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 20일 토요일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성모 성심 공경은 17세기 프랑스 출신의 요한 외드 성인에게서 비롯되었다. 이는 예수 성심을 공경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다. 성모 성심 공경은 19세기에 별도로 날을 잡아 기념하기 전까지는 예수 성심 미사에서 기억하는 형태로 전례 안에 들어왔다. 1942년 비오 12세 교황은 성모님의 파티마 발현 25주년을 맞아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께 세상을 봉헌하고, 이 기념일을 온 교회가 지내도록 하였다. 처음에는 8월 22일이 기념일이었는데, 1996년부터는 예수 성심 대축일 다음 날로 옮겨 지내고 있다.
☆☆☆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루카 2,41-51)
“Why were you looking for me?
Did you not know that I must be in my Father’s house?”
But they did not understand what he said to them.
He went down with them and came to Nazareth,
and was obedient to them;
and his mother kept all these things in her hear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한재호신부-
사제품을 받고 나니 제 어머니의 귀가 세 배는 커지신 것 같고, 아버지의 시력도 두 배는 좋아지신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제가 본당에서 어떤 강론을 하였으며 요즘에는 무슨 일로 바쁜지,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았는지 속속들이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또 아들 신부에게 누가 될까 봐 행동과 말도 늘 조심하십니다. 한번은 수도자나 성직자들이 주로 바치는 성무일도를 어떻게 바치는지를 물어보기도 하셨습니다. 제가 부르심을 받아 사제가 된 것이지만 부모님도 덩달아 그 삶의 일부를 떠안고 계시는 듯합니다.
사제의 부모가 살아가야 하는 이러한 숙명과도 같은 삶을 생각해 보면, 왜 교회가 예수 성심 대축일 다음날 성모님을 기억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 역시 예수님의 구원 사업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늘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시고 예수님의 길에 함께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이런 성모님의 생애를 상징적으로 잘 드러냅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잃어버리십니다. 성모님께서 세상 사람들의 길을 따라 걸으시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현존 안에 머물러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들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을 찾아나서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만이 삶의 의미가 있다고 여기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모님께서는 예수님께서 머무르셔야 할 자리에 함께 머무시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마치 사제의 부모가 사제가 머물러야 할 하느님의 현존에 함께하듯이 말입니다.
성모님께서 그렇게 자식을 사랑하시어 자식을 바라보며 사셨기에 예수님의 길을 함께 걷게 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분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닮은 분이 되셨습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신학생 때 교수 신부님 중에서 강의 내용이 너무 어려운 분이 있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인지 알아듣기가 힘들어서 공부 잘하는 친구에게 설명을 부탁하곤 했지요. 친구의 설명을 들으니 그렇게 어려운 내용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신부님의 강의를 들으면 쉬운 내용도 어렵게만 들렸습니다.
그렇다면 이 신부님은 우리를 골탕 먹이려고 부러 어렵게 말씀하신 것일까요? 나중에 신부가 되어 이 신부님을 우연히 만날 수가 있었고, 이 자리에서 신학생 때 신부님 과목 때문에 너무 힘들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은사 신부님께서는 두 눈이 커지면서 “왜?”라고 반문하시는 것입니다. 당신은 최대한 쉽게 풀이했다고 하시더군요.
신학생들을 힘들게 하려고 일부러 어렵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분은 쉽게 말하는 것이 힘들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일부러 어렵게 가르치신다고 생각하면서 부정적인 마음을 갖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종종 남에 대해 자신의 잣대를 내세워서 판단하곤 합니다. 그리고 그 판단이 부정적이었을 때는 자신의 반대편에 그 사람을 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 잣대보다 상대방의 잣대로 바라봐야 온전히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자기 잣대만을 내세웠기에 반대했고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이 아닙니까? 상대방의 잣대, 무엇보다도 주님이라는 기준의 잣대가 우리 안에 필요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잣대를 절대로 내세우지 않았던 분이 바로 성모님이십니다.
예수님과 성모님 그리고 요셉 성인은 관습에 따라 파스카 축제 때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십니다. 그런데 축제가 끝나고 다시 돌아가다가 당시 열두 살이던 예수님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성전에 율법 교사들과 토론하고 있는 예수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의 마음을 생각해보십시오. 성모님과 요셉 성인의 마음이 얼마나 새카맣게 변했겠습니까?
더군다나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화가 날 만도 하지 않았을까요?
물론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 하는 영원하신 당신의 권능과 영광을 말씀하신 것이지만, 아직 성모님께서는 이런 권능과 영광을 알아채기는 부족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성모님께서는 자신의 잣대를 세워서 예수님을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이를 성경은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라고 표현합니다.
끝까지 하느님 기준의 잣대를 간직했던 성모님의 마음, 이렇게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의 마음을 기억하고 우리 마음에 간직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옷감은 선과 악이 뒤섞인 실로 짜여진 것이다(셰익스피어).
