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9일 대림 제2주간 수요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마태오 11,28-30)
Take my yoke upon you
and learn from me,
for I am meek
and humble of heart;
and you will find rest for yourselve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기석신부-
이사야 예언서는 유배 전, 유배 중, 유배 뒤의 세 시기를 거치며 쓰여졌기에 각 시기 예언의 특징을 모두 보여 줍니다. 오늘 독서는 유배 중의 것으로 제2부 위로의 책에 해당하는 부분이며(40―55장 참조), 복역 기간이 끝나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기서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을 ‘별들을 창조하심은 물론 땅끝까지 창조하신 분’으로 ‘그 하나하나의 이름을 부르시고 막강한 능력과 권능이 크신’ 분으로 부릅니다. 계속 이어지는 표현들은 우리에게 희망과 믿음을 더욱 불어넣습니다.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시는” 주님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은 ‘새 힘을 얻어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감은 물론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할 줄 모르게’ 된다고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상일에 지쳐 버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고, 우리가 그분을 대신하여 행동하게 하는 힘을 줍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희망과 믿음이 그 바탕에 있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연말이라 바쁘고 대림 시기라 마음을 다잡아야 하는 요즈음, 오늘 독서와 복음은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나 피로 회복제가 되는 듯합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이제 내 인생은 바뀔 거야. 나는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 거야. 삶은 선물이야. 삶은 행복이야. 인생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어.”
실제로 그는 이 체험 후에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1분 1초도 헛되이 보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 뒤 최고의 작품이라는 평을 받는 책을 출판할 수가 있었지요. ‘죄와 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등이 이 사건 이후에 나왔습니다.
도스토옙스키처럼 극적인 체험이 있어야만 변화될 수 있을까요? 사실 그와 똑같지는 않겠지만, 절망의 체험을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절망 안에만 머물러 있다 보니, 이 순간이 극복되는 순간을 잘 기억하지 못할 뿐입니다.
그래서 절망 안에서 희망을 찾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야만 진정으로 변화될 수 있는 자신을 만날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절망과 시련이 찾아오면 불평불만이 먼저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 그냥 머물러 주저앉을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어린 나약함을 잘 알고 계십니다. 절망과 시련을 이겨내고 그 안에 담겨 있는 희망을 찾기 힘들어한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 용기가 되는 말씀을 해주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주님의 멍에는 적당히 무거워 그것을 멘 이들에게 오히려 힘을 북돋아 줍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은 강을 건너갈 때 머리나 가슴에 무거운 돌을 짊어지고 간다고 합니다. 강 중간쯤에 세찬 급류가 흐르는데, 무거운 돌로 인해서 급류에 휩쓸리지 않고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거운 짐이 자신을 살리는 것입니다.
이 무거운 짐이 주님의 멍에입니다. 짐이 없으면 편할 것 같지만 더 위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불편할 것 같은 멍에가 편한 것이 되며, 주님께서 주신 모든 짐이 그렇게 무겁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은총을 떠받치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우리를 떠받칩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갓난아기 때 목을 가누고 웃는 표정을 짓기만 해도 주변에서 손뼉을 치며 좋아합니다. 여기에 약간의 시간이 더해져서, 일어나 걷고, 어리숙하지만 말을 하게 되면 더 큰 힘찬 응원의 손뼉을 칩니다. 그런데 갓난아기가 아니라 더 큰 성인이 이렇게 한다면 어떨까요? 그 모습에 어떤 사람도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어른이라면 당연히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행동을 누가 했느냐에 따라 반응은 이렇게 다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대치의 차이 때문입니다.
