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 19일 금요일 예수 성심 대축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마태오 11, 25-30)
Take my yoke upon you and learn from me,
for I am meek and humble of heart;
and you will find rest for yourselves.
For my yoke is easy,
and my burden ligh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한재호신부-
신학교에서 사제가 되기를 꿈꾸는 학생들을 양성하면서 답답할 때가 가끔 있습니다. 그런데 수도원에서 양성을 담당하는 수녀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분들도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또 자녀를 둔 부모들은 철없는 자식들 때문에 한숨을 쉬기도 합니다. 본디 가르치고 기르는 처지에서는 배우는 이들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법이겠지요. 그래서 학생들이 스스로 깨치고 성숙해질 때까지 좀 더 기다려 주려고 애를 씁니다. 열두 제자들과 함께 지내셨던 예수님께서도 크게 다르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그분께서도 제자들을 ‘철부지’라고 부르고 계시니 말입니다.
사실 복음서에는 제자들의 철없는 모습이 자주 나옵니다. 마귀를 쫓는 권한을 가지고 있지만 믿음이 부족하여 악령에 시달리는 아이를 구하지 못합니다. 제자들 사이에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를 두고 논쟁을 하는가 하면, 야고보와 요한은 출세할 생각에 예수님께 영광의 자리 옆에 있게 해 달라고 청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이런 철부지 제자들을 두고 오늘 예수님께서 보이신 모습은 놀랍습니다. 한탄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고 계시니 말입니다. 왜 그러실까요? 지혜롭다는 자들,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드러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인간적인 지혜는 오히려 장애가 될 뿐입니다. 비록 철없고 부족하지만 연약한 모습 그대로 하느님 앞에 자신을 드러낼 때 그분의 권능이 그 사람 안에서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는 정녕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2코린 12,9)해야 할 철부지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바로 위의 형과 저의 나이 차이는 네 살입니다. 그러다 보니 같이 놀 일이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형이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학교에 들어가기 전의 저는 늘 혼자일 수밖에 없었습니다(저는 유치원을 다니지 않았습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지요. 하교 시간의 차이로 인해서 집에 오면 늘 혼자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집 근처에 다른 집이 없어서 친구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많이 외로웠을까요?
아닙니다. 혼자서도 놀 것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넓은 마당을 혼자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만지면서 놀았습니다. 집 안에서도 제 호기심을 채워주는 것이 많아서 혼자 있어도 즐거웠습니다.
아이들은 호기심이 많습니다. “이게 뭐예요?” 하면서 묻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호기심이 많으면 외로울 수 없고 그래서 매 순간 즐겁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서 호기심을 잃어버립니다. 호기심을 일으키는 질문을 더는 하지 않으면서 그러려니 합니다. 어쩌면 호기심은 미래를 바라보는 희망이고, 기쁘게 지금을 사는 지혜가 아닐까요?
우리의 주님께 대한 호기심은 어떤가요? 이 호기심을 가지고 주님을 알아가면서 희망을 품고 지금을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 대한 호기심 없이 ‘그러려니’ 합니다. 또 ‘이럴 거야’ 하면서 자신의 틀에 주님을 가둬버리기도 합니다. 그 결과 주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주님 안에서 희망과 기쁨도 찾지 못합니다. 어린이와 같은 이가 하늘나라를 차지할 것이라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바치십니다. 그 내용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 안에서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의 지혜와 슬기로 하느님의 선하신 뜻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 지혜는 단지 지혜처럼 보이는 것을 지녔을 뿐이라고 하시지요. 그에 반해 악에 물들지 않은 사도들을 철부지라고 표현하십니다. 나이가 어려 철부지일까요? 아닙니다. 죄와 사악함에서 철부지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악에 물들지 않는 순박한 사람들에게 당신을 알려 주심으로써 하느님의 은총을 환하게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주님께 대한 호기심 없이 ‘그러려니’ 하지 않으며, ‘이럴 거야’ 하면서 자신의 틀 안에 주님을 가두지 않습니다. 철저히 주님께 의지하면서 주님을 알기 위해 계속된 질문을 던집니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공경하며 그 마음을 본받고자 하는 날이지요. 이 마음을 본받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앞서 말씀드린 악에 물들지 않는 순박한 모습, 호기심을 갖고 주님을 알려고 노력하는 모습, 자신의 틀에 주님을 가두지 않는 모습을 통해서만이 주님 마음을 본받을 수 있습니다.