하느님의 은총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제 머리가 상당히 좋다고 생각합니다. 강의와 미사 강론 때 원고를 전혀 보지 않는 모습 때문입니다. 절대로 아니라고 말씀드리면, 원고를 모두 외워서 하는 것을 보면 좋은 것이 분명하다며 지나친 겸손은 교만이라는 말씀까지 하십니다. 물론 아주 돌머리는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썩 좋은 편은 아닙니다.
원고를 외우게 된 것은 저의 ‘눈’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실 원고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컴퓨터를 많이 해서인지 노안이 일찍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집중하지 않으면 글씨 읽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계속 외우려고 노력하다 보니 외우는 요령도 생기고, 말을 하는데 여유가 생긴 것입니다.
잘 보이지 않는 눈이 단점이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저를 성장시켜주는 장점이 된 것입니다. 일찍 찾아온 노안 역시 하느님의 놀라운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단점이라 생각하는 것들, 고통과 시련들. 이것들이 제발 내게 오지 않았으면 하는 것은 그것 자체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의미를 찾으려고 애쓰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장점을 찾게 된다면 이것 자체를 넘어서는 하느님의 손길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성모님의 마음은 찾는 마음이다
-전삼용신부-
어제 예수 성심 대축일에 이어 오늘은 ‘성모 성심 기념일’입니다. 그런데 그 앞에 ‘티 없이 깨끗하신’이란 수식어가 붙습니다. 죄가 없으시다는 뜻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원죄까지도 없으시기에 ‘죄에 물들지 않은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죄가 없는 마음이란 어떠한 마음을 말하는 것일까요? 어린이와 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를 짓지 않게 만드는 분 곁에 있어야 합니다.
영화 ‘블랙 스완’에서 주인공은 어머니의 뜻을 따라주기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진 여인입니다. 어머니가 자신을 낳기 위해서 발레를 포기하였기에 자신이 어머니의 꿈을 이루어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도 누군가와 깨끗하지 못한 사랑에 빠집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원하지 않는 행동을 집에서 하게 됩니다. 아침이 되어 눈을 뜨니 어머니가 자신의 침대 옆에 있었습니다. 너무나 화들짝 놀랐습니다. 자신의 모든 행동을 다 본 줄 알았는데, 다행히 어머니는 눈을 감고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밤새 자신의 침대 옆에 있었던 것입니다. 혹시 자신의 행위를 다 보았는지 몰라 주위를 살펴보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죄를 짓는 꿈을 꾼 것이었습니다. 죄를 짓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죄와 반대되는 뜻을 가진 사람을 멀리해야 합니다. 반대로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와 반대되는 뜻을 가진 분을 찾아야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부산 외가댁에 처음으로 간 날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일단 어머니와 외가 친척분들이 말씀하시는 것을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투리를 처음 들어보았기 때문입니다. 잘은 알아들을 수 없지만 외삼촌들에게 저를 맡기고 가신다는 말처럼 들렸습니다. 잘못 들었거니 했는데 다음 날 아침 일어났을 때 어머니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불안한 마음으로 여기저기 어머니를 찾아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다 외할머니가 말씀하시기를 어머니는 밑에 층에서 목욕하고 계신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저를 버리고 간 줄 알고 무척 불안했었습니다. 외가댁은 목욕탕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어머니를 찾던 제가, 어느 순간부터는 어머니를 더는 찾지 않았습니다. 죄가 커지는 사춘기 때부터였습니다. 어머니가 계시면 죄를 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도 안 좋은 비디오를 보다가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면 화들짝 놀라 테이프를 빨리 빼곤 하였습니다. 부모의 법이 아니라 내 안의 법을 따를 때는 이렇게 부모를 찾지 않을뿐더러 그분이 함께 있는 것이 부담스럽습니다. 죄가 커질수록 부모를 찾는 마음이 식어갑니다. 왜냐하면, 부모는 죄와 반대되는 법을 가지신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예수님을 잃으셨습니다. 자녀를 잃은 어머니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찢어지듯 아플 것입니다. 자녀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에너지를 총동원해 자녀를 찾습니다. 이사야서의 이 말씀이 꼭 성모 마리아의 마음과 같을 것입니다.
“밤새도록 당신을 그리는 이 마음, 아침이 되어 당신을 찾는 이 간절한 심정! 당신의 법이 세상에 빛나는 때 세상 주민들은 비로소 정의를 배울 것입니다.”(이사 26,9)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몰라 밤새 찾고, 아침이 되어서도 찾으려는 마음. 이것이 우리가 본받아야 하는 성모 마리아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죄와 반대되는 법이고 그 법대로 사는 것이 정의입니다.
