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7월 4일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Margaret K 2020. 7. 3. 07:24

2020년 7월 4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낡은 가죽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는 사람도 없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서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둘 다 보존된다.” 
(마태오 9,14-17)


 People do not put new wine into old wineskins.
Otherwise the skins burst, the wine spills out, 
and the skins are ruined.
Rather, they pour new wine into fresh wineskins, 
and both are preser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허규신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요한의 제자들은 질문합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다른 이들에게서도 비슷한 질문을 받으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마태 9,11) 하고 질문하였고, 그 이전에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시는 것을 보고 ‘하느님을 모독한다.’라고 비난한 바 있습니다(마태 9,3 참조).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이런저런 일들에 한마디씩 거드는 것을 보니 당시에 예수님께서는 인기가 많으셨던 것 같습니다.

왜 단식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답하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느냐?” 이 말씀대로라면 지금 제자들은 잔치를 벌이고 있는 중입니다. 지금은 슬퍼할 때가 아니라 기뻐할 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코헬렛의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기뻐 뛸 때가 있다.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간직할 때가 있고 던져 버릴 때가 있다”(코헬 3,1.2.4.6). 

우리 삶에도 이런저런 때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에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대림과 성탄, 사순과 부활, 그리고 연중 시기를 살아갑니다. “때”를 사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는 마지막 때를 향하여 갑니다. “모든 인간이 자기의 온갖 노고로 먹고 마시며 행복을 누리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선물이다”(코헬 3,13).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언젠가 책에서 화폐의 진짜 가짜를 구별하는 ‘위폐 감별사’의 인터뷰 내용을 볼 수 있었습니다. 기자는 감별을 잘하는 방법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졌고, 감별사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진짜를 잘 알아야 해요.”

진짜와 완전히 똑같은 가짜도 있지 않으냐고 다시 기자가 묻자, “위폐는 진짜로 보이기 위해 꾸미다 보니 부자연스러워요. 하지만 진짜 지폐는 자연스럽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큰 공감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삶을 떠올려 봅니다. 진짜의 삶을 사는 것일까요? 가짜의 삶을 살면서 진짜처럼 꾸미고 사는 것은 아닐까요? 

진짜의 삶을 살려면, 나를 만드시고 이 땅에 보내신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사랑 자체이며 완벽한 선이신 주님을 잘 알고, 그 뜻을 따라야 진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을 알기보다는 다른 것을 더 알려고 노력합니다. 화려하지만 부자연스럽게 보이는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만 알려고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 결과 주님을 잘 모르게 되고, 주님의 뜻 역시 제대로 따를 수 없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단식 논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단식한다고 거창한 말로 떠들어 대거나 창백한 얼굴로 뽐내며 지나치게 소문내고, 거룩한 분의 눈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 들기 위해 단식한다면, 그것은 장차 올 나라의 기쁨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올바른 덕행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보이기 위한 삶이 아닌 주님께 보이는 삶이야말로 진짜 삶이 됩니다. 그래서 새롭게 다가오신 주님과 그분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라고 명령하십니다. 

헌 옷과 헌 가죽 부대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상징하고, 새 천 조각과 새 포도주는 복음을 상징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 체제 전부를 부정하지 않고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옛 율법이라는 천은 유대인의 열성으로 낡아 버렸고, 여러 사상 학파에 의해 찢어졌으며, 불순한 행위들 때문에 해졌습니다. 그러나 복음이라는 천은 찢어진 것이 아니라 지금 짜이기 시작했습니다. 

새 천 조각과 새 포도주로 상징하는 주님의 말씀인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을 더 알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진짜를 알아야 가짜를 구별할 수 있는 것처럼, 진짜이신 주님을 알아야 가짜인 세상의 헛된 것을 구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얼굴은 각양각색이다. 하지만 마음은 훨씬 더하다(볼테르).

 


안전이 중요할까? 성장이 중요할까?


