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 28일 연중 제13주일 (교황 주일)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마태오10,37-42)
whoever does not take up his cross
and follow after me is not worthy of me.
Whoever receives you receives m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한재호신부-
오늘 복음의 주제는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외국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후배 신학생들이 한국 식료품을 소포로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오늘의 묵상은 후배들에게 쓴 제 답장으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저는 그대들이 참으로 어리석은 이들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이곳에서도 한국 식료품을 살 수 있다는 것도 모른 채, 기어이 소포를 보내고야 마는 그대들은 어리석습니다. 12시간 넘게 걸리는 이곳에 소포를 보내면 고추장 용기가 깨질 수 있다는 사실보다, 이 사람이 고추장 한 숟가락 먹지 못할까 걱정하는 그대들은 어리석습니다. 시험, 논문 등으로 바쁜 시기인데 귀한 시간 쪼개서 보답도 없는 소포를 보내는 그대들은 어리석습니다. 세상은 그대들처럼 그리 어리석지 않습니다. 받을 것 다 받고, 자기 앞가림부터 챙기고, 손익 계산에 재빨라야 살 만하다는 것을 그대들처럼 모르지 않습니다.
그대들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저는 어리석은 또 다른 사람들을 기억하였습니다. 가족들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고민을 어린 사제에게 털어놓았던 교우분들, 타지에서 고생한다며 봉투를 쥐어 주시던 선배 신부님들, 세상 좋은 것들을 마다하고 울타리 속에서 기도와 노동으로 살겠다고 세속의 옷을 벗은 젊은 처자들 ……. 프란치스코 성인도 그렇게 어리석어 한평생 거지로 살았고, 가타리나 성녀도 긴 머리를 잘랐으며,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도 자신의 젊은 생명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서는 죄없이 고통을 받고 돌아가시면서도 당신을 죽음으로 몰고 간 이들을 용서하시는 어리석음의 극치를 달리시고야 말았습니다. 어리석은 이들이여, 그대들의 어리석음이 하느님께 큰 찬양이 되었으리라,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될 것이라, 그대 자신들을 살릴 것이라 믿습니다. 어리석은 그대들에게 제 어리석은 사랑을 고백합니다. 사랑합니다. 함께 갑시다.”
진정한 평화
-키엣 대주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기에 우리는 선택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과 악마, 짧은 이 세상과 영원한 천국 중 하나를 선택하여야 하며 그 선택은 전혀 다른 두 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압력으로 약한 자를 억압하고 착취하지만 결국 그 강함은 약함을 감추고자 하는 모습입니다. 파라오의 행동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권력을 보호하고 부를 지키기 위해 그들은 두려운 존재였던 이스라엘 자손들을 더욱 더 가혹하게 다루었고 히브리인들에게서 태어나는 아들은 모두 강에 던져 버려 죽이라고 명령했고 노예로 삼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주님 앞에서는 아주 도덕적인 모습으로 위장합니다. 그 옛날 유대인들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얼굴로 많은 예물을 바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범죄를 저지르고, 동족을 억압하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주님은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그들에게 이중성을 경고하였습니다.
위선자들의 보여지는 평화 뒤에는 편견과 억압, 갈등이 존재합니다. 사람을 해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평화가 깃들 수 없습니다. 욕망은 언제나 두려움과 의심이 따르는 것이기에 절대 평화로울 수 없습니다.
반면 주님을 믿는 사람은 자신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고 있기에 언제나 평화롭습니다. 욕망을 벗어난 자유는 깊은 평화를 줍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나를 위하여 다른 사람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사람은 다음 생에서는 모든 것을 잃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의 심판과 벌을 받을 것입니다.
반면 나눔을 알고 자신을 버릴 줄 아는 사람은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자신을 마치 한 잔의 물처럼 생각하는 겸손함을 지니고 이웃을 사랑하고 봉사한다면 주님께서는 그것을 기억하고 합당한 보상을 주실 것입니다. 자신을 잊고 다른 사람을 생각할 때, 세계의 평화를 만드는 진정한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평화이고 그것이 주님의 평화입니다.
주님의 제자와 자녀로서 주님의 관대한 마음을 닮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예수님은 모든 것을 취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주기 위하여 오셨기에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지칠 줄 모르고 끝없이 주기만 하셨습니다. 심판과 처벌이 아니라 용서를 위해 오셨고 인간의 구원과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과 풍요로움을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제자라면 주님의 넓은 마음과 포용, 관대한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와 자녀로서 겸손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기 위해서는 믿음 안에서 작아져야만 합니다. 꼭 필요한 것만 갖는 아주 작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을 대할 때는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모든 일을 하고도 “저는 쓸모 없는 종입니다”라고 말 할 수 있는 겸손함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제자와 자녀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지향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선택을 받은 자녀는 주님의 뜻을 실천하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영혼의 중심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어야 합니다. 가족과의 단절과 사사로움을 버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진실하게 사랑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주님, 저희가 진정한 주님의 제자가 되어 주님을 따를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지금 어떤 길을 선택하였습니까?
2. 주님의 자녀로서 바른 길을 가고 있습니까?
3.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을 따르기 위해 어떤 실천을 하셨는지 묵상해 봅시다.
'두 교황'과 교황 주일
-임상만신부-
영화 ‘두 교황’은 은퇴를 결심하고 후임을 물색하는 베네딕토 16세 교황과 교구장 은퇴 승인을 받기 위해 교황을 방문한 베르골리오 추기경(현 프란치스코 교황)이 함께 지낸 이틀 동안 일어난 일을 담고 있다.
교회의 전통과 규범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보수파 교황과 이제는 교회가 시대의 흐름을 수용하고 신자들 중심으로 변해야 한다는 개혁파 베르골리오 추기경의 만남을 다루면서, 우리 교회가 무엇을 지켜야 하고 또 동시에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특히 “교회가 매 순간 선을 긋고 담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는 교황의 말에, “오늘날 교회는 자비로 담을 부수고, 그 대신 다리를 지어야 한다”고 응수하는 베르골리오 추기경의 대화를 통해, 제도 안에서의 전통적 교회론과 신자들 삶의 현장 속에 머물러야 한다는 새로운 교회론이 충돌하지만 결국은 이 둘이 함께 공존해야 함을 날카롭게 제시하고 있다.