오즈의 마법사에 자신에게 없는 심장을 찾겠다는 양철 나무꾼이 있습니다. 왜 심장을 찾으려고 했을까요? 그것 없이는 살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목적지에 도착하니 이미 심장이 생긴 것을 알았습니다. 찾으려는 마음이 이미 거룩한 마음입니다. 눈이 보이지 않던 헬렌 켈러도 이 진리를 깨닫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햇살을 향해 얼굴을 들어라. 그러면 그림자가 안 보인다. 해바라기가 그렇게 한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은 죄의 어둠에 들지 않습니다. 죄로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기를 원하지 않아서 그분의 법만을 찾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하느님 나라에 이르게 하는 길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찾고 나니 결국 ‘아버지 집’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물으십니다.
죄에서 구원해 줄 예수님을 찾는 마음만 있다면 이미 죄에서 벗어나기를 원한 것이고 또 벗어나고 있는 것이고 어쩌면 이미 아버지의 집에 도달한 것입니다. 이 간절히 찾는 마음이 곧 성모 마리아의 마음입니다.
-조재형신부-
한국은 현충일이 6월 6일입니다. 그런데 미국의 현충일은 5월 마지막 월요입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쉬는 날이 주말과 겹쳐지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처음 맞이하는 날이라서 착각했습니다. 같이 일하는 직원 중에도 한명이 착각하고 출근했습니다. 이왕 왔으니 오전만 근무하고 갔습니다. 지나치면 걱정이지만 살면서 착각은 웃음을 줄때도 있고, 긴장을 풀어주기도 합니다. 묵주기도를 하다가 착각하고 한단 더 할 때도 있습니다. 부모님께 생활비를 보내드려야 하는데 착각하고 한 번 더 보내드릴 때도 있습니다. 저도 선배 신부님의 착각 때문에 큰돈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본당으로 인사이동이 되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지구장 신부님께 새로 왔다고 전화를 드렸습니다. 지구장 신부님은 와서 점심이나 먹자고 했습니다.
저는 신부님을 찾아갔고 맛있는 점심을 먹었습니다. 식사를 마칠 무렵에 지구장 신부님이 쾌 큰돈을 주셨습니다. 저는 본당 신축하는 과정에서 빚이 남았는데 빚 갚는데 보태라는 걸로 알고 고맙게 받았습니다. 한 달 정도 지나서 지구장 신부님이 제게 전화를 했습니다. 착각했다고 합니다. 제가 새롭게 생긴 지구장 신부인줄 알았다고 합니다. 지구장으로 지내려면 활동비가 필요할 것 같아서 주었다고 합니다. 저는 이미 성당에 입금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신부님은 크게 웃으면서 그럼 그렇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인사를 잘 하니, 좋은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남에게 도움을 주는 착각, 공동체에 활력을 주는 착각은 가끔은 있어도 좋을 듯합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신부님께서 하느님나라에서도 기쁘게 지내시리라 믿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착각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잘못해도 용서해 주십니다. 우리가 또 다시 잘못할 걸 아시면서도 용서해 주십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도 착각하십니다. 자식이 세상에서 제일 똑똑하다고 여기십니다. 저의 어머니도 제가 가장 멋진 사제라고 착각하십니다. 자식이 힘들어하면 잘 할 수 있을 거라며 용기와 위로를 주십니다. 어머니에게는 자식의 직업, 능력, 학벌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머니에게는 그저 자식이니까 귀한 겁니다. 그저 자식이니까 사랑하는 겁니다. 성모님은 어린 예수님을 예루살렘에서 잃어 버렸습니다. 속에는 불이 났을 겁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을 겁니다. 예수님은 ‘제가 있어야 할 곳은 성전입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모든 것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고 합니다. 성모님께서도 ‘우리 아들 예수님이 최고야’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성모님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성모님의 마음을 어머니의 마음을 통해서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수녀님을 통해서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배려와 양보, 헌신과 봉사’의 마음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는 것을 몸소 실천하는 삶입니다.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곳을 찾아다니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당신이 발현한 곳을 찾아다니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하셨던 것처럼 우리들 또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겸손하게 사는 것입니다. 기적은 신앙의 본질이 아닙니다. 기적은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보여주시는 표징입니다. 내가 신앙 안에서 기쁘게 산다면 굳이 다른 기적은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눈으로 보면 살아 있는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표징이기 때문입니다.
매일 기도하고, 미사참례 열심히 하고, 이웃과 정을 나누면서 사시는 분들에게는 다른 기적이 필요한 것 같지 않습니다. 좋은 일이 생기면 감사를 드리고, 나쁜 일이 생기면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청하시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요구하고, 유대인들은 표징을 요구하지만 내가 보여 줄 수 있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 겸손의 길, 사랑의 길, 순명의 길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는 참된 진리입니다. 이 길이 성모님께서 걸어가신 길입니다.
