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 16일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마태오 5,43~48)
So be perfect,
just as your heavenly Father is perfec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한재호신부-
어떤 사람이 가시가 잔뜩 나 있는 나뭇가지를 손에 꽉 쥐고 있으면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나 지금 손이 너무 아파.” 가시나무를 손에서 놓으면 그만일 텐데, 그 사람은 아프면 아플수록 더 힘을 주어 그 나뭇가지를 손에 꽉 쥡니다. 이 사람이 아픈 이유는 가시나무 때문일까요, 가시나무를 쥐고 있기 때문일까요?
‘네가 어떻게 나에게 그런 모진 말을 할 수 있지?’, ‘네가 내 돈을 그렇게 떼먹다니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살다 보면 이런 생각들에 사로잡혀 마음에 큰 멍이 생긴 것처럼 아픔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심지어 이런 마음의 병이 몸에도 영향을 주어 몸이 망가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상처가 되었던 그 사건은 이미 지난 일입니다. 또 우리에게 상처를 주었던 원수 같은 그 사람은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여 우리가 아픈 이유는 그 사람이나 그 사건 때문이 아니라, 그 기억을 붙잡고 있는 우리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기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견물생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물건을 보면 그것을 가지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좀 더 폭넓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원수의 모진 말에만 시선을 두면 아픈 마음이 생기고, 원수의 단점에만 시선을 두면 증오심이 생깁니다. 또 상처가 된 사건들만 바라보면 우울한 마음이 생기는 법입니다.
반면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건네주었던 격려를 떠올리면 용기가 생기고, 미운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의 장점에 시선을 두면 존경심이 생깁니다. 또 우리 삶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바라보면 마음속에 감사함이 넘쳐흐릅니다. 요컨대 원수를 사랑하려면 나의 시선을 달리해야 합니다.
가시나무를 당장 손에서 놓는다고 아픔이 곧바로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상처를 낫게 하는 첫걸음입니다. 그 첫발을 떼고 인내하십시오. 그러다 보면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길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200mL를 담을 수 있는 컵이 있습니다. 이 컵에 500mL의 물을 담을 수 있을까요? 당연히 불가능합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가 생각한 만큼의 사랑만을 담을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의 크기가 200mL를 담을 수밖에 없는데 그 이상 되는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가 있겠습니까?
서로 사귀는 남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자는 어느 날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데이트 비용을 자기가 더 많이 내는 것 같고, 각종 기념일도 나만 기억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은 여자 친구에게 충실하기 위해 다른 사람도 거의 만나지 않는데, 여자 친구는 다른 친구 만나는 것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계속 만나고는 있지만 억울하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 둘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랑 크기가 작으면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부정적인 마음이 계속 일어나면서 사랑할 대상으로가 아니라, 내게 피해를 주는 대상으로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사랑을 어떻게 온전히 받아들일 수가 있을까요? 주님의 그 큰 사랑을 받아들이려면 당연히 그 사랑을 받아들일 내 마음을 키워야 합니다. 속 좁은 모습이 아니라, 넓은 마음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원수 사랑’이라는 명령을 하신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상대가 친구든 원수든, 믿는 이든 믿지 않는 이든, 어려움에 부닥친 이에게 선을 베풀라고 하십니다. 원수가 사랑을 받는 것은 자격이 있는 자라서가 아닙니다. 그보다 우리는 아무도 미워해야 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주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나쁜 것을 없애버리기 위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원수를 미워해도 그에게 아무런 해도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미워하게 되면 내 영혼에는 커다란 해가 가게 됩니다. 사랑의 마음이 줄어들어서 주님의 그 큰 사랑을 받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데만 머무르지 말고 기도까지 해야 한다는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하시지요.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 마음의 사랑 크기가 커지게 됩니다. 이렇게 사랑의 크기가 커지는 사람이 당연히 하느님처럼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주님의 사랑을 온전히 받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먼저 내 마음의 크기를 키우십시오.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큰 사랑의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내 마음속 은은히 빛나는 모든 기쁨을 멈추라. 오! 그렇다해도 희망의 불빛은 밝혀두라(토마스 캠벨).
