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12월 13일 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

Margaret K 2020. 12. 12. 06:59

2020년 12월 13일 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요한  1,6-8.19-28)

 

 He said:
“I am the voice of one crying out in the desert,
‘make straight the way of the Lord,’
as Isaiah the prophet sai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기석신부-


대림 시기의 세 번째 주일을 ‘가우다떼 주일’이라고 합니다. “기뻐하여라”라는 라틴어 단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오늘 미사 입당송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이 환호는 단식과 금육 또는 이와 유사한 신심 생활로 지금보다 회개의 시간을 더 길게 보냈던 예전부터 불리던 것입니다.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몸소 사람이 되시어 오신 주님을 맞이하려고 고행하던 교회가 더욱 힘을 내고자 기쁨의 주일을 마련하였던 것입니다.
대림 제3주일에는 이처럼 기쁨이 스며 있습니다. 이 기쁨의 근거는 오늘 복음에서 드러납니다.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라고 묻는 유다인들의 질문에 세례자 요한은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내 뒤에 오시는 분”께서는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 오실 때 어둠에 있던 사람들을 비추신 참빛으로, 사람들을 죄의 멍에에서 벗어나게 하신 분이십니다. 이분께서 곧 오신다는 희망이 기쁨의 참된 근거입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메시아의 출현을 알리며 구원의 기쁨을 선포합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이사야가 경험하는 기쁨과 예수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모두 하느님의 인간 구원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구원의 동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우리 삶의 기쁨의 근거를 참으로 깨닫는다면,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권고한 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사람의 고행을 통해 비춰지는 의지의 빛

-키엣 대주교-


세상의 빛을 보려면 물리적인 눈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빛은 그 빛을 본 증거자가 필요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바로 그리스도 빛의 증거자입니다.

그는 자신의 전 생애 동안 자신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증거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생애 대부분을 사막에서 은둔하며 살았습니다. 황량한 황야에서 고난을 견디는 삶이 얼마나 고단하겠습니까? 그럼에도 자신을 극복하려는 그 의지의 빛은 자신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희망을 밝혔습니다. 희망을 잃어버린 고단한 삶을 고귀하고 의미있는 삶으로 바꿔주는 것이 바로 미래에 대한 희망입니다. 

그는 참으로 겸손한 사람입니다. 자신은 위대한 엘리야도 예언자도 아니며 온 백성의 구원자도 아닌 그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이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을 그리스도로 오해하며 받들려는 영광을 거부하였고 허세가 아닌 진정한 고행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행동은 그의 증거를 더욱 밝게 빛나게 했고  그 빛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참된 빛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은 단지 주님이 오실 수 있는 길을 여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유일한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신을 희생했습니다. 자신을 따르던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떠났을 때 그는 자신의 임무를 완성했다고 만족해했습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세례자 요한은 가장 완벽한 증거자입니다. 밝은 빛으로 주님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은 어둠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그리스도를 알리기 위해 자신이라는 존재를 버려야 함을 알았습니다.

대림시기 우리는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불안 속에 맞이한 1월, 비대면으로 부활절 미사를 보던 그 때 우리는 성탄절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위기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지금이야말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고 주님을 기다려야 할 때입니다. 

우리 모두 세례자 요한이 되어야합니다. 열심히 나의 길만을 찾지 말고 주님의 길을 열어드려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나를 증명하기 전에 주님을 증거해 보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나의 길을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빛을 주실 것입니다.

주님, 저희가 세례자 요한을 본 받아 빛 가운데 살며 빛을 증거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성인 세례자 요한처럼 나도 주님을 증거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2. 성인 세례자 요한은 겸손한 빛의 증거자입니다. 과연 나도 주님을 위해 겸손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3. 주님을 증거하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오심을 기쁘게 기다리는 방법

-함승수신부-


사제들과 레위인들은 요한이 사제인 즈카르야의 아들임을 알고 있었는데 하느님의 놀라운 은총으로 태어난 그야말로 메시아라고 여겼던 듯합니다. 요한이 ‘메시아’로서 백성들을 ‘정화’하기 위해 세례를 베풀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을 꿰뚫고 있었던 요한은 서슴지 않고 분명한 어조로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엘리야’냐고 묻습니다.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말라 3,23)라는 예언대로, 요한이 세상 종말이 일어나기 전에 사람들을 회개시켜 파멸에 이르지 않도록 이끄는 그 ‘엘리야’인지를 물은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마지막으로 요한이 ‘그 예언자’인지를 묻습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동족들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신명 18,15)라고 모세가 예언한 그 ‘대 예언자’인지를 물은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번에도 아니라고 합니다.

그 대신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자신이 실천할 ‘소명’이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자신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맞이하여 구원받을 수 있도록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준비시키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고 밝힌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에게 질문하던 이들은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는 그 일을 해도 되는 ‘자격’을 먼저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하느님의 뜻을 열심히 따르는 행동 안에서 자신이 하느님께 받은 자격, 즉 ‘소명’이 드러난다고 여기는 요한의 사고방식을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이 ‘성경에 기록되어’ 합당한 자격을 갖춘 예언자도 아니면서 왜 제멋대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느냐고 따지나, 요한은 자신이 세례를 베푸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요한 1,26)

우리 곁에 ‘메시아’가 이미 오셔서 ‘우리가 모르는 모습으로’ 계시는데 우리 눈이 어두워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기에, 우리가 죄의 ‘어둠’에서 벗어나 ‘빛’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알아보도록 이끌어주려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비춰주시는 ‘진리의 빛’을 받아들이고,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라는 희망을 간직한 채 살아가면, 어려움과 고통이 닥치더라도 ‘언제나 기뻐하고 끊임없이 기도하며 모든 일에 감사하는’ 자세로 살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살기를 바라시기에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주신 것이지요.

호주의 젊은 시인 에린 핸슨이 쓴 ‘아닌 것’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당신의 나이는 당신이 아니다 당신이 입는 옷의 크기도 / 몸무게나 / 머리 색깔도 당신이 아니다 당신의 이름도 / 두 뺨의 보조개도 당신이 아니다 당신은 당신이 읽은 모든 책이고 / 당신이 하는 모든 말이다… 당신은 당신이 믿는 것들이고 /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며 당신 방에 걸린 사진들이고 / 당신이 꿈꾸는 미래이다 당신은 많은 아름다운 것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 당신이 잊은 것 같다 당신 아닌 그 모든 것들로 / 자신을 정의하기로 결정하는 순간에는”

‘하느님의 자녀’이며 ‘그리스도인’임을 결정하는 요소는 재산이나 사회적 지위가 아닙니다. 하느님을 닮은 그분의 ‘모상’으로 창조된 우리가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로 자신을 정의하려고 하면, 하느님께서 내 안에 심어주신 고유한 아름다움을, 내가 추구해야 할 고귀한 삶을 잃고 맙니다. 요한 세례자처럼, 하느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고유한 소명을 깨닫고 실천함으로써 내가 하느님께 사랑받는 자녀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충실히 실천하는 그분의 제자임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쁘게 기다리는 방법입니다.

 

가까이 오셨다

-김혜윤수녀-


이념과 원칙을 주입식으로 교육하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개혁을 완성할 수 없습니다. 체제와 낡은 통념, 시대적 착오를 전복시키는 힘은 사랑과 그로 인한 자발적 증언에서부터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이러한 힘을 혁명이라고 부르고 신앙의 영역에서는 구원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가장 정치적인 힘이며 사회적 영향력인 동시에 외부적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그 사랑이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주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는 것’(제1독서 참조)일 때, 그 사랑은 어떤 역량보다 강력하게 새로운 사회 질서를 세우게 됩니다. 대림 제3주의 전례 본문들은 이러한 기쁨과 희망으로 오시는 구원의 빛을 기다리며 환호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분의 오심으로 캄캄하고 숨 막히던 공간은 이제 밝은 빛 속에 날아다닐 듯 가볍게 호흡하고 생동하는 기쁨의 시대로 변하게 됩니다.

