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5월 10일 부활 제5주일

Margaret K 2020. 5. 9. 19:33

2020 5 10일 부활 제5주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았으니 
나의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요한 14,1-12)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
If you know me, then you will also know my Father

 

2020년 5월 10일 주일 부활 제5주일 매일미사_이옥수 도미니코 신부 집전   

 https://www.youtube.com/watch?v=Ya3xIEEV5U8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어떻게 …….’ ‘어떻게 …….’ 토마스는 ‘어떻게’에 묶여 있습니다. 토마스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실은 예수님 그분 자체입니다. ‘어떻게’는 토마스가 아니라 예수님의 일입니다.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어떻게’를 찾아 나서는 것은, 지도도 없이 미지를 탐험하는 일과 같습니다. 토마스와 필립보는 자기 경험과 지식의 한계 안에서 예수님을 이해하고자 합니다.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실은 자신을 개방하지 못하는 제자들의 한계 때문입니다. 

요한 복음에서 자주 등장하는 말마디가 ‘머물다’입니다. 함께 머무는 것은 경험과 이해의 사전 지식이 필요한 일이 아닙니다. 말 못하는 강아지나 고양이와도 함께 머물 수 있는 우리 사람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는 함께 머물기가 그리 힘든 이유는 무엇일까 곰곰이 자문해 봅니다. 말이 통하고 뜻이 통하는 것이 가능한 사람 사이에, ‘통할 수 있다는 사실’이 통하지 못하는 갈등의 시작이 될 수 있음을 뼈저리게 반성합니다.
‘너무 믿고, 너무 의지해서, 너무 미워할 수 있다.’라는 말은 신앙생활 안에서도 되짚어 보아야 할 말입니다. 예수님을 너무 믿고, 너무 의지해서 함께하시는 예수님이 아니라 자신이 꿈꾸는 예수님, 자신이 갈망하는 예수님이라는 우상을 부여잡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말을 다 들어주신다는 믿음은 예수님께서 이런 죄인 안에서도 자유로이 당신의 뜻을 온전히 펼치실 수 있을 때 터져 나오는 감사와 감탄의 행위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작 우리의 편협한 뜻을 이루시려고 육화하시고 우리와 함께 머무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자유로우실 수 있도록 예수님 앞에서 조용히 침묵하는 시간을 가져 보아야겠습니다. (박병규 신부)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그곳

-키엣대주교-


생로병사는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숙명입니다. 행복과 영원한 생명은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인간의 꿈입니다. 그 꿈에 도달하는 길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 희망을 주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렇습니다. 길이신 주님을 따라간다면 그 곳에 도달할 것입니다. 진리이신 주님을 따라간다면 길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생명이신 주님과 같이 산다면 결코 죽지 않고 영원한 행복을 얻을 것입니다. 천국은 더 이상 꿈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한 자리를 마련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유혹과 진실을 은폐하기 위한 거짓들이 항상 우리 옆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군중들과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고함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예수님을 죽이라며 폭동을 일으키려는 군중들의 거센 요구를 물리치지 못했고 물을 받아 군중 앞에서 손을 씻으며 말했습니다. “나는 이 사람의 피에 책임이 없소. 이것은 여러분의 일이오.” 결국 진실을 덮기 위해 거짓과 거짓이 결탁했습니다.

“그 분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 되살아나셨다.”

주님은 진실과 생명에 이르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아버지 하느님께 돌아가기를 원한다면 그 길은 오직 하나, 주님을 따르는 길뿐입니다. 그 길이야 말로 가장 안전하고 바른 길입니다. 그 길을 열어주신 분이 바로 주님이시며 그분이 바로 길이시며 우리가 가야 할 목적지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주님 안에서, 주님을 따르고 주님과 함께 가야만 합니다. 마치 내 안에 주님이 계신 것처럼, 주님 안에 내가 있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그분의 길을 따라 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이신 하느님 안에 계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 안에 머무르기 위해서는 그 분과 함께 가야 합니다. 그리고 내 몸 안에 그분의 모습을 지니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분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최종 목적지입니다.