의미 있는 삶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 갇혀서 직접 삶과 죽음을 함께 경험한 바를 기반으로 ‘로고 테라피’라는 정신이론을 만든 빅터 프랭클 박사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세 가지 방향을 말합니다.
첫째,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통해서.
둘째,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셋째, 삶에 대한 태도를 통해서.
이 세 가지 방향을 목적으로 삼고 꾸준히 나아갈 때 삶의 의미가 생겨나고, 그 과정에서 행복, 돈, 지위, 명예와 같은 것들을 부수적으로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 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할 때를 보십시오.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틀어지고, 내 삶에 충실할 수 없기에 의미를 찾지 못했던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의미 없는 삶을 살고 있다면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늘 깨달음을 주십니다. 이것이 내 삶의 의미이며, 지금을 사는 힘이 됩니다.
할 수 있었는데 할 수 없었다고 믿었다면
-전삼용신부-
어느 회사의 입사 시험문제에 다음과 같은 문제가 출제되었습니다.
당신은 폭우가 거세게 몰아치는 밤에 운전하고 있습니다. 마침 버스정류장을 지나는데 그곳에는 세 사람이 있습니다.
1. 죽어가고 있는 듯한 할머니
2. 당신의 생명을 구해준 의사
3. 당신이 꿈에 그리던 이상형
당신의 스포츠카에는 단 한 명만을 태울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태우겠습니까? 선택 후 설명하세요.
당신은 위독한 할머니를 태워 그의 목숨을 우선 구할 수도 있을 것이고, 의사를 태워 은혜를 갚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회가 지나고 나면 정말로 꿈에 그리던 이상형을 다시는 만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200명의 경쟁을 제치고 1등으로 채용된 사람이 써낸 답은 이렇습니다.
“할머니를 병원에 모셔 가도록 의사 선생님께 차 키를 드리죠. 그리고 난 내 이상형과 함께 버스를 기다릴 겁니다.”
할 수 있다고 믿으면 답이 보이고 할 수 없다고 믿으면 답이 보이지 않습니다. 위와 같은 문제를 맞힐 수 있는 사람은 분명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일 것입니다.
거짓말을 한 번도 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요? 음란한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요? 화를 절대 내지 않을 수 있을까요?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그를 위해 기도해 줄 수 있을까요? 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없다면 하라고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10살을 갓 넘은 마리아 고레티 성녀도 자신을 죽어가면서 자신을 수십 차례 찌른 청년을 용서하고 같이 천국에서 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할 수 있다고 믿으면 할 수 있고, 할 수 없다고 믿으면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셨기에 우리는 그런 마음을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시카고에 사는 한 부자가 소아마비를 앓고 있는 아들을 고치기 위해 오스트리아의 전문의인 로렌스 박사를 초빙했습니다. 로렌스 박사가 정성스레 이 아들을 치료하여 건강이 회복되었다는 소식이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습니다.
같은 마을에 사는 한 소년도 부잣집 아들과 같은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신문을 보고 로렌스 박사가 시카고에 머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년의 어머니는 돈이 많지 않았기에 자신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 그 저명한 의사를 초대한다는 것은 꿈을 꿀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로렌스 박사는 산책하다가 갑자기 비를 만나 그 소년의 집에 잠시 들러 쉬기를 청했습니다. 로렌스 박사인 줄 몰랐던 소년의 어머니가 냉대하며 거절하여 병을 고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이 어머니는 자신이 쫓아 보낸 사람이 로렌스 박사였음을 알고 후회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주님께서 저를 사제로 불러주신다는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거부하려 했던 가장 큰 이유는 혼자 살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할 수 없었다고 믿었다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사제가 되어보니 혼자 사는 것이 더 편한 것 같고 오히려 결혼해서 사는 것이 더 힘들어 보입니다.
주님께서 불러주시는 길에 반드시 할 수 있다는 믿음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할 수 없다고 믿었던 것들은 영원한 후회를 남깁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으면 할 수 있는 모든 도움이 보이지만, 할 수 없다고 믿으면 주님께서 도와주시려 해도 알아보지 못하고 흘려보내고 맙니다.