“주님은 비천한 이를 땅바닥에서 일으켜 세우시고, 가난한 이를 잿더미에서 들어 높이시어, 존귀한 이들과 한자리에 앉히시며,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
성모님의 신비를 이해하면 할수록 예수님의 신비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깊어질 것입니다!
-양승국신부-
돌아보니 한없이 부실한 내용이었지만 가톨릭평화방송과 성바오로 수도회가 공동 주관한 아레오파고스 성모님 편 열번의 강좌를 끝냈습니다.
강의를 준비하면서 크게 느낀 것 한 가지는 우리 가톨릭 신자들께서 지니고 있는 성모님에 대한 오해나 편견이 상당하다는 것입니다. 성모님이 어떤 분이신가 명확히 이해하는 것은 진정한 가톨릭 신자로서 살아가는데 아주 중요한 일임을 다시금 재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성모 신심에 있어서 늘 주의해야 할 것은 성모님에 대한 지나친 과장이나 확대해석, 왜곡이나 그릇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성모 신심은 결코 단독 교과목이 아닙니다.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론과 결부시켜야 마땅합니다. 성모 신심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 안에서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중심에 계시고, 그 옆에 성모님이 계십니다. 성모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모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열쇠입니다. 성모님의 신비를 이해하면 할수록 예수님의 신비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깊어질 것입니다.
성모님이 공경받으실 때, 그것은 아들 예수님께 영광이 됩니다. 성모님이 찬미받으실 때, 그것은 아들 예수님께 영예가 됩니다. 두 분을 뗄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 속에 계십니다. 인류 구원 사업이라는 사명과 운명을 공유하신 분들이기에 그렇습니다.
척박한 산골 나자렛에서 태어나신 마리아께서 평생에 걸친 순명과 기도, 각고의 노력 끝에 영광스럽게도 하느님의 어머님이 되셨습니다. 성모님의 생애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각자에게도 큰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한없이 부족한 우리들이지만 우리도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 하느님의 큰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오늘 우리는 기억해야겠습니다.
어제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에 이어 오늘 우리는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을 경축하고 있습니다. 보시는 것처럼 두분은 언제나 딱 붙어 계십니다. 성모님의 마음이 곧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두 마음은 언제나 함께, 한 방향을 향해 나아갑니다. 두 마음은 언제나 굳게 결속되어 있습니다.
오늘 읍내 병원에 다녀오다가 특별한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면사무소를 지나오게 되면, 그 뒤로 저희 수도원까지는 차량 통행이 거의 없는 한적한 도로입니다. 분교 앞을 지날 때였습니다. 예쁘게 생긴 어미꿩의 인도에 따라 열마리나 되는 아기꿩들이 줄줄이 차도를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녀석들이 안전하게 건너갈 수 있도록 멀찌감치 차를 세우고, 진풍경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마음 속으로 녀석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 나쁜 사람 아니란다. 내가 지켜줄테니 다른 차들 오기 전에 빨리들 건너가거라!’
제가 갑자기 나타난 돌발 상황 앞에 어머꿩은 엄청 당황한 것 같았습니다. 도로 중간 쯤에서 앞으로 나아가려다가, 잠시 멈췄다가, 다시 생각을 바꿔서 아기들을 이끌고 나름 초스피드로 건너갔습니다. 부화한지 얼마되지 않은 아기꿩들은 나름 최선을 다해 어미꿩을 따라갔지만, 보폭이 짧은 탓에 꽤 시간이 걸렸습니다.
아기 꿩들에 대한 걱정 때문에 노심초사하는 어미꿩의 모습이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모성이라는 것 정말 대단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새끼들이 알에서 부화하고 나면 그 뒤로는 완전히 어미 자신을 잊습니다.
하루 온 종일 목숨까지 걸어가며 새끼들을 먹여 살립니다. 혹시라도 침입자가 새끼들을 공격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면서 그렇게 힘든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성모님 역시 아기 예수님을 출산하신 이후의 삶, 보통 어머니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앉은 성모님의 마음은 다른 어머니들보다 더욱 특별했을 것입니다. 더 조심스러웠고, 더 노심초사했고, 더욱 많은 신경을 쓰셨을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이 날로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순간 순간 지켜보신 성모님은 혹시라도 나로 인해 아기 예수님이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어떡하나 걱정이 태산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성모님은 늘 묵묵히 예수님을 위해 엄마로서의 최선을 다했습니다. 예수님이 있는 곳에 늘 계셨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을 때 언제든지 응했습니다.
잠시도 떨어져있지 않고 예수님 주변만을 맴돌며,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예수님만을 사랑하고, 예수님만을 연구하고, 예수님만을 관상했던 예수님의 사람이 바로 성모님이셨습니다.