복음은 ‘시원한 물 한 잔’(마태 10,42)이라는 말로 교회의 원론적인 역할을 제시한다. 뜨거운 중동에서 ‘시원한 물 한 잔’은 누구에게나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이기에 우물은 반드시 보호해야 할 중요한 원천이다. 그러나 우물 보호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뚜껑을 닫고 열지 않아 더는 물을 마실 수 없다면 그 우물의 존재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이는 복음을 지키기 위해 너무 방어적인 모습으로 교회 안에만 머물러 있으므로 해서 삶의 현장과 유리된 면을 바로 잡아야 함을 일깨워 주는 동시에 교회가 일상의 현장에서 세상 속의 작은 이들에게 ‘시원한 물 한 잔’을 제공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우물 뚜껑을 열 때 정체성을 회복하고 현실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해 준다.
예수님께서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라는 표현으로 삶의 현장에서 무시당하고 소외받기 쉬운 사람들에게 자신의 중요한 것을 적극 나누어야 함을 강조하신다. 이는 ‘작은 이들’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매우 가벼운 존재일 수 있지만, 교회에서는 그들이 신앙적 실천 대상의 우선순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동안 교회가 제도권에만 공고히 머무르기 위해 정작 삶의 현장에서 관심이 필요한 작은 이들을 놓치고 있지 않았는지에 대해 돌아보아야 한다.
오늘 복음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냥 ‘물 한 잔’이 아니라 ‘시원한 물 한 잔’이라는 표현을 통해 나눔은 주는 사람의 입장이 아니라 그것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더욱 필요한 것이어야 함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동안 교회나 신자들이 가난하고 소외당한 사람들을 위하여 많은 부분을 나누었지만, 이제는 좀 더 신중하게 받는 사람의 입장까지 헤아려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오늘날에도 우리 주변에는 ‘시원한 물 한 잔’을 기다리며 목말라 애타는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회가 방황하는 이들은 무시한 채, 화려한 종교적 행사 위주로 단지 양적 팽창만을 위해 달려왔다면 이제는 과감히 그 달음질을 멈추고 주변을 돌아보아야 할 때이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에 따라, 잃는 것 보다는 작은 이들과 나눌 수 있는 것들을 먼저 헤아릴 수 있어야 “우리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태 10,42)
“우리는 가진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없이 활동하고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는 좀 더 윤리적인 비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2013년 CAPP 연설 중에서)
집착에서 벗어난 환대
-김혜윤 수녀-
‘사람대접 못 받는’ 모욕의 순간은 우리가 정말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 혹은 공동체로부터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혹은 그들이 기대하는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을 때(좀 더 분명히 말한다면, 충족시켜주지 못한다고 그들이 판단했을 때) 발생합니다. 받아들여지지 않고 환대받지 못하며 그래서 존재가 부정되고 마는 비극은 우리의 일상 도처에 기생(寄生)하는 슬픔이며 고통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환대’입니다. 가장 가난하고 불행한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이 왜 하느님을 환대하는 것인지를 설명해줍니다.
■ 복음의 맥락
마태오복음서는 크게 5개의 설교로 구성되어 있고 오늘 복음은 그 두 번째 ‘파견 설교’에 속해있습니다.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한 조건을 언급하시는데 첫 시작부터 가히 파격적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혹은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27)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유대로 묶일 수밖에 없는 가족 간의 사랑을 부인하는 듯한 말씀이 억지스러운 위협과 심각한 독선으로까지 느껴집니다. 이러한 난처한 말씀 앞에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본문을 복음서 전체의 맥락에서 파악하는 것입니다. 큰 맥락을 이해하게 되면 본문의 역설도 조금은 수용되기 때문입니다. 이 본문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박해를 각오하라’(10,16-25)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라’(10,26-33)는 말씀 다음에 등장합니다. 특별히 ‘가족’을 모티브로 한 단락에 포함되어 있는데, 아마도 성경 전체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일 듯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왔다’고 하시며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설 것’이라고 예견하시고 급기야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10,34-36)라고 까지 선언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도발적 말씀 바로 다음에 오늘 복음의 첫 부분(“아버지와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이 등장합니다.
사실 이 내용은 마태오복음서가 제작되던 시대의 사회적 혼란을 배경으로 할 때에만 이해 가능한 구절입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완성되었는데, 당시 유다 내부사회는 계급간의 갈등과 부패로 심각한 혼란에 빠져있었습니다. 결국 로마군이 주둔하여 사태를 정리하는 계엄 상황에 들어가게 되고, 이에 저항하던 유다인들은 예루살렘 성전 파괴라는 파국적 종말을 맞게 됩니다. 이 와중에 그리스도인들은 유다인들의 의심과 박해를 받아야 했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신원 때문에 가족 공동체가 붕괴되는 아픔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칼을 주러왔고 가족이 서로 갈라서게 된다는 말씀은 그리스도 때문에 감수해야했던 가족으로부터의 소외와 버림받음을 암시적으로 언급한 내용입니다.
■ 집착에서 벗어난 환대
과연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가족에 대한 사랑과 대립되는 것인지, 그렇다면 십계명 중 인간에 대한 내용으로서는 가장 먼저 등장하는 4계명,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지 질문하게 됩니다. 문장의 의미를 보다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 그리스어 문장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리스어 본문을 그대로 직역한다면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 위에 두고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가치가 없다.”입니다. 새 번역 성경에서 “사랑하다”로 번역된 단어는 ‘필레오’로서 누군가에게 매력과 호감을 느끼고 애착하는 것을 말하며, 이는 초성적 사랑을 의미하는 ‘아가페’(동사 ‘아가파오’에서 파생)와 구별되는 감정입니다. 결국 이 문장은 애착의 위험성과 집착이 수반하는 속박을 경고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집착할 때 발생하는 불안, 질투, 실망, 미움은 인간을 파괴하는 치명적 무기가 되며 집착에서 벗어나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할 때 인간은 훨씬 더 풍요롭고 안전하며 충만한 유기적 공존 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복음의 후반부는 한 사람에 대한 집착을 접고, 대신 주변 이웃들을 ‘받아들임’과 그 결과로 ‘받게 되는’ 보상(40-41절)에 대해 언급합니다. “받아들이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데코마이’이며 이는 ‘환영하다, 인정하다, 인내하고 참아주다’ 등의 의미를 가집니다. 누군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를 환대하고 존중하며, 그의 모든 것을 인내하고 참아주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렇게 무조건적 환대를 실천하는 사람은 더 큰 환대로 보상받게 되는데 특별히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42절) 보상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작은이들”은 스스로 보상할 수 없기에 하느님께서 직접 보상하시는 것입니다.
