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4일 연중 제27주일(군인 주일)
하면서 서로 짜고는 그를 잡아
포도원 밖으로 끌어내어 죽였다.
(마태오 21,33-43)
When the tenants saw the son,
they said to one another,
'This is the heir.
Come, let us kill him
and acquire his inheritance.’
They seized him,
threw him out of the vineyard,
and killed hi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한재호신부-
불편한 진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진실이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비유에 등장하는 소작인들이 바로 이런 불편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포도밭 주인이 소출을 받으려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는데, 소작인들에게는 그들이 눈엣가시였습니다. 자신들이 차지할 소출을 빼앗아 간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종들 가운데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여 버리고 맙니다. 불편한 존재들을 없앤 것입니다.
이제 주인은 아들을 보냅니다. 그런데 소작인들에게는 이 아들이야말로 가장 불편한 존재입니다. 아들만 없으면 포도밭을 아주 차지할 수 있는데, 아들은 가장 큰 걸림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들 또한 죽여 버립니다. 이렇듯 소작인들은 자기들에게 불편한 존재들이 나타났을 때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없애 버리는 쪽을 선택하였습니다.
여러분을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을 불편하게 하는 일들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들을 여러분의 삶에서 제외하지 마십시오. 그 사건들을 치워 버리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들과 그 사건들을 보내시면서 여러분을 바르게 이끄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진주가 만들어지는 과정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불편한 것들을 감수하고 인내하는 과정에서 조개는 진주를 만들어 냅니다. 불편한 사람들, 불편한 사건들은 나를 고쳐 나가게 하는 지름길입니다.
주님께서 세워주신 양심의 탑과 울타리
-키엣 대주교-
우리는 어떻습니까? 아마 우매함으로 주인의 것이 처음부터 내것인양 욕심을 내는 소작인과 같을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생명과 지혜, 영혼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사업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밭의 주인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내 뜻대로 사용하고 빼앗기지 않으려 높은 장벽을 칩니다. 사랑이 부족한 포도밭은 결국 황폐해지고 삶도 소멸됩니다.
하느님은 유다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포도밭을 내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 가장 먼저 선택된 사람이 바로 유다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포도밭의 비유는 유다사람들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다사람들은 우리 모두입니다. 포도밭은 바로 주님의 나라이며 교회이고 가정이며 학교, 사회입니다.
주님께서는 포도밭이 짓밟히는 위험을 알려주도록 양심의 탑을 세우셨고 짐승과 도둑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울타리를 쳐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와 사회의 규율입니다.
규율은 포도밭을 파괴하려는 적으로부터 보호하고 풍성한 수확을 보장합니다.
주님의 포도밭에서 일군 포도 알갱이는 짜고 걸러내고 참아내는 긴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향기가 나는 포도주가 됩니다. 한알의 포도가 포도주가 되기까지 수 많은 과정과 시간을 거쳐야 하는 것처럼 주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과 노력, 주님의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세워주신 양심의 탑을 허물었기에 생명이 위협당하고 파멸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규범의 울타리를 허물었기에 영혼의 포도밭이 유린되고 있다는 것도 모릅니다.
힘든 노동이 싫어 삶의 터전인 포도밭을 버렸기에 소득을 얻지 못한다는 것도 모릅니다.
주님의 노력과 사랑이 이처럼 허비된다면 우리의 삶은 점점 생명력을 잃고 시들어갈 것입니다. 아직 우리의 삶은 완전히 파멸되지 않았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주님을 나의 삶의 진정한 주인으로 모실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여러분에게 가장 아름다운 생명을 주신 주님을 믿으십시오. 주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밝은 미래를 주실 것입니다. 불의와 정의, 거짓과 참, 선과 악을 판단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미래를 향한 가장 아름다운 길을 선택할 수 있도록 양심의 탑의 울림에 귀기울이십시오. 나만을 위한, 나의 공동체만을 위한 이기적인 규율이 아니라 세상 모두가 수용하는 사회의 규정과 법을 따라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달콤한 유혹으로부터 나 자신을 보호하는 길입니다.
주님이 만들어 주신 포도밭에서 열심히 일하십시오. 근면과 노력만이 주님의 사랑 안에서 성공할 수 있는 오직 단 하나의 열쇠입니다.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면 돌아보고 회개해야 합니다. 주님의 뜻에 따라 살고 이웃과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눈 앞의 셈이 아닌 보이지 않는 하늘 나라의 셈을 따라가십시오. 비록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당할지라도 주님의 길만 따르십시오. 언젠가는 꼭 주님의 진한 사랑을 받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자신의 뜻을 포기하는 사람만이 향기가 가득한 포도주처럼 생명을 만드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주님, 나 자신보다 가정과 교회, 사회에 기여할 수 있도록 양심의 탑이 건재할수 있도록 보살펴 주소서. 그리고 나에게 주신 포도밭을 잘 가꿀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아멘

1. 나의 양심의 탑은 건재합니까?
2. 주님께서 세워주신 울타리는 안전합니까?
3. 주님께서는 나의 주인이심을 자각하고 있습니까?

어떻게 풍요로운 열매를 맺을 것인가?
-임숙희-
“저희의 날수를 셀 줄 알도록 가르치소서. 저희가 슬기로운 마음을 얻으리이다.”(시편 90,12) 한 사람이나 어느 집단에게서 알 수 없는 이유로 집요하게 괴롭힘을 당한 체험이 있습니까? 선의에도 불구하고 경청하지 않으며 말꼬리로 트집 잡고 급기야 사람들을 모아 제거해 버리겠다고 모략을 꾸미기도 하는 체험을 한 적이 있습니까?