사막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돌멩이를 주워 주머니에 넣는다면, 당신은 내일 기쁘면서 또 후회스러울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그 사람은 길에 떨어진 돌멩이 몇 개를 주워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다음날 주머니에 넣어 보니 그 돌멩이들이 다이아몬드, 루비, 사파이어 같은 보석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는 정말 어제의 그 목소리처럼 기쁘면서 후회스러웠습니다. 기쁜 것은 그 돌멩이들을 가져온 것이고, 후회스러운 것은 좀 더 많이 가져오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우리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도 똑같을 것입니다. 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만큼 기쁠 것이고, 할 수 없다고 믿었던 것들은 영원한 후회 거리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처럼 완전해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분 앞에서 어떠한 것들은 불가능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결자해지(結者解之), 사필귀정(事必歸正),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류가 공동체를 이루고, 문화와 문명을 발전시키면서 지켜왔던 원칙이며, 질서입니다. 동양도, 서양도, 종교도 이런 원칙을 지켜왔습니다. 그래야만 약한 사람도 존중 받을 수 있고, 강한 사람은 겸손 할 수 있습니다. 문제를 일으켜놓고 타인에게 책임을 미루는 사람에게는 결자해지를 이야기합니다. 공상과 망상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뿌리지 않고 얻으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사필귀정을 이야기합니다. 지금의 상황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불가에서는 이를 연기(緣起)라고 합니다. 세상의 모든 현상은 인연과 업보의 결과 다시 말해 인과응보라고 이야기합니다.
천주교회에는 사대교리(四大敎理)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것(天主存在),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라는 것(三位一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받는 다는 것(降生救贖) 그리고 선한 이에게는 상을 주고, 악한 이에게는 벌을 준다는 것(賞善罰惡)입니다. 성서는 선을 행한 이에게,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이에게 축복을 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땅을 주시고, 건강을 주시고, 자녀를 주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랐던 노아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랐던 아브라함은 늙은 나이에 아들을 얻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랐던 욥은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악을 행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던 이에게 벌을 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교만했던 아담은 낙원에서 쫓겨났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던 바벨탑은 무너졌습니다.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던 아합 왕은 벌을 받았습니다. 구약의 역사는 상선벌악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자해지, 사필귀정, 인과응보’를 뛰어넘는 새로운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인류가 지켜왔던 삶의 원칙과 질서를 넘어서는 새로운 원칙과 질서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신앙이고, 이것이 우리가 따르는 새로운 질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으실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의 삶을 살라고 하셨습니다. 벗이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주라고 하셨습니다.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주라고 하셨습니다.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도 필요하지만 옳고 그름의 인연을 끊어 버리라고 하십니다. 그때 비로소 새 하늘과 새 땅을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곳에서 하느님 나라가 시작된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마음에 담아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아름답지만 우리의 것으로 만들기에는 너무 어려운 일들일까요?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마지막 여섯 번째의 새로운 의로움으로, ‘완전한 사랑’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마태 5,45)
사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라는 <레위기> 19장 18절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사랑해야 할 대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복음>에서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14)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이웃과 원수를 구분해서 처우를 달리 해온 그동안의 관행을 완전히 뒤엎어, 이웃이나 원수를 가리지 않고 똑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원수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이 아니며, 또 우리 자신에게서 미움이라는 것을 없애기 위한 것도 아니며, 혹은 단지 사랑에 한계를 두지 말라는 것만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호의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부족한 이를 부족한 채로, 원수를 원수인 채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가 나를 미워하지 않게 되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는 채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그가 부족하기에 바로 그 이유로 더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가 사랑이 더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죄인이기에 처벌받아야 하기보다, 죄인이기에 용서받아야 할 대상이듯이 말입니다.
동시에, 이는 자기 자신만 구원받아야 할 존재인 것이 아니라, 타인도 구원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우쳐줍니다. 자기 자신만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인 것이 아니라, 타인도 사랑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 다음에 한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고 덧붙이셨습니다. 사랑은 애당초 자기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스테파노가 돌을 맞아 죽어가면서도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해 기도했던 것처럼(사도 7,60), 사도 바오로가 고난을 겪으면서도 유대인들을 위해 기도했던 것처럼(1코린 4,12) 말입니다.