인생은 겸손에 대한 오랜 수업이다(제임스 M.배리).
나는 겸손하니 내게서 배워라(아우구스티누스, 설교집 중에서)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당신에게서 세상을 건설하는 법,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창조하는 법, 기적을 일으키고 죽은 이를 되살리는 법을 배울 것이 아니라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것을 배우라고 합니다.
높이 올라가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밑에서부터 시작하십시오. 웅장한 건물을 세우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바닥에서 터부터 닦으십시오.
이것이 겸손입니다. 아무리 웅장한 건물을 짓고 싶더라도, 크고 높은 건물을 짓고 싶을수록 터를 더 깊게 파야 합니다. 건물은 짓다 보면 높이 올라가지만, 그 건물의 기초를 세우는 사람은 먼저 아주 아래로 내려가야 합니다.
이처럼 건물도 높이 올라가기 전에는 낮으며, 탑은 굴욕을 겪은 뒤에야 올라간다는 사실을 아시겠지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말씀입니다. 성인의 말씀처럼 우리도 겸손을 간직해야 합니다. 그래야 안식을 얻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당신의 멍에가 편하고 그 짐이 가볍다고 하셨습니다.
몸은 편안하나 마음 둘 곳이 없을 때
-전삼용신부-
한 자매님이 저에게 상담한 적이 있습니다. 중년 자매님이었는데 집도 넉넉하게 잘 살고 자녀들도 말썽 안 부리고 성당 잘 다니며 남편도 가정에 충실하고 직장에서도 착실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는 무슨 일로 밤에 혼자 앉아 눈물을 자주 흘린다는 것입니다. 가슴이 허한 것 같은데 원인을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몸과 영혼과 마음’으로 이루어진 복합체입니다. 몸이 편하다고 다 편한 것이 아니고, 정신적으로 걱정할 것이 없다고 해서 다 편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까지 편해야 합니다. 몸은 잠을 자면 되고, 영혼은 자기 생각을 멈추고 주님 말씀 안에 머물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마음을 쉬게 할 수 있는지는 잘 모릅니다. 마음도 쉬게 해 주어야 합니다. 마음도 안식처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몸은 물질로 되어 있어 물질적인 환경에서 쉴 수 있고, 영혼은 정신적이라 정신적인 환경 안에서 쉴 수 있지만, 마음은 영적이라 영적인 관계 안에서만 쉼이 가능합니다. 영은 사랑입니다. 나의 마음은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 안에서만 안식을 누립니다.
영국의 문인 부르크가 미국여행을 떠나게 되었는데 부두에는 전송객으로 많은 사람이 북적거렸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한 전송객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서운함을 느낀 부르크는 부두에서 놀고 있는 한 어린아이에게 “얘야! 내가 네게 6실링을 줄 테니 내가 저 배를 타고 떠날 때 나를 보고 손을 흔들어 주렴”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6실링을 받은 아이는 정말 열심히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부르크는 고백합니다.
“돈 받고 흔드는 손을 보고 나는 더욱 큰 고독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마음은 사랑 안에서만 쉴 수 있습니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 안에서만 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내가 먼저 누군가의 마음을 쉬게 해 주는 마음입니다. 내가 누군가의 마음의 쉼터가 되어주지 못했다면 누구도 나의 쉼터가 되어줄 수 없습니다.
뉴스에서 감동을 주는 사진을 보았습니다. 한 청년이 차 안에서 코로나바이러스로 호흡이 멈춘 할머니를 구 강대 구강 호흡법으로 살리려고 하는 장면이 찍힌 것입니다. 손자는 할머니를 차에 태우고 코로나 검사를 받으려 기다리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그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호흡의 어려움을 겪고 의식을 잃었던 것입니다. 할머니를 모시고 온 손자는 100% 자신도 바이러스에 전염될 것을 알면서도 구강 대 구강 호흡으로 할머니를 살리려고 한 것입니다.
