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6월 13일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Margaret K 2020. 6. 12. 07:42

2020년 6월 13일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마태오 5,33-37)


Let your ‘Yes’ mean ‘Yes,’

and your ‘No’ mean ‘No.’
Anything more is from the Evil On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한재호신부-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맹세를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수도자나 성직자들은 서원식 또는 서품식 때에 서약을 합니다. 또한 평신도들도 세례 때에 서약을 합니다. 그렇다면 맹세를 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말씀에 사용된 ‘맹세하다’의 그리스 말 ‘옴뉘오’는 ‘절대자이신 하느님을 근거로 자신이 진실하다고 주장한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사람이 맹세를 할 때에도 이 낱말을 사용하지만, 신약 성경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당신 자신을 두고 맹세를 합니다(루카 1,73; 히브 3,11; 6,13 참조).
예외적으로 하느님이 아닌 사람이 맹세를 하는 경우가 두 번 있습니다. 한 사람은 헤로데로서, 헤로디아의 딸에게 왕국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맹세를 합니다(마르 6,23 참조). 다른 한 사람은 베드로인데, 예수님께서 체포되시어 대사제의 저택에 끌려가셨을 때,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면서 맹세를 합니다(마르 14,71 참조). 이렇게 볼 때 맹세를 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려고 하느님을 이용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하늘, 땅, 예루살렘을 두고 맹세를 하기에 사람은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존재임을 깨달으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보잘것없는 피조물일 뿐입니다. 그러한 우리가 하느님을 이용하여 우리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려 한다면, 이는 하느님 앞에서 주인 노릇을 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그저 우리의 참주인이신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에는 “예.”라고 응답하고, 그분께서 원하지 않으시는 것에는 “아니요.”라고 순명하는 것뿐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평생 죽자 살자 일만 했던 어느 형제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가족의 행복을 위해 자신은 늘 일에만 매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퇴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까지 모아둔 돈도 있고 시간도 많으니, 여생은 행복하게 가족과 살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퇴직 후에 자기 생각처럼 되지 않았습니다. 남편, 아버지의 권위는 하나도 없는 것 같고,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럽기만 했습니다. 

늘 꿈꿔왔던 가족이 함께 모여 거실에서 과일을 먹으며 화목한 모습으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전혀 생기지 않았습니다. 왜 이렇게 다들 바쁜지 가족이 함께 여행을 가는 시간도 없었습니다. 자연스럽게 혼자 있는 시간만 많아졌고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결국, 이 형제님은 다시 일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은 평생 일만 해야 할 팔자라면서 말이지요. 

이 형제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퇴직 전까지 가족이 화목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시간이 많아지면 저절로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있을까요? 가난해도 화목하며 서로에 대해 사랑을 주고받는 가정과 부유하지만 서로 불목하며 사는 가정 중에 누가 더 행복할 지는 굳이 질문하지 않아도 아실 것입니다. 

사랑이 늘 먼저였고, 사랑이 진리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은 늘 나중이고, ‘사랑이 밥 먹여주느냐?!’면서 거짓인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행복으로 이끌어주는 것은 늘 사랑의 마음에서 시작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거짓 맹세는 참으로 자주 이루어집니다. 물론 거짓이라고 하기도 뭐합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할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랑도 나중에, 봉사도 나중에, 믿음도 나중에, 희생도 나중에……. 늘 언제나 나중입니다. 그러나 그 나중에 오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결국, 나의 맹세는 거짓이 되고 맙니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려라.’라는 말씀은 지금 당장 실천해야 할 사랑임을 분명하게 합니다. ‘나중에’에 포함되는 맹세가 아니라 ‘지금’ 시작되는 맹세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중에’ 이루어질 맹세는 우리를 후회의 길로 이끌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루어지는 맹세는 우리를 행복의 길로 이끌어줍니다. 

자신이 하는 사랑의 맹세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늘 뒤로 미루는 사랑이 아닌, 지금 실천하는 사랑, 그래서 주님의 사랑을 따라 이웃들에게 기쁘게 전할 수 있는 우리가 되었을 때, 하느님 나라가 멀리에 있지 않게 될 것입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바다와 하늘과 별 또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마십시오. 지금 그들을 보러 가십시오(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너 커서 뭐가 되고 싶어?”