주님과 함께 가는 길은 아주 멀고 힘든 길입니다. 아마 평생을 가도 도달할 수 없는 길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함께 가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에 순명하고, 아버지 하느님과 하나되기 위해 당신의 뜻을 버리신 것처럼 우리도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과 완전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나의 뜻을 버림으로써 그분과 하나되는 그 때야 말로 하느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 당신의 길 안에서 살아가야 함을 알게 하여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주님의 겸손과 온유함에 대해 묵상해 보십시오.

2. 주님의 길은 비록 멀고 힘든 길이지만 주님과 함께 그 길을 가고 있습니까?

3. 주님의 길이 아닌 다른 어느 길위에서 홀로 헤매고 있습니까?

4. 주님의 길을 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임상만신부-


코로나19 감염 확산 중심에 유사종교 ‘신천지’가 자리하면서 우리 사회에는 한동안 종교 무용론을 주장하는 이들로 인한 사회적 논쟁이 있었다. 죄책감을 없애거나 복을 빌러 교회에 간다는 둥 그리스도인들을 반사회적이거나 이기적인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왜곡하거나 의지가 나약한 사람들이 교회를 찾는다며 현실의 고통을 폄하하는 발언을 일삼았다.

물론 이런 말들이 전혀 근거가 없는 공격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맞는 내용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시간을 내어 교회에 나가고, 그들 나름의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은 그곳에 길과 진리와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라고 말씀하시며, 당신은 단지 사람들이 그 길에 이르는 것을 돕기 위한 안내판이 아니라 바로 그 ‘길’ 자체라고 선언하신다. 그리고 당신만이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해답이므로 엄한 곳에서 더 이상 헤매거나 근심하지 말고 당신을 믿고 따르라고 말씀하신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잡혀가시기 바로 직전, 매우 절박한 상황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것이다. 이들이 입으로는 목숨을 걸고 당신을 따르겠다고 장담하며 이구동성으로 소리치지만, 당신께서 잡혀가시고 나면 자기들이 가야 할 길도 모르고 방황하게 될 사람들이라는 것을 익히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이런 제자들을 두고 가셔야 하기에 단호하게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요한 14,3)고 하셨다. 모든 것이 절망적이고, 이제 다 끝장이 난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지만, 사실은 이제 당신으로 인하여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고, 당신을 통해 하느님의 나라가 서게 될 것이니 의심하지 말고 당신을 믿으라는 말씀이다. 나아가 다가올 하느님 나라에 대한 확실한 비전을 갖고 세상의 일에 대해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근심하지 말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지금 너희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지만, 믿음으로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곧 길이다. 세상은 사방이 온통 위선과 사기와 거짓이 만연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믿어라, 내가 곧 진리이다. 너희에게 죽음의 위협이 닥칠지라도 놀라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곧 생명이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으면 누구나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유럽의 어느 수도원 경당에 새겨져 있는 글이다. “네 삶이 불행해도 나를 원망하지 마라. 너는 나를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네 주인으로 삼지 않았고, 나를 진리라고 하면서 내게 배우지 않았다. 너는 나를 빛이라고 하면서 나를 바라보지 않았고, 나를 길이라고 하면서 나를 따라오지 않았다. 너는 나를 능력이라고 하면서 나를 의지하지 않았고, 나를 응답이라고 하면서 기도하지 않았다. 이제 모든 근심을 멈추고 오직 나를 바라보며 기도하라.”

세상에는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신 예수님을 의지하며 그의 말씀을 따라 하느님 나라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세상에 속하여 있지만,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모습으로 살기에 세상의 어떤 역경도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세상은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른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참된 삶의 길은 '사랑의 디딤돌'

-김창선-


오늘은 부활 제5주일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그리스도께서 사랑의 친교를 이루는 참된 삶의 길임을 계시하십니다. 삶의 궁극 목적인 ‘행복으로 가는 길’이기에 마음에 간직합니다. 이 말씀에 머물다 보니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세요.”하신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고별인사가 생각납니다.

