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10일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루가 11,27-28)
“Blessed is the womb that carried you
and the breasts at which you nursed.”
He replied, “Rather, blessed are those
who hear the word of God and observe i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한재호신부-
신자 분들 가운데 이렇게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본당에서 사목회장을 10년 동안 하였습니다.”, “소공동체 구역장, 교리 교사, 사목회 임원 등 본당에서 안 맡아 본 직책이 없습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분들을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쉬움을 느낍니다. 직책이 신앙의 성숙도를 알려 주는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때 우리는 모두 이러한 직책을 버리고 하느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사제복을 입고서, 수도복을 입고서, 교회 안에서의 어떤 직함을 가슴에 달고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군중 속의 한 여자가 예수님께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외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어머니라는 사실이 사람들 눈에는 대단한 가치일 수는 있겠지만, 하느님의 눈으로 볼 때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가치가 있는 것은 당신 말씀에 충실히 순종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이 한 가지뿐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성경에 나오는 그 많은 이들 가운데 하느님 말씀에 가장 충실히 순종하셨습니다. 교회가 성모님을 ‘지극히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분께서 그저 예수님의 어머니이시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히 듣고 지키는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이렇게 비교를 해보니, 문득 우리의 삶도 단편소설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특별한 사건도 없고, 문제의 해결도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등장인물과의 갈등도 흐지부지하게 끝나곤 합니다. 정말로 비슷하지 않습니까?
어떤 분은 자신의 삶을 책으로 쓰면 10권을 써도 부족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과연 자신의 삶이 특별한 스토리를 가지고 독자를 이끄는 장편소설 같을까요? 그렇게 특별하지 않을 것입니다. 누구나 경험하는 어떤 일에 새로운 사건 몇 가지만 붙었을 뿐입니다. 또 명확한 해결을 원하지만, 그런 일은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 삶도 바로 나의 삶임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단편소설의 재미는 세세한 감정들을 바라볼 수 있을 때입니다. 소소한 행복을 체험하는 우리의 삶을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의 삶을 비로소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결말이 이루어지지 않고, 문제의 해결이 힘들어도 그 자체만으로도 괜찮다면서 그 안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 안에서 소소한 행복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행복은 하느님과의 연결고리를 찾으면 자동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는 이 연결고리를 찾으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대단한 결말을 가져오는 행복만을 구하고 있습니다.
어떤 여인이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행복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을 배었고 젖을 먹였던 성모님은 분명히 복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성모님의 행복은 단순히 예수님을 배었고, 젖을 먹였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켰기 때문에 행복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삶의 행복은 대단한 결말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단편소설과 같은 작은 일상 안에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면서 굳은 믿음의 생활을 할 수 있어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행복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갈라 3,26)


불평등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만 영향을 미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답은 “아니다.”입니다. 불평등은 인구 대다수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1970년대 초기 연구에서부터 소득 격차가 큰 나라일수록 폭력 사건이 더 자주 발생하고 건강상태가 나쁘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치안이 불안하다는 나라를 생각해보십시오. 대부분 국민 간의 소득 격차가 큰 나라입니다. 우리나라도 7~80년대만 해도 도둑이 참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카페에 노트북을 놔둬도 아무도 가져가지 않을 정도로 정직합니다.
물론 지금도 소득 격차가 적은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옛날처럼 아주 잘 살고, 아주 많이 못사는 식의 격차가 아니므로 점점 범죄가 줄어드는 것입니다.
소득 격차가 큰 나라는 강도가 많습니다. 강도의 타겟은 누구일까요? 부유하고 소위 높은 자리에 올라 있는 사람입니다. 어떻습니까?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회적 평등이 이루어지는 곳이 곧 모두가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곳입니다. 차별하지 않고 사랑만을 강조하신 주님의 모습이 왜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잘살기 위함이었습니다.

인간의 3대 고통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군중 속에서 한 여인이 이렇게 소리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마치 “저렇게 훌륭한 자녀를 두었으니 저 엄마는 얼마나 행복할까!”라고 부러워하며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여인의 생각을 조금 바꿔주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그러니 오늘 복음은 ‘행복’에 관한 말씀이 됩니다. 이 짧은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 행복이 무엇인지 알려주려 하십니다.
행복을 알려면 고통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합니다. 자칫 우리는 진정한 고통이 아닐 수 있는 것도 고통이라고 착각할 수가 있습니다.
