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12일 대림 제2주간 토요일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마태오 17,10-13)
Elijah will indeed come and restore all things;
but I tell you that Elijah has already come,
and they did not recognize him
but did to him whatever they please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기석신부-
집회서의 저자 ‘시라의 아들 예수’는 불타는 전차를 타고 하늘로 오른 구약의 위대한 엘리야 예언자를 기억합니다. 북이스라엘 출신 엘리야는 아합 치세에 등장하여 삶의 대부분을 아합과 투쟁하며 ‘바알 우상’ 타파에 헌신하였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뜻대로 가뭄을 선포하지만 사렙타 마을의 과부에게는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하고 심지어 그의 죽은 아들을 부활시키는 기적을 행합니다(1열왕 17장 참조). 또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던 850명의 예언자들과 카르멜산에서 대결하여 바알 우상의 어리석음을 백성들 앞에서 폭로하며 이스라엘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죽지 않고 제자 엘리사가 바라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갑니다(2열왕 2,11 참조).
이와 같은 엘리야의 활약을 잘 알고 있던 이스라엘은 이 위대한 예언자를 아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드린 질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그렇습니다. “당신은 정해진 때를 대비하여, 주님의 분노가 터지기 전에 그것을 진정시키고,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되돌리며, 야곱의 지파들을 재건하리라고 기록되어 있다.”라는 집회서의 가르침처럼 다시 올 엘리야의 임무가 ‘자비’와 ‘화해’였으니 누가 그를 환영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엘리야가 참으로 마지막 날 전에 먼저 와야 하고, 이미 와 있다고 답하십니다. 물론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모든 것을 바로잡을 세례자 요한도 알아보지 못하여 제멋대로 다룬 이들이, 자비와 화해의 임무를 수행하실 사람의 아들도 그렇게 제멋대로 다룰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오늘 화답송 시편이 대림 시기 동안 하느님 약속의 실현을 기다리는 우리의 희망을 대변하는 듯합니다. “이스라엘의 목자시여, 귀를 기울이소서. 광채와 함께 나타나소서. 당신 권능을 떨치시어, 저희를 도우러 오소서.”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신부, 수녀가 뭐 저래?”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은 “계산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세상의 논리로 계산하지 않고, 주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위해 아흔아홉 마리를 들판에 버려둔 채 산속을 헤매는 목동 이야기를 기억해보십시오. 계산하지 않는 모습이 아닙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당신 몸으로 직접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아무런 죄가 없으신 하느님께서 세상의 죄인들 앞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당신의 전지전능한 힘으로 곧바로 벌을 내리실 수도 있었지만, 우리 구원을 위해 당신 몸으로 직접 속죄양이 되셨습니다.
하느님 편에 서기로 한 사람은 세상과 분리되는 삶, 대신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만을 바라볼 수 있다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판단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율법학자들은 사람의 아들이 오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 말이 맞다고 하시면서, 엘리야가 이미 왔음을 확실하게 전해줍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고 하지요.
누구를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세례자 요한을 엘리야로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세례자 요한은 엘리야 예언자가 환생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세례자 요한을 엘리야 예언자로 부르는 것은 그가 엘리야라서가 아니라 엘리야의 일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일, 주님의 길을 환하게 닦아놓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 역시 하느님의 일을 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면서도 세상 것에 대한 욕심과 이기심으로 인해서 하느님의 일이 늘 뒤처집니다. 나의 일만 할 뿐입니다.
엘리야의 일을 함으로써 주님으로부터 인정받은 세례자 요한처럼, 우리도 주님께 인정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청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청할 것이 더 있습니다. 바로 지상적 보화인 육신의 안위와 영혼의 행복입니다.
육신의 안위를 청하는 것이 마치 자신의 욕심에서 나오는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안위를 청하는 것은 하느님을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우리 육신은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궁극적 목표라 할 수 있는 영원한 생명 외에도 내 육신의 안위와 내 영혼의 행복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곧 하느님의 은총과 영혼의 덕을 청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청원을 진심으로 하는 사람은 다음의 세 가지 기본자세를 가지고 있다고 성 베르나르도 성인은 말씀하십니다.