할머니는 그렇게 운명하셨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래도 행복한 죽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자신을 사랑해주는 그런 손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손자가 아무것도 받지 않았는데 그런 사랑을 베풀 줄 알았을까요? 그만큼 할머니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음이 틀림없습니다. 할머니도 손자를 위해 그렇게 할 것을 자신도 알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할머니는 하늘나라에서도 안식을 취하시겠지만, 이미 이 세상에서부터 안식처를 지니신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행복한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안식처는 결국 할머니가 만들어놓으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다른 사람 마음 안에 자신의 안식처를 만들 수 있는지 그 해답을 알려주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예수님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의 스승이셨습니다. 온유함은 사람을 심판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화를 내지 않는 마음입니다. 겸손은 상대를 항상 자신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이고 상대가 더 영광을 받기를 바라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마음을 입으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이 세상에서부터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세우신 교회에서 안식을 누리셨고, 우리는 또한 그렇게 새로 태어나는 영적인 자녀들 안에서 안식을 누립니다. 마음이 지치고 힘들다면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는가, 아니면 화를 내고 심판하는 마음으로 대하는가. 내가 먼저 안식처가 되어주지 않으면 누구도 나에게 마음 쉴 곳을 내어놓지 않습니다.
-조재형신부-
비가 그친 날 오후였습니다. 산책길에 새를 보았습니다. 새는 지렁이 한 마리를 잡았습니다.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았습니다. 새는 지렁이를 몇 토막 냈습니다. 그리고 처마 밑에 있는 둥지로 날아갔습니다. 둥지에는 어미 새를 기다리던 아기 새들이 있었습니다. 어미 새는 토막 낸 지렁이를 남김없이 나눠주었습니다. 우연한 기회였지만 먹이를 주는 어미 새를 직접 보았습니다. 처마 밑에 있는 둥지는 안전해 보였습니다. 비를 맞을 일도 없었습니다. 서남향으로 지어졌습니다. 손도 없는 새가 부리로만 지푸라기와 나뭇가지를 모아 아기 새를 위한 보금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언젠가 아기 새들은 둥지를 나와서 자신들만의 세상으로 날아갈 것입니다. 세상 모든 새는 이렇게 어미 새의 보살핌을 받으며 날 수 있었습니다. 잠시의 시간이었지만 어미 새의 깊은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95년 예수 성심 대축일에 ‘사제성화의 날’을 지내도록 권고하였습니다. 한국 교회는 매년 예수 성심 대축일을 사제 성화의 날로 지내고 있습니다. 교구의 모든 사제들이 모여서 하루 피정을 하고 있습니다. 함께 모여 기도하고, 강의를 듣고, 고백성사를 보고, 은경축을 맞은 사제들을 축하합니다. 무엇보다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고자 다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먼저 하느님께 대한 순종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겟세마니 동산에서 하신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모든 사제는 예수님의 순종을 배워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연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지금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었습니까?” 율법학자는 강도당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에게 “당신도 가서 그렇게 하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산상수훈’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가난한 이,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이, 자비를 베푸는 이, 슬퍼하는 이, 평화를 베푸는 이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온 아들의 비유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잔치를 베풀어라. 죽었던 아들이 돌아왔다. 송아지를 잡자.”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모든 사제는 예수님의 자비하심을 배워야 합니다.
겸손과 희생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습니다. 첫째가 되려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합니다. 여우도 집이 있고, 참새도 새끼 두는 둥지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습니다. 누가 오른 뺨을 때리면 왼 뺨마저 내어 주십시오. 겉옷을 달라는 사람이 있으면 속옷까지 내어 주십시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행동으로 실천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고, 죽으셨지만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모든 사제는 예수님의 겸손과 희생을 배워야 합니다.
2001년 사제성화의 날이었습니다. 경기지역 사제들은 의정부 성당에 모여서 하루 피정을 하였습니다. 지구장 신부님이 제게 체험사례 발표를 부탁하였습니다. 사제가 사제 앞에서 발표하는 것은 무척 난감하고 곤혹스러운 일입니다. 선배들은 제가 살아온 날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료들은 저의 허물과 실수를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후배 사제들은 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정중하게 거절하였습니다. 지구장 신부님은 사목 체험을 편하게 이야기 하면 좋다고 하였습니다. 약간의 강사료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본당에서 있었던 사목체험을 기쁜 마음으로 나눌 수 있었습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하듯이, 저의 발표는 교구청에도 전해졌고, 다음 인사이동 때 저는 교구청 사목국에서 교육담당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사제성화의 날 발표는 그 뒤로 저의 사제생활에 많은 변화를 주었습니다. 해외 연수를 갈 기회가 주어지기도 했고, 다시금 교구청에서 일하기도 했고, 지금은 미주가톨릭평화신문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2020년 사제성화의 날입니다. 오늘 하루 피정하는 마음으로 지내려고 합니다. 모든 사제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닮을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그 속에서 생명의 물이 강물처럼 흘러나오리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이영근신부-
오늘은 예수성심 대축일 입니다. 오늘 <복음>은 짧지만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앞 장면>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을 이루심에 대한 예수님의 감사와 찬양의 노래요, <뒷 장면>은 고생하고 무거운 짐 진 자에게 안식을 주시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성심에로의 초대입니다.