교회의 어머니요, 세상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는 아들 예수님을 향해 지니셨던 똑같은 마음으로 오늘 우리 각자를 굽어보십니다. 어린 새같은 우리가 걱정되서 늘 노심초사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런 탈없이 하루 하루를 지내기를, 아버지의 따뜻한 품을 떠나 방황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
티 없으신 성모성심 기념일
-이영근신부-
오늘은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 기념일입니다. 우리는 어제는 예수님의 성심을 통해, 오늘은 성모님의 성심을 통해 아버지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열두 살 때, 과월절에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잃은 예수님을 사흘 만에 성전에서 찾았을 때, 예수님께서는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나는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할 줄을 모르셨습니까?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아들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루가 2,49-50) 단지 “그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습니다”(루가 2,51).
대체 이 복음이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티 없으신 성모성심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은 두 가지 의미로 묵상해볼 수 있겠습니다.
우선 당신의 소명과 관련하여 성모님께서 받으신 특별한 은총과 특권으로서의 “티 없이 깨끗하신 성심”이라 하겠습니다. 이에 대해서 <교회헌장>에서는 “온전히 거룩하신 분, 죄의 온갖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신 분”(교회헌장 56항)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의 말을 빌린다면, “천지 창조 이전에 이미 뽑아주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거룩하고 흠 없는 자가 되게 하셔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하셨다”(에페 1,4)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황 비오 9세께서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는 잉태되시는 첫 순간부터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과 특권으로 원죄에 물들지 않으셨다”(원죄 없으신 잉태)고 선포하셨습니다. 또한 <가톨릭교회교리서>는 “성모님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일생동안 어떤 죄도 범하지 않았다”(교리서 493항)고 말하고 있습니다.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의 또 하나의 의미는 성모님의 믿음과 관련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도 이와 관련해 묵상해 볼 수 있겠습니다. 곧 성모님께서는 온전한 마음, 갈림이 없는 마음, 한 점 의혹이 없는, 믿음에 있어서 티 없이 깨끗하신 성심을 지니셨다 하겠습니다. 그 성심은 언제나 야훼 하느님께 대한 갈망만이 가득 차 있었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희망했습니다. 말씀이 당신 안에서 이루어지기만을 고대하였고,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만 희망을 두었습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아드님의 죽음 앞에서도 오로지 믿음으로 서 계셨습니다. 그분의 마음 안에는 믿음만이 가득 차서 희망을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신명이 나있었습니다. 그 ‘성심’은 말씀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오로지 말씀만이 간직되어 있을 뿐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비록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할 때마저도, 오직 믿음만으로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습니다”(루가 2,51). 참으로 믿음에 있어서 티 없이 깨끗하신 성심이셨습니다. 그래서 <교회헌장>에서는 ‘성모님께서는 온전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구원의지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당신 아드님의 인격과 활동에도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치셨습니다. 그리하여 아드님 밑에서 아드님과 함께 구원의 신비에 봉사하셨습니다.’(교회헌장 56항 참조)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마음 역시, 이러한 성모님의 티 없으신 성심으로 채워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믿음의 응답만이 흘러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로지 예수님께만 희망을 둘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통과 슬픔 속에서도 오직 하느님의 뜻만을 간직하며 신명나기를 바랍니다.
티 없으신 성모성심이여!
믿으셨으니 참으로 복되십니다.
당신께서는 오로지 당신 아드님께만 믿음과 희망을 두셨듯이, 저희 또한 오로지 당신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께만 믿음과 희망을 두게 하소서.
당신 아들 예수님을 품었던 그 주물의 틀에 저를 받아들이시어 저희 또한 당신 아들의 성심 안에 흠뻑 젖어들게 하소서.
그 사랑의 성심으로 제 형제들을 가슴에 끌어안을 수 있게 하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
어머니.
당신은 마음에 말씀을 품으신 도서관이셨습니다.
말씀을 펼쳐 읽으시며, 순명을 배우셨습니다.
가슴 속 품은 하느님의 뜻에서, 희망과 믿음을 길러 올리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품었던 그 주물의 틀에 저를 품으소서. 아멘.
마음속에 간직 하였다
-반영억신부-
어린 시절 운동을 하였습니다. 지금은 왜소하게 보이지만 초등학교 때에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 키가 큰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운동을 하게 되었는데 마라톤도 하고 씨름을 하게 되었습니다. 시합을 앞두고는 늦게까지 연습하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연습 후에는 찐빵과 만두가 준비되어있었기에 견딜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시합에 ‘이겨라’ 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시합 날 입고 간 팬티에는 어김없이 헝겊 한 조각이 붙어있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갓난아기 때 입었던 ‘저고리’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부적이나 다름없는 것이었습니다. ‘이겨라’고 말씀은 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꼭 이길 것이라는 간절한 믿음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몰랐었지만 지금은 어머니의 큰 사랑으로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소위 미신행위였다고 할지라도.
