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 27일 연중 제12주간 토요일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
(마태오 8,5-17)
"Lord, I am not worthy to have you enter under my roof;
only say the word and my servant will be heale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한재호신부-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어떤 면을 보고 그를 칭찬하셨을까요? 백인대장이 예수님께 건넨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여기서 “상관 밑에 있는 사람”이라는 말을 직역하면 ‘권위 아래에 있는 사람’입니다. 백인대장은 로마 황제의 권위 아래에 있는 사람이었기에 군사들은 백인대장의 말에 순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명령은 곧 로마 황제의 권위를 받아서 내리는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병마에게 명령을 내리신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권위를 받아서 내리시는 것이기에 병마까지도 순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컨대 백인대장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권위 아래에 계신 분’으로 고백하였기에 칭찬을 받은 것입니다. 정녕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권위 아래에 계셨기에, 그분의 가르침에는 권위가 있었고, 마귀들도 그분 말씀에 복종하였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하느님의 권위 아래에 있다는 말에는,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철저히 순종하셨다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순종하지 않았다면 하느님의 권위 위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권위 아래에 머무르기를 바라셨기에 만나는 병자마다 기꺼이 그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사실 병자들을 고칠수록 유다인 지도자들에게 증오를 사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분께서는 온갖 위험을 감수하시고 병자들을 고치시는 일을 마다하지 않으셨고, 그 결과 증오에 가득 찬 지도자들에 의하여 십자가에서 목숨을 바치시게 됩니다. 이사야의 말대로 “우리의 병고를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시면서 하느님의 권위 아래에서 순종하신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돈이 생기면 행복하겠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어떻게 되어야 행복할까요? 당연히 돈이 생겨야 할 것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순간의 행복 체험을 하겠지만, 금세 사라지고 말 행복이고 때로는 행복이 아닌 불행의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결핍이 채워졌을 때 행복해질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그렇다면 앞서 돈에 대한 결핍이 있는 사람을 떠올려 보십시오. 이 사람이 자신의 마음에 쏙 드는 여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이 여인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 너무나 좋았습니다. 어느 날, 사랑하는 여인의 생일이 찾아왔습니다. 돈에 대한 결핍이 있는 이 사람은 생일 선물을 할까요? 하지 않을까요?
아마 사랑하기 때문에 돈에 상관없는 선물을 고를 것입니다. 그리고 행복해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기뻐하는 것에 더 큰 행복을 얻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결핍이 오히려 줄어드는 상황인데도 행복해합니다. 맞습니다. 결핍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을 선택했을 때 행복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지가 명확해집니다. ‘좋음’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세상의 것을 강조하지 않고 왜 ‘사랑’을 강조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의 것은 ‘결핍’을 계속해서 만드는 것이고, ‘사랑’은 그 결핍을 뛰어넘어 ‘좋음’을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핍’이 아닌 ‘좋음’을 바라보고 쫓아가는 것이 행복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백인대장의 믿음과 겸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의 결핍은 사랑하는 종의 아픔이었습니다. 따라서 종이 낫는 것이 그의 결핍을 채우는 것이겠지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위라면 충분히 예수님을 자기 집에 데려다 종을 고칠 수 있도록 명령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종의 치유라는 자신의 결핍만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이상의 것을, 주님께 대한 믿음과 겸손이라는 ‘좋음’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과 겸손이 선조들과 하늘나라 잔칫상에 자리 잡을 수 있게 되었으며, 실제로 믿은 대로 그의 종이 나았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 그 이상의 것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결핍을 채우는 것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보시기에도 합당한 ‘좋음’을 바라보고 찾을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내가 원하는 것 그 이상의 것을 주님을 통해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신념을 가진 사람 한 명의 힘은 관심만 가지고 있는 사람 아흔 아홉 명의 힘과 같다(존 스튜어트 밀).
제가 아니까요.
코로나 19로 인해 요양병원에 계신 아버지를 찾아뵐 수가 없었습니다. 그전에는 매주 함께 미사를 하면서 만났는데, 2월부터 혹시라도 모를 전염 때문에 전면적인 면회 금지가 되었고 그래서 오랫동안 만날 수가 없습니다.
사실 아버지는 몇 차례의 수술로 인해서 치매 환자가 되셨습니다. 제가 누군지 어느 때는 알아보다가도 또 어느 때는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바라보십니다. 그래도 매주 미사를 함께 해서 ‘마태오 신부’라고 말씀하셨는데, 오랫동안 보지 못해서 그런지 영상 통화를 해도 누군지를 알아보지 못하십니다.
