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12월 7일 대림 제2주간 월요일

Margaret K 2020. 12. 6. 06:38

2020년 12월 7일 대림 제2주간 월요일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암브로시오 성인은 340년 무렵 로마인 가문에서 태어나 트레비리(지금의 독일 트리어)에서 자랐다. 일찍부터 법학을 공부한 그는 변호사로 활동하였고, 로마에서 공직 생활도 하였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주교가 된 암브로시오는 아리우스 이단에 맞서 정통 그리스도교를 옹호하였다. 그는 특히 전례와 성직의 개혁을 꾸준히 실행하는 한편, 황제의 간섭을 물리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암브로시오 주교의 훌륭한 성품과 탁월한 강론은 마니교의 이단에 깊이 빠져 있던 아우구스티노 성인을 교회로 이끌기도 하였다. 397년에 세상을 떠난 그는, 예로니모 성인과 아우구스티노 성인, 그레고리오 성인과 함께 서방 교회의 4대 ‘교회 학자’로 칭송받고 있다.


☆☆☆

그때에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 앞으로 들여다 놓으려고 하였다. ..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루카 5,17-26)

 

And some men brought on a stretcher a man 
who was paralyzed;
they went up on the roof
and lowered him on the stretcher through the tiles
into the middle in front of Jesus. 
When Jesus saw their faith, he said,
“As for you, your sins are forgive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기석신부-


겨울에 비가 내리고 여름에는 건조한 지중해성 기후의 영향으로 이스라엘 집들은 지붕이 평편하였습니다. 그리고 집 밖으로 난 계단을 통하여 지붕으로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한낮의 열기를 피하여 잠시 휴식을 취하거나 농작물을 펼쳐 놓고 말리기도 하였습니다.
옥상과 같은 역할을 하는 이 지붕은 삼나무나 향백나무로 만든 긴 막대기를 대들보처럼 걸쳐 놓고 그 위에 짚을 깐 다음 마지막에 진흙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겨울비가 내리기 전에 돌로 만든 굴림대를 이용하여 진흙을 단단하게 다졌습니다. 이런 지붕은 마르코 복음서 2장의 중풍 병자 치유 이야기에서처럼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낼 수 있는 구조였습니다.
같은 장면을 전하는 오늘 복음에서, 이방인 루카 복음사가는 이스라엘의 기후와 토양은 물론 집 구조가 낯설었기에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 내고”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복음사가들은 중풍 병자를 도우려 한 이들이 예수님께 병자를 데려가려고 얼마나 노력하였고 그 마음이 얼마나 절실하였는지 말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처럼 눈먼 이들의 눈을 여시고, 귀먹은 이들의 귀를 여시며, 다리저는 이를 사슴처럼 뛰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의 혀가 환성을 터뜨리게 하시는 분께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십니다. 예수님을 만나 뵙기 위하여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 내는” 일은 중요합니다. 기다림의 시간인 지금, 주님을 만나고자 얼마나 열성적으로 노력하고 있는지 이웃과 함께 되돌아봅시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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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연세 많으신 할아버지께서 옷차림에 신경을 쓰기 시작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이제는 아무도 할아버지께서 자신의 외모에 신경 쓸 것으로 생각하지 않은데 말입니다. 그러자 어떤 분이 말합니다.

“할아버지! 좋아하는 분 생겼어요?”

오래전에 아내를 잃고 혼자 사시는 할아버지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노인대학에서 정말로 마음에 드는 할머니를 만난 것입니다. 그분께 더 마음에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말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었습니다. 당연히 옷차림도 바꿨더니 사람들이 젊어진 것 같다고 말합니다.

할아버지의 모습에 ‘나이 들어 무슨 주책?’이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는 분의 큰 착각이 하나 있습니다. 나이를 들면 사랑에 빠지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더 큰 실수입니다. 사랑에 빠지는 것을 포기하는 순간 늙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사람을 젊어지게 합니다. 몸에 활력을 주고, 긍정적인 마음을 줍니다. 따라서 죽기 전까지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늘 설렘을 가지고서 말입니다. 이 사랑은 이성 간의 에로스적인 사랑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마음 자체가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에, 누군가를 돕는 사랑의 실천은 사람을 젊게 만드는 것 이상의 커다란 변화가 동시에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기 사랑에만 집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라기보다는 욕심과 이기심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변화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친구들이 친구인 중풍 병자를 데리고 와서 지붕을 뜯고 주님 앞으로 내려보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서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 도저히 방법이 없어서 이렇게 했을 것으로 예측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복음에서는 특별한 말씀이 적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중풍 병자의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굳게 믿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중풍 병자를 예수님 앞으로 내려보냈던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서 중풍 병자를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친구들은 중풍 병자를 사랑했던 것입니다. 사랑했기에 예수님께 대한 믿음도 가질 수 있었고, 그 사랑의 마음이 놀라운 기적을 가져왔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모든 병자와 죄인들에게는 그를 주님께 데리고 갈 사랑의 중재자가 필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이 사랑 중재자의 모습을 갖추면서 살고 계십니까? 우리가 사랑을 실천할 때, 주님의 놀라운 기적도 함께 따라옵니다.
다른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의 몸도 내 몸같이 소중히 여겨라. 그리고 네가 다른 사람에게 바라는 일을 네가 먼저 그에게 베풀어라(공자).

