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1일 연중 제13주간 수요일
하느님의 아들이여,
어찌하여 우리를 간섭하시려는 것입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마귀들을 괴롭히려고 여기 오셨습니까?
(마태 8,28-34 )
“What have you to do with us, Son of God?
Have you come here to torment us
before the appointed tim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허규신부-
복음서가 전하는 치유에 관한 이야기는 보통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이루실 구원 업적에 대한 예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치유하시는 기적을 통하여 현실의 삶에서 고통당하는 이들을 해방하실 것을 미리 보여 주십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로마 8,22). 결국 병자의 치유는 우리를 해방시키신 예수님의 구원 업적을 기억하게 합니다.
다른 하나는 치유 이야기 안에서 드러나는 예수님의 신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상황에서 고칠 수 없었던 병자들을 치유하십니다. 그것이 육체적인 것이든 아니면 오늘 복음에서처럼 악령이나 마귀에 의한 것이든, 손쓸 수 없는 이들의 병을 고쳐 주십니다. 이것으로도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능가하는 힘과 능력을 지니신 분으로 드러나지만, 오늘 복음은 아주 뚜렷하게 마귀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밝혀 줍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마귀의 외침은 마치 훌륭한 신앙 고백처럼 들립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몰랐지만 이미 마귀는 알고 있습니다. 이런 고백에도 고을의 주민들은 두려움에 차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은 마치 마귀의 고백을 통하여 그분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고백하고 받아들이도록 우리를 초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뇌혈관 질환으로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를 잃은 한 형제님이 있었습니다. 이제 이 형제님 역시 돌아가신 부모님 나이가 되면서 걱정과 두려움이 생긴 것입니다. ‘나도 뇌혈관 질환으로 갑자기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닐까?’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두려움과 걱정이 생기면서 형제님의 관심사는 어디에 있게 되었을까요? 뇌혈관 질환을 예방할 수 있는 건강식품과 생활 습관에 관심이 쏠렸고 실제로 이것에 온 정성을 쏟았습니다.
한두 개의 두려움쯤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두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런데 몸에 대한 두려움에 대한 노력은 멈추지 않으면서도, 정작 영혼이 파괴되는 두려움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우리입니다. 그래서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죄짓는 것도 서슴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죄를 통해 내 영혼이 조금씩 파괴되고 있는데 말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께서는 죄를 선의 결핍이라고 정의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할 수 없는 상태, 그래서 영혼이 파괴되는 것입니다. 이 영혼이 건강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느님과 함께 하는 것, 즉 하느님 뜻에 맞춰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마귀 들린 사람 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있는 곳은 사람이 살지 않는 무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과 떨어져서 하느님 뜻에 맞지 않게 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 앞에 서시자,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말합니다. 마귀는 하느님과 상관없이 살려고 합니다. 사람은 하느님과 상관있게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돼지 떼 속으로나 들여보내 주시라고 청하고 실제로 그렇게 허락하셨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나요? 돼지 떼는 모두 죽고 말았고, 고을 사람들이 자기 고장에서 떠나가 주십사고 청하지요. 하느님을 거부하게끔 했습니다.
마귀는 정말로 대단합니다. 모든 것을 포기한 것 같지만, 끝까지 하느님과 인간이 함께 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리라.”(아모 5,24)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마귀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우리 때문에 이런 정의가 펼쳐지기가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오늘 제1독서의 아모스 예언자의 말을 기억하고 매 순간 우리의 삶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악이 아니라 선을 찾고, 사랑해야 한다.”(아모 5,14)
현명하지 못한 사람은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무엇이든 헐뜯는다(프아수아 드 라 로슈푸코).
생의 마지막 순간에…….
생의 마지막 순간, 즉 어떤 죽음을 맞이하고 싶습니까? 사랑하는 가족들의 기도 소리를 들으며? 아니면 아름다운 찬양의 성가 소리를 들으면서? 아무튼, 이렇게 기도로 가득한 곳에서 편안히 이 세상을 떠났으면 하는 것이 거의 모든 신앙인의 바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 역시 이런 죽음을 꿈꿔보면서 미소를 지어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묵상하다가 또 커다란 욕심을 갖게 되었음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죽음 옆에서는 기도와 찬양이 없었습니다. 대신 온갖 모욕과 비난의 소리뿐이었고, 사랑하는 가족과 제자들은 모두 도망치고 대신 자신을 반대하며 적대심을 표시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죽음이었습니다.
저는 죽은 순간까지도 제 욕심만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주님과 똑같은 삶을 살고 싶다고 기도하지만, 행동과 마음은 주님의 삶과는 정반대가 되기를 원하는 저였습니다.