어린아이에 대한 기대치는 그렇게 높지 않기 때문에 별것 아닌 행동에도 크게 와 닿고 또 반응을 보입니다. 그러나 성인 어른에게는 전혀 다른 기대치를 가집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와 똑같이 한다면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을 받아들이는 조건 중 하나는 이 기대치를 낮추는 것이 아닐까요? 너무 높은 기대치로 인해서 계속해서 부정적인 인간관계가 형성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대치가 낮아진다면 어떤 행동도 못 받아들일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명령하신 사랑의 실천이 그렇게 어렵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사랑에서 요행을 바라지 말라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멍에는 ‘뜻’입니다. 주인의 멍에를 메면 주인의 뜻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사랑’입니다. 사랑하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지 못하다면 주님의 멍에를 맨 것이 아닙니다. 먼저 마음을 바꾸지 않은 상태로 사랑하려 해봐야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본래 스스로의 힘으로는 사랑할 수 없게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뱀은 본성상 사랑할 수 없습니다.
어떤 분은 가정을 돌보지 않고 매우 폭력적인 남편과 사십니다. 그분은 남편이 바깥사람들에게는 천사처럼 잘하는데 자신과 자녀들에게만 그렇게 나쁜 사람으로 변한다고 말합니다. 그럴 수 있을까요? 같은 마음으로 다른 성격이 나올 수 있을까요? 물론 바깥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두려움 때문에 바깥에서는 표출하지 못하고 집안에서 다 풀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참아낸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 사람의 마음을 모를까요? 집안에서 사랑받지 못하는 남편이라면 바깥에서도 사랑받지 못합니다. 물론 이익적인 관계가 얽혀있어 주위에 사람이 많을 수 있더라도 진정한 친구는 사귀지 못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바깥에서는 잘 못 하는데 자신에게만 잘해준다고 믿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결혼 상대를 고른다면 어떤 사람을 고르겠습니까?
1. 다른 여자들에게는 냉정하지만, 자신에게만은 따듯하게 대해주는 사람.
2. 모든 여자에게 인기가 있고 자신에게도 잘 해주는 사람.
2번의 사람은 여자를 매우 힘들게 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과 결혼하더라도 그 남자를 좋아하는 수많은 여자 중 하나로밖에 느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밖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성격이 좋지 않은 사람으로 여겨지는 1번이 2번보다 더 낫지는 못할 것입니다. 지금이야 그렇지만 함께 살다 보면 본래의 성격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한 수도꼭지에서 물도 나오고 맥주도 나오지 않습니다. 마음은 수도꼭지와 같습니다. 집안에서 새는 바가지라면 바깥에서 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격이 교만하고 화를 잘 내는 사람인데 자신만은 사랑해 줄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장착하고 사랑의 멍에를 쓰라고 하시는 이유는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멍에를 써도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겸손하고 온유한 성격이 아니면 진정한 사랑은 불가능합니다. 성격이 그런데 나에게만 잘해줄 수 있는 사랑은 참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한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만약 돈을 좋아하고 화를 잘 내는 성격이라면 그 사람이 부모라도 그 사람의 사랑을 사랑이라 믿으면 안 됩니다.
영화 ‘내생에 최고의 경기’는 20세의 나이로 1913년 US오픈에서 우승한 ‘프란시스 위멧’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위멧은 브루클린 골프장에서 캐디로 일하는 소년입니다. 골프의 열정이 있었지만,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가난한 것이 그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아버지는 헛된 꿈은 꾸지 말라고 프란시스가 골프 치는 것을 반대합니다. 아버지는 돈밖에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화를 내며 아들을 쫓아내기도 합니다. 그래도 위멧을 지원해주고 믿어주는 사람이 있었기에 위멧은 아버지의 말에도 기죽지 않고 어린 나이에 US오픈에서 우승하고 나중에 백만장자가 됩니다.
