 믿고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는 기도를 바칩니다. ‘주님의 기도’로 아버지의 영광과 우리의 소망을 청합니다. ‘성모송’으로 찬미와 중재를 원하고, ‘묵주기도’로 마리아와 함께 복음 전체의 요약인 성자의 탄생과 복음 선포, 주님 수난과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신비를 묵상합니다. 하루에 세 번 ‘삼종기도’로 강생의 신비를 기립니다.
말씀 안에 계시는 ‘천주의 성모님’에 대한 신심 없이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신 구세주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어머니’, ‘은총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요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님을 사랑합니다. 삼위일체의 삶으로 친교와 일치를 이루는 기도에 ‘아멘’으로 응답합니다.

하느님의 파트너
-남상범신부-
찬미 예수님, 우리는 참 많은 사람들과 여러 가 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우리 옆에 누가 있 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도 달라집니다. ‘맹모삼 천지교’ 그래서 맹자 어머니는 세 번이나 이사를 하면서 아들 맹자에게 좋은 관계를 만들어 주었습 니다. 마라톤이나 달리기, 사이클을 탈 때에도 옆 에서 같이 뛰는 사람이 있어야 기록도 좋아진다고 합니다. 서로 경쟁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서로에게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함께하는 사람들, 인생의 파트너, 동반자. 그들이 함께 있기 에 우리의 삶은 보다 풍요로워지고 우리도 그러한 관계 속에서 성숙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의 계획이 어떻게 실현 되는지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천사 가 브리엘을 마리아에게 보내 당신의 뜻을 알리게 하 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 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 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 1,30-31) 그러자 마리아는 깜짝 놀라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 니까?”(루카 1,34)하며 반문합니다. 하지만 가브리 엘 천사는 엘리사벳의 잉태 소식을 전하면서 하느 님께 불가능한 일은 없다고 얘기합니다. 이에 마 리아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 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하며 응답합니다. 하느님의 계획이 마리아의 응답 을 통해 이 땅에 실현되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 로 하느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방법입니 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들의 협조를 구하십 니다. 우리들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우 리는 우리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께서는 그런 우리의 자유를 존중하시며, 우리에게 먼저 말씀하시고 협조를 청하고 계십니다. “주님 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마리아의 순종을 통해 하느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 것 이상으로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믿고 계십니다. 그래서 먼저 우리가 당신 의 뜻을 알고 따르도록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 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당신의 구원 계 획을 이루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구원 역사의 파트너로서 우리가 하느님의 손이 되고, 하느님의 발이 되어 하느님의 사랑을, 은총을, 축 복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고, 우 리가 기쁨을 나누는 그곳에서 하느님의 구원이 이 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구원 역사 안에서 이 루어 가시며, 끊임없이 우리들을 부르고 계십니 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신앙이자 은총입 니다. 구원 역사를 이루어가는 파트너로서 하느님 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며, 은총과 구원의 길 로 함께 나아갑시다.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박인근신부-
대림 초 4개 모두에 불이 댕겨졌습니 다. 빛이 밝아진 만큼 우리의 마음도 맑고 밝아지길 희망합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우리가 들은 말씀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입니다. 나탄 예언자가 다윗 임금께 “주님께서 임금님과 함께 계시니, 가 셔서 무엇이든 마음 내키시는 대로 하 십시오.”(2사무 7,3)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하느님의 뜻을 전해주기 전에 먼저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는 인사 를 건넵니다. 이 인사말은 인사치레가 아니라 신앙의 여정을 가능케 하는 동 기와 목적을 일깨우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는 일상의 사건들을 통해 전해지는 하느님의 뜻을 알고 실천하게 해 줍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는 하느님께서 내 삶의 주어로 자리하십니다. 내 눈이 아닌 하느님의 눈으로, 내 마음이 아닌 하느님의 마음으로 삶을 살게 하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믿음이고 지혜이고 사랑입니다. 삶 안에서 내가 찾은 하느님. 내 안에 숨어 계신 하느님 입니다. 성모님께서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 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라고 응답했듯이 우리 를 새롭게 변화시키시는 주님의 뜻에 기쁘게 응답할 수 있 는 은총을 청하며 다가오는 주님의 성탄을 기다립시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소서
-강동금신부-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즈카르야에게 보내어 아들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예고하셨습니다. 즈카르야의 아내 엘리사벳이 아기를 밴 지 여섯 달이 되었을 때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레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다윗 집안의 요셉과 약혼한 처녀 마리아를 찾아가게 하셨습니다. 당시 갈릴레아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천대받는 지방이었고 그 가운데 나자렛은 전혀 알 려지지 않은 시골 마을이었습니다. 천사는 마리아의 집에 들어가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루카 1,28) 라고 말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사제 즈카르야에게 나타 났을 때는 인사하지 않고 그냥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가브리엘 천사는 나이 어린 처녀 마리 아에게 인사를 합니다. 천사는 성령으로 인한 동정녀의 잉태를 말하고 엘리사벳의 잉태를 예로 들어 하느님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심을 깨우쳐 줍니다. 드디어 마리아는 말합니다. “보십시오. 저 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그대 로 믿고 순종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은총이 가득한 여인입니다. 복이 넘치는 여인입니다. 지금 우리는 아기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에 오롯이 순종하여 아기 예수님을 태중에 모셨습니다. 