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12월 4일 대림 제1주간 금요일

Margaret K 2020. 12. 3. 06:52

2020년 12월 4 대림 제1주간 금요일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이르셨다.

“너희가 믿은 대로 되어라.”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마태오 9,27-31)


Then he touched their eyes and said,
“Let it be done for you according to your faith.”

And their eyes were opene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기석신부-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이사 1,1)는 하느님께서 불어넣어 주신 영감으로 현실을 보고, 하느님께서 명하신 대로 그 현실을 말하는 예언자였습니다. 어제 독서의 묵시록 부분(이사 24―27장)에 이어, 이사야 예언서 28―33장은 불행 선언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신탁입니다. 비록 “불행하여라.”(28,1)라는 저주로 시작되지만 구원에 관한 약속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런 가운데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는 하느님의 구원에 관한 약속을 세 단계로 묘사합니다. 먼저 레바논의 분명한 변화를 언급한 뒤, 사람의 시각과 청각에서도 변화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마지막 단계에서 이사야는 악의 종말을 선언합니다.
이처럼 이사야가 이미 그날이 올 것이라고 말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로서 당신께서 지니신 변화의 힘을 사람들이 과연 신뢰하는지를 확인하고자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자비를 베풀어 달라’ 하고 외친 눈먼 두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부르며 메시아이심을 고백한 눈먼 이들은 “예, 주님!”이라고 응답합니다.
그렇습니다. 치유의 기적에 꼭 필요한 것은 하느님과 그분의 힘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성탄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이 대림 시기에 “임마누엘”(마태 1,23)께 드릴 찬미는 눈먼 두 사람의 신앙 고백을 넘어 화답송의 시편과 같아야 합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제빵을 배우는 청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빵을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대로 빵을 먹지 않습니다. 심지어 자기 생일 케이크도 먹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이 청년에게 누군가가 묻습니다.

“너 빵 싫어하잖아. 그런데 빵을 만들어?”

이런 질문을 아마도 많이 받았나 봅니다. 청년은 그냥 시큰둥하게 대답합니다.

“안 좋아해도 할 수 있는 일은 많아요.”

우리는 안 좋아하면 못한다고 단정 짓곤 합니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저 역시 책 읽고 글 쓰는 것에 관심이 전혀 없었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책을 많이 읽고 또 많은 글을 쓰고 있습니다. 안 좋아했지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다 보면 좋아질 수도 있습니다. 하긴 누가 이런 말도 하더군요.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은 애초에 다르다.’

아무튼 많은 이가 한쪽으로만 판단하고 단정 짓습니다. 이 과정 안에서 의외의 결과를 늘 만나게 됩니다. 오히려 반대 방향에서 해결책이 나올 때도 얼마나 많습니까? 인간이 얼마나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지 못하는 자신을 믿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그보다 자신을 더 좋은 쪽으로 변화시켜줄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은 어떨까요? 이런 믿음을 통해, 하지 못하는 자신에서 벗어나 또 다른 나를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께서는 믿음에 대해 강조하십니다. 눈먼 사람 둘이 예수님을 따라오면서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청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왜 치유를 받아야 하느냐?”라고 묻지 않으십니다. “너희가 치유 받으면 뭐가 좋은데?”라고도 묻지 않으십니다. 그저 이렇게 물어보시지요.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믿음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말씀입니다. 이 믿음에 대한 물음에 “예, 주님!”이라고 자신 있게 대답하자, 주님께서는 이렇게만 말씀하실 뿐이었습니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주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신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이 믿음만 있으면 불가능한 것도 가능한 것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 못하는 부족한 ‘나’라는 존재에서 벗어나 또 다른 나를 만나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완벽함이란 더 이상 보탤 것이 남아 있지 않을 때가 아니라, 더 이상 뺄 것이 없을 때 완성된다(생텍쥐페리).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

신학생 때 신부가 되면 이 몸이 부서질 정도로 정말 열심히 살겠다는 다짐을 많이 했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저만 했을까요? 당시 제 동창들과 이런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습니다.

“내가 신부가 되면 이렇게 살 거야.”라고 말했고, 모두가 이대로 실천했다면 이 땅에 성인 신부가 엄청나게 많이 나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쉽고 편한 것만을 찾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처음으로 본당신부가 되었을 때가 생각납니다. 신학생 때 그렇게 되고 싶었던 본당신부였고 그래서 나름 정말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미사 대수도 늘리고, 고해성사도 하루도 빠짐없이 30분 이상 주었습니다. 성사 활동에 충실했고, 그러면서도 외부 특강과 방송 그리고 책도 출판했습니다. 이런 저를 향해 다른 신부들은 어떻게 말했을까요?

“너 그렇게 살면 후임 신부는 어떻게 살라는 거니? 그 성당에 평생 살 것도 아닌데 적당히 살아.”