■ 복음의 맥락
대림 제3주는 ‘기쁨의 주일’이라고도 합니다. 기쁨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사제의 제의도 자색이 아닌 장미색(분홍)으로 대체되고, 제대 주변도 화려하게 꾸며집니다. 전례 중에 선포되는 본문들도 ‘기쁨’이라는 주제로 관통되어 있습니다. 입당송부터 “기뻐하여라. 거듭 말하니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여라. 주님이 가까이 오셨다.”라는 환호가 울려 퍼지고, 제1독서도 ‘메시아의 사명’을 언급하면서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한다”고 환호합니다. 화답송은 “내 영혼이 내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네”라는 성모님의 노래가 불려지고 제2독서 역시 기쁨을 품고 사는 것이 곧 하느님의 뜻임을 선언합니다. 이러한 기쁨은 구원자이신 분의 오심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빛이신 분이 오시기에 그토록 기쁠 수 있는 것입니다.

■ 기쁜 소식
요한복음서는 그리스도를 ‘빛’으로, 세례자 요한을 ‘그 빛에 대한 증언자’로 소개합니다.(요한 1,6-8) 대림 시기가 시작되면서 켜지기 시작한 대림초는 ‘빛’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데, 초를 하나씩 밝힘으로써 주님의 도착이 거의 임박했음을 알려줍니다. 특별히 요한은 사람들이 자신을 ‘빛’으로 착각할까봐 스스로의 신원을 “서슴지 않고”(20절) 고백합니다. 사제들과 레위인들이 ‘당신은 누구요?’하고 물었을 때 그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이어 엘리야도, 예언자도 아니라고 하면서 분명한 선을 긋습니다.(19-22절) 자신은 그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23절)라고 하는데 이때 ‘소리’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포네’이며, 특별히 ‘외치다’라는 그리스어 동사 ‘보아오’와 함께 사용됨으로써 어떠한 것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공표하기 위해 크게 지르는 소리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소리’에 대한 내용은, 바로 전에 언급된 부분(1,1-5)과 함께 읽을 때에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1,1-3) 요한복음서의 시작이기도 한 이 부분은 ‘말씀’에 대한 내용으로 되어 있으며, 요한은 ‘소리’이지만 그리스도는 ‘말씀’이심을 명백히 선언하는 데에 초점을 맞춥니다. ‘말씀’에 해당되는 그리스어는 ‘로고스’이며, 이 단어는 우선적으로 어떤 것에 대한 ‘말’을 의미하지만 ‘사건’, ‘일’이라는 뜻까지 포함합니다. 그 ‘말’은 언제나 ‘사건’과 ‘일’을 구체적 결과로 가져옴을, 즉 ‘말씀’은 어떤 일이나 사건을 발생시켜 삶의 중요한 변화를 만들어내고 창조하는 기능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단순히 ‘소리’만이 아니라 그 소리를 통해 실현되는 사건이고 변화를 일으키는 살아있는 동력이며 창조적인 일입니다. 말씀을 통한 창조는 지금 우리들 안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사건이기에 요한은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26절)라고 선언합니다. “말씀”이신 분은 당신 자신을 통해 주변을 진정으로 존재하게 하시고 변화를 통한 새로운 창조에로 초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런 창조주이신 ‘말씀’을 “내 뒤에 오시는 분”(27절)으로, 그리고 자신은 그 말씀을 선포하는 ‘소리’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 하느님의 영이 주는 기쁨
복음에서 요한이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규정하면서 인용한 본문은 이사야 예언서인데 제1독서는 이사야 예언서의 한 부분으로 되어있습니다. 새롭게 ‘기름 부어’ 축성한 메시아를 소개하는 본문으로서, 그 특성은 그 위에 “하느님의 영”이 내렸다는 것입니다.(이사 61,1) 즉 기름 부음을 받은 메시아가 하는 모든 일은 ‘성령’이 그에게 내려 이루어짐을 먼저 선언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와 함께함으로써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2절)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영이 함께할 때 이러한 위대한 해방이 가능한 것이고 그럴 때 누구도 두렵지 않고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강력한 하느님의 통치가 구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2독서에서 바오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라고 권고합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선물로 깨달을 때 우리는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게 되고 이러한 감사는, 또 다른 기쁨의 은총으로 우리 안에 간직되며, 그래서 그분의 오심을 기다리는 시간은 당연히 기쁘고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외치는 ‘소리’만 울려 퍼지던 광야는, 진정한 생명의 창조적 힘을 가진 ‘말씀’이 오심으로써, 아름다움과 풍요가 가득한 곳으로 변하게 됩니다. 사랑이 발생하고 그 사랑을 가져다주는 존재가 다가오면 주변이, 어제와 똑같던 그 주변이 급속도로 달라 보이듯이, 광야는 풍요와 빛의 땅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둠과 불안, 치욕과 분노를 전복시키는 힘은 복음이신 ‘말씀’의 오심으로만 가능한 사건입니다.

거의 일 년간 우리 삶의 언저리를 위협하며 전방위적으로 지구촌 전체를 고통과 결핍, 불행과 무력감으로 밀어 넣은 이 사태 속에서 우리 존재와 마음을 가득 채우는 빛, 그 사랑의 신비를, 견고한 행복한 활짝 핀 웃음으로 마주하는 성탄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기다림, 만남 그리고 나눔

-우창원신부-


전례력으로 새해를 시작한 지도 벌써 3주나 흘렀습니다. 지난 한 해는 예기치 못했던 바이러스로 인하여 많은 이들 이 어려움을 느끼며, 힘겨운 시간을 보내온 것이 사실입니 다. 그럼에도 우리가 “구세주 빨리 오사 어두움을 없이 하 며, 동정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옵소서”라는 성가 가사처럼 기쁜 마음으로 주님을 기다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 어주기를 기도해봅니다. 우리는 바로 그렇게 기도하면서 우리의 죄를 뉘우치고, 아름다운 마음 자세로 구세주 오실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림 제3주일에는 장미색 제의를 입습니다. 이 제의가 나타내는 색깔의 의미는 엄격한 보속 중에 성탄의 서광을 앞두고 기쁨과 휴식의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 대림 제3주일을 지내면서 우리는 회개와 속죄를 통하여, 오시는 예수님을 올바르게, 기쁘게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하면 오시는 그분을 기쁘게 맞이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제1독서를 통하여 들려주시는 “주 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이사 61,1)는 말씀을 묵상해보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방과 자유를 주시며 안식처가 되어주시는지, 그분의 오심이 잔정 우리에게 기쁜 소식인지 말입니다. 어떤 분들은 예수님이 실제로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고, 때로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에 대한 성경 말씀이 마치 뜬구름같이 여겨진다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쩌 면 우리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걸지도 모릅니다. “그분께서는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요한 1,10) 

주님께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우리와 늘 함께하십니다. 주님과의 만남이 외적으로 반드시 드러나지 않는 것 같더라도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우리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대림 시기가 특별한 기다림의 시간이긴 하지만, 사실 우 리의 기다림은 신앙생활에서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만남도 우리의 신앙생활 안에 계속되고, 반복되는 만남 일 것입니다. 

오늘은 자선주일입니다. 가장 비천한 이의 모습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며, 그분이 우리를 위해 당신 사랑을 ‘올인’하시며 이 세상에 오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이 보여 주신 세상을 향한 ‘사랑의 올인’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하겠습 니다. 이렇게 세상을 향하여 나눌 때 그 사랑은 더욱 커지 고 풍성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구세주 메시아여, 빨리오소서

-이상해 신부-


오늘은 대림 제3주일이며, 자선 주일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신앙적인 공백기, 내 신앙의 시험대, 일상 의 생활 형태가 무너졌고, 살기 위한 격리와 단절로 인해 한 해를 마감하는 시기에 신앙인으로 하느님께 확 인받고 싶은 때입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은 세상이란 무대 뒤로 서서히 사라지지만, 사람들의 관심이 그리스도께로 쏠리게 된다 는 사실에서 기뻐합니다. 메시아를 통한 사람들의 ‘구원’이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요한 자신은 ‘증언’하는 사 람으로서 소리에 불과할 뿐, 결코 사람들을 구원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자신은 증언자로서 하느님을 체험 했고, 자기 눈으로 보고 자기 손으로 만져 본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분은 진실과 거짓, 빛과 어두움,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서 옳고 그름의 심판을 실행해 나가실 분이라고 알려 주는 역할 외에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교만해질 수도 있었고, 자신의 위치를 잊어버리고 위신이나 힘을 사용할 만한데도, 그는 증언하는 사람으로 서의 겸손한 태도를 잊지 않고 세상을 향해 외칩니다. 