하느님은 언제나 3등입니다

예전에 ‘하느님은 언제나 3등입니다’라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하느님의 일을 뒤로 미루기만 했던 저 자신에 대한 반성을 많이 할 수가 있었지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또다시 하느님을 3등의 자리에 놓고 있습니다.

자신의 우선순위 일등은 ‘내가 하고 싶은 일’입니다. 그리고 우선순위 이등은 ‘내가 해야 할 일’입니다. 이렇게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해야 할 일을 모두 마친 다음에야 하느님 만나는 일을 하는 우리일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스스로 생각해보십시오. 하느님을 믿고 따른다고 입으로는 말하면서 하느님을 몇 등 자리에 올려놓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하느님을 더는 3등 자리에 놓아서는 안 됩니다.

고해성사가 죄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과정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고치시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내용은 ‘용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낫게 하시며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하십니다.

당시 ‘병’과 ‘죄’는 하나였습니다. 병이 죄에서 기인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병을 낫게 하는 것이나 죄를 용서하는 것이나 매한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병을 고칠 기적을 할 수 있음은 믿어도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은 없어야 한다고 믿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사람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 것일까요? 그러면 너무 쉽게 죄를 용서받기 때문입니다. 너무 쉽게 용서받으면 자신들이 용서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핑계가 없어집니다. 용서받으면 용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더는 죄를 짓지 못할 것을 압니다. 죄를 짓는 것 안에는 반드시 용서하지 못한 마음이 근저에 깔려있습니다.

 

      제가 군대에 가서 운전병 훈련을 받을 때 어떤 바람둥이 하나를 만났습니다. 그는 수십 명의 여자와 잠자리한 것을 자랑으로 삼았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신앙생활을 하며 살아온 저에게는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나이 스물이 갓 넘어서 50명 넘는 여자와 사귄 것입니다. 그의 집은 꽤 부자였고 부모는 커다란 식당을 몇 개 하고 있었으므로 밤늦게까지 집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여자들을 집에 데려와서 그런 삶을 살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어 보였습니다.

      제가 그러면 첫 경험은 언제냐고 물으니 인상을 찌푸렸습니다. 누군가를 생각하며 마구 욕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자기가 당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누나가 자신을 데리고 가서 첫 경험을 했는데 그 누나는 아무 남자나 데리고 가서 잠자리하는 평판이 아주 안 좋은 그런 여자였던 것입니다. 자신의 첫 경험이 그런 여자에게 빼앗긴 것이 그의 마음속에 큰 분노로 남아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는 그 누나와 똑같은, 아니면 더 나쁜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언젠가 그렇게 사는 것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어떻게 죄에서 벗어나야 할까요? 자신의 결심으로 그런 삶에서 되돌아올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오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도움이 필요합니다. 먼저 죄의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그가 그런 문란한 삶을 사는 힘은 자신을 더럽혔다고 믿는 그 누나에 대한 분노입니다. 그리고 그 분노가 자신이 지금 짓는 죄들을 합리화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 누나를 용서하지 못한다면 항상 그 분노가 또 다른 죄를 쉽게 짓게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누나를 용서하면 그런 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먼저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받아야 합니다.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받지 못하고 그 죄의 원인인 누나를 용서하겠다는 말은, 마치 속옷이 더러워서 겉옷으로 그것이 나타나는데 겉옷을 벗지 않고 속옷을 갈아입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겉옷을 벗어야 속옷도 갈아입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많은 여자에게 다 찾아다니며 용서를 빌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다 찾지도 못할뿐더러 모두에게 용서를 얻어낼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가서 용서를 청해야 할까요? 이때 오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처럼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야 합니다.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말은 진리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나의 죄를 용서해주셨다는 표징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잘못하였을 때 용서를 청할 용기를 내려면 그 사람이 용서할 수 있을 정도로 나를 사랑하는지 그 표징을 먼저 찾습니다. 아내와 다투었다면 남편은 장인·장모에게 먼저 용돈을 드리고 옵니다. 그러면 그 소식을 들은 아내는 남편이 들어올 때 살짝 미소 띤 얼굴로 맞이합니다. 그때 남편은 자신이 잘못한 것의 용서를 청합니다. 아내의 용서 사인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거절당할 수도 있기에 그러한 사인이 없이 무조건 용서를 청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대로라면 하느님께서 용서해주신다는 표징은 바로 ‘병이 치유되는 기적’입니다. 그런 기적을 인간에게 맡겼다면 인간을 통해서도 죄를 용서해주시겠다는 표징으로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교회에 병을 용서하는 권한을 주셨고 그것을 믿으라고 기적을 행하는 권한도 주셨습니다. 자녀가 부모가 주는 밥은 매일 먹으면서 부모가 자신은 용서하지 않는 분이시라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를 보면 둘을 알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하지만 마르틴 루터와 그의 동료들은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에게 주었어도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인간에게 주실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오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처럼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이렇게 명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성령의 힘으로 기적도 일으키고 죄도 용서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아낌없이 주시는 분께서 그 안에 앙꼬와 같은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빼고 주셨다고 말하며 하느님의 자비를 깎아내리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개신교도 하느님께서 어떤 이들에게는 병을 치유하는 기적의 능력을 주셨음을 믿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쉬운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주시지 않으셨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남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이 사실 기적을 행하기보다 더 쉬움을 압니다. 우리는 기적은 못 해도 이웃의 잘못을 많이도 용서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더 쉬운 것은 안 주시고 더 어려운 기적의 능력만 주셨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느님을 다 주시지 못하는 자비롭지 못한 분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자비롭지 못한 분으로 여기며 직접 하느님께 죄의 용서를 청합니다. 이런 오류를 통해 진짜 죄가 용서받았다고 믿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죄에서 벗어나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죄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지금 지은 죄를 분명히 용서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자신이 또 누군가를 용서하는 힘이 됩니다. 대부분 우리가 짓는 죄의 근저에는 부모가 마땅히 주어야 한다고 믿었던 사랑을 받지 못한 분노가 있습니다. 결국, 그 분노의 불을 끄기 전까지는 지금 짓는 죄들에서 벗어나려 해도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우선은 그 분노 때문에 지은 죄들부터 용서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뿌리도 용서할 힘이 생깁니다.