좋은 것을 하는 것보다, 나쁜 것을 하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
-전삼용신부-
얼마 전에 청년들이 찾아와서 식사하며 연애에 관한 주제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다 한 청년이 자신이 소개팅을 시켜주면 성사될 확률이 높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비법을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확실히 다른 것이 있었습니다. 보통은 소개팅을 시켜줄 때, “어떤 스타일의 사람을 좋아하느냐?”, “연봉은 얼마나 되면 좋겠냐?” 등을 물어봅니다. 그러나 그 청년은 “이것만 아니면 된다.”라는 것 하나만 말해달라고 한답니다.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정보만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나는 키 작은 것은 용납 못 해.”라고 한다면, 대상 중에 키 작은 사람은 제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단 만났을 때 비호감은 아니니까 말이 통하고 말을 하다 보면 정이 든다는 것입니다. 반면 그 사람이 좋아하는 면을 갖춘 사람을 소개해주면 그 사람 안에서 싫은 면도 발견하게 되어 처음엔 좋았다가 금방 싫어져 헤어지게 된다고 했습니다.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의 어떤 면이 특별히 좋아서 만나기보다는 자신이 싫어하는 면이 특별히 없어서 만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별히 젊은 남자들은 예쁜 여자면 다 좋아하는데, 그래서 결혼하고 후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격은 영 자신과 맞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제야 자신이 무엇을 싫어하는지 알아도 때는 늦습니다. 그러니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느냐보다 자신이 무엇을 싫어하느냐를 알아서 그것을 쳐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워런 버핏도 마찬가지입니다. 하고 싶은 것 25개를 적어서 5개만 남기고 나머지는 신경 쓰지 않는 방법을 씁니다. 주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을 벌 수 있는 주식을 찾는 것이 아니라 손해를 끼칠 수 있는 주식들은 쳐내고 마지막 남는 것을 선택하여 투자합니다. 그의 투자방식은 돈을 많이 버는 데 있지 않고 손해를 보지 않는 데 있습니다. 좋은 것을 하는 것보다 싫은 것을 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하는 것보다, 내가 싫은 사람을 선택하는 실수를 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좋아하는 것을 아는 것보다 싫어하는 것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장점을 키우려고 노력하시기보다는 우리 단점을 제거하시려는 데 더 노력을 기울이십니다. 과일나무가 있다면 굵고 튼튼한 가지를 더 튼튼하게 자라도록 신경 쓰는 게 중요할까요, 아니면 쓸데없이 에너지만 축내며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들을 쳐내는 것이 더 중요할까요? 쓸데없는 것들을 쳐내다 보면 자동으로 좋은 가지는 더 좋아집니다. 좋은 것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나쁜 것을 쳐내는 노력이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쳐내고 싶은 나쁜 가지들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바로 우상 숭배자가 되게 만드는 자아의 가지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가다라인들의 가장 문제는 재물에 대한 욕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귀 떼를 그들이 키우는 돼지 속으로 들어가게 만들어 그것들을 물속에 바쳐 죽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것 하나가 있다면 바로 재물에 대한 욕심입니다. 그것이 우상이 되어버려 당신을 그 우상을 섬기는 데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섬기며 하느님을 자신들 종으로 만들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주님은 우상숭배를 가장 싫어하십니다. 그리고 가장 큰 우상은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는 세속, 육신, 마귀의 욕구가 우리를 우상 숭배자가 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내 안의 이 가지치기하러 오시는 예수님이 싫다면 가다라인들처럼 예수님께 떠나 달라고 청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가지들을 제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십일조를 바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의 주인은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주님께 바쳐야 했던 선악과와 같습니다. 결국, 그것을 바치게 하지 못하는 장본인은 우리 안에 있는 뱀입니다. 자아입니다. 세속, 육신, 마귀의 욕구입니다. 예수님은 그것들을 하나하나 쳐내기 위해 오시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들의 배를 채우기를 바란다면 그것들을 쳐내려 오시는 예수님을 거부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세속, 육신, 마귀의 욕구 가지치기만 할 수 있어도 내 안의 성인의 본성은 저절로 더 완전해집니다.