신부 되기 전에는 분명히 열심히 살라는 말을 선배 신부님들께 들었는데, 이제는 적당히 살라고 합니다. 무엇이 맞을까요? 치열할 정도로 열심히 사신 예수님, 왜 이런 모범을 보이셨을까요? 우리가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당연한 칭찬도 받지 마라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눈먼 사람 둘을 치유해주시는 기적 이야기입니다. 눈먼 사람 둘은 영적으로는 믿음의 눈을 지닌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시자 이렇게 소리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다윗의 자손”은 메시아, 혹은 왕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비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에 응답해 주십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단단히 이르십니다.

“아무도 이 일을 알지 못하게 조심하여라.”

도대체 다윗의 자손이 당신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일이 알려지는 것이 무엇이 문제기에 이렇게 단단히 함구령을 내리시는 것일까요? 분명 그 함구함도 사랑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사랑은 무엇일까요? 상대에게 들어 높임을 받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들어 높이는 것입니다. 내가 상대에게 과분한 사람이라 느낄 때 사랑은 그 순간에 끝장납니다. 사랑은 겸손과 단짝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상대가 나에게 과분한 사람이라는 시각을 잃지 않기 위한 쉼 없는 싸움입니다.

      영화 ‘러브 & 드럭스’(2010)는 제약회사 말단 직원과 어여쁜 한 여인과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제약회사 말단 직원인 남자 주인공은 점점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여 본사 이사까지 노리는 위치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식당 아르바이트하는 여인은 파킨슨병으로 몸이 점점 굳어갑니다. 여자는 자신이 그 남자에게 맞지 않음을 깨달아갑니다. 남자도 약을 파는 사람이지만 자신의 여자친구 하나 고쳐주지 못하는 것에 피폐하여 갑니다. 그렇게 여자는 자신 때문에 망가지는 남자를 볼 수 없어 떠나고, 남자도 그 이별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입니다.

 

      본사로 가기 위해 이사를 해야 하는 날, 남자는 처음 여자와 사귈 때의 동영상들을 보며 생각에 잠깁니다. 지금 떠나면 영영 그녀와의 행복한 시절은 오지 않습니다. 남자는 버스를 타고 가는 여자를 잡기 위해 차를 몰고 갑니다. 버스를 세우고 그녀에게 고백합니다. 그녀가 오히려 자신에게 과분한 존재라고.

 

      이렇게 사랑이란 상대가 자신에게 과분한 존재임을 잊지 않으려는 노력의 결과물일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상대가 나를 칭찬하고 들어 높이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무리 내가 상대의 발을 닦아주려고 해도 상대가 나의 발을 닦는 분위기에서는 그러기 힘이 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을 메시아로, 또 당신을 왕으로 떠벌리려는 두 사람을 말리는 것은 사람들이 당신에게 그런 모습으로 다가오기를 원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발을 씻어주러 오셨습니다.

 

      하지만 메시아가 메시아로서 대접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우리는 그분을 메시아로, 왕으로, 하느님으로 찬미해야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분이 당신 자신을 그렇게 하라고 하신다면 사랑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당신 영광을 위해 무언가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과 이웃을 높이지 못하게 됩니다. 물론 “그들은 나가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그 지방에 두루 퍼뜨렸다”라고 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받을 영광은 받으십니다. 하지만 내가 ‘나는 그리스도다!’라고 하는 것과 “당신들이 나를 그리스도라 인정하시오!”라고 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이미 그리스도라 믿는 사람은 자신의 열등감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으로부터 그런 영광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어 자신을 열등하게 여기는 사람만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추구합니다. 우리가 노력해야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알아주느냐가 아니라 내가 다른 사람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아야 하느냐입니다.

 

      김하종 신부님이 가난한 이들에게 몸을 바치기로 한 하나의 전환점이 있습니다. 그분의 책 『순간의 두려움 매일의 기적』에서 직접 인용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는 요즘처럼 날이 좋은 1992 가을에 찾아왔다. 당시 나는 성남 중원구 상대원동에서 빈민 사목을 담당하고 있었다. 독거노인들과 장애인들을 방문하여 돕는 것이 내 담당이었다. 어느 날 생활이 어려운 장애인 한 분이 사는 집의 주소를 알게 되었다. 종이에 적힌 주소를 찾아 도착한 곳에는 아주 오래되고 낡은 집이 있었다. 어둡고 곰팡내가 가득한 지하로 내려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문 열려 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창문도 없는 어두운 방에 흐릿한 전등 하나만이 보일 뿐이었다. 너무 어둡고 덥고 냄새가 나서 몇 초 동안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고 나서 보니 방바닥에 50대로 보이는 아저씨가 누워 있었다.

      아저씨 옆에 앉아 대화를 나누었다. 아저씨는 20대 때 사고로 크게 다쳐 하반신이 마비되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30여 년을 이 지하에서 살고 있었다고. 식사는 어떻게 하는지 물었더니, ‘옆집 사람들이 기억해서 주면 먹고 아니면 굶어요’라고 했다. 당신 한국의 사회복지는 많이 발전하지 못해서, 이런 분들은 도움의 사각지대에 놓여있었다. 30여 년 동안 혼자서 그렇게 살아온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 안 좋았다. 뭐든 해야 할 것 같아서 ‘아저씨,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고 했더니, 방을 정리해달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방에 있지도 않고 있다고 해도 갈 수도 없는 화장실을 대신한 아저씨의 요강을 정리하고, 방 청소와 설거지를 했다. 그 후 다시 이야기하기 위해 바닥에 앉았다.