우리도 매일 매일 모든 일에서 마리아처럼 하느님의 뜻을 알고 그 분께 순종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을 우리 안에 모시고 살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 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구유를 마련하고 아기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합시다. 바오로 사도는 오랜 세월 감추어졌던 신비가 이제 때가 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음을 선포합니 다. 하느님의 말씀이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은 내가 전하는 복음으로,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로, 또 오랜 세월 감추어 두셨던 신비 의 계시로 여러분의 힘을 북돋아 주실 능력이 있는 분이십니다. 이제는 모습을 드러낸 이 신비가 모 든 민족들을 믿음의 순종으로 이끌도록, 영원하신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예언자의 글을 통하여 알려 지게 되었습니다. 홀로 지혜로우신 하느님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 다. 아멘!” (로마 16,25-27) 성모님께서 오롯이 주님의 뜻에 순종하셨듯이 여러분도 오로지 주님께 순종하여 살아가십시오. 그 러면 여러분은 언제나 성령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게 될 것입니다. 03 말씀의 향기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소서

우리 함께 예수님께서 꾸셨던 꿈을 꾸어요
-윤기성신수-
이제 주님 성탄 대축일이 정말 며 칠 남지 않았습니다. 그 어느 때보 다 세상은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간 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거의 1년 동안 계속된 코로나19 대유행 속에 서 우리 인간은 작은 바이러스 앞에 서 얼마나 나약한지 경험했습니다. 또한 지구촌이 한 공동체임을 강조 하던 나라들도 앞다투어 국경을 봉 쇄하였고, 이 대유행의 책임을 전가 하며 서로를 비난하였습니다. 나아 가 방역용품뿐만 아니라 막 개발되 기 시작한 백신을 먼저 확보하기 위 해 국가 사이에 서로 경쟁하는 모습 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인류 공 동체 안에서 가장 아픈 지체를 우선 적으로 돌보고 서로 양보해 가며 힘 을 모아야 이 위기를 가능한 한 빨 리 극복할 수 있을 텐데, 우리가 살 아가는 세상은 말과 실천이 상반되 어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성탄을 묵상하며 늘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떠올 립니다. 강도를 맞아 모든 것을 빼 앗기고 초주검이 되어 길에 쓰러진 사람을 보고 가던 길을 멈추고 그에 게 다가가 상처를 싸매 주고 돌보 아 주었던 착한 사마리아인 말입니 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가게문을 닫고 생계에 어려움을 안고 살아가 는 우리 교우들, 학교에 가서 마음 껏 수업을 듣지 못하고 친구들과 어 울릴 수 없었던 우리 학생들, 안 그 래도 끼니를 잘 챙겨 먹지 못하는데 무료급식소마저 문을 닫아 굶주리 는 노숙인들, 노인대학과 복지관에 갈 수 없어 정신적으로 우울감에 시 달리고 공동체 신앙활동에 참여할 수 없어 영적으로 분리된 채 살아가 는 많은 어르신들을 착한 사마리아 인이신 예수님께서 찾아가시어 손 을 꼭 잡아주시고 힘을 북돋아 주시 며 상처를 싸매 주시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우리 교회가 하느님의 크 신 구원 계획 앞에서 한없이 작음을 알지만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보 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 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ㄴ) 하고 응답하셨 던 성모님과 함께 현시대 안에서 하 느님의 요청에 용감히 응답할 수 있 기를 바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의 책 『꿈을 꿉시다 : 더 나은 미래 로 가는 길』과 같이 더 나은 미래로 가는 길 위에서 우리 함께 담대하게 꿈을 꿔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위기 와 변화 앞에서 예수님 성탄의 신비 에서 배운 자기 비움과 낮춤을 선택 하고 그럼으로써 자비의 물결이 흘 러넘치는 세상을 위해 한 걸음 앞으 로 나아갑시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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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왜(Why)?”가 아니라, “어떻게(How)?”라는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그래야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가 분명해집니다.
예전에 어떤 분으로부터 채칼 하나를 선물을 받았습니다. 채칼은 매우 날카로워서 아주 단단한 것도 상관없이 잘 썰렸습니다. 그런데 저의 부주의함으로 손가락 끝이 채칼에 썰린 것입니다. 곧바로 피가 솟구쳤습니다. 이때 저는 어떤 질문을 해야 했을까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데도, ‘왜 채칼에 베이었지? 도대체 이유가 뭐야?’라면서 채칼을 이리저리 살펴봐야 할까요? 아니지요. ‘피가 많이 나는데 어떻게 해야지?’라면서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왜(Why)?”만 외친다면 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진정한 답은 “어떻게(How)?”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더 긍정적이며 희망적인 답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요한의 출생 예고 뒤를 이어 예수님의 탄생 예고가 나옵니다. 이 장면에도 천사 가브리엘을 등장시키는데, ‘가브리엘’은 하느님의 힘이라는 뜻입니다. 즉, 하느님의 힘이 인간 역사 안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모님의 예수님 잉태로 하느님의 힘이 드러나서 구원의 새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성모님으로부터 태어난 아기는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며, 세상을 다시 창조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탄생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했습니다.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하는 성모님께 예수님 잉태의 소식은 당황스럽게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때 성모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처럼 불신의 마음으로 의심하지 않습니다. 매우 놀라셨겠지만, 의심의 목소리로 “왜(Why)?”라는 질문이 아닌, “어떻게(How)?”라는 질문을 던지십니다. 즉, 그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지를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 역시 이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하느님의 일을 믿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힘이 우리 곁에 밝게 드러날 것입니다.


잘 알려진 이야기 하나로 시작해봅니다.
우유통에 두 마리의 개구리가 빠졌습니다. 첫 번째 개구리는 이 우유통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생각으로 포기했습니다. 그래서 몇 번 허우적거리다가 죽고 말았지요. 하지만 두 번째 개구리는 살려는 마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쉬지 않고 헤엄을 쳤지요. 이렇게 우유를 계속 휘젓는 사이에 우유가 버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번째 개구리는 굳어진 버터를 딛고서 우유 통 밖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절망에 빠진 이에게 희망이 될 수 있는, 다시금 용기를 낼 수 있게끔 하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어떤 분은 그냥 이야기일 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면 그냥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고, 포기하지 않으면 희망의 길로 나아갈 가능성이 그만큼 생긴다는 것이 아닙니까?
어떤 분이 말합니다.