마태오복음 수난 전 장면에서 예수님도 그런 상황을 만나십니다. 자신이 흙으로 빚어졌으며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인간의 나약함을 잊어버린 데서 비롯된 인간의 오만과 편견, 완고함을 하느님 아들 예수님도 고스란히 체험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에게 열매를 맺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 복음의 맥락
예수님은 오늘 성전에서 유다 지도자들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축제 때 성전에 온 순례자들은 장엄한 성전 예식에 참여하기도 하고 현인과 랍비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성전에 모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가르치는데 예루살렘의 유다 지도자들이 무슨 권한으로 가르치는지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세 비유, 곧 두 아들의 비유,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혼인 잔치 비유를 통해 그들 자신의 참 모습을 보도록 도전하십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오늘 비유에 나오는 것과 같은 예수님 시대 부유한 시골 저택을 ‘성채도시와 다를 바 없는 커다란 성’이라고 묘사합니다. 여기에서 농사짓는 소작인들은 토지 주인에게 추수의 3분의 1세(임금에게는 또 다른 3분의 1세)를 납부했습니다. 집주인이 토지세를 징수하기 위해 보낸 종들에게 폭력을 행사한 포도밭 소작인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는 당시 사람들에게 친숙한 이야기였습니다.
■ 비유의 청중, 수석사제와 바리사이들
비유는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에게 도전하고 교정하고 회개를 요구하는 기능을 합니다. 이 비유에서 소작인에 비교되는 청중은 수석사제와 바리사이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사제 계급은 첫 번째로 손꼽히는 귀족이었습니다. 대사제는 한 명인데 수석사제는 여러 명입니다.
예루살렘의 고위 사제들은 성전 경비대장, 주간당직 사제들의 통솔자, 성전 감독, 창고 책임자 등으로 대부분 대사제의 친척이거나 대사제와 연관된 사람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당시 대사제가 지닌 엄청난 권력을 같이 누리던 사람들입니다.
대사제는 단지 제사만을 드리는 사람이 아니라 로마 제국 치하에서 이스라엘 대표자이자 예루살렘 치안과 성전 관리까지 맡으며 엄청난 권력을 누렸습니다. 대사제를 포함한 수석사제들의 특징은 돈, 권력, 성전 관리권, 로마인들과의 적당한 협잡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반대한 이유는 기득권층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성전을 정화하고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라고 불릴 것이다”라고 하시며 그들이 지닌 성전 이권을 침범했을 때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특권과 지위를 위협하는 존재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거룩한 것, 하느님의 것을 인간 탐욕과 권력으로 악용하는 것에 맞섰기 때문에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에서처럼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바리사이’는 열렬한 신앙심, 진지한 사람들이었고 율법을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특별히 율법 연구에 헌신하고 자격을 갖춘 사람들은 율법학자가 돼 존경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미워한 것은 모든 바리사이가 아니라 ‘바리사이주의’, 곧 형식주의와 자신들의 위상에 대한 자만에 기울어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반대한 이유는 예수님이 그들 마음의 겉모습이 아니라 내면을 정확하게 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완고함, 근거 없는 윤리적 우월감, 외적 형식에 대한 완고한 집착, 율법을 모르는 보통 사람들에 대한 멸시를 비난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미워하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자비로운 분이시고 그 어떤 사람이 저지른 죄도 용서하셨습니다. 그분은 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바리사이 시몬의 식사 초대를 받아들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열렬한 바리사이 바오로를 회개시켜 이방인에 대한 선교 사명을 부여하기도 했습니다. 이 자비로운 예수님이 사정없이 질타한 죄가 있다면 바로 위선입니다.
믿음 실천을 강조하는 마태오복음서 저자는 다른 복음서 저자들보다 위선에 대해 더 많이 경고하는데 바라사이와 율법학자들을 그런 위선의 유형으로 분류합니다.
위선이란 어떤 일에 대해 말하거나 믿는다고 하면서 다른 일을 행하는 것(혹은 전혀 행하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 자세는 하느님 뜻에 대한 적극적인 불순종 형태로 간주됩니다. 위선자는 잘못된 동기로, 특히 남에게 보이려고 바른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또 위선자는 식별력이 부족해서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의무에서 근본적인 것과 부차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식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마태오복음에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안식일, 이혼, 제물 등 여러 상황에서 부딪힌 것도 바로 이런 식별 부족 때문입니다.
■ 풍요로운 소출을 내는 이들
이 소작인 비유는 마르코복음 12장 1-12절에도 나옵니다. 마르코는 포도밭 주인과 그의 종들에게 소작인들이 행한 악한 행동에 초점을 맞추지만, 마태오는 포도밭에서 풍요로운 ‘소출’을 내지 못한 소작인들이 저지른 실패를 강조합니다.
어떻게 하면 하느님이 우리에게 맡긴 포도밭에서 풍요로운 소출,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요? 제2독서 말씀이 도움 됩니다. 바오로는 필리피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가르치기 위해 여덟 가지 덕 목록을 제시하며 이 모든 덕을 자기 것으로 내면화하라고 초대합니다. “마음에 간직하십시오”에서 “간직하다”로 번역된 그리스 명령형은 ‘문제에 대해 주의 깊게 사고하고, 식별하고, 어떤 것에 마음이 머물게 하라’는 요구입니다. 이것은 필리피 신자들이 지속적으로 해야 할 임무입니다.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 환경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성찰하고, 되새기는 사람, 사고하는 사람, 하느님 뜻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우리도 그런 자세를 훈련할 때 이 세상과 공동체 안에서 예수님을 따르며 자신의 은사에 맞갖는 소출,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원근 신부-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박명제신부-
교회는 10월을 ‘묵주 기도 성월’ 로 지내고 있습니다.
묵주 기도는 성모님과 함께 예수님의 강생과 공 생활, 수난과 부활의 신비들을 묵 상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도입니 다.
묵주 기도를 바치면서 10월 한 달을 거룩하게 보내며,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주님과 성모님의 사랑 을 더 깊이 깨달아 갔으면 합니다.
최근 코로나19로 인한 세계적인 어려운 상황과 더불어 분열과 비난, 상처와 이기적인 모습으로 서로의 거리는 멀어지고 마음의 벽도 높아져 가는 상황에서 심리적, 영적 바이러스로 신앙적 위기감도 느 껴집니다.