어렸을 때 참 많이 들었던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다 보면, 되고 싶었던 모습이 많았습니다. 

야구선수, 탁구선수, 과학자, 수학자, 선생님, 그리고 신부님도 있었습니다. 모두 되고 싶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다 결국 현재 사제로 살고 있습니다.

꿈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즉, 어떤 꿈이냐가 중요합니다. 저의 경우, 단순히 신부가 되는 일회적 꿈이 아니라, 어떤 신부가 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꿈이 없다고 합니다. 10대에는 공부하느라, 20대에는 스펙을 쌓느라, 30대에는 취업하고 경력을 쌓느라, 40대에는 가족을 부양하느라 꿈을 꾸고 그 꿈을 구체화하는 일을 하지 못합니다. 그저 지금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벅차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늘 ‘나중에’를 외칩니다. 

꿈을 꾸기 힘들 정도로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나를 위해 꿈을 꾸어야 하지 않을까요? 새롭게 태어날 어떤 나를 만들어야 합니다. 

나의 꿈을 만들고 그 꿈을 구체화하는 오늘이 되시길 바랍니다.                   

 

자기를 믿는다는 말과 자기를 합리화한다는 말은 동의어다

-전삼용신부-

 

사람은 살아가면서 누구를 가장 믿고 신뢰해야 할까요? 어떤 이들은 결국, 믿을 것은 ‘자기 자신’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제가 ‘자기 자신을 절대 믿으면 안 된다’고 말하면 이상한 눈으로 쳐다봅니다.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데 어떻게 자기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하겠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믿지 않는 것이 결국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길임을 우리는 잘 알지는 못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은 절대로 자신을 신뢰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을 두고도, 땅을 두고도,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라고 하십니다.

맹세는 자기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을 때 하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네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도 말씀하십니다. 네가 머리카락 하나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는데 어떻게 그런 능력으로 자기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말씀이십니다.

      물론 하늘이나 땅, 그리고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그 자리는 하느님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확신은 하느님만 할 수 있는 부분이지 인간이 할 것이 아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옳으신 분은 하느님밖에 없으니 하느님께 신뢰해야지 자기 자신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을 신뢰하면서 동시에 하느님을 믿을 수는 없을까요? 인간은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신뢰의 정도는 한정되어 있고 내가 그 신뢰를 나 자신에게 주는 만큼 하느님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제 생각을 지나치게 믿음으로써 결국 진리를 보지 못하여 되돌이킬 수 없는 삶을 살기도 합니다.

 

      영화 ‘기억의 밤’은 자기 자신만을 굳게 믿는 두 형제의 이야기입니다. 재수생인 동생과 모든 것에 완벽한 형은 우애가 좋았습니다. 그런데 새로 이사 온 집에서 형은 조금씩 이상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형이 조금씩 형처럼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부모도 조금 이상합니다. 친부모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는 가족들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집을 빠져나와 경찰서로 도망칩니다. 가족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경찰서에서 신원조사를 해 보고 거울을 보니 자신은 20대 초반의 재수생이 아니라 이미 40이 넘은 아저씨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형이 꾸민 일이었습니다. 형은 사실 20대 초반입니다. 자신의 가족을 살해한 범인을 찾다가 결국 찾아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범인은 기억상실증에 걸려 자신의 범행을 기억해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최면을 걸어 모든 것을 20년 전으로 돌려놓고 그 범인이 모든 것을 기억해 낼 수 있도록 꾸몄습니다. 이 과정에서 범인은 조금씩 기억을 찾게 되었던 것이고 결국 자신이 함께 살던 이들이 자신의 가족이 아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결과는 어떨까요? 자신은 착한 재수생이기에 범인이 아니라고 굳게 믿었던 동생은 모든 것을 깨닫고 자살합니다. 범임을 찾아 원수를 갚으면 속이 후련할 것이라 믿어 고생 끝에 범인의 기억을 되살려주기는 했지만 결국 남는 것이 없음을 깨닫고 형도 자살합니다. 이렇게 영화는 허무하게 끝납니다. 그들의 착각이 처음부터 이 결말로 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런 예화를 일반화의 오류라고 말씀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한 영화를 너무 모든 것에 적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심판 때는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당연히 잘 살았다고 굳게 믿으며 살아온 이들은 악한 삶을 살아왔음을 알게 될 것이고, 끊임없이 죄인이기에 주님의 자비만 청하며 살았던 이들은 선한 삶을 살았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성인이라고 굳게 믿었고, 김수환 주기경은 돌아가시기 직전 하느님의 자비를 청해 달라고 신자들에게 부탁했습니다.