요한의 증언은 목숨을 건 행동하는 증언이었습니다. 

 오늘은 자선 주일입니다. 우리 주변 이웃들에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증언해야 하는 시기입니다. 나라뿐만 아니라 세상 전체가 어렵고 온통 짜증으로 일그러져 있습니다. 가정은 한숨 속에서 지내고 있고, 각 나라는 저마다 살길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우리 개개인 역시 끝없는 절망 속에서 벽장에 갇힌 것처 럼 삽니다. 이 위기 속에서 필요한 것은, 작은 것이라도 나누는 손과 마음일 것입니다. 

 세상에 오시는 메시아는 우리처럼 가난한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나의 고통에 함께 고통을 나누고, 나의 슬픔에 함께 슬퍼하시며, 나의 죽음에 함께하시며, 추운 겨울날 나와 함께 추위와 싸우고, 나의 굶주 림, 육체적인 부족함과 많은 질병과 환난 속에 있는 우리에게 위로와 해방뿐만 아니라 동반자가 되셨다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저마다 살기 위해 나의 고통과 절망에서 멀어지고, 외면할 때도 그분만은 언제나 어려움 중에 있는 나와 함께 살기 위해 오십니다. 지금 우리가 가난한 사람에게 자선을 베푼다는 것은 곧 메시아 를 맞이하는 길입니다. 자선을 통하여 메시아께서는 지금의 이 암울한 시기를 바꾸어 주실 것이라는 희망 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증언대로 반드시 오실 것입니다. “구세주 메시아여, 빨리 오소서.” 아멘

 

대림은 자선과 회개의 삶

-주영돈신부-


 오늘은 기쁨(Laudate) 주일이며, 자선 주일이다. 기쁨과 사랑을 함께 나누는 주일이다. 올 한 해는 미사 참례를 온전히 할 수 없었지만, 코 로나19로 고통받는 이들과 나눔을 실천할 기회는 많았다. 힘든 이웃을 생각하고, 나누는 삶은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참 아름다울 것이다. 사실 우리는 일 년 동안, 나눔의 주일을 많이 보낸다. 구체적으로 해외 원조 주일(1월), 사순 헌금과 가난한 이 를 위한 단식과 봉헌(3월), 헌미헌 금(11월), 연중 제32주일인 ‘가난한 이를 위한 주일’, 오늘 대림 제3주 일인 자선 주일이다. 이런 여러 기 회에 우리는 가난한 이를 기억하고, 이들을 위해 자신의 것을 봉헌하면 서 살아간다. 왜 이렇게 많은 주일에 ‘가난한 이 를 기억하는가?’ 그 이유는 마태 25 장의 최후의 심판의 기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굶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헐벗은 자, 병든 자, 감옥에 갇힌 자’를 돕는 것이 우리 구원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주님이 원하 시는 일이며, 우리가 받게 될 최후 의 심판의 기준이 된다. 아기 예수 님이 오심을 준비하는 대림의 시간 에, 이웃을 돌보는 일은 주님의 길 을 준비하는 삶이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오 심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선포 한다.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회 개는 내 주위의 사람을 돌보는 일 을 시작하는 삶이다. 회개의 삶이 다. 주님은 날 보고 계신다.’ 또 토 빗기는 “자선은 사람을 죽음에서 구해주고 모든 죄를 깨끗이 없애 준 다.”(12,9)고 한다. 자선은 참된 생명 을 얻을 수 있는 수단이다. 대림 시기는 주님의 오심을 준비 하는 시간이며, 회개의 삶을 요청 받는 시간이다. 나의 삶을 돌아보 고, 회개의 삶을 요청받는 이 시기 에, 자선의 삶을 통하여. 새 생명의 삶을 준비해야 한다. 이것이 교회가 대림 제3주일을 자선 주일로 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자선과 회개를 실천하는 삶을 살 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제2독서 에서는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 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 하십시오. 이것이 ... 하느님의 뜻입 니다.” 하고 선포한다. 또 복음에서 선포되는 요한 세례자를 통하여 더 잘 배울 수 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 다.” 바로 겸손과 솔직함은 자선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자세이 다. 이번 주간을 보내면서, 6가지 사 랑의 실천을 구체적으로 계획해 보 고, 또 겸손과 기쁨, 기도, 감사의 삶 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하자.

성탄준비물

-최훈 신부-


 오늘은 기쁨(Laudate) 주일이며, 자선 주일이다. 기쁨과 사랑을 함께 나누는 주일이다. 올 한 해는 미사 참례를 온전히 할 수 없었지만, 코 로나19로 고통받는 이들과 나눔을 실천할 기회는 많았다. 힘든 이웃을 생각하고, 나누는 삶은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참 아름다울 것이다. 사실 우리는 일 년 동안, 나눔의 주일을 많이 보낸다. 구체적으로 해외 원조 주일(1월), 사순 헌금과 가난한 이 를 위한 단식과 봉헌(3월), 헌미헌 금(11월), 연중 제32주일인 ‘가난한 이를 위한 주일’, 오늘 대림 제3주 일인 자선 주일이다. 이런 여러 기 회에 우리는 가난한 이를 기억하고, 이들을 위해 자신의 것을 봉헌하면 서 살아간다. 왜 이렇게 많은 주일에 ‘가난한 이 를 기억하는가?’ 그 이유는 마태 25 장의 최후의 심판의 기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굶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헐벗은 자, 병든 자, 감옥에 갇힌 자’를 돕는 것이 우리 구원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주님이 원하 시는 일이며, 우리가 받게 될 최후 의 심판의 기준이 된다. 아기 예수 님이 오심을 준비하는 대림의 시간 에, 이웃을 돌보는 일은 주님의 길 을 준비하는 삶이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오 심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선포 한다.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회 개는 내 주위의 사람을 돌보는 일 을 시작하는 삶이다. 회개의 삶이 다. 주님은 날 보고 계신다.’ 또 토 빗기는 “자선은 사람을 죽음에서 구해주고 모든 죄를 깨끗이 없애 준 다.”(12,9)고 한다. 자선은 참된 생명 을 얻을 수 있는 수단이다. 대림 시기는 주님의 오심을 준비 하는 시간이며, 회개의 삶을 요청 받는 시간이다. 나의 삶을 돌아보 고, 회개의 삶을 요청받는 이 시기 에, 자선의 삶을 통하여. 새 생명의 삶을 준비해야 한다. 이것이 교회가 대림 제3주일을 자선 주일로 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자선과 회개를 실천하는 삶을 살 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제2독서 에서는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 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 하십시오. 이것이 ... 하느님의 뜻입 니다.” 하고 선포한다. 또 복음에서 선포되는 요한 세례자를 통하여 더 잘 배울 수 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 다.” 바로 겸손과 솔직함은 자선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자세이 다. 이번 주간을 보내면서, 6가지 사 랑의 실천을 구체적으로 계획해 보 고, 또 겸손과 기쁨, 기도, 감사의 삶 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하자.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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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당연히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그 이유를 다른 곳에서 찾으려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참 많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

예비 신자들이 이렇게 답변하는 것은 모르니까 그럴 수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세례받은 지 꽤 오래된 사람들 역시 이 마음의 평화를 말합니다. 구원을 향해 걸어가는 길에서 자연스럽게 얻는 것이 마음의 평화인데, 마음의 평화가 일순 위에 있다 보니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생활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하면 신앙을 버리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합니다.