만약 위멧이 진정으로 아버지가 자신에게 하는 행동들이 사랑이라고 믿었다면 성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위멧은 아버지의 행동이 참사랑은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길을 갔습니다. 화를 잘 내고 돈을 좋아하는 사람은 비록 아버지일지라도 그 사랑은 오염되었을 수밖에 없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지 못한데 사랑한다고 하는 말은 믿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잃은 마음에서 어떻게 참사랑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사랑에 속지 않으려면 그 사람의 성격이 온유하고 겸손한지 먼저 살펴야 합니다. 자아의 멍에를 벗어버리지 못한 사람은 사랑한다고 해도 믿어서는 안 됩니다. ‘나’라는 것 안에는 세속-육신-마귀의 사랑과 반대되는 욕구가 샘솟습니다. 이는 물이 오염되어 먹으면 죽는 것인데 남에게 마시게 해주겠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은 한마음에서 나오는데 마음이 사랑과 반대되는 성격이라면 그 사람이 나만은 진정으로 사랑해 줄 것이란 기대는 접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진정 사랑할 능력이 있는지 알려면 그 사람의 마음이 본래 자신의 마음인지, 아니면 그리스도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바뀌었는지 잘 관찰해야 합니다. 마음은 내가 누구냐는 믿음에 의해 바뀝니다. ‘나는 나’라고 대답하는 사람을 주의하십시오. 자신을 그리스도라 믿는 사람만이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지닐 수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복음에서 보면 마귀, 사탄이 예수님을 알아본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귀들도 열심히 공부하고 나름대로 연구를 했기 때문에 알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전쟁에서도 상대방의 정보를 미리 알면 쉽게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첩보원을 보내고 공작원을 보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알고 싶은 것이 많을 것입니다. 남편이 나 몰래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것은 아닌지, 나 몰래 다른 주머니를 차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옆집의 자매가 나를 보고 웃기는 하지만 정말 나를 좋아하는지 아니면 뒤에서 나를 욕하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저도 알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주교님께서 나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사무실의 직원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친구들은 나를 좋아하는지 궁금한 것도 많습니다. 신문홍보를 갈 수 있을지 알고 싶습니다. 일기예보를 하듯이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알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것은 끝도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또 알면 더 힘든 것도 많습니다. 알면 같이 잠자리에 드는 것도 힘들고, 알면 같이 식사하기도 힘들고, 알면 내가 더 큰 죄를 지을 것도 같습니다. 건강검진이 꼭 필요하지만 건강검진의 결과를 볼 때는 걱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니고데모와 대화를 할 때도 그렇습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할 때도 그렇습니다. 빌라도와 대화를 할 때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관점은 아느냐 모르느냐가 아닙니다. 믿느냐 믿지 않느냐 입니다. 물속에 빠진 베드로를 건져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왜 이렇게 믿음이 약하냐! 눈먼 소경에게도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믿느냐! 눈을 떠라! 죄를 지은 사람에게도 너의 믿음이 너를 살렸다고 하십니다.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말씀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믿으면 남편의 말, 아내의 말, 자녀들의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믿으면 오해 할 일이 그만큼 적어집니다. ‘박수 칠 때 떠나라.’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 제목이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마귀는 떠날 때를 모르고 있다가 예수님께 혼나고 떠납니다. 우리 주변에는 떠날 때를 모르고 사람들에게 욕을 먹는 사람도 많습니다. 물론 떠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동안 쌓아놓은 공도 있고, 이제 겨우 자리를 잡았는데 떠난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떠날 수 있다는 것은 마음을 비운 다는 것이고 마음을 비운 다는 것은 단순해진다는 것이고 단순한 사람은 쉽게 믿을 수 있습니다.
미국의 대선이 끝났지만 아직 절차가 남았습니다. 미국은 선거가 끝나면 승자는 승리선언을 하고, 패자는 승복 선언을 하였습니다. 절차는 오랜 전통에 따른 형식이었습니다. 현직 대통령이 패한 경우에는 백악관으로 승자를 초대해서 차를 마시면서 축하하였습니다. 승자는 자신을 지지해준 유권자뿐만 아니라, 상대방을 지지해준 유권자들에게도 위로의 인사를 하였습니다. 선거에는 상대방이 있지만 선거 후에는 모두 미국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현직 대통령이 선거의 결과에 불복해서 승복 선언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박수 칠 때 떠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면 좋겠습니다.