      믿음도 하나의 에너지입니다. 우리가 힘을 한쪽에 쓰면 다른 쪽에 쓸 힘은 그만큼 줄어듭니다. 자기 자신과 주님도 그렇게 대치됩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버리지 않으면 당신을 따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자기 자신에 신뢰를 두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참 나’는 ‘내가 믿는 나’가 아니라 내가 믿는 나를 믿을 것인지, ‘나는 나다’라는 주님을 믿을 것인지 결정하는 ‘나’입니다. 이렇듯 ‘참 나’와 ‘자아’, 그리고 ‘주님’이 구별될 때 비로소 자아에만 신뢰를 주던 것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내가 나와 주님 사이에서 나의 신뢰를 어느 쪽에 줄 수 있는지 정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이전에는 주님을 믿어도 결국 자아가 만들어낸 우상을 믿는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100%의 신뢰를 자아에게 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켈리 맥고니걸’의 「움직임의 힘」이란 책에 헤펠이란 운동을 아주 싫어했던 한 여인의 사례가 나옵니다. 그녀는 여자는 달리기하면 안 된다는 철저한 믿음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물론 이것은 50년 동안 뚱뚱하게 살아온 자신을 합리화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라고 왜 하면 안 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믿음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엔 마라톤을 완주하게 됩니다. 건강해진 것은 이루 말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믿으며 크고 작은 이러한 착각 속에서 자기 합리화를 하며 삽니다. 여기에 빠지지 않으려면 나 자신을 믿는 나의 믿음에 의심을 가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한 번쯤은 믿고 실천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나의 신뢰는 나 자신에게서 조금씩 주님께로 옮겨가게 되고 그만큼 하느님 자녀의 모습으로 변하게 됩니다.

 

-조재형신부-

 

어린 시절의 기억입니다. 가끔 동네에 뻥튀기 아저씨가 왔습니다. 옥수수, , 보리를 가져다주면 기계에 놓고 한참을 돌립니다. 그리고 아저씨가 큰 소리로 뻥이요라고 말하면 아이들은 귀를 막고 보았습니다. 아저씨가 막대로 돌아가던 통을 열면 큰 주머니로 강냉이가 들어가고, 쌀 과자가 들어가고, 보리과자가 들어갔습니다. 고소하고 달달했던 뻥 과자를 먹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은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중학생 때의 기억입니다. 공부를 그다지 잘 못했습니다. 그런 제게 동기부여를 해 주신 분이 있습니다. 10등 안에 들면 자전거를 사 준다고 하셨습니다. 뒤에서 맴돌던 제가 10등 안에 든다는 것은 땅에서 물고기를 잡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자전거는 가지고 싶었습니다. 열심히 공부했고, 마침내 9등을 했습니다. 그때의 기분은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얻은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나도 할 수 있다. 나도 하면 된다.’라는 자신감입니다.

 

제가 살면서 나름대로 세운 원칙이 있습니다. 100원 짜리를 95원에 사면 그런대로 잘 한 것입니다. 105원에 사면 그것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100원 짜리를 50원에 산다고 하면 그것은 분명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물건에 문제가 있거나, 사기를 당할 확률이 높습니다. 100원 짜리를 150원에 산다고 하면 그것도 분명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시세를 알아보지 않고, 성급하게 결정했을 확률이 높습니다. 수조원대의 사기로 물의를 일으킨 투자증권회사가 있었습니다. 높은 수익률을 보장한다고 하였고, 사람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몰려들었습니다. 높은 수익률은 당연히 원금의 손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원금의 보장이 안 될 수 있음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당장 눈앞의 높은 수익에 눈이 멀어 덥석 큰돈을 투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을 속이는 사람은 당연히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속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도 있습니다.