본당 신부님의 강론으로 마음의 평화를 잃어서, 교우의 잘못된 모습을 본 뒤에 마음의 평화를 잃어서, 세상 것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마음의 평화를 잃었기 때문에…. 등의 이유로 마음의 평화를 잃게 하는 교회에 다닐 수 없다고 합니다.

신앙은 단순히 세상 안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하느님 안에서 참된 기쁨과 행복을 얻기 위한 것, 즉 나의 구원을 위해서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을 위해 주님과 함께 하는 길을 걸어가게 될 때, 자연스럽게 평화도 얻게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지도자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그리스도냐, 엘리야냐, 예언자냐면서 끈질기게 답을 요구합니다. 그러자 요한은 단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말합니다. 소리는 사람들이 길을 제대로 갈 수 있도록 알려줍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구원의 길을 향해 외치고 싶지만, 유대인들의 지도자들은 단순히 그의 신원에 대해서만 묻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제들과 레위인들뿐 아니라 바리사이들도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어 묻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의도는 사제들과 레위인들처럼 순수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요한이 누구인지 알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 올가미를 씌우는 데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례를 베푸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묻지요.

요한은 자신이 베푸는 세례에 관해 겸손하게 말하면서 자기는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기에도 합당치 않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가장 큰 겸손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주님을 세상에 외치는 소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구원을 위해 주님을 준비하는 멋진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를 다시금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부차적인 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처럼 착각해서는 주님과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씨 뿌릴 시기는 끝났고 지금은 수확을 할 시기이다. 도움닫기는 이미 했고 이제는 뛰어오를 때이다. 준비는 끝났고 이제는 실천할 때이다(칼 바르트).


일 중독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물질문명이 발달할수록 여유는 점점 더 없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쩌면 물질문명이 자전거 페달 밟기와 같지 않을까 싶습니다. 멈추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서 불안하고 초조하지요. 즉, 물질문명을 따라가면 따라갈수록 우리는 점점 더 빨리 달려야 하고, 자연스레 바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아무리 일을 해도 끝없이 주어집니다. 일에 치여서 산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그러다 보니 쉬고 있으면서도 일에 대한 걱정과 초조감으로 휴식다운 휴식을 취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 중독에 빠지게 됩니다. 어쩌다 일이 없으면 오히려 불안하지 않습니까? 물론 일이 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며 행복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일을 내려놓을 수 있는 여유를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의 삶을 정리하면서 그 안에서 진정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나의 삶을 위해 일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일을 위해 내 삶이 희생되어서는 안 됩니다. 무엇이 중요한지 알 수 없는 혼돈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빛을 만난 이의 특징: 새롭고 명확한 정체성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에 관한 내용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증언하러 온 것은 ‘빛’입니다. 복음은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나오는 이야기는 ‘정체성’입니다. 요한은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모세와 같은 예언자도 아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계속 누구냐고 하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빛을 증언하는 이는 빛을 봅니다. 그런데 그 빛을 보는 것이 아니라 빛을 통해서 자신을 다시 보게 되는 것입니다. 태양은 눈이 부셔서 똑바로 바라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태양이 있다는 것을 나를 바로 보게 됨으로써 알게 됩니다. 이것이 빛을 본 이들의 특징입니다.

 

      제가 ‘나는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묻고 다녔을 때는 고등학생 때였습니다. 내가 왜 공부해야 하는지, 장차 어떤 일 하며 살아야 하는지 혼란스러웠습니다. 어떤 때는 연예인이, 어떤 때는 사장님이 되고 싶고, 어떤 때는 대통령이 되고 싶기도 했습니다. 무엇이 되고 싶은지 자주 바뀌는 이유는 내가 명확한 자기 정체성과 소명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를 물을 때 그때 저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나는 나야!”

      내가 나의 주인으로 착각하니 갈 길이 막막하고 어두운 밤에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빛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이런 대답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어둠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가 어둠 속에 있을 때였습니다. 빛을 만나면 내가 어둠이었음을 깨닫고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 정체성에 따라 새로운 소명을 발견하게 됩니다.

 

      골수기증, 헌혈, 자선, 자연보호 운동 등을 선도하며 개신교 신자로서 본인이 ‘나는 하나님의 배우입니다’라고 자신 있게 선포하는 배우가 있습니다. 배우 ‘최강희’씨입니다.

하지만 최강희씨는 처음에는 매우 자존감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모태신앙을 가지고 있었지만 예수님을 만난 적은 없었습니다. 되고 싶은 것도 없었고, 인생이 언제 끝나는가만 기다렸고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자해까지 하며 자신에게 전혀 만족할 수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녀가 가장 연기를 잘해서 처음으로 칭찬을 받은 대사가 이것이었다고 합니다.

“여기 숨어있었어. 아무도 없으니까 무섭잖아.”

      감독님에게 연기가 기가 막힌다고 처음으로 칭찬을 받아보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대사는 그녀의 삶이었고 진심이었습니다. 어쨌든 그런 칭찬을 들으니 자존감이 높아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연기 생활을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의 성취로 자존감이 높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밤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는 지친 생활 속에서 마음도 지쳐갔습니다. 겉으로는 밝은 척하지만 사실 사람들과 함께 식사도 할 수 없었습니다. 소화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혼자 방에서 짜장면을 시켜놓고 눈물이 쏟아져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술과 담배에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하루라도 술 담배를 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습니다. 운전하며 사고가 나서 빨리 죽고 싶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예배는 꼬박꼬박 나갔습니다. 물론 예배 내용은 기억나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람들이 통성기도를 하는데, 그녀는 들릴까 말까 한 목소리로 “살려주세요 ... 살려 주세요 ... ”를 반복했습니다. 그러자 이런 깨달음이 생겼습니다.

 

      ‘담배나 술이나 내가 좋아서 하는 게 아니었구나. 괜히 하는 거구나. 괜히 피지는 말아야지. ... 주님 저 의지박약인 거 아시죠? 그렇게 만드셨잖아요. 그런데 괜히는 안 필게요. 하지만 피고 싶을 때는 필게요. 술도 괜히는 안 마실게요. 그런데 마시고 싶을 땐 마실게요.’

 

      그렇게 몇 번 더 마시고 피우고 했습니다. 그러나 괜히는 안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술과 담배를 끊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제가 만난 예수님은 자유예요. 그리고 그게 세상에 어떤 자유보다 제가 자유라고 생각했던 모든 행동을 해봤을 때 세상의 자유는 저를 자유롭게 하지 못했습니다. 찝찝하고 다음에 수습해야 하고 결국 내가 점점 더 죽어갔었습니다. 진짜 자유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새벽 예배에 참석하고 싶어졌습니다. 한 번 나가고 두 번 나가니 이제 빠질 수 없는 하루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하나님 만나기 전의 내가 어떤지 알기 때문에 돌아가고 싶지 않은 거예요. 그래서 매일 새벽 예배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내가 의지박약인 것을 알기 때문에, 나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매일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을 대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열등감으로 자신을 증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전에는 나를 증명하고 싶었어요. 억울한 것은 따지고 내 생각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어요. 그러나 지금은 굳이 나를 증명하고 싶지 않아요. 노력도 억지로 하지 않아요. 내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을 때 하나님이 느껴져요.”

      자신의 꿈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예전에는 아무것도 되고 싶은 게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뭐든지 될 수 있다고 믿어요.”

“당신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묻는 말에 그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같은 최강희지만 밤에서 아침으로 나온 것 같아요. 나는 그리스도인이고, 하나님의 배우입니다.”