반면에 주님의 위로와 성 모님의 도움에 대한 간절함은 더더 욱 깊어만 갑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이러한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신앙적 위기를 견뎌내는 길은, 사회적 거리가 떨어지더라도 마음의 거리는 더 좁혀가는 배려와 이해, 곧 서로에 대한 용서와 사랑입니다. 그리고 신앙인들은 주님 곁에 머무신 성모님께 의탁하며 드리는 묵주 기도로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교구 수호자이신 묵주 기 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교회가 기념하는 이번 축일은 성 비오 5세 교황께서 묵주 기도를 통하여 승리를 거둔 그리스 레판토 해전의 승리에 감사드리고자, 10월 7일을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 리아 기념일로 설정하셨으며, 이 축제는 하느님 아드님의 사람이 되심과 공생활, 수난 그리고 부활의 영 광에 특별한 방법으로 참여하신 복 되신 동정 마리아의 이끄심으로 그 리스도의 모든 신비를 묵상하도록 이끌어줍니다. 성 비오 5세 교황께서 “열렬한 마 음으로 묵주 기도를 바치는 신자들은 이러한 신비 묵상을 충실히 따라 기도하면 믿지 않는 이들을 변화시키며, 이단의 두려움들을 물리치고 가톨릭 신앙의 빛을 새롭게 맞이하 게 됩니다.”(『묵주 기도의 대헌장』 2항) 라고 하셨습니다.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을 보내면서, 세상의 빛과 소 금으로써 성모님의 겸손한 신앙의 모범을 따라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응답하며 주님께로 한 걸음씩 가까이 나아갑시다.
또한 부산교구를 위하여 기도와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과 군 인 주일을 맞아 국방의 의무를 수행 하는 모든 군인들에게도 감사드리 며 서로를 위하여 묵주 기도를 봉헌 합시다. 아멘!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양형석신부-
코로나 19 확산 사태라는 초유의 상황을 겪으면서, 과거에 유사한 일을 경험했던 사람들의 상황을 찾아보다 알 베르 까뮈의 <페스트 la peste>라는 소설을 다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현재의 우리 상황과 외적 내적으로 많이 닮은 모습입니다.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탄생 배경인 당대의 절망적인 상황(1947년;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서 작가는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없는 세상에서 혹은 하느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작중의 인물들은 저마다 삶의 해법을 제시합니다. 신앙 대신 이념이나 과학에 의지하는 사람들도 있고, 무신론 자면서 구체적인 이웃사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반면 전통적인 섭리의 신앙을 지키다가 죽어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신앙은 모든 세기와 세대에 걸쳐 언제나 위협을 받이왔습니다. 하느님을 대체하기 위한 온갖 종류의 시도가 있었습니다. 판관 기데온의 질문이 핵심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면 어째서 저희가 이 모든 일을 겪고 있단 말입니까?”
성경은 시종일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고 선포합니다. 어려움 중에도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고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백성의 울부짖음(체아카)에 개입하시기도 하고(이사5,7; 탈출 3,9), 때로는 궁극의 선을 위하여 일시적으로 악을 용인하시기도 합니다.(창세 45,5) 또한 “하느님은 시련과 함께 그것을 벗어날 길도 마련 해 주십니다.”(1코린 10,13)
이것을 알아보는 눈이 신앙입니다.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는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우리에게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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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기억나니?”
이 말로 먼저 물어보고 함께 기억할 만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보다 기억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그런 일이 있었냐는 의심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때 한 친구가 중간에 선생님께서 다른 학교로 전근 가신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모두가 기억했습니다. 드디어 기억의 공통점이 생겼습니다. 모두가 좋아했던 선생님의 전근은 우리 모두의 기억에 선명하게 기록되었나 봅니다.
어느 책에 이런 말이 적혔던 것이 생각납니다.
‘모두가 과거를 다르게 기억한다. 저마다 과거를 다르게 살기 때문이다.’
공감 가는 말입니다. 그래서 같은 공간, 같은 시간을 살았음에도 기억하는 과거가 다를 수밖에 없나 봅니다. 여기서 문제 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나의 기억만 정답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의 지금 행동을 정당화시키곤 합니다. 나의 기억에 오류가 있을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포도밭 임자가 소작인들에게 일을 맡기고 갑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맡긴 일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에 있는 것들을 보살피고 그들에게 주어진 것을 지키라는 것뿐이었습니다. 소작인이 해야 할 일이라고 하는 포도밭을 일구고, 울타리를 둘러치고, 또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우는 모든 힘든 일을 포도밭 임자가 합니다. 얼마나 소작인들을 배려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소작인들은 포도밭 임자의 배려를 기억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다른 기억을 간직합니다.
그 밭을 차지해야 한다는 기억만을 만들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의 아들을 죽여 버리는,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을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비유는 당신 자신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주인의 아들은 예수님이고, 못된 소작인은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이 말씀은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해당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는 우리를 향해, 더 많은 것을 얻지 못했다는 잘못된 기억만 하는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이렇게 잘못된 기억을 하는 우리는 오늘 독서에서 전해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마음에 새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언제나 주님과 함께 하는 행복의 기억을 간직하게 될 것입니다.
“나에게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것을 그대로 실천하십시오. 그러면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필리 4,9)


한때 헬스에 푹 빠졌던 적이 있습니다. 근육 붙는 재미와 함께, 무거운 것도 가볍게 드는 제 모습에 만족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사람들이 이런 말을 많이 했습니다.
“신부가 왜 근육을 만드는 거예요?”
지금 현재 헬스를 잘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단단했던 근육은 거의 다 빠져나갔습니다. 대신 배만 볼록 나왔습니다. 운동하지 않으니 근육이 사라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시 근육을 만들 수가 있을까요?
나이가 있어서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운동밖에 없습니다.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한다면 근육은 다시 생길 것입니다(이런 마음으로 요즘 다시 헬스를 시작했습니다).