 

오늘 엘리사는 12마리의 겨릿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소가 12마리 있다는 것은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12마리의 겨릿소를 가지고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엄청난 땅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만났고, 이제 겨릿소를 모두 포기합니다. 재산과 땅을 모두 포기하고 엘리야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엘리사는 분명 엘리야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바알의 예언자들을 물리친 이야기, 아합 왕의 잘못을 올바르게 지적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엘리사에게 이제 재산과 땅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 더 가치 있고, 더 보람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도 작은 형제회 수도회를 선택했습니다. 작은 형제회 수도회는 아프리카로 선교를 갔었고, 안토니오 성인은 아프리카로 선교를 가는 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의 선택은 기준이 있습니다. 재물, 성공, 권력, 명예가 기준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에서는 그것들이 많은 것들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직장에서 좋은 성과를 내는 것도, 험한 일을 마다하지 않는 것도 좋은 보상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선택들이 모여서 지금의 사회를 만들었습니다. 원하는 곳으로 휴가를 갈 수 있고, 좋은 집을 살 수 있고, 먹고 싶은 음식을 먹을 수 있고, 좋은 공연을 마음껏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의 기준은 믿음, 희망, 사랑입니다. 오늘 엘리사가 선택했던 것처럼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꺼이 좋은 직장을 포기 할 수 있고, 아프리카로의 선교를 떠나기도 합니다. 그분들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화, 행복, 기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렇게 이야기 하셨습니다. ‘강론자는 자신이 하느님께 사랑받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그리고 언제나 그분의 사랑이 결정적이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아름다움을 마주하면서 강론자는 자신의 삶이 그 아름다움에 대한 충분한 찬미가 되지 못한다고 자주 느껴서 그토록 위대한 사랑에 더욱 충실하게 응답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마음을 열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내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말씀이 자신의 삶에 와 닿지 못하게 한다면, 그 말씀이 자신을 반성하도록 이끌지 못한다면, 그 말씀이 자신에게 권고가 되지 않는다면, 그 말씀이 자신을 흔들어 놓지 않는다면, 그 말씀과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내지 않는다면, 그는 분명히 거짓 예언자, 사기꾼, 협잡꾼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복음의 기쁨 151)

 

교황님의 말씀을 떠올리면서 오늘 복음 묵상을 하니 명확하게 이해 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따르는 것이 제자의 길입니다. 자신의 욕심과 자신의 뜻을 먼저 찾으려는 것은 사기꾼의 행위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너희는 말할 때에 .’ 할 것은 .’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양승국신부-

 

선거 때만 되면 어김없이 나타나 기상천외하면서도 허무맹랑한 공약들을 남발해서 빅웃음을 선사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한 재미있는 후보는 입만 열만 ‘억억!’ 입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 생계 지원금 1억! 결혼 자금 1억! 주택 자금 2억! 참전 용사 5억! 거기에다 유엔 본부 판문점 이전! 

 

하나 하나 따지고 보니 그 후보자가 당선되면 나라 곳간이 금새 바닥이 날것이 백퍼센트 확실시되더군요. 뒷감당 못할 헛공약들 앞에 사람들은 헛웃음만 터트렸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이스라엘에도 거짓 예언자들의 헛 공약들이 남발했습니다. 나만 믿고 조금만 기다리면 로마 식민 통치로 인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겠다.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하고도 드넓은 토지를 무상으로 나눠주겠다. 예루살렘은 온 세상의 중심이 되게 할 것이며, 뽑힌 백성 유다인들의 곳간은 곡식으로 흘러넘치도록 해주겠다. 

 

돌아보니 저 역시 무수한 헛 공약들을 남발했습니다. 하나 하나 따져보니 부끄러워 얼굴을 들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마음 속으로 자주 다짐을 합니다. ‘헛된 공약 남발하지 말고 그저 주어진 조건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정답이다!’ 

 

그런 사람들 있습니다. “저 엉뚱한 프로젝트 저거 자네가 기획한거지?”하고 물었을때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닙니다. 하늘을 두고 맹세컨데, 그거 제가 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제가 했다면 손에 장이라도 지지겠습니다.” 

