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6일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루가 10,38-42)
Martha, Martha, you are anxious
and worried about many things.
There is need of only one thing.
Mary has chosen the better par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한재호신부-
오늘 복음에서 마르타와 마리아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방식은 서로 달랐습니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그들의 위치입니다. 마르타는 예수님보다 ‘위’에 있습니다. 이는 ‘다가갔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말 ‘에피스테미’를 번역한 것인데, 본디 그 뜻이 ‘위에 서다.’입니다. 곧 이 말은 예수님께서 바닥에 앉아 계실 때 마르타는 그 옆에 서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르타가 예수님을 자신보다 위에 계신 분이 아니라, 아래에 계신 분으로 여긴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다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보다 ‘아래’에 있습니다. 이는 ‘주님의 발치에 앉았다.’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의 위치에서 알 수 있는 그들의 사랑법은 무엇일까요? 마르타는 자신이 사랑의 주인공이 되어 예수님보다는 자신의 생각에 시선이 머물러 있습니다. 그 결과 염려와 걱정이 가득하여 예수님을 다그치기에 이릅니다. 반면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행동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마르타와 달리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수 있도록 모든 일을 내버려 두고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합니다.
어느 책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한 인간에게 가장 큰 영광은 그가 무엇을 하였느냐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해 주셨느냐이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발치에서 그분 마음을 헤아리며 그분께서 일하시도록 내어 드리는 것이 그분 사랑에 맞갖은 사랑법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냉면집 장사가 여름 한 철이다.”
물론 정답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함께 있던 방송인들이 이 대답이 맞을 것으로 예측하는 것입니다. 한글만 보면 당연히 그렇게 예측할 수도 있는 ‘냉면한철’입니다.
그러나 이는 ‘낯빛이 싸늘하기가 차가운 쇠붙이 같다’라는 뜻으로, ‘사사롭고 편벽됨이 없어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을 이르는 말입니다. 한자를 보지 않고서는 전혀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삶도 겉으로만 봐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를 잘 알면서도 우리는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고 단죄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따라서 그 안에 담긴 뜻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더군다나 주님의 뜻은 그냥 눈으로만 쉽게 보고 판단할 수 있는 간단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예수님을 집으로 모신 마르타는 너그러운 손님 접대의 덕을 보여 줍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분과 그분의 성도들을 위해 음식을 장만한 것은 매우 훌륭한 일입니다. 그런데 마르타의 동생인 마리아의 모습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그녀는 마르타처럼 손님 접대를 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생명의 빵이신 주님 발치에 앉아서 정의와 진리를 즐겼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하나 발생합니다. 시중을 드느라 분주한 자신과 달리 주님 발치에 편하게 앉아서 말씀을 듣는 마리아에 관한 판단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라고 청을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마리아를 칭찬하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칭찬하신 것은 마르타가 잘못했다는 뜻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느님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 것은 영원에 속하는 일이지만 육신을 섬기는 일은 지나가 버리는 일일 뿐임을 밝히신 것입니다. 결국, 겉으로는 보이는 모습을 보고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보다 그 안에 담긴 뜻을 볼 수 있어야 함을 마르타에게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어떤 모습도 주님께서는 기쁘게 받아주십니다. 주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시는 것을 부족한 인간의 눈으로 부정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어느 단체에 가입하기 위해 가입 신청서를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항목 중에 취미와 특기가 있는 것입니다. 학창시절에는 이 항목에 쓸 것이 참 많았습니다. 우표 수집, 기타 연주, 독서, 탁구…. 너무 많아서 글씨를 쓸 칸이 부족한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내 취미와 특기가 뭐지?’라고 자신에게 반문할 정도로 특별한 취미도 또 나름의 특기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도 없는 것 같습니다. 이는 너무 각박하게 살아왔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그래서 어제는 오랜만에 기타를 꺼내서 옛날 가요를 힘차게 불러봤습니다. 더군다나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미사 때 성가도 부를 수 없지 않습니까?