아직 초등학교에도 들어가지 않은 6살짜리 아이가 엄마에게 밖에 나가서 친구들과 놀겠다고 말합니다. 이 엄마는 허락해줄까요? 허락해주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 ‘안전’ 때문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아이 때에는 감시받지 않는 자유 놀이를 즐기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다락방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 자체가 이렇게 원하고 있으며, 실제 이 자유 놀이를 통해서만 뇌 속의 뉴런 발달과 관계된 복잡한 회로 연결이 온전히 마무리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안전’이라는 이유로 자유 놀이를 하지 못하면 뉴런 발달이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신체적 능력 및 사회성이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저 역시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는 동네에서 실컷 놀았던 기억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지금 부모 없이 놀고 있다면 부모가 방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자유 놀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그냥 가둬두고 키워서는 절대로 안 되는데 말이지요. 

 

나쁜 놈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전삼용신부-

 

  ‘나쁜 놈’은 ‘나뿐인 놈’의 줄임말이라고 합니다. 나쁜 사람은 왜 생겨나는 것일까요? 나쁜 사람은 누구도 그 사람을 자신을 위해 살 수 있을 만큼 사랑해주지 않아서 생깁니다. 누군가를 위해 살 대상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자신만을 위해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마약에 중독되어 3번 죽을 뻔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의 어머니만은 그를 믿어주었습니다. 못된 친구들과 어울릴 때도 어머니는 믿어주었습니다. 술과 마약을 하고 새벽에 들어올 때도 어머니는 깨어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대화 좀 하자고 할 때 마크는 짜증을 내고 방문을 꽝 닫고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세상에서 자신을 유일하게 믿어준 어머니가 원하는 것은 자신과 대화 한 번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어머니가 믿어준 대로 나쁜 친구들을 끊고 술과 마약을 끊었습니다. 그리고 미국 최고의 프로레슬러가 되었습니다. 이제 어머니를 편하게 모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일본에서 경기를 마치고 새벽에 급한 전화를 받았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는 비가 내리는 거리를 뛰어나가 울면서 소리 질렀습니다.

“어머니, 죄송해요!”

돌아가신 어머니 모습은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그는 울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일어나요. 엄마가 저의 영웅이에요. 저의 모든 것, 제가 되길 원하는 모든 것은 다 엄마를 위해서였어요. 저를 믿어준 건 오직 엄마뿐이었어요.”

      그리고 청년들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결국 진짜 세상에 혼자 남겨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지금은 청년들을 위해 전 세계 강연을 하러 다니는 전직 레슬러 ‘마크 메로’(marc mero)의 이야기입니다.

      어린이들을 생각해봅시다. 어린이들은 누구를 위해 살까요? 보통은 부모를 위해 삽니다. 부모를 실망하게 해 드리지 않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따라서 부모가 나쁜 사람이 아닌 이상 부모 덕택으로 아이들은 어느 정도 나쁜 삶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사랑을 제대로 주지 않을 때는 아이들은 부모에게 원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친구를 위해 살거나 그것도 안 되면 자신만을 위해 살게 됩니다. 그렇게 어렸을 때부터 나쁜 아이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아이들을 잡아줄 수 있는 나이는 밥을 차려줄 때까지만 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도움을 받아야 할 때 부모를 위해 살아야 할 이유가 줄어듭니다. 이때 자신을 잡아줄 새로운 부모님, 즉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면 자동으로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게 됩니다. 그러면 나쁜 놈이 되는 것입니다. 이웃을 위해 살아도 대부분 그 이웃들에게 이용당하고 상처받습니다.

 

      우리는 어른이 되어서도 하느님으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영원한 아기들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힘들 때 의지할 신을 찾습니다. 찾아서 그 신을 위해 살면 다행이지만 찾지 못하면 나쁜 사람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왜 당신의 제자들은 단식하지 않느냐고 따집니다. 단식은 좋은 것입니다. 자기를 절제하면 덜 나쁜 사람이 될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나 단식하면서도 그 단식이 자기 자신을 위할 때는 그 사람이 나쁜 놈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단식을 하더라도 당신을 위해 하라고 하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같은 단식이라도 자신을 존재하게 해 준 하느님을 위해 한다면 그것이 좋은 것이나, 그 단식만의 가치 때문에 한다면 결국 그것도 자기 영광을 위해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새 포도주이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비록 구약에 있었던 가르침과 다르지 않으나 새로운 가르침인 이유는 그 모든 율법을 당신을 위해 지키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나쁜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고백하고 하느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절로 나쁜 놈이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특정한 날을 중시하는 사람도 주님을 위하여 중시하는 것이고, 아무것이나 먹는 사람도 하느님을 위하여 먹는 것입니다. 사실 그는 먹으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가려 먹는 사람도 주님을 위하여 가려 먹으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가운데에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자신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바로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로마 14,6-9)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합니다. 자크 라캉이란 학자가 한 말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인간은 누군가를 ‘위해’ 살게 창조되었습니다. 성자께서 성부를 위해 사신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인간도 누군가를 위해 살아야만 합니다.

