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10월 8일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Margaret K 2020. 10. 7. 05:17

2020 10 8일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나는 말한다.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루가 11,5-13)

 

 I tell you, ask and you will receive;
seek and you will find;
knock and the door will be opened to you.
For everyone who asks, receives;
and the one who seeks, find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한재호신부-


오늘 복음은 우리가 하느님께 간청하면 그분께서는 이에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점은 그분의 응답은 우리가 기대하는 때와 방식이 아니라, 그분께서 원하시는 때에 그분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가령 꼬마 아이가 자기 아빠에게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면 아빠는 그 간청을 곧바로 들어주겠습니까? 아이가 어른이 될 때까지 기다리고, 컸을 때 운전면허를 취득할 수 있게 뒷바라지를 하고, 그 뒤 자동차를 마련할 수 있도록 도와준 다음에야 운전할 수 있게 하지 않겠습니까? 하느님께서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기 위하여 적절한 때를 살펴보고 계시며, 심지어 그때까지 우리가 감히 청하지 못하는 은혜도 주십니다.
또 아이가 동네에서 친구들과 싸웠는데, 분을 이기지 못하여 엄마에게 달려가 그 친구를 혼내 달라고 청하면 엄마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이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으며 우선 화를 달래고, 무엇이 올바른지 차근차근 설명해 준 뒤에야 그 친구에게 가서 진정한 화해를 이끌지 않겠습니까? 하느님께서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우리의 기도가 뱀을 달라는 기도라면, 그분께서는 생선으로 응답하시기 위해서 적절한 형태를 찾으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의 침묵을 두고, 그분을 무능하게 보거나 선하지 못한 폭군으로 내몬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분께서 언제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묘한 방식으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점을 굳게 믿어야 하겠습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분들을 종종 만납니다. 이분들의 고통은 이런 것입니다. “왜 저는 이렇게 예민한 것일까요?” 사람들은 예민한 성격보다는 둥글둥글한 성격을 좋아합니다. “너는 성격이 예민해.”라는 말과 “너의 성격은 둥글둥글해.”라는 말 중에 어떤 말이 좋은 말로 들립니까? 말 한마디에 흔들리는 자신의 성격이 아니라, 어떤 말에도 전혀 상관없는 성격이길 원합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세상을 바꾼 사람, 세상에 커다란 획을 그은 사람은 모두 예민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예민한 성격을 좋은 쪽으로 바꿀 수도 있고 오히려 정반대인 나쁜 쪽으로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스티브 잡스, 아이작 뉴턴, 윈스턴 처칠, 슈만 등은 모두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로 심각한 우울증을 앓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예민함을 좋은 쪽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자신을 어떻게 받아들이냐가 중요합니다. 예민한 성격이 결코 나쁜 성격이 아님을 인정하면 또 다른 변화를 가져올 수가 있습니다. 이 인정의 단계에 들어서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내가 필요한 것을 찾고 계속해서 주님께 매달리며 의탁하는 믿음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우리는 기도로 청하고, 바른 삶으로 찾고, 한결같은 신앙으로 두드려야 합니다. 은혜로운 좋은 선물을 주는 분이신 하느님께서 우리가 청하고 찾고 두드리면 기도를 들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다만 당신의 시간표에 따라서 들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주님의 문을 두드리는 것은 그분께 기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우리는 기도할 때, 몸과 영혼에 해가 되는 것을 구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욕심에서 나오는 것을 청할 때가 참 많습니다. 여기서는 자기만을 위한 주님의 특별한 손길이 필요해집니다. 이를 주님께서 좋아하실까요? 따라서 성령께로부터 오는 선물을 청할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거룩한 천사와 성인들과 함께 우리를 거룩하고 흠 없게 만들어 줄 좋은 선물들을 주고 싶어 하십니다.

이렇게 문을 두드리는 기도를 통해 우리는 진정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하면서 새로운 나의 변화를 찾게 될 것입니다.
인생이란 배움의 연속이다. 사랑하는 법, 놓아주는 법, 자신과 타인을 향해 가장 친절하게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브로니 웨어).