정치는 이기고 지는 게임이 아닙니다. 정치는 애덕을 실천하는 대표를 선출하는 것입니다. 강을 건너는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시민이 할 수 있습니다. 강을 건널 수 있도록 다리를 건설하는 것은 정치가 하는 것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은 시민이 할 수 있습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은 정치가 하는 것입니다. 애덕을 실천하는 것이 정치의 본질이라면 언제든지 새로운 사람에게 애덕을 실천 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억지로라도 왕으로 모시려는 사람들을 피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욕망, 권력, 명예, 재물의 탑에서 내려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니지 마라.” 예수님께서는 먼저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면 다른 모든 것들은 하느님께서 채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
-반영억신부-
몸은 고달프고 힘이 들지만, 본연의 일을 하고 있으면 기쁩니다. 그러나 자기가 하는 일이 억지로, 마지못해 하는 일이 되면 무거운 짐이요, 멍에가 될 것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 꼭 해야 할 일을 즐기면서 기쁘게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11,28). 고 하셨습니다. 당시에는 사람들이 무거운 짐과 멍에를 메고 괴로워했습니다. 무엇보다 억눌리고 고된, 가난의 생활이 짐이 되고 힘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수많은 규정을 지켜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누구나 지키기만 하면 살 수 있는 구원과 생명을 위해 주어졌던 율법(에제키엘 20,13). 을 율법학자들은 수백 가지의 특수한 규정을 만들어 견딜 수 없는 짐이 되게 하였습니다. 법을 만든 그들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을 위한 율법이 아니라 율법을 위해 사람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율법은 죄를 지은 사람에게 벌을 주는 도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마태11,28). 하시며 산상 설교를 통해 참된 행복과 율법(마태5장-7장)을 철저하게 가르치셨습니다. 율법학자들은 법에 사람을 맞추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위한 법을 확인하셨습니다. 율법은 죄의 심판인 벌을 강조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벌이 아니라 죄의 용서를 통해 멍에를 거두어주고 짐을 내려주셨습니다. 율법을 폐기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으로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이제 “하느님의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1요한5,3).
우리 삶의 여정에는 각자가 지고 가야 할 삶의 무게가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한다고 해서 그 짐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홍해를 없애주시는 기적을 베푸신 것이 아니라 홍해를 갈라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어렵고 고달픈 삶의 무게를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으로, 연민의 눈길로 보아주시고 함께 걸어가 주십니다. 어렵고 힘들 때 누군가 함께 해 주면 위로가 되고 희망이 살아나듯 예수님의 온유함과 겸손한 마음에서 나온 그분의 말씀과 눈길은 매섭고 날카로운 바리사이, 율법학자를 넘어 큰 힘이 됩니다. 사실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깁니다. 냉철하고 날카로우며 차가운 율법학자는 부드럽고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주님의 멍에는 편하고 짐이 가벼운 이유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고달픔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삶을 봉헌하고 끊임없이 사랑을 실천하면 내적인 평화와 기쁨, 행복을 맛보게 됩니다. 사실 “사랑한다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로마13,10). 주님의 계명을 준수하고 계명의 의미를 살려고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예수님의 멍에는 위로의 원천이 되고 인간적인 욕심을 포기하는 힘이 될 것입니다. 세속의 멍에를 벗고 예수님의 멍에를 선택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완전하여 생기를 돋게 하고 주님의 법은 참되어 어수룩한 이를 슬기롭게 하네. 주님의 규정은 올발라서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님의 계명은 맑아서 눈에 빛을 주네’(시편19,8-9). 고달픈 삶의 여정 안에서도 주님의 멍에를, 그리고 주님께서 주신 짐을 기꺼이 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송영진신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자신이나 구원하라고 예수님을 조롱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성전을 허물고 사흘 안에 다시 짓겠다는 자야, 너 자신이나 구해 보아라.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마태 27,40).”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시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믿을 터인데(마태 27,42).”
그 상황을 ‘멍에’에 관한 예수님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가 어떻게 우리에게 안식을 줄 수 있는가?