죽음이 고통이라고 여긴다면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돌아가시면서, “저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세요”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몸의 고통이 불행이라고 믿는다면 젊고 예쁜 나이에 온몸에 3도 화상을 입고 수많은 고통스러운 수술을 한 뒤에도 지금 행복하여 자신은 이전의 예쁜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이지선씨를 보면 될 것입니다.
혹은 못생기고 병이 들고 부모로부터 버려지는 것이 불행이라고 여긴다면 얼굴에 모반을 가지고 태어나 부모로부터 버려지고 다른 쪽 얼굴엔 암이 들어 뼈까지 깎아내야 했던 김희아씨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은 우리가 불행이라고 여기는 모든 것들을 가졌음에도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진정한 불행과 고통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저는 불행과 행복을 조금 더 본성적이고 근원적으로 접근해 보고 싶습니다. 저는 불행을 3단계로 나눕니다.
첫 번째 불행과 고통은 인간 본성의 자유를 제약받는 것입니다. 정태춘씨 노래에 ‘우리들의 죽음’이란 제목이 있습니다. 이 곡은 1990년 3월 실제 발생했던 어린 남매의 화재 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애절한 멜로디와 슬픈 가사로 표현한 곡입니다.
서울 지하 셋방에서 다섯 살 혜영이는 방바닥에 엎드린 채, 세 살 영철이는 옷더미 속에 코를 묻은 채 숨져 있었습니다. 부모는 시골에서 농사짓다가 힘에 겨워 서울에 올라와 지하 셋방을 얻어놓고 맞벌이를 하던 중이었습니다. 아이들을 맡길 데가 없어 방에 두 아이를 놓고 혹시 부엌에 칼을 만지거나 밖에 나가 길을 잃을까 봐 문을 밖에서 걸어 잠근 상태였습니다. 아이들의 유일한 놀이는 성냥으로 불장난하던 것이었고 그렇게 사고가 발생한 것입니다.
부모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존엄성인 자유를 박탈당하였습니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은 성장하여서도 자신의 존엄성에 대한 믿음을 갖기 어렵습니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1995)는 오직 자유만을 위해 싸우는 한 인물이 나옵니다. 세상에 자유를 박탈당하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은 없을 것입니다.
두 번째 고통은 자유롭기는 하지만 자아의 본성을 따르는 삶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행복으로 여기는 것은 자아와 자신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기쁜 것을 우리 기쁨으로 여기지만 실상은 자아의 종살이를 하는 것입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가 자신이 늑대인 줄 알고 산다면 자신은 행복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볼 때는 그것은 고통입니다.
마를린 먼로는 부족한 것이 없었지만 약물 과다복용으로 사망하였고, 헤밍웨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운지도 모르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많은 부자와 정치인, 연예인들이 이런 고통을 겪습니다. 자유가 있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채울 수 있다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 공허함을 마를린 먼로는 폐장한 해수욕장과 같다고 표현했고 헤밍웨이는 끊어진 필라멘트와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는 인간을 만나야 합니다.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오지 못하면 항상 다 채워져도 공허함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세 번째 고통은 더 큰 행복이 무엇을 따름인지 알면서도 그것을 따르지 못하는 고통입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가 인간을 만나 자신이 인간일 수도 있음을 믿어도 자신이 하는 행동은 늑대의 그것을 정확히 닮아있습니다. 하려고 해도 안 되는 이런 상황이 큰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도 가장 힘들었을 때를 보면 조금 늦은 나이에 성소를 느껴 ‘신학교 가야 하나, 이대로 살아야 하나?’를 고민할 때였습니다. 이때의 1년은 참으로 힘들어서 겨울 바다에도 빠져보고 술도 많이 마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을 따르기로 하고 나서부터 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게 될 수 있었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과연 예수님을 낳고 젖을 먹여 행복하셨던 것일까요? 성모님께서 기쁨의 노래인 마니피캇을 부르실 때는 예수님을 잉태하시고 엘리사벳을 방문하셨을 때였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잉태하신 것을 넘어 하느님의 뜻을 잉태하셨던 것입니다. 그 뜻을 따르는 삶이 남들이 보기에는 목숨을 건 여행일 수 있으나 그 당사자에게는 위 세 개의 인간의 큰 고통을 넘어서는 참 기쁨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인간의 완성을 이루어줄 수 있는 유일한 보물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에게 인간으로서의 충만한 행복을 줄 수 있는 것이 인간의 뜻인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 자녀의 행복까지 누릴 수 있는 유일한 피조물입니다. 하느님의 행복까지도 누릴 수 있는 우리가 기뻐해야 할 유일한 이유는 이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조재형신부-
