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10월 12일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Margaret K 2020. 10. 11. 06:10

2020 10 12일  연중 제28주 월요일 


이 세대가 기적을 구하지만

요나의 기적밖에는 따로 보여줄 것이 없다.

니느웨 사람들에게 요나의 사건이 기적이 된 것처럼

이 세대 사람들에게

사람의 아들도 기적의 표가 될 것이다. 
(루가 11,29-32)

 

 “This generation is an evil generation;
it seeks a sign, but no sign will be given it,
except the sign of Jonah.
Just as Jonah became a sign to the Ninevites,
so will the Son of Man be to this generatio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한재호신부-


요나는 니네베로 가서 예언자직을 수행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습니다. 니네베는 북부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아시리아의 수도였으니, 이스라엘 백성의 원수입니다. 요나는 원수를 위하여 예언하고 싶지 않아서 타르시스를 향하여 배를 타고 도망갑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태풍을 일으키시고 큰 물고기를 시켜 요나를 삼키게 하십니다. 사흘 동안 물고기 배 속에서 지낸 요나는 마침내 하느님께 굴복하여 니네베로 갑니다.
본디 니네베는 가로지르는 데에만 사흘이나 걸리는 도시인데 요나는 하룻길을 걸은 다음 회개하라고 외칩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하루의 외침만으로도 니네베 사람들 전부가 자루옷을 걸치고 단식합니다. 높은 사람, 낮은 사람 따로 없이 임금마저 단식하였습니다. 심지어 동물들에게도 자루옷을 입혔고 단식하게 하였으니 숨을 쉬는 모든 것은 다 회개한 것입니다.
요나의 표징은 예수님의 표징과 대조를 이룹니다. 요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기 싫어 니네베로 가지 않고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시려고 몸소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요나는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사흘 동안 물고기 배 속에서 지내다가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철저히 순종하셨기에 사흘 동안 저승에 가셨다가 부활하셨습니다. 요나가 니네베에 심판 선포를 할 때 그는 충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목숨까지 바쳐 가시며 예언자직을 수행하셨습니다. 그런데 정말 슬픈 일이 벌어집니다. 요나의 성의 없는 표징에도 니네베 사람들은 회개하였지만, 요나와 비교할 수 없이 더 크신 분께서 이 땅에 오셨는데도 사람들의 마음은 좀체 바뀌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어떠한가요?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국제 뉴스를 보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의 어느 아파트에 불이 났습니다. 3층 난간 안쪽에는 시커먼 연기와 새빨간 불꽃이 솟아오릅니다. 그리고 창가에는 3살, 10살 먹은 아이가 구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불의 크기는 점점 커져 오고, 구조대는 오지 않는 상황이었지요.

이 안타까운 상황을 보고 있었던 창가 아래에 있던 주민들이 아이들을 향해 “뛰어내려!”를 외치고 있습니다. 뛰어내리면 아래에서 받아주겠다는 말과 함께 말이지요. 잠시 뒤에 아이들은 뛰어내렸고, 주민들은 아이를 안전하게 받아서 구조했습니다. 이때 아이를 받아낸 주민 두 명이 팔이 골절되었습니다. 아무리 아이라 해도 3층이면 12m 높이니까 위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자기 몸이 다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아이를 구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수 있는 부분은 아이들이 뛰어내렸다는 사실입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받아준다고 하지만, 그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기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뛰어내렸던 이유는 밑에서 받아주겠다는 어른들의 말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민들도 그 믿음에 응답했습니다. 손목 골절이 되더라도 아이를 구했던 것이지요.

사람도 이러한데 하느님은 어떠실까요? 우리의 믿음에 무조건 커다란 사랑으로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걱정하지 말고 자신의 위협에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주님께 뛰어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표징을 요구합니다. 자신들이 믿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표징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놀라운 표징을 계속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났고,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람이 듣고 볼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역시 도저히 믿지 않을 수가 없게 만드는 표징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귀 두목의 힘을 빌려서 그런 신비한 일을 행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또 다른 표징이라고 합니다.

이들을 향해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요나라는 표징은 예수님 안에서 완성된 수난과 부활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보지 못한다면 절대로 구원의 길에 들어설 수 없음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똑같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계속해서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울 수 있는 주님의 표징을 요구하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나만 잘 되고, 나만 행복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나만을 위한 주님을 요구한다면, 주님을 제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이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이해하고, 이해하는 사람은 사랑한다(폴 투르리에).


기쁨에서 시작하세요.

지금까지 살아오면 나름 깨달은 것이 있다면, 재미를 느끼고 즐거워야 실력도 향상된다는 것입니다.