힘이 불끈 솟는 것만 같습니다. 옛날 취미가 지금에도 힘을 제게 전해주는 취미였습니다.
취미 생활을 하지 않다 보면 삶의 기쁨을 잊어버리고 맙니다. 취미와 특기를 다시금 찾아보십시오. 사는데 바빠서라는 말을 많이 하고 있지만, 지금을 잘 살기 위해서 꼭 필요합니다.

필요한 한 가지는 자기 관리뿐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입니다. 마르타는 보통 예수님을 위해 봉사와 활동을 위주로 하는 이들을 대표하고, 마리아는 기도와 관상을 위주로 사는 사람을 대표합니다.
마르타는 활동을 통한 성과로 예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사람이고, 마리아는 그저 예수님 곁에서 더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보고 불평하는 마르타에게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마르타를 따르면 예수님께 식모가 되고, 마리아를 따르면 신부가 됩니다. 예수님은 식모와 같은 여인을 원하시지 않고 순결한 신부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집에서 밥도 청소도 하지 않는 아내를 원하시는 것이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랑을 사랑하는 순결한 신부가 신랑이 원하는 일을 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결국, 순결한 신부가 식모보다 더 많은 일을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식모는 합당한 보상을 받지 못한다고 느끼면 지쳐 쓰러지지만, 신부는 신랑을 위해 목숨을 다할 때까지 충실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더 사랑하는 것이지, 더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식모가 될 것인지 신부가 될 것인지 우리는 결정해야 합니다. 순결한 신부가 되려고 하다 보면 끝까지 좋은 결과를 내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좋은 결과를 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의 특징은 일에 집중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첫째로 자기관리에 집중합니다.
술, 담배를 하지 않고 운동이 유일한 취미라는 유재석씨도 자기관리에 충실한 사람의 대명사입니다. 그가 나이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하나 끊어가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그는 일을 통해 자기를 증명하려 하지 않고 자기관리가 잘 된 모습이 일을 통해 입증되도록 합니다.
정준하 씨는 말합니다.
“재석아, 너 너무 재미없게 산다. 몸이 재미가 없잖아.”
정형돈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 그렇게 재미없게 사는 거 주위 사람들이 스트레스야.”
또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점점 재석이 형이 무섭다고 느껴진다. 그러니까 너무 좋은데, 슈퍼맨이 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운동도 진짜 열심히 하고 담배도 끊고 점점 이형, 범접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가는 느낌이랄까!”
무한도전이 끝나고 다른 멤버들은 활동이 약해져도 유재석씨는 언제나 건재합니다. 유재석씨가 집중하는 것이 일이 아닌 자기관리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의 결과는 자기관리에서 나옵니다. 이것을 소홀히 하면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유재석씨도 놀란 자기관리 장인이 있는데 바로 박진영씨입니다. 박진영씨의 자기관리 방법을 들으며 유재석씨도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박진영씨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배고파!”, “죽겠다!”입니다. 조금만 먹으면 바로 살이 찌는 박진영씨는 일주일의 반 이상 하루 20시간 공복을 유지합니다. 1일 1식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침엔 운동하며 힘들어 죽겠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렇게 고통스럽게 자기관리를 하는 것입니다.
성공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런 사람이 배 두드리며 먹고 놀아도 되는데 왜 이렇게 고통스럽게 자기관리를 하는 것일까요? 그는 매년 한 곡씩 노래를 발표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올해도 ‘When We Disco’라는 곡으로 복귀를 했습니다. 그의 음원 수입이 국내 1위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이렇듯 꾸준한 성과를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르타는 일로써 자신을 증명하려는 사람의 전형이고, 마리아는 먼저 자기관리부터 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봉사와 기도 중 하나만 끊으라고 하면 어떤 것을 끊으시겠습니까? 활동을 끊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활동을 끝까지 이어갈 수 있습니다. 자기관리를 하는 사람은 그것을 이용하여 분명 무언가 이루어내고 싶은 열망으로 들끓습니다. 그래서 일에 지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일 중심인 사람은 그 일이 잘되지 않으면 실망하고 지치고 그래서 쉽게 포기하게 됩니다. 일보다 자기관리가 우선입니다.
