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6월 15일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Margaret K 2020. 6. 14. 08:04

2020 6 15일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마태오 5,38-42)

 

Offer no resistance to one who is evil.
When someone strikes you on your right cheek,
turn the other one to him as well.
If anyone wants to go to law with you over your tunic,
hand him your cloak as well.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한재호신부-

 

어느 동네에 사이가 좋지 않은 이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중 한 사람이 마술 램프를 발견하였습니다. 그가 램프를 문지르자 그 안에서 요정이 나타났습니다. 요정은 그를 주인이라 부르며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저는 주인님께서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 세 가지 소원만 들어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 그 소원이 이루어지면 주인님께서 가장 미워하는 사람은 그것의 두 배를 누리게 됩니다.”
램프의 주인은 요정에게 궁전만 한 집 한 채가 생겼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정말 으리으리한 집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웃집에서 갑자기 집이 두 채가 생겼다고 좋아하는 것입니다.
램프 주인은 요정에게 두 번째 소원을 빌었습니다. “나는 저놈과 더 이상 마주치고 싶지 않아. 외국으로 이민을 갈 수 있게 나에게 100억만 보내다오.” 요정은 이 소원도 들어주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웃집에는 200억이 생겼습니다. 배 아픈 주인은 마지막 소원을 빌었습니다. 그것은 불행히도 자기 한쪽 눈을 잃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원수 같은 이웃이 양쪽 눈을 잃게 하려고 그런 것입니다. 
다소 유치한 예화일 수 있지만, 어쩌면 우리의 삶에서 이렇게 유치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미움에 사로잡힌 나머지 상대방의 불행을 꿈꾸다가 자신마저 불행해져 버리는 어리석음에 빠지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악인에게 맞서지 말라고 가르치신 것은 아무리 불의를 저지르는 악인일지라도 그의 불행을 바라지 말고 그를 끝까지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대하라는 의미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책을 9권이나 출판했고, 매달 묵상 잡지를 발행하고 있습니다. 또 인터넷에 20년째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런 저를 보고서 글 쓰는 것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겠다고 말씀하시지만, 점점 더 글에 대한 자신감이 없어집니다. 이렇게 부족한 글을 사람들에게 보여줘도 될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한없이 부끄러워집니다. 그런데 처음 글을 써서 인터넷에 올릴 때만 해도 그렇게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꾸준히 글을 쓰고 있는 나에 대해 ‘열심히 살고 있다’라는 특별한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20년 전의 글이 훨씬 나은 글이었을까요? 자신감 넘치게 쓴 글이지만, 지금 읽어보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습니다. 이런 글을 어떻게 인터넷에 올릴 생각을 했냐며 부끄럽기만 합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하지요. 우리 역시 많이 알면 알수록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겸손이 부족하다면 그만큼 앎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에 대해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분이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알면 알수록 주님 앞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알면 그만큼 겸손해지는 우리가 됩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우리에게 제시하십니다.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고,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겉옷까지 내주고, 천 걸음을 가지고 강요하면 이천 걸음을 가 주라는 말씀은 세상이 보여 주는 모습과는 전혀 다릅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겸손의 길임을 보여 주십니다. 복수하는 삶도 아니고, 자신의 것만을 챙기는 삶도 아니고, 오히려 어리숙하고 미련해 보이는 삶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겸손의 모습으로 사랑을 철저하게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주님을 알게 됩니다.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으며, 주님을 통해 참 행복의 길이라 할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겸손의 삶도 사랑의 삶을 외면하면서 철저히 세상의 논리를 통해서만 살아가려고 할 때, 우리는 주님을 진정으로 알 수 없게 됩니다. 그냥 급급하게 지금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알기 위해 더욱더 노력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지혜보다는 주님의 지혜를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미련하고 어리숙해 보이지만, 참 행복의 길로 갈 수 있는 길을 기쁜 마음으로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있게 됩니다.



멈추지 말고 한 가지 목표에 매진하라. 그것이 성공의 비결이다(안나 파블로바).

 


시간


지난 3월 말, 어머니께서 편찮으셔서 병원에 입원하셨습니다. 고령이신데 고관절 골절이 된 것입니다. 몸 상태도 좋지 않았습니다. 폐렴에 빈혈, 여기에 폐에 물이 차서 상당히 어려운 상태였습니다. 