‘검소함, 헌신, 겸손’
어떤 청원을 하고 계십니까? 욕심과 이기심을 위해 지금 내 육신의 안위만을 청하는 것이 아니겠지요?

성령의 땔감은 우리 자신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의 주제는 ‘왜 구원자보다 세례자 요한이 먼저 와야 하는가?’입니다. 예수님은 타볼산에서 변모하시며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셨습니다. 이 모습을 본 제자들은 엘리야를 생각하며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율법 학자들의 생각이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엘리야가 세례자 요한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요한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당신도 박해할 것이라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그제서야 제자들은 깨닫습니다.
“그제야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달았습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과는 어떠한 관계일까요?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셨습니다. 성령은 불입니다. 엘리야가 하늘에서 불을 내린 적이 있었습니다. 바알 예언자들과 시합을 할 때였습니다. 엘리야 시대는 우상숭배 시대였습니다. 진정한 우상은 자기 자신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을 섬길 때 자신이 원하는 돈과 육체와 명예를 섬기게 됩니다. 그런 이들이 제단에 바치는 소는 아깝게 바치는 소입니다. 그러니 성령의 불이 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제물을 바칠 때 감사한 마음으로 세속-육신-마귀의 육체적 욕망을 바쳐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모든 악의 뿌리는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말합니다(1티모 6,10 참조). 또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욕망을 채우려고 육신을 돌보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로마 13,14)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육과 영은 반대가 되고, 세상 사람들 앞에서 의롭게 보이고 높여지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일입니다(루카 16,15 참조).
따라서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려와 그리스도를 잉태하게 하려면 그 성령께서 태우실 땔감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자신입니다. 나를 봉헌하려는 마음 없이는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면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해집니다.
유튜브 ‘우와한 비디오, 세상에 이런 일이’에 ‘온몸을 집어삼키는 각질의 공포, 씻지도 눕지도 못한 채 건선으로’란 내용이 있습니다.
한 청년이 돈이 없어서 건선이 온몸을 뒤덮을 때까지 치료하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내용이 나옵니다. 혼자 살아야 하는 처지에서 이 청년은 처음엔 고시원에서 생활했습니다. 하지만 건선이 심해지자 고시원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피시방 의자에 앉아서 밤을 새워야 하는 처지로 살아갑니다. 돈을 벌어야 하지만 누구도 취직시켜주려 하지 않습니다. 물론 목욕탕에서도 받아주지 않아 몸을 씻을 수조차 없습니다. 겨우 인력사무소를 통해 막일을 할 수는 있지만, 발의 각질들 때문에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그런 일을 하는 것은 여간 힘들지 않습니다. 조금만 걸어도 발이 퉁퉁 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사연입니다. 그러나 그가 가장 두려운 것은 외로움과 미래에 대한 불안입니다.
너무나 착한 사람임에도 순서를 모르면 이런 상황까지 올 수 있습니다. 몸이 준비되지 않으면 사람과 관계가 되지 않고 그러면 돈도 벌 수 없습니다. 몸을 치료하는 것보다 먼저 사람과의 관계나 돈부터 생각하면 하느님께 땔감은 준비하지 않고 불만 달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도와줄 사람도 만나지 못하고 돈도 벌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다행히 유튜브 ‘우와한 비디오’ 팀에서 병원도 데려가 주고 복지센터를 통해 치료가 완료될 때까지 드러누워 잠을 잘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꾸준한 치료를 마치고는 완치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기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타인관의 관계를 통해 돈도 법니다. 그러나 타인과의 관계는 사랑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랑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불입니다. 그리고 불은 땔감이 필요합니다. 내 육체, 육체의 욕구를 끊임없이 봉헌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가르친 사람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래서 누구도 세례자 요한을 거치지 않으면 사랑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와한 비디오’에 ‘힘을 내요! 기적을 들어 올리는 남자, 영복 씨’가 나옵니다. 영복씨는 소뇌위축증을 앓고 있습니다. 여동생도 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도 이 병을 앓고 있습니다. 소뇌가 위축되는 병으로 균형감각을 잃고 말도 어눌하게 됩니다. 하지만 영복씨는 아내와 부모님께 걱정을 끼쳐드리지 않기 위해 하루 8시간 이상씩 운동을 합니다. 그래서 보디빌더 대회에서 우승까지 합니다. 물론 병은 진행 중이지만 자신이 무너지면 가족과의 관계도 무너지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운동하는 데 씁니다.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이도 이와 같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이것을 가르친 마지막 사람입니다. 이 구약을 통과해야 그리스도와의 마지막 계약인 신약이 체결됩니다. 나 자신을 주님께 감사의 제물로 먼저 봉헌합시다. 그래야 성령의 불을 받고 가족과 이웃과의 관계도 좋아질 수 있습니다. 탈 수 있는 것을 바치지도 않고 불을 달라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의 땔감은 우리 자신입니다.