      1882년 프레드릭 카벤다쉬와 토마스 버크를 찔러 죽인 브라디라는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공공연하게 자신을 고발한 사람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사형 집행 전날, 한 수녀님이 그에게 면회 신청을 했습니다. 수녀는 그를 만나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브라디씨, 저는 어떤 사람을 몹시 미워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해도 용서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데 사실 나의 신앙으로도 그를 도무지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수녀에게도 그런 일이 있습니까? 용서하는 데는 까닭이 없지요. 그냥 마음을 풀어 버리면 되는 게 아닙니까?”

이때 수녀는 브라디의 손을 잡으면서, 떨리는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좋습니다. 나는 뵈닉스 공원에서 버크를 죽인 당신을 용서하겠습니다. 그는 바로 나의 오빠입니다.”

      그러자 브라디는 그 큰 눈을 한참 감고 있더니, “죄송합니다. 그리고 용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저를 고발한 사람을 지금 용서합니다. 이제는 마음이 후련합니다.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마음의 평화를 체험하고 브라디는 조용히 숨을 거뒀습니다.

      우리 부모님들도 완벽한 하느님이 아니셨습니다. 그래서 사랑도 주셨지만 분명 상처도 주셨을 것입니다. 교회에 기적을 행하는 능력인 성령을 주셨으면 그 같은 성령의 힘으로 죄도 용서하는 권한을 주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깨끗이 용서받아야 합니다. 이 힘이 내 근저에 있는 죄의 핑계거리를 용서하게 할 것입니다. 그래야 죄에서 해방됩니다. 예수님은 이 죄의 값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피를 흘리러 세상에 오셨습니다.

      죄가 고통임을 알고 벗어나고 싶다면 우선 죄의 용서를 믿고 죄를 온전히 용서받읍시다. 그리고 그 목적이 내 안에서도 미움이 남아 있지 않게 하려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나에게 상처를 준 모든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게 되면 결국 모든 죄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죄에 대한 핑계가 사라지고 용서해주신 분에 대한 감사가 나를 지배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재형신부-


2020년 코로나19는 고인이 되신 분들을 위한 장례에도 많은 변화를 주었습니다마지막 가는 길에 사랑하는 남편의 손을 잡지 못하고창 밖에서 마지막 모습을 보기도 했습니다화상으로 인사를 하기도 했습니다어머니께서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지만 저도 한국에 가지 못하고 미국에서 연도와 미사를 하였습니다동창신부님이 어머니 마지막 가는 길을 영상으로 보내 주었습니다영상으로 어머니의 입관 예절을 볼 수 있었습니다교구장님께서 집전하시는 장례미사를 볼 수 있었습니다어머니를 위한 동창 신부님의 강론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백신과 치료제가 나와서 일상의 소중함을 함께 느끼면 좋겠습니다.

 

고인이 되신 분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빈소에는 가지 못하지만 조의금을 보내는 사람이 있습니다빈소에 와서 고인을 위해 연도를 바치고 유족들을 위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장례미사에 와서 고인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고인이 묻히는 장지까지 가서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는 사람이 있습니다아무리 친할지라도사랑하는 가족일지라도 거기까지입니다고인과 함께 무덤에 묻히는 사람은 없습니다그렇게 해서도 안 되는 일입니다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떠난 고인이 천상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도록 기도합니다하느님의 자비하심에 맡겨 드립니다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받아들입니다하느님께로부터 왔으니 하느님께 돌아 갈 것을 믿습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희망을 이야기 합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수선화처럼 활짝 피고즐거워 뛰며 환성을 올려라레바논의 영광과카르멜과 사론의 영화가 그곳에 내려그들이 주님의 영광을우리 하느님의 영화를 보리라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그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하느님께서는 비록 우리 죄가 진흥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하얗게 하시고우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하얗게 하실’ 것입니다하느님의 자비와 하느님의 사랑이 크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이사야 예언자의 희망이 현실이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면서 변화되었습니다절망은 희망으로어둠은 빛으로슬픔은 기쁨으로 변화되었습니다죄인으로 멸시받고공동체로부터 쫓겨났던 사람들이 죄의 용서를 받았고공동체로부터 다시 받아들여졌습니다이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하느님 나라는 화려하고커다란 건물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닙니다비록 작고보잘 것 없어도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고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려는 열린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신부님들과 함께 뉴저지에 있는 ‘Worthington State Forest Park'엘 다녀왔습니다델라웨어 강이 흐르는 아름다운 공원입니다조금 무리하게 걸었더니 다리에 문제가 생겼습니다평소에 가지고 다니던 약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챙겨오지 못했습니다말은 하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는데 함께 했던 신부님이 어디 아픈지 물어보았습니다다리가 조금 아프다고 말했더니 기꺼이 약국까지 같이 가 주었습니다다행히 약을 구할 수 있었고남은 일정을 차질 없이 보낼 수 있었습니다마치 오늘 복음에서 아픈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갔던 따듯한 이웃 같았습니다저는 신부님의 도움으로 걸을 수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따뜻한 이웃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걷게 해 주셨습니다.