오늘은 예수성심에 대한 <뒤 장면>만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듣기만 하여도 벅찬 감격이 밀려오는 위로의 말씀입니다. 당신께서 안식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안식”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얻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예수님에게서 얻습니다. 곧 그것을 가지신 분으로부터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것은 그분의 선물이요, 사랑이요, 자비요, 호의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 사랑의 마음에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것은 그저 화를 내지 않고 온순하다는 뜻을 넘어서, 타인의 아픔을 안다는 뜻입니다. 곧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진” 이들의 아픔을 아는 마음입니다.
“내 멍에를 멘다.”는 것은 당시의 유대인 사회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를 말해줍니다. 당시의 팔레스타인의 ‘멍에’는 혼자 메는 것이 아니라, 항상 짝을 이루어 두 노역자가 함께 메게 되어 있듯이, ‘예수님의 멍에’는 예수님과 함께 메는 것을 말합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구원의 직무를 공동으로 수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함께 메는 ‘멍에’이기에, “그 멍에는 편하고, 그 짐은 가볍습니다.”(마태11,30) 그러기에 우리가 진 짐은 우리를 짓누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북돋아주고 도와줍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은총을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우리를 지고 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은총을 돕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우리를 돕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지고 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모범을 보여주시는 스승이 아니라, 함께 걸으면서 몸소 우리를 지고 가시며 우리를 동행하고 인도하는 참된 스승이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단지 “길”을 제시하는 스승이 아니라, “길” 자체이신 참 스승이십니다.
이처럼, “나에게 배워라”는 말은 단순히 뒤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 하나 되어 걸으며, “당신의 마음”을 배우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를 위해, 당신의 심장을 내어주셨습니다. 사실, 우리는 당신 심장에 배신의 창을 꽂았지만, 당신은 우리에게 생명의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당신에게 죄악을 쏟아 부었지만, 당신은 우리에게 은총의 피와 물을 쏟으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우리의 불신과 불순명으로 피 흘리면서도, 우리의 굳은 심장에 새 살이 돋게 하셨습니다. 당신 심장을 내어주시고, 그 지극한 사랑으로 우리 안에 당신의 피가 흐르게 하시고, 은혜로운 구원을 주셨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마음, 곧 “양순하고 겸손하신 당신의 마음”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이제 우리는 사도 바오로의 고백처럼,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그 마음을 품게 되었습니다.’(필립 2,5 참조). 바로 그 마음 안에서, 우리는 “참된 안식”을 얻습니다.
하오니 주님, 사랑에 불타는 예수 성심이여!
이제, 당신의 피를 흘리는 능력 외에는, 아무런 능력도 없게 하소서!
당신 사랑의 피를 흘리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줄을 모르게 하소서!
오로지 임의 사랑, 임의 성심만을 알게 하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아버지의 선하신 뜻”(마태 11,26)
주님!
오늘도 미처 알아듣지도 못한 채, 당신의 ‘선하신 뜻’을 부둥켜안고 살아갑니다.
드러내신 그 사랑에서, 당신의 얼굴을 보게 하소서.
감추신 그 신비에서, 당신 심장의 소리를 듣게 하소서.
그 모든 것 안에서, 믿음과 사랑이 자라게 하소서.
신비를 살게 하소서. 당신의 ‘선하신 뜻’을 살게 하소서. 아멘.