 

안했으면 그냥 아니라고 이야기하면 좋을텐데,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의 말을 믿게 하려고 하늘, 땅, 하느님까지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소한 일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존귀하신 하느님까지 증인으로 내세우는 자들 앞에 크게 노여워 하시며, 솔직하고 단순하게 처신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의 허세와 교만을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허무맹랑한 거짓 맹세를 아예 하지 말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아예 맹세하지 마라. 너희는 말할 때에,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오 복음 5장 34~37절) 

 

사실 유다인들은 하느님에 대한 지극한 경외심으로 인해 그분의 이름조차 입에 올리는 것을 꺼려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두고 맹세한다는 표현 대신 하늘, 땅, 예루살렘, 머리를 두고 맹세했습니다.

  

사실 하늘, 땅, 예루살렘 등은 하느님을 지칭하는 우회적이 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고 그분께서 땅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신다는 믿음 때문에 하느님 대신 하늘, 땅을 두고 맹세했던 것입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그들의 전매특허인 ‘맹세’를 밥먹듯이 되풀이하는 와중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절대 진실’을 요구하셨습니다. 그 결과 절대로 맹세를 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맹세는 대체로 불신 사회에서 성행하는 어법입니다. 누군가가 말을 하면 사람들이 그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신의 말을 제발 믿어달라는 의도에서 맹세를 내세웠습니다.

  

유다인들은 맹세를 즐겼는데, 맹세를 할 때 성전이나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구속력이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대신 성전의 금(금촛대, 금속죄판, 금화)이나 제단 위에 놓인 예물을 두고 한 맹세는 유효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를 통해 그들은 자신들이 제사에는 관심이 없고 젯밥에만 관심이 많은 사이비 지도자라는 것을 만천하에 공개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한 신앙인,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맹세’라는 극단적인 도구의 통용보다는, 상호간에 자주 오고가는 신뢰와 우애, 나눔과 소통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이영근신부-

 

 오늘은 네 번째 새로운 의로움으로, 맹세에 대한 말씀입니다. 흔히 우리는 자신이 주장하는 바의 진실성을 뒷받침하거나, 그 이행을 보증하기 위해서 맹세라는 것을 합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야훼 하느님께서 맹세하시는 분으로 드러납니다. 예를 들면, 계약체결 때(신명 4,31;7,8), 약속 이행의 보장을 말씀하실 때(창세 22,16;26,3), 심판 예고 때(민수 14,21;아모 4,2;6,8), 말씀의 권위를 강조하실 때(에제 20,3;33,11)에 그러하십니다. 그리고 이 경우에 대개, 나는 살아있는 자로다라는 표현이 뒤따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말씀에 대한 유일한 보장은 하느님 자신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명기>에서는 하느님의 이름으로만 맹세하라고 규정되어 있습니다(신명 6,13;10,20). 그리고 <레위기>에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레위 19,12).

한편, 사람들끼리 맹세하여 계약을 체결하고 약속이나 결심이 취소될 수 없다는 것을 보증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맹세는 법정의 심문에서나 예언자들의 예언에서 그 말의 진실성을 보증하기도 했는데, 특히 하느님을 보증자로 내세우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법정에서 증언할 때 <성경> 위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합니다. 이는 거짓 맹세인 경우에는 어떠한 처벌도 감수하겠다는 심정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차차 시간이 가면서, 하찮은 일까지도 하느님을 끌어들여 자신의 목적을 위한 이기적인 거짓 맹세가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vlwanfemf을 두고 맹세함으로써 우상숭배의 결과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십계명에서는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고 이를 단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거짓 맹세뿐만 아니라, 아예 맹세하지 마라(마태 5,34)고 말씀하십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맹세는 본질적으로 하느님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만이 자신을 보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간은 그 주인이 아니기에, 하느님이나 하느님 것을 두고 맹세할 수 없습니다. 곧 인간은 부르심에 대한 응답자이지, 스스로가 부르심의 주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뜻에 응답하는 사람들이지, 하느님의 뜻을 만드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진리인 것이 아니라, 우리는 진리에 응답하여 따르는 사람들이입니다. 그러기에 할 것은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 해야 할 일입니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진실이 요청될 뿐입니다. 그리고 그 응답의 성실한 실행에 그 진실성의 여부가 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우리 주님께 응답하고, 응답한 바를 충실히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나아가서, 믿는 자에게는 맹세의식 자체가 필요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믿음 안에서 의로워지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서는 말합니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12,5)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기 전에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믿음으로써 올바른 사람이라고 인정받는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로마 4,11-12)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졌음으로 ~하느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로마 5,1).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 할 것은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마태 5,37)

 

주님!