소식을 듣고 강화에서 1시간 넘게 걸리는 병원까지 부랴부랴 운전해서 갔습니다. 그런데 면회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면회가 제안되어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행히 위험한 순간은 넘겼다고 해서, 얼굴도 뵙지 못하고 다시 성지로 돌아왔습니다. 

사실 할 일이 참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병원에 갔는데 허탕 쳤다는 생각에 억울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운전하는 동안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묵주기도를 바쳤던 것, 운전하며 어머니의 쾌유를 기원하는 화살기도를 계속 바친 것, 어머니와의 좋았던 추억을 생각했던 것 역시 소중한 시간이었다는 점입니다. 아쉽기는 하지만 억울해할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결과에 이르지 못하면 시간 낭비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소소한 일상도 나의 삶이며, 그 소소한 일상과 과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이 소중한 것입니다. 

죄로 기울어지는 시간 외에는 어떤 시간도 나쁘지 않습니다. 나쁘지 않은 시간을 나쁘다고 단정 짓는 순간, 내게 나쁜 시간은 참으로 많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시간, 나의 삶을 구성하는 이 시간에 좀 더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집중한다면 얼마나 많은 유익한 시간이 내게 다가오는지를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자주 발끈한다면?

-전삼용신부-

 

우리 ‘영성의 수준’은 어떻게 평가될 수 있을까요? 저는 제가 발끈할 때를 돌아봅니다. 타인으로부터 받는, 혹은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반응하고 발끈한다면 딱 저의 수준이 거기까지입니다. 발끈한다는 말은 공격받는 것에 대해 나의 ‘자아’가 반응한다는 뜻입니다. 큰 개나 큰 물고기와 같은 동물들은 작은 물고기나 고양이가 괴롭혀도 별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수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싸우겠다고 으르렁거리면 비슷한 수준이란 뜻입니다. 만약 우리가 자전거를 배우고 있다면 뒤에서 아버지가 자전거를 잡아주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거센 바람에 두려워하고 길이 울퉁불퉁해서 소리를 지른다면 뒤에서 잡아주시는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자신을 버리고 주님께 신뢰를 두는 사람은 세상 것에 두려워 반응하거나 발끈하지 않습니다.

      유튜브로만 보았지만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 중의 한 분이 박보영 목사입니다. 그분은 의사를 하다가 모든 재산을 다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길거리 아이들을 키우며 목회를 시작했던 분입니다. 그분을 제가 존경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도 이 사건 때문입니다.

      한 번은 자신이 키우는 여자아이가 길거리 생활을 다시 하기 위해 가출했습니다. 몇 주 뒤에 아이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통사정하고 다시 다니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목사님을 부르더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이가 임신한 상태인데 그 아버지가 목사님이라고 아이가 말했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집으로 데려올 때 등 뒤에서 선생님들의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아이에게도 뭐라 하지도 않았습니다. 아이는 죄책감을 견딜 수 없어 목사님의 아이가 아니라 가출했을 때 만난 오빠의 아이라고 실토하였습니다.

 

      어떻게 자신을 흉악한 범죄자 취급을 하며 욕을 하는데 반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자신을 그렇게 만든 은혜를 원수로 갚는 아이에게 화를 내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자기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아는 반응하지 않습니다. 영성은 자아를 얼마나 죽이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저는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발끈하면 나의 영성은 거기까지입니다.

 

비오 신부님은 사제 서품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몸에 오상을 받으셨습니다. 신자들은 성인 신부님으로 좋아했지만 몇몇 고의 성직자들은 그것을 마귀의 장난으로 여겼고 그렇게 보고하여 교회는 신부님이 신자들과 함께 하는 미사를 금지했습니다. 신부님은 아무 반응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순종하여 혼자 몇 년 동안 미사를 드렸습니다. 이런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지만 신부님은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그리스도의 다섯 상처를 받을 때 그분의 자아도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분 영성의 수준입니다. 내가 어떤 일에 자주 발끈한다면 나의 수준이 거기까지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자주 꾸던 꿈이 슈퍼맨이 되어 하늘을 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높이 날아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계속 건물과 산에 부딪혀서 떨어졌습니다. 우리 영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위로 오르는 방법은 그리스도처럼 못 박히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못 박히실 때 참지 못하시고 발끈하셨다면 이 지구상에 어떤 생명체도 생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눈 한 번 깜빡이는 것으로 모든 인간을 재로 만들어버리실 수도 있으십니다. 만약 그러하시다면 그분은 하느님이 아니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되시기 위해 그분은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조롱하는 인간들의 공격을 그대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 못들에 의지하여 하늘로 높이 들리우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처럼 지상의 어떠한 것에도 반응하는 수준이 되지 말라고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조재형신부-