 

      그때 갑자기 아저씨를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제가 안아드려도 될까요?’라고 했고, 아저씨는 흔쾌히 ‘네, 신부님. 좋습니다.’라고 했다. 그런데 아저씨를 안는 순간, 코를 찌르는 독한 냄새에 구역질이 났다. 동시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화와 기쁨이 느껴졌다. 그리고 한 음성이 들렸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이 음성이 예수님의 메시지임을 확신했다. 이 음성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 아니면 나의 상상이나 환청인지는 아직 잘 모른다. 그러나 그날부터 특별히 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일하기 시작했다. 확실한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된 것이다.

      안나의 집을 찾아오는 사랑하는 친구들 한 명 한 명은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상처’라고 믿는다. 다시 말해 나는 매일 예수님의 상처를 모시고 사는 것이다. 그렇기에 노숙인 친구들을 볼 때마다 힘들지 않고 오히려 행복하고 기쁘다. 또한, 오늘도 변함없이 예수님의 상처를 모실 수 있게 해주심에 감사드린다.”

 

      저도 노숙인 무료급식 처에서 봉사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매우 힘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들에게 무언가 해주고 있다고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때가 소경이었습니다.

 

우리는 ‘내가 누구인가?’를 넘어서 ‘저들이 누구인가?’로 가야 합니다. 그들이 모두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상처로 보일 때 그들에게서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영광스럽게 하는 데 전념하게 됩니다. 이것이 사랑이 시작되는 터닝포인트입니다.

      사랑은 누가 먼저 발을 씻겨주어야 하는 사람인지에 대한 싸움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면에서 당연한 당신의 영광을 추구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항상 모든 이들을 아버지처럼 대하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아무리 당연한 칭찬이라도 받지 않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당연한 칭찬이라도 받는 것을 즐기면 사랑을 위한 경쟁에서 먼저 패배하게 됩니다.

 

-조재형신부-


라디오와 친숙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밤을 잊은 그대에게별이 빛나는 밤에밤의 플랫폼영시의 다이얼두시의 데이트이브의 연가영화 음악실이 생각납니다대부분의 프로그램은 60년대와 70년대에 시작되었습니다음악 프로그램이 시작되면서 시그널 음악이 흘러나왔습니다대부분은 잔잔한 멜로디의 서정적인 음악이었습니다늦은 밤에 시작되는 프로가 많았기 때문입니다밤에 근무하는 직장인들늦은 밤에 공부하는 학생밤을 잊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프로였습니다아직 텔레비전이 익숙하지 않았던 시절이었습니다저는 밤의 플랫폼에 나오는 이사도라라는 음악이 좋았습니다진행자의 따뜻한 목소리도 좋았습니다그런가하면 영시의 다이얼에서는 ‘In the yeat 2525'라는 음악이 흘러나왔습니다경쾌하면서 가슴이 뛰는 음악이었습니다이사도라가 애잔하다면 2525년에는 신비로웠습니다시간이 되시면 두 음악을 들어보셔도 좋습니다.

 

오늘은 ‘2525이라는 노래의 가사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Zager와 Evans가 1968년도에 발표한 음악입니다.

“2525년에 인류가 아직 살아있다면 알게 되겠지요. 3535에 인류는 더 이상 거짓과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을 것입니다사고와 말과 행동이 그날 먹은 알약에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4545년에는 이도 필요 없고눈도 필요 없을 것입니다먹지도 않고보지도 않을 것입니다. 5555년에는 팔도다리도 필요 없을 것입니다기계다 다 할 것입니다. 6565년에는 남편도 아내도 필요 없을 것입니다아이는 유리관에서 얻을 것입니다. 7510년에는 하느님께서 다시 오신다면 인간의 모습을 볼 것입니다. 8510년에는 하느님께서 과거의 인간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말 할 것입니다. 9595년에도 인간이 계속 살고 있을지 궁금합니다지구의 혜택을 인간이 모두 착취하고되돌려 준 것은 없습니다서기 10,000년이 되면 인간은 수십억의 눈물을 흘리겠지요인간의 지배는 끝나고수없이 반짝이는 별들이 마치 어제의 일처럼 느껴지겠지요.”