젊은 시절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읽고 공감한 한 정신과 의사가 쓴 「아직도 가야 할 길」은 “삶은 고해다”로 시작됩니다. 영적 성장의 길은 평생 걸리는 머나먼 배움의 길인가 봅니다. 주님의 길을 따라가면 행복할 텐데 우리의 마음은 산란합니다. 삶은 힘들고 어깨의 짐은 무겁습니다. 인생은 ‘고해(苦海)’이기 때문일까요?

오늘의 제1독서의 말씀은 초기 예루살렘 공동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가난한 과부들이 매일 배급을 받을 때 홀대를 받았기에 그리스어를 쓰는 유다인들이 히브리어를 쓰는 유다인들에게 불평합니다. 공동체 생활에서 분배에 인간적 약점이 드러난 모습입니다. 열두 사도들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일곱 봉사자(부제)를 뽑아 안수하여 사랑의 봉사직무를 맡기고,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충실하니 교회는 더욱 성장합니다.

오늘의 제2독서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 예루살렘 성전의 “살아 있는 돌”이심을 밝히십니다. 주님께서 “시온에 놓으신 돌, 품질이 입증된 돌, 튼튼한 기초로 쓰일 모퉁이의 값진 머릿돌(이사 28,16)”이십니다. 세례로 주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교회(‘영적 집’)에서 보편사제직을 수행하는 “살아 있는 돌”로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영적 제물을 바칩니다(1베드 2,5).

주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 이 돌은 “차여 넘어지게 하는 돌과 걸려 비틀거리게 하는 바위”(1베드 2,7; 이사 8,14)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백성인 우리가 교회 건설에 쓰임새 있는 값진 돌이 되고, 하느님 마음에 드는 영적 제물을 바치려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빛의 자녀’답게 사랑의 삶을 사는 ‘디딤돌’이 되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요한복음이 전하는 오늘 복음은 예수님 고별담화(요한 14-17장)의 시작입니다. 성경에는 야곱, 모세, 바오로 사도 같은 주요 인물들이 마지막 떠날 때 후손에게 들려주는 여러 이야기(창세 49장, 신명 31-33장, 사도 20장)가 있습니다. 마지막 떠나시는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영원한 친교를 이루는 길임을 보여주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인간 존재의 ‘참된 삶의 길’, 진리 안에 있는 생명의 길을 계시하신 말씀입니다.

마지막 만찬 때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예수님께서 유다의 배신과 으뜸 제자인 베드로의 세 번 부인을 예고하십니다. 제자들의 마음이 산란함을 아시고 마음의 평화를 위하여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믿고 또 믿으라고 당부하십니다.

프라 안젤리코의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1433).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요한복음은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하느님의 외아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 ‘생명의 빵’, ‘영원한 생명의 말씀’, ‘세상의 빛’, ‘메시아’, ‘착한 목자’, ‘부활이요 생명’, ‘참포도나무’(요한 1,14.29; 6,35.68; 8,12; 9,22; 10,11; 11,25; 15,1)로 전합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합니다. 바로 그 성경이 예수님을 위한 증언입니다(요한 5,39).

공생활 동안 함께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요한 14,4)”라고 상기시키지만 형상을 중시하는 토마스는 그 길을 모른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로 가는 유일한 길(요한 14,6)임을 단언하시나 체험을 중시하는 필립보는 알아듣지 못하고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함께한 제자가 모른다기에 예수님은 “너는 나를 모른단 말이냐?” 하고 주의를 환기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면 하느님을 압니다(요한 8,19).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다.” 하신 주님 말씀을 믿지 못하면 하신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으라 하십니다(요한 14,9-11). 말씀대로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이십니다.