-조재형신부-
산책을 하면서 길을 포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먼저 주차된 차량을 옮기도록 안내장을 부쳐놓습니다. 낡은 길의 포장을 걷어냅니다. 2주일 정도 지나면 새롭게 길을 포장합니다. 그리고 2주일 정도 지나면 횡단보도 표시를 합니다. 2주일 정도 지나면 드디어 중앙차선을 칠합니다. 동네 길을 새롭게 포장하는데 대략 2달 정도 걸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도시가스 배관 공사는 작년에 시작되었는데 아직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것을 보았던 제게는 조금은 낯선 풍경입니다. 아마 한국에서 길을 포장했다면 1주일이면 충분했을 것 같습니다. 불편함을 일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여유 있게 하는 것도 좋은 것 같습니다. 서두르다가 실수하는 일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작년에 거주자 등록증을 받고, 운전면허증을 받고, 신용카드를 받으면서 경험했습니다. 생각보다는 조금 느리지만 결국은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예전에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3시간이 행복하려면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됩니다. 3일이 행복하려면 백화점에서 좋은 물건을 사면 됩니다. 3달이 행복하려면 친구들과 여행을 가면 됩니다. 3년이 행복하려면 배우자를 만나서 결혼하면 됩니다. 평생 행복하려면 선행을 베풀면 됩니다.” 2020년은 코로나19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실내에서 음식을 먹지 못했습니다. 백화점으로 물건을 살 여유가 없었습니다. 여행하려던 계획도 대부분 취소되었습니다. 결혼식도 미루어 졌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기도 했습니다. 코로나19의 엄중함 중에도 행복한 분들이 있었습니다. 이웃에게 선행을 베푼 사람들입니다. 미사가 끝나면 성당을 소독하는 봉사자들이 있습니다. 정성껏 마스크를 만들어 이웃에게 나누어주는 분도 있습니다. 세입자들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월세를 감면해주는 분도 있습니다. 몇 달씩 집에도 못하고 환자들을 돌보았던 의료진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행복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기쁘게 할 때 우리 곁을 찾아옵니다. 곧 백신이 나온다고 하니 2021년은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고난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불의하게 고난을 겪으면서도, 하느님을 생각하는 양심 때문에 그 괴로움을 참아 내면 그것이 바로 은총입니다. 잘못을 저질러 매를 맞을 때에는, 견디어 낸다고 한들 그것이 무슨 명예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선을 행하는데도 겪게 되는 고난을 견디어 내면, 그것은 하느님에게서 받는 은총입니다.(베드로 전서 2, 19 -20)” 하느님을 생각하는 양심 때문에 불의한 고난을 참아내면 은총이 된다고 합니다. 선을 행하는데도 겪게 되는 고난을 견디어 내면 하느님의 은총이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험난함이 내 삶의 거름이 될 수 있다면 그것 또한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신앙인들이 따라야 할 ‘이정표’와 같은 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엘리야’입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거짓 예언자와 싸워서 하느님의 영광을 보여 주었습니다. 사렙다 과부에게 기적을 베풀어서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임을 보여 주었습니다. 엘리야는 지금도 신앙 안에서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힘과 용기를 줍니다.