박찬호 선수도 첫 메이저리그 성공신화를 이루어내고 후배들에게 미국에서 성공하기 위한 적합한 조언을 달라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치지 않는 것입니다.”
잘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관리를 우선시하라는 것입니다. 꼭 필요한 것은 하나뿐입니다. 나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거룩해지면 주위 사람들도 거룩해집니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을 거룩하게 만드는 사람이 되려다가는 자신도 거룩함을 잃습니다.
제가 살을 조금 빼니까 저절로 주위 사람들도 다이어트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일로 나를 증명하려 하지 말고, 내가 일을 통해 증명되도록 합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철저한 자기관리가 필요한데, 신앙인 처지에서는 그것이 기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루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기도로 여기고 기도시간을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마련할 줄 알 때 다른 하는 모든 일도 잘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예전에는 평생직장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한 직장에서 정년퇴임을 하는 것을 당연하게,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요즘은 정년퇴임까지 5번 정도 직장을 옮긴다고 합니다. 직책은 19번 정도 바뀐다고 합니다. 그만큼 사회가 다양해지고, 직업을 구할 기회가 많아졌습니다. 그런가하면 대학교에서 배운 것으로는 새로운 직업을 구하기가 쉽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새로운 것을 배우는데 소홀해서는 안 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이민 사회도 다양한 직업을 갖는 분들이 많습니다. 한국에서는 증권회사에 다녔는데 이민 와서는 한의사가 되신 분도 있습니다. 언어의 소통 문제로 직업을 바꾸기도 하고, 회사의 구조조정 때문에 직업을 바꾸기도 합니다. 학교 선생님을 하다가 신문사 직원이 되신 분도 있습니다. 여행을 다니다가 여행사를 운영하는 분도 있습니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들다가 여행사를 다니는 분도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서, 필요에 따라서 직업을 바꾸는 것이 당연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율법학자였던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였습니다. 율법학자로서의 신념으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신비한 체험을 했던 바오로 사도는 율법학자라는 직업을 바꾸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박해하던 바오로 사도는 이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로마의 시민권자였던 바오로 사도는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기보다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찾아가는 선교를 하였습니다. 가는 곳마다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선교여행을 통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율법학자로 대접을 받으며 편하게 지낼 수 있었지만 바오로 사도는 박해와 시련이 눈앞에 보이는 사도의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선교방법은 2000년 교회의 역사를 통해서 전해졌습니다. 선교사들은 중국과 일본에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선교사들이 아프리카와 남미에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선교사들은 박해가 심했던 한국으로도 왔습니다. 복음을 위해서라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박해도, 시련도, 죽음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30년째 사제로 지내면서 다양한 직책을 경험했습니다. 본당 사제로 16년 지냈습니다. 보좌신부 8년, 본당 신부 8년을 지냈습니다. 신학교에 다닐 때는 본당 사제가 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고, 사제가 하는 일은 본당 사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교구의 인사이동을 통해서 다양한 사목을 체험하였습니다. 사목국에서는 3년 동안 교육 담당 업무를 하였습니다. 소공동체를 위한 교육을 하였고, 구역장과 반장을 위한 월례교육을 준비하였습니다. 해외연수와 중견사제 연수를 통해서 재충전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연수의 기회를 주신 교구장님께 감사드립니다. 청소년국에서는 6개월 동안 청소년 수련원에서 지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학생들과 함께한 유익한 경험이었습니다. 성소국에서는 5년 동안 사제양성을 위한 업무를 하였습니다. 교황방한 준비위원회 업무를 한 것도 보람 있는 일이었습니다. 작년부터는 미주가톨릭평화신문에서 신문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돌아보면 주님께서는 제게 참 다양한 일을 맡겨 주셨습니다. 많은 결실을 맺지는 못했지만 큰 허물없이 지낼 수 있었음에 감사드립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마리아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습니다. “마르타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활동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도 좋은 몫입니다. 영성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도 좋은 몫입니다. 중요한 것은 활동과 영성의 목적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이 더 큰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모두가 좋은 몫입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직업이 있습니다. 직업에 따른 다양한 직책이 있습니다. 신앙인에게 그 일이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좋은 몫을 선택한 것입니다. 비록 그 일 때문에 시련과 고난이 있을지라도 좋은 몫을 선택한 것입니다.