예수님의 마음을 간직하라
-반영억신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드러내신 예수 성심을 특별히 기억하는 날입니다. 또한 ‘사제 성화의 날’로 사제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복음 선포의 직무를 더욱 훌륭히 수행하는 가운데 완전한 성덕으로 나아가고자 다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닮고 그 삶을 충직하게 사는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길 기도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우리 각자의 마음으로 간직하고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주어진 소명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인간적인 마음이 지배할 때가 훨씬 많습니다. 심지어는 기도 안에서도 내 욕심을 채우려고 합니다. 그러니 언제 예수님의 마음으로 바뀔지 장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간직하고 싶은 소망은 있지만 그에 따르는 노력과 정성은 여전히 소홀하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예수님의 대표적인 마음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11,29-30). 온유한 마음은 부드러움입니다. 어떠한 상황 안에서도 흔들림이 없는 마음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세상의 모든 것이 다 변해도 좋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 내리면!”이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느님 안에 뿌리 내리면 모두를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이며 그분의 뜻을 헤아리지 결코 절망하거나 호들갑을 떨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겸손은 한없이 낮아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시면서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2,7). 우리의 눈높이를 맞춰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섬김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다면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품고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일상 안에서‘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자주 묻게 되기를 바랍니다.
노자는 “알면서도 모르는 게 으뜸이요, 모르면서 아는 게 병통”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당시에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는 배척을 당하였습니다. 소위 잘나고 똑똑한 내로라하는 사람에는 쉽게 받아들여 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최고였기 때문에 주님의 가르침이 들어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철부지들에게는 받아들여졌습니다. 그야말로 촌놈들, 상것들, 별 볼일 없는 못난이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에게는 겸손과 단순함이 있었고 그것이 사실 세상의 희망입니다.
잘난 사람은 남을 등쳐먹으려 애를 쓰고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 서로를 헐뜯고 깎아 내리지만 때 묻지 않은 철부지들은 새로운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머리로 계산하지 않고 마음을 열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단순한 사람을 미덥게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아는 것이 결코 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서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물을 꿰뚫는 통찰력을 가리키며 친숙해 지는 것, 그리고 감정을 이해하며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결국 알기 때문에 달라지는 것을 포함합니다. 또한 남녀가 결혼을 통해 가장 깊이 만나는 것을 ‘안다’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안다고 하는 것은 당신의 사랑으로 충만히 채워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안다는 것은 곧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고 하셨고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마태11,27) 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과 하느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알려주셨습니다.
이제 그 아버지에 관해서 아들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고 그분이 알려준 아버지를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그분을 알리기 위해서 그분을 알아야 하는데 그 첫 자세가 “어린이와 같이”(마르10,15)단순한 마음으로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철부지 어린이는 잔머리를 굴리지 않습니다. 온전히 부모에게 의존합니다. 계산하지 않고 부모를 따릅니다. 그것이 겸손이기도 합니다. 단순하면 할수록 하느님의 뜻을 더욱 잘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마음을 열어주시어 예수님의 온유함과 겸손을 살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송영진신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이 말씀의 ‘고생, 무거운 짐, 멍에’를 인생살이의 고통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된 해방과 자유와 안식을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여기서 ‘모두’ 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모든 사람’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차별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라는 말씀은,
“나를 믿고, 나의 계명을 실천하면서, 내 뒤를 따라라.” 라는 뜻입니다.
‘내 멍에’ 라는 말은, 예수님의 계명을 뜻하는데,
예수님의 계명이 실제로 멍에라는 뜻은 아니고, 비유적인 표현일 뿐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계명이 멍에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믿는 사람들에게는 ‘멍에를 벗겨주는 열쇠’입니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라는 말씀은,
“고통스러운 멍에를 벗기고 편한 멍에로 바꿔 주겠다. 무거운 짐을 가벼운 짐으로
바꿔 주겠다.” 라는 뜻이 아니라, “모든 멍에를 벗겨서 편안함을 주겠다.
모든 짐에서 완전히 해방시켜 주겠다.” 라는 뜻입니다.
(“내 멍에는 편하고”는 “내가 주는 멍에는 편안함이고”,
즉 “내가 주는 것은 멍에가 아니라 해방이고” 라는 뜻이고,
“내 짐은 가볍다.”는 “내가 주는 짐은 가벼움이다.”,
즉 “내가 주는 것은 짐이 아니라 안식이다.” 라는 뜻입니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라는 말씀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말씀 때문에, “무거운 멍에를 벗으려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가벼운 멍에를 감수해야 한다.”고 해석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참된 안식을 얻기 위해서이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새로운 멍에를 메는 것이 아니라 ‘멍에를 벗기는 열쇠’를 얻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아무리 편안해도 멍에는 멍에일 뿐이고, 아무리 가벼워도 짐은 짐일 뿐입니다.