[‘배우 최강희 간증: “나는 크리스천, 하나님의 배우입니다.”, ‘CBS 새롭게하소서’, 유튜브]


      오늘 요한 복음에 나오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은 굳이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빛을 만났다는 것을 증언하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과 그에 따른 소명을 명확히 알고 있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배우 최강희씨가 예수님을 ‘자유’라는 이름으로 만나고 자신의 정체성과 소명이 명확해진 것처럼, 세례자 요한도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로서의 명확한 정체성과 소명을 가졌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나려는 우리가 찾는 것은 바로 나의 정체성과 소명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그분이 주러 오시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빛을 만난 사람들은 그런 명확한 정체성으로 세상에 빛을 증언하는 사람이 됩니다. 만약 나의 명확한 정체성이 무엇인지, 왜 살아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면 우리는 최강희씨처럼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누군지 모르고 사는 것이 죽음입니다. 그러면 그분께서 내가 누구인지 알려주러 오실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지난 11월 22일 연중 제33주일은 교황님이 제정한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이었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제정하면서 크리스천으로서 단 한 사람이라도 가난한 이를 친구로 두고 있는지 자문해보라고 말한 뒤 교황청에서 노숙자와 실직자 등 1500여명과 오찬을 함께 했습니다이어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바티칸 옆 19세기 궁전을 노숙자 쉼터로 만들어 개방했습니다.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맞으면서 서울대교구는 교구장님과 보좌주교님들이 가난한 이들에게 정성이 담긴 도시락을 배달해 주었습니다.

 

도시락 배달을 마친 후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어렵고 가난한 이들을 도울 때 우리도 그들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뵙고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하느님의 뜻대로 나누면서 살아갈 때 우리도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희망이 있습니다우리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기쁘게 봉사하면 좋겠습니다.” 교구의 총대리인 손희송 베네딕토 주교님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어려운 사람들이 더 급격히 힘들어지는 시기에 우리가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고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은 그들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뵙는 것이며이를 통하여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희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가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해야 하는 이유를 명확하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신앙인들이 살아가야 할 방향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지금 나에게 편한 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나에게 이익이 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외로운 이들을 위로하고아픈 사람들을 치료해 주는 것이 신앙인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준비한다고 말을 하였습니다비록 그 길이 험난하고비록 그 길에 장애물이 있어도 넘어가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그리고 세례자 요한은 겸손하게 말을 하였습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제게 감동을 주었던 신학생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그 친구는 청소년들이 지내는 사회복지 시설에서 봉사를 하였습니다그런 어느 날늘 남이 입던 옷을 입는 아이들 생각이 나서 보세 옷가게를 찾았습니다그런데 그날 옷 가게에는 평소에 입고 싶었던 옷들이 있었습니다아이들을 위해서 옷을 살까아니면 평소에 입고 싶었던 그 옷을 살까통장에는 200,000원 밖에 없었습니다큰맘을 먹고 아이들을 위해서 옷을 사서 사회복지 시설로 갔습니다아이들은 무척 좋아하였습니다그런데 시설에 계시는 수녀님께서 신학생에게 선물을 하나 준비하였습니다그것은 그토록 입고 싶었던 가벼운 패당 잠바였습니다.

 

기분이 좋아진 학생은 보세 옷가게를 다시 찾았습니다수첩을 놓고 왔기 때문입니다그런데 옷가게 사장님이 신학생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도 도움을 주고 싶다면서 아이들을 위한 옷과 양발을 한 보따리 주셨습니다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던 학생은 그날 저녁에 본당 신부님을 만났습니다그런데 본당 신부님께서 성탄을 축하한다고 하시면서 봉투를 주셨습니다그런데 그 봉투에는 그날 자신이 사용한 금액인 200,000원이 들어 있었습니다그 신학생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도 기분이 좋아졌습니다나눔은 결코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나눔은 보다 안전한 곳에 나의 것을 모아 놓는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십시오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도 좋아하셨고한동안 많은 사람들이 즐겨 불렀던 노래가 있습니다오늘은 해바라기의 사랑으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일이 또 하나 있지

바람 부는 벌판에 서 있어도 나는 외롭지 않아

그러나 솔잎하나 떨어지면 눈물 따라 흐르고

우리 타는 가슴 가슴마다 햇살은 다시 떠오르네.

 

아 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들의 사랑으로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 주리라

아아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들의 사랑으로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 주리라

아 아 라라 라라라 라라 우리들의 사랑으로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 주리라 


오늘 우리는 과연 어떤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양승국신부-

 

대림시기 말씀의 전례 안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 있으니,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 이유는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는 대림시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가르쳐주는 이정표요 모델이기 때문입니다.

 

어찌어찌 하다보니 벌써 대림 제3주일입니다. 이러다가 아무런 준비도 못한채 성탄을 맞이할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남아있는 대림 시기 동안 세례자 요한의 말씀들, 그의 삶과 죽음을 잘 묵상해보는 것도 아주 좋은 성탄 준비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눈으로 바라보니 세례자 요한의 생애는 재미라고는 하나도 없는 팍팍한 인생이었습니다. 힘겹고 고된 여정이었습니다. 또한 고독하고 슬픈 길이었습니다.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난 세례자 요한은 소년티가 채 가시기도 전에 깊은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끝도 없이 펼쳐진 하늘과 황량한 불모지 밖에 없는 광야로 들어간 이유는? 조만간 구세사의 전면에 등장하실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광야에서 세례자 요한은 영적 생활에 충실하고자 초간단 미니멀리즘, 초근목피(草根木皮)의 삶을 살았습니다. 먹고 마시고 즐기는 곳으로 가는 에너지를 모두 차단시키고, 그 에너지를 깊이있는 기도생활에 투자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세례자 요한의 외양이 참으로 우스꽝스러웠습니다. 몸에 걸친 것이라고는 낙타 털옷 한조각이었습니다. 최고급 낙타 털옷이 아니라 길가다가 만난 죽은 낙타의 가죽을 벗겨 대충 만든 옷이었습니다. 가뭄에 콩나듯이 식사를 하셨는데, 먹기가 만만치 않은, 제대로 정제도 되지 않은 들꿀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거친 광야 생활은 그 자체로 죄와 타락, 금전과 우상 숭배로 얼룩진 유다 지도층 인사들을 향한 강력한 경고요 도전장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남다른 기대감을 안고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메시아께서 오시면 부패하고 타락한 이 세상을 깔끔히 정리하시리라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썩어빠진 무리들을 심판하시고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시리라 믿었습니다.

  

드디어 그토록 고대하던 메시아께서 세례자 요한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첫 증인인 세례자 요한은 뛸듯이 기뻤을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광야로 들어가 쌩고생한 것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진 것 같아 행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돌아가는 분위기를 유심히 살펴보니, 정작 예수님께서 구세사의 전면에 등장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크게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악인들은 예나 지금이나 떵떵거리면서 희희낙락하고 있습니다. 로마의 압제는 여전했습니다. 헤로데 역시 변화되기란 글렀습니다.

  

세례자 요한 스스로를 바라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애써 교육시킨 제자들을 예수님께로 넘긴지 오래였습니다. 한 때 이스라엘 전역을 들었다 놨다 하던 세례자 요한이었는데, 지금은 깊은 지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평생토록 공들였던 그 모든 것들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 같은 느낌에 세례자 요한은 무척 슬펐을 것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나 하며 탄식을 터트렸을 것입니다. 지하감방에 갇혀 있떤 그는 너무 답답했던 나머지 제자들을 예수님께로 보내 묻게 합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태오 복음 11장 3절)

 

보십시오. 그토록 위대한 세례자 요한도 아직 걸어야 할 길이 많이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그 역시 죽음 일보 직전 까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의구심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역시 예수님을 통해 변화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도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다린 메시아는 다분히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메시아였습니다. 백성들이 메시아를 통해 기다렸던 것은 로마 제국의 압제로부터 독립이었습니다. 식민 통치의 종식이었습니다.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한 태평성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 한번도 그런 비슷한 말씀을 하신 바가 없습니다. 틈만 나면 되풀이하신 말씀은 그저 사랑하라는 말씀, 원수조차도 사랑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어떤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전삼용신부-


오늘은 기쁨주일(gaudete) 입니다. ‘핑크 빛’ 대림초에 불이 붙여졌습니다. 성탄을 기다리는 우리의 마음을 기쁨으로 태웁니다. 빛이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도 기쁨입니다.

<입당송>에서는 노래합니다.

“기뻐하여라.