고등학교 때 배웠던 기타가 그랬고, 더 어렸을 때 배웠던 탁구가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독서 능력도 학창 시절 때가 아니라, 독서의 즐거움을 깨달은 성인이 되어서였습니다.

지금의 삶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이런 기쁨이 아닐까요? 기쁨을 통해 내 안의 성취는 계속해서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라면 어떨까요? 너무 힘들다는 생각만이 내 머릿속을 지배하면서 개인의 발전이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 역시 기쁨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의무요, 강요가 아닌 기쁨의 길임을 발견하도록 하십시오.

요나의 표징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요구하는 세대를 악한 세대라고 말씀하십니다. 표징이 하나도 없었지만 남방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배우려 그 멀리서 솔로몬을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이 말은 표징이 없어서 못 믿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배울 마음이 없어서 안 믿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이들에게 설사 표징이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밤낮을 머물고 난 뒤에 니네베로 가서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요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니네베 사람들이 다 회개를 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표징을 요구하는 세대는 회개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솔로몬보다 지혜로우시고 요나보다 크십니다. 솔로몬은 하느님 지혜를 발산하는 사람이었고 요나는 그 표징을 보여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솔로몬은 진리를, 요나는 은총을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늘로부터 태어난 사람이 아니면 그 은총과 진리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만약 하늘로부터 태어났다면 표징이 없어도 믿고 변화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요나의 표징은 무엇일까요?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갈라 6,14)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표징은 요나가 그랬던 것처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새로운 창조입니다. 요나는 니네베 사람들을 창조하였고 그리스도는 교회를 창조하셨습니다. 세상에 이것보다 완전한 표징은 없습니다.

      어떤 대학 교수의 ‘나는 꼴찌였다’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나의 고향은 경남 산청, 지금도 비교적 가난한 곳이다. 아버지는 어려운 형편에 머리도 그리 좋지 않은 나를 대구로 유학 보냈다. 나는 대구중학교에 다녔고, 석차는 68/68 등, 꼴찌였다.

부끄러운 성적표를 가지고 고향에 가는 어린 마음에도, 그 성적표를 부모님께 내밀 자신이 없었다. 아버지께서 교육을 받지 못한 한을 자식을 통해 풀고자 대도시 중학교로 유학을 보냈는데, 꼴찌라니. 가난한 소작농이면서도 아들을 중학교에 보낼 생각을 한 아버지를 떠올리면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성적표를 1/68로 고쳐 아버지께 보여드렸다. 아버지께서는 초등학교도 다니지 않았으므로, 내가 1등으로 고친 성적표를 알아차리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대구로 유학한 아들이 집으로 오자, 마을 사람들이 몰려왔다. “찬석이는 공부를 잘했더냐?”라고 물었다. 아버지께서는 “앞으로 봐야제. 이번에는 어쩌다 1등을 했는가 봐.” 마을 사람들은 “자식 하나는 잘 두었어. 1등을 했으면 책거리를 해야제?”하면서 부러워했다.

 

      당시 우리 집은 동네에서 가장 가난하였다. 이튿날, 강에서 멱을 감고 돌아오니, 아버지께서는 한 마리뿐인 돼지를 잡아, 동네 사람들을 모아 놓고 잔치를 하고 있었다. 그 돼지는 우리집 재산목록 1호였다.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진 것이다. 나는 “아부지~” 하고 불렀지만, 다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곧바로 집 밖으로 뛰어나갔다.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겁이 난 나는, 강으로 가 죽어버리고 싶은 마음에 물속에서 숨을 안 쉬고 버티기도 했고, 주먹으로 내 머리를 내리치기도 했다.

 

      충격적인 그 사건 이후 나는 달라졌다. 항상 그 일이 머리에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악물고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하여 그로부터 17년 후 나는 대학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나의 아들이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그러니까 내 나이 45세가 되던 어느 날, 아버지께 33년 전의 일을 사과하려 했다. “아버지, 저 중학교 1학년 때 1등은 사실은요…….” 하고 말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옆에서 담배를 피우시던 아버지께서 “알고 있었다. 그만해라. 민우(손자)가 듣는다”라고 말씀하셨다. 자식이 위조한 성적을 알고도, 재산목록 1호인 돼지를 잡아 잔치하신 부모님 마음을 아직도 알 수가 없다. ‘전 경북대 총장 박찬석 교수의 글’이라고 합니다.