주님의 성탄을 준비하는 대림시기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였고,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오시는 날은 꿈꾸었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오시면 하였을 일들을 보여주었습니다. 오늘 나는 어떤 모습으로 주님의 오심을 준비해야 하는지 돌아봅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엘리아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이영근신부-
타볼산에서의 거룩한 변모 후 산에서 내려올 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마태 17,10)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마태 17,11)라고 엘리야의 사명을 밝히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마태 17,12)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먼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을 엘리야로 알아보지 못한 것을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세례자 요한도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요한 1,26)라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듯이, 당신도 그렇게 제멋대로 다루어지고 고난 받게 될 것을 예고합니다. 결국,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함은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함을, 엘리아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암시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엘리야도 메시아도 ‘이미’ 왔지만,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우리 가운데 와 계신 분을 알아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알아보는 영적인 눈이 열려야 할 일입니다. 특히 우리는 성탄을 준비하면서, ‘먼저’ 우리에게 와서, 우리를 바로잡는 엘리야의 인도를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제멋대로 다루지는 않아야 할 일입니다.
또한, 오늘 우리가 우리들 가운데 서 계시고 형제들 안에 계시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영접하지 않고 제멋대로 다룬다면, 바로 우리에게 구세주께서는 고난을 받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완고함과 비뚤어진 마음과 악의로 형제들을 거부하고 배척하면, 그분은 오늘 우리에게 그렇게 제멋대로 다루어지고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은 “이미” 우리 가운데 와 계신 그분을 버림받지 않고, 박해받지 않도록 해 드려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더 이상은 제멋대로 다루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겪으신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에서 있기 마련인 고난에 당황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음에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의 편지에서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도 여러분은 기뻐하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1베드 4,13-13)
또한, 바오로 사도는 ‘고난’을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필리 1,29).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 17,12)
주님!
제 눈이 가려져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함은
빛을 피하고 어둠을 좋아한 어리석음이었습니다.
제 가슴이 굳어져 당신을 맞아들이지 못함은
진리보다 제 자신으로 꽉 채운 완고함과 오만이었습니다.
빛이요 진리이신 주님, 저를 밝히소서.
제 어리석음과 완고함을 걷어내소서. 오만불손함을 태우소서.
제가 밝아져, 더 이상은 당신을 제멋대로 다루지 않게 하소서. 아멘.

오시기로 되어있는 분
-반영억신부-
유다인들은 메시아가 오기에 앞서 그가 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전령이요 선구자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마지막 예언서인 말라기서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말라3,23-24). 이 본문은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의 신앙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엘리야가 ‘이미 왔는데’,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름은 다르지만, 세례자 요한이 바로 메시아에 앞서 오기로 되어있는 엘리야인데 그를 몰라본 것입니다. 사실 누군가를 알아보려면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
루카복음 1장16-17절은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 하고 천사의 이야기를 전함으로써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예고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1,23). 라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그는 마침내 하느님 나라를 위해 백성들을 준비시킨 마지막 때의 예언자로서 엘리야의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시대의 표징을 알아보지 못하고 요한을 제멋대로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헤로데는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음에도 헤로디아의 딸에게 헛된 맹세를 하여 결국 요한의 목을 베도록 명하였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마르6,26). 그러나 헤로데만이 그를 죽였는가? 생각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잘못은 모두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요한의 외침을 따르기를 거부하고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헤로디아는 헤로데 동생인 필리포스의 아내입니다. 그러나 헤로데와 혼인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러 차례 말했습니다. 이것을 알고 있는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고 했나 봅니다. 사실 헤로디아의 마음이 우리 안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길을 거부하고 내 마음대로 하려는 욕심과 똥고집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마음을 바꾸지 못한다면 우리도 요한을 죽인 공범자가 되고 맙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대의 징표를 읽고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려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언자도 메시아도 결코 만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도 고난을 받을 것이다” (마태17,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언자 엘리야의 역할을 한 요한을 알아보지 못했고 결국 메시아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를 죽인 그들이 결국은 예수님까지도 십자가에 못을 박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사악하기보다도 자기 안에 갇힌 무지의 탓이 크다 할 것입니다.