 

2,500년 전에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날에는 귀먹은 이들도 책에 적힌 말을 듣고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겸손한 이들은 주님 안에서 기쁨에 기쁨을 더하고 사람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포악한 자가 없어지고 빈정대는 자가 사라지며 죄지을 기회를 엿보는 자들이 모두 잘려 나가겠기 때문이다.” 과학과 기술이 발달한 현대의 사람이 암울한 미래를 노래했다면 먼 옛날 예언자는 희망의 미래를 이야기하였습니다이사야 예언자가 살던 시대는 시련과 고난의 삶이 계속되었습니다이스라엘 백성은 강대국의 침략으로 나라를 빼앗겼습니다정든 고향과 가족들을 떠나서 낯선 곳으로 유배를 가야 했습니다그럼에도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었습니다하느님께서는 겸손한 사람들을 높이신다고 합니다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신다고 합니다권세 있는 자를 자리에서 내치신다고 합니다높은 산은 깎여지고깊은 골짜기는 메워진다고 합니다이사야 예언자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신앙의 눈을 뜨라고 하십니다핸드폰의 기능을 잘 몰라도음악을 잘 못해도운동을 잘 못해도 우리는 모두 신앙의 눈을 뜰 수 있습니다신앙의 눈을 뜨면 새로운 것들이 보일 거라고 하십니다신앙의 눈을 뜨게 되면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습니다고통 중에 인내를 가질 수 있습니다어둠 속에서도 빛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기다림은 지루함이 아니라 설렘이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성탄은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인간은 하느님을 닮은 모상으로서 존엄하고소중한 권리가 있다고 합니다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이고하느님의 선물로 이 세상에 왔지만하느님의 집인 천국으로 가는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사람은 하느님을 알고하느님을 믿어서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우리가 주님의 성탄을 준비하는 것은 바로 이 세상에서 생명의 문화를 알고생명은 하느님의 선물임을 좀 더 깊이 자각하는 것입니다. 

 

산산조각난 내 인생의 조각들을 하나 하나 주워 모으셔서, 찬란한 명품으로 재탄생시켜주시는 예수님!

 -양승국신부-

 

한 고마운 후원자께서 존경하는 정호승 시인의 신간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비채)를 보내주셔서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60여편의 주옥같은 시와 산문이 어우러진 참으로 매력적인 책입니다.

  

정호승 선생님께서는 스물 세 살에 등단하셔서 지금까지 총 13권의 시집을 통해 천 여편의 시를 쓰고 발표하셨다는데, 그중 당신께서 늘 가슴에 품고 다니시는 최애시(最愛詩)가 한편 있답니다. 그 시의 제목은 ‘산산조각’입니다.

  

룸비니에서 사온

흙으로 만든 부처님이

마룻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목은 목대로 발가락은 발가락대로

산산조각이 나

얼른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꿇고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순간접착제를 꺼내 붙였다.

그때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불쌍한 내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주시면서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지

  

오늘 우리가 봉독하는 복음서에도 인생이 처참하게도 산산조각난 두 인생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눈먼 사람 둘이 따라온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시각 장애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혹독한 일이었습니다. 당시 의료 수준으로 회복이나 치유는 꿈도 꿀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당시 사회 분위기 상 시각 장애인들에 대한 배려나 복지 혜택은 언감생심이었습니다.

  

가족들도 나몰라라, 공동체도 그들을 소외시켰습니다. 더 억울한 일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시각 장애를 죄에 따른 벌로 여겼습니다. 앞을 못보는 불편함에 죄인 취급까지 받으니 그 삶이 얼마나 힘겨웠겠습니까? 한 마디로 두 사람의 삶은 산산조각 난 것입니다.

  

산산조각 났으니, 더 이상 내려설 곳도 없었습니다. 부끄러워하거나 체면 차릴 여유도 없었습니다. 치유자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들은 두 눈먼 사람은 남아있는 모든 에너지를 다 동원해서 크게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태오 복음 9장 27절)

  

이윽고 자비하신 예수님께서 산산조각난 두 사람의 인생을 측은지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셨습니다. 가엾은 마음이 든 예수님께서 산산조각난 두 사람 인생의 조각들을 하나 하나 주워모으셨습니다. 마침내 산산조각난 두 인생을 당신 뜨거운 사랑의 용광로 속에 넣으셔서, 찬란한 명품으로 재탄생시키셨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저 역시 산산조각난 인생일 뿐입니다. 주님 크신 은총 아니라면 단 한 순간도 제발로 서있을 수 없는 인생입니다. 그저 주님 자비만 바랄 뿐입니다. 주님 뜨거운 사랑만 기대할 뿐입니다. 아침이면 아침마다 크게 외쳐야겠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이영근신부-


오늘 <말씀전례>는 ‘보는 것’, 곧 ‘눈’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말합니다.

“그날에는~ 눈 먼 이들의 눈도 암흑과 어둠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이사 29,17)

 

<화답송>은 주님의 아름다움을 뵙고자 청하는 <시편>의 입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주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시편 27,4)

<복음 환호송> 역시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입니다.

“보라, 우리 주님 권능을 떨치며 오시어, 당신 종들의 눈을 밝혀주시리라.”(이사 40,10)

 

<복음>은 이러한 이사야의 예언과 시편작가의 간청이 이루어짐을 보여줍니다. 곧 예수님께서 구약에 제시된 메시아임임을 드러냅니다.