우울함에 빠져 있는 자존감을 잃은 사람을 종종 봅니다. 이 자존감을 회복하기가 불가능한 것일까요? 자존감 넘치는 삶은 꿈같은 이야기이고 남의 이야기일까요? 아닙니다. 자존감 근육을 단련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불가능보다 가능의 모습을 보면서, 자존감을 살리는 말과 행동부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것이든 주님 안에서 불가능한 것은 없습니다.

감사도 연습해야 한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못된 소작인들의 비유’입니다. 소작인들은 주인이 맡기고 간 포도밭을 자신들의 것인 양, 합당한 소출 일부도 주인에게 내어주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감사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날까요?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하나의 법칙이기 때문에 예외가 없습니다. 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되고 가지지 못한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기게 됩니다. 다 가진 자는 지금 가진 것에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감사하기에 더 감사한 일이 일어납니다.
발명왕 에디슨은 초등학교 때 저능아 취급을 받았고 학교에서 수업을 가르칠 수준이 아니라며 그를 쫓아냈습니다. 게다가 그는 이른 나이에 청력을 잃고 청각 장애인이 됩니다. 하지만 그는 학교에 가지 않게 된 덕에 연구할 시간이 많았고, 청력을 잃어 실험에만 집중할 수 있어 감사한다고 회고록에 남겼습니다. 감사는 분명 하느님의 은총이 들어오게 만드는 문입니다.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당신 은총이 세상에 전달되게 하십니다.
일본 ‘내쇼날’ 창업자 마쓰시다는 아흔넷의 나이로 운명할 때까지 산하 570개 기업에 종업원 13만 명을 거느린 대기업 총수입니다. 그도 아버지의 파산으로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하고 자전거 점포 직원으로 일했습니다. 그도 항상 감사한 것이 있었는데, “1. 가난한 것, 2. 허약한 것, 3. 못 배운 것”이라 말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불행을 다 가지고 태어나셨는데 어떻게 그것이 하늘의 은혜였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가난 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부지런히 일하지 않고서는 잘 살 수 없다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또 약하게 태어난 덕분에 건강의 소중함도 일찍 깨달아 몸을 아끼고 건강에 힘써 지금 아흔이 넘었는데도 30대의 건강을 유지하며 겨울철에도 냉수마찰을 합니다. 또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했기 때문에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저의 스승으로 받들어 배우는데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저에게 남들이 말하는 불행은 하늘이 저를 성장시키기 위해 마련해 준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작은 것에 감사하다 보면 큰 복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됩니다. 우리가 많은 발명품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혹은 많은 재산을 모을 수 없는 이유는 어쩌면 그런 것들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한 수녀님에게 자그마한 건물을 지으라는 명이 떨어졌습니다. 물론 본원에서도 도와주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돈 때문에 걱정이 많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이전에 알던 후원자분을 다시 만나게 되었고, 또 그분을 위해 기도를 해 주니 그분에게도 남는 이익이 생겼습니다. 그것을 기부하겠다고 하여 통장 액수를 보니 3억 원이었습니다.
수녀님은 수중에 그렇게 큰돈을 가져본 적이 없어서 그다음부터는 불안함에 떨어야 했습니다. 누가 통장을 훔쳐 가지 않을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최대한 빨리 그 돈을 써버리지 않으면 불안증에 시달릴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6개월 뒤, 건물을 짓는 계약금으로 그 돈을 먼저 써 버렸습니다. 그러니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수녀님들은 청빈서원을 하신 분들입니다. 그래서 돈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불안합니다. 그런데 수녀님이 아닌 분들도 복권에 당첨되거나 땅값이 올라 갑자기 많은 돈이 들어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 많은 액수의 돈을 그대로 유지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왜 불안할까요? 평상시에 감사 연습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돈을 다 잃어도 감사할 수 있다면 그 돈을 잃지 않습니다. 그러나 수녀님이 수억 원의 돈을 가지고 있다면 여간 불안하지 않습니다. 돈 한 푼도 없이 편안할 때로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그러면 그렇게 돈이 다 빠져나가게 됩니다.
수녀님들이야 할 수 없지만 보통 사람들은 감사 연습을 할 수 있습니다. 항상 들어오는 모든 것들의 십 분의 일을 바치며 그 모든 것이 하느님 것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인의 하인들은 포도밭 소작인들에게 이것을 연습시키기 위해 오는 사람들입니다.
살아가다 보면 십일조를 내지 못해도 갑자기 돈이 들어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주님께서 주신 것, 주님께서 도로 가져가시니 다만 주님을 찬미할 마음을 갖고 잃어도 감사할 수 있는 훈련을 한다면 나중에 하느님의 아드님까지 품을 수 있는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감사해야 행복한 줄 알면서도 잘 감사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훈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훈련도 안 하며 김연아 선수처럼 스케이트를 잘 탈 수 있으면 감사하겠다고 생각합니다. 감사도, 사랑도 훈련해야 합니다. 연료만 주어진다고 아이가 차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훈련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가장 좋은 것이 감사일기와 십일조입니다.
운동하지 않으면 몸에 지방이 저절로 많아지는 것처럼, 감사도 정해놓고 운동처럼 해야 합니다. 십일조를 정해놓고 내고 미사 때 주님을 찬미하면 됩니다. ‘시간 날 때 운동해야지!’라고 하면 절대 할 수 없는 것처럼, 규칙적으로 정해놓고 감사도 실천하지 않으면 결코 할 수 없습니다. 감사는 하느님 나라를 사는 은총표입니다. 은총표는 하나하나 모아야 합니다. 감사도 하려고 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 꾸준한 연습을 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조재형신부-
인터넷으로 ‘개미’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자연은 ‘진화’라는 틀에서 생명의 다양성을 일구어왔습니다. 흔히들 진화는 ‘적자생존, 자연도태, 양육강식, 승자독식’이라는 경쟁의 정글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진화에서 ‘공생, 연대, 협력, 나눔’이라는 아름다운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서로에게 도움을 주면서 이익을 주고받는 모습이 있습니다. 곤충은 꿀을 얻고, 꽃은 번식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악어새는 먹이를 먹고, 악어는 입안을 청소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공생, 연대, 협력, 나눔으로 성공한 종이 있는데 그 중에 개미가 있다고 합니다. 전 세계에 있는 개미의 무게와 전 세계에 있는 사람의 무게를 비교하면 누가 더 무거울까요? 개미의 무게가 사람의 무게보다 10배 정도 더 무겁다고 합니다.