물론, 요한의 죽음이 단순히 한 왕의 방자한 변덕과 경솔한 맹세의 결과가 아니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요한12,24) 메시아적인 구원의 죽음이었지만 이것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제자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삶이었습니다. 따라서 죽음을 통해 새로운 생명이 온다는 진리를 알면, 주님을 따름에 있어 고통의 길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은 예수님께서 살아간 삶을 살아가는 기회가 됩니다”(함께야). 그러므로 막연히 내가 그려놓은 주님을 기다리지 말고 주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오시든지 제대로 알아볼 수 있도록 깨어있어야 하겠습니다. “오, 주님! 저는 당신을 몰랐나이다. 다만 지상의 일들을 알고 맛보려 했나이다. 주 하느님! 모든 것을 바꾸어 주시어 당신 안에 편히 쉬게 하소서”(십자가의 성 요한).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복음: 마태 17,10-13: 엘리야는 이미 왔으나 알아보지 못하였다
-조욱현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엘리야의 재림에 대한 논쟁을 보여주고 있다. 바리사이들은 엘리야가 종말 전에 온다(말라 3,23 참조)고 하였다. 엘리야는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며 모든 것을 예전의 상태로 돌려놓는다고 하였다. 바로 앞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거룩한 변모를 보여주셨다.
제자들은 이 영광스러운 변모가 그분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왜 선구자인 엘리야가 나타나지 않는지 물었다.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10절) 여기서 “먼저”라는 말에는 엘리야가 먼저 오지 않으면 성경이 말하는 구원자의 오심이 아니라는 뜻이 담겨있다.
예수님은 요한 세례자를 엘리야로 소개하시지만, 세례자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의 화해와 재건을 이룩하지 못하고 참수당했기 때문에 재림한 엘리야일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그 엘리야가 아직 재림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다음에 오실 메시아도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메시아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세례자 요한을 재림한 엘리야로 생각하였다(11,14 참조). 그러나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기 전에 헤로데에게 죽임을 당했다(14,3-12). 이렇게 메시아의 선구자가 배척을 당한 것처럼, 메시아이신 예수께서도 배척을 당하셨다는 것이다(11,16-19 참조).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12절) 그를 감옥에 가두고 처형한 헤로데와 그들이 공범자였다.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12절) 그런 다음 주님께서는 그들이 엘리야에게 한 것과 같은 일을 당신도 당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엘리야가 이미 왔다.”(12절)는 말과 그에 대한 구원자의 설명을 듣고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임을 깨달았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두 번 오신다고 이야기한다. 첫 번째 오심은 지금 오심이다. 바오로 사도는 “과연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 이 은총이 우리를 교육하여, 불경함과 속된 욕망을 버리고 현세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해줍니다.”(티토 2,11-12)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 우리에게 오시는 그분을 잘 맞을 수 있도록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두 번째 오심에 대해 바오로 사도께서는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우리의 위대하신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우리”(티토 2,13)라고 한다. 엘리야나 메시아의 참모습은 희생적인 사랑과 봉사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엘리야가 되고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는 은총의 기간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 17, 12)
-한상우신부-
다른 것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들
마음이다.
사로잡혀
있기에
부자연스럽고
답답한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요한
세례자조차
알아보지
못하게 되었다.
하느님의 뜻과
멀어지면
불행한 삶이
된다.
아프게도
제멋대로
다루는
이 어리석음을
지금껏 우리는
반복하며
저지르고 있다.
메마른 우리
마음을 위해
간절히
기도드린다.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묵상하게 된다.
하느님의 뜻을
감히 우리가
지배할 수 없다.
하느님의
섭리에
떼어놓을 수
없는 우리들
삶이다.
진정한
하느님 사랑에
눈을 뜨는
대림시기여야
한다.