“위기는 죽으라고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숨겨져 있는 ‘나’를 살리는 방법을 찾으라고 오는 것”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온다고 할지라도 늘 밝은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면 지혜로운 길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나려면 믿음과 믿음의 결합으로 좋은 열매를 맺어야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 마리아께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를 예고하는 내용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께서 어떻게 믿는 이를 통하여 좋은 열매를 맺는지 그 원리를 알려줍니다. 우선 좋은 열매를 맺었던 한 스승과 그의 제자들에 관한 사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회계학 교수인 C.J. 스켄더입니다. 그의 제자들은 어마어마한 성과를 거둡니다. 두 명의 제자를 소개합니다. 레지 러브와 베스 트랜햄입니다.
레지 러브는 듀크 대학 시절 미식축구와 농구팀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펼친 스타 운동선수였습니다. 그러나 2년 넘게 프로 축구팀에서 그를 선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진로를 바꾸기로 합니다. 다시 듀크 대학에서 행정학과 공공정책을 공부하였고 그때 스켄더 교수에게 배웠습니다. 미국 의회에서 인턴 과정을 하는 중 당시 상원의원이었던 오바마 밑에서 우편물 취급을 담당합니다. 러브는 오바마 의원에게 극찬을 듣습니다.
“잠도 거의 자지 않고 그토록 많은 일을 한꺼번에 처리하는 그의 능력은 보기만 해도 자극이 됩니다. 그는 자기 분야의 달인입니다.”
그리고 오바마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레지 러브는 그의 오른팔이 됩니다. 그는 ‘오바마의 그림자’라고 불렸습니다. 레지 러브는 자신이 그렇게 일을 잘 처리하는 사람이 된 데에는 스켄더 교수의 영향이 지배적이었다고 말합니다.
“스켄더의 수업을 듣기 전까지 나는 회계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습니다. 그 시간에 배운 지식이 나에게 백악관으로 가는 길을 안내해주었지요.”
다른 스켄더의 제자는 베스 트랜햄입니다. 그녀는 숫자와는 관계가 먼 인물이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까지 아날로그 시계를 보는 법을 몰랐고 고등학교도 남자친구 덕분으로 수학과목 낙제를 면했으며 성인이 되어서도 백분율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어찌어찌해서 공인회계사 공부를 보게 되었는데, 시험 2주 전에 세 아이 중 두 아이가 수두에 걸려 공부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시험을 치른 그녀는 낙방을 확신하며 실의에 빠졌습니다. 전 과목에 낙제점을 받았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이때 그녀의 스승인 스켄더는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네가 시험에 떨어지면 네 대출금을 내가 다 갚아줄게.”
베스는 주 전체 시험 응시자 13만 6,525명 중 1위로 회계사가 되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2등과 3등도 스켄더의 제자라는 것입니다. 스켄더의 학생 중 역대 공인회계사 시험에서 노스캐롤라이나주 전체 3위 안에 들어 메달을 획득한 사람은 마흔 명이 넘습니다.
다른 교수들은 평생 한두 명 만들기도 어려운데, 어떻게 스켄더는 그렇게 수많은 훌륭한 제자들을 배출하는 것일까요? 이를 이해하기 위해 하버드대학 심리학자 로버트 로젠탈의 유명한 연구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로젠탈은 샌프란시스코의 한 초등학교에서 모든 아이에게 문제 해결 능력, 어휘력, 추론 능력 등을 객관적으로 측정하여 상위 20%를 잠재적 영재로 분류하였습니다. 그로부터 1년 후 아이들의 IQ를 측정했더니 다른 아이들은 8%가 올랐지만, 영재들은 12%가 상승했습니다. 2년 후에는 IQ의 차이가 더 벌어졌습니다. 선생님들은 영재들이 나이가 들면서 아이큐가 더 빨리 좋아진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로젠탈이 영재를 뽑은 것은 사실 ‘무작위’였습니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20% 안에 드는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알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20% 아이들을 바라볼 때 영재가 될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아이들에게 그대로 전달된 것이고 결과도 그렇게 나온 것입니다. 아이들을 영재로 만드는 것은 아이들의 능력보다 선생님의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스켄더 교수가 더 훌륭한 제자들을 많이 배출하였던 것은 제자들에 대한 그의 믿음이 남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는 제자들을 ‘보석 원석’으로 보았습니다. 모두가 보석인데 다듬어지지 않아서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 믿음과 또한 그 믿음을 향한 제자들의 믿음이 결합하자 좋은 열매들을 맺게 된 것입니다. 스승이 믿어준다고 제자들이 다 믿는 것은 아닙니다. 가리옷 유다와 같이 끝까지 그럴 수는 없다고 열등감을 유지하려는 제자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자 대부분은 스승의 믿음에 응답하고 그 응답한 제자들은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참조: 『기브앤테이크』, 애덤 그랜트, 생각연구소]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보내시어 나자렛의 마리아라 하는 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습니다. 제자를 뽑아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제자도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라고 하는 천사의 말을 믿고,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응답하였습니다. 만약 즈카르야가 이런 믿음이 있었다면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이 나왔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완전히 믿고 받아들이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일정 기간 벙어리로 지내야 했습니다. 하지만 성모 마리아의 믿음은 완벽했습니다. 하느님의 믿음을 온전히 받아들일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합당한 열매인 구원자를 낳았습니다.
결혼한다면 좋은 자녀를 낳고 싶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두 사람의 결혼을 통해 훌륭한 자녀를 탄생시킬 믿음을 가지고 계시고 그렇게 두 명을 혼인시켰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믿음에 응답하는 부부의 자세입니다.
자신들을 통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하느님의 능력을 믿고 그 계획을 믿는다면 정말 훌륭한 열매들이 맺힐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자신들이 믿는 만큼의 열매만이 맺힐 것입니다. 유태인들의 자녀들이 그렇게 세상에서 엄청난 성과를 내는 것은 그 부모들을 향한 하느님의 믿음을 다른 나라 부모들보다 그만큼 더 많이 받아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열등감에 빠져있지 맙시다. 우리는 모두 보석 원석들입니다. 그분의 손에 내어 맡기기만 하면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하느님께서 왜 성모 마리아를 통해서만 구세주를 세상에 보내실 수 있었는지를 깊이 묵상하며 성모 마리아의 믿음을 닮아가야겠습니다.