미국에서 워싱턴 주 부시자로 활동하던 촉망받던 시각장애 정치인 사이러스 하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미주가톨릭평화신문 9월 13일자 보도) 하빌은 어린아이였을 때 안구 암에 걸렸다고 합니다. 수술을 하였지만 시력을 상실하였습니다. 초등학교 때의 일입니다. 놀이터에서 친구들이 놀고 있을 때였습니다. 교장 선생님은 다칠 수 있으니 감시 카메라 앞에 있으라고 했습니다. 하빌의 어머니는 교장 선생님을 찾아가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 아이가 놀이터에서 놀다가 팔을 다칠 수도 있고, 넘어질 수도 있고, 머리를 다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치료하면 고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의 영혼이 다치면 치료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함께 놀도록 해 주십시오.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하빌은 어머니의 격려와 도움으로 자신도 정상인 아이들과 함께 지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비록 넘어지고, 다친 적이 있지만 하빌은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마칠 수 있었고, 정치인이 되었습니다. 장애인을 위한 정책을 만들었습니다.
하빌은 본당 신부로부터 ‘모든 것 안에서 계신 하느님 발견하기’라는 마틴 신부의 책을 선물 받았습니다. 정치인으로 더 성공할 수 있었지만 하빌은 새로운 선택을 하였습니다. 예수회에 입회하였습니다. 남은 삶을 사제로 살기로 했습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 살기로 했습니다. 육체의 장애를 극복하는 정책을 만드는 것도 좋지만 영적인 장애를 치유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의 ‘영신수련’을 통해서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라면 성공보다는 가난을, 건강보다는 아픔을, 오래 사는 것보다는 일찍 죽는 것도 선택할 수 있음을 알았다고 합니다. 예전에 성인전을 읽으면 공주였던 분이 수도자가 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군인이었던 분이 사제가 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정치인이 사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시각 장애이면서 정치인이 사제가 되었던 경우는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 사제의 길을 선택한 하빌에게 하느님의 자비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넘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아십니다. 우리가 악의 유혹에 빠질 수 있다는 것도 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을 것도 아십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하느님의 감시카메라 앞에 세워 놓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에덴동산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에덴동산을 망칠 수 있다는 것을 아십니다. 에덴동산에 있는 생명을 죽일 수 있다는 것도 아십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하느님의 감시카메라 앞에 세워 놓지 않으셨습니다. 만일 우리를 하느님의 감시카메라 앞에 세워 놓으셨다면 인류의 문명과 문화는 없었을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와 예술은 없었을 것입니다. 비록 넘어지고, 다치고, 하느님과 멀어질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믿어 주시고,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소유와 욕심 때문에 차별하였습니다. ‘종교, 국적, 신분, 계층, 성별, 이념, 사상, 학벌, 지역’이라는 이름으로 차별하였습니다. 육체적인 장애를 ‘죄인’이라고 차별하기도 했습니다. 편견과 선입견이라는 카메라 앞에 세워 놓기도 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믿음이 온 뒤로 우리는 더 이상 감시자 아래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속한다면, 여러분이야말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약속에 따른 상속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미 2000년 전에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자녀라고 이야기였습니다. 우리들 또한 바오로 사도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오늘 사람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젓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다른 대답을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더욱 행복합니다.”
살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성공, 재물, 업적, 인간관계, 가족, 건강’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것들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아프고 가난한 이웃을 돌보는 것입니다. 친구가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 함께 가주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같은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우선순위는 이기적인 삶이 아니라, 이타적인 삶이었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은 행복하여라.