거듭 말하니,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여라. 주님이 가까이 오셨다.”(필리 4,4.5 참조)

 

<제1독서>에서는 이사야 예언자가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민족들 앞에 의로움과 찬미가 솟아나게 하시리라.”(이사 61,10-11)

 

<화답송>에서는 성모님의 기쁨의 노래를 부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고,

내 구원의 하느님 안에서 내 마음 기뻐 뛰노네.”(루카 1,46)

 

<제1독서>에서 바오로는 기뻐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아버지의 뜻입니다.”(1데살 5,16-18)

 

<복음 환호송>에서는 이사야 예언자가 전하는 기쁜 소식을 노래합니다.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이사 61,1 참조)

 

그렇습니다. 이토록 오늘 말씀은 기쁨의 선포로 꽉 차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기쁨으로 나서야 하는 곳은 당혹스럽게도 광야입니다. 우리는 설레는 기다림과 고대하는 기쁨의 핑크빛 옷을 입고서 어처구니없게도 텅 빈 광야로 나서야 합니다. 그곳에서 광야처럼 텅 빈 사람, 요한을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님을 증언하며 기뻐합니다.

“신랑의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요한 3,29)

 

참으로, 요한은 자신을 온전히 비워버린 이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외치는 이가 아니고, 그저 ‘외치는 이의 소리’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야말로 비워져 있기에, 참된 소리가 되었습니다. 비어 있는 자 만이 온전한 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소리를 내는 이는 피리가 아니라 피리를 부는 이입니다. 피리가 결코 스스로 소리를 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붓이 스스로 글씨를 쓰는 것이 아니라, 붓을 쥔 이가 글씨를 쓰는 것이듯이 말입니다. 그처럼, 요한은 자신이 외치는 이가 아니라, ‘외치는 이의 소리’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은 그저 비어 있는 피리에 지나지 않으며, 글을 쓰는 이의 손에 쥐어져 있는 붓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진정 비어있는 이였습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말이 아니라, ‘외치는 이의 소리’가 되어 퍼질 수 있었습니다. 그는 비어졌기에 말씀을 반겨 맞아들였고, 들어 온 그 말씀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말씀의 참된 증거자가 되었습니다. 또한, 그의 비어져 있음은 겸손과 낮춤으로 드러납니다. 그는 이제 자신이 다른 이의 발밑으로 내려가려고 하나, 그 자격마저 없는 몸임을 고백합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1,27)

 

본래 주인이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종이 그 신발 끈을 풀어주는 법인데, 요한은 그런 종의 일마저도 할 만한 조격조차 없는 부당한 몸이라고 고백합니다.

한편, 그는 자신이 비어져 있는지라 다른 이들은 알아보지 못하는 분을 알아보고서 선포합니다.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요한 1,26)

 

그렇습니다. 그분이 우리 가운데 계시건만, 우리는 그분을 보지 못합니다. 우리의 영적인 눈이 감겨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분을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5)

 

그렇습니다. 어둠은 그분을 보지 못합니다. 빛이 들어와 눈이 열려야 그분을 보게 됩니다. 마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눈을 뜨고도 “그들과 함께 걸으시는”(루카 24,15)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다가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나누어주실 때야 “눈이 열려”(루카 24,31) 알아보았듯이 말입니다.

이처럼, 믿음 안에서 영의 눈이 열려면, 보게 됩니다. 곧 빛이 비추어 눈이 열리는 것이 깨어남입니다. 그러니 깨어있기 위해서는 먼저 깨어나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기쁨도 함께 깨어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주님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필리 4.4)

 

그렇습니다. 우리의 눈이 열려 주님의 현존을 보게 되면, 우리는 “주님 안에서”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기쁨 안에서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말을 너희에게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기 위함이다.”(요한 15,11)

 

바로 지금이 그렇게 깨어나야 할 대림의 때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여러분이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 이미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로마 13,11-12)

그렇습니다. 이제 이미 아직 아니 사이에서 지금 여기를 살아갈 수 있도록 “깨어나야 할 일입니다. 이미 베풀어진 하느님의 구원은총에 깨어나고, 동시에 구원의 완성을 향한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2코린 2,14)을 동행하시는 성령께 깨어나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당신은 누구요?”(요한 1,19)

 

주님!

화살표 같은 존재가 되게 하소서.

제 자신이 아니라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붓이 되어 당신의 말씀을 삶으로 쓰게 하소서.

피리가 되어 당신의 노래를 온몸으로 드러내게 하소서.

주인이신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당신을 아버지라 부르는 저는

당신의 사랑받는 새끼, 당신의 귀염둥이 아들, 당신의 사랑이오니,

당신께만 속해 있게 하소서. 당신의 사랑만을 드러내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생명의 춤이 되고, 당신 축복의 강복이 되게 하소서. 아멘.


세례자 요한만 보지 말고 예수님을 보아야 한다.

-송영진신부-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요한 1,19-20).”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23)”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 그러자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1,25-27)”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세례자 요한이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요한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고, 또 사람들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 만일에 우리가 보라는 예수님은 안 보고

요한만 바라본다면, 그것은 사제들, 레위인들이 요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과

다를 것 없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세례자 요한에 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요한 1,6-8).”

이 말은 세례자 요한을 깎아내리는 말이 아니라,

‘빛으로 오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세례자 요한만 보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촉구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빛’(구원)을 받으려면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하고,

빛으로 오신 예수님만 믿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말에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라는 말은,

“주님을 잘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그 준비는 바로 ‘회개’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의 말은 “회개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의 표현만 보면, ‘광야에서 외치는 이’와 ‘소리’가 구분되어 있어서,

‘광야에서 외치는 이’가 따로 있고,

또 ‘소리’도 따로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아니고,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다.” 라고 번역했어야 하는 말입니다.

(원문대로 직역하는 것이 꼭 좋은 일만은 아닙니다.)

여기서 ‘소리’ 라는 표현은,

‘말씀보다 격이 낮은 말’을 나타내기 위한 표현으로 해석됩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말은 ‘말씀’이고, 예언자가 하는 말은 ‘소리’입니다.

(또는 “주님은 말씀이신 분”이고,

“예언자는 소리인 사람”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도, 세례자 요한이 자신은 그리스도(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한 표현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말에서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라는 말은, “나의 세례는

물로 주는 세례일 뿐이다.”, 즉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기 위해서 물로 세례를

줄 뿐이다.” 라는 뜻으로 한 말이고, 그래서 이 말은,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마르 1,8).”, 즉 “그분이 바로 너희를 구원하시는

분이다.” 라는 것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라는 말은,

뜻으로는 “너희는 아직 모르고 있지만,

그분은 이미 너희 가운데에 와 계신다.”입니다.

(‘너희가 모르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 아니라,

‘그분께서 이미 와 계신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라는 말은,

뜻으로는 “그분은 나보다 더 높으신(위대하신) 분이시다.”입니다.

(이 말은, 수행원이 높은 사람의 앞에서 가고,

높은 사람은 수행원의 뒤에서 가는 상황에서 온 말입니다.)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보다 더 위대한 분이신 이유는,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를 준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일 뿐이지만,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라는 말은,

뜻으로는 “나는 그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보잘것없는 존재일 뿐이다.”입니다.

흔히 이 말을 ‘세례자 요한의 겸손’을 나타내는 말로 해석하는데,

이 말은 그의 겸손이 아니라 그분과 자신의 관계를 정확하게 나타내는 말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겸손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겸손한 사람이었다는 것은 맞는데, 이 말은 그의 겸손이 아니라

그분의 위대함을 나타내는 말로 해석하는 것이 옳습니다.)

사람들을 구원하는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그 구원을 받아야 할 사람들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아는 것이 겸손의 출발점입니다.

그런 점에서 “세례자 요한은 겸손한 사람이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지낸 사도들의 증언을 믿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복음서에 세례자 요한의 증언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고 해도

우리에게는 별로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회가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그의 회개 선포가 아직도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임무를 마치고 떠났지만,

그가 하던 일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고,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만일에 믿기만 하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실천하지 않는 믿음’, 즉 ‘죽은 믿음’입니다(야고 2,26).