      한 나라가 망하려면 어떠한 믿음이 사라질 때일까요? 바로 ‘자녀를 낳는 것이 가장 큰 행복’임을 믿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사라지면 나라가 망하고 인류가 멸종합니다. 이런 믿음이 사라진 나라로부터 자연 파괴가 더 심각하게 일어납니다. 동물들은 이 본성을 절대 잃지 않습니다. 그래서 천적이 없는 이상 동물들은 영속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이 믿음을 잃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더 믿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더 믿는 사람은 세속-육신-마귀가 더 행복이라 믿습니다. 이들은 자녀를 낳는 게 왜 행복이냐고 그 표징을 보여달라고 합니다.

      새로 태어남의 행복은 자녀를 낳을 때 완성됩니다. 박찬석 총장 아버지의 행복은 자신이 믿어주면 자기 아들이 훌륭하게 될 것을 믿고 가장 소중한 돼지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돼지를 잡는 것이 참 행복을 위한 유일한 길이었음을 나중에야 확인하게 됩니다.

      누군가가 그렇게 했을 때 행복한 모습이 바로 표징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려던 요나의 표징이 바로 그것입니다. 교회를 탄생시키려 십자가의 피 흘림을 당하셨어도 부활하여 기쁨을 누리시는 바로 그것이 표징입니다. 이 표징을 두고 계속 표징을 운운하는 것은 그런 행복을 따를 마음이 없다는 것만을 증명해 줍니다. 제가 사제가 된 기쁨을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표징은 사제로서 또 누군가를 새로 태어나게 해 주기 위해 피 흘림으로써 얻는 기쁨과 행복을 보여주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보고도 믿지 않고 표징을 요구한다면 방법이 없습니다. 자녀를 낳는 행복,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요나의 표징입니다. 이 요나의 표징을 받아들이는 공동체만 영원히 지속될 수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The Social Dilemma'를 보았습니다구글페이스북인스타그램트위터에서 일하던 전직 고위 간부들이 쇼셜 미디어(SNS)의 위험성을 증언하는 내용입니다물은 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지만 뱀이 먹으면 독이 됩니다물은 도구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자전거를 잘 사용하면 건강에 도움이 됩니다환경을 보존하는 교통수단이 됩니다자전거는 우리가 사용하지 않으면 그 자리에 있습니다. SNS는 잘 사용하면 정보를 얻는 유익한 도구가 됩니다이웃과 소통할 수 있는 도구가 됩니다원하는 물건을 구할 수 있고금용거래를 할 수 있는 도구가 됩니다.

 

자전거와 SNS는 하나의 차이점이 있습니다자전거는 나의 정보를 수집하지 않습니다자전거는 나에게 신호를 보내지 않습니다그러나 SNS는 끊임없이 나의 정보를 수집하고 있습니다나에게 신호를 보내서 SNS를 보게 만듭니다. SNS의 뒤에는 거대한 자본이 있고이익을 추구하는 기업이 있기 때문입니다나의 정보와 나의 관심은 광고주에게는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상품이기 때문입니다.

 

전직 간부들은 SNS의 위험성을 4가지로 이야기합니다첫째는 분극화입니다다양한 의견이 공유되지 않고 자신만의 의견을 중요하게 여깁니다여기에는 대화와 타협의 여지가 별로 없습니다나의 정보를 알고 있는 SNS는 가정에서도직장에서도친구들과의 모임에서도 끊임없이 SNS 속으로 들어오게 만들고 있습니다둘째는 극단화입니다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적으로 규정하기도 합니다약탈과 방화는 물론 살인까지도 일어납니다인종차별에 반대하면서 모임 집회가 약탈과 방화로 변질되기도 합니다정부의 정책을 규탄하는 집회가 방역을 방해하고 전염병이 퍼지도록 방치하기도 합니다.

 

셋째는 가짜뉴스입니다. SNS를 통해서 가짜뉴스는 일반뉴스보다 여섯 배 빨리 전파된다고 합니다. SNS는 가짜뉴스의 위험성을 방치하고 있습니다가짜뉴스는 이익을 창출하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가짜뉴스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 수 있다고 합니다넷째는 중독성입니다어린 시절부터 SNS를 체험한 세대는 하루 중 많은 시간을 SNS에서 지내고 있습니다호기심을 자극하고새로운 것을 알려주고가상의 세계에 머물도록 합니다거기에는 가치질서윤리진실사랑이 들어설 자리가 별로 없습니다그런 것들은 돈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SNS에 빠져있는 세대의 우울증과 자살률이 높다고 합니다전직간부들은 SNS의 위험성을 증언하면서 자녀들이 SNS에 중독되지 않도록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고 합니다잠자리에는 SNS를 가져가지 않도록 한다고 합니다. SNS를 사용하는 계획을 세우도록 한다고 합니다주체적으로 정보를 검색하고본인의 관심분야를 스스로 찾으라고 한다고 합니다가상의 세계에 머물기 보다는 책을 읽고토론하고건강을 위해서 운동하라고 한다고 합니다.