 

꿈과 희망은 혼자일 때는 그대로 꿈과 희망으로 남을 때가 많습니다그러나 함께 할 때면 꿈과 희망은 현실이 될 때가 많습니다하느님께서는 함께하는 우리들의 열린 마음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작은 노력을 보시고큰 축복을 내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약하면 약할수록, 문제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큰 사랑으로, 더 큰 자비심으로 그를 공동체의 중심에 둬야겠습니다.

 -양승국신부-

 

중증 중풍병자를 향한 이웃들의 지극정성이 유난히 돋보입니다. 그들은 치유자 예수님에 관한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중풍병자를 위한 평상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중풍이 깊어지면서 온 몸이 마비되어 하루 온종일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중풍병자에게 기쁜 소식을 알리며, 평상에 들어옮겼습니다.

  

예수님께서 머물고 계시는 곳으로 옮겨오는 일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환자가 누워있는 무거운 평상을 들고 보조를 맞추어 ‘하나 둘 하나 둘’ 하면서 조심스럽게 먼길을 걸어왔을 것입니다. 

 

막상 현장에 도착한 그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치유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셀수도 없이 많은 환자들이 이스라엘 전역에서 몰려온 것입니다. 하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다보니 사도들은 질서를 유지시키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대기 번호표를 받았는데, 기다리다가는 밤을 지새워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난감했던 이웃들은 머리를 맞대고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이 일을 어떡하지? 환자 상태는 심각한데, 순번대로라면 이틀 밤을 꼬박 지새워야겠고, 환자에게 밤이슬을 맞게 할수도 없고...’

  

마침내 그들은 묘안을 짜냈습니다. 상황이 하도 다급하다보니 편법을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집 지붕 위로 올라갔습니다. 계폐가 가능했던 지붕을 벗겨내고, 위에서 아래로 중풍병자를 내려보내기로! 

 

중풍병자에 대한 마음이 각별했던 이웃들이었습니다. 어떻게든 한번 살려보려는 그들의 마음, 어떻게든 새 삶을 살게 도와주려는 마음,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백방으로 노력하는 그들의 따뜻한 마음이 돋보입니다.

  

참으로 인간미 넘치는 이웃들입니다. 그들은 공동체 안에서 가장 약한 지체였던 중풍병자를 가장 중심에 두었습니다. 어찌 보면 공동체의 가장 큰 약점이자 수치꺼리인 중풍병자를 가장 귀중히 여겼습니다. 그를 위해 공동체 모두가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런 중풍병자 이웃들의 정성, 따뜻한 마음을 예수님께서 높이 평가하십니다. 기상천외한 그들의 방법이 예의가 아니었지만, 크게 개의치 않으시고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오늘 공동체 안에 가장 중심에 둬야할 대상, 가장 배려 받아야 할 대상, 가장 사랑이 필요한 대상이 어디 있는지 유심히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누군가 약하면 약할수록, 문제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큰 사랑으로, 더 큰 자비심으로 그를 공동체의 중심에 두고, 그를 꼭 안아주고, 결국 그를 구원하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공동체 구성원들의 중풍병자를 향한 그 지극 정성, 그 간절한 마음이 하늘조차 움직였습니다. 하느님 마음조차 감동을 받으신 것입니다. 가장 나약한 존재를 향한 공동체 구성원들의 각별한 마음, 환자 중심주의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중풍병자 입장에서는 또 얼마나 감동적이고 감격적이었겠습니까? 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모습에 감사와 기쁨의 눈물을 쉼없이 흘렸을 것입니다.

  

나를 들것에 싣고 그 먼길을 뛰어온 공동체 구성원들의 모습, 나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모습에, 반드시 치유받아 백배 천배로 갚아야겠다는 마음으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이영근신부-


놀라운 사실이 선언되었습니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루카 5,20)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죄의 용서’를 선언하십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사실 앞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루카 5,21)

 

참으로 그렇습니다.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단 한 분, 오직 하느님이 아니고서야 그 누구도 용서할 수가 없거늘, 감히 누가 “죄를 용서받았다.”고 선언할 수 있을까? 더구나, 하느님께서 용서하셨다는 것을 대체 누가 알 수 있을까?