오늘 우리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 성모님의 마음을 기억하며 기념합니다. 성령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잉태하시고 낳으신 후 그 지상 삶의 여정과 죽음에까지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그분의 모든 것을 지켜보시고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시며 오로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기다리신 어머니의 마음, 아들 구세주 그리스도의 협력자로 일생을 봉헌하시고 아들의 십자가 밑에 서 계셨던 어머니의 마음을 기억합니다. 어머니의 위대함은 삶의 여정에 예기치 못한 많은 일들이 벌어졌지만 늘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이 살아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도 날마다 순간마다 믿음이 살아있기를 기도합니다.
성경을 보면, 파스카 축제 때에 예루살렘으로 가셨던 예수님의 부모는 길 잃은 예수님을 찾아 사흘이나 헤맸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을 찾아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습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루카2,48-50). 사실 요셉이 아버지인데 또 아버지가 따로 있다니 정말 뚱딴지 소리였습니다. 따라서 그 신비로운 진실을 알아듣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때를 기다리며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도 순종의 생활로써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습니다. 지금은 잘 알아들을 수 없으나 아들에 대한 한없는 사랑은 한결같았습니다. 그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아들을 찾아 헤맨 사랑의 울타리 안에서 또한 모든 것을 마음속에 간직한 어머니의 큰 품에서 아들은 커갔습니다. 루가복음 사가는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루카2,52)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동료 인간들의 총애를 받았고 그분은 자라면서 사회 안에서 당신의 자리를 잡아나가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아들에 의해 어머니의 마음도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일상 안에서도 마음속에 간직하여 되새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간직한다는 것의 의미는 삶에서 일어나는 일을 통해 이 말씀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지 항상 묵상한다는 뜻입니다. 이 순간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주님께서 이 순간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이 상황은 하느님 말씀과 대조하여 어떻게 이해할 것이지 찾는 작업입니다. 이는 삶을 하느님 말씀으로 읽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내 삶에서 하신 모든 일을 기억하는 것은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프란치스코교황). 하느님의 뜻과 내 뜻이 상충될 때가 많습니다. 당연히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야 함에도 내 일의 성공과 업적을 위해 하느님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나와 다른 너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마음속에 간직하여 되새기는' 시간을 꼭 챙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욱현신부-
축일의 유래: 요한네스 에우데스(Jean Eudes, 1601-1680)는 예수 성심과 성모 성심의 스승이요, 첫 번째 사도로 불리고 있다. 그는 예수 성심 축일을 지내기 20년 전부터 그의 제자들과 함께 이미 2월 8일을 마리아 성심 축일로 지냈다(1643년). 이후 교황 비오 7세는 성모성심을 축일로 지낼 수 있도록 청하는 모든 교구와 수도 단체에 허락하였다.
1942년 교황 비오 12세는 온 세상을 ‘마리아의 무죄한 성심’에 봉헌하면서 전례등급을 올렸고, 날짜를 성모승천 대축일의 제8부인 8월 22일로 고정시켰다. 그러나 로마 전례 개혁은 다시금 지역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기념일로 환원하고, 1996년부터 예수 성심 대축일 다음 토요일로 고정시켰다.
축일의 의미: 이 축일은 마리아의 깨끗하고 열절한 사랑의 마음속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찬미하고 주님 현존의 기쁨을 축하하는 것이다. 아울러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마음에 주님이 거주하도록 안배하시어 거룩하게 하신 하느님을 찬미하며, 우리 자신도 하느님 영광의 살아있는 성전이 되도록 마리아께 전구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과 예수님께 대한 성모 마리아의 사랑이 그 목표로서 우리도 마리아와 같은 사랑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복음: 루카 2,41-51: 소년 예수와 성모 마리아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전하는 유일한 자료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단순한 유년기의 예수님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이것은 파스카 신비를 완성할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일생을 그려내는 루카에게 마리아가 이미 파스카 신비에 참여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 이야기는 지혜와 파스카의 특징을 드러내는 그리스도론이다. 예수님이 지혜 자체이며, 파스카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이 사건의 배경은 구약의 파스카 축일이다. 구약의 파스카는 당시 예루살렘에서 지내기로 되어 있었다. 또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의무적이었는데, 아마 12살이 그 규정 나이였던 것 같다.
성전에서 학자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광경은 구약의 파스카 예식에서 가장 나이 어린 사람이 파스카 예절에 관한 것을 질문하고 가장 연장자가 파스카의 역사와 의미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과 비슷하다. 여기서는 학자들이 질문하고 예수께서 답하시는 것이, 예수께서 신약의 파스카의 주인공임을 드러낸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들을 경탄하게 하는 지혜의 스승, 지혜 자체로 보인다.