주님의 크신 은총으로 인해, 이 큰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저는 또 다시 앞으로 나아갑니다!
-양승국신부-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유다교 열성 신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신 바오로 사도께서 겪으셨던 고초가 얼마나 컸었던가 하는 것은, 그가 집필한 여러 서한들을 통해서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실 유다교 입장에서 보면 바오로 사도는 배교자요 배신자였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그저 그런 신자 중 한 사람이었다면 그리 큰 문제가 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바오로는 앞길이 창창하던 유다교 청년 지도자였습니다. 원로들과 지도층 인사들은 율법에 대한 사랑과 유다교에 대한 열정으로 똘똘 뭉쳐진 인재 바오로를 눈여겨보고 있었습니다.
그런 바오로가 하루 아침에 그리스도교로 돌아선 것은 유다교 입장에서 큰 충격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오로가 유다교에 끼친 손실은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개종 이후 깊은 광야 수도원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발길 닿는 곳마다 다니면서 끊임없이 외쳤습니다. 수많은 유다인들이 줄줄이 바오로 사도를 따라 그리스도교로 개종했으니, 유다 지도층 입장에서 바오로 사도는 눈엣가시같은 불편한 존재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바오로 사도가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 사이에서 큰 환영을 받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찾아내고 체포하려고 눈에 불을 켜고 다니던 바오로였습니다.
그런 바오로 사도가 하루 아침에 개종을 하고, 그리스도교 공동체 근처를 기웃거리니, 신자들 입장에서는 불안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러다 언제 돌변할지 모른다는 의구심도 떨칠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바오로 사도는 배신자라는 낙인과 의심으로 가득찬 눈초리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방황했습니다. 그러나 다마스쿠스로 가던 중의 강렬한 주님 체험 이후 바오로 사도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알아주던 말던, 누가 험담을 하던 뒷담화를 하던 상관하지 않고 묵묵하고 충실하게 복음 선포를 향한 여행길을 계속 걸어갔습니다.
놀라운 일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기회 닿을 때 마다 회개 이전의 부끄러웠던 모습을 공개석상에서 솔직하게 고백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베드로 사도와 함께 초세기 교회를 이끈 쌍두마차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 중의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그 정도 되었으면, 충분히 회개의 과정도 거쳤겠다, 자신의 어두웠던 과거에 대해서 굳이 스스로 들춰내지 않아도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겸손하게도 바오로 사도는 틈만 나면 지난 시절 자신이 저절렀던 과오와 어두웠던 시절을 사람들 앞에서 고백했습니다.
“형제 여러분, 내가 한때 유다교에 있을 적에 나의 행실이 어떠하였는지 여러분은 이미 들었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교회를 몹시 박해하며 아예 없애 버리려고 하였습니다.”(갈라티아서 1장 13절)
부끄러운 지난 날을 고백할 때 마다 바오로 사도는 늘 이런 식으로 말씀을 마무리짓습니다.
“이토록 부당하고 부족한 저를 당신의 사도로 선택해주신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는 사도로 불릴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크신 은총으로 인해, 이 큰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저는 또 다시 앞으로 나아갑니다.”