-조재형신부-
2020년 성탄을 기다리면서 반가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제약회사들이 잇따라 백신 개발에 성공했다는 소식입니다. 화이자, 모더나, 아스트라제네카에서 백신을 개발했고 90%이상의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30여개의 제약회사들이 백신을 개발하고 있다고 하니 더 많은 백신이 나올 것으로 기대합니다. 백신개발이 코로나19를 막아주는 것이 아닙니다. 백신을 접종해야 코로나19를 막을 수 있습니다. 공공재로서 모든 사람이 쉽고, 저렴하게 코로나 백신을 맞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의료 종사자, 노약자들에게 먼저 예방 접종이 이루어지고, 다음에 모든 사람에게 접종이 이루어지면 좋겠습니다. 2020년 우리는 코로나19라는 긴 터널을 지나고 있습니다. 이제 곧 백신과 치료제가 나오고 밝은 빛을 볼 것입니다. 마스크를 벗고 환한 얼굴로 인사하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마음 놓고 악수하고, 포옹하면 좋겠습니다. 성가대는 고운 목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면 좋겠습니다. 함께 먹고 마시면서 친교를 나누면 좋겠습니다. 이제 곧 터널을 지날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마스크를 착용하고, 손을 자주 씻고, 거리두기를 지켜야 하겠습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림 시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향해 나가는 터널과 같습니다. 오늘은 대림 제1주일부터 대림 4주일까지의 내용을 요약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대림 제1주일의 주제는 “깨어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주인이 갑자기 돌아와 너희가 잠자는 것을 보는 일이 없게 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 예수님께서 깨어 있으라고 하시는 것은 물리적인 시간을 이야기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의미의 시간을 이야기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시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구원의 시간에 충실하기 위해서 4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말씀입니다. 매일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사람은 구원의 시간에 가까이 있는 사람입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성경을 모르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둘째는 기도입니다. 기도는 지상 최대의 힘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샘이 깊은 물과 같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뿌리 깊은 나무와 같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언제나 기도하십시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감사하십시오.”
셋째는 시대의 징표입니다. 허리가 아픈데 다리를 주무르면 별 효과가 없습니다. 교회의 가르침을 통해서 시대의 징표를 읽을 수 있습니다. 교황님의 문헌을 자주 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교회의 신문과 방송을 가까이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넷째는 실천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실천을 말씀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
대림 제2주일의 주제는 “인권”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연중 제33주일을 ‘가난한 이들을 위한 주일’로 선포하셨습니다. 교회는 약한 이, 가난한 이, 병든 이, 외로운 이, 억울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교황이 되신 후 가장 먼저 찾아 간 곳은 이민자의 섬 ‘람페두사’였습니다. 람페두사 섬은 전쟁과 가난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아프리카 난민들이 유럽으로 가기 위해 거치는 중간 기착지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이,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찾고, 세상사는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꿈을 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되어서 꿈을 실천하였습니다. 이제 누군가 그 일을 해야 합니다. 바로 우리들이 그런 일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2000년 전에 오셨던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이것이 언제가 오실 구세주를 기다리는 신앙인의 삶입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증언하는 우리의 행동입니다. 사회의 그늘에 있는 사람들,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 감옥에 갇혀있는 사람들, 외국인 노동자들, 누군가가 도와주어야만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위로를 받고, 희망을 볼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신앙인의 삶이어야 합니다. 우리들 모두가 하느님을 닮은 소중한 모상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모든 이들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보라, 내가 네 앞에 내 사자를 보내니 그가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대림 제3주일의 주제는 “자선”입니다. 제게 감동을 주었던 신학생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 친구는 청소년들이 지내는 사회복지 시설에서 봉사를 하였습니다. 그런 어느 날, 늘 남이 입던 옷을 입는 아이들 생각이 나서 보세 옷가게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날 옷 가게에는 평소에 입고 싶었던 옷들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을 위해서 옷을 살까, 아니면 평소에 입고 싶었던 그 옷을 살까! 통장에는 200,000원 밖에 없었습니다. 큰맘을 먹고 아이들을 위해서 옷을 사서 사회복지 시설로 갔습니다. 아이들은 무척 좋아하였습니다. 그런데 시설에 계시는 수녀님께서 신학생에게 선물을 하나 준비하였습니다. 그것은 그토록 입고 싶었던 가벼운 패당 잠바였습니다. 기분이 좋아진 학생은 보세 옷가게를 다시 찾았습니다. 수첩을 놓고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옷가게 사장님이 신학생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도 도움을 주고 싶다면서 아이들을 위한 옷과 양발을 한 보따리 주셨습니다.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던 학생은 그날 저녁에 본당 신부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본당 신부님께서 성탄을 축하한다고 하시면서 봉투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봉투에는 그날 자신이 사용한 금액인 200,000원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신학생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도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나눔은 결코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나눔은 보다 안전한 곳에 나의 것을 모아 놓는 것입니다.
대림 제4주일의 주제는 “순명”입니다. 이 세상에 죄, 고통, 죽음이 시작된 것은 아담의 불순종이었습니다. 구원의 역사는 요셉, 마리아, 예수님의 순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법대로 살았고, 의로운 요셉은 마리아의 잉태 소식을 들었고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해도 당연한 것이 당시의 법과 관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천사의 말을 듣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마리아와 혼인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천사에게 아이를 잉태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상식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고, 그렇게 되면 파혼은 물론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천사의 말을 듣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골고타 언덕을 올라 죽음을 받아들이셨습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은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구원의 시간에 깨어있다면, 이웃의 고통에 동참한다면,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한다면, 나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살아간다면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1년에 한번 돌아오는 성탄이 아니라, 우리는 매일 성탄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모든 예언자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미리 알려 주었고 동정 성모님께서는 극진한 사랑으로 그분을 품어 주셨으며 요한은 오실 분을 미리 알려 주고 이미 와 계신 그분을 가리켜 주었나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저희가 깨어 기도하고 기쁘게 찬미의 노래를 부르면서 성탄 축제를 준비하고 기다리게 하셨나이다.”