지금 나의 기도가 가장 필요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지금 나를 가장 힘들어하는 사람, 또 내가 가장 힘들어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나 이웃만 사랑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자기에게 잘 해주고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라고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지금 나의 사랑이 가장 필요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지금 나를 가장 힘들어하는 사람, 또 내가 가장 힘들어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아닐까요? 사실, 친구를 사랑하는 사람은 죄는 짓지 않을지 몰라도, 의로움을 행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친구가 아닌 원수를 사랑할 때라야, 의로움을 행하게 됩니다. 악을 피하는 것을 넘어 선을 행할 때라야, 비로소 완전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의로움이 무엇인지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단지 죄짓지 않고 무난하게 살기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베푸는 데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사랑이 우리를 하느님과의 의로운 관계로 이끄십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주님!
되갚지 않을 뿐 아니라, 억울한 고통도 기꺼이 지게 하소서.
미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받아들여 사랑하고, 사랑할 뿐 아니라, 기도하게 하소서.
죄짓지 않을 뿐 아니라 죄인을 용서하고, 용서할 뿐 아니라 선을 베풀게 하소서.
개방할 뿐 아니라 받아들여 수용하고, 수용할 뿐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변형되게 하소서. 아멘.
나도 다른 사람의 원수가 될 수 있다
-반영억신부-
살아가면서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래서 나는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말합니다. 사실 상처를 주는 사람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나와 관련이 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상처가 되지 않고 쉽게 잊어버립니다. 아주 가까이 있기에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아내가 될 수 있고 남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식이 될 수도 있으며 부모나 이웃, 절친한 친구, 동료가 될 수 있습니다. 상처를 풀지 못한 채 시간이 흐르면 미움이 쌓이고 마음의 병이 되고 결국은 원수가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 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5,44-45). 고 말씀하셨습니다. 미움을 사랑으로 정복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는 원수와 박해하는 사람, 악인과 선인,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이 따로 없습니다. 다 내 자식이요,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베푸십니다. 오로지 사랑만이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원수를 만드는 것은 바로 나입니다. 사랑으로 충만하다면 원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그러니 상처를 받을 수 있는 연약함을 지녔고, 그렇기 때문에 상처를 받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처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것도 아니고, 혹 아픔이 이미 시작되었다면 그 아픔을 오래 가지고 있지 않아야 합니다. 더러운 것이 내 몸에 들어왔는데 왜 그것을 끌어안고 있습니까? 내보내야지요. 상처를 준 그 무엇이 내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인식하면 내 보내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 원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깊이 보면 우리 자신들이 다른 사람의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가끔 신자들의 기도소리를 들어보면 ‘세상에 못된 사람이 너무 많은데 회개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이러저러한 상태를 낱낱이 고발하는 식으로 얘기해 놓고는 ‘그러니 고쳐주십시오’. 하는 식입니다. ‘자기는 아무런 잘못도 없고 회개할 이유도 없는데 남들이 잘못해서 이지경이 되었으니 그들을 좀 어떻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다른 사람도 나도 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이고,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연약함을 지녔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리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이미 원수가 없습니다.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시는 하느님만을 바라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나도 다른 사람의 원수이니 오늘은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으로 하느님의 마음을 닮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간직하여 모두가 사랑해야 할 사람으로 보인다면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라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람들로부터 온갖 멸시를 받고 죄인취급을 받았던 세리들도 서로를 사랑하며 서로 상대방을 헐뜯지는 않았습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이방인들 사이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우애를 베푸는 것은 아주 보편적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사랑해야할 소명이 있을 뿐입니다. “성인은 착한 사람을 착하게 대하고 착하지 않은 사람 또한 착하게 대하니 이는 덕이 오직 착하기 때문이다”(노자49장). “사랑은 사랑일 뿐, 상대에 따라서 달라지거나 있다가 없다가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이현주).
그러므로 지금의 처지에 안주하지 말고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하느님의 완전함을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많이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많이 행하십시오.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5,5).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요? 원수사랑!이죠. 그렇다면 가장 아름다운 사랑은? 당연히 원수사랑!이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송영진신부-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3-48).”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율법은 레위기 19장 18절에 있습니다.