비교에서 악이 나온다
-반영억신부-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기의 몫을 행하고 또 그 몫에 기쁨과 감사함을 지닙니다. 자기 몫이 무엇인지 알고 확신이 서 있다면 그 몫-을 행하는 것에 배 아플 것도 없고, 기쁨이 클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기 몫이 무엇인지 아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일행이 어떤 마을에 들렀는데 마르타라는 여자가 자기 집에 예수님을 모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그 집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정작 마르타는 시중드는 일에 경황이 없었고, 동생 마리아가 예수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르타가 마음이 상했는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 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주십시오”(루가10,40).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가10,41-42).
마르타의 몫도, 마리아의 몫도 다 필요하고 좋은 몫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를 꾸중하지 않습니다. 또한 마리아에게도 그녀가 필요한 것을 선택했다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마리아가 선택한 것은 좋은 몫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우선순위를 따진다면 마리아의 몫입니다. 왜냐하면 ‘들어야 믿을 수 있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이 있어야,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로마10,17)'. 말씀을 기초로 삼지 않은 행동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어 깨닫게 되면, 하고 싶은 일을 하기보다 해야 할 일을 하게 됩니다. 내 뜻을 앞세우지 않고, 주님께서 원하는 것을 찾게 됩니다. 진정 하느님 앞에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마르타는 다소 불평어린 어조로 예수님께 말씀을 드렸는데, 그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의 역할을 다 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지 생색은 왜 냅니까? 왜 동생과 비교합니까? 열심히 일해 놓고 마음에는 화를 잔뜩 담고 있어야 하겠습니까? 어떤 일을 하든, 그 일이 내 몫이었으면 그것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스스로 주님을 위해 시중을 들었으면, 그 자체를 기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마도 마르타는 활동적인 여인인 듯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일에만 집착하면, 그 활동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다시 말하면 활동은 기도 안에서, 말씀 안에서 나온 활동이라야 참된 활동이 됩니다. 또한 기도를 하면 할수록 활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도 없는 활동은 무의미합니다. 활동이 없는 기도는 또한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상 안에서 좋은 몫을 택할 수 있는 지혜를 간직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몫이 주어졌든, 최선을 다했으면 그 자체로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오히려 너희는 그분의 나라를 찾아라. 그러면 이것들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루가12,31). 따라서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방해가 되는 것들은 뒤로 미루고 모든 것에 앞서 주님의 말씀을 먼저 듣기를 희망합니다. 세상을 사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그러나 친구를 따라 강남을 가지 말고, 자기 몫에 충실해야 합니다. 자신을 잃어버리고 남을 따라가다 보면 불평불만이 생기게 되고, 결국, 악에 지고 맙니다. 지금 하는 일이 좋은 몫이라면 마음껏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마르타와 마리아를 방문하시다.
-송영진신부-
예수님은 ‘생명의 빵’이신 분입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48-51).”
예수님은 ‘우리를 먹이시는 목자’이신 분입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요한 10,9).”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0,27-28).”
양들이 목자를 먹이는 것이 아니라, 목자가 양들을 먹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물고기를 잡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의 이야기는,
바로 그것을 잘 드러내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요한 21,12-13).”
<루카복음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라고 물으시고, 제자들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리자 예수님께서 그것을 잡수셨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루카 24,41-42),
그 이야기는 당신이 유령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신 이야기이지
제자들이 예수님께 음식을 대접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께서 먼저’ 사람들의 배고픔을
걱정하셨고(마태 15,32), 배고픈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마태 15,37).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을 잘 받아먹는 것이 예수님을 잘 따르는 것이고,
그것이 예수님을 잘 섬기는 것입니다.
“그들이 길을 가다가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38-42)”
지금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사람들이 당신의 말씀을 잘 듣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마르타가 바라고 있는 것은
예수님께 음식 대접을 잘 해 드리는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코헬렛’의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코헬 3,1).”
지금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입니다.