‘죽은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반대로, 회개하면서도 예수님을 안 믿는다면?

그런 경우에는 회개 자체는 의미 있는 일이겠지만,

즉 회개 덕분에 지옥은 면하겠지만,

믿음 없는 회개로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것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고, 자기가 거부함으로써 그 나라에 못 들어가게 됩니다.

<죄 속에 있는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것만 세례자 요한의 임무였던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만드는 것도 그의 중요한 임무였습니다.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요한 1,7).”>


-조욱현신부-


오늘 전례의 핵심은 ‘기쁨’이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비록 자기는 무대 뒤로 서서히 사라지지만 사람들의 관심이 그리스도께로 쏠리게 된다는 사실에서 그의 기쁨이 충만해진다. 그는 그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요한 1,8)이기 때문이다. 즉 이 기쁨의 동기는 ‘구원’에 있는 것이다. 우리 신앙인들은 어둠의 세력에 질식되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해 보다 더 확신에 찬 모습으로 ‘기쁨’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우리는 ‘구원받은 자’의 얼굴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구원받은 기쁨에 찬 삶의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복음: 요한 1,6-8.19-28: 요한 세례자의 증언과 기쁨

 

오늘 복음의 내용은 요한의 역할에 대해 중점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세례자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수를 증언해 주었듯이 성탄을 앞둔 우리에게도 그분을 증언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만일 깨어있지 못하고 그분의 신비를 볼 수 없다면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26절) 라는 꾸짖음을 우리도 들을 수 있다. 우리가 성탄 성가를 부르고 끊임없이 말구유를 경배한다고 하더라도 깨어있지 못하여 신선하고도 밝은 믿음을 갖지 못한다면, 우리도 ‘다시 오시어 우리 가운데 서 계신’ 주님을 뵙지 못하게 될 것이다.

 

요한의 증언은 신앙과 전례적 선포 안에서 계속된다. 그의 증언은 우선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6절)으로서 예언적 사명을 띠고 온 것이며, 또한 그는 ‘빛’이나 ‘메시아’가 아니라, 그 ‘빛’을 증언하는 것이다. ‘증언’이라는 의미는 직접적인 인식과 체험 그리고 자기 눈으로 보고 자기 손으로 만짐(1요한 1,1 참조)을 전제로 하므로 역사적 성격을 띤다. 그분은 내면으로부터 파악되지 않으면 절대 인식되지 않는 분이다. 그러기에 ‘증언’이라는 것은 항상 상충적인 판단의 상황을 전제로 한다. 즉 진실과 거짓, 빛과 어두움, 신앙과 불신 사이에서 옳음을 가리는 심판의 과정을 전제로 한다.

 

요한에게 그의 신원을 묻는 그 자체가 진리를 알고자 하는 자세가 아니라, 심문이다.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아요? 그 예언자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요?”(21-22절). 그러한 자세였기 때문에 그들은 이미 그들 가운데 와 계신 ‘진리’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으며, 앞으로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요한의 태도는 겸손하다고 하기 전에 진실하고도 진리를 존중하는 태도이다.

 

그는 엘리야도 또 모세의 뒤를 잇는 예언자도 아니었지만, 엘리야와 예언자로서의 요소를 다 갖추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23절) 한다. 즉 그는 하나의 ‘소리’로서 희망과 구원, 그리고 회개의 소식을 전하기 때문에 그 ‘소리’가 가리키는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는 것이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25절) 라는 질문에 요한은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26-27절).

 

요한은 유다인들이 자신들의 신앙의 안목으로는 알아 뵙지 못하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에도 ‘부당함’을 말함으로써 그분의 위대하심을 증언하면서 청중들에게 그분께 대한 갈망을 일으키도록 한다.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께 자리를 마련해드리고자 하는 겸손한 행위이다. 이러한 자세가 우리에게서도 나타날 때 우리는 우리 가운데 오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성탄의 신비 앞에 요한은 위대한 교육자이다.

 

제1 독서 역시 성탄을 합당하게 준비하게 하는 가르침이다. 이사야는 한 신비스러운 인물이 올 것과 그의 사명을 예고하는데 특별히 가난한 이들, 약한 이들, 압박받는 이들을 돌보아줄 것이라고 한다(이사 61,1-2). 예수께서는 나자렛 회당에서 이 구절을 읽고 자신에게서 이루어졌다고 하시면서 공생활을 시작하셨다. 그분이 이 신비스러운 인물이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그분을 믿지 않고 죽이려 했다(루카 4,28-30 참조).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수님 시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자신들의 판단 기준에 따라 해석하여 자기 편한 대로 받아들이려 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을 따른다고 하지만 오히려 예수께 자신을 따르라고 하고 있다.

 

예수님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자’이며, 아무도 생각해주지 않는 가난한 이들을 구원하고, 이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는 포로들과 옥에 갇힌 이들을 해방하고, 찢긴 마음을 싸매어 주라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시다. 얼마나 많은 ‘찢긴 마음들이’ 이 세상에, 보잘것없다고 하는 사람들과 뛰어나다는 이들 사이에, 무죄한 사람들과 살인자들 사이에, 가난한 이들과 너무 많은 재물로 질식하고 있는 이들 사이에 있는지는 하느님만이 아신다.

 

예수님은 오셨다. 그리고 성탄 때마다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서 누구든지 필요로 하는 정신과 육체의 해방을 이루시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다. 우리에게 오심을, 우리에게 베푸실 이 해방의 은총은 이제 우리를 통하여 세상의 모든 이에게 기쁜 소식으로 전해져야 할 것이다. 그것이 나에게 참된 기쁨의 소식이었고, 나에게 ‘혁명’적인 것이었다면, 그것은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도 혁명적인 것으로 그 마음 안에서 성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기쁨의 삶을 살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요한 1, 20)

-한상우신부-

자기자신을
아는 것에서
신앙은
깊어진다.

우리를
아는 것이
관계를
올바로 되돌려
놓는 사랑의
참된 시작이다.

사랑하기에
기다리고

사랑하기에
길을 곧게
내는 것이다.

우리자신을
알면 알수록
겸손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 삶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도움이 필요한
사랑의
사람들이다.

빛이신
그리스도를
향하여
걸어가는
사람들이다.

자선(慈善)은
그리스도의
길이다.

그리스도의 길은
자선이라는
사랑의 길이다.

사랑은
내어드리는
것이며

내어드림은
그리스도께로
가는 일치의
길이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나누고 있는가?

자신을
드러내려는
나눔이 아닌
그리스도를
되찾는 나눔이
참된 나눔이다.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나눔이
기쁜 나눔이다.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는
자선도
함께한다.

삶의 중심은
재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대림시기이다.

대림은 자선이며
자선은 빛을
증언하는
신앙의 실천이다.

실천이 있는 곳에
살아있는 신앙도
있다.

신앙안에
겸손한
자선이 있다.

자선으로
우리의
성탄은 더욱
아름답고
빛날 것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는 기쁨이 가득합니다.