이런 안타까움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니, 이렇게 알아보지 못하시니 찾아가는 것도 의미 없어 보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저를 알아보지 못해도 저는 아버지를 알아보기 때문에 찾아가는 것입니다. 단지 나를 몰라본다고, 전혀 상관없는 사이가 되는 것이 아니지요.
우리는 하느님을 외면할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며 하느님의 뜻을 모른 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우리의 모습에도 하느님은 우리를 알아보시고 또 늘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이 하느님의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힘을 내서 다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비유는 진리에 이르는 사다리다
-전삼용신부-
얼마 전 후배 신부님이 상담하고 싶다고 하여 찾아왔습니다. 사제로서 후배 신부가 찾아올 사람이 되었다는 것에 감사했습니다. 이야기하던 중 강론에 대해서도 말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강론을 잘 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대해 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예화를 써!”라고 말했습니다.
자칫 강론에 예화를 사용하면 수준이 낮은 것처럼 인식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비유를 통하지 않고서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말은 세상 모든 것들 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려는 진리가 들어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다는 뜻은 그렇게 비유가 당신 진리로 올라오는 사다리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며칠이 지난 뒤 그 신부님이 자신도 비유를 통해 강론하기 시작하였다는 문자를 저에게 보냈습니다. 저는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프란츠 카프카는 ‘변신’과 같은 작품을 쓴 위대한 소설가입니다. 그런데 그는 어릴 때부터 유약하고 예민하여 일을 끝까지 해내는 적이 없었습니다. 사업가인 부모는 대학을 졸업하고 2년이 지나도 취직을 하지 못하는 카프카를 실패자로 낙인찍었습니다.
도시에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믿은 카프카는 시골로 내려가 조부와 함께 농사를 짓기로 합니다.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조부는 카프카를 데리고 사과농장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사과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첫 번째 사과나무 앞에 서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 나무는 내가 6년 전에 심었는데 줄기가 부러지더니 가지도 부러져 쓸모없게 되어버렸단다.”
그리고 두 번째 사과나무 앞에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나무는 심은 지 1년 뒤에 가지치기를 해 주었지. 그랬더니 3년 뒤에 맛있는 열매를 맺었는데, 가지치기를 너무 많이 해서인지 작년엔 싹도 트지 않고 말라 죽었어.”
세 번째 나무 앞에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나무는 두 번째 나무와 같은 과정을 거쳤는데 끝까지 살아남았어. 자신이 가진 모든 에너지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데 쓴 거지. 이젠 잎도 무성하고 가지도 튼튼해져서 열매가 주렁주렁 열린단다.”
조부는 이 세 나무를 보여주고는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인간도 이 세 사과나무와 같단다. 어떤 사람은 아무 의욕도 없지. 처음부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남아. 그러면서 환경이나 남의 탓만 한단다. 어떤 사람은 열심히는 살아. 그러나 목표가 없어. 그래서 적당히 열매 맺다가 죽고 말지. 그러나 네 안에는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좋은 열매를 맺을 아주 좋은 것들이 많아. 그것들을 밖으로 끄집어내어 좋은 열매를 맺어야지. 그것이 네가 끝까지 건강하고 왕성하게 살 수 있는 길이란다.”
[참조: ‘인생에 한 번은 유대인처럼’, 자오모, 자오레이, 유튜브 ‘책한 민국’]
할아버지의 비유를 통한 이 한 번의 교육은 부모가 이십 년 넘게 가르친 것보다 큰 교육이 되었고 카프카의 삶을 바꾸어놓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비유가 이렇게 강력한 힘을 갖는 이유는 세상을 하느님께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마치 음식 안에 보이지 않는 소금의 짠맛이 다 배어있는 것처럼 세상 모든 것들 안에는 하느님의 진리가 녹아있습니다. 소금만 먹으면 짜서 감당할 수 없겠지만, 세상 것들과 곁들여 받아들이면 진리의 맛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실 때도 비유로만 설명하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종의 병을 고쳐달라고 청한 백인대장에게 예수님께서 이런 엄청난 칭찬을 해 주십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도대체 하느님도 알지 못하는 로마 사람이 어떻게 그런 큰 믿음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비유를 통해 진리에 다다르는 법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다른 이들은 주님께서 자신들의 집으로 찾아와 고쳐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것을 묵상하다 보니 예수님께서 굳이 자신의 집에 오시지 않아도 기적을 행하실 수 있는 분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무작정 공부만 하는 것보다 비유를 통해 진리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이렇게 좋은 결과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자녀가 지치고 절망하여 더는 버틸 수 없는 큰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 유태인들은 이렇게 교육한다고 합니다. 자녀를 조금 높은 울타리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가 아끼는 모자를 벗겨 그 울타리 너머로 던집니다. 그러면 자녀는 어떻게 해서든 그 모자를 찾아옵니다. 그리고 무언가 깨닫습니다.