 

세계적인 생태학자가 티베트에서 스님들과 회의를 했을 때입니다. 생태학자의 찻잔에 파리가 한 마리 빠졌습니다. 생태학자는 그런 경험이 전에도 있었기에 별일 아닙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스님이 생태학자의 얼굴을 보니 생태학자는 다시금 별일 아닙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스님은 손가락을 넣어서 찻잔에 빠진 파리를 꺼내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돌아와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파리도 별일 없습니다.’ 순간 생태학자는 깜짝 놀랐습니다. 자신은 생태학자로 자연과 환경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를 중심으로 생각했다는 걸 알았습니다. 스님은 생태학자는 아니지만 찻잔 속에 빠진 파리를 먼저 생각할 정도로 자연과 환경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코로나19가 인간의 몸에 들어왔습니다. 대공황 때보다 더 큰 경제위기가 왔다고 합니다. 2차 세계대전 때 보다 더 힘들다고 합니다. 여행도 할 수 없고, 식당에도 갈 수 없고, 학교에도 갈 수 없고, 축구도, 야구도 구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치료약을 개발하고, 백신을 만들려고 합니다. 우리 몸에 들어온 바이러스를 내 보내야하기 때문입니다. 유럽도, 미국도 이제 어느 정도 피해를 감수하면서 활동을 재개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 별일 아닌 것이 아니지만 경제위기가 더 큰 문제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는 지구가 인류에게 보낸 백신인지도 모릅니다. 인류가 더불어 살아가는 자연과 생물에게 큰 문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탐욕과 개발은 생태계에게는 커다란 위기가 되고 있습니다. 백신과 치료제를 개발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동안 인류가 걸어온 삶의 태도를 돌아보는 것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는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나봇에게 포도원은 삶의 전부였습니다. 조상이 물려준 유산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포도원은 매매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땅은 소유와 매매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조상들이 물려준 유산이었고, 후손들이 살아가야할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그래서 땅은 어머니와 같았고, 삶의 전부였습니다. 아합 왕에게 나봇의 포도원은 그저 가지고 싶은 또 다른 포도원이었습니다. 그에게는 포도원이 차고 넘쳤습니다. 그럼에도 아합 왕은 나봇의 포도원을 가지고 싶어 합니다. 그에게 포도원은 조상이 물려준 유산도 아니었습니다. 포도원은 열매를 맺도록 일하는 삶의 터전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또 하나 가지고 싶은 소유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리고 별일 아닌 것처럼 나봇의 포도원을 부당하고, 불의한 방법으로 빼앗았습니다. 아합 왕만 그랬을까요? 지난 세기 인류는 제국주의라는 부당한 힘으로 식민지를 만들었고, 약한 이들의 포도원을 강제로 수탈하였습니다.

 

한국의 대통령이 WHO의 회의에 참석해서 코로나19에 대한 백신은 인류가 함께 개발하고, 백신은 모든 나라에 동등하게 공급되는 공공재로 만들자고 제안하였습니다. 가난하고, 병든 이들에게 우선적으로 백신이 공급되도록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코로나19와 같은 바이러스는 단절과 봉쇄만으로는 막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가 안전해질 때 비로소 나도 안전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화와 연대, 협력과 나눔만이 문제를 해결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구상에서 가장 강한 나라는 백신을 독자적으로 개발하겠다고 합니다. 자국민에게 우선적으로 공급하고, 백신을 소유하겠다고 합니다. 수요와 공급의 논리에 따라서 가격을 정하겠다고 합니다. 당연히 가난하고, 병든 이들은 백신의 도움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경제논리에 몰입하는 이들에게 찻잔 속의 파리는 별 일 아닐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이신 삼위일체 하느님께 문제가 있어서 사람이 되신 것은 아닙니다. 그분들은 친교와 나눔 그리고 사랑으로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천상의 질서와 관계는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디에 문제가 있었을까요? 하느님께서 만드신 세상에, 하느님께서 특별한 관심과 사랑으로 창조하신 인간에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스님이 파리를 사랑해서 찻잔 속의 파리를 꺼낸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 직접 세상이라는 찻잔 속으로 내려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인간의 언어와 인간의 생각으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느님의 의로움이 무엇인지 이야기하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외면하고,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십시오. 누가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십시오.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십시오.”