식사는 그 다음에 하면 됩니다.
‘빵의 기적’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일으키시기 전에 먼저
‘가르치는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마르 6,34).”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주심으로써 사람들을 영적으로 배불리 먹이시는 일을
먼저 하셨고, ‘기적의 빵’을 주셔서 육적으로 배불리 먹이시는 일은
그 다음에 하셨습니다.
(항상 꼭 그런 순서로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고,
예수님께서 ‘말씀’을 주실 때에는 그것을 잘 들어야 하고,
‘빵’을 주실 때에는 그것을 잘 받아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르타의 이야기를 겉으로만 보면, 마르타와 마리아의 갈등이
이야기의 핵심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그것은 아니고,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하신 말씀이 핵심입니다.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라는 말씀에서
‘많은 일’은 ‘다른 사람의 일’을 뜻할 수도 있고,
‘너무 많은 음식’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지금 마르타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일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뜻입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라는 말씀은, “너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잊지 마라.”(“왜 그 일을 하는지 잊지 마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가 하고 있는 일을 막지는 않으셨지만,
‘많은 일’ 때문에 ‘필요한 것 한 가지’를 잊어버리고 있는 것은 잘못이라고 타이르셨습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잘 대접하기 위해서 애를 썼고, 그 마음은 훌륭한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일’을 신경 쓰다가 예수님을 잊어버린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일하면서도, ‘일’만 신경 쓰다가
누구를 위한 일인지 잊어버리고, 왜 하는지도 잊어버리고, ‘일’만 생각합니다.
신앙인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예수님을 잊으면 안 되는 사람입니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라는 말씀에는
“너는 나쁜 몫을 선택하였다.” 라는 뜻은 들어 있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마리아는 자신에게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라는 뜻인데,
그 ‘좋은 몫’은 사실은 마르타에게도 ‘좋은 몫’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시니까, 마르타는 먼저 말씀을 들어야 하고,
음식을 준비하는 일은 그 다음에 해야 합니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음식을 먼저 준비하더라도
필요한 양만 준비하고 바로 와서 말씀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너도 여기 와서 앉아라.” 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마르타가 하는 일도 ‘좋은 일’이지만,
‘말씀을 듣는 일’이 ‘더 좋은 일’이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양들이 목자를 먹이는 것이 아니라 목자가 양들을 먹인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마리아가 선택한 몫을 빼앗지 마라.” 라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말씀’은 영원하다는 뜻입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10,38-42: 마르타와 마리아
예수님을 집으로 모신 마르타는 깊은 애정으로 지극히 거룩하신 분과 그분의 제자들을 위해 음식을 장만하고 있다. 그래서 몹시 분주하였다. 그런데 그의 동생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39절) 이것은 무엇을 하였다는 것인가?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마태 5,6) 주님의 발치에서 시장한 마리아는 바로 이 샘에서 정의의 곳간에서 먹고 마시고 있다.
즉 자기가 귀 기울여 듣고 있는 그분의 진리를 먹고 있었다. 주님은 “나는 진리다.”(요한 14,6)라고 하신 분이시다. 그분은 생명의 빵인 당신을 마리아에게 먹이고 계셨다. 그분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요한 6,41)라고 하셨다. 그 빵은 사람을 먹여 기르되 절대 줄어들지 않는 빵이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모습에서 보듯이 덕은 한 가지의 모습이 아니다. 한쪽에는 분주한 섬김이 있고, 다른 쪽에는 하느님 말씀에 대한 경청이 있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 분주하게 일하는 것보다 우선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42절) 하신다. 그러니 아무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지 못하는 것을 얻도록 노력하자.
시중드는 일로 바빠서 거룩한 말씀에 관한 지식을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 마르타가 열심히 시중을 들어 책망을 들은 것이 아니다. 다만 더 좋은 몫을 택한 마리아가 인정을 받은 것이다. 복음에서 보면 마르타는 마리아보다 더 뜨겁게 사랑했다. 주님께서 도착하시기 전부터 시중들 준비를 했고, 라자로를 살리시려고 주님께서 오셨을 때도 먼저 달려나가 그분을 맞이하였다.