또 파스카적 용어를 통하여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신비의 고통과 기쁨을 미리 체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이야기는 부활사건과 공통점이 있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다.”(2,41; 22,8.13), “사흘이라는 시간”(2,46; 24,46),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이룰 필요성”(2,49; 24,7)과 “이해하지 못하였다”(2,50; 24,25)는 것이다.
여기에서 사흘이라는 시간 개념은 성서에 자주 나타나는 주제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모리야 산으로 사흘 길을 걸었다. 요나는 하느님의 말씀을 이방인들에게 선포하기 위해 고래 뱃속에 사흘간 머물렀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으로부터 사흘간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 개념은 고통의 최대치를 드러낸다. 사흘이란 의인들의 최대의 고통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마리아와 요셉이 사흘간 소년 예수를 찾아 헤맸다는 것은 의인으로서 최대의 고통을 겪으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이를 잃어버린 다른 어머니처럼 극한의 고통을 겪으셨다는 것을 뜻하며, 훗날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하는 예수의 고통을 미리 겪으셨다는 것을 아울러 미리 보여주고 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성전에서 발견하고 꾸짖는 가운데 요셉을 아버지로 언급하는 데 대해서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언급하고 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49절) 이 말은 예수께서 이미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의 아들임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그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51절ㄴ)는 진술은 신앙의 길을 걷는 마리아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여기서 ‘알아듣지 못함’은 지혜의 결핍이 아니라, 하느님께 열려있음, 내맡겨져 있음을 드러낸다. 이러한 신앙의 자세는 목동들이 다녀간 이야기에도 나타난다(2,19). 거기에는 이 신비를 간직한 것만이 아니라, 깊은 묵상의 자세를 보여주는 표현으로 “간직하였다.”는 말이 덧붙여지고 있다. 또 이 이야기에서는 ‘찾다-발견하다.’는 신앙의 도식을 볼 수 있다. 불 신앙인은 찾아도 얻지 못하지만 신앙인은 찾으면 얻게 된다는 것이다. 주님을 열심히 찾는 마리아의 신앙을 묵상하게 한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또한 마리아의 신앙을 다른 각도에서 발견할 수 있다. 마리아와 요셉도 예수님을 잃어버린 적이 있다. 그러니 우리의 신앙생활도 너무나 자주 하느님을 잃어버리고 나 홀로 방황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는 그것을 나 홀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나가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우리는 마리아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 마리아는 사흘간의 고통 후에 성전에서 예수님을 다시 찾는다.
이것은 우리도 잘못하여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졌을 때, 즉시 다른 곳에서 주님을 찾지 말고 하느님의 뜻으로, 하느님께로 되돌아가야 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으로 다시 돌아갈 때 비로소 주님을 다시 만날 수 있고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마리아를 따르는 자세이다.
마리아의 신앙을 본받고 따르도록 노력할 때에 우리는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을 따라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께 대한 더 완전한 사랑을 드릴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은총을 구하며 열심히 살아가도록 하자.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 51)
-한상우신부-
어머니의 마음
어머니의 시간은
자식을 향한
오롯한 사랑의
마음입니다.
언제나 자식을
향해 열려있는
사랑의 삶이며
기도의 삶입니다.
마음은
삶을 향하고
삶은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마음안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마음을
받아 주는 것은
언제나 같은
마음입니다.
어머니의
마음은
하느님을 향한
믿음의 마음입니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할지를
마음으로
가르쳐주십니다.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음은 예수님을
향한 성모님의
마음임을 믿습니다.
머리가 아닌
뜨거운
마음으로
살게하소서.
어머니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서로를 끌어안는
참된 회개임을
믿습니다.
티 없이 깨끗하신
어머님,
우리의 죄와
혼돈을 위해
빌어주소서.
-오상선신부-
오늘은 말씀을 통해 성모님의 마음을 만나는 날입니다.
"제 마음 당신 구원으로 기뻐 뛰리이다. 은혜를 베푸신 주님께 노래하리이다"(입당송).
미사를 여는 이 말씀은 마치 예수님을 임신하신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셨을 때 노래한 성모 찬송의 '한 줄 요약' 같습니다. 미사의 시작부터 기쁨과 환희가 펼쳐지는 것 같네요.
사실 우리는 "성모성심" 하면 성모 칠고를 상징하는 칼 일곱 개에 심장이 찔리신 성모님 성화를 먼저 떠올립니다.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한 그분의 인생이 고통 투성이였고, 인류의 어머니로서 무수한 자식 걱정에 근심이 그칠 날 없는 숙명을 보여 주는 것 같지요.