눈을 떠야
하느님의 뜻을
놓치지 않는다.
알아보아야
사랑은
깊어지고
넓어진다.
선입견을
버리는 것이
대림의
본질이다.
대림은
주님의 뜻
알아보기위해
우리의 닫힌
눈을 뜨는
시기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이상과 현실의 차이를 보여 줍니다.
"당신은 정해진 때를 대비하여 주님의 분노가 터지기 전에 그것을 진정시키고,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되돌리며, 야곱의 지파들을 재건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집회 48,10)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경이 언급하는 엘리야의 역할에 희망을 품습니다. 엘리야가 "정해진 때", 마지막 날이 오기 전에 주님의 뜻에 맞갖게 백성을 준비시키리라는 것을 믿기 때문이지요. 이는 백성에게 분노해 외세의 손에 넘겨버리신 아버지 하느님의 노기를 가라앉히고 그분 마음을 되돌리며 다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되살려 주시리라는 기대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을 향한 엘리야의 열정과 충실성을 잘 알기에, 바알과 이제벨, 아합에 맞서 용감하게 하느님을 증거한 그가 당시 이스라엘을 억압하는 외세의 손에서 하느님 백성을 구하리라는 희망도 지니고 있었습니다.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마태 17,10)
제자들이 율법 학자들의 말을 빌어 예수님께 여쭙니다. 방금 전에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현장에서 모세와 엘리야까지 보고, 예수님께서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심을 깨달은 직후이니 그들도 궁금했을 터입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 17,12)
사람들이 기다리는 엘리야가 곧 세례자 요한이었음을 예수님께서 밝히십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앞서 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주님의 길을 준비한 것을 백성들은 모르지 않았지요.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이상과 관념으로는 엘리야가 오면 반겨 맞이하고, 그가 하느님의 일을 하도록 최대한 협력할 것처럼 생각했지만, 진짜 현실로 그가 왔을 때는 마귀들렸다고 모함하며 결국 무참히 살해했으니 말입니다.
이상한 것은 또 있습니다. 참으로 오실 분, 그분을 맞이하도록 엘리야가 백성을 미리 준비시킨 분, 곧 사람의 아들이 이 땅, 당신 백성들 가운데로 오셨지만 그분 역시 배척과 수난과 죽음이라는 같은 운명을 걷게 될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도대체 이스라엘은 누구를, 무엇을 기다린 것일까요???
이 질문은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코로나19 감염증 확산 사태로 다른 어느 때보다 혹독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 세상에 과연 우리가 기다리는 구원자는 어떤 분이실지요?
건강한 웰빙 라이프를 보장해 주실 분, 젊음을 유지시켜 주실 분, 힘과 명예를 드높여 주실 분, 돈을 많이 벌게 해 주실 분, 내 가족의 합격과 출세와 안위를 지켜 주실 분... 우리는 과연 어떤 구원자를 기다리는지요?
세례자 요한은 죽음을 뻔히 보고도 권력자와 타협하지 않았고, 예수님도 가난한 이들과 죄인들을 품은 채, 기득권층의 질시를 받으며 죽음을 향해 걸어가셨습니다. 얼핏 지지와 열광을 받을 것 같은 선지자나 구원자의 이상과 현실이 이리도 다르니, 아무래도 알아보는 눈은 적을 수밖에 없겠지요. 이상은 물론 실천으로까지 따르는 이 역시 적을 수밖에 없을 것이고요.
사랑하는 벗님! 이제 대림 제3주일을 향해 갑니다. 늘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 실존을 지고 삐걱대며 걸어가는 우리는, 나는, 어떤 구원자를 기다리는지 숙고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기다리는 예수님과 실제로 오실 그분이 꼭 일치하면 참 좋겠습니다. 우리는 단박에 그분을 알아보고, 그분도 한눈에 우리를 알아보실 것입니다. 거룩한 기다림으로 더 깊어가는 여러분 영혼에 축복을 보냅니다.