이는 ‘예수님을 믿는 눈먼 두 사람의 눈이 열려 보게 된 이야기’ 입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눈 먼 사람 둘이 따라와서 집 안에까지 따라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눈이 멀어 보지도 못하는 사람들이었는데도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볼 수는 없었어도 그분에 대해서 들을 수는 있었을 것입니다. 보지 못하면서도 들은 바를 믿었으니, 진정 복된 이들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은 보고도 믿지 못하는데, 보지 못하면서도 믿었으니 말입니다. 사실 그들은 이미 눈이 열린 이들이었던 것입니다. 곧 믿음의 눈이 열려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하셨으니, 그들은 진정 행복한 이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불신이요, 그분을 보게 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니, 진정 믿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이르셨습니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마태 9,29)

 

우리는 여기에서 믿는 것이 먼저인지, 보는 것이 먼저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눈 먼 이들은 보았기 때문에 믿게 된 것이 아니라, 믿었기 때문에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곧 그들은 믿었기에 눈이 열린 것이지, 눈이 열렸기에 믿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청한 바를 얻었기에 믿었던 것이 아니라, 먼저 믿음으로 청해서 청한 바를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눈을 열어 보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으십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루카 10,24)

 

하오니, 주님!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눈이 열려 당신을 알아보았듯이,

오늘 제 마음에 믿음의 눈을 열어주시어 당신을 뵈옵게 하소서!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마태 9,27)

 

주님!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보지 못하게 하는 불신의 암흑을 벗어나 보게 하소서.

먼저 믿고, 믿는 바를 청하게 하소서.

원하는 바를 믿은 것이 아니라, 믿는 바를 원하게 하소서.

믿음의 눈을 열어 보게 하소서.

보게 되어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보게 하소서. 아멘.

 

그들의 눈이 열렸다

 -반영억신부-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 꼭 이루고 싶은 소망이 있습니다.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만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생각지도 않게 소망이 이루어질 수도 있지만, 정성과 사랑을 쏟았을 때 더 큰 기쁨을 누리게 되고 보람을 차지하게 됩니다. 최선을 다했으면 그것으로 만족한 것입니다. 그것이 행복입니다. 그런데 자꾸만 다른 것과 비교하니까 있던 행복도 사라지고 맙니다.

  

어떤 눈먼 사람 둘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소망이 무엇이겠습니까? 눈을 뜨는 것입니다. 눈을 뜨려면 눈을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그들은 마침 길을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태9,27). 하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자비를 입어 눈이 열렸습니다. 그들에게는 눈을 뜨고자 하는 소망이 있었고, 그것을 이루어 주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믿음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써 하느님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믿음으로써 하느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매일의 묵상을 통하여 주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의 성장을 이루고 마침내 주님의 능력에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그림은 밀라노의 어떤 백작의 요청에 따라 3년 동안에 걸쳐 완성했다고 합니다. 그 그림은 예수님께서 중앙에 앉아 계시고 제자들이 양옆에 앉아서 함께 마지막 식사를 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처음 그림은 예수님께서 오른손에 잔을 들고 계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볼 수 있는 그림은 그렇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한 사연이 있습니다. 다빈치는 작품이 완성될 무렵에 친구에게 그림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대뜸 “다빈치, 여기 예수님께서 든 잔은 꼭 진짜 같은데!” 라고 말했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 다빈치는 그림을 수정하였답니다. 진짜같이 보이는 잔을 지워 버리고 예수님의 팔이 가만히 탁자 위에 올라가 있는 지금의 모습대로 말입니다. 그것은 그의 믿음이 그렇게 했습니다. 결코, 예수님보다 더 중요하게 드러나는 부분이 있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나이가 43살이었답니다. 저는 그동안 무엇을 했나 모르겠습니다.

  

신앙인이라고 하면서 우리의 삶은 예수님보다 더 중요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돈도 벌어야 하고요, 취미생활도 해야 하며, 분위기 좋은 곳에 가서 친구도 만나야 합니다. 때맞춰 여행도 해야 하고, 음료도 마셔야 하며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먹고, 마시고 즐겨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기도는 물론 미사도 소홀히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보다도 세상 것을 즐기고 찾고 있으니 어찌 보면 우리는 눈뜬장님입니다. 무늬만 신앙인입니다. 육적인 눈뿐 아니라 영적인 눈, 믿음의 눈을 떠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9,39). 보고 있다고 착각하는 눈을 어루만져 참으로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영적인 시력을 회복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눈먼 두 사람을 고치시다.

 -송영진신부-


메시아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인류는 ‘어둠 속에서’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구원의 길’을 몰라서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런 인류를 구원하려고 ‘빛이신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 4,16).”

(‘어둠’은 죽음과 멸망을 뜻하고, ‘빛’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에 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야 합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빛’에 관해서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빛이 너희 가운데에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빛이 너희 곁에 있는 동안에

걸어가거라. 그래서 어둠이 너희를 덮치지 못하게 하여라. 어둠 속을 걸어가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빛이 너희 곁에 있는 동안에 그 빛을 믿어,

빛의 자녀가 되어라(요한 12,35-36).”

지상에서의 인생은, ‘생명의 빛’을 얻기 위한 노력을 하라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시간입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또 그 시간이 언제 끝날지......?)

‘생명의 빛’을 얻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는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나중’이란 없습니다.