내가 진정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면 하지 말아야 하는 것부터 가지 쳐 나가십시오. 내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알 수 없거든 하기 싫은 것부터 가지 쳐 나가십시오. 문제는 에너지입니다. 그 에너지가 좋은 곳에 집중되려면 그것을 허비시키게 만드는 것들부터 가지치기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조재형신부-
서울대교구 교구장께서 코로나19 이후 교회에 대해서 언급하였습니다. 부활절을 지내면서 쪽방촌으로 도시락을 배달하였다고 합니다. 쪽방촌의 열악한 현실을 보았고, 같은 쪽방촌에서도 더 가난한 사람이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한 희생자 중에는 가난한 이들이 더 많았다고 합니다. 직업이 없는 사람, 보험이 없는 사람, 집이 없는 사람은 코로나19에 노출될 확률이 더 많고, 치료받을 수 있는 기회는 더 적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 이후의 세상은 빈부의 격차가 더 심해질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에게 우선적인 관심을 보여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이 시대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조지 플루이드에 대한 추모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의 죽음이 인종차별에 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리에 나와서 외치는 사람의 주장은 ‘정의 없는 자유는 없다.’였습니다. 연예인과 운동선수들도 플루이드의 죽음을 함께 애도하였습니다. 교황님께서도 인종차별은 사라져야 한다고 이야기하셨습니다. 피부색이 다를지라도, 난민일지라도, 이민자일지라도, 어린아이라도, 여성이라도, 노인이라도 사람은 모두 존중받아야 합니다. 사람은 모두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편의성이라는 이유로, 학연과 지연이란 이유로 경제적인 이익을 챙기는 수단으로 정의와 부정이 함께 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부적절한 동거는 늘 파열음이 생기고 정의와 부정이 나눠질 때 비로소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예전에 우리는 ‘사바사바’라는 말이 많았고, 밀가루 선거란 말도 있었고, 촌지문화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이런 불편한 동거가 행해지곤 합니다. 오늘 아모스 예언자는 바로 이런 점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손에 박힌 가시는 뽑아야 하듯이, 부정과 불의는 진실과 정의와는 함께 할 수 없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진실이, 정의와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게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귀 들린 사람에게서 마귀를 쫓아내셨습니다. 무엇이 마귀입니까? ‘편견과 이기심입니다. 욕망과 탐욕입니다. 시기와 질투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귀 들린 사람을 고쳐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께 마을을 떠나달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들 역시 ‘편견, 이기심, 욕망, 탐욕, 시기, 질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악의 세력은 진실과 정의 그리고 진리와 평화와 함께 공존할 수 없습니다. 신앙은 바로 이런 공존의 그늘을 밝히는 것입니다. 신앙은 그렇기에 때로 힘들고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공정과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가운데 드리는 예배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양승국신부-
여러분들 혹시 미사 참례 중에 주님으로부터 이런 말씀을 들으면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나는 여러분들이 봉헌하는 성찬례를 원치 않고 배척합니다. 여러분들의 그 거룩한 척 바치는 미사를 반길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바치는 그 가증스런 예물은 거들떠 보지도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부르는 성가를 내 귀를 거슬르게 하니 집어치우는게 좋습니다. 도저히 더 이상 못 들어주겠습니다.”
미사 봉헌하시는 신부님들이나 참석한 신자들이 이런 말씀을 들었다면 엄청난 충격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럴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정성이나 마음이 사라진 미사, 가난한 이웃들과 구체적으로 연대하지 못하며 드리는 미사, 갖은 잡념과 미성숙한 신심으로 봉헌하는 미사를 하느님께서 기꺼이 받아주실리 만무합니다.
아모스 예언자가 활동하던 시기 이스라엘 백성들의 축제와 예배가 딱 그랬습니다. 예언자의 지적은 신랄하고 날카롭습니다.
“나는 너희의 축제들을 싫어한다. 배척한다. 너희의 그 거룩한 집회를 반길 수 없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과 곡식 제물을 바친다 해여도 받지 않고, 살진 짐승들을 바치는 너희의 그 친교 제물도 거들떠보지 않으리라. 너희의 시끄러운 노래를 내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희의 수금 소리도 나는 듣지 못하겠다.”(아모스 예언서 5장 21~23절)
기원전 8세기경 활동한 아모스는 남왕국 유다 트코아 출신 예언자이지만 특이하게도 북왕국 이스라엘에 와서 예언직을 수행했습니다. 아모스 예언자가 활동하던 당시 이스라엘의 임금은 여러보암 2세였습니다. 신명기계 역사가들의 평가에 따르면 여러보암 2세 역시 다른 많은 임금들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죄에 물들게 한 임금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여로보암 2세가 요르단 건너편 이스라엘 북쪽과 남쪽 국경을 되찾았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하느님께서 그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하셨음도 인정합니다. 여로보암 2세 시대 이스라엘은 대내외적으로 최고의 번영과 평화를 누렸습니다.