나의 변화.

수피 바야싯의 글입니다.

젊은 시절에 나는 혁명가였고 주님께 드리는 나의 기도는 모두 이와 같았다.

‘제게 세상을 뒤바꿀 힘을 주소서.’

중년이 이르러 단 한 사람의 영혼도 고쳐놓지 못한 채 반생이 흘러갔음을 깨닫고 나의 기도는 이렇게 달라졌다.

‘저와 인연이 닿은 모든 사람을 변화시킬 은총을 주소서. 가족과 친지들만 변한다 해도 저는 만족하겠나이다.’

이제 오늘내일 할 만큼 늙어서야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던가를 알게 되었다. 이제 나의 유일한 기도는 이것뿐이다.

‘저 자신을 변화시킬 은총을 주소서.’

세상 사람들은 남의 변화만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변하지 못하는 남을 향해서 판단력이 부족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욕심쟁이라며 비판합니다. 그러나 가장 먼저는 ‘나의 변화’가 아닐까요?

내가 변화될 때 다른 사람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온전하게 알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사면권이다

-전삼용신부-


어제 주님의 기도를 말씀드리며, 주님의 기도는 진리를 담고 있어서 ‘나침반’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자주 바치는 사람은 인생의 방향을 잃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방향만 안다고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을까요? 그 방향으로 나아갈 힘도 있어야 합니다. 감옥에 갇힌 사람은 움직일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십계명을 스스로의 힘으로 지킬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 계명을 주는 이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 계명을 지킬 힘이 생기지 않습니다.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실상 파라오를 사랑하며 십계명을 지키려 하였습니다. 감옥에 갇혀있으며 집의 방향을 안다고 갈 수 있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주신 예수님을 사랑하며 그 계명을 지키려 합니다. 우리 힘으로 지키려 하지 않고 그분의 도우심을 청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가 항상 청원으로 되어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주님의 기도대로 나아갈 권한과 힘을 청하는 기도입니다.

 

      저의 유튜브 채널에 올라온 ‘나라물고기’님의 사연을 소개해드립니다.

“6년 전 한국에 들어와 건강 검진 4시간 마치고 어머님 산소를 이장 신청하러 갔습니다. 신청 도중 병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초음파상 간암이 보이니 내일 와서 CT 촬영하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음날 의사 선생님이 초음파를 보여주는데 제가 보아도 큰 종양이 보이고 의사는 90% 간암이라 확신했습니다.

      저는 올 것이 이제 왔다고 생각했지요. 의사를 만나고 나오며 마음으로 ‘하느님 감사합니다, 찬미합니다. 제가 간암이랍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감사 찬미 기도하면 늘 그렇듯이 마음속 두려움이 사라져요. 저는 간염이 있었고 동생 둘이 이른 나이에 간암으로 죽었으니 이제 내 차례구나 생각한 것입니다.

 

      CT 찍고서 일단 어머님 산소 이장 끝내고 보자. 할 수 있는 자녀는 저밖에 없으니까. 간암으로 수술을 한 동생은 2년 살고, 아무것도 안 한 동생은 7개월 살았으니 1개월 후에 예정된 아들 결혼을 보고 죽음을 준비하리라 생각했어요. 아버님 옆으로 이장 다 마치고 난 후 다음날 CT 결과는 간암은 아니었어요.”