"기뻐하여라. 거듭 말하니,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여라. 주님이 가까이 오셨다."(입당송)

미사는 초입부터 우리를 기쁨으로 초대합니다. 주님을 기다리면서 지쳐가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멀리 계시지 않으니 힘내라고, 마치 곁에 계시는 듯 앞당겨 기뻐해도 좋다고 등을 토닥이며 미사 안으로 안내하지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요한 1,20)

복음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전하며 백성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세례자 요한을 등장시킵니다. 그가 누구인지 의구심을 품는 이들에게 요한은 자신이 "누구"가 아닌지 명백히 밝히면서, 동시에 자신이 누구라고, 즉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요한 1,23)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아닌 것에 대해서도 인정하고 수긍하는 이는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입니다. 이런 이는 자기가 아닌 커 보이는 모습을 탐하지 않고, 작아 보이는 자기 모습에 실망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아는 사람은 크고 작음, 중요도, 지명도에 연연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자신을 알고 인정하고 사랑하며, 무엇보다 감사합니다.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요한 1,26)

사람들은 자기들 눈 앞에 있는 요한이 메시아가 아니고, 자기들 틈에 있지만 자기들이 모르는 그 누군가가  바로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당황합니다. 모른다는 것은 어둠이고 한계입니다. 하지만 모름은 미지의 세계를 향한 열림일 수 있습니다. 모든 가능성을 열고 존재하는 모두와, 다가오는 모두를 환대하는 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아니다." 그리고 "모른다."는 주님 앞에 선 인간의 진실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아닌 타자이시고, 인간이 죽었다 깨어도 다 알 수 없는 분이시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아님과 모름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아니고 모르기 때문에 겸허해야 하지요.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메시아의 사명과 기쁨을 노래합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이사 61,1-2)

주님께서 보내신 이의 첫째 소명은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입니다. 그것도 가난한 사람에게! 가난은 물질적 가난만이 아니라, 정신적, 심리적, 영적, 관계적 가난도 포함합니다. 부귀영화를 누리며 산해진미로 배를 채운들 결핍이 없을 수 없지요. 누구도 가난에서 완벽히 예외일 수 없습니다.

그러니 기쁜 소식은 모두를 위한 선물입니다. 우리 존재의 근원이시며 만물의 주인이신 분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기쁜 소식, 바로 그분께서 가까이 오셨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분은 단죄가 아니라 사랑으로 심판하는 분이시고 우리 모두의 한계를 지고 가신다는 기쁜 소식이지요.

제2독서에서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뜻이 명백히 드러납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

기쁨과 기도와 감사가 바로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것도 "언제나! 끊임없이! 모든 일에!" 하느님은 우리가 그렇게 살기를 바라셔서 원래부터 그렇게 지으셨습니다.

삶이 버거워 "기쁨"을 미루고, 아직 죄가 많고 준비가 안 되어 "기도"를 미루고, 아직 욕망이 다 채워지지 않아 "감사"를 미뤄 온 것은 우리였지요. 하지만 모든 조건이 채워지길 기다린다면, 평생 기쁠 수 없고 기도하지 못하며 감사할 줄 모르는 가련한 인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자신이 받은 은총과 한계를 바르게 인식하는 이는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고유하고 특별한 선물을 잘 압니다. 그래서 아닌 모습,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 담담하게 "아니다." 할 수 있고, 가진 것에 대해 기쁘게 감사할 수 있지요. 주님 앞에서 기쁘고 감사하며 기도하는 영혼은 진정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이 기다림의 시기에 우리가 만나는 세례자 요한처럼 말이지요.

요즘 우리 참 어렵습니다. 매일 늘어나는 코로나19 확진자 숫자와 어두운 소식들에, 각자 직접 겪고 있을 고통까지 더해지니 더더욱... 이런 사회적 세계적 혼돈 상태와 기쁨은 마치 극과 극의 이물질처럼 느껴지기도 할 텐데요.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럴수록 기쁨을 선택하고 선포하며 전파하는 존재여야 합니다. 기쁨은 감정이 아니라 선택이기 때문이며, 그것이 제2의 그리스도로 이 세상에 불리운 우리 모두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시기지만 기쁠 일은 없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다 아시고 실천하는 일들일 겁니다. 문득 떠오른 나눔의 아이디어에 지인이 함께하겠다고 동참할 때, 축 처진 어깨를 한 채 지나가는 누군가를 위해 기도할 때, 이 고립의 시간이 더 힘에 겨울 누군가를 위해 전화를 걸고 작은 정성을 보낼 때,  소박한 나눔이지만 누군가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리라 생각하니 가슴이 뛰지요?

이것이 교회가 대림 제3주일을 자선 주일로 보내는 이유일 겁니다. 자발적 나눔에는 늘 기쁨과 희열이 축복으로 얹어진다는 걸 여러분은 이미 체험으로 아실 것이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혹 여건이 더 나빠져서 공동체로 모여 주님을 찬미할 수 없게 된다면, 우리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은수자가 되어 주님께 깊이 몰두하고 사랑 안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 주님과 단 둘이 사랑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며 기도하는 은총의 시간을 누릴 수 있으니 너무 아파하지 맙시다. 주님 마음 안에 깊이 잠겨 숨은 기도로 주님께 찬미와 영광을 올리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말씀과 기도 안에 우리 모두는 하나로 엮여 있으니, 힘 내십시오!!! 

내다보는 기쁨과 앞당기는 기쁨

 -김찬선신부-


"내 영혼은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형제 여러분,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대림 3주일은 여러분이 잘 아시듯 '기뻐하라!' 주일입니다.

주님께서 오실 날이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이 주제로 묵상을 하려고 하니 그제 수련 형제의 강론이 떠올랐습니다.

 

지난주 저는 수련자들 특강을 위해 대전을 다녀왔습니다.

수련소에서는 수련자들이 돌아가며 강론을 하는데

한 형제가 강론을 다음과 같은 말로 끝냈습니다.

 

'오후 3시에 너를 만난다면 나는 오후 2시부터 행복할 거야!‘

이것은 어느 시인의 시구이거나 어쩌면 그 형제가 수도원에

들어오기 전 연애를 할 때 실제로 느꼈던 행복감 그러니까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을 앞두고 느꼈던 행복감일지도 모릅니다.

 

사랑을 하는 사람은 이와 같은 행복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남 때의 행복뿐 아니라 만나기 전의 행복,

곧 대림절의 행복인, 내다보는 행복과 앞당기는 행복이 있을 것입니다.

 

기쁨도 정확히 같습니다.

성탄의 기쁨도 있지만 주님 오심을 기다리며 그 만남을

내다보는 기쁨과 앞당기는 기쁨이 있는데 오늘 3주일의 기쁨이 이런 겁니다.

 

그런데 이 기쁨을 저는 오늘 조금 특별하게 의미부여코자 합니다.

오늘 독서의 기도 독서에서 아오스딩 성인은 오늘 복음을 해설하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말을 제거한다면 소리는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소리가 의미를 전달하지

않을 때 그것은 빈 소리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전달할때 그 과정이 어떤지 생각해 봅시다. 내가 말할 바를 생각할 때

이미 내 마음속에 말이 있습니다. 내가 그것을 당신에게 전하려고 할 때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을 당신의 마음속에다 전달할 수단을 찾습니다.

그리고 내 마음속에 이미 있는 말에게 소리를 주어, 그 소리를 통해서

그 말을 전달하게 됩니다. 말의 소리는 그 말의 내용을 전달하고, 임무를

마치고 나면 '이것으로 나는 기쁨에 넘친다.'라고 말하고 사라져 버립니다."

 

여기서 아오스딩은 소리가 말을 만나서 의미있게 되는 기쁨을 말합니다.

그렇지요. 말을 만나지 못한 소리는 무의미하고 그래서 우리는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고 하는데 우리 소리들은 말씀을 만나야 의미있게 되고,

그래서 말씀이신 주님을 만나게 될 때 우리 소리들은 기쁩니다.

 

그러나 말 또한 소리라는 수단을 만나지 못하면 전달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소리는 말이 전달되는 중요한 수단으로서 의미있으며,

이렇게 말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의미있는 존재이기에 기쁩니다.

 

그러므로 우리 소리들은 말이 되는 소리일 때만 의미있고 기뻐해서는

안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씀을 날라다줄 때도 의미있기에 기뻐해야

하는데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말씀을 날라다줄 때 기뻐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 이사야서는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라고 얘기하는데 곧

자기만 의미있게 되는 기쁨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 특히 이 사회에서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는 가난한 이들도 말씀을 만나 의미있게 되고,

그래서 그들도 같이 기뻐하게 하는 기쁨을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대림 3주일에 자문해야 합니다.

나는 대림절의 기쁨을 살고 있는가?

나는 다른 이들 특히 가난한 이들과 함께 기쁨을 살고 있는가?

 

그리고 나만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기뻐하지 않고

너와 함께 주님으로 기뻐하는 성탄절이 되도록 이 대림절을 살아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