램브란트의 ‘예수의 설교’(1657).
■ 환대와 보상
이러한 환대와 보상의 상호성은 제1독서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수넴이라는 곳에 살고 있던 한 여인은 엘리사 예언자가 그 지역을 지날 때 마다 자기 집에 모셔 음식을 대접하고 환대합니다. 이는 그녀가 엘리사를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2열왕 4,9)으로 인식했기 때문이고, 하느님의 사람을 환대한 것은 곧 하느님을 환대한 것이 됩니다. 결국 이러한 환대는, 나이 많은 남편과 자식 없이 살고 있던 여인의 임신으로 보상받게 됩니다. “부인은 아들을 안게 될 것이오.”(16절)
누군가에 대한 혹은 무엇에 대한 집착은 주변의 “작은이들”에게 다가가야 할 우리의 진심과 선의를 무기력하게 하는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가족 간의 사랑을 예수님 보다 우위에 두는 것을 경고하신 말씀은, 사실 부질없는 집착이나 애착을 넘어서는 넓은 사랑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아무리 열렬하고 충실한 사랑이라 하더라도 가족이라는 좁은 테두리 안에 갇혀 폐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 축복이 아니라 형벌이 되고 맙니다. 폐쇄적이기에 치열하고, 치열할수록 맹목적인 가학성을 띨 수밖에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집착하지 않는 마음은 상대를 포기하거나 버림을 의미하지 않고 ‘믿음’을 의미합니다. 상대를 믿지 못할 때 불안하고 초조하여 마음을 놓을 수 없게 되고 결국 그런 놓을 수 없음이 집착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서로를 믿을 때 자유로울 수 있고 관대하며 유쾌하고 따뜻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결속과 연대의 미명아래 자행되는 배타적 집착에서 벗어나 다름과 낯섦을 인정하고 서로를 하느님의 사람으로 받아들여 존중하는 환대입니다.
제자됨의 길
-김상우신부-
2020년도 절반 이상이 지났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 감 염증으로 빼앗긴 우리의 일상, 그리고 정상적인 미사 참례 와 본당 활동이 아련하고 그리워지기까지 합니다. 그러면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신앙인에게 필요한 자세는 무엇일까요? 저는 연중 제13주일 복음(마태 10,37-42)에서 실 마리를 찾아봅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네 복음서 가운데 특히 스승이신 예수 님의 모습을 강조합니다. 이 복음서는 독자들이 스승 예 수님의 제자됨의 길을 걷도록 초대합니다. 복음서 끝부분 에 따르면,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 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 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9-20)라는 스승 예수님의 사명이 제자들에게 부여됩니 다. 이 같은 맥락에서 주일 복음 말씀을 읽어봅시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 이 구절은 예수님의 제자 됨의 길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할 때 더 명확하게 다가옵니 다. 37절에서 ‘사랑하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는 하느 님에 대한 사랑을 가리키는 그리스어 동사와는 다릅니다. 37절의 표현은 마태오 복음서에서 ‘좋아하다’라는 의미로 부정적인 것을 가리키거나 멸시적인 어조(마태 6,5; 23,6)로 사 용되기까지 합니다. 이는 가족들 사이의 유대와 연대, 사랑 도 물론 중요한 가치이기는 하지만, 하느님 사랑과 같은 범 주에 넣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신앙인으로서 예수 님의 제자됨의 길을 걸으며, 가족 사랑을 핑계로 하느님 사 랑을 소홀히 하면서 스스로에게 한없이 관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9) 여기서 ‘목숨’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명사는 육체적 생명만을 가 리키지 않습니다. 이 단어는 영적인 생명, 즉 영원한 생명 을 지향하는 전인적 생명, 존엄한 인격체로서의 생명을 뜻 합니다. 게다가 ‘목숨을 얻다’라는 표현에서 ‘얻다’라고 번 역된 그리스어 동사는 ‘발견하다’라는 일차적 의미가 있습 니다. 그래서 단순한 육체적 생명이 아닌 영원한 생명, 인 격체로서의 전인적 생명을 스승 예수님을 위해 기꺼이 내 어놓고 잃을 각오마저 아끼지 않는 제자들은 역설적으로 그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의 약속입니다. 절망과 피로감, 실망과 무기력함으로 점철된 일상에서, 많은 것들이 상대화되고 부질없이 느껴지는 이 시기에, 스 승 예수님의 제자됨의 길을 여러분은 어떻게 걷고 계십니 까? 이 시기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우리 신앙인에게 변하지 않는 가치와 놓치지 말아야 할 가치는 무엇인지 곰 곰이 돌아보시기를 청합니다
예수님께 합당한 사람
-최원석신부-
6·25 한반도 전쟁 70주년을 지내고, 예수 성심 성월의 마지막 주일인 오늘은 교황 주일입니 다! 베드로 사도의 266대 후계자이신 교황 프란치스코 성하의 건강과 평화를, 그리고 모든 양 떼들을 진리의 길로 이끌어 주시기를 청하며, 교황님의 뜻을 위해 열렬한 기도와 희생, 물질 적 지원을 드리는 날입니다! 오늘 주님은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는 말씀을 세 번이나 하십니다. 과연 우리는 ‘예수님께 합당한 사람’ 인가요? 태권도를 배우는 사람이 자기 몸을 지키고, 불의를 용납하지 않고, 약자들을 보호한다면, 태권 도 정신에 합당합니다. 그러나 미용에 좋아서, 다이어트를 위해서, 약자를 괴롭히기 위해서라 면, 그는 태권도 정신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천주교를 믿는 이유가 마음의 위안을 위해서,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 또는 사업의 번창을 위해 서라면, 예수님께 합당하지 않습니다. 천주교 신자가 신천지로 넘어가도, 사랑하는 자녀들이 냉 담 중이어도, 불의와 폭력이 난무하고,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어도 그저 남의 일인 듯 구경만 한 다면 그런 신자는 예수님께 합당하지 않습니다. 부모나 자녀들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 도,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도 예수님께 합당하 지 않습니다. 현세에서 행복을 추구하려는 사람은 참 행복을 잃을 것이며, 예수님 때문에 현세의 행복을 포기하는 사람은 영원한 행복을 얻을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것이 천주께 영광이 되는지, 영혼들의 구원에 유 익한지, 그리고 성교회의 승리에 기여하는지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이것이 옳은 길이라고 판단되면, 주님의 명령으로 알고 묵묵 히 실천하십시오! 그러면 ‘예수님께 합당한 사람’ 이 될 것입니다!