 

      이 일이 6년 전이니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분은 간암 선고를 듣고 주님의 기도를 바친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감사와 사랑’으로 종합될 수 있습니다. 감사와 사랑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내 안에서 저절로 솟는 감정이 아니란 뜻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불만의 감옥으로부터 해방해 주십니다. 그래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의 기도에서 제시하는 방향에서 흐트러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게 해 주십니다. 주님의 기도는 방향과 함께 나아갈 힘과 자유를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주님의 기도를 꾸준히 바치라는 의미로 이런 비유 말씀을 해 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그 친구는 가난하여 벗에게 내어놓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친구를 찾아가 빵 세 개를 청합니다. 그러나 그 친구는 이미 온 가족이 잠자리에 들었으니 괴롭히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벗을 위해 그는 계속 청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라고 하시는 말씀은 세속적인 것, 육적인 것, 세속적 명예를 청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 반대로 그것들을 이길 힘을 청하라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이길 힘을 주님의 기도로 청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기도를 통해 성령께서 들어오십니다. 그 힘으로 우리는 자기를 이기고 어느 상황에서건 감사와 찬미, 사랑의 마음을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그 힘으로 주님을 한 발짝 더 닮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어떤 사람이 살인죄로 복용 중인 동생을 찾아갔습니다. 그 사람은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사람으로서 동생을 사면할 임금의 사면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동생에게 묻습니다.

“만약 자유를 얻는다면 나가서 무엇을 하고 싶니?”

“나를 감옥에 처넣은 판사부터 죽여야지!”

그는 밖으로 나오며 사면권을 찢어버렸습니다.

      사면권은 성령과 같습니다. 그 성령은 내가 그 성령을 주시는 분의 뜻대로 살 수 있는 의도가 있는지에 따라 주어지기도 하고 주어지지 않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그 성령의 오심이 합당한 의도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 주님의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기도를 통해 성령을 청하면 성령을 주지 않으실 수 없습니다. 성령은 세속-육신-마귀, 즉 파라오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면권입니다. 이 빵 세 덩어리를 끊임없이 청하면 우리는 우리의 감옥인 자아로부터 탈출한 참 자유인이 됩니다. 참 자유인이 되었다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성령의 열매인 감사와 사랑이 멈추지 않고 솟아나옵니다.


-조재형신부-


한 달 전에 어머니께서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9년 전에는 아버님께서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평생 그토록 사랑하셨으니 하느님의 품에서 두 분이 반갑게 만나셨을 거라 생각합니다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는 잘 몰랐는데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니 가슴이 뻥 뚫린 느낌입니다동료 사제들도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면 의지할 곳이 없어지는 느낌이라고 합니다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그렇듯이 저의 어머니께서도 평생 가족들을 돌보며 사셨습니다장례미사 때 유족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부모님의 뜻을 받아들여 형제들이 서로 화목하게 지내십시오부모님께서 신앙 안에서 사셨으니 신앙에 충실하십시오고인을 위해서 기도해 주신 분들에게 감사하십시오.” 저도 제가 강론 때 말하였던 것처럼 형제들과 화목하게 지내려 합니다사제의 직무에 충실하려 합니다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려 합니다.

 