하지만, 평생 사랑을 보람으로 여기고 살아온 이들에게 인생을 묻는다면, 늘 고통과 비탄 뿐이었다고 푸념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대개는 입가에 옅은 미소가 피어오르면서 사랑하고 행복했던 순간들을 소환해낼 것 같지 않나요? 마리아의 삶도 결코 평탄하지 않았고 침묵과 인내로 품어야 하는 슬픔과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지만, 교회가 마리아를 기념하며 기쁨을 노래하는 이유입니다.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루카 2,46)
복음은 예루살렘 축제 후 소년 예수님을 잃었던, 부모로선 십년 감수했을 사건을 들려줍니다. 외아들을 찾아 헤맨 사흘은 죽음과 같은 시간이었겠지요. 사흘은 마리아께서 먼 훗날 예수님을 무덤에 묻고 견뎌야 할 고통의 사흘을 예비합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
다행히 예수님을 찾긴 했는데, 예수님의 답변을 다 이해할 수 없었지요. 사흘 졸인 가슴에 사과는 커녕 영문 모를 당당함까지... 아마도 마리아는 어미로서 한계를 느끼셨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무엇을 마음속에 간직하셨을까요? 고통? 조바심? 두려움? 괘씸함? 한계? ... 놀랍게도 오늘의 말씀은 제게 '그건 기쁨이었다'고 속삭이십니다. 마리아의 성심 안에 가득 찬, 티없이 깨끗한 기쁨을요.
누군가 인생의 위기를 물을 때, "아, 정말 진짜 힘들었어요. 죽을 뻔했다니까요" 하며 사건의 초반부터 구구절절 한숨과 눈물을 섞어가며 과정 위주로 들려주는 사람도 있고, "그러게요 분명 어려운 순간이었는데 그럭저럭 지나갔어요. 견딜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하며 승화시킨 결과를 나눠주는 사람도 있지요. 아마도 전자는 고통과 슬픔이, 후자는 감사와 기쁨이 마음속에 더 짙게 간직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마음속에 간직한 것이 그의 성격이 되고 인격이 되고 영성이 되어가는 것이겠지요.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이사 61,10)
제1독서는 이렇듯 마리아의 기쁨을 예언합니다. 풍요하고 순탄해서도 아니고 누리며 대접 받는 삶이어서도 아닙니다.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할 수 있는 자격은 주님의 축복과 구원과 의로움을 믿고 그분께 온전히 자신을 던져 의탁한 이에게 부여되는 상급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벗님은 마음속에 무엇을 간직하고 있는지요. 녹록치 않은 삶에서도 마음속에서 기쁨을 길어올리시는 성모님처럼, 믿음과 의탁으로 마음속에 기쁨의 자리를 마련하시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일편단심一片丹心
-김찬선신부-
어제 예수 성심 축일을 지낸 다음 오늘 어머니의 성심 축일을 지냅니다.
이는 아드님의 축일을 지내면 어머니 축일도 지내야 한다는
교회의 전례 정신을 반영하는 것임에 틀림이 없지요.
그런데 두 분의 성심을 같이 축하하고 기념하지만
올해 저에게는 두 분의 마음이 다르게 다가옵니다.
물론 사랑의 마음이라는 면에서는 다를 바 없지만
주님 마음 안에는 우리 인간이 있는 데 비해
성모님 마음 안에는 성자께서 계신 것이 차이지요.
그래서 주님 마음은 피 흘리시는 마음인 데 비해
성모님 마음은 성자를 모시기 위한 깨끗하신 마음입니다.
물론 아드님을 봉헌하실 때 성모님 마음도 창에 꿰 찔리는 고통을 겪으실
거라고 시므온 노인이 예언한 대로 성모님도 피 흘리시는 마음이시지만
주님이 우리 인간 모두를 위해 피 흘리시는 것이라면
성모님은 일편단심 주님을 위해 피 흘리시는 것이 차이점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모님 마음은 주님 향한 일편단심一片丹心, 한 조각의 붉은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조각조각 나 있지만 성모님 마음은 한 조각입니다.
우리에게는 분심이 많지만 성모님께는 분심이 없고 오직 한 마음입니다.
우리의 어머니들이 자녀들에게 일편단심이니 성모님은 더 그러시겠지요?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주님을 향한 마음 외에 다른 마음은 없는 것이요,
우리 마음에 주님 사랑 외에 다른 것들은 깨끗이 다 치워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끗한 마음이란 마음 안에 쓰레기들을 다 치워버린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쓰레기들이란?
욕심, 근심, 걱정, 시기, 질투, 미움 등
우리 마음 안에 사랑 아닌 모든 부정적 감정들,
그리고 사랑일지라도 주님 사랑이 아닌 사랑들이 아닐까요?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6월 9일 토요일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오늘의 복음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0년 6월 22일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0) | 2020.06.21 |
---|---|
2020년 6월 21일 연중 제12주일 (0) | 2020.06.20 |
2020년 6월 19일 금요일 예수 성심 대축일 (0) | 2020.06.18 |
2020년 6월 18일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0) | 2020.06.17 |
2020년 6월17일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0) | 2020.06.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