세속 일에만 정신이 팔려서 그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어둠 속’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라는 말씀은,

“멸망을 향해서 가는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는데 눈먼 사람 둘이 따라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집 안으로 들어가시자 그 눈먼 이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예, 주님!’ 하고 대답하였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이르셨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이 일을 알지 못하게 조심하여라.’ 하고 단단히 이르셨다. 그러나 그들은 나가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그 지방에 두루 퍼뜨렸다(마태 9,27-31).”

 

이 이야기의 시작 부분을 보면, 눈먼 사람들이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는데도 예수님께서 외면하시고 그냥 집으로 들어가신 것처럼 보이는데,

아마도 실제로는,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어떤 집으로 들어가시자,

눈먼 사람 둘이 따라 들어가면서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 것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말에는 자기들의 눈을 고쳐 달라는 뜻도 들어 있고,

‘새로운 인생을 살 기회’를 달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그들의 말을,

몇 푼의 돈을 구걸하는 말로만 생각할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그런 일’이라는 말은,

눈을 고쳐 주는 일과 새로운 인생을 주는 일을 모두 가리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너희는 믿느냐?” 라고 물으셨을까?

(예수님은 사람의 속을 꿰뚫어 보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을

아셨을 것이고, 또 그들이 믿었으니까 간청했다는 것도 아셨을 것입니다.)

“너희는 믿느냐?” 라는 질문은, 그들의 믿음을 몰라서 하신 질문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을 강화시키기 위한 질문이고,

자신들의 믿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게 만들기 위한 질문입니다.

믿음은 공개적으로 고백함으로써 더욱 강해집니다.

만일에, 고백하지 않고 믿음을 감춘다면,

그 믿음은 점점 약해지다가 결국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은 믿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라는 말씀은,

그들이 믿고 청한 것들을 당신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눈먼 사람 둘’을,

“구원받기를 갈망하지만, 어디로 가야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방황하는 사람들”에 대한 상징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또는 어떤 시련과 고난을 만나서 절망 상태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을 고쳐 주신 일은,

몸의 장애를 고쳐 주신 일이기도 하고,

새 인생을 살 기회를 주신 일이기도 하고,

구원의 길을 볼 수 있게 해 주신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 덕분에 눈을 고친 그들이 할 일은

‘구원의 길’을 걸어가는 ‘새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대신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각자 자신들이 스스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살다보면 어떤 위기를 만나서 눈앞이 캄캄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빛이 되어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여러 빛 가운데 하나이신 분이 아니라, ‘유일한 빛’이신 분입니다.)

 

이 이야기와는 정반대가 되는 이야기가, 즉 예수님을 거스르는 짓을 하다가

눈이 멀게 된 사람의 이야기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 총독은 바르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그리스 말로 마술사를 뜻하는 그 엘리마스는 총독이 믿지 못하게 막으려고 그들을

반대하고 나섰다. 그때에 바오로라고도 하는 사울이 성령으로 가득 차 그를

유심히 보며 말하였다. ‘온갖 사기와 온갖 기만으로 충만한 자, 악마의 자식,

모든 정의의 원수! 당신은 언제까지 주님의 바른길을 왜곡시킬 셈이오?

이제 보시오, 주님의 손이 당신 위에 놓여 있소. 당신은 눈이 멀어 한동안 해를

보지 못할 것이오.’ 그러자 즉시 짙은 어둠이 그를 덮쳐, 그는 사방을 더듬으며

자기 손을 잡아 이끌어 줄 사람을 찾았다. 그때에 그 광경을 본 총독은

주님의 가르침에 깊은 감동을 받아 믿게 되었다(사도 13,7-12).”

바오로 사도가 엘리마스의 눈을 멀게 만든 일은, 단순한 ‘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생명의 빛을 보는 것을 막는 것이 얼마나 악한 일인지를 깨달으라는,

또 그것을 깨달았다면 회개하라는 일종의 충격요법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엘리마스의 시력을 영구히 빼앗은 것이 아니라,

‘한동안’만 못 보게 만들었습니다.

그 ‘한동안’은 구원받기 위해서 노력하라고 ‘참회의 시간’으로 준 것입니다.)

 

복음: 마태 9,27-31: 두 소경의 눈을 보게 하시다.

-조욱현신부-


오늘 복음에서 소경 두 사람이 예수님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하고 청하였다. 예수께서는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하셨을 때, 그들은 “예, 주님!”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치유해 주셨다(27-30절). 이 소경들 치유의 기적은 하나의 “표징”으로서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앞에 “빛”을 필요로 함을 가르쳐주고 있다.

두 눈먼 사람들은 믿음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믿음이 없으므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아직 참된 빛, 곧 율법과 예언서가 예고한 하느님의 외아들을 볼 수 없었다. 이 두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자마자 시력을 되찾았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심을 믿으면 오류라는 눈멂이 사라지고 곧 참된 빛에 관한 지식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눈먼 이들이 외치는데 예수님께서는 얼른 청을 들어주시지 않고 물음을 던지신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데리고 가까운 집으로 가신다. 그리고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고쳐 주시며 아무에게도 일 일을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신다. 군중들에게서 칭송을 받는 것을 경계하시고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하신다. 두 사람은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듣기만 하고도 믿음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신들의 눈으로 이 기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눈멀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곧바로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들은 그때 일어난 일을 알리지 말라는 지시를 들었지만, 그 일을 알렸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곳에서 어떤 사람에게 “집으로 돌아가, 하느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을 다 이야기해 주어라.”(루카 8,39) 하셨다. 그것은 우리 자신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느님께만 영광을 바쳐야 한다는 것이다.