      주님께서 당신을 위해 살라고 하시는 이유는 당신이 영광을 독차지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가 나쁜 놈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자신만을 위해 살 때 나쁜 놈이 됩니다. 이는 부모가 아이들이 비뚤어지지 않게 하려고 아이들이 자신에게 순종하게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나쁜 놈이 되지 않는 유일한 길은 우리 하는 모든 일이 주님께 영광이 되려는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살아야 나쁜 놈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산보 가는 길에 젊은이들을 보았습니다. 손에는 팻말을 들고 있었습니다. 평화적인 시위였고, 경찰들도 젊은이들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차량통행이 원할 할 수 있도록 질서를 유지하였습니다. 인종차별이 없는 사회, 인권이 보호되는 사회, 정의가 실현되는 사회를 이야기하였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소나기가 내렸습니다. 급한 대로 처마 밑으로 몸을 피했습니다. 비는 한동안 내렸지만 우산보다 훨씬 큰 처마는 비를 피하기에는 충분했습니다.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면서 37년 전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보좌 신부님과 주일학교 교사들과 신학생이었던 저는 안면도로 하계 수련회를 갔었습니다. 새벽에 일출을 보고 싶어서 바닷가로 나갔습니다. 마음이 통한 주일학교 교사와 함께 갔습니다. 일출을 보고 오늘 길에 소나기를 만났습니다. 처마 밑에 잠시 비가 멈추길 기다리며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담배를 피울 때라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담배를 피웠습니다. 혼자서 소나기를 피하는 것은 지루했지만 마음이 통하는 사람과 바다를 바라보며 소나기를 피하는 것은 낭만이었습니다.

 

2014 4 16일 제주도로 가는 배가 침몰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학생들이 꽃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가족들의 아픔은 헤아릴 길이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학생들의 죽음을 함께 아파했습니다. 그해에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광화문에서 유가족의 손을 잡아 주었습니다. 십자가를 들고 전국을 돌던 유가족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세례명은 프란치스코였습니다. 교황님은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고통 중에 있는 세월호의 유가족들을 위로하였습니다.

 

많은 시민들이 광화문에서 세월호 유족들의 아픔을 함께 하였습니다. 매일 미사가 있었고, 진실이 밝혀지기를 바라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거짓이 진실을 이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힘들었지만 유족들은 함께하는 이웃들이 있어서 고통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2020 5 25일 조지 플로이드라는 흑인이 경찰에 의한 폭력으로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단순한 사고로 묻힐 수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함께하였고, 더 이상 인종 차별이 없는 사회가 될 수 있도록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고, 거짓이 진실을 가릴 수 없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으라고 하십니다. 어떤 의미일까요? 오늘 독서에서 아모스 예언자는 그 의미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벌어진 곳은 메우고, 허물어진 곳은 일으켜서 옛날처럼 다시 세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정의가 그분 앞을 걸어가고, 그분이 그 길로 나가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억울한 이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와 새 부대는 새 하늘과 새 땅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온통 사랑 덩어리입니다. 믿음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아름다움 덩어리입니다. 희망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축복 덩어리입니다. 아기는 엄마의 품속에서 편안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10개월이 되면 그 편한 곳에서 세상으로 나와야 합니다. 계속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죽을 것 같은 고통을 겪으면서 아이는 세상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탯줄을 끊어야만 스스로 숨을 쉬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기는 죽음을 체험하지만 우리는 그 순간 탄생을 축하합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에로 들어간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볼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단식논쟁을 통해서, 새로운 때가 도래했음을 선포하십니다.  신랑이 와 있는 때가 도래한 것입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마태 9,15)