하느님이 아니고서야 말입니다. 그러니 결국,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루카 5,24)

 

그리고 그 증거로 중풍병자를 치유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그러자 그는 그들 앞에서 즉시 일어나 자기가 누워있던 것을 들고,

하느님을 찬양하고 집으로 돌아갔다.”(루카 5,24-25)

 

여기서, 우리는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일 잇습니다. 그것은 치유 받았어도 “들것”을 여전히 들고 다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몸이 치료되었다고 해서, 몸을 버려두고 다닐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치유 받은 이들이요, 이미 용서받은 이들입니다. 그러나 그 상처는 지니고 다닙니다. 왜냐하면, 상처는 치유 받았음을 보여주는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할례’라는 상처를 ‘하느님 백성의 표지’로 지니고 다녔듯이 말입니다. 또 야곱이 ‘엉덩이뼈의 상처’를 ‘축복의 표지’로 지니고 다녔듯이 말입니다. 그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상처’를 ‘구원의 표지’로 몸에 지니고 다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들것'에 메여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는 기꺼이 들고 다녀야 할 일입니다. 아니, 오히려 들것에 아픈 형제들을 태워 들고 집으로 가야할 일입니다. 마치 내 형제들이 나를 '들것'에 태워 예수님께 데려왔듯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인류를 태워, 들고 아버지께로 가셨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상처에서 흐르는 용서의 피를 마실 때라야, 우리는 그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그것을 구원의 표지로 지니게 됩니다. 용서야말로 진정한 치유를 가져오는 권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치유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용서하십시오. 용서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하느님께서 용서하셨음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이미 치유 받은 것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루카 5,24)

 

주님!

평상에서 일어나게 하소서.

일어나 평상을 들고 가게 하소서.

평상 위에 당신의 사랑을 들고 다니게 하소서.

당신께서 십자가에서 사랑을 드러내셨듯이,

저도 저를 일으키신 그 사랑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좋은 이웃이 되어라

-반영억신부-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웃 사람끼리 서로 돕고 의좋게 지내는 모습이 멀리 있는 사촌보다 더 가까운 사이로 친하게 지낸다는 의미입니다. 살아가면서 이웃을 잘 만나는 것은 큰 복입니다. 그런데 이웃을 잘 만나 복을 누리려고 하는 사람은 많지만, 이웃에게 복이 되어주려고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누가 나의 이웃이 되어주길 바라지 말고, 내가 다른 사람의 이웃이 되어 복을 지어 줄 수 있는 마음이 커지기를 희망합니다.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 앞으로 들여다 놓으려고 했지만, 사람들이 많아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붕으로 올라가 천정을 벗겨내고 환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 보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루카5,20). 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육체적인 병을 낫게 해 달라고 간청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병과 허약함 뿐 아니라 그 속을 고쳐 주셨습니다. 인간은 겉모양을 보고 판단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속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영혼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의 뿌리를 다스리시고 부족함을 충만하게 채워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능력의 말씀 한마디로 모든 것을 이루셨습니다. 명의는 원인을 치료하십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오셨고 말씀을 완성하시는 분이십니다. 중풍병자는 군중이라는 장벽과 지붕이라는 걸림돌을 넘어 예수님의 능력을 만났습니다. 위기는 기회입니다. 넘어야 할 산을 넘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실, 예수님시대에 병자들은 자신들의 죄 때문에 하느님의 저주를 받아 그리된 것이라 여겼으니 ‘죄를 용서받았다’는 선언은 모든 것을 다 얻은 것입니다.

 

중풍병자는 이웃을 잘 만났습니다. 그는 이웃이 있었기에 능력의 주님 앞에 설 수 있게 되었고 모두를 얻었습니다. 그야말로 잘 만난 이웃사촌이 복덩이 입니다. 중풍 병자의 믿음도 믿음이지만 이웃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치유해 주셨다는 것이 우리에게 큰 위로를 줍니다.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수고와 땀이 결코, 헛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웃의 믿음을 보고도 은총을 허락하시니 좋은 이웃을 만나는 것도, 좋은 이웃이 되어주는 것도 다 복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큰 복을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다는 것을 미심쩍어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용서를 하시는데, 사람은 용서보다 의아하게 생각하며 판단하고 심판하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즉시 그 마음을 아시고 중풍병자를 일으켜 세우는 능력을 드러내셔서 믿도록 해주셨습니다. 판단과 심판에 앞서서 용서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놀라서 하느님을 찬양하고 두려움에 차서 신기한 일을 보았노라고 말했습니다. 용서는 사랑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이 일은 오늘도 믿는 이들 안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어느 날 할머니 한 분이 “신부님 고맙습니다. 제가 성경에 맛들이게 되었습니다.”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어느 날, 몸이 많이 아픈데도 불구하고 미사참례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부님께 안수를 받으며‘저에게 꼭 필요한 것을 주십시오.’하고 기도했습니다. 저는 몸이 많이 아팠지만 아픈 것을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저에게 꼭 필요한 것을 주십시오.’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왔는데 그때가 점심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저도 모르게 밥 대신 성경을 챙겼고, 성경을 읽는데 말씀이 꿀같이 달았습니다. 전에는 이해가 되지 않던 말씀이 마음에 쏙쏙 들어왔습니다. 저는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성경을 읽게 되었고 저의 모습을 지켜보던 남편이 ‘대단한 학자가 났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날 이후로 성경을 보지 않고는 못 견디게 되었습니다.”

  

큰 믿음에 바탕을 둔 행동에 신기한 일은 여전히 일어날 것이고 구원의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나만의 구원이 아니라 이웃의 구원을 위해 애쓰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 처음에 선포하신 복음은,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입니다(마태 4,17).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루카 24,47-48).