자모이신 성 교회의 지극히 공경하올 교황성하께!
문봉한신부-
먼저 프란치스코 형제를 교황님으로 모실 수 있는 은총을 주신 하느님께 두 손 들어 감사의 찬양을 올립 니다. Viva PaPa! Viva Paco! 지상에서는 가장 위대한 부름을 받은 한 분만이 설 수 있는 그 엄중한 자리에서, 위대한 교황님이 나약 하게 모든 이의 기도를 청하면서 거룩한 직무를 시작하셨지요. 너무나 겸손하고 솔직해서 당신이 서신 발 코니가 마냥 높으신 분의 자리만이 아니라,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사랑의 위엄이 흘러내리는 천상의 층계 가 되었습니다. 당신께서는 죄인에게나 선인에게나 가진 자든 없는 자든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기도로 청하 셨습니다. 그 모습은 모든 이의 모든 것인 착하신 주님을 보여 주었습니다. 세상은 당신에게서 희망을 받아 안으며 한 마음으로 새 교황님을 위해 기꺼이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그 날 이후 온 인류가 마주한 위대하면서도 겸손한 친구인 당신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린 적이 없었습니 다. 늘 고맙습니다. 저희보다 한 발 앞서 어떻게 기도해야 되는지를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또한 어려운 문 제를 푸는 열쇠는 자본과 권력을 이용한 계략이 아니라, 자신을 순수하게 내어주는 사랑임을 입증해 주셨 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공격이 하느님의 사랑을 몰아낼 것처럼 이 땅에서 기승을 부리는 날, 비에 젖 은 성베드로 대성당 계단에서 홀로 인류를 위해 기도하시던 당신에게서, 또 다시 희망을 보았습니다. 희망 은 막연히 기대만 하는 자의 몫이 아니라 성실히 준비하는 자의 선물임을 깨달았습니다. 그 순간 그렇게 내 리던 비는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인류의 공포는 반드시 이겨낼 수 있다는 희망의 예표로 변화되었습니다. 이렇게 당신은 늘 고통 속에서 함께하는 친구로서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그래 서 우리 모두가 교황님을 사랑합니다. 당신은 언젠가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 “사랑은 구체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굶주린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병자들을 찾으라고 하셨지요. 말이 아니라 실천을 통한 사랑입니다.” 구체적인 실천 없는 사랑은 자신 을 내어 주지 않는 이기적인 변명에 불과함을 깨우쳐 주셨지요. 이렇듯 사랑의 산증인이신 당신과 함께함 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새삼 느낍니다. 오늘 교황 주일을 맞이하여 다시 한 번 새롭게 다짐해 봅니다. ‘변 명과 핑계가 아니라 구체적이며 신속하게 사랑을 실천하겠습니다.’ 이 사랑 안에서 우리의 친구이신 교황님 과 함께하며 행복하겠습니다. Viva PaPa! Viva Paco!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렸을 때 모래를 가지고 놀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느 공사장에 쌓여 있는 모래 더미 속에서 친구들과 함께 모래성을 쌓으며 놀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아저씨가 우리에게 다가오더니 한참 동안 쌓아 올린 모래성을 발로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놀면 안 돼. 이곳은 위험하니 나가 놀아.”
같이 놀고 있던 친구와 그 자리에서 쫓겨나면서 우리는 이 아저씨를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릅니다. 정성을 다해 쌓고 있는 모래성을 발로 부쉈다면서 말이지요.
어른이 된 지금, 아직도 그 무너진 모래성을 안타까워할까요? 이제는 별것 아니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위험한 공사판에서 노는 우리를 쫓아내기 위한 아저씨의 행동도 충분히 이해됩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아까워하고 억울해하는 일들을 겪습니다. 하지만 그 일들 역시 시간이 지나면 별것 아닌 것으로, 하찮은 것으로 여겨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늘나라에서는 어떨까요? 부족함이 전혀 없는 만족으로 가득한 곳에서 지금의 아쉬움은 특히 별것 아닌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현재 아까워하고 억울해하는 일을 비롯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장차 갈 하느님 나라에서가 아닐까요? 그래서 그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을 제시하신 주님의 말씀에 더욱더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 사랑보다 가족 사랑을 앞에 두지 않도록, 즉 모든 관계에서 사랑의 우선순위를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가족들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보다 하느님 사랑이 더 위에 있으며, 심지어 자기 목숨보다도 더 우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위해 죽어서 영원히 사는 것이 인간적인 이익을 위해 살다가 영원한 죽음을 당하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은 자신의 몸과 함께 죄스러운 버릇과 즐거움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선순위를 하느님께 두는 사람에게 합당한 상이 주어집니다. 하늘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은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커다란 상입니다.