 

죽는 것이 곧 사는 길입니다. 지는 것이 곧 이기는 길입니다!

 -양승국신부-

 

사악함과 교활함에 있어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왕비가 있었으니 사마리아 임금 아합의 아내 이제벨이었습니다. 부창부수(夫唱婦隨)라고 둘은 합세해서 힘없는 백성들을 괴롭혔습니다.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은 나봇이었습니다. 하필 나봇은 아합 임금 궁 바로 옆에 좋은 포도밭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나봇이 싫다는데도 불구하고 집요하게 아합은 나봇 소유의 포도밭을 팔라고 압력을 넣었습니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소중한 유산이기에 이를 거부하자, 부부는 의기투합해서 간계를 꾸밉니다.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위해 요즘으로 치면 뒷골목 조폭들까지 동원하고, 빠져나갈 수 없는 함정을 만드는 참으로 악랄한 부부입니다. 마침내 그리도 원하던 포도밭을 손에 넣은 아합 임금은 회심의 미소를 짓지만, 그 기쁨은 잠시뿐입니다. 부부가 합심해서 저지른 악행은 수천년이 흘러도 계속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사악함과 권모술수가 철철 넘쳐흐르는 아합 임금과 이제벨 왕비 부부를 보니 한 비슷한 부부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군인으로서 충실해야 할 국방의 의무는 뒷전이고, 어수선한 정국을 틈타 탱크를 앞세워 정권을 잡으신 분, 만만한 재벌들 등쳐서 천문학적 재산을 축척한 분, 부정축재한 돈 회수하려니 29만원 밖에 없다는 분, 그분이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보다 훨씬 멋질뿐 더러, 대한민국 민주화의 아버지라고 칭찬하는 그 부인! 

 

지금이라도 진정으로 참회하고 반성하면 참 좋을텐데, 그럴 기색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으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아합 임금과 이세벨 못지 않은 비참하고 가련한 독재자와 부인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텐데, 그들 후손들은 참으로 불쌍합니다. 

 

세월이 흘렀지만 아합 왕과 이제벨 왕비가 풍기던 악취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눈에 즉시 포착된 것이 백성들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을뿐 악행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사악한 왕과 왕비요 끄나풀들이었습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습니다. 윗물이 탁하면 아랫물도 탁하기 마련입니다. 백성들의 지도자들이 악행과 타락의 전문가들이며 권모술수와 착취의 달인이다보니, 그런 분위기는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자연스레 퍼져나갔습니다.

  

최상위층에서 강탈해가니, 피해를 본 그 다음 층에서는 아랫 층에 화풀이라도 하듯이 강탈해가고, 강탈당한 사람들은 울분은 못참고 폭력으로 대응을 하고...이런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를 눈여겨보신 예수님이셨기에 정반대의 가르침을 백성들에게 건네신 것입니다.

  

“악인들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오 복음 5장 39~42절)

  

예수님 말씀 언뜻 들으니 참으로 거부감이 느껴집니다. 뜨거운 피가 흐르는 인간으로서 그게 가능한 일일까? 하는 의구심도 듭니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보니 참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이며, 위대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진리의 핵심은 언제나 수용하기가 참으로 힘듭니다. 그러나 기꺼이 수용하고 받아들일때, 그 순간부터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누릴 수 없는 대자유가 선물로 주어집니다.

  

우리 그리스도교의 핵심 진리는 언제나 역설적입니다. 죽는 것이 곧 사는 길입니다. 지는 것이 곧 이기는 길입니다. 내려서는 것이 곧 올라가는 길입니다. 작아지는 것이 곧 커지는 길입니다.

  

오른뺨을 제대로 한대 맞고 나서 강펀치로 대응하지 않고 왼뺨을 내미는 일,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겉옷까지 내주는 일, 천 걸음을 가자는 사람에게 이천 걸음을 가주는 일,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함께 하신때 가능합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5,38-42: 나는 말한다. 앙갚음하지 말아라

오늘 복음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 윤리적 특성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법은 기원전 1700년경 함무라비 법전에 나오는 동태 복수법’(lex taleonis)이다. 이것이 역시 구약성서의 윤리 일부분이 되었다.

 

탈출 21,22-25에는 사람들이 서로 싸우다 임신한 여자와 부딪쳤을 경우, 그 여자가 유산만 하고 다른 해가 없으면, 가해자는 그 여자의 남편이 요구하는 대로 벌금형을 받아야 한다. 그는 재판을 통해서 벌금을 치른다. 그러나 다른 해가 뒤따르게 되면, 목숨은 목숨으로 갚아야 하고,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고 하고 있다.