그러나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는 율법은 구약성경에 없습니다.
(이 말씀은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을 지적하신 말씀으로 생각됩니다.)
유대인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민족들을 ‘원수’로 생각했고,
또 구약성경의 전체 흐름이 우상 숭배를 미워하는 것이기 때문에,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 유대인들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 사고방식이 구약성경의 가르침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구약성경에도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과 비슷한 율법이 있습니다.
“길을 잃고 헤매는 너희 원수의 소나 나귀와 마주칠 경우, 너희는 그것을
임자에게 데려다 주어야 한다. 너희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에 눌려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을 경우, 내버려 두지 말고 그와 함께 나귀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탈출 23,4-5).”
유대인들은 원수라고 해도 동족이 곤경에 처해 있는 것을 보았을 때에는
이 율법대로 실천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민족 사람이 그런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을
보았을 때에는 어떻게 했을까?
아마도 율법주의자들은 외면하고 그냥 지나쳤을 것이고,
율법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었을 것입니다.)
1) 탈출기에서 말하는 ‘원수’는 원한 관계에 있는 개인의 사적인 원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원수’는
사적이든지 공적이든지 간에 “내가 원수라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이웃이고 형제입니다.
그래서 ‘원수’는 없습니다.
내가 내 마음대로 원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너희는 이웃을 사랑하여라.”입니다.
(“원수 같은 사람이라도 너의 이웃이고 형제이니 그를 사랑하여라.”)
종교와 신앙이 달라도, 우리 교회를 박해해도, 적도 아니고 원수도 아닙니다.
사랑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2)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하여라.”는 “좋아하여라.”가 아니라,
“하느님 뜻의 실현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라는 말씀이
바로 그것을 나타냅니다.
박해자들의 회개를 위해서 기도하고, 그들도 구원받기를 기도하고,
그들도 구원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 그것이 그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의 회개와 구원을
바라시기 때문이고,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회개시키기 위해서 잘해 줄 수도 있고, 꾸짖거나 타이를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원수 같은 사람에 대한 사랑은 ‘좋아하는 감정’에 속한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우리에게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는 일입니다.)
3) 우리는 흔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원수’는 악인이라고 생각하고,
자기 자신은 선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원수 같은 사람을 사랑하는 일을
선인이 악인에게 사랑을 베풀어주는 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누가 감히 하느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선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다른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악인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앞에서 ‘한 사람’일 뿐입니다.
원수 같은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선인이 악인에게 사랑을 베풀어주는 일이
아니라,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누가 선인이고 누가 악인인지는 우리가 판단할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판단하실 일입니다.
4)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예수님의 계명은
“편 가르기를 하지 마라.” 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참 사랑’에는 울타리도 없고, 편 가르기도 없고, 차별도 없습니다.
루카복음 10장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인’은
울타리가 없는 ‘참 사랑’을 실천한 사람으로서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원수 관계였고, 서로 접촉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착한 사마리아인’은 강도당한 사람이 어디에 속한 사람인가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것만 보았고, 도와주었습니다.
(이야기 속에서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전후 상황을 볼 때 강도당한 사람은 분명히 유대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 강도당한 사람을 도와준 사람을 사마리아인으로 설정하신 것도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의 갈등을 염두에 두셨기 때문입니다.)
‘같은 편’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미워하고 싫어하고,
배척하고 차별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인간 세상의 현실입니다.
요즘에 ‘인종 차별’과 ‘민족 차별’이 언론에 자주 보도되고 있는데,
그런 일은 하느님의 사랑을 거스르는 ‘큰 죄’입니다.
같은 편끼리만 사랑하는 것은 죄인들이나 하는 짓,
즉 죄를 짓는 일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5)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사랑’과 같은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과 대등한 위치에 올라서라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가 되라는 뜻입니다.)
원수 같은 사람도 사랑하고, 편 가르기를 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는 것이 ‘완전한 사랑’입니다.
만일에 원수 같은 사람은 사랑하지 않고, 자기편에 속한 사람만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불완전한 사랑’이고, 불완전한 사랑으로는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없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지 못한다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신앙생활은 모두 헛일이 되어버립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5,43-48: 원수를 사랑하여라.