오늘 제가 응답하게 하소서!

주인행세 하기를 멈추고, 당신 뜻에 응답하는 자 되게 하소서!

응답이 행동으로 진실하게 하소서!

 할 것은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 하게 하소서.

말과 행동이 참되게 하소서.

 할 것을 아니요라고 하지 않고, “아니요 할 것을 라고 하지 않게 하소서.

자신이 진리인 양 내세우지 않고, 진리를 따르는 사람 되게 하소서. 아멘

 

복음: 마태 5,33-37: 맹세하지 말라

-조욱현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거짓 맹세하지 말 것이며, 맹세하면 꼭 지켜야 한다는 말씀을 심화하여 아예 맹세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필요한 참말만 하라고 하신다.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은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기만 하면 된다. 예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참 진실이기 때문이다.

 

구약에서는 거짓증언을 막기 위해 맹세의식을 세워, 거짓 맹세를 하면 벌이 따른다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신앙은 맹세가 아예 필요가 없게 한다. 신앙은 실제로 우리의 삶의 태도를 확립하기 때문이다. 믿음의 단순함 속에는 맹세의식 자체가 필요 없다. 그들에게는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말과 행동은 언제나 참되다.

 

예수께서는 모든 맹세를 거부하신다. 하늘과 땅 그리고 예루살렘은 하느님께 관계되는 것뿐 아니라, 그 맹세 자체가 실제의 허위를 가리려는 보장 수단으로 삼는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쓸데없는 맹세를 하여 하느님을 욕되게 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맹세를 자주 하는 사람은 때때로 거짓 맹세를 하게 된다.

 

주님께서는 하늘이나 땅을 두고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다. 이것은 우리가 피조물을 피조물 이상의 영광을 지닌 것으로 여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즉 피조물을 하느님으로 높이지 말라는 것이다. 맹세하는 사람들은 자기보다 높은 이를 두고 맹세합니다.”(히브 6,16) 주님은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는 것을 금하시며,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36)고 하신다.

 

지상의 예루살렘은 저 위에 있는 하늘의 예루살렘의 예형이며(갈라 4,26) 위대한 임금님의 도성, 즉 영적 천상교회인, ‘그리스도의 몸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또 머리를 두고 맹세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모든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1코린 11,3)이시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을 두고 맹세하는 사람은 이 모든 것의 창조주이신 분을 끌어다 대는 것이다. 자기 머리를 두고 맹세하는 것은 자기를 섬기는 것이 된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느님을 두고 하는 맹세가 허위의 수단이 아니라고 해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것이다. 그러기에 진실한 사람으로서  할 것은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며 쓸데없이 맹세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것은 절대 진실을 말하게 되는 것일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적어도 진실한 태도를 보이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며, 이것이 진정 하느님의 참다운 자녀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진짜, 정말의 의미는 가끔 자기변명이나 남의 흉으로 흐를 수 있는 말이다. 우리의 삶은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의 영적인 성장에 도움이 되는 말을 많이 하도록 하여야 한다. 주님 안에 형제자매인 우리는 진리를 찾아 사는 사람들로서 하느님과 이웃 앞에 진실로, 진리로 자유로운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마태 5, 34)

-한상우신부-

맹세와 
배신의 갈림길
사이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헛된
맹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한없는
도우심입니다.

맹세에 기대어 
사는 것이 아닌
주님 은총에
기대어 사는
우리들 시간입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마음을 다시
다잡게 됩니다.

삶의 모든 순간이
우리 뜻대로
되지않음을
절실히 깨닫는 
요즘입니다.

주님 도우심 
없이는 한 발짝도
뗄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헛된 맹세의
영혼 없는
반복이 아닌
기도의 살아있는
겸손이길
기도드립니다.

헛된 맹세에서
우리를 꺼내시는
주님의 십자가를
다시 만납시다.