 

이 율법은 인간이 자신의 지체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한, 상대방에게도 악한 행실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율법은 사악한 자들을 선하게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이 율법 때문에 선한 이들을 악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 법은 재판관을 위한 것이지 개인이 복수하기 위한 법이 아니었다. 또 문자 그대로 실행되지도 않았다. 본 피해 이상을 벌을 주지 말라는 지침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뺨마저 돌려대어라.”(39) 이 말씀은 단순히 인내에 관한 말씀이 아니다. 이 말씀은 어떤 교회와 신앙을 비방하여 말하는 사람에게 자기가 지닌 믿음에 대하여 대답할 수 있도록 준비된’(1 3,15 참조) 자세를 말한다. 그래서 올바른 교리를 알게 도와주면 그들은 비난을 그치고 신앙을 갖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런 손찌검에 당신 뺨을, 채찍에 당신 어깨를 내주실 것이다.

 

네 속옷과 겉옷을 내주어라.”(40) 우리를 비방하는 사람들이나 박해하는 이들이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하여 소송을 걸어 우리 것을 빼앗으려 한다면 우리의 겉옷을 그들의 손에 던져 주고 더 좋은 옷인 의로움을 입고 달아나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육신의 옷을 찾으려 하는 동안에 영적인 가장 고귀한 옷을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41) 주님께서는 이렇게 우리를 모욕하는 이들에게도 어려움에 부닥쳐 있으면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모욕하는 이들에겐 용감한 정신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고 하신다. 이 말씀은 또한 비신자나 아직 진리를 따르지 않는 사람이 만물을 세우신 분, 곧 하느님 아버지에 관해 이야기하면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라는 뜻이다. 즉 그를 신앙의 길로 인도하라는 말씀이다.

 

모든 것을 이웃 사랑으로 변화시키라고 하신다. 이것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겠다. 시간을 요구할 수도 있고, 우리의 마음 자세도 그렇게 하려는 원의가 있어야 한다. 시간을 기다리고 기회를 보아 서로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갖도록 하여야 한다. 이것이 주님을 따르는 우리의 자세가 아닐까?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 5, 39)

-한상우신부-

우리가 맞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믿음이란
우리가 악인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우리가
믿는 믿음입니다.

맞서서 이기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
의탁하는 기도에
있습니다.

맞서는 힘이 아닌
주님을 향하는
믿음의 힘에
우리가 성장합니다.

맞서려는 
마음대신
복음의 길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주어진 
시간속에서
잃어버린 것이
우리의 행복임을
깨닫게됩니다.

우리가 머물러야 
할 곳은 주님의
품이지 악인을
향한 미움과
증오가 아닙니다.

서로를 
상(傷)하게 하는
악순환의 굴레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것은
우리가 악인에 맞서거나
반응하지 않는 
믿음뿐입니다.

그 믿음이 서로를
치유할 것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 안에서 우리는 참으로 어처구니없이 불의와 마주합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 5,39).

예수님 말씀이 점점 어렵게 다가옵니다. 불의와 억압이 판치는 세상에서 가진 것 없고 힘 없는 이들은 제 한 몸 지켜내기도 버거운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짓밟히지 않으려고 안간힘 쓰고, 행여 당하게 되면 되갚아주고 싶어합니다.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럴 수밖에 없어 보이는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영 다른 세상 말씀같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아주 잔인무도한 폭력이 등장합니다. 재산과 권력으로 거칠 것 없는 아합 임금 내외가 포도밭 임자인 나봇에게 저지르는 만행입니다.

아합은 자기 궁 곁에 정원을 꾸미고 싶어 나봇의 상속 재산인 포도밭을 탐합니다. 정상적인 이스라엘 자손이라면 조상 대대로 이어온 상속 재산을 함부로 처분하지 않지요. 아무리 임금이어도 하느님을 경외하고 율법을 존중한다면 이런 요구를 하지 않을 겁니다.

나봇 이야기는 사회 정의와 권선징악의 주제를 숙고하도록 돕는 좋은 텍스트가 됩니다만, 오늘 말씀께서는 저를 다른 길로 이끄십니다.

"그대의 포도밭을 나에게 넘겨주게. 그 포도밭이 나의 궁전 곁에 있으니 그것을 내 정원으로 삼았으면 하네"(1열왕 21,2).