이 말씀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죄를 용서받는다고(구원받는다고)

선포하여라.” 라는 명령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구원받을 수 있다.”)는 소식이 바로

우리에게 ‘큰 기쁨을 주는 소식’(복음)이고,

‘회개’와 ‘믿음’은 그 기쁨이 실현되는 방법,

즉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방법(구원받는 방법)입니다.

여기서 ‘용서’는 ‘구원’과 같은 뜻입니다.

그런데 회개는 용서받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용서받았기 때문에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일 자체가 ‘용서’이고 ‘구원’입니다.)

따라서 회개는 이미 주신 용서를 받아들여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일이고,

회개하지 않는 것은 이미 주신 용서를 받지 않겠다고 고집부리는 것입니다.

 

“그때에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 앞으로 들여다 놓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군중 때문에 그를 안으로 들일 길이 없어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 내고, 평상에 누인 그 환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 보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루카 5,18-20)”

 

이 이야기에 나오는 중풍 병자는 ‘몸의 병’을 고치는 일도 원했겠지만,

‘죄를 용서받는 것’을 더 간절하게 원했다고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도 그의 죄를 용서하는 일이

더 급하고 더 중요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나는 너의 죄를 용서한다.”(“나는 너를 죄에서 구원한다.”) 라는 선언입니다.

이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그 병자가 이미 회개했음을

인정하신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그들의 믿음’이라는 말에서 ‘그들’이라는 말은,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과 그 병자를 모두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이라는 말은, 그들 모두가 예수님을 믿었고, 회개했고,

용서받기를 원하고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그렇다면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라는 말씀은,

중풍 병자뿐만 아니라 ‘그들’ 모두에게 하신 말씀이 됩니다.

 

(그들이 지붕으로 올라가고, 기와를 벗겨 내고, 환자를 평상에 누인 채

예수님 앞으로 내려 보낸 일은, 그 어떤 난관에도 굴하지 않을 정도로

그들 모두가 치유와 용서와 구원을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단순히 바라기만 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희망을 이루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행동으로 노력하는 것이 진정한 희망입니다.)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라는

예수님 말씀을 “나는 너를 죄에서 구원한다.”로 바로 알아들었고,

그래서 이 말씀에 대해서 의문을 품게 됩니다(루카 5,21).

하느님만이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기 때문에(하느님만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너를 죄에서 구원한다.” 라는 말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이라는 그들의 생각은(루카 5,21),

생각 자체로는 틀린 생각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라는 것을 믿지 않고서

그렇게 생각한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생각은 틀린 생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루카 5,22-24).”

여기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라는 말씀은,

“죄를 용서하는 일(사람을 죄에서 구원하는 일)”과 “중풍을 고쳐 주는 일”은

둘 다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당시에 중풍은 사람의 힘으로는 고칠 수 없는,

즉 하느님의 권능으로만 고칠 수 있는 불치병이었습니다.)

 

예수님 말씀의 표현만 보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당신의 권한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 그 병자의 중풍을 고쳐 주신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그것은 아니고, 그 병자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과 그의 몸을 고쳐 주는 일은 모두

처음부터 예수님께서 작정하신 일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라는 말씀은,

“너희가 알게 될 것이다.”로 해석됩니다.

(이 이야기에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문은 ‘상황 설정’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 때문에 중풍을 고쳐 주신 것은 아니고, 중풍을 고쳐 주시는 것을

본 사람들이 그 권능을 통해서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권한을

깨닫게 되고 믿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올바른 표현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마디 말씀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 주시고,

한 마디 말씀만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렸던 두 죄수 가운데 한 사람의 경우가

좋은 예입니다(루카 23,42-43).

예수님의 한 마디 말씀만으로 그 죄수는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갔다고(구원받았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죄수의 이야기에서 놓치면 안 되는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 죄수가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아무런 자격도 갖추지 않고서

‘무임승차’ 하듯이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 죄수는 분명히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했고(루카 23,41),

예수님께 구원을 간청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구원받기에 합당한 회개를 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죄수 모두에게 구원을 주셨지만,

오른쪽 죄수만 회개해서 그 구원을 받았고, 왼쪽 죄수는 회개하기를 거부함으로써

구원을 주시는데도 받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안 받아서 못 받은 것입니다.)


복음: 루카 5,17-26: 지붕을 벗기고 중풍 병자를 예수님 앞에

-조욱현신부-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이웃 사랑에 대한 감동적인 모습을 보고 있다. 중풍 병자는 주위의 사람들의 믿음과 노력으로, 혹은 동료들의 기도와 희생 때문에 예수께 인도되었고, 은총을 받는다. 모든 병자와 죄인들에게는 그를 주님께 데리고 갈 중재자가 필요함을 말해 준다.

 

예수께서는 그 중풍 병자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그 환자를 침상에 달아 당신 앞으로 내려보낸 그들의 믿음을, 즉 그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병자를 치유해 주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20절) 하신다. 예수님은 그 환자의 영을 먼저 고쳐주신다. 그냥 걷게 되면 다시 죄를 짓게 되기 때문이다. 하느님이신 그분은 그의 영혼의 병을 먼저 고치신다.