 

SNS가 내 삶의 독이 되지 않도록 분별하고 식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SNS를 통해서 거대한 이익을 챙긴 기업은 SNS를 통해서 생긴 갈등과 분쟁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합니다방대한 자료와 정보를 얻는 만큼 세금을 내야한다고 합니다. SNS를 통해서 분노가 커졌다면, SNS 때문에 기도하는 시간봉사하는 시간이 부족하다면가족과 있는 시간에도 SNS를 더 가까이 한다면 SNS가 나의 삶에도 이 되고 있음을 알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우리가 진정으로 찾아야 하는 표징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의 몸인 부인의 자녀입니다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그러나 보라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예수님의 자유로움은 하느님 아버지께 온전히 종속됨을 통한 자유로움이었습니다!

 -양승국신부-

 

공생활 기간 내내 예수님께서 일관되게 보여주신 특징적인 모습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그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이 그토록 추구하는 세속적 권세나 명예는 거들떠보지도 않으셨습니다. 헤로데나 로마 총독, 최고 의회, 대사제 등 지상 권세 앞에서 조금도 주눅들지 않으셨으며, 할말 안할 말 다 하셨습니다. 세속적인 야심이나 권력욕으로부터의 자유로움 때문이었습니다. 

 

마치 한 줄기 바람 같으셨던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가 그토록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혈연이나, 학연, 지연을 헌신짝처럼 차버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정들었던 고향 나자렛을 포함해서, 즐겨찾으셨던 제2의 고향 카파르나움이라 할지라도, 결코 안주하거나 정착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 손길을 필요로 하는 곳을 향해 지체없이 떠나고 또 떠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유다 지도층 인사들이 목숨처럼 소중히 여겼던 율법으로부터, 제사 규정으로부터, 안식일 규정으로부터, 정결례로부터, 성전으로부터, 재물로부터 철저하게 자유로우셨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습관처럼 어제와 결별하고, 즉시 자리를 털고 일어나, 홀연히 또 다른 여행길을 재촉하시는 예수님의 뒷모습이 참으로 멋있어 보입니다. 좀 더 머물러 달라는 사람들의 요구 앞에 예수님께서는 얄짤 없으셨습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당신의 손길을 기다리는 또 다른 고을로 떠나가셨습니다. 

 

그 모든 예수님의 자유로움의 원천이자 배경이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도 하느님 아버지께 매여있었기 때문입니다. 내 뜻, 내 의지, 내 계획은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아버지의 뜻만을 추구했습니다. 그저 아버지의 의중에 순명했습니다. 

 

그저 아버지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당신 삶속에서 실천했습니다. 자연스럽게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세속의 권력이 들이대는 협박이나 강요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세상의 갖은 유혹과 달콤함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대자유의 원천이신 하느님 아버지께 온전히 종속됨을 통해 참 자유를 얻으신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역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바라봐야겠습니다. 그 어디에도 종속되지 않음으로 인한 자유가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께 100퍼센트 종속됨으로 인한 자유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인이기를 갈구합니다. 동료 인간 존재로부터의 자유, 관계로부터의 자유, 나 자신으로부터의 자유, 죄나 유혹으로부터의 자유, 재산이나 명예로부터의 자유...

 

그러나 현실은 어디 그런가요?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더 얽매이고, 더 짓눌리고, 더 종속되어 허덕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건네시는 바오로 사도의 권고 말씀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갈라티아서 5장 1절)

  

오늘 우리를 억압하는 것을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를 부자유스럽게 만드는 요인은 무엇입니까? 자유로움의 모델로서, 오늘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고, 해방시켜주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의 은총 안에 좀 더 자유로운 오늘 하루를 만끽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앞 장면의 내용과 연결되어 있는 장면입니다.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습니다. 그러자 어떤 사람들은 놀라워하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저자는 마귀의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루카 11,15)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카 11,29)

 

“악한 세대”라는 말은 <마태오복음>에 비추어 보면, 단지 마음이나 행실이 악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마태 17,17)를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앞 장면에서 그들이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그들의 완악함과 비뚤어진 마음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루카 11,16 참조).

사실, 이방인인 니느웨 사람들은 회개했건만, 막상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한 이방인 남방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찾아 달려왔건만, 막상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유대지역에서는 이미 그들 가운데 와 계신 지혜마저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오히려 그분을 시험하려 들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나의 표징은 무엇인가?