보좌신부 때입니다인사이동으로 중곡동용산세검정제기동에 있었습니다어머니께서는 제가 가기 전에 먼저 성당에 가서 기도하셨습니다아들 신부가 잘 지낼 수 있도록 기도하셨습니다제가 있을 때는 한 번도 오지 않으셨습니다마치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의 길을 미리 준비하였던 것처럼 어머니께서는 제가 가야할 본당에 미리 가셔서 어머니의 방법으로 준비하셨던 것 같습니다본당신부 때입니다신자 수가 적었습니다평일 미사에는 5명 정도 나왔고주일에도 50명 정도 나왔습니다사제관에서 근무할 사람을 구할 형편이 되지 않았습니다어머니께 같이 지내면 좋겠다고 부탁드렸습니다어머니께서는 3년 동안 저와 함께 지내셨습니다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셨던 아버님께서도 3년 동안 혼자 지내셨습니다자식을 위한 사랑은 아버님과 어머니가 같았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제게 따뜻한 밥을 해 주셨습니다항상 저보다 먼저 일어나셨고저보다 늦게 주무셨습니다레지오도 하셨고교리도 가르쳐 주셨고세례식 때는 대모가 되어 주셨습니다교우들도 어머니를 가족처럼 따뜻하게 대해 주었습니다아픈 사람을 찾아가서 기도해 주셨습니다아버님도 가끔씩 어머니를 보기 위해서 오셨습니다아버님께서는 어르신 복사단을 만들어 주셨습니다어르신들과 장기도 두시고집으로 가셨습니다지금 생각하니 혼자 집으로 돌아가시는 아버님의 마음이 허전했을 것 같습니다그때는 몰랐습니다아버님은 강하신 분이기에 아무렇지도 않으셨을 거라 생각했습니다어머니께서는 따뜻한 마음으로 저를 도와 주셨고아버님께서는 지혜로 제게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담벼락 너머에 있던 은행나무의 가지를 잘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바람이 불어비가 내리면 가지가 부러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지나가다 사람이 다치면 성당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저는 그런 생각을 못하였습니다사목회 총무와 함께 가지를 잘랐습니다수녀원 마당에 꽃을 심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꽃을 보면 수녀님의 마음이 맑아 질 거라고 하셨습니다수녀님이 기분이 좋으면 기쁘게 일하실 거라고 하셨습니다저는 그런 생각을 못하였습니다사목회 총무와 함께 채송화나팔꽃봉숭화코스모스를 심었습니다꽃을 보니 제 마음도 맑아졌습니다이제는 두 분 모두 하느님의 품에서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청하여라너희에게 주실 것이다찾아라너희가 얻을 것이다문을 두드려라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오늘 주님께 청하고 싶습니다. “세상을 떠난 부모님과 죽은 모든 영혼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소서.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반영억신부-


“우는 아이에게 젖을 준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나 원하는 사람이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간절히 원하면 반드시 얻을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을 헤아려 주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꿈은 이루어집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이 얻지 못하는 까닭은 하느님께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해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욕정을 채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야고4,2-3). 그러므로 구하십시오! 주님께서 반드시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신다고 믿고, 하느님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11,9-10). 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꼭 들어주신다는 보증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주님에게서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야고1,6-7). 사실 “우리가 그분에 대하여 가지는 확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그분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을 알면, 우리가 그분께 청한 것을 받는다는 것도 압니다”(1요한5,14-15). 오늘 복음은 바로, 우리의 기도를 꼭 들어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청해도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시편 66장18절을 보면, “만일 내 마음속에 죄악이 들어있었다면 주님께서 들어주지 않으셨으리라.” 라고 적고 있습니다. 잠언에도 “나는 대답하지 아니하리라. 또, 나를 애써 찾겠지만 만나지 못할 것이다. 주 하느님을 두려워하여 섬길 줄 모르고 지식을 멀리한 탓이다. 내 충고를 따르지 않고 온갖 훈계를 업신여긴 탓이다”(11,27-30).하였습니다. 완고한 자의 기도는 응답받지 못합니다. “귀를 막고 하느님의 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마저 역겨워 하리라”(잠언28,9). 그리고 “구해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욕정을 채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야고4,3). 더더욱 악행을 저지른 자의 기도는 외면하십니다. “두 손 모아 아무리 빌어 보아라. 빌고 또 빌어 보아라.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너희의 손은 피투성이, 몸을 씻어 정결케 하여라”(이사1,15-16).