사람은 10,000년 전부터 농사를 지었고, 농사를 통해서 문화와 문명을 만들어 왔습니다. 개미는 65,000,000년 전부터 농사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사람은 도자기를 만들어서 음식을 저장했습니다. 도자기를 만들지 못했던 개미는 스스로 도자기의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일개미가 벽에 달라붙어 있으면 다른 개미들이 꿀을 넣어 주었습니다. 벽에 붙어있는 일개미는 몸이 100배로 커진다고 합니다. 겨울이 와서 꿀을 얻을 수 없을 때 벽에 붙어있는 일개미는 동료들에게 꿀을 내어 준다고 합니다. 붙어있는 일개미 5마리를 떼어 놓았다고 합니다. 그러자 일개미들이 자원해서 벽으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개미는 이렇게 협력하고, 연대하며 개미 왕국을 만들어 왔다고 합니다.
신앙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인간과 세상의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셨고,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과 사람이 좋은 관계를 맺기를 바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을 충실하게 지키기를 바라셨습니다. 그것이 사람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는 사람에게 자비와 축복을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과 세상이 좋은 관계를 맺기를 바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위해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사람은 세상을 소중하게 여기기를 바라셨습니다. 세상 또한 하느님의 손길이 담긴 곳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소중하게 여기면 세상은 사람에게 곡식을 주고, 공기를 주고, 물을 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과 사람이 좋은 관계를 맺기를 바라셨습니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피부색 때문에, 성별 때문에, 이념과 사상 때문에, 신분과 계층 때문에 차별 받기를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같은 크기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온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여라.”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새로운 계명을 줍니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하십시오. 여러분 중에 가장 헐벗고, 가장 가난하고, 가장 아픈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입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하느님과의 좋은 관계를 깨트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좋은 것을 주셨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의 신을 섬겼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우리들 또한 이스라엘 백성처럼 살았습니다. 자연을 파괴하였습니다. 북극의 얼음이 녹고 있습니다. 바다와 강이 오염되고 있습니다. 하늘도 오염되었습니다. 사람을 노예로 삼아서 괴롭혔습니다. 전쟁과 폭력으로 사람을 죽였습니다. 가난해서, 병들어서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무기를 만드는 데는 엄청난 돈을 쓰면서 환경을 보호하고, 가난한 이를 도와주는 데는 인색합니다. 기후변화로 지구는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코로나19는 일상의 삶을 멈추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관계를 회복하지 않으면, 자연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않으면,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더 큰 재앙이 올 것 같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포도원 소작인이 주인의 뜻을 따르지 않고 제 멋대로 포도원을 관리한다면, 주인이 보낸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고 죽인다면 포도원 주인은 소작인들을 쫓아낼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포도원을 새로운 사람에게 맡길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지구라는 포도원을 우리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지구가 우리의 것인 양 대하는 것 같습니다. 지구는 우리의 선조들이 살아왔고, 우리의 후손들이 살아야 할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포도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지구를 소중하게 대해야 합니다. 지구를 사랑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교회라는 포도원, 가정이라는 포도원을 맡겨 주셨습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성사를 통해서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고, 친교를 통해서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가정은 작은 교회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는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저희는 당신을 떠나지 않으오리다. 저희를 살려 주소서. 당신 이름을 부르오리다. 주 만군의 하느님, 저희를 다시 일으켜 주소서.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 나에게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것을 그대로 실천하십시오. 그러면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

오늘 이 아침 주님께서는 새로운 하루와 더불어 또 다시 건너갈 것(Pascha)을 바라십니다!
-양승국신부-
너나 할것 없이 힘겨운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습니다. 답답하기 그지없는 현실과 암담하고 불투명한 미래 사이에서 겪게 되는 근심과 걱정, 부담감과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이런 오늘 우리에게 건네시는 바오로 사도의 권고가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형제 여러분,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줄 것입니다.”(필리피서 4장 6~7절)
탈출구도 없을뿐더러, 사방이 높은 담으로 가로막혀, 밤잠도 제대로 못이루고 있는 오늘 우리에게, 바오로 사도께서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랍니다.
해도 해도 너무한 현실 앞에, 입만 열만 불평불만이 폭포수처럼 터져나오는 우리에게, 바오로 사도께서는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랍니다.
도무지 희망이라고는 없어보이는 현실 앞에, 마냥 주저앉아 있는 우리에게, 바오로 사도께서는 끊임없이 기도하고 간구하며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랍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바오로 사도의 권고는 지극히 현실성이 떨어져보이고, 대책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께서 걸어가신 전도 여행길을 생각해보니, 권고 말씀이 절대로 헛된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깊은 지하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찬미의 송가를 불렀습니다. 혼절할 정도로 심한 매를 맞으면서도 그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고 있다는 마음에 주님께 감사드렸습니다. 그토록 공들였던 초기 교회 공동체들이 수시로 흔들리고 분열되었으며 삐그덕거렸지만,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희망의 기도를 바쳤습니다.
이렇게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몸소 겪은 바를 가르쳤고, 당신이 직접 사신 바를 권고했습니다. 그러니 2천년 세월을 건너와 오늘 우리에게까지 그분의 말씀은 생생한 설득력과 호소력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편지를 끝맺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또한 감동적입니다.