자신의 십자가도 벗지 못했으면서 어떻게 우리의 멍에와 짐을 벗길 수 있는가?”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1코린 1,18).”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능력을 펼치시어,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하늘에 올리시어 당신 오른쪽에 앉히셨습니다.
모든 권세와 권력과 권능과 주권 위에, 그리고 현세만이 아니라
내세에서도 불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신 것입니다(에페 1,20-21).”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무기력한 죽음만 보지만,
우리는 십자가에서 부활과 생명을 봅니다.
예수님은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신 분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의 짐과 멍에를 없애실 수 있고,
우리에게 참되고 영원한 안식을 주실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분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복음입니다(2티모 2,8).”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1코린 15,19-20).”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부활과 생명과 구원을 얻는 것은,
모든 짐과 멍에에서 해방되는 일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 일을 조금 다른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이 자녀들이 피와 살을 나누었듯이, 예수님께서도 그들과 함께 피와 살을 나누어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시고,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분명 천사들을 보살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보살펴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히브 2,14-18).”
예수님은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서 모든 점에서 우리와 같아지신 분입니다.
(인간을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기 위해서
우리와 똑같이 생로병사의 고통을 겪으신 분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일로 생각하면, 예수님은 멀리 떨어진 안전한 뭍에서
밧줄을 던져 주기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직접 물속으로 뛰어들어서
구해 주시는 분, 우리를 죽음에서 구하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신 분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부활하신 분입니다.)
또는 우리를 온갖 멍에와 짐에서 해방시켜 주기 위해서 당신이 우리의 멍에와
짐을 대신 짊어지심으로써 그 멍에와 짐을 없애셨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멍에’에 관한 말씀에서 ‘짐’과 ‘멍에’는,
넓은 뜻으로 ‘죄와 죽음의 억압’을 포함해서
우리가 겪는 인생살이의 모든 고통으로 해석됩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고통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해방시켜 주셨다는 것은 자유를 주셨다는 뜻이고, 자유는 곧 구원을 뜻합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나에게 오너라.” 라는 말씀은,
“나를 믿고, 나의 가르침대로 살아라.” 라는 뜻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라는 말씀에서
‘안식’은 궁극적인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내가 너희를 구원하겠다.” 라는 뜻입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라는 말씀의 뜻은, “내 안에 머물러라.”입니다.
이 말씀을 설명한 것과 같은 말씀이 요한복음 15장에 있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5,5).”
예수님의 멍에를 멘다는 말은, 예수님 안에 머무른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배운다는 말은,
예수님을 자기 안에 모시고 사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안식을 얻는다는 말과
예수님 안에 머물러서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은 사실상 같은 말입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나에게 오면 멍에와 짐을 벗고 편안함과 가벼움을(안식을) 얻을 것이다.”이고,
앞의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라는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멍에’와 ‘짐’이라는 말은 일종의 반어법적 표현입니다.
(믿음이 없거나 부족한 사람들은 흔히
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도 자기들에게 멍에와 짐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멍에와 짐이 아니라, ‘멍에와 짐을 벗겨 주는 열쇠’입니다.
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을 실천함으로써
참된 해방과 구원과 안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 마태 11,28-30: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조욱현신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28절) 하느님을 믿고 그분을 따르는데, 힘이 들고, 허덕인다는 것은 참으로 알아듣기 힘든 모습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평화와 기쁨을 주시는 분인데 그분 때문에 불편해진다든지 어려워진다면 그것은 올바른 신앙인의 삶을 벗어난 것임이 틀림없다. 이는 율법에 매여 그 참뜻을 알지 못하고 허덕이는 사람들을 말한다.
주님께서는 율법의 멍에를 멜 힘조차 없는 지친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악마에게 시달리며 무거운 짐을 지고 무수한 죄에 억눌린 우상 숭배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29절) 우리는 그분에게서 기적을 일으키거나 죽은 이를 되살리는 법을 배울 것이 아니라,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29절)한 것을 배우라고 하신다.