주님의 뜻은
예와 아니오처럼
맡김과 
내려놓음의
믿음입니다.

 

 

 

-오상선신부-

 

사람은 모름지기 하느님 앞에서 제 분수를 알아야 한다고 오늘 미사의 말씀은 조곤히 이야기하십니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마태 5,33).

맹세는 사람이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자기보다 위대하고 강한 존재의 명성과 힘을 걸고 스스로를 보증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니 맹세는 자신의 신용 문제를 넘어서, 걸고 맹세한 대상의 위상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말이 쉽다고 손쉽게 아무 맹세나 해서는 안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무엇도 함부로 맹세에 이용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늘, 땅, 예루살렘, 머리"

함부로 맹세해서는 안 되는 또다른 이유는, 사실 인간이 그 어느 것 하나도 제 것인 양, 제가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양 들먹일 권리가 없기 때문이지요. 하느님의 옥좌인 하늘, 하느님의 발판인 땅, 하느님의 도성인 예루살렘, 하느님의 피조물인 우리 지체 중 한 부분까지 그 어느 것 하나 우리의 권한에 속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당장 위기를 모면하려고 거짓으로 맹세를 하면 안 된다거나, 맹세한 바는 꼭 지키라는 옛 가르침은 사실 맹세를 지킬 힘이 인간 편에 있음을 전제합니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지요. 맹세한 바는 최선을 다해 지키려 노력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한치 앞도 모르는 인간에게 그마저도 불가능한 순간이 닥칠 때가 없지 않습니다. 인생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해도 굳게 한 약속이 물거품이 되어 버리는 처절한 순간이 고의가 아니어도 찾아올 수 있다는 말입니다. 목숨보다 소중했던 신의와 명예가 땅에 떨어지는 비참함 속에서, 맹세조차도 하느님께서 지키게 해 주셔야 가능한 것임을 비로소 깨닫게 되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아예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 것 같습니다. 맹세에 대해서는 노력 외에 인간에게 부여된 권한은 사실상 없으니까요.

제1독서는 엘리사의 부르심 대목입니다.

"엘리야가 엘리사 곁을 지나가면서 자기 겉옷을 그에게 걸쳐 주었다"(1열왕 .19,19).

고대에는 옷이나 물건에 그 사람의 능력이 깃든다고 보았지요. 옷을 걸쳐 주는 행위는 자신의 소명을 상대에게 부여하는 의미가 됩니다. 더군다나 당대 독보적인 예언자 엘리야의 옷이니 이 태도는 단순한 증여라기보다 의미심장한 부르심의 의식입니다.

"다녀오너라.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였다고 그러느냐?"(1열왕 19,20)

흥분하는 엘리사에 비해 엘리야는 차분합니다. 이 대답은 무심하게 들리기까지 할 정도입니다.

사실 오늘의 이 대목이 "아벨 므홀라 출신 사팟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네 뒤를 이을 예언자로 세워라"(1열왕 19,16) 하고 분부하셨던 주님의 말씀을 실현한 것에 지나지 않지요. 바로 어제 들었던 독서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주님께서 당신 계획에 따라 이미 준비하고 세우신 이를, 그 주님께서 만나게 해 주셨으니, 엘리사의 소명 기사에서 엘리야의 권한은 매우 미약합니다. 아니,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지요. 엘리야는 자신에게 주어진 분수를 잘 알았기에 권위를 부리거나 으스대지 않고 오히려 한 걸음 떨어져 관조하듯 제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 둘을 포함해 온 세상이, 온 역사가 주님이 내신 길로 흘러왔고 또 흐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만 하여라"(마태 5,37).

그저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예" 또는 "아니오"만 하면 됩니다. 절대자를 들먹이는 맹세나 핏대 올리는 호소, 심지어 눈물까지도 진정성에 가닿기엔 함량 미달인 경우가 허다하다는 걸 우리는 알아버렸지요. 그러니 그저 귀를 쫑끗 세우고 영혼을 활짝 열어 하느님의 뜻만을 좇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그 어느 것도 내 것은 없습니다. 나를 치장하기 위해 함부로 차용해서 써도 되는 이름도 없습니다. 하느님 뜻이면 "예!" 하느님의 뜻이 아니면 "아니오!" 하는 것이 우리의 최선일 것입니다. 그마저도 결과는 오롯이 주님 몫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축일입니다. 안토니오는 가장 대중덕인 인기가 많은 성인이지요. 성 안토니오처럼 "주님만이 우리 몫의 유산"(화답송)이심을 기억하며, 겸손하고 치열하게 하느님의 뜻을 찾는 하루 되시길 기도합니다.