신앙인들이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삶의 우선순위로 정한다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삶의 우선순위로 정하면 좋겠습니다. 복음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것을 삶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제들은 더욱 행복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삶으로 드러나는 신앙인들은 참으로 행복할 것입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11,27-28: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있던 한 부인이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27절) 감격에 찬 말을 하고 있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잘 성장하였을 때, 으레 받을 수 있고 또 할 수 있는 찬사다. 이 부인의 찬사는 우선은 예수님을 두고 한 것으로, 바로 그의 어머니인 마리아께 대한 찬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28절) 하신다. 더 중요하고 우리가 모두 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며, 이런 사람들이 진실로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혈연관계로 그분의 형제나 친척이라고 해도, 그분을 믿지 않는다면 그 관계는 아무것도 아니다.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이미 당신의 신앙으로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이웃 사랑으로 실천한 분이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세상의 구세주로 낳아주실 수 있으셨던 분이기 때문에 복되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성모님은 예수님을 낳아 기르신 까닭에 복되기도 하시지만, 그보다 더 큰 의미는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신앙인들 가운데 한 분이신 까닭에 복되시다는 뜻이다.
마리아께서는 몸과 마음으로, 즉 신앙으로 예수님을 품으셨기 때문에 복되신 분이시다. 예수님의 몸을 잉태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을 믿으셨기 때문이다. 이제 예수께서는 마리아께서 복되신 것을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도 주신다. 마리아께서 복되신 것처럼 이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하는 사람들이 계속 누릴 수 있도록 해주셨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하느님을 체험할 수도 있고, 이 체험을 통해서 신앙인의 삶을 갖게 된 것을 감사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삶이 끝까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 안에 항상 새로이 태어나는 것을 체험한다면 구원을 항상 체험하며 완성해 가는 것이다. 그 구원은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뵐 때 완성되겠지만, 이 세상에서부터 구원은 체험적으로 되어야 한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말씀에 한순간 감격하고 체험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해 꾸준히 지키고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다른 복음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고 하였다(참조: 마르 3,35).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바로 예수님을 낳아 젖을 먹이신 성모님이 행복하신 것 같이, 아니 오히려 더 행복할 수 있는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하자. 이제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항구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청하자.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 28)
-한상우신부-
말씀은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을 통해서
깨어난다.
말씀에서
행복으로
번져가는
우리들 관계이다.
말씀없이
행복할 수 없다.
흩어진 행복을
말씀으로
다시 만난다.
삶의 전부를
하느님 말씀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말씀에 모든
삶을 걸으셨던
성모님과 예수님의
삶이다.
모든 관계는
말씀을 듣고
말씀을 지키며
성장한다.
말씀은 우리의
생활을 살리고
마음을 살린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말씀이다.
행복은 말씀과
함께한다.
행복은
말씀이다.
말씀과
함께하는
행복만이
서로를
살린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행복을 이야기하십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루카 11,27)
한 여인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큰 감동을 받아서 외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께 영예를 돌림으로써 자녀인 예수님을 칭찬하는 겁니다. 실제로 자녀의 걸출함은 고생스러움이 없지 않았던 임신과 양육의 과정을 행복과 보람으로 승화하지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육적 관계성에 기인한 행복을 언급하는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답하십니다. 물론 인간적으로 관계 안에서 주고받는 행복도 참 소중하지만, 그보다 더 큰 행복이 있다고 하시는 겁니다. 바로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의 행복입니다.
이는 초월적이고 영적인 행복입니다. 물리적 상황이 어떻든, 인간적 처지가 어떻든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 하느님을 마주할 수 있는 영혼만이 누리는 행복이지요. 이 행복은 성별, 나이, 빈부, 인종, 신분 그 무엇에도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아무리 세속적으로 탁월한 위치에 있어도 태생 계급처럼 딸려 오지 않는, 누구에게나 공평히 열린 행복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율법의 지배를 벗어난 하느님 자녀의 행복을 이야기합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가 율법 아래 갇혀, 믿음이 계시될 때까지 율법의 감시를 받아 왔습니다."(갈라 3,23)
율법은 세상에 구원자가 오시기 전까지, 말하자면 "감시자 노릇"(갈라 3,24)을 했습니다. 하느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사람 사이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하느님의 마음을 인간의 언어로 풀어주다 보니, 하느님 마음보다 인간의 해법이 더 강화되어 본질을 잃어버린 것이고요.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갈라 3,26)
이제는 율법이 아니라 믿음이 우리를 의롭게 합니다. 율법서의 문자는 우리의 육을 지배하기에 태도와 행위, 결과와 성취에 주안점을 둡니다. 이와 달리 성령과 하느님의 자녀됨은 영을 지배하는 현실입니다. 이는 마음과 정신, 지향과 의도, 동기에 불을 지피는 힘이지요.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3,27)
우리가 원래 어떤 사람이든, 성별, 나이, 빈부, 인종, 신분에 상관없이 세례는 우리에게 하나의 옷을 입혀 줍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옷입니다. 이 옷은 우리가 더 이상 육의 원리에 얽매이거나 세속적 행복에 집착하지 않고, 영으로 훨훨 날아오를 수 있는 자유를 선사합니다. 그래서 성별, 나이, 빈부, 인종, 신분에 상관없이 행복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하지요. 세속이 씌워준 어떠한 불평등과 고통의 굴레 안에서도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이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날마다 말씀을 경청하고 묵상하고 머물고 관상하고 실천합니다. 말씀과 함께하는 삶이 곧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 삶이지요. 우리가 말씀을 통해 주님과 일치를 이루며 누리는 행복은 육이 주는 다른 만족과 비교할 수 없이 충만하고 고귀합니다.