예수님의 삶은 언제 어디서나 사랑입니다. 인간적인 마음으로 조건 없는, 완전하고 보편적인 사랑이며, 삶의 의미를 되찾고 기쁨이 충만한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의 전 생애가 하느님의 계시이고 사랑이십니다(가톨릭 교리 478, 609). 주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만찬에서 사랑의 새 계명을 주신 예수님께서는 길이십니다. 그 길은 인간 존재가 아버지를 직접 뵙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길입니다. 사랑하면 모습이 닮아간다고 합니다. 우리의 품위는 사랑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새 성전에 “선택된 값진 머릿돌”이십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가 주님의 도구가 되어 모든 이들이 딛고 오르내리는 ‘사랑의 디딤돌’이 되면 “그분의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입니다(요한 14,12).”


너그러운 마음갖기!

신현준신부-


오늘 복음 말에서 개인적으로는 “하느님을 믿고 또 나 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요한 14,12)는 말이 마음에 와닿으면서, 여러 생각의 나래를 펼치게 해줍니다. 

우선, 하늘나라에 가게 되면 집 걱정은 안 해도 되겠구 나 싶은 안도감이 듭니다.

 또 물론 개개인마다 입장이 다를 수 있겠지만, 적어도 하늘나라에서는 집은 사는 곳이지 투 기의 대상이 되는 곳은 아니겠다 싶은 생각에 미소를 짓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 내가, 우리가 살 곳이 충분히 있다 는 예수님의 약속은 무엇보다도 큰 위안을 줍니다. 이보다 멋진 구원 약속이 어디에 있을까요?

 둘째로, 예수님을 믿으면 내가 어떤 사람이든지 상관 없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에서 우리 하느님이 얼마 나 마음이 넓은 분이신가 감탄하게 됩니다. 내가 구원받 을 만한 어떤 업적을 이루어냈건 이루어내지 못했건 상관 없이, 혹은 내가 키가 크고 잘생겼건, 키가 작고 못생겼건 상관없이, 혹은 피부나 출신지나 학위 등 무엇도 상관없 이, 우리 모두를 받아들일 만큼 하느님의 마음은 크고 넓 다는 말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또 그렇다면 이렇게 포용력이 크신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들 역시 이런 넓은 마 음을 받아들여 우리 안에 있는 온갖 편견의 벽을 무너뜨 리고 차별 없이 모든 이를 대하도록 예수님의 초대를 받 고 있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닮은 넓은 마 음으로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데 일조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흔히 ‘신천지’ 내지 ‘JMS’ 같은 잘못된 유사종교에 빠지는 이들을 보면, ‘이’ 세 상에 대한 관심은 없으면서 ‘저’ 세상에 대한 관심만 과도하 게 많은 이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면서 ‘저’ 세상에서는 주목도 받고 권력도 누리는 ‘한 자리’를 차지할 거라는 ‘저 세상 한탕주의(?)’에 빠져있는 건 아닐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우리는 이 세상 한가운데에서 예수님의 가르 침대로 살면서 평화를 이루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기 때문 입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 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5,23-24)

교형자매 여러분,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에 성당에도 잘 나오지 못하고 미사와 봉사활동 등에 참여하지 못하면 서 내적으로 많이 힘드셨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 에게 공포와 걱정을 끼치는 이 상황에서도 우리를 버리지 않고 함께 해주시는 우리 주님의 사랑을 확신하면서 우리 주님처럼 넉넉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우리 자신과 우리 이웃을 바라보며 기도할 때, 이처럼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 면서 작은 ‘부활체험’을 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아멘.


입만 열면 좋은 말을...

정귀철신부-


오랜 기간 사목활동을 하면서 가슴 아픈 일이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가슴 아팠던 일이 생각납니다. 

어느 날 성당 정문 앞에 상자가 놓여 있어서 그것을 열어 보니 그 안에는 십자고상과 성경, 예수성심상, 성모상, 묵주, 레지오 경본 두 권, 초 몇 자루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순간 어떤 신자가 이제는 신앙생 활을 하지 않겠다고 그동안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성물을 모두 다 성당 문 앞에 가져다 놓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져온 성물은 새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썼던 것이라는 것도 알았고 그러면 그렇게 오랫동안 해 왔던 신앙생활을 이제는 그만두겠다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성경에는 자매님의 세례명 이 쓰여 있었습니다. 