 

그것은 마치 요나가 “이제 사십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 3,4)라고 외치며, 회개의 때가 왔음의 표징이 되었듯이, <루카복음>의 예수님의 공생활을 알리는 첫 발설에서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루카 4,18-19)하시면서 구원의 때가 왔다는 표징입니다. 또한, 요나의 표징은 십자가와 부활의 표징이기도 합니다. 곧 요나가 바다에 빠져 고래 배속에서 사흘째 날에 다시 밖으로 나온 일은 사람의 아들이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사흘째 되는 날에 다시 살아나는 것을 예표해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드러내시며 말씀하십니다.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32)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31)

 

사실, 요나와 솔로몬은 예수님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요나는 소생했을 뿐이지만,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번영과 지혜는 사라질지라도, 예수님의 지혜는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줍니다. 곧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드러냅니다.

그러니 필요한 것은 표징을 볼 줄 아는 눈, 곧 믿음으로 보는 눈입니다. 사실 믿음으로 보면, 모두가 신비요 사랑이요 자비요 기적일 것입니다. 모두가 다 하느님의 활동이요 현존일 것입니다. 그것은 기이한 일을 보는 눈이 아니라, 그 속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보는 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언가 불가사의한 일로 우리를 놀라게 하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크나 큰 사랑과 그 자비를 선포하시기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것은 기적을 찾기보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믿는 우리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루카 11,29)

 

주님!

당신께서는 불가사의한 일로 놀라게 하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자비를 선포하시려 오셨습니다.

제 눈이 기적을 보기보다, 당신의 자비를 보게 하소서.

제가 찾기도 전에 저를 찾으시고 제 안에서 구원을 이루시는,

먼저 베푸신 당신의 자비를 보게 하소서. 아멘


우리를 기다리시는 분  

-반영억신부-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요구하는 군중을 보시고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가 11,30).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마음의 쇄신을 갖지 않은 이상 어떤 것을 보여줘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을 열고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려는 사람만이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보이신 표징을 알아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을 지닌 사람에게는 예수님께서 구원의 표징이 되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단죄의 표징이 됩니다.

요나 예언자가 회개의 삶을 가르쳤을 때 삶을 바꾼 사람은 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은 살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거부하는 사람은 생명을 누리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자체가 벌이 됩니다. 그분께서 주시는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 벌입니다.

일상을 하느님의 손길이 주어지는 자리로 인정할 때, 매 순간 접하게 되는 모든 것에서 하느님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내적인 마음의 변화 없이는 주님의 손길이 매 순간 주어져도 결코 그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바꾸십시오. 주어진 모든 것이 주님이 주신 일이라고 받아들이십시오. 그래서 어떤 일을 하든지 억지로 할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기쁘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나를 도구 삼아 일하십니다. 그러니 감사하십시오.

성녀 줄리아르는 말합니다. “정력적으로 온 힘을 다해서 일하되 법석을 피우지 마십시오.” 성 아우구스티노는 “하느님은 항상 일하시나 조용히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얼마나 말이 많은가?” 조용한 가운데 함께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표징을 요구하지 말고 삶의 자리를 표징의 자리로 만들면 좋겠습니다. 겉모양에 힘쓰는 허영은 영혼을 병들게 한다고 했습니다. 겉모양도 중요하지만, 속이 더 소중함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착각과 오류 속에 살면서 그것을 지적해 줘도 인정하지 않고 완고하게 버티면 그것은 악한세대입니다. 악한세대는 자신이 회개할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타인과 심지어 예수님이 회개의 대상이라 생각합니다. 그들은 착각 속에 삽니다. 그럼에도 이 악한세대 사람들을 내치지 않으시고 회개를 기다리시는 분이 우리의 주님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동안 죽음을 체험한 후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설교를 들은 많은 이들이 회개하였습니다.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으면 회개의 길에 들어서야 합니다. 성령께, 돌같이 딱딱한 마음을 살 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시켜주기를 청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요나의 표징 
-송영진신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 하느님의 뜻입니다(요한 3,17).
복음서에 자주 나오는 ‘심판 예고 말씀’은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라는 호소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으려면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들은,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을 받을 것이다.” 라고
위협하는 말씀이 아니라, “회개해서 구원을 받아라.” 라는 사랑의 말씀입니다.
인간들이 회개해서 구원을 받기를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들을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요나서에 나오는 ‘니네베 심판 예언’과 ‘니네베 사람들의 회개’와
그 회개를 보시고 하느님께서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는 이야기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잘 나타냅니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 3,4)” 라는 요나의 예언은,
실제로는 “회개하지 않으면 사십 일 뒤에 니네베는 멸망한다.”였을 것입니다.
(무조건 멸망한다는 예언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예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상 “회개하면 구원을 받는다.” 라는 예언입니다.)
니네베 사람들이 그 예언을 듣고서 단식하고 회개한 것은
멸망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지만,
그래도 어떻든 니네베 사람들은 회개했고, 심판과 멸망을 피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요나 3,10).”
요나는 자기가 예언한 대로 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 화를 냈습니다(요나 4,1).
하느님께서는 그런 요나를 이렇게 타이르셨습니다.
“너는 네가 수고하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았으며, 하룻밤 사이에 자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아주까리를 그토록 동정하는구나!
그런데 하물며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요나 4,10-11)”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은 ‘어린이들’입니다.
어린이들은 죄가 없고, 또 짐승들도 죄가 없습니다.
하느님은 짐승들도 가엾게 여기시는 분입니다.)
심판과 멸망이 두려워서 회개하는 것은 구약시대 사람들의 모습이고,
오늘날의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기 때문에,
또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회개합니다.
회개는 “사랑에 대한 사랑의 응답”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일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나타내고,
또 이미 우리를 용서하셨음을 나타냅니다.
회개는 그 용서에 대한 응답입니다.
(용서받으려고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받았기 때문에 회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회개하지 않는 것은, 이미 받은 사랑과 용서를 스스로 저버리는 것입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루카 11,29-30).”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32).”