당시의 국제 상황이 이스라엘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초강대국으로 명성을 떨쳤전 아시리아는 통치권이 급격히 약화되어 ‘내코가 석자’인 관계로 다른 나라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습니다.
다마스쿠스 왕국 역시 아시리아와의 전쟁에서 크게 패한 후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북쪽의 하맛 왕궁과 부단히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은 유다 왕국과도 평화로이 지내던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유리한 국제적 상황을 이용해 여로보암 2세는 요르단 건너편으로 영토를 확장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태평성대를 누렸습니다. 정치적 안정은 경제적 번영도 함께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로 인한 폐단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가중되면서 경제적 평등이 무너졌습니다. 특정 사람들에게 부와 권력이 편중되었습니다. 가난한 백성들이 겪는 서러움과 위화감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이런 시대 아모스 예언자가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불평등 현상을 눈여겨본 아모스 예언자는 부자들의 사치와 향락을 신랄하게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꼭 필요한 말씀 한 마디를 그들 심장을 향해 던집니다.
“다만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아모스 예언서 5장 24절)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거창한 종교 예식을 거부하시는 이유가 명백하게 설명되고 있습니다. 바로 공정과 정의가 결여되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지역의 종교 의식은 사람들에게 아무런 윤리적 요구를 하지 않았습니다. 신에게 드리는 예배와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별개의 것으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신에게 바쳐야 할 예배만 제대로 이행하면 신과의 친교 관계를 잘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으신 주님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그분과의 계약은 사람들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요구합니다. 주님과의 관계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통해서 표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모스 예언자는 공정과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가운데 주님께 드리는 예배는 아무리 성대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분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고 주님께서는 그러한 예배를 거부하심을 명확하게 지적한 것입니다.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가다라인 지방에서 더러운 영을 쫒아내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의 첫 이방인지역 나들이입니다.
거센 돌풍을 잠재우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호수를 건너왔지만, 또 다른 거센 돌풍을 만나게 됩니다. 마치 모세가 갈대바다를 건너왔지만 여전히 사막에서 또 거센 돌풍을 마주했듯이 말입니다. 더러운 영에 들린 이는 족쇄나 쇠사슬로 묶어둘 수 없을 만큼 거센 돌풍에 휘둘려 밤낮으로 소리 지르며 무덤을 헤집고 다녔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바다의 돌풍이 아니라, 인간에게 부는 거센 돌풍을 잠재우십니다.
사실, 당시에 마귀들과 악령들이 추방되는 사건은 종말의 표징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마귀들은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마태 8,29)하고 외쳤습니다. 곧 종말의 때가 되기 전에는 당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지 않느냐고 예수님께 항변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을 쫓아내시면서 종말의 때가 왔음을 드러내십니다. 동시에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그런데, 혹 우리도 하느님께 나와 무슨 상관이냐고, 나를 괴롭히지 말아달라고, 간섭하지 말아달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대체, 우리 안에 누가 있어 그렇게 하고 있을까요?
사실, 우리 안이 빛이라면 빛을 반겨 맞아들일 것이고, 어둠이라면 어둠을 반겨 맞아들일 것입니다. 마귀 들린 이는 자신 안에 마귀를 받아들인 까닭일 것이요, 우상숭배에 빠진 이는 우상을 받아들인 까닭일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 생각이라는 우상에 빠진 이는 자기 자신의 이기와 편리를 따르기 마련일 것입니다. 그래서 돼지를 치던 이들은 거룩한 권능을 보고 달아납니다. 그리고 돼지를 치던 고을 주민들은 예수님을 보고 자기 고장에서 떠나가라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 안에 돼지 떼가 판치게 방치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분의 말씀과 은총을 반겨 맞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빛을 밝혀드는 일입니다. 우리 안에 말씀을 품고 말씀의 빛을 밝혀드는 일입니다. 빛이신 주님만이, 사랑이신 주님만이 우리 안에서 어둠을 몰아내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더러워져 있어 주님을 맞아들이기에 합당하지 못하다고 말하는 것이 겸손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러워져 있기에 주님을 맞아들이는 것이 겸손일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죽은 이들의 무덤 가운데 살지 아니하고, 살아계신 주님의 사랑 가운데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러 오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그들은 그분을 보고 저희 고장에서 떠나가 주십사고 청하였다.”(마태 8,34)
주님!
어둠을 몰아내소서.
제 안에 돼지 떼가 판치지 않게 하소서.
저는 본래부터 주님의 거처이니, 제 안에 빛을 밝히소서.
죽은 이들의 무덤이 아니라, 살아계신 당신의 사랑 가운데 살게 하소서. 아멘.