우리도 자녀에게 많은 옳은 이야기를 직설적으로 하기보다는, 이런 비유와 체험을 통해 가르쳐보는 것은 어떨까요? ‘비유’는 진리에 다다르는 사다리이고, 소통의 다리입니다.
-조재형신부-
코로나19 이후의 세상에 대한 담론이 있습니다. 인류는 평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평화는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고, 굶주리지 않고, 병마에 시달리지 않고,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잃지 않고 사는 것이 평화입니다. 이방인이라고 해서 차별 받지 않고, 피부색으로 인해 차별 받지 않고, 성별이 다르다고 차별 받지 않고, 나이로 인해 차별 받지 않는 세상이 되어야 합니다. 물과 공기는 모두에게 주어지듯이, 백신과 치료제가 만들어지면 모두에게 주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바이러스는 국경도 없음을 보았습니다. 바이러스는 부유한 나라나, 가난한 나라나 가리지 않고 퍼지는 걸 보았습니다. 20세기가 전쟁과 냉전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평화와 연대의 시대가 되어야 합니다.
재난 기본소득 지급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해서 미국은 실업자가 사천만 명이 넘었습니다. 가족을 생각하면 1억 명이 넘는 사람이 실업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은 다른 나라도 큰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이동이 제한되면서 소비가 위축되었고, 유통이 멈추면서, 생산이 줄어들었습니다. 이는 대량실업으로 이어집니다. 사람은 일자리가 없어도 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국민들이 낸 세금은 이런 상황에서는 국민들에게 직접 전해져야 합니다. 이는 세금을 퍼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세금을 낭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금을 낸 국민들이 받아야 할 당연한 권리입니다. 미국도 국민들에게 재난 기본소득을 지급하였습니다. 한국도 전 국민에게 재난 기본소득을 지급하였습니다. 이는 소비를 촉진시키고, 유통과 생산을 유발하면서 경제에도 좋은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공권력의 부당한 행사로 인해서 무고한 사람이 희생당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건의 경위는 이렇습니다. 20달러 위조지폐가 마트에서 사용되었습니다. 마트 주인은 경찰에 신고하였고, 경찰은 위조지폐를 사용한 사람을 연행하였습니다. 경찰은 수갑을 채웠고, 반항하지 않던 사람의 목을 무릎으로 눌렀습니다. 그 시간이 8분이 넘었고, 숨을 쉴 수 없는 사람이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공권력을 부당하게 행사한 사람은 백인이었고, 억울하게 사망한 사람은 흑인이었습니다. 경찰에 대한 처벌이 약하자, 시위와 데모가 일어났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21세기가 시작되었지만 아직까지 20세기의 잘못된 사고를 가진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공권력은 시민에 대해 봉사하는데 사용되어야 하는데, 공권력을 시민을 억압하는 권력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인종차별에 대한 구시대의 악습이 아직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백인대장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힘을 자신이 데리고 있는 종을 위해서 사용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찾아갔고, 예수님께 부탁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십시오. 제 종은 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였습니다. 백인대장의 믿음은 종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종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참된 평화를 이야기하셨습니다. 유대인에게만 속하는 평화가 아니었습니다. 이방인인 백인대장의 종에게도 주어지는 평화입니다. 죄인으로 여겨지던 나병환자에게도 주어지는 평화입니다. 부정한 사람으로 여겨지던 하혈하던 여인에게도 주어지는 평화입니다. 열병으로 누워있던 시몬의 장모에게도 주어지는 평화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나라입니다.
“나의 딸 백성이 파멸하고 도시의 광장에서 아이들과 젖먹이들이 죽어 가는 것을 보고 있자니 내 눈은 눈물로 멀어져 가고 내 속은 들끓으며 내 애간장은 땅바닥에 쏟아지는구나. 억눌린 이가 수치를 느끼며 돌아가게 하지 마시고, 가련한 이와 불쌍한 이가 당신 이름을 찬양하게 하소서.”
백인대장의 단순하고 순수한 무사(武士)적 태도!
-양승국신부-
이스라엘 민족은 신앙에 살고 신앙에 죽는 신앙의 민족이었습니다. 하느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든 것이었습니다. 하느님 말씀은 곧 법이었고, 지혜였고, 국가적 희망의 근거였습니다.