여기서 ‘이 세대’는 믿으려고 하지는 않고, 표징만 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태도는 자기들을 구원하려고 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악한 세대’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것인데, 그것은 대단히 오만하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물에 빠져서 죽을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하려고 구조대원이 손을 내밀 때,
그런 급박한 상황에서 구조대원이 내민 손을 잡으려고 하지는 않고,
구조대원이라는 것을 먼저 증명하라고 요구한다면?
믿으면 사는 것이고, 안 믿으면 죽는 것입니다.)

‘요나 예언자의 표징’은 좁은 뜻으로는 요나가 사흘 낮과 사흘 밤을
큰 물고기 배 속에 있다가 살아서 나온 일을 가리킵니다(요나 2,1).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요나의 예언을 듣고
니네베 사람들이 회개한 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회개하는 것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즉 “표징을 요구하지 말고 먼저 회개하여라.”로 해석됩니다.
‘요나 예언자의 표징’이라는 말을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을 암시하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고, 그러면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나의 죽음과 부활이 너희에게 표징이 될 것이다.” 라는 뜻이 됩니다.
(이 경우에 ‘표징’이라는 말은, 믿으면 살고, 안 믿으면 죽는,
갈림길에 서 있는 표지판 같은 것을 뜻하는 말이 됩니다.)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메시아의 말씀을 듣고도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은 것은 죄” 라고 니네베 사람들이 증언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의 설교를 듣고서 회개했고,
그래서 하느님의 심판을 피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증인 자격이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날에도 자칭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자들이(루카 10,21)
종교와 신앙에 대해서 이런저런 시비를 거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안 믿는 것은 그들의 자유이지만, 그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고
‘어리석음’일 뿐이고,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부정하는 것은 ‘죄’일 뿐입니다.
‘철부지들’ 같은 사람들이 단순하게 믿고, 겸손하게 회개하는 것,
그것이 바로 ‘참된 지혜’입니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31).”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스바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와 부귀영화를 보고
하느님을 찬미했습니다(1열왕 10,1-9).
그러나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예수님의 복음’에 비하면
솔로몬의 지혜는 하찮은 것이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누리게 될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행복에 비하면 솔로몬의 부귀영화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11,29-32: 이 세대가 왜 이렇게도 악할까!

유대인들은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된 참 메시아’임을 입증할 수 있는 표징을 요구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표징을 보여주지 않으신다. 그것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고,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져주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요나라는 표징 밖에는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다. 요나의 표징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을 말하는 것이다.

요나의 표징은 니네베 사람들에게 두 가지 면에서 도움이 되었다. 만일 그들이 요나의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요나처럼 산 채로 저승으로 갔겠지만, 요나의 예언을 믿고 회개했기 때문에 요나처럼 죽음으로부터 되살아날 수 있었다. 예수님도 사람들은 그분의 돌아가심을 통해 살거나 그분의 돌아가심을 통해 멸망하기도 한다. 이 표징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에 따라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31절) 남방 여왕은 교회의 모습이다. 남방 여왕이 솔로몬에게 왔듯이, 교회도 주님께 왔고, 남방 여왕이 이 세대를 단죄하듯 교회도 그럴 것이다. 지나가고 마는 지혜와 죽을 수밖에 없는 임금을 보고자 왔던 남방 여왕이 그 세대를 단죄한다면, 지혜 자체이신 임금을 사모하는 교회는 어떻겠는가?