우리 역시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순명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양승국신부-
천사 가브리엘을 통한 하느님의 초대가 나자렛의 소녀 마리아에게 전해지는데, 그 초대의 말씀들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초대 말씀의 표현 하나 하나가 모두 소중하지만, 오늘따라 특별히 제 마음에 크게 와닿는 구절들이 몇개 있습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복음 1장 28절)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 복음 1장 30절)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복음 1장 37절)
놀라운 하느님의 초대는 마리아에게 있어 너무나 엄청난 초대인 동시에 부담스러운 초대였습니다. 막막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동시에 가슴 뛰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고 그랬을 것입니다.
고작 12~13세 어린 소녀에게 가혹하고 과중한 초대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하느님께서는 따뜻한 위로와 격려, 확증의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마리아에게 용기를 지니게 만드십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세상에 이보다 더 큰 격려와 지지의 말씀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마리아는 깊은 감사의 마음과 함께 불안했던 마음이 눈녹듯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총애(寵愛)받다는 것은 그냥 사랑받다는 것이 아니라 유난히, 그리고 각별히 사랑받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하느님의 총애를 받는다는 마음에 마리아는 용기백배해서, 그 귀한 사랑의 증인으로 살겠다는 굳은 다짐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때로 사랑의 힘은 엄청납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지요. 당신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말씀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아직 마리아에게 남아있는 작은 의혹이나 의구심 마저 걷어가게 만드십니다.
당혹스럽고 불안한 마음을 잠재우고 용기백배한 마리아의 음답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남아있는 대림시기 우리 모두 순간순간 되풀이해야할 신앙 고백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복음 1장 38절)
이토록 장엄하고 아름다운 마리아의 응답을 통해 이제 하느님께서 그녀의 태중에 거처하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녀와 항상 함께 하실 것입니다. 임마누엘 하느님이 되실 것입니다. 이제 그녀는 새로운 성전, 새로운 성도(聖都),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마리아의 갸륵하고 용감한 피앗(Fiat)으로 인해, 하느님께서 그녀 안에서 예수님을 통해 당신 백성에게 자신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이제 마리아는 그녀 안에 메시아가 끊임없이 살아계시는 계약의 궤가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부르실때 절대로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마리아는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순수한 자유 의지로 응답했습니다.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의 메시지를 통해서 하느님의 의도를 충분히 알게 되었습니다.
마리아에게 있어 하느님의 뜻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마리아는 그분의 여종을 자처하며 기쁘게 예라고 순명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 안에서 순명의 덕은 아주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도 순명에 의해서였습니다. 그분께서 세상을 떠나신 것도 순명에 의해서였습니다. 우리 역시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순명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이영근신부-
마지막 네 번째의 기쁨의 하얀 대림초가 켜졌습니다. 대림시기가 거의 끝나가고, 성탄절이 다가옵니다. 우리의 구원이 다가옵니다. 주님께서 가까이 와 계십니다. 서둘러 마중을 나가야 할 때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나탄 예언자는 다윗 왕에게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2사무 7,16) 라는 하느님의 약속을 전합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오랜 세월 감추어 두었던 신비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는 모습을 드러내어 예언자들의 글을 통하여 알려지기 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제1독서>에서 예고되었고, <제2독서>에서 증언된 그분이 마리아에게서 잉태된 경위를 전해줍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합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천사는 “기뻐하여라.”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기뻐해야 할 이유도 밝혀줍니다. 그것은 그녀가 “은총이 가득한 이”이기 때문이고, 그 은총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이 기뻐해야 할 이유입니다. <제1독서>에서도 하느님께서는 다윗에게도 “네가 어디를 가든지 너와 함께 계셨던”(2사무 8) 사실을 깨우쳐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오늘 우리에게도 벌어집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이 사실, 우리가 이미 은총을 가득히 입었다는 이 사실에, “예" 라고 응답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하면, 말씀이 우리 안에 수태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구세주의 잉태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잉태!’, 그것은 그분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그분의 뜻’일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에게도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해 드려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예”라는 믿음의 응답과 순명, 그리고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는”(루카 1,38) 희망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희망이 아니라, 하느님의 희망이 우리에게서 실현되게 하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희망이 이루어지는 장소요, 당신 은총이 이루어지는 공간이 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 아들의 집’으로 삼으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큰 기쁨인가요? 우리가 바로 ‘하느님의 집’이라니 말입니다. 잃었던 어린 예수님은 성전에서 찾았을 때 그는 성모님께 말합니다.
“저는 제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사실, 오늘 <복음>에서 천사가 마리아에게 말하였습니다.
“보라. 네가 이제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루카 1,1,31-32)
여기에서 말하는 ‘아들’(바르)의 히브리어 그림글자의 뜻은 ‘집에 거하는 사람’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은 ‘아버지의 집’에 거하는 이이며, 우리를 ‘아버지의 집’으로 삼아 우리 안에 거하는 이인 셈입니다. 이처럼, 우리를 ‘아버지의 집’인 성전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요? 야곱이 에사우를 피해 하란으로 가다가 베델에서 꿈을 꾸고서 외쳤던 그 놀라움과 경탄의 유레카를 외쳐봅니다.
“진정 주님께서 이곳에 계시는데도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구나.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곳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의 문이로구나.”(창세 28,16-17)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가 마리아와 함께 진정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를 희망하는 분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이 사실 말입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의 희망이 있다는 이 사실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 안에서 당신의 희망을 실현시키시는 바로 그분이 우리 안에 잉태 되셨습니다. 마치, 마리아께서 하느님의 희망과 은총을 받아들여 하느님의 감실이 되고 거룩한 성전이 되셨듯이, 이제 우리 역시 그렇게 하느님의 감실이요, 거룩한 성전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참으로 기쁘고 행복합니다. 바야흐로 성탄의 기쁨이 몰려옵니다. 희망이 이미 수태된 까닭입니다. 이토록, 우리 안에는 하느님의 희망이 이미 가득합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마리아와 함께 기뻐하며, 받은 그 희망이 실현되도록 하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아기 예수님을 탄생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으시기에”(루카 1,37), 우리 안에서 당신의 희망을 실현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바로 하느님의 희망입니다. 사실, 우리는 바로 이 희망으로 구원된 사람들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로마 8,24)
그래서 천사는 우리에게도 말합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주님!