세상의 모든 어려움과 힘듦이 사라지는 나라, 더는 억울하지도 않고 아까워할 것이 없는 나라, 커다란 기쁨 속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나라, 이 나라를 향한 우리의 노력을 늘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하느님께 우선순위를 두는 삶입니다.
자신을 비우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하느님이 채우실 방을 마련하는 것입니다(성녀 마더 데레사).
어디에 집중하고 있는가?
사람은 자신의 계획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을 때, 더 좋은 것을 선택할 수 없을 때 힘들어하거나 괴로워하고 화를 냅니다.
어떤 자매님의 고민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침기도는 성실하게 바칠 수 있는데, 저녁기도는 늘 빼먹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침기도 할 때는 가족들이 아직 깨어 있지 않아서 혼자 조용히 기도할 수 있는데, 저녁에는 가족들 식사를 비롯한 각종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고 함께 텔레비전을 보다가 그냥 잠들게 된다는 것이었지요. 가족만 없어도 저녁기도를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사실 가족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께 집중하지 못하는 불안정한 마음 때문입니다. 이 마음으로 사소한 기회만 생겨도 뒤로 미루거나 하지 않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선순위를 주님께 두어야 내 마음을 온전히 주님께 집중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제약, 예속 등의 이유를 들어 주님께 나아가는 것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통해서만 큰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상대가 나를 진정으로 좋아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전삼용신부-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은 두 부류가 있습니다. 나를 진정 사랑해서 다가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나를 이용하려고 다가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를 이용하려 다가오는 사람도 사실 자신이 그런 줄 모르는 때도 있습니다. 자신은 사랑한다고 다가오지만, 자신의 본성이 아직 저급한 상태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내가 에너지를 더 쏟아야 할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분하는 것은 나의 몫입니다. 이 구분을 잘하지 못하면 모기에게 속아서 피를 빨리느라고 평생을 허비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 중에, 나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과 나를 이용하려는 사람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제가 전에 다니던 치과에서 신경치료를 하다가 저의 치아를 갈라지게 한 의사 선생님이 있습니다. 어찌나 미안해하던지 저에게 모든 것을 해 줄 기세였습니다. 제가 사제라고 말하니까, 신자가 아님에도 자신의 남편의 친구 중에 사제가 있다고 하며 문밖에 나갈 때까지 저에게 관심을 주었습니다. 우선은 갈라진 치아를 임시로 붙여서 크라운을 씌웠습니다. 쓸 수 있을 때까지 쓰자는 것이었습니다.
몇 년이 지난 후 그 치아가 조금 아파서 같은 치과에 찾아갔습니다. 그분은 저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저를 대하는 것도 이전과는 딴 판이었습니다. 그리고 치아가 갈라져 있으니 빨리 뽑고 임플란트를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해 놓고 잊어버린 것입니다. 저는 “제 치아를 이렇게 갈라지게 한 분이 당신입니다.”라고 말하여 기억을 되살려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을 꺼냈습니다.
“제가 그때 찾아왔던 신부입 ... .”
그분은 제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말을 끊고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오늘 뽑고 가실래요?”
자신의 의도가 너무 앞서니 제 말은 들리지도 않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잠시 제 치아와 이별할 시간을 달라고 말하며 그 치과를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다시는 그 치과에 가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그 일이 있은 지 몇 달이 지났지만, 치아를 정상적으로 잘 쓰고 있습니다. 쓸 수 있을 때까지 쓸 생각입니다.
나에게 관심이 있는지 알려면 나의 말을 경청하는지 살펴보면 됩니다. 상대가 나를 좋아할 때는 나의 말을 잘 들으려 합니다. 그러나 건성으로 듣거나 듣지 않으려는 모습이 있으면서도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그것은 나를 이용하려는 사람입니다.
아주 단순한 것 같지만 저는 몇 년 동안 제 말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저를 좋아하는 줄 착각하여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면 그 사람에게 나가는 것은 무엇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말을 듣고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에 관심이 없으면 그 말하는 사람에게도 사실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관심이 생겨야 그 사람이 말하는 것에도 관심을 두게 됩니다.
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의 일화라고 합니다. 버나드 쇼는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좋아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조각가 로댕을 좋아하는 친구들은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싫어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귀한 로댕의 그림 스케치를 구했다고 하며 그 친구들을 불렀습니다. 로댕을 좋아하는 그 친구들은 그 그림만 보며 예술적인 기지를 발휘하여 온갖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때 버나드 쇼가 “아, 미안합니다. 이 그림은 로댕의 것이 아니라 미켈란젤로의 것이었네요.”라고 말했을 때 장내는 정적만이 흘렀다고 합니다.
[출처: ‘말의 품격’, 이기주, 유튜브 ‘책 읽는 다락방 J’]
사람이 싫으면 그 사람이 하는 말도 싫게 들립니다. 모든 것이 싫게 들립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말과 행동을 바꾸어 잘 보이려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미 지난 복권을 사려고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빨리 포기하고 나의 말에 관심을 기울이는 새로운 사람에게로 향하는 것이 삶을 허비하지 않는 방법입니다. 물론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한다면 참아낼 수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쫓아갈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나 어머니, 아들이나 딸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지 않으면 당신에게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지, 가족이나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바로 당신께서 하시는 말씀을 대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에게 관심이 없으면 아버지에게도 없는 것입니다. 말씀은 누군가를 알리기 위해 파견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입으로 하는 말이 될 수도 있지만,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교회도 예수님의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따라 내가 예수님을 더 좋아하는지, 아니면 이용하기 위해 다가가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파견된 사람을 대하는 것이 곧 파견한 사람을 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교회에 관심이 없다면 예수님에게도 관심이 없는 것이고, 교회가 하는 말과 가르침에 관심이 없다면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오늘은 교황 주일입니다. 교회의 권위에 대해 묵상하는 날입니다. 신자들은 모이면 주로 누구에 대해 말을 많이 하나요? 아마 본당의 사제와 수녀님들에 대해 말을 많이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앞에서는 잘하면서도 뒤돌아서면 그분들을 굳이 안 좋게 말하는 신자분들도 있습니다. 그분들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을 들어 높이는 것입니다. 그런 일에 동조해서는 안 됩니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 왕을 주님께서 왕으로 뽑으셨다는 것 하나 때문에 끝까지 그를 공경하였습니다.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결코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손을 댈 수 없다며 자신의 원수지만 용서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에 대한 태도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태도는 그분이 파견하신 분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달렸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그분께서 파견하신 이도 사랑합니다. 그 인품에 상관이 없습니다. 인품이 좋으면 더 좋겠지만, 그분이 파견하신 분이라는 것 하나 때문에라도 공경한다면 주님께 합당한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매번 인사이동 때마다 주님께서 파견하시는 이들 앞에서 주님께 합당한 사람인지, 아닌지에 대한 시험을 받습니다.