아합 임금의 터무니없는 요구 안에 감추어진 상징 안으로 들어가 봅시다.

하느님과, 신부인 하느님 백성의 사랑을 노래한 아가에는 "포도밭"과 "정원"의 표상이 풍부히 등장합니다.

"아침 일찍 포도밭에 나가 포도나무 꽃이 피었는지 ... 우리 보아요. 거기에서 나의 사랑을 당신에게 바치겠어요"(아가 7,13).

포도밭은 하느님과 인간이 사랑을 나누는 자리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되고 성령의 기운이 되는 포도주를 빚는 열매가 맺히는 곳이지요. 그런데 이 포도밭에 이르는 길은 결코 녹록하지 않습니다. 아가의 여인 역시 환희와 상실의 굴곡진 여정을 거쳐 포도밭에 도달하지요. 우리가 걷는 신앙 여정, 인생 여정과 다르지 않습니다.

"나의 포도밭은 오직 나에게만 속한다오"(아가 8,12).

포도밭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여인,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그녀에게 하느님 외에 다른 주인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온전히 소유하고 온전히 속한 관계, 바로 하느님과 당신 백성과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를 깨뜨리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건 악입니다. 도움이나 호의를 가장하고 들어와 비등한 대가를 제시한다 해도 악입니다. 그래서 아합은 하느님에게서 이스라엘을, 그리스도에게서 인류를 분리시키는 악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결국 나봇은 이제벨의 계략과 음모로 스러집니다. 거짓인 줄 알면서도 이에 동조해 무고한 이를 해친 자들은 그것이 충성이라 여길 겁니다. 물론 포도밭도 당장은 아합의 손아귀에 들어가겠지요.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다시 이 말씀을 마주합니다. 예수님의 요구는 점점 더 구체적이 되어 갑니다. 오른뺨 친 이에게 왼뺨도 대주라고, 속옷 달라는 이에게 겉옷도 주라고, 천 걸음 가자고 강요하면 두 말 않고 그 곱절로 가주라고, 달라면 주라고, 꿔달라면 꿔주라고...

이제 마음 깊숙한 곳에서 질문이 하나가 올라옵니다. "도대체 왜 그래야 하죠? 그렇게 해서 얻는 게 뭐죠?"

사실 예수님은 그처럼 어려운 요구를 우리에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바로 오늘 말씀 안에서 나봇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포도밭인 우리, 사랑하는 신부인 우리를 지키시려다 무참히 희생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장 비참한 죽음으로 모든 것을 잃은 듯 보였지만, 결국은 부활로써 모든 영혼을 구원하고 차지하십니다! 아합과 이제벨이 피로 약탈한 포도밭을 누리지도 못하고 엘리야 예언자의 전언대로 비참히 생을 마감한 것처럼(1열왕 21,17-26; 22,29-40; 2열왕 9,30-37 참조), 결국 악은 주님 앞에서 패배합니다.

당장에는 무도한 악행과 무죄한 이들의 희생이 전면에 보이지만, 예수님의 희생제사는 그 너머에 무언가 있다고 속삭입니다. 악에 대한 승리와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묵묵히 수난과 죽음의 여정을 걸으신 예수님은 그래서 당신이 아시고 친히 가신 길을 우리에게 권고하시지요. 그분은 그러셔도 됩니다. 충분히 자격이 있으시지요.

사랑하는 벗님! 아까의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도대체 그렇게 해서 얻는 게 뭐죠?"

이 답 역시 오늘의 말씀 안에 들어 있습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사는 것이라네"(영성체송).

그렇습니다! 억울한 죽음으로 목숨을 잃은 나봇은 하늘 나라에서 비옥한 포도밭을 영원히 차지할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맞서지 않고, 내어주고, 가 주고, 양보하고, 물러서 준 양선한 이들도 그러할 것입니다. 지상에서건 천상에서건 양선한 이들이 한 평생 살 주님의 집은, 주님과 나누는 뜨거운 사랑이 포도주로 빚어지는 아름답고 평화스런 포도밭입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그 사랑에 취해 행복하지요.

이제 예수님의 요구가 강요 아닌 초대로 느껴집니다. 주님과 나의 사랑의 포도밭을 지키는 일 말고는 과감히 내려놓고 내어 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지요. 조금 잃고 조금 손해 보더라도 마음과 영으로 더 큰 부요를 차지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무엇보다 사랑을, 하느님을 차지하십시오.

 

악인의 악에 말려들지 않는 비법-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61174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6월 18일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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