또한 하느님 말씀은 백성들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삶의 기초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명을 불어 놓어주는 힘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느님의 말씀과 신앙 안에서 성장해왔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중요한 이스라엘의 신앙은 세월이 흐르면서 고착화된 틀안에 갇혀버리게 되었습니다. 신앙은 성장이 가로막힌 율법과 성전과 예식 안에서 빛을 바래기 시작했고, 퇴보일로를 걷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하느님과 가장 가까이 있다는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던 이스라엘 민족은 아이러니하게도 하느님과 가장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사제들에게 있어 신앙은 일종의 생존 방식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율법학자들에게 있어 신앙은 오만과 논쟁의 도구였습니다. 바리사이들에게 있어 신앙은 거드름 피우고 잘난체 하는 구실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은 그릇된 지도자들에게 너무 종속되어 있어, 어떤 것이 참된 신앙이요, 어떤 것이 그릇된 신앙인지 분간하는 식별력을 상실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앙은 그저 현세적·육체적 보호를 받는 피난처가 되고 말았습니다.
신앙이 살아계신 주님과의 생생한 만남이 되지 못했습니다. 신앙이 사랑이신 주님과의 인격적 만남이라는 진리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신앙이 구원이신 주님으로부터의 은혜롭고 과분한 초대라는 사실도 알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조금씩 조금씩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능력을 상실해갔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등장하셔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르셨을 때, 그들은 이미 은혜로운 초대의 음성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진리를 향한 귀를 닫아버렸기에, 불순명으로 인한 영적인 나병에 걸리고 만것입니다.
그러나 백인대장의 태도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선택된 민족 이스라엘 백성의 일원이 아니라 ‘제외된 자’ ‘소외된 자’라는 것을 잘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백인대장을 한없이 겸손하게 자신을 낮춥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간절히 청합니다. 그는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이스라엘의 그 어떤 신앙인들보다도 진실된 신앙, 깊은 신앙을 지니고 있었고, 거기에 더해 따뜻하고 자상한 마음, 깊은 인간미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오 복음 8장 6~8절)
주님은 인간의 비위를 맞추려고 인간에게 접근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백인대장의 겸손한 말처럼, 인간이 자신의 집을 떠나 주님께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가 교회 안에 있으면서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단죄하지만, 그들이 오히려 내적으로는 교회 안에 속하고, 우리가 오히려 교회 밖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백인대장의 단순하고 순수한 무사(武士)적 태도는 매일 우리가 봉헌하는 미사 때마다 되풀이되며 우리의 정신을 환기시키고 있습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치유되는 순간은 우리 스스로 자신의 병세를 자각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스스로의 상태를 고백할 때입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8,5-17: 백인대장의 종, 베드로 장모의 치유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백인대장의 종과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해주신다. 백인대장은 자기 종을 데려오지 않았다. 이것을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내고 환자를 예수님 앞으로 내려 보낸(루카 5,19 참조) 일보다 더 큰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백인대장은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면 종이 일어나고도 남는다고 확신했기에 종을 데려올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가서 그를 고쳐주마.”(7절) 예수님은 종을 치유해 주시는 것은 물론이고 그의 집으로 가시겠다고 하신다. 이 말씀 때문에 우리는 백인대장의 훌륭한 믿음을 알게 되었다. 백인대장은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8절)라고 대답하였다. 이러한 믿음이 예수님을 감동시켰고 한 인간에 대한 백인대장의 관심과 사랑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 요구를 기꺼이 들어주시도록 하였다.
백인대장은 자신을 자격 없는 사람으로 여김으로써 그리스도를 자신의 집뿐 아니라 마음에도 모실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자임을 보여 준다. 그가 그의 집에 들어오신 분을 마음으로도 이미 맞아들이지 않았다면 그런 큰 믿음과 겸손을 보여주는 말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집에 가시겠다는 것은 단순히 그의 집이 아니라, 그의 마음 안에 들어가시겠다는 뜻이다.