‘안식’은 멍에와 짐이 하나도 없는 상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라는 새로운 멍에와 짐을 주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 멍에와 짐을 완전히 없애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안식’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누리는
참 평화와 참 행복과 참 기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 구원은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계명을 실천하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은,
예수님만이 그 구원과 안식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고,
그것을 얻기를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그 구원과 안식은 죽은 다음에나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기 시작할 때 시작되는 것입니다.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쪽 세상에 살아 있을 때나 죽은 다음에 저쪽 세상에 갔을 때나
우리를 고생시키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안식을 누리는 생활입니다.
언제인지 모르는 ‘나중’에 안식을 얻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만으로
고통스러운 인생살이를 참고 견디는 생활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시작되어서, 실제로 누리고 있는 구원과 안식 덕분에
고통을 참고 견딜 수 있는 생활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예수님과 어떤 사마리아 여자의 만남이 연상됩니다.
그 사마리아 여자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닌”(요한 4,18) 여자였으니,
그의 인생은 지독한 갈증에 시달리는 인생이었고,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또 “무거운 멍에를 메고 있는” 인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의 갈증과 고생과 짐과 멍에를 꿰뚫어보셨고,
그 여자를 그것들에서 해방시켜 주려고 하셨습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요한 4,13-14).”
그 여자는 예수님 덕분에 자기를 짓누르고 있던 갈증과 고생과 짐과 멍에에서
해방되어서, 참된 안식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에 그 여자가 어떤 유혹을 받아서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는 일이
생긴다면? 그러면 더욱 지독한 갈증에 시달리게 될 것이고,
더 무거운 멍에를 메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났다면,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했다면,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으로만 나아가야 합니다.)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벳자타 못 가의 병자’의 경우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병자는 서른여덟 해나 앓고 있었고, 벳자타 못 가에 오랫동안 누워 있었고,
자기 힘으로는 못 속에 들어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무거운 멍에와 짐을
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가엾게 여기셔서 그의 병을 고쳐 주셨고,
그에게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요한 5,14).”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병을 고쳐 주심으로써 인생살이의 멍에와 짐을 벗겨 주셨고,
참된 안식을 향해서 나아가라고, 또 구원과 안식의 완성에 도달하라고
격려하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께 고마워하기는커녕 예수님을 유대인들에게 밀고했습니다.
그는 몸의 건강은 얻었지만, 영혼의 안식은 얻지 못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멍에와 짐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우리를 가엾게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사랑’이고, 그 멍에들과 짐들을 벗겨주시는 것은 예수님의 자비입니다.
(예수 성심 대축일은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를 공경하고 경축하는 대축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받은 그 사랑과 자비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은 나눌수록 커지지만, 나누지 않으면 기름 없는 등불이 꺼지는 것처럼
희미해지다가 결국 사라질 것입니다.
안식은 혼자서만 누릴 수 없습니다.
모두가 함께 누릴 때에만 참된 안식이 됩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11,25-30: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초기 교회에서부터 예수성심에 대해 언급되었었는데 이는 하느님이면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이루는 한 구성요소를 의미하였다. 예수성심은 강생의 신비와 수난과 죽음, 성체성사 설정 등을 통하여 보여준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을 말한다(참조: 마태 11,29).