바로 솔로몬보다 더 위대한 지혜, 요나보다도 더 큰 하느님의 표징을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베푸셨는데도, 즉 다른 어느 세대, 어느 백성에게도 베풀지 않은 특전을 베풀었는데도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자기 고집에만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볼 수가 없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지 2000년이나 지난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이 지혜와 삶을 통해서 체험하고 소화해 전해준 신앙과 교회의 가르침, 성경 등 우리는 하고자만 한다면 더더욱 하느님을 가까이 모시고 더욱 의욕적인 믿음의 생활을 할 수 있는 때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더 큰 특전이 내린 때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잘 안된다면 우리도 성경 말씀대로 더 큰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면서 나태하기 쉬운 우리 자신을 채찍질해야 할 것이다. 또한, 유다인들이 하느님을 알면서도 자신들의 현세적인 이익만을 위해 기적을 요구하듯이 우리 자신이 하느님을 부르면서도 세상의 이익만을 찾음으로써 하느님의 뜻과는 먼 생활을 하고 있지나 않은지 경계하고 깨어있어야 하겠다.

가장 큰 기적이란 바로 나 자신이 변화되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변화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큰 기적도 나의 눈에는 기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눈이 변화될 때에 참으로 하느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생명을 얻을 수 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표징과 믿음의 관계를 이야기하십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카 11,29)


당신 주위로 몰려드는 군중을 향해 예수님께서 한탄하십니다. 군중의 마음에서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보다 저급한 호기심과 탐욕스런 기회주의를 읽으신 까닭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메시아의 도래는 약속의 성취이고 희망이며 구원입니다. 백성들은 그동안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기대를 걸었던 인물들이 반짝 하고 떠오르다가 사라지기를 무수히 경험해 왔을 겁니다. 이제는 쉽사리 믿기도 어렵거니와 섣불리 믿었다가 낭패를 볼 수도 있으니 더 살펴보고 더 시험해 보아야 최소한 본전이라도 건질 터입니다. 지금 그들에게 필요한 건 믿음보다 검증입니다.

"요나 예언자의 표징"

니네베 사람들은 먼 이국에서 온 떠돌이 예언자의 외침을 듣고 믿었습니다. 자기들이 섬기는 신이 있음에도 유다의 예언자가 전하는 이스라엘의 하느님 말씀을 들었던 것입니다.

요나 예언자가 자기들에게 오기 전에 있었던 일,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도망가다 바다에 던져져 큰 물고기에게 삼켜지고, 그 뱃속에서 사흘을 지낸 뒤 멀쩡하게 살아서 육지로 나온 신기한 사연을 그들이 먼저 알아서 그를 믿었던 걸까요? 아닌 것 같습니다.

성경을 보면 요나는 니네베에서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주력합니다. 요나는 니네베 사람들에게 연민을 갖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의 구원을 언짢게 여길 만큼 그들에게 애정이 없었으니 자기 이야기를 해가면서 그들을 설득할 이유가 없었을 것 같네요.
(요나 4,1-3 참조) 그러니 니네베인들이 접한 것은 오로지 이방인의 입에서 나온 멸망의 예언뿐이었을 겁니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루카 11,30)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를 표징으로 받아들입니다. 자기들이 섬기는 민족의 신도 아니면서 자기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이방신,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베푸시는 사랑의 표징으로 말입니다. 요나는 민족의 적에게까지도 무한히 자비하신 사랑의 하느님의 표징입니다. 요나의 파견을 통해 하느님은 어느 한 민족을 관할하는 지방 신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주인이심이 드러납니다. 온 세상 모든 만물, 모든 존재는 야훼 하느님의 귀한 소유입니다.

"사람의 아들도 그러할 것이다."

예수님도 이처럼 하느님 사랑과 자비의 표징입니다. 군중은 자기들을 믿게 만들어 보라며 예수님께 노골적으로 기적을 요구하지만, 이미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적이고 신비이며 표징입니다.