백인대장은 상관이 있고 부하들이 있어서 마음대로 움직인다고 하면서 하느님께로부터 권한을 받으신 분이 이런 일을 하시는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한다. 예수께서는 백인대장의 모습에 감탄하신다. 종에 대한 백인대장의 사랑은 예수님께서 고통 받고 소외된 사람들, 특히 병자들과 죄인들에 대해 가지신 사랑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신이 가지고 계신 사랑을 가지고 자기 종을 위하여 이방인인 예수님을 찾아온 그에게 그의 믿음을 보실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백인대장과 같은 많은 사람이 사방에서 모여와 하늘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것이라고 하시면서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들은 바깥 어둠 속으로 쫓겨날 것이라고 하신다. 바로 백인대장을 칭찬하시는 말씀이다. 그리고는 백인대장에게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종이 나았다. (13절)
또한,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해주시고 다른 많은 병자도 치유해주셨다. 많은 일 속에서 피곤하셨겠지만, 당신께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을 거절하지 않으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도움을 구하는 사람이 있는 한 예수님의 사랑의 손길이 쉴 틈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그 사랑을 우리도 실천하여야 하며, 그분께 은총을 받았으면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을 위한 봉사로 이어져야 한다. “부인은 일어나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15절)라고 하고 있다. 사랑과 봉사의 가르침을 따르자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저는 제1독서가 묻고 복음이 답하는 모양새를 봅니다.
"처녀 딸 시온아, 너를 무엇에다 견주며 위로하리오? ... 누가 너를 낫게 하리오?"(애가 2,13)
애가는 이방 민족의 침입으로 무너진 도성의 절규와 탄식을 들려줍니다. 침략 전쟁으로 온 민족이 실의와 절망에 빠지지요. 장정들은 칼에 맞아 죽고 젖먹이들은 굶어 죽고 여인들은 유린당해 죽고 패전국의 신은 조롱당하다 무너진 성전과 함께 자취를 감춥니다.
이 기막힌 고통과 환난은 과거의 역사적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우리 삶 곳곳에서 터져나옵니다. 사고와 실직, 병고와 죽음, 이별과 증오, 테러와 전쟁 등 애가의 애간장을 끊는 듯한 탄식은 더 이상 패망한 이스라엘만의 것이 아니지요. 그러니 위의 저 질문 역시 그들만의 질문이 아니고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지요.
"바로 그 시간에 종이 나았다"(마태 8,13).
"당신 손을 대시니 ... 열이 가셨다"(마태 8,15).
"악령들을 쫓아내시고 앓는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마태 8,16).
이렇게 삶의 벼랑 끝에 몰렸던 이들이 구원을 체험합니다. 구마와 치유는 육체적 상태의 호전된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관계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 이웃과의 관계 회복,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 회복입니다.
주님께서 내리신 징벌로 '시들어가던 백성'(애가 2,2 참조)이 강생하신 주님의 자비로 되살아납니다. '누가 너를 위로하고 낫게 하랴?'는 한탄 섞인 질문에 보내는 응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구약 백성의 눈물에는 사실 '민족주의'가 짙게 드리워져 있지요. 예수님은 이방인 백인 대장의 믿음을 들어 이 우월주의적 폐쇄성을 지적하십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들은 바깥 어둠 속으로 쫓겨나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8,10.12).
구약 이스라엘이 "우리"라고 여겼던 견고한 민족주의적 울타리는 예수님을 통해 개방되고 확장됩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는 이스라엘 핏줄이건 아니건 구원의 대상입니다. 구원받을 수 있는 조건은 족보에 달려 있지 않고 삶의 질곡과 고통을 껴안고 살아가며 믿음에 희망을 두는 모든 인간 실존에 근거합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 나을 것입니다"(마태 8,8).
군대의 위계 안에서 명령과 복종을 배운 백인대장은 말씀과 순명과 이루어짐의 메카니즘을 누구보다 깊이 통찰한 듯합니다. 우리도 매 미사 때, 영성체를 준비하며 이 고백을 되풀이하지요. 한 이방인의 믿음의 고백이 오늘 우리의 믿음을 재촉하고 일깨웁니다.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마태 8,13).
예수님께서 그 믿음에 응답하십니다. 율법과 선민사상에 사로잡힌 이스라엘이 놓친 믿음이고, 먼 발치서 진리를 목도한 이가 겸손히 선택한 믿음입니다. 사실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이 말씀을 해주고 싶어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루어짐의 전제는 믿음이지요. 믿음은 주님의 은총과 우리의 결단이 일으키는 불꽃이라 감히 이름해 봅니다.
사랑하는 벗님!
벗님은 우리가 구원이 필요한 존재임을 믿지요? 또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는 분이심을 믿지요? 비록 우리의 이 믿음이 아직 부족하고 미흡하지만, 믿은 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실망하지 말고 믿음의 길을 꿋꿋하게 한걸음씩 걸어갑시다. 믿음의 여정의 동반자인 벗님을 축복합니다.
우리의 사랑이 주님을 통하면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64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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