“원수를 사랑하여라.”(44절)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명령하신 것은 원수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이다. 원수가 남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자신에게서 나쁜 것을 없애 버리기 위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다. 미워한다는 것은 당사자는 아무런 해도 입지 않을 수 있지만, 미워하는 사람은 영에 큰 해를 입는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한다. 스테파노가 순교할 때,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해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이를 보여 주었다(사도 7,60 참조)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불가능한 것을 법으로 제정하지 않으신다. 유대인들에게 많은 고난을 겪었던 바오로도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1코린 4,12 참조).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라고만 하시지 않고 기도하라고 하셨다.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45절) 이렇게 원수를 사랑할 때, 그분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받은 우리는 아드님이 주신 계명을 실천할 때 그분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우리는 하느님 안에 새로이 태어남으로써 자녀들이 되며, 그분의 새로운 창조물이요 자녀로서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자녀로서의 권한을 받는다. 우리는 아드님과 같은 참 자녀들이 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를 자녀가 되는 권한으로 부르시는 것은 우리가 당신 모습과 닮은 모습이 되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45절) 여기서 해는 그분의 지혜를 뜻하며, 비는 진리의 가르침이 적셔주는 것을 뜻하고 있다. 이 지혜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우리의 몫이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46-47절)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 자체가 기쁨이기 때문에 보물을 지닌 것은 아니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 본능을 넘어 행동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큰 보물을 지닌 것이다. 하느님의 상속자는 행실로 하느님을 닮지 않는다면 완전한 상속자가 아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48절) 오늘 복음은 “모든 것은 선으로 완전해진다.”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한다. 믿음은 분노가 앙갚음으로 바뀌는 것을 막을 뿐 아니라, 분노를 해를 입힌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부드럽게 바꾸어 놓기도 한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하느님 상속자들의 삶으로 부르시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모습을 보이도록 부르신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버지의 선하심을 본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 44)
-한상우신부-
사람의 원수는
언제나
사람으로
다가옵니다.
한때는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조차
원수로 다가옵니다.
우리자신또한
누군가에게 분명
원수가 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우리 관계의
아픈 뒷모습을
보게됩니다.
원망과 원한에
허우적대는
우리들 삶입니다.
원수를
미워하고
증오하며
우리들또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 어떤 순간도
사랑의 하느님을
밀어낼 순 없습니다.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은
원수를 사랑하는
삶안에 있습니다.
생생한
하느님 사랑이
우리들 삶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예수님에게
사랑과 용서를
구합니다.
우리를
붙잡고 있는
미움과 증오
분노와 분개에서
자유롭게 하길
기도드립니다.
원수에게
우리가 주어야
할 것은 다름아닌
하느님을 향하는
사랑뿐임을
다시 배웁니다.
우리를 용서하고
사랑하듯이
원수를 이해하고
기도하는 예수 성심
성월의 부서지는
마음되십시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아버지처럼 사랑하라고 이르십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4).
원수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개인차가 있을 겁니다. 대개는 나와, 내가 사랑하는 이들, 내게 소중한 이들의 목숨을 빼앗거나 상해를 입힌 사람을 가리키지요. 하지만 이념과 사상이 달라서 서로 맞서고 대적하는 이들을 원수의 범주에 넣기도 합니다.
"이 내 원수! 또 나를 찾아왔소?"(1열왕 21,20)
제1독서에서 아합 임금이 엘리야에게 외칩니다. 엘리야는 나봇의 일로 분노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러 위험을 무릅쓰고 아합 임금 앞에 섰지요. 아합은 무장을 하지도 않고 폭력을 쓸 이유도 없는 엘리야를 왜 원수라 부를까요?
원수의 범위에는 사사건건 나를 공격하고 상처 입히는 이들은 물론, 나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도 포함됩니다. 내 생각이나 계획과 대립각을 세우고 엇나가는 이, 내 어둠과 죄악에 대해 직언을 하는 이, 결국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도 넓게 보면 적이고 원수일 수 있습니다.
"아합은 이 말을 듣자 제 옷을 찢고 자루옷을 걸치고 단식에 들어갔다"(1열왕 21,27).