참으로 큰 기쁨입니다.
제 안에 사랑이 있다는 이 사실, 참으로 놀랍고 아찔한 감미로움입니다.
하오니, 이제는 그 사랑에 승복하게 하소서.
항상 저를 향하여 있는 당신 사랑 안에 머무르게 하소서. 아멘.

마리아의 응답
-송영진신부-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루카 1,28-29).”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라는
천사의 인사말은 단순한 인사말이 아니라,
마리아가 어떤 신앙인인지를 나타내는(확인해 주는) 증언이고, 곧 이어 전하게 될
‘메시아 강생’이라는 놀라운 소식(기쁜 소식)의 서론과 같은 말이고,
하느님의 특별한 선택과 부르심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라는 말은,
마리아가 하느님의 은총을 충만히 받은 상태에 있음을 확인해 주는 말인데,
하느님께서 마리아를 특별히 선택하셨음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 말은 마리아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을 믿는 근거이기도 합니다.)
“기뻐하여라.” 라는 말은, 당시에 일상적으로 사용되던 인사말인데,
여기서는 마리아가 받고 있는 은총을 확인해 주는 특별한 말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참 기쁨’의 원천입니다.
은총에서 비롯된 기쁨이 아니라면, 또는 은총과 상관없는 기쁨이라면,
그것은 기쁨이 아니라 속된 쾌감일 뿐입니다.
만일에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신앙생활의 어떤 부분이 잘못되어 있는(고장 난) 사람입니다.
또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것이 아닌 사람입니다.
(마리아가 기뻐하지 않고 있어서 천사가 “기뻐하여라.” 라고 말한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마리아는 늘 ‘순수하고 참된 기쁨’ 속에서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천사의 인사말은 마리아가 이미 누리고 있는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이 주어진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라는 말도
하느님께서 마리아를 특별히 선택하셨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라는 말에 대해서,
“하느님께서는 마리아하고만 함께 계셨을까?” 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고,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시는 분이다.”가 우리의 기본 믿음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마리아를 ‘예수님의 어머니’로 선택하셨다는 뜻이지,
마리아하고만 함께 계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로 선택하신 일’은 마리아에게만 해당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함께 계시는 일’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라는 말은,
마리아 쪽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말입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항상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시는 분이지만,
모든 사람이 하느님과 함께 있는(사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과 함께 사는 사람도 있고, 떨어져서 사는 사람도 있고,
등 돌리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과 함께 사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밀접하게
‘하느님과 함께’ 살았던 분입니다.
마리아가 특별히 선택되고, 특별한 은총을 받은 일은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니
따로 토를 달 것이 없고, 그냥 그렇다고 믿으면 되는 일입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은
마리아 쪽에서 늘 성실하게 하느님과 함께 살았다는 점입니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라는 말은,
천사가 한 인사말의 특별함을 느끼고 놀랐다는 뜻입니다.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라는 말은,
천사가 한 인사말을 알아듣지 못했다는 뜻이 아니라,
왜 자기에게 그런 인사말을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 말에 들어 있는 특별한 뜻은 알아들었지만,
자기에게 왜 그런 특별한 말을 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해서 놀란 것입니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마리아가 천사의 인사말에만 놀라고,
천사가 나타난 일 자체에 대해서는 놀라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마리아는 천사가 나타났을 때, 천사를 천사로 바로 알아보았고,
또 천사가 자신에게 나타난 일에 대해서는 별로 놀라지 않았습니다.
늘 하느님과 함께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루카 1,30-32ㄱ)”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루카 1,34-35ㄴ)”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루카 1,38).”
천사는 인사말을 통해서 암시했던 일을 구체적으로 말해 줍니다.
30절-32절의 천사의 말을 요약하면,
“너는 하느님의 아드님의 어머니가 될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의 어머니로 너를 특별히 선택하셨다.”입니다.
이 말은 일방적인 통보도 아니고, 강제 명령도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어머니로 너를 특별히 선택하셨는데,
너는 이 ‘부르심’에 응답하겠느냐?”가 천사가 한 말의 진짜 뜻입니다.
(만일에 마리아의 자유의지와 상관없는 일방적인 통보라면,
또는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명령이라면,
마리아의 응답과 순종은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라는
마리아의 질문은, 겉으로만 보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로 오해할 수도
있는 말인데, 이 말의 진짜 뜻은, “저는 동정녀인데, 제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지금 바로 요셉과 결혼해야 합니까?)”입니다.
<마리아도 아직은 성령 잉태(동정 잉태)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서둘러서 결혼하라는 뜻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질문에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순종하겠다는 뜻이
이미 들어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천사의 답변의 뜻은,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알아서 하실 터이니, 너는 하느님만 믿으면 된다.”입니다.
마리아의 응답과 순종은 ‘믿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온전히 삶으로 실천한’ 위대한 믿음입니다.

대림 제4주일: 나해: 말씀이 사람이 되심
-조욱현신부-
오늘의 전례는 이미 우리 눈앞에 다가와 있는 성탄을 앞두고 기다림의 자세가 더욱 열정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번 주간의 독서는 우리에게 마리아의 태중에 육화하신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신비를 깊이 묵상하도록 인도하고, 하느님의 약속이 무의미한 것으로 지나치지 않도록 항상 깨어 기다리라고 한다.