기도를 했는데 들어주시지 않는 이유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첫째는 마음 없이 청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청해야 합니다. 또한 끈질기게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디안들이 가뭄에 기도하면 반드시 비가 온다고 합니다. 그들은 비가 올 때까지 기도를 한답니다. 한편 내가 겸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나의 기도는 어느 쪽에 가까운지를! 또 다른 이유는, 들어주면 오히려 피해를 주기 때문입니다. 과일을 까고 있는데 어린아이가 칼을 달라고 졸라대며 칭얼거린다고 칼을 줄 수는 없는 법입니다. 허락하면, 교만해지고 피해가 간다면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청하되, 합당한 마음으로 청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믿음으로 소원을 하느님께 말씀드리기 바랍니다. 분명한 것은, 언제나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신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그분의 방법으로, 그분이 원하시는 때에 반드시 주신다는 것입니다. 정해진 기도문을 읊는 것도 필요하지만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할 때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 무엇인지 알게 해 주시고, 선한 열매를 맺어 주십니다. 그러니 쉽게 포기하지 말고 그분의 때와 방법을 헤아리며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청하여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 
-송영진신부-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루카 11,8).”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안 주셔도 끈질기게 졸라 대면 마침내 주실 것이다.”
라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은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좋은 때에 주시는 분이니,
당장 못 받아도 실망하지 말고 꾸준히 기도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다음 말씀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루카 18,7-8).”
하느님은 미적거리시지 않는 분, 우리 기도를 지체 없이 들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때’는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정하십니다.
따라서 ‘미적거리시지 않는다, 지체 없이 들어 주신다.’ 라는 말은,
우리 쪽의 기준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하느님 쪽의 기준으로 하는 말입니다.
‘가장 좋은 것’도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정하십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바라는 것’을 ‘가장 좋은 것’으로,
‘지금 당장’을 ‘가장 좋은 때’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로 가장 좋은 것인지, 아닌지는 하느님께서 판단하실 것이고,
나쁜 것이라면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또 언제 주실 것인지도 하느님께서 판단하실 것이고,
필요하면 지금 당장 주실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백 년 뒤나 이백 년 뒤에 주실 때도 있습니다.
(로마제국의 종교박해 때에 순교자들은 ‘종교와 신앙의 자유’를 갈망했고,
그것을 하느님께 간절하게, 또 끈질기게 청했습니다.
그랬는데 종교와 신앙의 자유를 얻은 것은 삼백 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 11,9-10).”

이 말씀은, ‘능동적인 수용’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전지전능하신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시고, 그것을 제때에 주신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과 “청하여라.” 라는 말씀이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그것은 아니고, “아버지께서 주신 그것을 청해서 받아라.” 라는 뜻입니다.
우리 기도는, 안 주시려고 하는 아버지를 졸라서 받아내는 일이 아니라,
이미 주신 것을 잘 받으려고 준비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청하지 않는 것은 받으려는 마음이 없는 것이고,
받지 않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은총은 능동적으로 받기를 원하고,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받게 됩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사람은
자기가 받으려고 하지 않아서 못 받게 됩니다.
‘성사’가 좋은 예입니다.
우리 교회의 일곱 가지 성사는
받기를 원하고, 청하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만 베풀어줍니다.
청하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고, 준비도 안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그에게 억지로 베풀지는 않습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마음을 바꾸기 위한 일이 아니라, ‘내가 변화되기 위한 일’,
즉 주시는 은총을 잘 받는 사람으로 변화되기 위한 일입니다.

여기서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라는 말씀은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와 같은 뜻의 말씀입니다.
(같은 뜻의 말씀을 세 번이나 반복한 것은
‘능동적인 수용’ 태도를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라는 말씀은, “잠겨 있는 문을
열어 달라고 두드려라.”가 아니라, “너희가 들어가야 할 문을
아버지께서 이미 열어 놓으셨으니 그 문으로 들어가라.” 라는 뜻입니다.
(그 문은, 아버지께서 자물쇠는 열어 놓으셨지만, 아직 닫힌 채로 있는 문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 문을 찾아서 열고 들어가는 일입니다.
표현은 그렇지만, 뜻으로는
“아버지께서 주시는 것을 청해서 받아라.”와 같습니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11-13)”