 

그러나 그 옆에 있던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께서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수군거린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21절) 예수께서 어떤 분인지도 모르고 예수님을 단죄하며 판단하고 있다. 이 판단이 결국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다. 우리도 많은 경우에 나의 이웃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서 나의 잣대로 재고 판단하고 단죄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그러한 마음을 보신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질문을 던지신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에 걸린 이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23-24절) 예수께서는 여기서 죄를 용서하는 것과 일어나 걸으라는 명령 중 어느 것이 더 쉬운 것이냐고 물어보시는 것이 아니다. 두 행위 모두가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며, 그것은 오로지 하느님께만 가능한 일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을 예수께서는 중풍 병자를 치유하심으로써 밝혀주고 계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적을 보았으면서도 그분이 누구신지를 알아보려 하지 않고 그분을 죽이려고 하는 유다의 지도자들이 있었고, 군중들은 그 기적을 보고 두려움에 싸이지만, 하느님을 찬양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26절) 한다. 여기서 오늘이란 루카가 구원의 미래성이 아닌 현재성을 강조하는 의미이다. 지상에 살아가면서 우리는 구원을 체험하고 그 구원을 누려야 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이어야 한다.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예수께 갔던 친구들의 희생으로 치유를 받을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 자신도 받은 만큼 남을 위해 기도하고 희생할 수 있는 자세를 갖고 살아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신앙의 참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루카 5, 26)

-한상우신부-

우리의 오늘은
어떠한가?

이웃과
이웃사이에

필요한
믿음이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필요한 믿음이다.

믿음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가르쳐준다.

사람을 위한
가장 존귀한
일이 바로
믿음이다.

우리의 믿음도
병들 때가 있다.

믿음이 병들면
믿음으로
풀어야 한다.

믿음은 주님의
것이다.

믿음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기도하는 간절한
마음에 있다.

좌절하고
상처입은 이들이
주님을 만나도록
도와주는 데
깊은 믿음의
의미가 있다.

믿음의 가치는
오늘의 의미이다.

믿음으로
오늘을
성찰하게 된다.

믿음은 우리의
인격으로
실천하는 오늘에
참된 의미가 있다.

새날이 밝아온다.
같이 살아가며
함께하는 믿음이
필요한 시간이다.

믿음이 중심이
되어야 할
우리의 관계이다.

병든 이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듯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하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믿음에 따른
삶을 오늘도
산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이고
실천이다.

우리의
믿음과 실천이
누군가에게는
신기한 오늘이
되게할 것이다.

나와 너를
이어주는
믿음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구원과 찬양의 연관성을 보여 주십니다.

오늘 복음 대목에는 여러 관전 포인트가 숨어 있습니다. 지붕까지 올라가 병자를 예수님 앞에 내려보낸 이웃들의 헌신과 믿음, 용서의 권한, 치유와 용서의 연관성,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의 의심 등등 그런데 오늘 말씀은 제게 치유된 이의 태도를 더 확대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루카 5,20)

당시 병을 죄에 대한 하느님의 징벌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병에 걸린 것도 힘든데, 거기에 더해 죄인이라는 주홍글씨까지 떠안아야 했지요. 환자에게는 병으로 인한 고통에 부끄러움이라는 가중처벌까지 주어진 것이니 참 안타깝지요.

중풍에 걸려 고통 받던 그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용서받았다."는 예수님 말씀이 참 놀랍고 감사했을 터입니다. 죄를 용서받음으로써 원래의 건강하고 온전한 상태를 회복할 수 있다는 희망이 마음 속에서 일기 시작합니다. 이 희망의 실현은 그리 머지 않은 듯 보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해 주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루카 5,24)

기대에 찬 그의 앞에서 잠시 신학적 논쟁이 오갑니다. 소위 배운 이들, 제도와 학식으로 무장한 전문가들의 불편한 마음을 예수님께서 알아차리신 것입니다. 아는 것이 오히려 병인듯 하네요. 하지만 병자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자신의 죄가 사해진다면 곧 이 지긋지긋한 병마도 떨어지게 될 것이니까요. 그런 일은 하느님의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일이니,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분을 그저 믿으면 됩니다. 

"그는 그들 앞에서 즉시 일어나 자기가 누워 있던 것을 들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돌아갔다."(루카 5,25)

그는 죄의 용서와 육신의 치유, 모든 것을 얻습니다. 예수님이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경계의 대상이 되기는 했지만 그분은 별로 개의치 않으시는 듯 보입니다.

"하느님을 찬양하며"
치유된 이가 집으로 돌아가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하느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어나 평상을 들고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지요. 찬양은 명령한다고 튀어나오는 태도가 아닙니다. 감사와 찬미가 내면에서 솟구쳐 오를 때 흘러나오는 기도가 찬양입니다.

한 영혼이 구원받았음을 확신할 때, 누가 권하지 않다도 기쁨에 찬 찬양이 나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이 기도를 무척 좋아하십니다. '내 마음을, 내 사랑을 네가 알아들었구나. 용서와 구원을 깨달았구나.' 하시며 어린아이처럼 흡족해하실 겁니다.

제1독서인 이사야서의 대목 안에는 기쁨과 즐거움, 환호와 환성이 가득합니다. 구원의 날, 모든 피조물이 주님 앞에서 흥겨워하며 한껏 행복을 누리리라는 예언입니다. 말씀을 읽고 듣는 우리의 입꼬리까지 살며시 올라갈 정도로 생기와 축복이 넘치는 광경이지요.