-조재형신부-
오늘은 6월의 마지막 주일이고 전 세계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시고 애쓰시는 교황님을 위해 특별히 기도하는 교황 주일입니다. 권위는 있지만 권위주의적이지 않게, 신자들 위에 군림은 하지만 오직 사랑으로 군림할 수 있도록, 다스리기는 하지만 오직 봉사하는 마음으로 다스릴 수 있도록 기도했으면 합니다.
유튜브는 다양한 동영상을 볼 수 있는 플랫폼입니다. 저는 주로 강의를 듣거나, 미국 뉴스를 듣기도 하고, 음악을 듣습니다. 동영상을 다 보면 유튜버들이 ‘좋아요와 구독’을 눌러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이 눌러주신 좋아요와 구독은 더 좋은 영상을 올리는데 도움이 됩니다.” 저도 마음에 드는 영상물이 있으면 좋아요를 누르곤 합니다. 잠깐의 관심이 모이면 몇 백만, 몇 천만이 되기도 합니다. 민주주의는 깨어있는 시민들의 선택으로 이루어집니다.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가 있으면 부정과 부패가 자라지 못합니다. 깨어있는 시민이 깨어있는 지도자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도 있습니다. “한 나라의 민주주의의 수준은 그 나라 사람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에 따라서 정해집니다.” 코로나19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의 방역 수준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깨어있는 국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입니다. 사회적인 거리두기를 지키고, 마스크를 착용하고, 의심증상이 있으면 즉시 검사를 받고, 자가 격리를 하는 것입니다. 정부의 방역 대책과 국민들의 참여가 함께하면 코로나19의 확산을 막을 수 있고, 피해를 줄일 수 있습니다.
지난 예수 승천 대축일이었습니다. 교회는 그날을 홍보주일로 정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병자를 고쳐주고, 마귀를 쫓아내라고 사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코로나19로 홍보를 다닐 수 없었습니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을 통해서 신문 홍보를 하였고, 구독을 부탁하였습니다. 감사하게도 많은 분들이 함께 해 주셨습니다. 이름, 주소, 전화번호를 보내는 것이 귀찮을 수 있습니다. 구독료를 내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신문구독을 신청해 주셨고, 후원금도 보내 주셨습니다. 기도해 주시고, 함께 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저희 신문사는 신협과 거래를 합니다. 가깝기도 하고, 광고주이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신협이기에 가능한 범위에서 편의를 봐주기도 합니다. 신협의 정신은 ‘일인은 만인을 위해서, 만인은 일인을 위해서’입니다. 상부상조의 정신으로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신협의 정신은 초대교회의 신앙생활과 비슷합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가진 것을 서로 나누었고, 가난한 이들을 먼저 도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셨고, 그분의 십자가와 죽음으로 우리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인 성녀들의 전구와 우리들의 기도는 연옥에 있는 영혼들에게는 참된 위로와 기쁨이 될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엘리사는 나이가 많은 부부에게 도움을 받았습니다. 부부는 기쁜 마음으로 엘리사에게 먹을 것을 주었고, 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엘리사가 하느님의 일을 하는 예언자였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엘리사는 부부가 원하는 것이 자녀의 축복임을 알았습니다. 엘리사는 내년에는 부부에게 자녀가 생길 것이라고 축복해 주었습니다. ‘적선지가필유여경(積善之家必有餘慶)’이라고 합니다. 좋은 일을 하는 집안에는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노부부의 선행은 그렇게 바라던 자녀의 축복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와이에서 사는 젊은이가 사제관으로 먹을 것을 보내왔습니다. 이곳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지만 지금은 하와이에서 일을 한다고 합니다. 신부님들을 위한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 젊은이를 보지 못했지만 좋은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있는 신문사에도 도움을 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문 앞에 마스크를 놓고 가셨습니다. 어떤 분은 과일과 음식을 놓고 가셨습니다. 밤하늘이 아름다운 것은 어두운 우주가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어두운 우주를 비추는 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나눔의 빛을, 희망의 빛을, 사랑의 빛을 비추는 아름다운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선행을 넘어 희생과 봉사를 이야기 하십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뜻하지 않은 사고, 질병, 어려움의 십자가 상황에서 ‘그렇습니다.’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이외로 많습니다. 딸을 교통사고 잃어버리고 불쌍한 어린이를 돌보는 데 전 생애를 바치는 아버지, 민주화를 외치다 죽어간 아들을 대신하는 어머니, 그 모습들은 십자가를 지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해줍니다.
하느님은 십자가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시지는 않는지 생각해 봅니다. 그 십자가는 하늘을 쳐다보며 찾는 것도 아니고 바라만 보는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는 짊어지는 것입니다. 나의 삶 안에 받아들여 주님처럼 등에 짊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삶 안에 받아들이는 사람은 비록 시작은 작을지라도 가정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조욱현신부-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존재이다. 그러므로 어떤 면에서 인간은 눈에 보이는 하느님이다. 그러기에 모든 인간은 다 하느님과 만남의 ‘기회’요 ‘장소’이다.