 

이는 단식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지금은 단식할 때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새 시대가 왔기 때문입니다. 곧 새로운 시대의 단식은 달라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구약의 단식과 신약의 단식은 그 의미가 다르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실, 바리사이들과 요한의 제자들은 <레위기> 16 29-31절에 따라, 구약의 속죄일을 지키기 위해 단식을 했습니다. 곧 잘못을 벗고 정결해지기 위해 1년에 한 번씩 단식했습니다. 그리고 열심한 바리사이들은 월요일과 목요일, 1주일에 두 번씩 단식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단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물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단식을 거부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은 그 가 아님을 말씀하시면서 그 이유를 세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이미 보았듯이 아무도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아무도 헌 옷을 생배조각으로 깁지 않는다는 것이며, <셋째>는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부대에 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신랑이라고 부르십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을 신랑이라고 부른 적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신부를 얻는 이는 신랑입니다.

신랑의 벗이 곁에 있다가 신랑의 목소리를 들으면 그게 기뻐합니다.”(요한 3,29)

 

오늘, 신랑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태 9,16-17)

 

이처럼,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낡은 옷에다가 깁을 수 없는 새 천이며, 낡은 가죽 부대에 담을 수 없는 새 포도주에 비유하십니다. 이는 당신과 함께 새 시대가 도래 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이제는 단식의 의미도 달라진 것입니다. 새로운 단식, 곧 구약의 속죄와 정결을 위한 단식이 아니라, 신랑이 떠나간 후에 있게 될 단식입니다.

이 말은 단식이 주님의 수난과 죽음과 연결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이제부터 단식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것을 기억하며, 그 사랑에 감사드리며,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는 단식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새 포도주를 담을 새 부대가 필요합니다. 새 부대는 변화된 삶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새 포도주를 담을 변화된 삶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새로운 삶 안에 우리의 새로운 생명과 사랑을 채우는 일이 될 것입니다.

 

주님! 제 마음이 새 포도주를 담을 새 부대가 되게 하소서!

제 삶이 포도주잔이 되게 하소서

술잔 가득 당신의 사랑을 건네게 하소서

당신 사랑에 젖고 당신 향기 품게 하소서.

사랑의 웃음소리, 지저귀는 새소리로 번지게 하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태 9,17)

 

 

주님!

제 마음이 당신의 부대이오니, 사랑의 술을 부으소서!

제 삶이 당신 사랑의 잔이오니, 술잔 가득 사랑을 채우소서.

취해, 기뻐 흥겨우리이다. 온통 젖어, 향기 품으오리이다.

만나는 이마다 축복과 기쁨, 생명과 진리 그득 담아 건네오리이다.

오늘, 저의 삶이 화들짝 달구어지게 하소서. 아멘.

 

-조욱현신부-

 

복음마태 9,14-17: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유다인들에게 자선과 기도와 단식은 그들의 신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스승의 영향을 받아 자주 단식을 하였다이와는 달리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별로 단식을 하지 않았다그래서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14하고 물었다예수께서는 그들이 잘 알고 있는 결혼식을 예로 들어 설명하신다.

 

그들의 결혼은 우리가 행하고 있는 것과 달라서그들은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니고집에 있으면서 일주일 동안 가까운 친지들을 불러 기쁨의 축제를 지냈다이때에는 모든 율법의 의무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즐길 수 있었다그러므로 그때에는 단식의 의무에서도 해방된다는 것이다예수께서는 당신을 신랑에제자들은 신랑의 친한 친구들로 비유하신 것이다그러한 잔치에서 슬퍼하며 단식할 수 없다그 때는 단식할 때가 아니고 즐기는 때이다.

 

지금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스승을 빼앗기고 슬퍼하는 것처럼예수의 제자들도 신랑을 빼앗기고 난 후 단식을 하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죽으시고 영광을 입으시고 하느님의 영광 안에 들어가시고 나서 제자들은 단식하기 시작하였다초기 교회의 신자들은 수요일과 금요일에 단식하였다고 한다.