"구원받은 이들만 그곳을 걸어가고, 주님께서 해방시키신 이들만 그리로 돌아오리라."(이사 35,9)

온갖 질병과 장애로 고통 받던 이들이 치유되고, 사막과 광야는 꽃을 피웁니다. 무너져가던 이들이 힘을 얻고 해를 끼치던  모든 것은 사라집니다.

그런데 "거룩한 길"
(이사 35,8)에는 구원받은 이들과 해방된 이들만 들어서서 걷는다고 하십니다. 육신의 치유와 생명이 구원으로까지 이어진 이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빈곤과 억압에서 벗어났다고, 곤란한 지경에서 빠져나왔다고, 앓던 질병이 떨어져 나갔다고 모두가 다 구원자 하느님을 떠올리며 감사와 찬양을 올리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물리적이고 환경적인 곤란의 해소가 구원이 되려면, 곧 주님의 거룩한 길에 들어서려면 이 일을 베푸신 주권자 하느님을 알아보고 그분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게 첫째입니다. 이 감사와 찬양은 하느님께 이득이 되는 게 아니라, 바치는 이에게 구원을 각인시켜 주지요.

그래서 구원받은 이는 찬양을 멈추지 않고, 찬양하는 이는 구원받은 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찬양은 강요한다고 나오는 게 아니지만, 구원은 찬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오늘 치유받은 중풍병자처럼, 신기한 일을 보고 놀란 군중처럼 말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주님께서는 우리가 앓는 내외적 고통과 결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고 싶어하십니다. 문제는 이를 구원으로 연결시키는 우리의 능력이지요. '나는 구원받은 존재인가?' 의문이 든다면, 내가 감사하고 찬양하는 사람인지를 성찰해 보면 좋을 듯합니다. 어떤 처지에서든 감사하고 찬양하는 능력이 출중한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구원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나는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고 경탄하며 하느님을 찬양하는 하루 되시길 축원합니다. 

내가 진정 굳세어져야 할 것은?

-김찬선신부-


오늘 이사야서는 마음이 불안한 이들에게 이렇게 말하라고 합니다.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그분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불안하다는 것은 안전과 안정이 위태로운 상황을 말함입니다.

불안하다는 것은 지금 안전하지 않고 불안정하다는 말입니다.

 

지금 담벼락에 금이 가 있어 언제 집이 무너질지 모를 때 불안하고,

지금 암 투병 중인데 언제 죽을지 모를 때 불안합니다.

그리고 내가 죽게 될까 봐 두렵습니다.

 

불안이라는 것이 이런 것인데 오늘 주님께서는 불안해하는 사람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굳세어져서 우리의 하느님을 보라고 합니다.

 

이것은 마치 칼을 들고 나를 죽이려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을 보지 말고 하느님을 보라는 말과 같습니다.

헌데 이런 실제 상황에서 사람을 보지 않고 하느님을 보는 게 가능할까요?

 

인간적으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대단한 사람이나

칼 든 사람을 제압할 힘을 지닌 사람은 혹 자기를 죽이려는 자를

크게 두려워하지 않고 그래서 불안해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겁니다.

 

실제로 제가 존경하는 수사님은 그런 모습을 보여주신 적이 있습니다.

옛날 제가 결핵환자들과 자활촌을 하기 위해 시골에 갔을 때

같이 간 환자 중에 한 분이 하루는 기도하고 있는 저희 방에

칼을 들고 들어와 저를 죽이겠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 자매님이 다른 분들과 우리 시설에 격려차 오셨는데

공교롭게도 그 자매님과 우리 형제 두 분 다 64일 기도 끝에 만난 겁니다.

 

그리고 우리 형제님께서는 여자를 만나게 해달라는 기도가 끝나는 날

그 자매님을 만났으니 하느님께서 짝지워주신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그 자매님도 순진하게 그 말을 믿고 당장 결혼해주겠다고 한 것인데

제가 반대하고 나서니 그 형제님이 저를 죽이겠다고 온 것입니다.

 

그때 같이 기도하시던 수사님이 큰 소리로 지금 기도 중이니 썩 물러가라고

야단치셨고, 그 형제님은 놀라 돌아갔는데 그때 이후 저는 저도 수사님처럼

그렇게 담대할 수 있을지,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도 오늘 이사야 말씀처럼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 때문에 담대할 수 있을지 생각게 되었습니다.

 

아무튼, 이런 실제 상황에서 하느님을 볼지, 사람을 볼지는 우리의 선택인데

오늘 이사야서는 굳세어져서 인간을 두려워 말고 하느님을 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앞서 봤듯이 인간을 두려워 하지 않고 우습게 보게 하는 것은

인간적인 굳셈으로도 가능할 수 있지만 그 상황에서 하느님을 보는 것은

인간적인 굳셈만으로는 불가능하고 오직 신앙적인 굳셈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는 말씀처럼 대림절은 오시는 주님을 볼 때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는 말씀처럼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 수 있는 것은 주님께 대한 굳센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사야서의 "굳세어져라"는 고작 체력이나 마음이나 의지가

굳세어지라는 말씀이 아니라 믿음이 굳세어지라는 말씀인데

오늘 복음에서 그 많은 사람들의 눈총 속에서도 지붕을 뚫고 환자를

내려보내 치유받게 한 협력자들은 이런 굳센 믿음의 본보기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12월 10일 대림 제2주간 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