제1 독서의 예언(2사무 7,11.13ㄴ.14ㄱ.16)은 다윗 가문에서 태어날 메시아만이 나탄의 예언을 이루어줄 것이다. 예언서와 시편을 통해 이러한 방향으로 나타나고 있다.(이사 11,1; 시편 88,4-5.29 참조). 오늘 복음에서도 그리스도의 인성 시작을 다윗과 연결하고 있고(루카 1,32-33 참조), 바오로 사도도 이러한 역사적 신앙의 자료를 말하고 있다.(로마 1,3-4 참조) 여기서 모든 주도권은 오직 주님께 있으며, 하느님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될 것이다.
복음: 루카 1,26-38: 너는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으리라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31절). 이 말씀은 동정녀의 마음과 태중에서 실현되는 강생의 신비를 알려주는 말씀이다. 모든 역사와 구세사는 나자렛의 한 처녀가 지극히 높으신 분의 뜻에 동의하는 그 짧은 순간에 집중되고 있다. 마리아가 아들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바로 그녀를 통해 이 세상의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성 베르나르도는 이렇게 적고 있다. “동정녀시여, 속히 응답하소서. 천사에게 속히 응답하시고 천사를 통해서 하느님께 응답하소서. ‘말’을 하시고 하느님의 ‘말씀’을 받으소서. 인간의 ‘말’을 하시고 하느님의 ‘말씀’을 잉태하소서. 일시적인 ‘말’을 하시고 영원한 ‘말씀’을 받으소서.”("Missus est"에 대한 설교 IV,8-9).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34절).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동정잉태’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한 천사의 응답은 이러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35.37절). 또한, 마리아의 동정성은 예수님과 관련에서만 그 의미가 있다. 즉 예수께서 인간이 되시어 완전히 우리의 형제가 될 수 있고 동시에 인성을 갖춘 채 하느님의 참된 아들이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마리아의 동정성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천사의 응답은 사막의 천막에서,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구름형상으로 나타나셨던 하느님의 신비스러운 현존(탈출 40,34; 1열왕 8,10 참조)을 상기시킨다. 바로 루카가 이러한 상징적 표현을 통해 예수의 존재적 기원이 하느님께 유래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이에게 개방되어있는 ‘새로운 집’ ‘새로운 성전’이시다. 즉 아홉 달 동안 성령의 엄위로운 궁전이 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태중에서 이루어지기 시작한 집이다. 이제 성탄의 신비에 가까이 들어서는 우리에게 주시는 구체적인 가르침이 여기에 있다. 즉 우리도 마리아를 지극히 풍요롭게 한 ‘동정’의 자세, 다시 말해 하느님의 주도권과 그 사랑에 대해 완전히 개방된 자세를 우리 마음 안에 갖추지 못한다면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우리에게 오시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내용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무상성’이 마리아에게서 완전히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창조적 힘을 지닌 ‘무상성’에 인간의 응답과 협조가 있을 때, 그 선물이 은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38절) 라는 응답이 ‘은총’을 세상에 들어오게 하였고 ‘인간성’이 새롭게 창조되게 하였으며 마리아 자신이 그 모범이 되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을 완전하게 행하셨다. 그러므로 그녀에게 가장 위대한 일은 그리스도의 모친이 된 것이 아니라 그분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이다”라고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말하고 있다.
마리아는 먼저 신비스러운 방법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분의 ‘모친’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는 그리스도를 낳아줄 수 있는 어머니가 될 수 있다. 즉 가장 올바른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들에게 낳아줄 수 있다는 의미이다. 즉 마리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올바른 제자가 됨의 삶을 통하여 언제나 우리 안에 우리 가정 안에 예수께서 태어나시는 삶이 되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 1, 31)
-한상우신부-
겨울
찬 바람 속에서
우리의 대림은
더더욱
깊어간다.
대림은 성탄을
향해 가듯
성탄은 잉태한
말씀을
탄생시키려한다.
말씀의 잉태이며
말씀의 성탄이다.
말씀은 너만의
성탄이 아닌
나의 성탄
우리 모든
공동체의
성탄이 되게한다.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성탄이며 성탄은
말씀의 시작이다.
말씀을
받아들이고
말씀과 함께
살아가는 삶이
구원의 삶이다.
말씀은 삶을
비추어준다.
하느님
말씀을 온전히
믿고 받아들이신
성모님의 삶이다.
순종은 먼저
말씀을 받아
삼키는 삶이다.
하느님 말씀에
순명하는 것이
돌보아주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성탄을
완성시키시는
하느님 말씀이다.
말씀이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떠오른다.
다시 말씀에
충실할 때이다.
말씀은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
말씀은 믿음을
필요로 한다.
믿음은 서로를
살린다.
믿음 안에서
최고의 정점은
예수님 탄생이다.
맡겨드리는
삶이 탄생이며
믿음이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 1, 30)
하느님을
진실로 믿는
우리들이길
기도한다.
믿음이 없기에
말씀과 성탄이
간절한 우리들이다.
믿음은
믿음을
구원한다.
우리에게
주신 믿음이다.
하느님께
맡겨드리는
믿음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대림 제4주일 미사의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신원을 구약의 하느님께서 어떻게 준비하셨는지 듣습니다.
"주님이 너에게 한 집안을 일으켜 주리라고 선언한다. ...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2사무 7,11.14)
이는 다윗 임금에게 내리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에 왕정이 수립되면서 첫 임금은 벤야민 지파 출신의 사울이었지만 그는 주님의 눈밖에 나게 되지요. 이어 주님은 유다 지파 출신의 양치기 다윗을 임금으로 선택하셨고, 겨우 왕정 초기에 불과한 이스라엘에 다윗 가문을 통해 왕정을 이어가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주님 친히 아버지가 되어 주실 존재는 표면적으로 볼 때 당장은 다윗의 왕위를 이어받을 아들 솔로몬이 되지만, 영적 구세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까지 가리키는 중의적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너의 집안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2사무 7,16)
주님은 "영원히"라고 반복해서 다윗 집안을 축복하십니다. "영원히"는 한두 세대에 그치는 인간의 시간을 초월하는 단어지요. 다윗에게 약속하신 왕좌가 고작해야 몇십 대에 이르는 인간 계보에 국한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은 마리아에게 잉태 소식을 알리는 천사의 방문 일화입니다.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루카 1,32)
"태어나실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 불릴 것이다."(루카 1,35)
천사는 마리아가 잉태하여 낳게 될 아들을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 하느님의 아드님"이라 부릅니다. 이는 일찌기 다윗에게 "그의 아버지가 되어 주겠다."고 하셨던 약속의 실현입니다.