제1독서: 2열왕 4,8-11.14-16a: 엘리사와 수넴의 여인
‘나그네 대접’에는 인간적 차원 외에 ‘거룩한’ 차원이 내포되어 있다. 수넴의 여인은 그 점을 확언하고 있다. “틀림없이 우리 집에 늘 들르시는 이분은 거룩한 하느님의 사람입니다”(9절). 그 여인은 엘리사를 극진히 대접하였고, 하느님께서는 아기를 낳지 못하는 그녀가 아들을 갖게 보답해 주셨다. 나그네 대접은 그것을 받지 못하면 죽을 수도 있으므로 생명의 행위이다.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생명’을 ‘나그네 대접’에 대한 보상으로 주시고 계시다. 이제 ‘신앙’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는 나그네 대접은 우리가 하느님 말씀의 선포자가 되게 해줄 것이다.
복음: 마태 10,37-42: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이다
지난 주일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박해 때문에 두려움을 느낄 것이라고 하시며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다. 두려워한다는 것은 온 힘을 다하여 고백하여야 할 자신의 신앙을 감추고 싶어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오늘 복음에서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 있어서 장애가 되면 끊어버려야 할 것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제자’에게는 그리스도만이 ‘절대적 가치’이기 때문에 나머지 모든 것은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광신적 행위의 차원이 아니라, 영적이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차원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38절). 또한, 그분을 따르고자 한다면, 십자가를 감수해야 한다.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하느님과 진리에 충실하신 그분 존재의 본질적 차원이었다. 즉 하느님 아버지의 뜻과 형제들을 위해 행동하셨던, 그래서 당신 자신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역시 이렇게 살아야 한다. 그분의 길을 철저히 따라야 하기 때문이며, 생존을 위한 타협이나 자신의 취향에 따라 행동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 말씀의 힘을 저하하기 때문이다.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이며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사람이다”(40절).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사도들에게 행하는 것이 곧 당신에게 행하는 것이라고 하신다. 물론 파견받은 자와 파견하신 분은 다르다. 사도들을 ‘맞아들임으로써’ 복음선포를 돕는 사람은 복음선포 그 자체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로 맞아들이는 사람은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며...그가 내 제자라고 하여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그 상을 받을 것이다.”(41-42절).
여기서 ‘맞아들인다.’라는 말은 물질적 차원에서의 ‘맞아들이기’ 즉 수넴의 여인이 예언자 엘리사에게 했던 것과 같이 복음을 전하는 자에 대한 ‘나그네 대접’의 의미이기도 하다. 즉 물질적 의미 외에 ‘신앙을 통해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또 하느님의 도구로 봉사하는 사람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예언자’는 예언자로 인정을 받게 되고 ‘옳은 사람’은 옳은 사람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그러기에 사도로 파견받지 못했지만, 사도들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교회는 이렇게 ‘사도적’인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언자’, ‘옳은 사람’, ‘보잘것없는 사람들’(41-42절)은 모두 복음 선포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구약성서의 ‘예언자들’과 연결된다. 그리고 복음을 선포하는 데 있어서 요구되는 ‘성덕’의 의무를 강조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들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맡기신 복음선포 사명이다. 자신은 죽임을 당한다 해도 그리스도께서는 승리하셔야 한다. 즉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 우리에게 요구되는 철저한 자기 포기이다.
제2독서: 로마 6,3-4.8-11: 세례를 받고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게 되었다
바오로 사도는 이 점에 대해서 세례를 통하여 설명하고 있다. 세례성사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묻힘’에 참여케 함으로써 ‘부활’에 참여케 해준다. 십자가는 십자가로만 남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 신자의 죽음과 생명 두 순간이 동시적(同時的)으로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우리 안에서는 죽음과 생명이, 선과 악이, 하느님의 뜻과 세상이 원하는 것이 끝없는 투쟁을 벌일 것이다. 이 투쟁이 우리에게 매일의 십자가로 나타날 것이다. 이 투쟁에서 갈등을 겪어야 하는 나 자신이 바로 나의 십자가이다. 그래서 복음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루카 9,23).
우리는 모두 우리의 십자가를 통하여 복음을 선포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더라도 복음 선포자들에게 협조함으로써, 그들이 더욱 복음을 선포하는데 잘할 수 있도록 한다면 우리는 그들과 같은 상을 받게 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선포하는데 장애가 되는 것을 하나하나 없애면서 절대가치이신 그리스도를 선택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삶이 될 때, 우리의 삶도, 이 사회도 아름답게 변화되어 갈 것이다.
-김기현신부-
오늘 복음 마지막에 보면. ‘시원한 물 한 잔’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 단어를 보면서 어제 있었던 기분 좋은 느낌의 일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강화도에 들어와서 지낸지 이주 정도가 됩니다. 그런데 가까운 곳에 예전에 제가 있던 섬 본당 출신 수녀님 두 분이 일하고 계셨습니다. 그저께 알게 되어서 찾아뵙게 되었는데요. 연락도 없이 찾아갔는데 반갑게 맞이해 주시고 시원한 매실차와 과일을 주셨습니다. 그와 더불어 좋은 이야기도 많이 해 주시고, 가까운데 있으니 일하러 오라는 부담감도 조금(?)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는데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인정, 칭찬의 말들을 많이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중국에서 조금 갈증을 느낀 것 중의 하나가 인정, 칭찬, 격려, 지지의 말들인데요. 어제 그 갈증이 해소된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좋아졌던 것 같습니다. 수녀님 말고도, 요즘 주위에 신부님들, 전 본당 신자 분들을 통해서 그러한 갈증이 채워지고 해소되는 느낌이 참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예전에도 그 비슷한 느낌의 체험들이 몇 가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국에 있을 때 아는 것도 없고, 어떤 일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막막함이 있을 때 선교하시는 신부님들, 수녀님들을 많이 찾아뵙고 머물렀던 적이 있습니다. 갑자기 전화를 드리고 방문을 했었는데요. 대부분의 신부님, 수녀님들이 낯선 저를 반갑게 맞이해 주시고 이러저러한 일들을 많이 보여주셨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보여주기 어려운 부분들도 있고 귀찮은 일이 될 수도 있을 텐데, 대부분의 분들이 배려해 주셔서 저의 궁금증이나 어려움들을 해소시켜주셨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전에 제가 시골에 있을 때 공소를 지어야 했는데, 그 때도 모금을 나가기에 앞서 평소에 다니지도 않고 인사도 하지 않던 내가 찾아가면 대부분 싫어하실 거라는 약간의 걱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열악한 시골 본당의 일을 도와주시고, 도움과 관심에 대한 목마름을 해소시켜 주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한 생각들이 지나가면서 교회 공동체 안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갈증을 해소시켜 줄 수 있는 시원한 물 한 잔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예상보다 크고 감사한 도움과 위로의 손길들이 많이 있죠. 그래서 돌아보면 감사할 수 있고, 또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해 나감에 있어서도 부담감이 덜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은 받아 마시는 것만이 아니라, 내가 받아 마신 시원한 물 한 잔을 다른 이에게도 제공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시원한 물 한 잔’이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듯이, 그 일은 아주 작으면서도 그 시기 그 장소에서 주어야 하는 적절한 도움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전에 예수회 신부님들이 발행하는 조그만 책자를 많이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여러 수사님들이 여러 나라에서 활동하시고 일하시는 체험에 관한 내용이었는데요. 읽으면서 비슷한 패턴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부분 일을 시작하실 때는 내가 능력도 없고, 아직 충분하게 배우지 못했고, 가진 것도 많지 않은데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하는 망설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수사님들이 깨달은 것은 먼 미래에 더 많이 가지고 배워서 줄 수 있는 건 없다는 겁니다. 자신들이 줄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자리에서 줄 수 있는 작은 것이라는 깨달음이 있었고, 작은 일들을 수행해 나가시고 열매를 맺으시는데요.