 

지식과 지혜의 차이    

-김찬선신부-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는 프란치스칸 중에서 첫 번째 교회학자입니다.

그래서인지 오늘 축일의 첫 번째 독서는 지혜서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안토니오를 통해 지혜로움에 대해 보고자 합니다.

지식이 지혜가 아니고
지혜로운 사람이 지식이 많은 사람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지식과 지혜가 같은 것이 아니고 분명 다른 것이지만
같은 점이 있다면 지식이나 지혜 모두 <아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것을 뒤집어 보면 <아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면에서는 같지만
둘이 서로 다른 것은 그 <아는 것>이 너무도 다르다는 점입니다.
지식이 많은 것이 잡다한 외부 정보를 많이 아는 것이라면
지혜가 많은 것은 행복을 위한 비결을 많이 알고 잘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가 많은 사람은 행복하지만
지식이 많은 사람이 꼭 행복한 것은 아니고,
지식만 쌓고 지혜를 쌓지 않은 사람은 오히려 불행합니다.

그러니까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알긴 아는데 잘못 아는 것이고,
아는 것은 많은데 잘못 아는 것이 많은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
-자기 자식 소중한 것은 아는데 남의 자식 소중한 것은 모르고,
-돈이 소중한 것은 아는데 돈의 해로운 점은 모르는 것이며,
-건강이 소중한 것은 아는데 건강 염려증의 해로움은 모르는 것이고,
-돈은 행복을 위해 필요한 것이지 충분한 것이 아님을 모르는 것 등이지요.

그런데 살다 보면 백과사전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되는데
그분들이 정말 백과사전처럼 참으로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것이 지적인 만족감을 위해서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는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비록 이런저런 이유를
댈지라도 그것은 지혜롭지 못하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관건은 어떻게 지혜를 얻을 수 있느냐, 그것입니다.

우선 지혜를 얻고자 하는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사실 다른 것을 얻고자 열망치 않고
지혜를 얻고자 열망하는 것 자체가 지혜로움의 표시입니다.

이런 면에서 그러니까 시작 차원에서 저는 지혜로웠습니다.
저는 한창 공부해야 할 때 공부하지 않고 고민하였고,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을 하였으며,
그래서 인생의 목적이 행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행복을 위해서 수도 생활을 선택하기까지 하였으며 이에 대해 후회없습니다.

문제는 지혜를 얻는 과정에서 방황을 한동안 하였던 것이지요.
신앙인이면서 비신앙인처럼 지혜를 얻으려 했던 것입니다.
수행을 통해서 그리고 인생의 성공과 실패의 경험을 통해
지혜를 얻으려 했지 지혜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얻으려 하지 않은 겁니다.

교만함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약 여러 곳에서 주님을 두려워함이
지혜의 원천이라는 말을 하였는데도 한참 지나서 그것을 알았고,
그러나 그것을 안 것과 실제로 사는 것 사이의 조화는 여전히 과제입니다.

그런데 오늘 축일을 지내는 안토니오는 서른여섯에 졸하였음에도
일찍이 이 지혜를 깨쳤고 일생을 훌륭히 그러니까 지혜롭게 살았습니다.

"나는 기도를 올려서 지혜를 받았고, 하느님께 간청하여 지혜의 정신을
얻었다. 나는 지혜를 욕심을 채우려고 배우지 않았다. 이제 그것을
아낌없이 주겠다."
고 오늘의 독서 지혜서가 얘기하듯 그는 학문 연구가
아니라 기도 안에서 지혜를 얻었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그는 "기도와 헌신의 정신을 끄지 않으면" 형제들에게 신학을 가르쳐도
좋다는 프란치스코의 권고대로 일생 기도와 헌신의 정신을 끄지 않았고,
그래서 지혜를 하느님에게서 얻었으며 이웃에게 나눠준 우리의 모범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6월 16일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