 

우리는 여기서 이것을 생각할 수 있다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기쁨이요 잔치라는 것이다주님과 함께 있는데 슬픔과 어두움이 있을 수 없겠지만만일에 그렇다면 신앙에 문제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그래서 주님을 모시고 항상 기쁘게 사는 것이 중요하며내 잘못으로 주님을 모시지 못했을 때는 우리는 기도하고 단식하며 자선을 베풂으로써주님을 다시 모셔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이러한 가르침은 율법에 매인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가르침이다그 가르침을 들을 때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그 말씀 때문에 걸려 넘어지고 만다그래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지기 때문이다또한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16-17).

 

수축이 강한 새 천을 찢어서 헌 옷을 깁는 사람도 없지만새 포도주도 발효가 심하므로 수축작용이 거의 없는 가죽 부대는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으려면지금까지의 고정화된 나 자신의 틀이라고 하는 헌 옷이나낡은 가죽 부대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내 마음의 자세가 근본적으로 새롭게 변화되어야 함을 의미한다새로운 근본적인 변화를 위해 노력하자.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새로움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습니다.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마태 9,14)

단식은 하느님과 더 가까워지기 위한 수행 방법 중 하나입니다. 몸과 마음을 비워 하느님으로 채우고, 비운 바를 가난한 이웃에게 나눌 수 있으니까요. 구약시대의 종교적 규범을 충실히 이행해온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단식은 절대적 가치입니다. 그들 눈에는 예수님과 몰려 다니면서 군중 틈에서 기회가 닿는 대로 먹고 마시는 제자들 무리가 상당히 이상하게 보였던 것 같습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마태 9,15)

예수님은 지금이 혼인 잔치가 베풀어지는 때이고 제자들은 신랑과 함께 있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이 무슨 의미일지 단식에 대해 묻던 이들이 과연 알아들었을까요?

새로움은 다양한 반응을 불러일으킵니다. 기존 질서의 혜택을 누리는 이들에게는 새로움이 의심과 불편함을 가져올 것이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새로움이 가져다 줄 기회와 변화를 꿈꾸고 기대하겠지요.

혼인 잔치는 새로움이 시작되는 곳입니다. 남녀가 각자 살아온 가족과 문화와 경험을 뒤로 하고 새로운 존재와 더불어 새 가정을 꾸리는 새 출발의 장이지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안의 요소가 없을 수 없지만 이를 극복하게 하는 건 두 주인공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세상은 혼인 잔치의 도가니로 변모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신부인 이스라엘 백성의 신랑이시듯, 예수님께서 교회의 신랑으로 현존하십니다. 옛 관습과 관념들은 혼인 잔치의 뜨거운 열기 속으로 녹아들어 새로운 영감으로 탈바꿈될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태 9,17).

혼인 잔치에서 새 포도주가 흘러나옵니다. 새 것은 옛 것과 맛도 향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이 더 좋은지는 각자의 믃입니다. 다만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으면 이미 낡고 삵은 가죽 부대가 터져 버려 못 쓰게 되고 새 포도주도 바닥에 쏟아지게 되지요.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마태 9,17).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둘 다 보존되는 것입니다. 옛 포도주를 부인하지 않으시고, 또 헌 가죽 부대가 상해서 못쓰게 되는 것도 바라지 않으십니다. 옛 포도주에 취한 사람에게 새 포도주를 마시라고 구슬리거나 강요하지도 않으시지요. 그저 새로움에는 새 그릇이 필요다고 하실 뿐입니다.

사실 새 포도주를 견제하고 불편해 하는 건 오히려 옛 포도주를 즐기는 이들이지요. 그들에겐 이미 누리던 것이 충분하거나, 그 외의 것을 숙고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새 것에는 안전지대를 벗어나는 위험이 따르기에 과감한 결단과 용기, 모험의식이 필요합니다.

제1독서에서 아모스는 주님께서 회복시켜 주실 새 시대를 예언합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 산에서 새 포도주가 흘러내리고 모든 언덕에서 새 포도주가 흘러넘치리라. 나는 내 백성 이스라엘의 운명을 되돌리리니"(아모 13-14).