우리의 일도 마찬가지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줄 수 있는 작은 것이 중요합니다. 그 일이 나에게는 작아 보일지라도 누군가에게는 가야 할 길을 계속 걷게 해 주는 시원한 물 한 잔이 될 수 있고, 그러한 도움들이 모이면 더 큰 일들을 만들어 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 공동체 안에서 내가 받아 마신 시원한 물 한 잔과 또 내가 줄 수 있는 시원한 물 한 잔을 생각해 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강론할 때 약간은 부담스럽고 떨리는 자리가 있다.
신부님들과 수녀님들 앞에서 강론 할 때인데,
요즘 하나 더 있다는 걸 느낀다.
이상하게 성지에서 강론하면 약간은 부담스럽고 떨린다.^^;
-오상선신부-
오늘 주일미사의 말씀은 하느님의 사랑받는 사람으로서 우리가 타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보여 줍니다.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
주님을 사랑하고 따르는 우리로서는 사실 가슴이 서늘해지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께 합당하지 않다면 나름 애쓰며 걸어온 신앙 여정이 다 헛것이었나 허탈해지지요.
예수님은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보다 당신이 더 사랑받길 바라십니다. 그렇다고 당신이 모든 사랑을 다 독점하시겠다는 욕심은 아니지요.
"받아들이는 이"(마태 10,40-41)
여러 차례 반복되는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 봅니다. 사도들을 받아들이면 예수님을,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거라고 하시네요. 또 예언자와 의인을 받아들이는 이는 그들이 받은 보상까지 받는다고 하시니 과연 받아들임의 공로와 결과가 엄청나다는 걸 알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모든 인간이 기울어지게 마련인 본능적 가족애를 넘어서라고 초대하십니다. 가족을 소홀히 하거나 미워하라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 사랑으로 시야를 확장하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사랑받는 존재로서, 역시 하느님의 귀한 피조물인 모든 사람을 편애와 애착, 차별 없이 존중하고 받아들이라는 권고지요.
이런 보편적 사랑에 눈을 뜨면 가족을 덜 사랑하게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기심과 대리 만족의 도구로 소유물처럼 이용 또는 집착하지 않고 온전한 인격체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가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소유로서 존중과 사랑을 받아 마땅한 고귀한 존재임을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엘리사와 수넴여인의 일화를 다룹니다.
"이분은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이 틀림없습니다"(2열왕 4,9).
여인은 엘리사에게서 하느님의 기운을 감지하고 먼저 청을 합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을 알아보는 그녀의 눈이 놀랍지요 그녀는 엘리사에게서 하느님과의 연결고리와 거룩한 분위기를 알아채고 사심 없는 헌신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녀의 봉헌을 기억하시지요.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다시 한 번 일깨웁니다.
"여러분 자신도 죄에서 죽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로마 6,11).
사랑하는 벗님! 나를 포함해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이고, 특별히 세례를 통해 죄에 죽고 새 생명을 얻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숨 쉬고 살아갑니다. 저마다 드러나는 지향은 제각각으로 보일지 몰라도 그 본질은 하느님과 그분 나라지요. 나는 그런 사람입니다! 나뿐 아니라 벗님도, 타인도 그런 사람입니다!
삶의 질곡을 헤치며 살아오느라 우리의 본성적 아름다움은 허물과 죄악, 가면과 변형으로 가리워지거나 일그러져 버렸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서로의 두꺼운 껍질을 뚫고 그 사람 안에 감추어진 하느님 모상성을 발견하는 일이 그리 쉽지만은 않지요.
그래도 우리는 믿기에 그럴 수 있습니다. 내가 귀한 만큼 타인도 귀하고, 내가 거룩한 만큼 타인도 거룩함을 아니까요. 그래서 나를 둘러싼 이들을 하느님 사람으로 받아들이면서 예수님을, 하느님을 모셔들입니다. 게다가 예언자나 의인처럼 처절한 희생적 여정을 걷지 않고도, 그들을 알아보고 받아들이는 자체로 예언자와 의인의 보상을 받게 됩니다. 그러니 말씀을 따르는 삶에서 절대 손해 볼 일은 없습니다. 좀 속된 표현입니다만, 밑지는 장사가 결코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늘, 이 거룩한 주일, 마음의 눈을 크게 뜨고 하느님께서 내게 보내신 거룩한 이가 누구인지 가슴 설레며 찾아보는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그에게 보내는 존경의 눈빛과 미소, 시원한 물 한 잔까지도 하느님께 올라가는 향기로운 예물입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이니까요. 아멘.
오늘은 교황주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위해 기도합니다.
받아 들임에 대하여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65087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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