그 자매님은 무슨 이유로 신앙생활을 접기로 결심하였을까요? 20세기 들어 발전하기 시작한 ‘인지 심리학’에 의하면 사람의 행동을 유발하는 인자가 두 가지가 있다고 합 니다. 

하나는 이익이고 또 하나는 쾌락(행복)이라고 합니다. 즉, 사람은 이익이 있어야 움직이고 쾌락(행복)을 얻기 위하여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중 더 강력한 동인은 쾌락(행복)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사람은 어느 경우에 쾌락(행복)을 느낄까요? 그것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고 인정받을 때라고 합 니다. 그러기에 그 반대의 상황, 신뢰했던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차별을 받고 그들이 자신에 대한 나쁜 말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불쾌함을 느끼고 그에 대한 불만을 표현하고 강력하게 반응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사도행전의 말씀이 나오는데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히브리계 유다인들에게 불평을 터뜨 리게 되었고 그 이유는 그들의 과부들이 매일 배급받을 때에 홀대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나옵니다. 주님의 제 자들인 사도들도 그렇게 차별을 했으니 그들이 얼마나 기분이 나빴으면 불평을 했을까요! 나라도 그러한 차 별 대접을 받고 무시를 당했다면 가만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 내에 많은 냉담자가 있습니다. 그들이 냉담한 이유는 우리 천주교회의 교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 서, 혹은 예수님을 믿기가 싫어서가 아닐 것입니다. 교회 내에서 성직자나 수도자 혹은 교우 간에 인정해 주 지 않고 무시당하고 차별당한다고 느껴서 상처를 받고, 교회에 나오면 마음이 편해질까 했는데 그러지 않아 서 불평을 하게 되고, 즉, 인간관계에 상처를 입어서 냉담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라 봅니다.


 요즈음 사이비 종교인 신천지에 대해서 많은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신천지 안에 천주교에서 넘어온 사람들 이 매우 많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천주교는 전례가 재미도 없고 인정하고 존중해 주지도 않고 끼리끼리 어울리고 차별하고 열심히 하면 시기 질투하고 뒷담화하고 무시하니 그런 사이비로 넘어가는 것이 아닐까요?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어울리고 세리와 창녀와도 어울린다고 비판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은 그 어느 누구도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름을 불러 주셨습니다. 세리 자캐오는 자신의 이름을 불 러 주시는 예수님께 믿음을 고백하고 회개의 삶으로 변화하였습니다. 우리도 교회 안에서 예수님처럼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며 서로 간에 입만 열면 좋은 말을 한다면 불평하는 사람도, 냉담하는 사람도 없는 사랑과 행복이 넘쳐흐르는 공동체가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이상영 신부-


 사람은 누구나 인생이라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통해서 도달하게 될 목적지를 추구하며 길을 갑니다. 자신이 추구하는 목적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길은 정해집니다. 그리고 추구하는 목적을 향해 인생길을 잘 가고 있는지 두고두고 따지며 걸어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생의 목적은 정해졌는데 그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 그리고 그 길 이 정말 확실한지를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누군가의 인도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아무나 따라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엉뚱하고 잘못된 길로 들어설 수도 있고, 그래서 자신의 인생을 망칠 수도 있 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고 얻어 누리고자 하는 사람들은 당신을 따라오라고 말씀하 십니다. 이 말씀은 인생의 목적이 생명이 아닌 다른 것이라면, 예컨대, 부나 권력이나 명예 등등이라면 예 수님께 올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다면 다른 것은 얻을 수 있어도 생명은 얻지 못한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생명을 얻지 못한다면,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을 얻는다고 할지라도 아 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마태 16,26)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요한 14,6)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그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십니다. 대개는 목적지에 도달하 기 위한 길과 그 길의 참됨 여부, 즉 목적이 분리되어 있지만,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예 수님께서는 생명을 얻기 위한 수단인 동시에 목적이시며, 생명으로 가는 길인 동시에 생명 그 자체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동시에 길이 되고 진리가 되고 생명이 되십니다. 길과 진리와 생명을 따로따로 찾고 얻으려 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는 길이 바로 진리요, 진리가 바로 생명입니다. 그리고 그 길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길, 진리, 생명은 하나로 수렴되는데, 곧 예수님이십니다.  