“끝으로, 형제 여러분, 참된 것과 고귀한 것과 의로운 것과 정결한 것과 사랑스러운 것과 영예로운 것은 무엇이든지, 또 덕이 되는 것과 칭송받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마음에 간직하십시오. 그리고 나에게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것을 그대로 실천하십시오. 그러면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필리피서 4장 8절)
풀잎끝에 맺힌 이슬방울처럼 순식간에 지나가고 사라지는 대상들, 헛되고 무의미한 대상들, 속되고 천박한 대상들에 자신도 모르게 깊이 함몰되어 살아가는 오늘 우리에게, 바오로 사도는 참되고 고귀한 대상들, 의롭고 정결한 대상들, 사랑스럽고 영예로운 대상들을 선택하라고 요청하십니다.
오늘 이 아침 주님께서는 새로운 하루와 더불어 또 다시 건너갈 것(Pascha)을 바라십니다. 천박한 삶에서 품위있는 삶으로, 지극히 본능적인 삶에서 지성적 삶으로, 육적인 삶에서 영적인 삶으로..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송영진신부-
우리 교회의 이름인 ‘가톨릭’이라는 말은 ‘보편적인’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셨고,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 3,26-28).”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느님의 의로움은
믿는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로마 3,22).”
'보편적이다.', 또는 ‘차별이 없다.’ 라는 말은,
어떤 특혜나 특권이 없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신앙도 보편적이고, 하느님의 심판도 보편적입니다.
신앙생활에도, 하느님의 심판에도, 어떤 특혜나 특권 같은 것은 전혀 없고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공평하게, 하느님의 뜻과 예수님의 가르침이 적용됩니다.)
‘구원의 보편성’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부터 이미 드러나 있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창세 12,3).”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유대인들만의 조상으로 삼으신 것이 아니라,
모든 신앙인의 조상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아마도 우상숭배자들과 싸우느라고 그렇게 되었겠지만,
이스라엘은 자기들만이 하느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선민사상과 우월감에 빠졌고,
자기들만이 구원을 받는다는(이방인들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특권의식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특권의식은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만드는
율법주의로 이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를 통해서 유대인들의 특권의식과
위선적인 신앙생활을 꾸짖으시고, 구원의 보편성을 강조하십니다.
“다른 비유를 들어 보아라.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마태 21,33-36).”
이 말씀은 하느님의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인 유대인들의 ‘죄의 역사’를
가리키는 말씀인데, 여기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소작인’이라고 표현하신 것은
유대인들이 소작인처럼 살고 있는 것을 꾸짖기 위해서라고 해석됩니다.
우리는 소작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입니다.
소작인은 밭 임자와는 ‘남’이고, 남의 밭에서 ‘억지로’ 일하는 사람입니다.
자녀는 아버지의 밭에서 ‘기쁨으로’ 일하는 사람입니다.
비유에서 소작인들이 주인 몫의 소출을 주기를 거부하는 것은,
자기들이 일해서 얻은 소출을 ‘착취’당한다고(빼앗긴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이것은 유대인들의 특권의식을 비판하는 비유로 해석됩니다.
(“어떻게 살든지 간에 우리는 구원이 보장된 사람이다.” 라는 특권의식.)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먼저 선택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특권을 주신 적은 없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고 죄를 지으면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가 끊임없이 나옵니다.
예언자들의 주 임무는 “회개하여라.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 라는
하느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었는데,
유대인들은 그 말씀 자체를 듣기 싫어해서 예언자들을 박해했습니다.
죄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회개하라는 말이 듣기 싫었던 것이고,
구원이 보장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멸망의 경고가 듣기 싫었던 것입니다.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마태 21,37-40)”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주인이 아들을 보낸 것은
소작인들을 처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이르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유대인들을 처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을 포함해서 모든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해서 이방인들에게로 복음이 넘어간 것은 아닙니다.
복음 선포의 순서가 그렇게 되었을 뿐입니다.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간에 누구든지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면 구원을 받게 됩니다.
<비유에서는 소작인들이 포도밭을 차지하려고 아들을 죽인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유대인들이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려고
예수님을 죽인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께 충성하려고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을 죽인 일은
결과적으로 하느님께 반역죄를 지은 것이 됩니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마태 21,42-43).”
이 말씀은 ‘복음의 보편성’과 ‘구원의 보편성’에 관한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쓸모없는 돌’로 여겨서 내버렸지만,
즉 ‘하느님을 모독한 죄인’이라고 판단해서 예수님을 죽였지만, 예수님은 사실은
‘모퉁이의 머릿돌’이신 분, 즉 온 인류를 구원하는 구세주이신 분입니다.
인간들의 눈에는 그것이 마치 대단한(놀라운) 반전(反轉)처럼 보이지만,
‘반전’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느님께서 계획하셨던 일입니다.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라는 말씀은, 유대인들이 반역했기 때문에 그들의 특권을 빼앗아서 이방인들에게
주신다는 뜻이 아니라, “계속 그렇게 어리석은 특권의식을 버리지 않고
위선적인 신앙생활을 고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세례대장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특권을 보장받은 것은 아닙니다.
끝까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21,33-43 : 저 자는 상속자다. 자, 저 자를 죽이자!
오늘 복음의 밭 임자는 포도밭을 일구고 울타리를 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소작인들이 했어야 할 일들을 직접 하였다. 소작인들은 그렇게 많은 일을 해야 했던 것이 아니다. 주어진 것을 잘 지키기만 했어도 되었다. 모든 것이 다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나왔을 때, 율법을 주셨고 도시를 세워주셨으며 성전을 마련해 주셨고 제단을 준비해 주셨다. 그러고는 “멀리 떠나셨다.”(33절) 하느님께서는 끈기 있게 그들을 기다려 주셨다.