"그분께서는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루카 1,33)
그리고 천사의 말에서 "영원히"라는 단어가 다시 등장합니다. 다윗에게 하셨던 "영원히"라는 말씀이 이제 완전히 제 의미를 드러냅니다. 인간에서 인간으로 혈육을 통해 이어지는 왕좌가 아니라, 영원하신 분이 차지하시고 행사하실 하느님 주권의 영원성입니다.
제2독서에서는 이에 대한 사도 바오로의 해석을 듣습니다.
"오랜 세월 감추어 두셨던 신비의 계시"(로마 16,25)
"이제는 모습을 드러낸 이 신비"(로마 16,26)
사도는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바로 하느님의 계시라고 증언합니다. 율법과 예언서에 정통했던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구약의 하느님께서 미리 준비하시고 약속하신 다윗의 후손이신 동시에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확신합니다. 주님의 말씀과 예언자들의 글이 이를 담고 있기 때문이지요.
오늘 복음 속 사건에서 천사는 마리아에게 이 연속성을 밝힌 것입니다. 이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계시는 인간적이고 육적인 방식이 아니라 은총과 하느님의 총애, 성령과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으로 이루어질 신비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이제 마리아는 기꺼이 주님을 맞이하겠다고, 온 이스라엘의 염원을 담아 고백합니다. 스스로를 비천한 종에 불과하다고 낮추면서, 이 엄청난 선택에 대한 주님의 주도권을 겸허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이 응답을 통해 영원히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시고, 영원히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순수하고 겸손한 이의 온전한 헌신과 의탁입니다. 수동적인 긍정을 넘는 용기 넘치는 적극적 포용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신비의 계시"인 성탄을 향하는 기다림의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대림초의 색깔과 함께 주님 향한 우리의 그리움도 하얗게 사위어가고 있지요. 우리가 고대하는 분을 보증해 주시는 마리아와 함께, 기꺼이 주님께 "예!" 하고 응답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비천한 종을 돌보시는 주님 자비에 모든 걸 맡기고 주님의 뜻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도록 용기를 내어 나아갑시다.

하씨 집안 세우기
-김찬선신부-
전에 수련소에 오씨 성을 가진 형제들이 여럿 산 적이 있습니다.
그들이 농담하기를 하느님도 성모님도 예수님도
자기들과 같은 성이라는 것인데 그 이유가 우리가 기도할 때
'오, 하느님', '오, 마리아', '오, 예수님'하며 기도하기 때문이랍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오씨 집안에 하느님, 마리아, 예수를 끼여주는 것인데,
저는 오늘 하씨 집안에 제가 끼고, 여러분도 껴서
하씨 집안을 우리가 같이 세우자고 얘기합니다.
여기서 하씨 집안이란 물론 하느님 하씨의 집안이라는 것이고,
우리 인간 혈육의 성은 버리고 하느님의 성을 가지자는 거지요.
왜 오늘 이런 생각을 하게 됐냐면 오늘 독서에서 늘그막의 다윗이
자기 궁전을 화려하게 짓고 하느님께 죄송하여 성전을 하느님께도
지어드리겠다고 하니 하느님께서는 성전을 짓는 것은 그만 두라고,
오히려 당신이 그 후손을 통해 다윗 집안을 다시 일으키실 거라고
다윗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은 다윗이 성전을 지어드리겠다는 것을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지으려면 제대로 지어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다미아노 십자가의 주님께서 당신의 집을 고치라는 말씀을
프란치스코가 건물 성전을 고치라는 줄 알고 아시시에 있는 세 성당을
고쳤는데 주님께서 실제로 고치길 원하신 것은
건물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였던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다윗과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성당을 잘 지어
거기에 당신을 처박아 놓고 우리는 우리끼리 우리 궁전에서 희희낙락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집안이 바로 당신의 성전이 되길 바라시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집안이 하느님의 성전이 되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하느님 모시기입니다.
나와 우리 집, 우리 공동체에 하느님 모시기입니다.
먼저 내 안에 하느님 모시기입니다.
그리되면 하느님은 내 밖의 건물 성전이 아니라
내 안의 <나>라는 성전에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주님의 성전이 되기 위해 이 대림절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성전정화인데 구체적으로는 고백성사이고,
고백성사를 보지 않더라도 내 안에서 미움이니 분노니 시기 질투와 같은
악감정들을 몰아내고 근심이나 걱정 같은 쓰레기도 비워버리는 것입니다.
또 다르게 표현하면 빈 구유 만들기를 하는 것입니다.
여관은 만원이어서 주님 모실 공간이 없었고 그래서
비어있는 외양간의 구유에서 주님 태어나셨는데 우리 안도
다른 것들로 만원이라면 이 대림 시기에 빈 구유로 만드는 겁니다.
그런데 나 개인이 하느님 성전이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의 가정과 공동체가 하느님 성전이 되는 것, 이것이 더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실 분, 곧 예수님은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넘어 집안입니다.
당신 집안을 다시 일으키시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뜻입니다.
이렇게 오시겠다는 주님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는 뻔합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 하느님을 모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종종 우리는 하느님을 우리 집에 모셔들이는 것을 잊고 우리끼리 삽니다.
주님은 성당에 모셔두고 우리 집에선 우리끼리 살고 우리끼리 놀러 갑니다.
모든 결정을 독단으로 하거나 같이 하더라도 주님 빼놓고 우리끼리 합니다.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우리 집의 주인은 나이거나 우리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집이 하씨 집안이 되기를 바라고 노력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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