제2의 엘리야로서
-김찬선신부-
오늘은 조심스러운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가능하면 정치적인 나눔이라고 오해될 수도 있는 얘기를 피하려고 하지만,
정치적인 제 소견을 피력하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가르침을 시대상황에
맞춰 얘기하는 것이 제가 해야 할 예언의 소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라는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가톨릭 사제로서 그리고 또 다른 엘리야로서
예언의 사명이 있지만 예언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지 않기에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늘 조심스럽고 매우 부담스럽습니다.
그런데도 오늘 제가 하려는 얘기는 요즘 한창 뜨거운 검찰 개혁 문제입니다.
검찰 개혁은 진보 세력이 정권을 잡을 때마다 개혁을 하려고 하는 것인데
저는 이 검찰 개혁은 반드시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우리 사회를 바로잡아야 할 검찰이 제 역할을 하지 않고,
우리 사회의 최고 권력으로 늘 군림하고 있고 작금의 검찰의 저항도
그 권력을 결코 놓지 않으려는 극렬한 저항의 연장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검찰은 검찰의 권력을 인정하고 또 그 권력을 이용하여
정권을 유지해온 보수 정권의 불의한 공작 정치에는 늘 협조해왔습니다.
자기들을 인정해주는 정권과는 늘 공모했지 독립적이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런 검찰이 이제 와서 검찰 독립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검찰이 과도하게 가지고 있는 권력을 이 정권이 나누라고 하니
이제 와서 검찰 독립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버티고 있는 겁니다.
저는 지난 강론에서 수차례 얘기했듯이 검찰이 과거 어떻게
공작 정치의 하수인 노릇을 했는지 실제로 겪은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지금의 검찰 독립은 진정 검찰 독립을 위한 게 아니라
자기들의 권력을 놓거나 나누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일 뿐임을 압니다.
그런데 이들을 바로잡겠다는 지금 진보 정권은 그러면 또 어떻습니까?
검찰을 바로잡겠다는 목적과 명분은 옳지만 이들을 바로잡을만큼
자신들이 옳고 자신들은 개혁할 것이 없습니까?
진보 정권은 보수 정권보다는 옳다는 또는 깨끗하다는 독선이 늘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현 정권을 포함해 진보 정권이 보수 정권들보다는
정의를 내세우는 만큼 그 부패가 적은 편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하느님 앞에서 볼 때나 복음에 비춰 볼 때도 깨끗한 건 아니지요.
그러니 겸손해야 하고, 자기들부터 먼저 바로잡았어야 했습니다.
저는 이 진보 정권이 정권을 잡고, 국회 다수의석을 차지할 때부터
정의를 내세우는 만큼 교만하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국민을 겸손하게 섬겨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 정권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이 정권은 어떻게 해야 하고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검찰 개혁을 하지 말아야 합니까?
우리는 양비론兩非論, 그러니까 이쪽도 나쁘고 저쪽도 나쁘다는 논리에 빠져
회의론에 빠지거나 바로잡으려는 생각이나 노력을 무력화해서는 안 됩니다.
제가 예언의 자격이 없기에 매우 조심스럽고 부담스럽지만
그래도 교회의 사제로서 제2의 엘리야가 되어야 하는 사명 때문에
이 부담스러운 얘기를 한 것처럼 정부도 검찰 개혁은 멈추지 말고
우리는 검찰 개혁이 이루어질 때까지 개혁을 완수하라고 그러나
자신을 바로잡는 노력도 병행하라고 계속 요구해야 할 것입니다.
저나 신부들이 이런 얘기를 하면 일부 신자들 '저 신부는 좌파'라는 얘기를
서슴없이 하며 사제의 얘기를 예언이 아니라 정치적 발언이라고 믿고,
그래서 사제의 말을 믿기보다 세상의 거짓 뉴스를 더 믿습니다.
그런데 일부 신자들이 이런 것처럼 일부 사제들이 사실 복음에 입각하여
예언적이지 않고 정치적인 경우가 있는 것도 사실이기에 저의 오늘 나눔도
예언적이지 않고 정치적인 것은 아니었는지 조심스레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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