 

즉 소경들의 되찾은 시력은 우리가 항상 청해야 할 신앙의 빛을 의미한다. 우리 자신을 보면 그것을 만들어내지도 못하면서 너무나 쉽게 그 빛을 잃어버리고 잃어버린 줄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 빛은 우리가 청하고 받아들일 자세만 되어있다면 하늘로부터 끊임없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선물이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우리 인간의 역사 내에 오심의 신비를 거행하고 있다. 예수님의 이 ‘오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빛이 필요한 것이며, 이 신비를 이해할 수 있는 내적인 “빛=밝음”은 신앙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이 소경들의 치유 사화는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시고 우리 가운데 임하시는 그 신비를 이해하고 또한 우리의 삶 속에 그것을 체험할 수 있으려면 이 소경들이 예수님께 가지고 있었던 큰 믿음의 “빛”이 필요한 것이다.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마태 9, 28)

-한상우신부-

겨울의 맑고
차가운 바람이
마음을
어루만진다.

믿음의 영역에
속하는 마음의
시간이다.

올바른
믿음은 먼저
우리자신을
제대로
보게한다.

빛으로
다가오시는

믿음의
빛이시다.

아픔이
있는 자리에서
믿음은 희망이
된다.

믿음의 회복이
치유의 기쁨이
된다.

믿음은 성숙을
향해 나가야 한다.

믿음의 목적은
하느님의 자비를
간절히 구하는
은총이다.

믿음은
다시 보게되는
내면의 자유를
또한 새롭게
선사한다.

예수님을 통해
다시 보게되는
삶의 새로운
의미이다.

소외되고
단절된
우리자신이
하느님의 자비를
통해 우리의
참모습을 다시
보게된다.

보아야 할것을
제대로 볼 때
찬미와 기쁨으로

대립과 파괴
불안과 불편
왜곡과 분열은
믿음의 힘으로
해소될 것이다.

우리자신을
다시
보게 하시는
주님이시다.

믿음은 뜨거운
내적체험으로
우리를 이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제대로
보는 것이다.

참된 믿음은
다시 제대로
새롭게 보는
것임을 믿는
것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믿음의 힘을 보여 주십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가 믿느냐?"(마태 9,28)

눈 먼 사람 둘이 예수님을 따라오며 자비를 청합니다. 집 안으로 들어가신 예수님을 따라 들어가기까지 하는 걸 보면 절박하기 그지없어 보이지요.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으십니다. 치유야 예수님 혼자서도 얼마든지 이루실 수 있지만, 믿음은 그 치유를 끌어내는 진정성입니다. 
 

"예, 주님!"(마태 9,28)

그들 역시 단순하고 간결하지만 확고하게 답합니다. 그들이 그저 속는 셈 치고 한번 떠보기나 하려고 예수님께 따라붙은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지요.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들으면서 그분을 믿고 그분에게서 나오는 능력에 희망을 걸었습니다. 그래서 자비를 청하며 간절히 매달린 것이지요.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마태 9,29)

예수님은 그들의 닫힌 눈에 손을 대시며, 믿는 대로 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의지와 그들의 믿음이 만나 하느님의 모상이 회복되는 기적으로 이어집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입니다. 주님까지도 움직이니 말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이스라엘의 구원의 날을 이야기합니다.
 

"그날에는 귀먹은 이들도 책에 적힌 말을 듣고,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이사 29,18)

그날은 눈과 귀에 실제적으로 장애를 가진 이들이 치유되는 기쁨의 날이 되기도 하겠지만, 동시에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완고하고 우매한 백성이 회심하는 구원의 날이 되기도 할 것입니다. 눈이 열려 하느님을 알아보고, 귀가 열려 그분의 말씀을 듣는 자체가 곧 구원입니다.
 

"그들은 자기들 가운데에서 내 손의 작품인 자녀들을 보게 될 때, 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리라."(이사 29,23)

이기심과 경계심으로 가리워진 눈은 이웃의 본모습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들이 하느님의 작품이고 자녀이며 모상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지요. 모르니 함부로 이용하고 착취하고 소외시킵니다. 그러기에 타인을 도구화하거나 무시하는 이들은 아직 눈멀고 귀먹은 사람입니다. 

타인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 그가 볼 수 있는 사람인지, 들을 수 있는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이를 하느님의 자녀이고 작품이며 모상이라 보는 이는 모든 존재를 경외심으로 대하기 마련이니까요. 그리고 이런 시선을 가진 이들을 통해 이 땅에서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빛납니다. 서로에 대한 존중과 사랑으로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믿는 대로 되어라."
이 말씀은 희망도 주시지만 한편으로 두려움도 일으키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어느 면을 바라보고 있고, 또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 숙고해 보면 알 수 있지요. 믿는 대로 된다니, 우리의 믿음부터 성찰하고 정향해야 할 것 같습니다.