돼지보다 젖소가 좋다
돼지가 젖소에게 물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보다 너를 좋아하는 이유가 뭘까? 나는 죽은 후에 햄이며, 베이컨에 족발, 삼겹살 곱창까지 몽땅 주는데 말이야?" 그러자 젖소가 대답했습니다. "글쎄 내 생각에 말이야 넌 죽은 후에야 모든 걸 주지만 난 살아생전에 우유며 치즈, 좋은 것을 주기 때문이 아닐까?”
돼지는 새김질을 못해 구약에선 더러운 짐승으로 먹지 못하게 했고, 지금도 이스라엘과 아랍사람들은 먹지 않습니다. 가나안과 시리아, 로마 사람들은 돼지를 제물로 바쳤습니다. 유다인들에게는 돼지를 키우는 일조차 금기사항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지역은 하느님의 뜻이 전해지지 않는 곳으로 먹어서는 안 되는 돼지를 키웠습니다. 그들에게는 식량입니다.
결국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은 돼지 취급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이방인지역에 가셨습니다. 그리고 한 말씀으로 마귀들이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 물에 빠져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예수님을 자기 고장에서 떠나달라고 청하였습니다. 돼지들이 죽었으니 예수님께서 거기에 머무신다는 것은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벌써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에게는 악의세력인 마귀가 죽었다는 것을 생각지 못하고 경제적 손실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돼지를 잃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잃는 것보다 훨씬 더 낫습니다.
예수님의 행위는 하느님을 모시지 못하고 악의 세력이 자리할 때 이방의 지역이 되는 것이요, 그곳에 죽음이 온다는 것을 일깨워 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방 지역이란 다른 곳이 아닌 내 삶의 자리 한 가운데 있습니다. 살아생전에 남을 위해 배려하지 못하고 나중에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 이기적인 마음, 힘들이지 않고 한몫 챙기려 하는 한탕주의, 소위 용하다는 곳을 찾아다니며 하는 미신행위, 가정을 뒤 흔드는 향락을 쫓아 즐기는 행위 등등 우리 삶의 자리가 유혹의 자리요, 이방의 자리가 되고 있으며 죽음의 자리가 되고 있습니다.
마귀들은 사람들을 뒤 흔들었지만 예수님께는 꼼짝을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다라인들의 지역을 가만히 지나가시는데도, 견디지 못하고 빨리 멀어지기를 바라면서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저희를 쫓아내시려거든 저 돼지 떼 속으로나 들여보내 주십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마귀들은 예수님 앞에서는 힘을 못 쓰고 꽁무니를 뺐습니다. 그렇다면 마귀들이 아무리 날뛰더라도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아무 걱정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면 근심하지 않고 방황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떠나서 방황하면 마귀는 다가오고 절망이 기다립니다. 예수님을 꼭 잡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각자의 삶의 자리를 하느님을 모신 자리로 빛내야합니다. 결코 자신의 힘에 의존하지 말고 하느님의 힘에 의존하여 하느님 안에서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어야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누구를 기쁘게 하기 원하십니까? 하느님입니까? 세속입니까? 사실 물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대답을 못살고 있을 때가 있음을 고백합니다. 주님의 뜻을 따라 악을 미워하고 선을 행하며 공정한 마음을 지키고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 차별 없는 사랑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한 우리의 삶입니다. 그러나 부족함을 있는 그대로 주님께 봉헌하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무엇을 하려거든 돼지 보다 젖소가 되어 지금 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가다라인들의 지방에서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 가다라인들의 지방에서 마귀들을 쫓아내신 이야기는(마태 8,28-34),
은총은 받기를 희망하고, 받으려고 노력하고,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만이 받게 된다는 교훈입니다.
가다라인들은 마귀들의 억압에서 해방되는 은총을 받았지만, 그 해방이
은총이라는 것을 몰랐고, 자기들을 해방시켜 주신 예수님을 쫓아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믿었다면 받게 되었을 더 큰 은총을,
즉 구원의 은총을 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건너편 가다라인들의 지방에 이르셨을 때, 마귀 들린 사람 둘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너무나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다닐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하고
외쳤다(마태 8,28-29).”
여기서 ‘마귀 들린 사람들’이 하는 말은, 실제로는 ‘마귀들’이 하는 말입니다.
마귀들은 자기들이 쫓겨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든 방어를 하려고 애를 씁니다.