언제나 하느님과 하느님의 일에 따르려고 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관심사가 되어야 하고, 갈림 없는 마음으로 쫓는 길이어야 한다. 다른 것은 아무리 중요해 보이더라도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야 한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는 이런 사고방식과 행동 양식의 전형을 보여주는 성경의 아름다운 예라고 할 수 있다.
마르타는 주님과 그분의 제자들을 위해 시중드는 매우 거룩한 봉사를 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 그분의 영적 가르침에 모든 주의를 기울였다. 그렇다고 마르타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지만, 비판하지도 않으셨다. 다만 마리아가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42절) 하심으로써 마르타의 몫은 남에게 빼앗길 수 있는 것이라고 하신다.
육신을 시중드는 일은 섬김을 받는 사람이 그곳에 있는 동안에만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마리아의 영원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실천하는 모습은 끝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 10, 42)
삶의 중심은
한 가지뿐이다.
삶의 중심이
되시는
하느님께 우리의
염려와 걱정을
맡겨드린다.
하느님께
멀어질 때
염려와 걱정은
더욱 커진다.
걱정하고
염려하는
시간은 많아도
하느님께
머무르는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가장 필요한 것은
하느님을 향한
믿음이다.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믿음의 몫이다.
믿음은
함께하는
기쁨이다.
믿음의 방향은
일이 아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다.
선택은 마음을
표현한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일보다 마음이다.
우리의 마음을
드리고 우리의
마음을 기꺼이
하느님께
나누는 마음이다.
마음 안에
일이 있고
마음 안에
기쁨이 있다.
필요한 것은
삶의 첫자리에
계시는 하느님께
먼저 우리 마음을
드리는 것이다.
마음을
드리는 것이
말씀을 듣는
머무름의
첫시작이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
우리 마음을
하느님께
두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개인 소명의 고유성을 이야기하십니다.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루카 10,39)
이 유명한 복음 내용을 '활동'에 대한 '관상'의 우위성 차원에서만 바라보면 마르타 성녀가 평가절하되어 버리는 당혹스런 일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예수님은 당신이 각별히 사랑하는 두 사람을 차별하거나 경쟁 구도로 세우실 분이 아니지요. 누군가를 들어높여 다른 이를 낮추실 리도 없습니다. 이 일화를 통해 들려주고 싶으신 예수님 마음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셔 들였다."(루카 10,38)
마르타는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모셔 들인 여인입니다. 베타니아의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 세 남매와 예수님 사이의 애틋한 우정이 바로 마르타의 환대에서 시작된 것이지요. 마르타는 적극적이고 부지런하며 헌신적이고 용기 있는 멋진 영혼의 소유자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루카 10, 39)
손님 대접에 분주한 마르타에 비해 마리아는 고요히 예수님 앞에서 그분을 응시합니다. 말씀하시는 분 앞에서 듣는 것. 이 또한 최대의 접대 행위입니다. 이는 주인이 해야 할 일 중에 하나지요. 객들을 자기들끼리 있게 두고 주인은 정신없이 일에 몰두하는 것만큼 무례한 일도 없으니까요.
세상 모든 좋은 일이 다 그렇듯이, 마르타의 입장이나 마리아의 입장이나 함정은 있기 마련입니다. 오늘 마르타가 삐끗한 지점에 머무릅니다. 사실 손님을 접대하다보면 좀 더 잘 하고 싶은 마음이 자꾸 커집니다. 손님에 대한 최대의 존경과 예의를 표현하고 싶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 좋은 지향이 내면의 건강하지 못한 욕구, 이를테면 사랑받고 인정받으려는 욕구와 엉켜버리면 적정선을 넘기기 쉽습니다. 만족을 모르게 되어 버리지요. 그러면 시간이 더 필요하고 일손이 더 필요하며 물질도 더 필요합니다. 내 안의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서 더, 더 원하게 됩니다. 더 잘 하려고 그러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저 깊은 곳에서 더 사랑받고 더 인정받으려는 마음이 활활 불타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과도하고 방만한 열정에는 얼마간 자신의 책임이 따릅니다.