이 사랑의 표징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여전히 믿기 위한 데이터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데이터는 앎을 위한 것이지 믿음을 위한 것이 아니지요. 믿을 이라면 기적 없이도 믿습니다. 믿음은 선택이고 결단이며 자신을 내던지는 모험이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구약의 백성인 유다인과, 그리스도를 믿는 신약의 백성인 교회를 아브라함의 두 부인, 하가르와 사라에 비유합니다.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의 몸인 부인의 자녀입니다."(갈라 4,31)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율법의 종살이에서 벗어난 성령의 자녀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율법의 문자에 달려 있지 않고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갈라 5,1)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로움을 인정받고 자유인으로 살아갑니다. 모든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님과 일치함으로써 우리는 성령이 이끄시고 허락하시는 대로 자유로이 사랑하고 헌신합니다. 우리는 이 자유를 육의 허영이나 욕정, 탐욕을 만족시키는데 쓰지 않고,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데 쏟아붓습니다. 진정 그리스도 안에 자유로운 이는 그렇습니다.

가장 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가장 비참한 죄인으로 모습으로 돌아가신 예수님은 하느님 사랑의 표징입니다. 성부 하느님께서 성자 예수님으로 이 세상에 현존하시며 당신 사랑을 보여 주셨지요. 그러니 이를 믿는 우리에게는 다른 표징이 필요없습니다. 사랑의 완결판이 우리와 함께 있으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삶이 내 맘대로 되지 않을 때, 도무지 터널의 끝이 보이지 않을 때, 지금 내 모습이 나에 대한 주님의 최선인지 회의가 들 때, 한 번 더 용기를 짜내어 주님께 믿음을 고백합시다. 내 앞 십자가 위에 매달려 계시는 예수님이 나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의 생생한 증거임을 믿읍시다.

믿음의 여정을 걷고 있는 우리 모두를 응원합니다. 우리에게 약속된 구원은 믿음과 동행하는 길이고, 또 그 결승점이니, 
"억눌린 이를 흙먼지에세 일으켜 세우시고, 불쌍한 이를 잿더미에서 들어 올리시는 분"(화답송)께 의지해, 힘껏 나아갑니다. 

기도하지 않고 요구하는 나는 아닌지   

-김찬선신부-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오늘 주님 당시의 사람들은 표징을 요구하는 것 때문에
악하다는 단죄를 주님으로부터 받습니다.
이에 우리는 표징을 요구하는 것이 왜 악하다고 하시는지 의아해합니다.

왜냐면 우리도 자주 표징을 바라기 때문이고,
그러나 악하기 때문에 표징을 요구하는 것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많은 우리는 악하기 때문에 표징을 요구하지 않고
약하고 가난하기 때문에 그리고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에 표징을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약하고 가난한 사람과 너무도 고통스러운 사람은 표징을 감히 요구하지는
못하고 하느님께서 표징을 보여시기를 바라고 청하는데
그것을 악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왜'라는 말을 같이 쓰지만 그러니까 '왜 그랬냐?'고 똑같이 말하지만
따지는 뜻에서 '왜'를 쓸 수 있고,
상대방의 뜻을 알고 싶고 이해하고 싶어서 '왜'를 쓸 수도 있듯이
표징도 무도하게 요구할 수도 있지만 겸손하게 청할 수도 있지요.

며칠전에도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는 한 자매님이 그 병고가 좀 나아지기를
바라며 하느님께 기도했음에도 그 병고가 계속되자 하느님께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고, 하느님이 자기를 사랑하시는지 의심도 가는 것 때문에
죄송스럽기도 하지만, 그러면서도 하느님께서 정말 나를 사랑하시는지
알고 싶기도 하고, 아무튼 마음이 참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상태였기에
그 마음을 저에게 하소연해오셨습니다.

이런 분은 나의 병이 치유되는 그런 기적이나 표징이 주어지기를 감히
바라지는 않을지라도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의 고통에 주님도
함께 해 주신다는 그런 표징만은 하느님께서 보여주시기를 바랄 겁니다.

그런데 앞서 봤듯이 표징을 이렇게 바라는 것은 악하다고 할 수 없고,
그리고 이런 분들이 표징을 바라는 것은 요구가 아니라 기도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기도해야 할 것을 요구하는 사람도 있지요.

그래서 오늘 우리는 성찰하게 되고 반성도 하게 됩니다.
나는 지금 기도해야할 것을
오늘 복음의 악한 사람들처럼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10월 15일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이 세대가 기적을 구하지만 요나의 기적밖에는 따로 보여줄 것이 없다. 니느웨 사람들에게 요나의 사건이 기적이 된 것처럼 이 세대 사람들에게 사람의 아들도 기적의 표가 될 것이다. (루가 11,2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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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요구하는 세대를 악한 세대라고 말씀하십니다. 표징이 하나도 없었지만 남방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배우려 그 멀리서 솔로몬을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이 말은 표징이 없어서 못 믿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배울 마음이 없어서 안 믿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이들에게 설사 표징이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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