특히 교부들은 예수의 성심을 사랑과 은총의 샘으로 생각하여 십자가상에서 군인의 창에 찔리어 예수의 옆구리에서 물과 피가 나온 것을(요한 19,34) 천상의 보물창고에서 무수한 은혜가 쏟아져 나온 것에 비유하였다. 즉 심장에서 흘러내린 물은 영혼을 깨끗이 씻고 초자연적 생명을 부여하는 성세성사를 상징하며, 피는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게 하는 영혼의 양식인 성체성사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마치 하와가 아담의 옆구리에서 나온 것처럼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예수의 옆구리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13세기 이래 독일의 신비주의에 영향을 받아 성심 공경이 성하였다. 교황 비오 12세(1939-1958)의 회칙에서 “구세주의 상한 성심에서 구원의 성혈을 나누어주는 교회가 탄생하였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예수성심은 하느님이면서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사랑과 정서, 감정의 중추이며 인간에게 베푸시는 하느님 은총의 근원이며 사랑의 표현이다. 동시에 인간 사랑의 응답을 바라시는 하느님의 원의이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성심을 특별히 공경하는 축일이다. 성체와 성혈 대축일 다음 금요일에 지키도록 한 것은 이 축일이 성체성사와 밀접히 연관되기 때문이다. 13세기 이래 예수성심의 공경이 성하였지만, 1673년 12월 27일 프랑스 파레이 르 모니알에서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콕(1647-1690)에게 예수께서 발현하시어 성심공경과 성심축일의 제정을 요청하시게 되어, 성심께 대한 신심이 공적으로 세상에 전파되었다. 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로 대축일로 지내오고 있다. 이날은 또한 한국 주교회의는 사제성화의 날로 정하여 사제들이 완덕에로 나아가도록 기도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율법을 잘 알고 잘 지키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며 철부지 어린아이들은 율법을 알지도 못하고 지키지도 못하는 사람들이다. 철부지 어린아이들은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다. 이런 어린아이들은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따르며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하느님 앞에 가장 아버지의 뜻을 잘 따른 어린이는 바로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예수님을 따르는 철부지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계시해 주셨다. 바로 예수님 당신의 아들 자신을 통하여 이렇게 알려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알게 된 사람들은 이제 예수님 안에서 위안과 안식을 찾고 또 누릴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의 법은 우리가 실천하면, 그만큼 큰 기쁨과 위안을 누릴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도 가지려 노력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은총을 구하자.
-오상선신부-
예수님의 마음에 풍덩 빠지는 사랑의 날,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주님의 마음속 계획은 대대로 이어지네"(입당송).
장엄한 대축일 미사에 들어서면서 울려퍼지는 입당송은 주님과 우리 사이의 사랑을 한 눈에 조망하게 해 주는 단어를 제시합니다. 그건 바로 "주님의 마음속 계획", 즉 섭리이고 사랑입니다.
"주님께서 너희에게 마음을 주시고"(신명 7,7).
제1독서에서는 주님과 우리 사이의 사랑의 시작을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마음을 주신 겁니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준 경험이 있다면 이 말씀의 세기와 농도를 알아들을 겁니다. 마음은 전부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마음에 딸려오는 것에 불과하지요.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1요한 4,7).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 사랑을 알게 된 우리는 하느님의 피조물인 동시에 자녀입니다. 사랑의 존재가 된 우리는 사랑의 근원이신 분을 압니다. 보잘것없는 피조물에 죄인인 우리가 하느님을 알게 되다니요! ... 이것이 사랑의 신비이고 사랑이 일으킨 기적입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6).
하느님과 우리는 서로 안에 머무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마음을 모조리 다 주었으니 이젠 둘이 아닌 하나입니다.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28).
전혀 구색이 안 맞는 두 존재의 일치가 가능한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를 당신에게 오라고 초대하셨습니다. 그분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셔서 누구도 가리거나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심지어 우리가 아무리 모자라고 불결하고 못나도 무시하거나 소외시키거나 못마땅해하지 않으십니다. "다 오라"는 초대는 사회에서 전화번호도 묻지 않은 채 진심없이 남발하는 '언제 한번 보자'는 식의 빈말이 아닙니다.
"모두 나에게 오너라."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래 이 말씀을 얼마나 자주 마주쳤는지요! 하지만 잠시의 위안으로 스쳐보내고는 정말 진심을 다해 전력질주하여 그분 마음으로 달아든 기억이 과연 몇 번이나 있을런지요...
"모두 나에게 오너라."
이 초대를 하신 예수님은 진심이셨지만, 이 말씀을 별로 안 친한 이들 사이에 영양가 없이 오가는 인사치레 정도로 흘려듣고 잊어버린 것은 우리 쪽이 아니었는지요...
그분의 마음은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넓습니다. 우리 모두, 온 세기와 역사와 나라와 종족에 딸린 모든 이를 다 받아들이고도 남을 크고 넉넉하고 선선하고 부드러운 마음! 그분은 그 마음을 활짝 열어젖혀 우리가 그 안으로 뛰어들어오기만 기다리십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그 속에서 생명의 물이 강물처럼 흘러나오리라"(영성체송).