나봇에게 저지른 극악무도한 범죄에 대해 하느님께서 상응하는 징벌을 내리시리라는 예언자의 전언에 아합은 당장 태도를 바꿉니다. 옷을 찢고 자루옷을 걸치고 단식을 하는 것은 회개와 참회의 전형적 행동입니다. 바라 마지않던 포도원을 차지한 기개 따위는 눈씻고 찾아 볼래야 찾을 수 없습니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아합 임금이 원수라 칭할 정도로 성가시고 불편한 존재인 엘리야의 말을 들었다는 점이고, 그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느님을 믿었다는 점입니다. 원수라 여겼던 존재에게서 자기 성장의 단서를 발견했다고 한다면 너무 거창할까요...
"그가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추었으니"(1열왕 21,29).
결국 하느님은 자신을 낮춘 아합 임금의 태도를 보시고 내리시려던 벌을 유예하십니다. 그 태도에서 통회의 마음을 보신 겁니다. 나봇의 억울한 죽음을 생각하면 당장 두 쪽을 내어 처단해도 시원찮을 악인이지만, 아합 역시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피조물이지요.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예수님의 자상한 당부입니다. 우리가 당장 나를 힘들게 하는 원수에게 집착해 하느님 자녀라는 본질을 놓치지 않길 바라시는 마음에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인간 실존을 잘 아시는 그분은 원수 사랑이 감정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그리 쉽지 않다는 걸 모르시지 않기에 우격다짐하듯 강요하지는 않으시지요. 그저 너희 아버지처럼, 너희가 사랑하고 또 너희를 사랑하는 그 아버지처럼 되어 보라고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경계가 없습니다. 구분하고 나눠서 일부분만 사랑한다면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의 원천이신 하느님께서 그러실 수 없기 때문이지요.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때 사랑입니다. 공정하고 정의롭고 치우침 없는 사랑, 나를 낮추고 너를 높이는 사랑, 나를 죽여 너를 살리는 사랑입니다. 이에 반하는 것은 편애와 집착이고 자기애와 욕정, 애욕과 과시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혹 원수로 여겨지는 이가 있습니까? 그이 때문에 힘드시죠? 그를 포함해 온 세상 모든 피조물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뜨겁고 진실하게, 담백하고 순수하게 아버지의 사랑을 닮아보려 애써 봅시다. 그 자체로 이미 우리는 아버지 사랑 안에 있습니다. 아멘.
기도할 때 이미 원수가 아니다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61452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마태오 5,43~48)
---
어느 회사의 입사 시험문제에 다음과 같은 문제가 출제되었습니다.
당신은 폭우가 거세게 몰아치는 밤에 운전하고 있습니다. 마침 버스정류장을 지나는데 그곳에는 세 사람이 있습니다.
1. 죽어가고 있는 듯한 할머니
2. 당신의 생명을 구해준 의사
3. 당신이 꿈에 그리던 이상형
당신의 스포츠카에는 단 한 명만을 태울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태우겠습니까? 선택 후 설명하세요.
당신은 위독한 할머니를 태워 그의 목숨을 우선 구할 수도 있을 것이고, 의사를 태워 은혜를 갚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회가 지나고 나면 정말로 꿈에 그리던 이상형을 다시는 만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200명의 경쟁을 제치고 1등으로 채용된 사람이 써낸 답은 이렇습니다.
“할머니를 병원에 모셔 가도록 의사 선생님께 차 키를 드리죠. 그리고 난 내 이상형과 함께 버스를 기다릴 겁니다.”
할 수 있다고 믿으면 답이 보이고 할 수 없다고 믿으면 답이 보이지 않습니다. 위와 같은 문제를 맞힐 수 있는 사람은 분명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일 것입니다.
할 수 있다고 믿으면 할 수 있고, 할 수 없다고 믿으면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셨기에 우리는 그런 마음을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전삼용신부-
---
'오늘의 복음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0년 6월 18일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0) | 2020.06.17 |
---|---|
2020년 6월17일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0) | 2020.06.16 |
2020년 6월 15일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0) | 2020.06.14 |
2020년 6월 14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0) | 2020.06.13 |
2020년 6월 13일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0) | 2020.06.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