높이 올라가려면 밑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건물을 세우려면 터부터 닦아야 한다. 건물이 높으면 높을수록 터를 더 깊게 파야 한다. 건물을 세우려면 먼저 기초를 닦기 위해 아주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그분의 겸손을 배울 때, 그 멍에는 편하고 짐은 가벼워진다. 그러면 왜 주님께서는 ‘그 길’을 ‘좁은 길’이라고 하셨을까? 게으른 사람들에게는 좁은 길이다. 그러나 잘 배운 이들에게는 그 계명이 가볍다.
설사 잠깐 육체적 고통이 따른다 해도, 지금 희망 안에 양육되고 있는 사람은 그 고통을 쉽게 견디어 내는 신심이 깊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이 어렵게 보이는 것을 요구하시는가? 이것이 어렵게 보이는 것은 그 멍에를 메고 그분의 말씀을 믿는다면 얼마나 편하고 가벼운 짐인지를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분의 짐은 관습과 규정이 아니라, 영혼의 결심이기 때문이다.
생명을 원하고 좋은 날들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부정과 악의의 멍에를 벗어버려야 한다. 모든 악덕의 불쏘시개인 부정이라는 멍에를 벗어버리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편하고 가벼운 멍에를 멜 수 없다. 그리스도의 멍에를 힘들다고 여기는 것은 세상에 물든 마음으로 하늘의 것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은 아직 그리스도께로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분의 멍에를 메고 그분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29절) 짐 진 이들에게 힘을 북돋아 주는 참으로 기분 좋은 무게임을 알려주시는 말씀이다. 세상 주인들의 짐은 힘을 점점 더 빠지게 하지만, 그리스도의 짐은 그 짐을 진 이들을 오히려 도와준다. 우리가 은총을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우리를 지고 가며, 우리가 은총을 돕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도우라고 은총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주님께 감사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 28)
-한상우신부-
안간힘과
고단함 사이에
우리가 있다.
안타깝고
아픈 우리들
삶이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우리모두를
위로하시는
사랑의
주님이시다.
비우고
맡겨드리는
법을 배우게
되는 시간이다.
안식은
사랑이다.
사랑과 생명
안식과 일상은
서로를
향해 있다.
안식을 주시는
주님이
우리 뒤에
계신다.
우리
힘만으로
이 무거운 짐을
질 수 있다는
교만을
내려놓는다.
주님께서
함께하는 삶이
참된 안식의
삶이며
새로워지는
삶이다.
구체적인 삶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감당할 수 있는
멍에와 짐임을
믿는다.
우리를
성장시키기 위한
멍에와 짐이다.
멍에와 짐으로
지친
우리 마음을
만나게된다.
마음에 안식을
주시고 마음에
위로를 주시는
온유와 겸손의
주님이시다.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온유와 겸손의
마음이다.
주님께서 주시는
안식은 온유와
겸손의 마음을
되찾게한다.
마음이 편해지면
멍에와 짐도
편하고 가볍다.
큰 아픔을 겪은
모든 이들을 위해
주님께
진심으로
기도드린다.
주님의 위로
주님께서 주시는
마음의 휴식이
아픈 이들에게는
가장 큰 사랑이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마음까지
품어주시는
새 날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 싶으신 것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주님은 우리에게 안식을 주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시지요. 그분은 세상 안에서 이리저리 치이며 허덕이는 자녀들을 외면하실 수 없으십니다. 생로병사의 파도, 스스로의 죄악과 나약함에 넘어지고 무너지는 우리에 대해 한없이 연민하시지요. 그분이 우리에게 "안식"을 주고 싶어하십니다. 공부나 격무에 지친 자녀를 편히 쉬게 해주고 싶은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사실 "안식"은 하느님께서 태초에 세상을 창조하실 때 모든 피조물에게 허락하고 명하신 축복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안식", 곧 쉼을 두려워합니다. 자는 시간도 아깝다며 불철주야 달리는 이들을 칭찬하고 쉼 없이 몰두해야 성공한다고 부추깁니다.