마르타는 "당연히" 마리아의 노동력을 예수님께 요구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접대를 위해서는 마리아의 손이 필요하니까요. 그런데 그건 마르타의 만족을 위한 것이지 예수님의 바람은 아니었지요.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42)
예수님의 이 말씀에 마르타가 서운해졌을 수는 있지만, 예수님의 의도는 그렇지 않으셨을 겁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 마리아의 경청을 콕 짚어서 하시는 말씀이라기보다, 누구나 자기의 고유한 소명을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이 한 가지씩 있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그러니 마르타도 본인에게 필요한 것 한 가지에 본인이 몰두하면 되는 것이지요.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했다."는 말씀 역시, "너도 그렇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예수님께는 마리아의 소명이 귀한 것처럼 마르타의 소명도 귀합니다. 훗날 죽었다가 되살아나는 기적으로 예수님을 증거한 라자로의 소명 또한 귀하고요.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마리아가 자기 소명을 빼앗기지 않는 것처럼, 마르타도 그럴 것입니다. 우리 모두 각자에게 가장 잘 맞는 모습으로 창조된 만큼, 우리는 자기 존재의 본질, 정수를 빼앗길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 마르타가 자기 자신의 욕구에 집중하기보다 예수님께 필요한 것을 바라본다면 과도한 열기가 제 온도를 찾아 마르타 다움이 질서를 잡게 될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소명에 대해 솔직하고 담담하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갈라 1,16)
사도는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던 자신이, 본래 창조 때부터 "새로운 길"이 이방인에게 전파되도록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소명이 제 궤도를 찾기까지 그는 사도들을 찾아가거나 해서 성급히 인정받으려 하지 않고, 여러 해 동안 침묵과 고독 중에 숙고와 성찰의 시간을 보냅니다. 바오로에게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중요했을 뿐, 당장 제자단에 합류하여 제도권의 확인을 받는 것이 중요하지는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그들은 나 때문에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갈라 1,24)
바오로의 과거를 아는 이들이 바오로의 회심 소문을 듣고 그를 조롱하거나 소외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섭리를 미리 준비하신 하느님을 찬양했다고 합니다. 사도로써 이만한 열매가 또 있을까 싶도록 보람찬 결실이지요.
사도 바오로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난 체험 이후, 이해할 수 없이 펼쳐지는 길 위에 자신을 온전히 내던졌습니다. 인간적인 계획이나 수를 내려놓고, 인내하며 머물렀지요. 그리고 주님께서 자신의 소명에 빛과 색과 온도를 입혀 쓰실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그만의 고유한 소명이 이렇게 완성되어 가게 되지요.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로서 교회의 보편 소명을 받아 살아갑니다. 거기에 더하여 우리 각자에게 주님께서 창조 때부터 심어 주신 고유한 개인 소명을 꽃피우고 완성해가는 중입니다. 마르타에게는 마르타만의 아름다움이, 마리아에게는 마리아만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벗님 여러분 각자에게도 마찬가지지요.
사랑하는 벗님! 각자 주님께서 주신 고유한 소명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께서 주시고, 우리가 선택한 좋은 몫을 주님께 올라가는 동앗줄이라 여기면, 단단히 부여잡고 절대 빼앗기지 않겠지요. 우리 모두는 주님과 하나 되는 데 "필요한 한 가지"를 저마다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좋은 몫을 택하셨으니, 벗님은 참으로 복되십니다.

비록 염려와 걱정의 분순물이 있을지라도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82364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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