회의주의나 자포자기, 비아냥과 냉소는 믿음을 오염시키고 불순하게 만들 뿐 아니라 결과마저 그 지경이 되어 버리게 만들겠지요. 반면 순수한 신뢰와 희망, 단순한 의탁과 신의에서 우러나는 믿음은 그 열매를 그대로 맺을 것입니다. 그러니 믿는 바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질 것입니다.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태 9,27)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서, 우리의 눈을 열어달라고 간청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아직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완고함을 녹여 주시어, 세상 모든 이들 안에 계신 주님의 현존을 깨달을 수 있게 해 주십사고 청합시다. 우리의 눈이 열리고 귀가 트이는 만큼 우리는 서로의 고귀함을 알아보고 주님께 더 큰 찬미와 영광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아멘. 

주님 손의 작품인 우리들

 -김찬선신부-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이르셨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눈먼 이들이 보게 되는 오늘 복음인데

이 복음을 읽으면서 나는 눈이 멀쩡할까 돌아봤습니다.

물론 이 성찰은 육신의 눈이 멀쩡한지에 대한 것은 아니지요.

 

저의 육신의 눈은 물론 나이 먹으면서 시력이 떨어진 상태지만

그 까짓것은 크게 걱정할 것이 아니고 그저 불편한 정도이며,

그것 때문에 불행하지 않고 구원과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 비추어 우리가 성찰해야 할 것은

진정 봐야 할 것을 보는 눈이 있는지, 믿음의 눈은 있는지 그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눈먼 이들은 인간 예수 안에서 주님을 알아보고,

자기들의 눈을 뜨게 해줄 능력이 있는 분임을 알아봅니다.

그런데 예수가 한낱 인간이 아니고 주님이며 능력이 있는 분임을

알아보는 눈이 바로 믿음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고 물으시자

"예, 주님"이라고 그들이 답하는 것을 보면 믿음의 눈이 보게 한 것입니다.

 

저도 이 면에서는 눈이 멀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도 능력의 주님을 믿고, 실제로 제가 그 많은 일을

겁 없이 벌이는 것은 누차 말씀드렸듯이 이 믿음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제가 성찰이랄까 반성을 한 것은 능력의 주님께 대한

믿음의 눈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믿음의 눈입니다.

인간을 불신의 눈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 말입니다.

 

이런 성찰을 한 이유는 오늘 이사야서의 마지막 구절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들 가운데에서 내 손의 작품인 자녀들을 보게 될 때

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리라."

 

주님 손의 작품들인 인간.

 

이것은 이사야가 여러 번 얘기하는 것으로

지난 대림 1주일 독서에서도 얘기한 바 있지요.

"주님, 당신은 저희 아버지십니다. 저희는 진흙,

당신은 저희를 빚으신 분 저희는 모두 당신 손의 작품입니다."(이사 64,7)

 

인간에 대한 저의 눈은 신앙의 눈으로 보지 않을 때

<꼴 보기 싫어하는 눈>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문제는 보기 싫어하는 눈이 아니라

보기 싫다고 보지 않는 눈, <보기를 포기한 눈>입니다.

보기 싫은 것은 인간으로서 그래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더 문제는 싫다고 보지 않으려는 또는 않겠다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적으로도 문제이고 미성숙함입니다.

살아가면서 어떻게 보고싶은 것만 보고 삽니까?

 

그런데 더 문제는 신앙인이라고 하면서 꼴 보기 싫다고 하고,

꼴 보기 싫다며 보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작품인 인간을 꼴 보기 싫다는 것은

그가 하느님의 작품임을 알아보는 눈이 멀었거나

아무리 하느님 작품이어도 꼴 보기 싫다는 것 아닙니까?

 

인간을 믿지 못하는 것 이전에 하느님을 믿지 않거나

인간을 사랑치 않는 것 이전에 하느님을 사랑치 않는 겁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면 인간은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의 작품임을 믿고,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내 중심으로 인간을 거부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이 면에서 오락가락합니다.

형제를 꼴 보기 싫어하다가 하느님 손의 작품으로 보다가 하는 겁니다.

그래도 점점 나아지겠지요? 그럴 것이라고 저를 믿어줘야겠지요?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6년 12월 3일 토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마르코 16,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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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내가 누구인가?’를 넘어서 ‘저들이 누구인가?’로 가야 합니다. 그들이 모두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상처로 보일 때 그들에게서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영광스럽게 하는 데 전념하게 됩니다. 이것이 사랑이 시작되는 터닝포인트입니다.

      사랑은 누가 먼저 발을 씻겨주어야 하는 사람인지에 대한 싸움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면에서 당연한 당신의 영광을 추구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항상 모든 이들을 아버지처럼 대하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아무리 당연한 칭찬이라도 받지 않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당연한 칭찬이라도 받는 것을 즐기면 사랑을 위한 경쟁에서 먼저 패배하게 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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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