이는 자본주의와 자유시장 경제체제 안에서 거대 자본이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개개인의 사고에 심어놓은 함정일지도 모릅니다. 그 영향 때문인지 사람들은 안식을 불안해합니다. 죽으면 어차피 안식이니, 살아있는 동안 죽어라 일해 성공하겠다고 이를 악물지요. 거기서 병도 생기고 고통도 옵니다. 그 대가로 숫자와 물질은 쌓여가지만 마음은 공허하고 각박해질 뿐입니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30)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께서, 당신이 지워주시는 멍에와 짐은 편하고 가볍다고 밝히십니다. 성공과 맞바꾼 세상의 쓴 잔과는 사뭇 다른 듯하지요.
세상은 눈에 보이는 성과를 생산적이라고 칭합니다. 그렇다면 안식은 소모적인 낭비일 터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안식을 마치 무기력하고 무계획적인 시간 낭비처럼 여깁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기도가 아닐까 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몰두해 그분과 친교를 나누는 것이 기도입니다. 온전한 안식의 시간이지요. 기도가 깊어질수록 그토록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주님과의 머무름에 쏟아붓게 됩니다. 그분 사랑 안에 머무르고 싶은 갈망이 더 커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거룩한 안식을 위해 생활의 어떤 부분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주님과의 사랑이 다른 즐거움보다 더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에 빠지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쓰는 시간이나 노력, 물질이 하나도 아깝지 않은 것처럼, 기도를 위해 쓰는 시간과 노력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는 거룩한 안식이고 또 거룩한 낭비입니다.
세상 걱정 근심에 매몰되어 늘 피곤하고 불안하고 우울한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손을 내미십니다. 당신이 주시는 안식을 누리라고요. 남들에게 질세라 목숨 걸고 매달리는 그것들이 당장은 중요해 보여도 실은 생명을 갉아먹는 욕망의 하수인일 뿐임을 깨달으라고 하십니다. 좀 느려도, 좀 작아도, 좀 낮아도, 좀 덜 중요한 사람이어도 괜찮으니, 진정한 행복을 위해 잠시 멈추라고요. 그리고 "안식"의 축복을 누리라고요.
제1독서에서는 우리를 생기있게 하는 힘이 어디서 오는지 이야기합니다.
"나의 길은 주님께 숨겨져 있고, 나의 권리는 나의 하느님께서 못 보신 채 없어져 버린다."(이사 40,27)
하느라고 했는데 바라는 성과는 보이지 않고, 예고 없이 닥쳐오는 실존적 고통들로 지쳐갈 때, 인간은 이처럼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한탄합니다. 체념과 회의가 짙게 깔려 있지요. 나름 열심히 했어도 행복하지 않은 건 주님이 나를 외면하고 무관심하며, 소외시킨 탓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믿고 욕망에 더 채찍질을 할수록 안식은 물론 주님과도 점덤 더 멀어질 뿐입니다.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를 치며 올라간다."(이사 40,31)
욕망에 바랄 것이 아니라 주님께 바라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기력을 북돋아 주시는 분이시니, 그런 주님께 바라는 것이 어차피 끝을 모르고 치닫는 욕망으로 점철된 세상에서 방전되지 않고 살아가는 지혜임을 일깨워 주십니다.
주님께 바라는 이는 그분 안에서 누리는 안식을 소중히 여깁니다. '그 시간과 그 에너지와 그 돈으로 다른 걸 했었더라면' 하고 다른 이들은 혀를 끌끌 찰지언정, 본인은 전혀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주님 안의 안식은 세상 것을 다 가져도 얻을 수 없는 충만한 평화이고, 온전한 의탁이 주는 위안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당신께 와서 안식을 누리라고 하시는 주님의 초대에 기꺼이 응답하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그분은 우리를 채찍질해서 더 크고 놀라운 성과를 얻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진정 하느님 모상으로 사람답게 사는 법을 알려 주러 오셨습니다. 주님께 바라는 이는 안식을 누릴 것입니다. 이 안식은 우리를 더 깊고 그윽하고 고귀한 사랑의 장막 안으로 데려갈 것입니다. 그러니 복잡한 것들을 좀 내려놓고 주님께 달아듭시다. 이 코로나 시대는 그렇게 하라는 주님의 강력한 초대일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고통
-김찬선신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에게 오라고 하십니다.