주님은 당신 마음, 그 사랑의 바다에 풍덩 빠져 마음껏 헤엄치며 사랑을 만끽하라고 하십니다. 사랑 밖에는 거칠 것 없는 완전한 자유와 희열의 바다에 머무르는 동안, 내가 바다인지 바다가 나인지, 내가 사랑인지 사랑이 나인지, 내가 주님인지 주님이 나인지 구분조차 모호해집니다.
쩍쩍 갈라지는 가뭄 논바닥 같았던 영혼도 주님 마음 안에 머무르면 사랑의 물이 오르고 윤기도 차오르지요. 생명의 물은 나를 적셔 되살리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내 속에서 "강물처럼 흘러나"올 엄청난 수원지를 이룹니다. 그토록 넓고 선하고 충만한 주님이 우리 안에 가득 들어차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사랑의 바다이신 예수 성심께 온전히 잠겨 사랑이 되는 큰 축제일 되시길 축원합니다. 그리고 성교회의 지향에 합하여 저를 포함해 모든 사제들의 성화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마음이 어질고 겸손하신 예수님,
저희 마음을 주님 마음과 같게 하소서. 아멘.
너의 미움에서 나의 사랑에로
-김찬선신부-
예수 성심 대축일을 지내는 오늘, 첫 번째 독서인 신명기가
과연 오늘 축일에 맞는 말씀인지 의아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해주시고,
당신을 미워하는 사람은 미워하시는 분이라면 우리와 뭐가 다르시고,
그 정도의 사랑의 마음을 일컬어 성심이라고 과연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는 더디시나 자애는
넘치시네. 우리를 죄대로 다루지 않으시고, 우리의 잘못대로 갚지
않으시네."라는 오늘 시편 말씀이 더 성심 축일에 맞갖지 않을까요?
그러나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늘 얘기하는 바이지만
벌주시는 것도 사랑이고 용서하시는 것도 사랑입니다.
다 사랑인데 용서하시는 사랑이 이해해주시는 사랑이라면
벌주시는 사랑은 성장케 하시는 사랑이 그 차이인 거지요.
어린애에게는 무한 사랑이 맞습니다.
갓난애가 똥을 싸고 시도 때도 없이 우는 것은 이해하고 받아들여야지
왜 그러냐고 야단치고 벌을 주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 사랑이 없음입니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가면서 이해를 받던 아이도
이제는 이해를 하는 어른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이해할 줄 모르면 모를수록 애라고 해야겠지요.
그런데 이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해라는 말을 한자어 뜻대로 풀이하면 이理를 해解하는 것입니다.
과학 원리를 풀어서 아는 것처럼 사랑의 이치를 풀어 아는 겁니다.
그것을 오늘 신명기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천대에 이르기까지
계약과 자애를 지키시는 진실하신 하느님이심을 알아야 한다.
또 당신을 미워하는 자에게는 그를 멸망시키시어
직접 갚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우선 하느님께서 마냥 오냐 오냐 하실 거라고 알아서는 안 됩니다.
어린아이 적의 잘못에는 자애로우시지만
커서 짓는 죄는 그냥 놔두지 않으십니다.
무거운 짐에 고생하는 사람을 위로해주시긴 해도 내려놓으라 하진 않으시고,
같이 십자가를 지시긴 해도 대신 져주시진 않습니다.
우리를 마냥 어린애로 키우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은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시지만
미워하는 사람까지 사랑하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미워하는 것도 괜찮다고 하실 수 없기 때문이고,
우리를 사랑하는 어른으로 키우시기 위함입니다.
사실 어린애는 받을 줄만 알지 사랑할 줄 모르는데
사랑할 줄 모르는 이런 어린애를 마냥 괜찮다 하지 않고
사랑할 줄 아는 어른으로 자라게 하는 것이 사랑이지요.
그러니 사랑이신 분이 미워하는 사람을 괜찮다고 하실 수 없고,
무엇보다 당신을 미워하는 사람을 괜찮다고 하실 수 없으신데
그것은 당신이 우리의 사랑을 받고 싶어서가 아니라
당신 사랑을 거부하면 우리가 불쌍하고 불행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할 줄 모르고 미워하기만 하는 우리를
하느님께서 가만 놔두지 않으심은
미움과 미움이 충돌하는 우리의 미움과는 다른 것이며
우리의 미움을 당신의 사랑으로 단죄하시는 것이며
그러므로 미움에서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사랑인 거지요.
그러므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하심은
너의 미움에서 나의 사랑으로 돌아오라고 하심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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