마귀들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신앙고백이 아니라 방어 전략으로서 하는 말입니다. (일종의 ‘아첨’입니다.)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라는 말은, 예수님의 영역과
자기들의 영역은 다르고, 자기들이 하는 일을 상관할 권한이 예수님에게 없다고 주장하는 말인데, 이 말은 거짓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상관하면 안 되는, 또는 상관할 필요가 없는 영역이란 없습니다.
세상 모든 영역은 다 하느님의 것이고,
하느님께서는 모든 권한을 예수님께 주셨습니다.
특히 마귀들이 하는 일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방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마귀들과 마주치기만 하면 언제나 그것들을 쫓아내셨습니다.
‘때가 되기도 전에’ 라는 말도 거짓말입니다.
여기서 ‘때’는 마귀들이 쫓겨나는 때, 즉 종말을 가리킵니다.
종말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시작되었고, 지금 진행 중이고,
언젠가 그날이 되어서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완성될 것입니다.
따라서 마귀들이 쫓겨나야 하는 때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왜곡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들을 쫓아내신 것은, 마귀들의 억압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이고, 그리고 마귀들이 본래 있어야 할 곳,
즉 지옥으로 그것들을 돌려보내기 위해서입니다.
단순히 마귀들을 괴롭히려고 그러신 것은 아닙니다.
마귀들은 언제나 거짓말만 하는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귀들이 하는 말은 처음부터 들으면 안 됩니다.
(사람들 가운데에는 ‘지옥’을 ‘마귀들이 다스리는 곳’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지옥은 그런 곳이 아니라, ‘마귀들이 벌을 받는 곳’입니다.)
“마침 그들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에 놓아기르는 많은 돼지 떼가 있었다. 마귀들이
예수님께, ‘저희를 쫓아내시려거든 저 돼지 떼 속으로나 들여보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가라.’ 하고 말씀하시자, 마귀들이 나와서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돼지 떼가 모두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물속에 빠져
죽고 말았다(마태 8,30-32).”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을 보시자마자 바로 “사람에게서 나가라.” 라고
명령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마르 5,8).
마귀들은 예수님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습니다.
나가라고 하시면 나갈 수밖에 없는데, 그런데도 마귀들은 타협안을 제시합니다.
마귀들도 지옥에 가는 것은 무서워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인간 세상에 머물러 있으려고 합니다.
그것들이 생각해낸 타협안은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마귀들의 간청을 들어주셨는지는 모릅니다.
어떻든 돼지들의 죽음의 책임은 예수님이 아니라 마귀들에게 있습니다.
돼지들이 집단 자살을 한 것에 대해서는
“말 못하는 짐승들도 마귀들이 들어오는 것을 거부한다.”고 해석합니다.
(마귀는 사람에게만 해로운 존재가 아니라, 짐승들에게도, 또는 자연계에도
해로운 존재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돼지들이 집단 자살을 함으로써 머물 곳을 잃어버린 마귀들은v 지옥으로 떨어졌을 것입니다.
“돼지를 치던 이들이 달아나 그 고을로 가서는, 이 모든 일과 마귀 들렸던 이들의
일을 알렸다. 그러자 온 고을 주민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나왔다. 그들은 그분을
보고 저희 고장에서 떠나가 주십사고 청하였다(마태 8,33-34).”
예수님께서 마귀들을 쫓아내신 일은, 마귀 들린 사람들을 구출하신 일이기도 하고,
가다라 지방을 마귀의 억압에서 해방시키신 일이기도 합니다.
‘돼지를 치던 이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직접 보았고,
그래서 그 일을 증언하는 증인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온 고을 주민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나왔다.” 라는 말은, ‘돼지를 치던 이들’의
증언을 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경하려고’ 모여들었다는 뜻입니다.
‘돼지를 치던 이들’은 자신들이 목격한 ‘일’을 증언하긴 했지만,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 없이, 그저 ‘본 일’만 전하는 증언이었습니다.
신앙의 관점에서는 ‘믿음’을 증언할 때에만 비로소 ‘참 증언’이 됩니다.
“떠나가 주십사고 청하였다.” 라는 말은, 뜻으로는 “떠나라고 요구하였다.”이고,
이 말은, 주민들이 예수님을 쫓아내려고 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가다라인들은 왜 예수님을 쫓아내려고 했을까?
1) 자기들을 억압했던 마귀들의 힘도 무서웠지만,
그 무서운 마귀들을 쫓아내신 예수님의 힘은 더 무서웠던 것일 수 있습니다.
믿으려고 하지 않는, 또는 믿음이 없는 사람의 눈에는
하느님과 예수님의 권능은 무섭게만 보일 것입니다.