이 말씀은 ‘올바른 지향’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만 주시는 분입니다.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라는 말씀에서 ‘성령’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뜻하는 말인데, 그 은혜는 우리 생각을 초월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은혜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아버지께 청해야 할 것도 ‘가장 좋은 것’이어야 합니다.
만일에 ‘나쁜 것, 악한 것, 나만 좋아하고 남에게는 해를 끼치는 것’을 청한다면,
아버지께서는 절대로 그것을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과 내가 좋아하는 것이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좋은 것,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좋은 것을 청해야 합니다.
자기가 원하고, 좋아하는 것이라고 해도, 그것이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라면,
그것을 청하는 기도를 하는 것은 기도가 아니라 죄를 짓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와 이웃 사랑을 거스르는 죄.)
그런데 ‘나에게 가장 좋은 것’, 또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좋은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을 모르니까 그냥 내가 원하는 것을 청하는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닌가?
바로 그것도 우리가 기도해야 할 이유입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로마 8,26).”
성령의 도움을 받으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청하는 기도를 하더라도, 그것만 달라고
고집을 부리지 말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내가 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또 내가 생각했던 때보다
훨씬 더 좋은 때에, 그것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11,5-13: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한밤중에 온 식구와 잠자리에 든 벗을 깨워 자기가 필요한 것을 얻어낸 사람이 있다. 잠자리에 든 친구는 친구의 끈질긴 요구를 마지못해 들어주었지만, 주무시지도 않고 우리를 깨워 기도하게 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주시겠는가? 우리가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우리 자신만이 아니라, 남들을 위해서 그분의 은총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받을 수 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벗(요한 15,13 참조)이시기 때문이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9절) 하늘나라는 게으르고 한눈파는 자들이 아니라, 그것을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이들에게 주어지고 발견되고 열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 나라의 문은 기도로 청하고 바른 삶으로 찾고 한결같은 신앙으로 두드려야만 열리는 문이다. 기도와 올바른 삶 그리고 한결같은 신앙으로 노력해야 한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12절) 하신다. 여기서 생선은 믿음을 상징한다. 생선은 물세례를 연상할 수 있고 이 세상 파도에 상처를 입지 않는다. 반대로 뱀은 사람을 속여 하느님을 믿지 않게 만든다. 달걀은 희망을 상징한다. 앞으로 병아리가 생겨나듯 곧 눈에 보이리라고 희망하기 때문이다. 전갈은 희망의 반대이다.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필리 3,13) 나아가며, 꼬리에 독침을 품고 있는 전갈을 경계해야 한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로마 8,24)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태 7,9) 빵은 사랑을 상징한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1코린 13,13)이라 하였고, 음식물 가운데서는 빵이 단연 으뜸이기 때문이다. 돌은 그 반대이다. 돌처럼 단단히 굳은 마음은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것은 당신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주실 줄 아시는 그분이 우리에게 청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하시는 것이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13절) 우리의 마음이 악에 휩쓸리기 쉽고 만유의 하느님과 달리 선에만 이끌리는 존재가 아니지만, 우리 자식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알듯이 그분께서는 성령을 주신다고 하신다.



여기서 성령은 하느님과의 친교 안에 들어감을 뜻하며 또한 성령의 은사를 가리킨다. 그것은 모든 면에서 좋은 것이다. 그것을 얻는 사람은 가장 복되고 칭송을 받을 만한 사람이 될 것이다. 기도로 하느님으로부터 가장 좋은 것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느님 안에 깨어있는 삶이 되도록 노력하여야겠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기도의 자세를 일러 주십니다.

"줄곧 졸라 대면"(루카 11,8)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한밤중에 두 벗 사이에 생긴 일을 비유로 드시면서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일깨워 주십니다. 아무리 벗이어도 모든 요청을 다 수락하지는 않겠지만, 
"줄곧 졸라 대면" 결국은 들어 주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한밤중에 창밖에서 빵을 부탁하는 벗이 꼭 성가시고 귀찮아서 그 청을 들어 주었을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가만히 그 입장에 머물러 보면 다른 개연성도 없지 않습니다. 누군가 한 차례 거절된 일에 대해서 계속 간절히 매달린다면, 당장은 인간적으로 성가시고 짜증스러울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저 사람 정말 절박하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니까요.