이는 너희가 나를 기다리는 이 대림절에 내가
너희에게 가니 너희도 내게로 오라고 하시는 것이며,
고생하며 무거운 짐 진 너희에게 안식을 주러 내가 가니
너희는 안식을 얻으러 내게로 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런 성찰을 하였습니다.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당신께 오라고 하시는데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이 주님께 갈 것이라고, 반대로
사는 게 즐겁고 편안한 사람은 주님께 가지 않을 거라고 말입니다.
사실 많은 경우 고생을 모르고 근심 걱정이 없으며 편안한 사람은
이미 안식을 누리고 있기에 안식을 주실 주님을 찾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이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우리도 편안할 때는 주님을 찾지 않습니다.
그래서 심하게 얘기하면 고생이란 접점/Meeting Point,
곧 우리로 하여금 주님과 만나게 하는 곳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편안할 때는 주님을 모르고 살다가
고통 중에서 주님을 찾고 만납니다.
제가 아주 옛날에 성심원에서 만나 뵌 분도 전형적으로 그런 분이었습니다.
이 분은 본래 의사였습니다.
그런데 나병에 걸렸고 의사이기에 스스로 자가치료를 하였지만
약이 변변치 않았을뿐더러 그마저도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아
결국 나병이 겉으로 드러나자 집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되었지요.
몇 번이나 자살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고 그래서 자살도 포기하고,
몸과 마음, 정신이 다 망가져서 성심원에 들어와 사시게 되었지요.
자살을 포기했지만, 인생도 포기했기에 자포자기 상태로 살아가는데
그래도 공부를 많이 하신 분이기에 심심풀이 삼아서
그러니까 성경을 그냥 다른 책 읽듯이 읽어 내려가셨습니다.
그러다가 하느님은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에게 똑같이
비와 빛을 주신다는 구절을 읽다가 그만 하느님을 만나게 되셨답니다.
이때부터 교리를 공부하여 세례를 받고, 당신을 위로하러 찾아오는
많은 사람에게 오히려 하느님을 열심히 믿으라며 복음을 전하셨답니다.
당신은 나병 때문에 온갖 고생을 하였고 모든 것을 잃었지만
나병 때문에 하느님을 얻었고 그래서 지금 여전히 육신의 고통은 크지만
하느님 때문에 당신은 너무 행복하다고 하시며 기쁘게 복음을 전하십니다.
나병 때문에 불행한 것이 아니라 나병 때문에 불행한 사람이 불행한 겁니다.
고통 때문에 불행한 것이 아니라 고통 때문에 불행한 사람이 불행한 겁니다.
고통 때문에 불행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없이 고통당할 때 불행하고,
고통 때문에 불행한 것이 아니라 사랑 없이 고통당할 때 불행합니다.
그래서 그 반대도 가능합니다.
고통이 없으면 행복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날 때 행복합니다.
고통이 없으면 행복한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고통을 무릅쓸 때 행복하고,
고통 때문에 사랑이 오히려 불타오를 때 행복합니다.
그러나 말이 쉽지 고통은 엄연하고 그렇게 만만치 않습니다.
견디는 것도 쉽지 않고 고통을 사랑으로 바꾸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게 됩니다.
하느님 없이 편히 사는 것과 고통스럽지만 하느님과 사는 것,
그 둘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마태오 11,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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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에는 ‘뜻’입니다. 주인의 멍에를 메면 주인의 뜻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사랑’입니다. 사랑하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지 못하다면 주님의 멍에를 맨 것이 아닙니다. 먼저 마음을 바꾸지 않은 상태로 사랑하려 해봐야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본래 스스로의 힘으로는 사랑할 수 없게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뱀은 본성상 사랑할 수 없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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