2) 가다라인들은 마귀들과 함께 사는 것이 처음에는 힘들고 불편했겠지만,
그런대로 적응해서 살면서 힘들고 불편한 것을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그랬는데 예수님 때문에 생긴 새로운 변화가 더 낯설고 불편했을 것입니다.
(‘믿음’은 쇄신과 변화로 이어집니다.
반대로 말하면, 새롭게 변화되기를 거부하면 믿음의 길을 가지 못합니다.)
3) 돼지 주인들의 눈에는 마귀가 제거된 영적인 이익보다 돼지 떼를 잃어버린
물질적인 손해만 보였을 것이고, 그들은 물질적인 손해는 아주 큰 손해로,
영적인 이익은 아주 작은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정말로 큰 이익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큰 손해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게 해 주는 힘입니다.)

가다라인들 지방의 마귀 들린 사람
-조욱현신부-
예수께서는 호수를 건너 가다라 지방으로 가셔서 무덤에 사는 마귀 들린 사람들을 만나신다. 마귀 들린 이들은 우상숭배에 빠진 이들을 의미한다. 쇠사슬에 묶여 무덤에 산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하느님을 멀리하고 자신의 죄라는 쇠사슬과 죄라고 하는 차꼬에 묶여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29절)한다.
그가 말하는 때는 “메시아의 때”로서 마귀가 정복당하는 때를 말한다. 그러면서 “저희를 쫓아내시려거든 저 돼지 떼 속으로나 들여보내 주십시오.”(31절)하고 간청한다. 돼지 떼는 호수 가까운 곳에서 아무것이나 주워 먹으며 세상의 죄에 따라 살던 믿음이 없는 사람들을 상징한다. 이 속된 호수 가까이 사는 그들은 오류와 무절제한 욕망에 젖어있어서 쉽게 마귀들에게 정복당하고 만다.
예수께서는 “가라!”하고 명령하셨고, 마귀들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 돼지 떼는 물속에 빠져 죽는다(32절). 이러한 소식을 들은 동네 사람들이 나와서 예수님을 보고는 저희 마을에서 떠나 달라고 간청하였다(34절)고 전하고 있다. 하느님을 모르고 예수께서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현존 그 자체가 도전이며, 하나의 두려움으로 다가올 수 있다. 그래서 떠나 달라고 하는 것이다.
동네 사람들은 물론 깨끗이 치유된, 크나큰 고통을 당했던 그 마귀 들렸던 사람도 보았지만, 예수님께 자기들을 떠나가 달라고 간청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모르기 때문에 그분과 함께하는 것이 처음부터 받아들이기 힘든 도전으로 두려움으로 될 수 있어서 다른 것보다도 그분과 만나기조차 꺼리는 것이다.
순간적이고 현세적인 손해가 아까워 구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떠나 달라고 했던 동네 사람들의 모습이 우리에게는 없었는가? 믿음이 없었던 그들처럼 우리도 세상을 구원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께 우리의 마음의 고장에서 떠나 달라고 하지나 않았는지? 그리고 지금 우리의 삶이 주님께 우리를 떠나 달라고 간청하고 있는 삶이 아닌지 잘 살펴보아야 하겠다.
우리는 언제나 매 순간 하느님의 뜻 앞에 서 있다. 이 하느님의 뜻은 하나의 십자가의 도전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 십자가를 어떻게 처리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느냐가 중요하다. 그 십자가가 영광을 줄 줄 알지만, 그 과정이 두려워 그 십자가를 버려야 할까? 아니면 그 도전에 순순히 응답함으로써 영광을 누릴까? 진지한 마음으로 주님께 우리 자신을 봉헌하며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청하자.

마귀들이 나와서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마태 8, 32)
-한상우신부-
뜨거운
푸르름으로 치닫는
방해받지 않는
7월의
깨끗한
첫시작입니다.
우리 내면에서
나와야 할 것은
사악함이고
들어가야 할 것은
믿음의
고요입니다.
마귀추방으로
서로를
살게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앞에두고도
비탈길을 내리달려
죽음에 이르는
안타까운 우리들
모습이며 어둠의
속성입니다.
그릇된 생명의
방향을 수정할
때입니다.
예수님의
적극적인 개입을
받아들일 때입니다.
구체적인 개입으로
우리 인격의
품위를
되찾게 됩니다.
인격의 본질은
사랑과 자유입니다.
굴레와 속박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십니다.
서로를
아름답게하는
자유입니다.
아름답게하는
자유는 회개와
정화를 통해
더욱 풍요롭습니다.
풍요로운
사랑으로
비참함이
돌보심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요.