줄곧 졸라 대는 모습은 절박함의 표현입니다. 다른 길이 없으니까요. 차선책도 대안도 부재한 생황에서 기대할 곳은 오직 상대방의 결정 번복뿐입니다. 물러설 수 없는 이는 될 때까지, 들어 허락될 때까지 청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 11,10)


예수님께서 기도의 원리를 아주 단순하고 명백하게 설명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미 체험으로 알고 계시는 진리입니다.

이 말씀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 사람은 어쩌면, 아직 기도한 바를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때까지 기도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그에게 이 말씀은 선택적 가설처럼 들릴 테지요.

반대로 간절한 기도가 이루어진 체험을 간직한 이들은 그 기도를 들어 주실 때까지 인내와 끈기로 충실히 매달렸던 이들이겠지요. 그들에게 이 말씀은 흔들릴 수 없는 진리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13)


'악하고 이기적인 인간도 제 자녀에게는 필요한 좋은 것을 주려 하는데 아버지 하느님은 어떠시겠는가?' 하고 예수님께서 반문하십니다. 자녀에 대한 인간의 사랑이 우리 인간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투영이고 닮음이니 그 원형이신 분이 어떠하실지는 유추가 가능하지요.

우리의 기도는 하느님께서 미리 우리 마음에 심어 주신 갈망이 제 길을 찾는 여정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이루시려는 것을 우리가 갈망하도록 마음을 움직이십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청한 바는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루어 주시리라 믿기에, 이루어 주실 때까지 기도를 포기하지 않으니까요. 거기에 성령까지! 주님은 우리가 바라던 것에 더하여 성령까지 주심으로써 당신의 응답을 완성하십니다.

성령께서는 기도한 이가 체험한 하느님의 응답을 감사하게 하시고 계속 기억하게 해주십니다. 기억은 우리 삶에 주님의 현존을 지속시키는 영적 장치입니다. 그리고 믿음도 더해 주시지요. 성령의 힘으로 이 믿음을 통해  우리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릅니다.
(로마 8,15 참조)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갈라티아인들에게 반어법적 질문을 연달아 던집니다.

"여러분은 율법에 따르는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어서 성령을 받았습니까?"(갈라 3,2)


갈라티아인들에게서 자신들이 받은 그리스도의 은총을 어느새 잊어버리고 눈에 쉽게 보이는 율법 준수적 행위로 구원의 보증을 기대하는 퇴행이 보였나 봅니다. 이에 사도가 다급히 그들을 일깨웁니다.

"복음을 듣고 믿었기 때문에"(갈라 3,)


주님께서 그들에게 성령을 주시고 그들 가운데서 기적을 이루신 이유는 그들이 복음을 듣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단순하고 순수한 믿음을 보신 주님께서 기적도 성령도 주신 것이지요. 사도는 지금 그들이 신앙의 출발점을 기억하도록 질문으로 휘몰아치며 그들을 흔들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기도를 통해 받은 것들은 겨자씨 한 알 만큼도 못 되는 보잘것 없고 유약한 믿음을 대견히, 어여삐 보신 주님의 자비 덕분입니다. 성령께서 기도의 응답으로 받은 은총을 우리 영혼에 각인시키시어 기억하게 하시고 감사하게 하시니, 기도의 응답들은 회상에 머물지 않고 우리 인생 여정에 함께 동행합니다.

진정 기도하는 이는 청하는 바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자신 안의 갈망이 곧 이루어 주시려는 주님의 의지임을 직관으로, 체험으로, 관상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바는 그저 지치지 않고 주님께 그분의 의지를 일깨워 드리는 것뿐입니다. 진정 기도하는 이에게 다른 길은 없습니다. 퇴로는 이미 끊어버렸으니, 주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오롯이 집중하고 전념하는 열렬한 사랑만이 오직 남은 외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 영혼이 간절히 원하는 바를 깊이 바라보고, 이 마음을 주신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오늘 되시길 바랍니다. 믿음을 주신 주님께서 성령과 함께 기도의 열매 또한 맺어주실 것입니다. 단, 그 "때"와 그 "방식"은 주님의 재량이고 몫이니 거기까지 넘보지 않도록 겸손히 삼가면서, 청하고 찾고 두드리며 열렬히 그분 창문 아래 머무릅시다. 벗님이 간절히, 절박히 청하는 바가 꼭 이루어지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성령으로 시작한 일, 성령으로 마치도록   

-김찬선신부-

 

“여러분은 그렇게도 어리석습니까?
성령으로 시작하고서는 육으로 마칠 셈입니까?”