밭 임자는 “소출을 받아 오라고”(34절) 자기 종들, 즉 예언자들을 보냈다. 소출은 행실로 드러나는 복종심을 뜻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토록 세심한 보살핌을 받고 나서도 게으름을 피워 소출을 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을 찾아온 종들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밭 임자에게 용서를 청해야 했지만 그들은 성을 내고 자신들의 손에 피를 묻히기까지 했다. 그러나 주인은 그들의 회개를 위해 계속 종들을 보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인은 아들을 보낸다.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37절) 이 말은 글자 그대로 소작인들이 그렇게 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주님은 소작인들이 아들을 죽일 줄 알고 있었다. 소작인들은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듣든, 또는 듣지 않든”(에제 2,5)이라며 다른 곳에서 말씀하신다. 그들이 당신의 종들에게는 완고하게 굴었을지라도 아들의 존귀함에는 경의를 표했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소작인들은 어떻게 했는가? 자기들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청할 시간이 있었지만, 예전에 저지른 죄보다 더 큰 죄를 짓는다.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하고 말하면서,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38-39절)고 한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하고 소리치며, 주님을 도성 밖에서 십자가에 못 박기도 하였다. 그들은 율법이라는 상속재산을 차지하지 못하였고 스스로에게 죽음을 선고하고 말았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40절)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41절)고 대답한다. 그 대답으로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인정하였다. 주님께서도 당신의 말씀으로 이것을 암시하셨다. “집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동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42-43절)
그리스도께서 ‘돌’로 불리시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그분께서 놓으신 기초는 튼튼하여 그분 위에 서 있는 이는 거짓스런 속임수에 넘어가거나 박해의 폭풍에 흔들리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 사악한 자들은 그분 안에서 완전하게 파멸하기 때문이다. 돌과 부딪히는 것은 산산조각 나지만 돌은 멀쩡하다. 돌 위에 떨어지면 스스로 부서지고 만다. 그들의 파멸은 돌의 힘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떨어진 그들의 잘못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다.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자기들에게 하는 이야기인 줄 알고 예수님을 죽이자고 마음먹었지만 군중이 두려웠다. “군중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여겼기 때문이다.”(46절) 그 군중들에게 변을 당할까 두려워 한 것이지만 그 군중들도 결국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하고 외칠 사람들이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참으로 주님의 일을 올바로 따르고 있는 소작인의 삶을 살고 있는가? 반성하며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청하자.

-오상선신부-
오늘 주일미사의 말씀은 주님을 아는 은총이 우리에게까지 닿게 된 까닭을 이야기합니다.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마태 21,33)
예수님께서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를 들려주기 시작하십니다. 이 비유의 배경은 오늘 제1독서인 이사야서의 대목을 그대로 언급하신 것입니다.
포도밭을 만드는 주인을 관상합니다. 그분이 얼마나 신이 나고 흥겨워하시는지요. 그분에게 포도밭은 단순한 소유지를 넘어, 애인이고 신부이며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해 당신 짝으로 삼으실 때의 기쁨과 환희가 우리 가슴까지 떨리게 하는 설렘으로 다가옵니다.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마태 21,39)
그런데 포도밭 소작인들은 처음 밭을 경작할 수 있게 선택되었을 때의 초심을 잃어버렸습니다. 잃은 것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넘보지요. 합당한 소출을 바치지 않으면서 주인의 종들을 해치고 아들까지 죽여 버렸습니다.
"내 포도밭을 위해 내가 무엇을 더 해야 했더란 말이냐?(이사 5,4)
포도밭 주인이신 주님의 눈물 어린 탄식이 들립니다. 주인은 좋은 터를 잡아 온갖 시설을 다 짓고 지극 정성으로 포도밭을 마련했습니다. 사랑을 퍼부었으니 사랑 가득한 열매를 맺으리라 기대했지요. 누구의 돌봄도 받지 못한 시고 떫고 볼품 없는 야생 들포도가 열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겁니다. 정말로 무엇을 더 어떻게 해주어야 했을까요...
이 탄식은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마태 21,37) 하며 끝까지 소작인들을 믿은 순진하다 못해 바보스런 복음 속 주인의 탄식입니다. 모든 것을 마련해 주었던 주인이 당신 백성에게서 배척받는 적반하장의 극치일 겁니다.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은 내줄 것입니다."(마태 21,41)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이 비유가 자신들을 향하고 있다는 걸 아직 알아차리지 못하고 바른 소리를 합니다. 누가 들어도 불의한 상황이기 때문이니까요.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소작인들"
새로운 소작인들은 이 포도밭의 주인이 누구이며, 자기들은 그와 맺은 계약을 통해 이곳에서 일을 하고 있음을 인식하는 일꾼들입니다. 자기들 노동의 몫을 가져가더라도, 땅의 주인에게 돌아가는 합당한 소출을 바칠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지요.
주님과 백성의 계약은 종이 한 장으로 남기 이전에 먼저 서로의 영혼과 마음에 새겨집니다. 둘 사이에는 부르심과 응답이 있었고, 그에 따른 선택과 책임이 있습니다. 이를 잊은 존재는 결국 포도밭을 빼앗길 것입니다. 사랑으로 시작된 계약은 사랑을 맺어야 하니까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마태 21,43)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단호하고 냉정한 선언입니다. 이대로라면 비유 속 소작인들처럼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이스라엘은 결국 하느님 나라를 빼앗길 터입니다. 그리고 이천 년 전 그들의 마음 속에 떠오른 적도 없었던 지구 반대편의 우리에게까지 하느님의 나라가 전해지게 되지요.