-오상선신부-
한 해의 새로운 절반을 시작하는 7월의 첫 날인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가 주님과의 관계를 "진짜진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물으십니다.
"마귀 들린 사람 둘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 왔다"(마태 8,28).
그 지역의 골치거리인 두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사나워서 사람들이 피해 다녀야 할 정도라고 하지요. 스스로 인간 사회의 관계성을 거부하는 그들이 스스로 무덤에서 나와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외부적으로 보면 예수님을 향하고 있고 거리도 점점 좁혀지고 있기는 한데, 그들의 외침은 정반대의 내용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태 8,29)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는 말은 인간 관계를 해치는 최악의 발언들 중 하나일 겁니다. 관계성의 거부는 서로를 어떤 책임도 의무도 없는 진공 상태로 몰아넣습니다. 관계 없음은 관심 없음이고 마음 없음이며 사랑 없음입니다.
하지만 모든 인간은 자신을 지으신 하느님과 관계가 있지요. 그리고 모든 피조물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 근본적 관계성을 거부하는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임이 명백합니다.
"온 고을 주민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나왔다"(마태 8,34).
이 조용한 지방에서, 그들 스스로 자청하여 들어간 돼지떼가 모두 물에 빠져 죽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온 고을 주민들이 예수님께 다가오지요. 그들의 방향성도 처음의 두 마귀 들린 이들과 같이 예수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저희 고장에서 떠나가 주십사고 청하였다"(마태 8,34).
슬프게도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가는 대다수의 고을 사람들 요구도 무덤 속에 살던 두 사람의 요구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 둘처럼 거칠게 외치지는 않았지만, 점잖고 외교적이며 완곡하고 세련된 어조로 예수님과의 관계를 거부한 것이지요. 떠나달라고...
적극적으로 악에 받친 태도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보통 사람인 그들에게는 재산의 손실이 견딜 수 없는 불편과 분노를 초래한 것 같습니다. 구원받아 멀쩡해진 두 사람의 안위를 경축하기보다 잃어버린 재산이 아깝고 아쉬울 뿐이지요.
제1독서에서는 위선과 허례허식으로 가득한, 마음 없는 예식을 주님께서 얼마나 혐오하시는지 보여줍니다.
"나는 너희의 축제들을 싫어한다. 배척한다. 너희의 그 거룩한 집회를 반길 수 없다"(아모 5,21).
이스라엘의 축제와 집회는 주님과의 연관성 아래 설정되고 지켜져 왔습니다. 주님께서 개입하신 역사의 마디마디를 길이 기념하고 경축하기 위한 종교 예식이었으니까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몸으로는 주님의 도성과 성전에 모이고, 율법이 정한 제물을 바치며, 노래와 연주로 주님을 찬미합니다. 하지만 마음을 보시는 주님은 그들이 외적으로 번지르르하게 만든 예식 이면에 가난하고 약한 이들에 대한 소외와 무시, 착취와 거부가 깔려 있음을 놓치지 않으십니다. 그건 바로, 몸으로는 주님 앞에 나와서, 마음으로는 '당신과 내가 무슨 상관이냐'고 외치는 것과 다름 없지요. 오늘 복음 속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정을 세워라"(아모 5,15).
가난한 이들을 외면한 채 들고 오는 예물이나, 약자들의 기회를 도용해 얻은 재물이 주님께 기쁨이 될 리 없습니다. 차라리 렙톤 두 닢 어치도 못 되는 빈한한 제물이어도, 아니 아예 빈 손이어도 사랑과 경외심을 가득 담은 마음이 주님께 영광이 되고 찬미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이들은 주님과 "상관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난한 마음에는 '저는 정말 가난하고 부족한 죄인이지만, 당신밖에 아무도 없습니다. 바칠 게 없어도 당신을 사랑해서 나아왔으니, 보잘것없지만 받아주십시오' 하는 진정성이 흐릅니다. 이런 이는 주님과의 관계성 안으로 자신을 던집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 봉헌을 결코 내치지 않으시지요.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신분이나 소속, 타이틀, 직함, 예식 참여 횟수나 헌금 액수 등 외적으로 주님을 향하는 것에 만족하는 이들이 아니지요. 몸뿐 아니라 마음과 영혼, 정신과 기억, 온 존재로 주님과 단단히 연결된 결합체이리라 믿습니다. 몸과 마음이 한 목소리로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과 저는 떨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입니다." 하고 외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일관적이고 통합된 존재로 주님 앞에 스스로 사랑의 예물이 되신 벗님을 축복합니다. 오늘 내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해 조곤히 묵상해봅시다.

피해망상과 마귀병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66229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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