주님께서 이방 민족에게 짓밟혀 피폐해진 백성에게 새로운 치유와 회복, 풍요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징벌을 불러들인 백성의 죄를 잊어 주시고 그들을 조건 없이 다시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새로이 적셔줄 새 포도주는 "성령"이고 "예수님의 피"이며 "새 계약"을 상징합니다. 이렇듯 성자 예수님과 누리는 인류의 혼인 잔치는 하느님의 섭리 안에 이미 예견되었던 것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어린양과의 천상 혼인 잔치를 향해 가는 이들입니다. 거기서야말로 단식은 영영 불필요하겠지요. 그때 우리는 완전히 비워져 영원한 신랑이신 주님으로 충만히 차 있을 테니 그 완전한 행복 속에 단식이 끼어들 틈은 없을 겁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사랑 넘치는 혼인 잔치와 신랑을 잃은 슬픔의 계곡을 구비구비 지나는 순례길을 걸을 것입니다. 무엇이 오더라도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새로움에 마음을 활짝 열고 따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미 예수님과의 사랑에 빠져 새 포도주에 맛들인 우리에게 두려움따윈 없을 테니까요.

 

음식이 아니라 욕망을 끊는 단식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단식에 대해 질문을 합니다.
아니, 왜 단식을 하지 않는지 따집니다.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오늘 반대의 질문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단식은 왜 해야 하지요?'

사실 10여 년 전부터 거의 단식을 하지 못하는 저로서
단식을 왜 해야 하는지 얘기하는 것이 공염불 같아 얘기할 자격이 없지만
잘못하는 단식이라도 해야 한다면 이렇게 해야 한다는 뜻에서 얘기합니다.

지난주 저는 클라라 수녀님들을 방문하고 특강을 했는데
주제가 클라라 성녀의 단식 영성이었습니다. 

클라라 성녀의 단식은 살인적이어서 프란치스코나 주교님이 말릴
정도였는데 주일과 성탄일에만 두 끼를 먹었기에 그것이 1년에 53일이었고,
월, 수, 금요일에는 완전한 단식을 했으니 1년에 156일은 완전단식이었으며,
화, 목, 토요일에는 한 끼만 먹었으니 1년에 156일은 한 끼 단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살인적인 단식을 했을까요?
그것은 단지 음식을 끊음이 아니라 욕구를 끊음이요.
그럼으로써 욕구가 욕망이나 욕심으로 발전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끊으려는 것이요 만족과 불만을 둘 다 초월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만족을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당연한 것이 인생의 목적이 행복이기 때문이고,
행복이란 한 마디로 만족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족이란 또 무엇입니까?
그것은 불만이 욕구 불만이듯 욕구의 만족이지요.
그러니까 만족의 문제는 욕구의 문제인 것이지요.

우리 인간의 욕구 중의 하나가 식욕이고 많은 욕구 중에서 가장 강한
욕구가 성욕과 식욕이라고 할 수 있지만, 성적인 욕구는 강하긴 해도
나이를 먹으면 쇠퇴하거나 사람에 따라 아예 없을 수도 있는 데 비해
식욕은 생존과 직결되어 있기에 거식증 환자가 아닌 한 절대적이지요.

그러므로 단식을 한다는 것은 우리 인간의 가장 강하고 중요한 욕구를
통해서 우리 인간의 전체 욕구를 다스리기 위한 것이고,
이 세상 욕망과 만족을 초월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초월이란 어떤 것입니까?
초월이란 무엇을 뛰어넘어 높은 어디에 도달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단식은 이 세상 욕망과 만족을 초월하여 어디에 도달코자 하는 걸까요?

행복이라면 진복팔단의 행복이요,
만족이라면 천상 만족이며,
그러기 위해서 욕망을 갈망과 열망으로 바꾸는 것이지요.

욕망은 불사르고 나면 재만 남지만
욕망을 갈망과 열망으로 바꾸면 그것들은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사랑으로 바뀌지요.

그러니까 단식은 욕망을 사랑으로 바뀌게 하는 것이고,
이것을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는 신랑을 위한 단식이라고 하시는데
오늘 주님께선 이어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도 하십니다.
당신이 오셨기에 단식도 이제는 개념이 바뀌어야 한다는 뜻이지요.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음식이 아니라 욕망을 끊는 단식,
욕망이 사랑으로 발전하는 단식을 지향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7월 7일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