이스라엘의 거부로 인해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 받은 우리 모두는 "제때에 소출을 내는 민족"으로 불리움 받았습니다. 이 은총에 우리의 공로는 없습니다. 다만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사랑이 작용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제시합니다. 필리피서의 짧은 대목 안에 거룩한 영적 단어들이 보석처럼 촘촘이 박혀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 기도, 간구, 하느님께 아룀"
"참되고 고귀하고 의롭고 정결하고 사랑스럽고 영예롭고 덕이 되고 칭송받는 것은 무엇이든지 마음에 간직하고, 그대로 실천함"
오늘 필리피서 대목 안에 나오는 말씀들을 모으니, 이야말로 우리가 바쳐야 하는 소출임을 알겠습니다. 하느님께 감사하며 기도하고 그분과 깊은 관계 안에 머무르는 것은 하느님께 바치는 직접적인 소출이지요. 온갖 덕과 선을 간직해 실천하는 것은 형제자매와 이웃을 이롭게 하는 선물이면서 동시에 결국은 이조차도 하느님께 돌아갈 소출입니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아 세웠으니, 가서 열매를 맺어라."(복음 환호송)
우리는 제때에 소출을 내는 소작인으로서, 주인의 부르심에 감사하며, 그에 맞갖은 열매를 맺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열매가 우리 자신들만 배불리고 풍요롭게 해서는 곤란합니다. 우리가 바치는 소출은 주님의 공정과 정의가 이루어지는데 쓰여야 합니다.(이사 5,7 참조) 포도밭을 짓고 꾸밀 때 주인이 가졌던 설렘과 기대, 사랑을 떠올린다면 그분을 실망시켜드리고 싶지 않지요. 여러분도 같은 마음이시리라 믿습니다.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마태 21,42)
우리에게까지 다가온 주님의 부르심과 기대를 경이롭게, 감사히 받아들입시다. 가장 먼저 선택하신 이들에게 모질게 배척받으신 그분 마음을 위로해 드리면서, 부족하지만 풍성히 열매 맺고 소출을 바치는 신실한 백성이 되도록 애를 씁시다. 우리 혼자 힘만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주님과 함께면 가능합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필리 4,6.9)
오늘은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축일입니다. 프란치스코를 사부로 모시고 살아가는 저희 모든 프란치스칸들을 축하해 주시고 기도해 주십시오. 작음과 형제애 안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제때에 맺는 하늘나라의 소작인들이 될 수 있도록... 아멘.

프란치스코 대축일
-김찬선신부-
올해 프란치스코 대축일 강론은 여느 해 강론과 다른 강론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전의 강론은 그해의 시대정신과 맞는 강론을 하려고 노력하였고,
그래서 프란치스코 대축일 강론은 다른 강론과 비교할 때 길기도 하고
담대하기도 하고, 엄숙하기도 하였지요.
그런데 어제 올해는 무슨 강론을 할까 산보하며 묵상하는데
정말로 문득 그러니까 예기치 않고 뜻밖에도 이제 '프란치스코가 참 버겁다'
'지쳤다', '프란치스코를 그만 내려놓자' 이런 느낌들이 올라오는 거였습니다.
너무도 뜻밖이고, 놀라서 '이거 진심이야?' '이제 프란치스코가 싫어졌어?
그리고 예수님도 따르기 싫어진 거야?'하고 제게 물었습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니 프란치스코가 싫어진 것 아니고, 예수님은
더더욱 아니었는데 그렇다면 이 부정적인 느낌은 무엇이고?
왜 이런 느낌이 느닷없이 올라온 것일까 또 생각게 되었지요.
여전히 프란치스코를 사랑하지만 의지가 들어간 부분, 힘이 들어간 부분이
있었던 것이고 그래서 너무 의지적으로 프란치스코를 따르지 않고
힘을 빼고 따르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환갑을 지내며 찾아온 변화의 연장이었습니다.
제가 환갑이 되었을 때가 저의 서품 30주년이었고,
서원 35주년이었으며, 수도 생활 45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돌아보니 참 열심히, 아니 치열하게 살아왔다고 함이 낫겠습니다.
그러나 열심히 살기는 했지만 잘 산 것은 아니라는 반성이 되었습니다.
열심히 노를 저었는데 배가 엉뚱한 방향으로 간 것은 아닐까?
잘못된 방향은 아니지만 헛심을 쓴 것은 아닐까?
또 하나의 반성은 제가 그때까지 너무 책임만 맡고 살아왔는데
이제는 무거운 책임을 형제들과 하느님께 넘겨드리고 살아야겠다는,
이젠 나를 위한 삶, 내가 살아야 할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사실 저는 그런 생각을 종종 하였습니다.
하느님을 위해서는 10년만 열심히 살아도-열심히 살기만 한다면-
잘 사는 것이니 그렇게 살고 나면 수도 생활을 그만두어도 되지 않을까?
그런데 하느님과 공동체를 위해서라면 45년 열심히 산 것으로 되지만
나를 위해서는 예수님과 프란치스코를 따르는 삶을 그만두어서는 안 되고,
남은 인생은 정말 이 삶을 열심히가 아니라 잘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프란치스코도 생애 후반부에 총 봉사자의 책임을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 물러난 것이기도 하지만 밀려난 측면도 있었지요.
이제는 더 이상 프란치스코가 생각한대로 가서는 안 된다는
유식하고 유능한 형제들에 의해 밀려난 것이기도 한 거지요.
이때, 프란치스코는 형제회가 자신이 받은 소명에서 벗어나는 것 같아
고뇌가 컸고, 잘못 가는 것에 대한 책임감도 너무도 크게 다가왔습니다.
이때, 기도 중에 하느님께서 나타나시어 이 수도회가 누구의 것이냐?
이 수도회를 누가 세웠냐는 음성을 듣게 되면서 프란치스코는
근심 걱정을 책임감과 함께 내려놓고 오로지 복음선포의 삶에만 전념합니다.
저는 이제 모든 힘을 빼고 살아도 되는 은총이 주어졌습니다.
프란치스코를 본받아 주님을 따르는 삶을 오로지 살 수 있는
은총의 시기가 주어졌는데 그것을 버겁게 생각하며 살거나
사랑이 아닌 의무나 의지로 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이제는.
어제 수녀님들과의 추도식을 끝내고 뽑은 프란치스코의 말씀,
"기쁨과 더불어 가난이 있는 곳에 탐욕도 인색도 없습니다."는
프란치스코의 권고가 그래서 마음에 더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도 저와 같은 분이 있다면 여러분도
저와 같이 프란치스칸 삶을 은총과 사랑으로 살아가십시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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