헤어나올 수 없는 말씀의 매력에 풍덩 빠진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오늘도 말씀에 머물러 주님과 행복한 하루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믿음과 사랑으로 하나되는
-김찬선신부-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가 율법 아래 갇혀,
믿음이 계시될 때까지 율법의 감시를 받아 왔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온 뒤로 우리는 더 이상 감시자 아래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오늘 이 갈라티아서를 읽으면서 탁 드는 생각은
죄를 짓지 않는 사람보다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하느님을 믿는 사람보다는 사랑하는 사람이 낫겠다는 거였습니다.
사실 이것으로 오늘 독서를 통한 성찰은 그쳐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요점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하지만 성찰을 더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
더 성찰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기에 여기에 살을 좀 더 붙여보겠습니다.
죄를 짓지 않는 것은 오늘 바오로 사도가 얘기하듯이 율법으로도 가능한데
그것은 율법이 감시자의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을 때마다 우리를 감시하고 있던 율법이 우리를 찌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는 것은 죄짓지 않는 것이 인생의 제일 중요한 목표일
때이고 그래서 율법으로 죄짓지 않을 때 인생을 망치지 않을 수는 있지요.
그러나 이것은 자기가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일 뿐 그러니까 기껏해야
완전한 사람이 된다거나 결벽 주의자처럼 무결점의 사람이 될 뿐입니다.
그런데 설사 율법을 지킴으로써 이런 사람이 될 수 있을지라도
이런 사람이 행복하고, 인생을 잘 산 거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완벽 주의자나 결벽 주의자는 자기도 힘들고 남도 힘들게 하여
그 주변에 아무도 사람이 끼지 않는 불행을 초래할 뿐입니다.
너무도 깨끗한 집에는 감히 발을 들여놓기 힘든 것과 같지요.
그런데 관계를 살지 않고, 무엇보다도 하느님과의 관계를 살지 않고도
이런 사람이 행복하고, 인생을 잘 산 거라고 할 수 있겠냐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잘 지켜 죄없고 완벽한 사람이 되는 것보다는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과의 관계적 행복을 사는 것이 더 낫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따르고,
하느님께서 믿어주시는 자가 되는 것, 그 얼마나 흐뭇합니까?
저는 옛날 선생님께서 저를 믿어주실 때 그리고
사람들이 저를 믿어줄 때 믿음을 배신하지 않기 위해
저는 제 삶을 스스로 점검하고 옳게 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믿는 관계일 때 서로 자신을 개방하고
상대가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용함으로써 믿음의 일치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갈라티아서는 서로 믿음으로써 일치를 이루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모두가 하나 되는 차원을 얘기합니다.
차별이 없는 하나일 뿐 아니라 분열이 없는 완벽한 하나를 얘기하는 겁니다.
그러나 믿는 관계보다 더 행복한 관계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믿음의 일치보다 더 완전한 일치가 사랑의 일치이기 때문입니다.
일치를 이루기만 하면 됐지 사랑의 일치가 믿음의 일치보다
왜 더 완전하고 더 나은지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고,
실제로 왜 더 완전하고 나은지 설명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바오로 사도도 믿음과 희망과 사랑 중에
사랑이 최고라고 얘기했고 제가 생각하기에도 개방하여 하나 되는 것보다
자신을 무화하고 내어줌으로써 하나가 되는 것이 더 완전하고 뜨겁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의 완성이니 믿음에서 하나 되는 것에서 출발하여
사랑으로 하나 되는 것으로 우리는 나아가도록 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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