오늘 이 갈라티아서 말씀이 눈에 바로 들어오는 것은
제가 그리고 어쩌면 여러분도 이런 잘못을 자주 범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 하는 일도 그런지 모르지만 옛날 저의 경우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시작하였는데
그 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내 일이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평양에 큰 식당과 병원을 짓는 사업이었습니다.
4년여를 끌던 북한과의 협상이 마침내 타결이 된 날 저는
너무 기뻐서 즉시 경당으로 달려가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렇게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문득 ‘왜 내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지?
하느님께서 내게 고마워해야 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드는 거였습니다.
왜냐면 감사를 드린 것은 그 일을 내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닙니까?
내 사업이 내 뜻대로 되게 해주신 거라고 생각하고 감사드린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사업을 시작할 때는 하느님의 사업이라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니까 하는 거라고 하며 시작했었지요.

그러므로 그 사업이 진정 하느님의 사업이라면
그 일이 성사되었을 때 오히려 하느님께서 수고한 제게
'찬선아 고맙다!'고 하셔야 할 것이지 제가 감사드려야 할 것은 아니지요.
설사 제가 감사드린다 해도 이 일에 저를 써주셔서 감사드린다고 해야지요.

그래서일까 갈라티아 사람들에게 오늘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의 그 많은
체험이 헛일이라는 말입니까?”
라고 말하는데 저도 그런 체험이 많지요.

그중에 하나가 역시 앞에서 얘기한 그 북한 사업을 할 때입니다.
그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큰돈이 필요했고,
그래서 자선 음악회를 몇 차례 했는데 첫 번째 음악회 때
마침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하여 표를 파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요.

그래서 저는 표를 파는 데 온 신경을 쓰고 애도 썼는데 그러던 어느 날,
새벽 묵상 중에 문득 표를 파는데 혈안이 되어서 사람을 사람이 아니라
표를 사줄 사람인지 아닌지의 관점에서 만나는 저를 보게 되었지요.

이렇게 사람을 돈으로 보는 저를 보면서 깜짝 놀라 지금 하는 이 사업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하느님의 일이라면 하느님께서 되게 해주실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제가 아무리 애써도 안 될 거라고 마음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랬는데 그날 오후 어떤 자매님이 당신의 결혼 패물인 금목걸이를
형제를 통해 제게 보내오셨는데 자신을 누구라고 밝히지도 않으셨습니다.

저는 이 사건이 그날 새벽 욕심을 비운 것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으로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제게 보내신 메시지라는 느낌이 왔습니다.

당신의 사업은 당신이 되게 해주실 것이니 주님께 맡기라는 메시지,
경고적인 차원에서는 내 사업인 양 욕심부리지 말라는 메시지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분의 그 패물을 북한 사업에 보태지 않고 지금까지
간직하면서 주님의 메시지를 상기시키는 성사적 표지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체험을 진하게 했음에도 2년도 지나지 않아 하느님 사업을
또 제 사업으로 만들고 감사를 드렸던 것이었고, 이것은
오늘 바오로 사도가 나무라듯 은총 체험을 헛것으로 만드는 짓이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기도에 대해 가르치시면서
하느님께서는 청하는 사람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성령을 주신다고 하시는데
우리도 욕심을 채우기 위해 청하지 않고 성령을 주시도록 청해야 할 것이고,
성령으로 시작한 일은 성령으로 마칠 수 있게 해달라고 늘 청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10월 11일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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