 제자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서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열쇠는 바로 부활에 대한 믿음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요, 깨달아야 할 진리요, 누려야 할 생명 그 자체이십니다. 예수님의 부활 에 대한 믿음 안에서 우리가 따라야 할 확실한 길을, 오류와 거짓으으로 가득 찬 세상을 밝히는 등불 같은 진리를, 우리가 받아 누려야 할 생명을 찾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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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상에서 허들 경주가 있습니다. 허들이라는 장애물을 놓고서 이를 뛰어넘어 순위를 다투어 결승선에 도달하는 경기입니다. 언젠가 육상 경기장에 갔다가 허들 선수들이 연습하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허들의 높이에 깜짝 놀랐습니다. 1m가 넘는 높이였고 그 무게도 상당했습니다. 총 10개의 허들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합니다. 당연히 장애물이 없는 일반 트랙경기보다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 경기를 보면서 우리 인생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생의 길에 장애물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 장애물을 당연하다고 여겨야 합니다. 원래가 장애물이 놓인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빨리할 수 없다고, 또 이 장애물을 뛰어넘기 힘들다고 그냥 포기하면 어떨까요? 허들 경주 선수가 이렇게 했을 때 실격을 당하는 것처럼, 우리 역시 결승선에 도달할 수 없으며 승리의 기쁨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허들 경주 선수는 달리는 연습뿐 아니라 허들이라는 장애물을 뛰어넘는 연습도 합니다. 우리 역시 인생의 길에서 장애물을 뛰어넘는 연습을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포기, 좌절이 아니라, 결승선이라는 희망을 바라보며 앞으로 또 앞으로 달려야 합니다.

우리의 결승선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가장 큰 선물을 그냥 주겠습니까? 고통이나 시련에 무너지지 않고 그 희망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먼저 모범을 보여주시지요. 그 모범을 기억하며 오늘도 힘차게 나의 장애물들을 뛰어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신께 굳은 믿음으로 다가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이 땅에 직접 오셨고, 가장 큰 사랑과 함께 많은 표징을 던져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믿지 못합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스스로 장애물을 뛰어넘는 것이 아니라, 그 장애물을 말끔하게 치워 줄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불편함을 해결해 줄 ‘종’을 찾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스스로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주님만이 길이고 진리이며 생명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로 이끌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길 앞에 많은 장애물이 놓여 있어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주님만 굳게 믿는다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 앞의 장애물만을 바라보면서 한숨을 내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면서 희망의 웃음을 지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더 행복해지길 바라지 않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김한승). 



갱년기 극복.

선배 신부님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한 신부님께서 불쑥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 갱년기인가 봐.”

여성과 마찬가지로 남성도 나이가 들면서 남성호르몬이 줄어든다고 하지요. 그러면서 감정 기복과 수면장애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이 신부님께서도 이런 증세가 나타나면서 요즘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때 바로 옆이 있었던 그 신부님의 동창 신부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십 넘도록 열심히 살았으니 이제 지칠 때도 된 거지.”

저의 경우, 아직 갱년기가 오지 않았는지 여전히 잠도 잘 자고 어떤 특별한 감정 기복도 없습니다. 그러나 제게도 이런 위기가 온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다행인 것은 말할 대상이 참 많다는 것입니다. 같은 길을 걸어가는 신부들도 있고, 무엇보다 나를 지켜 주시는 가장 든든한 ‘빽’이라 할 수 있는 주님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버티는 것만으로도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럴수록 주님을 바라보면서 주님과 함께해야 하지 않을까요? 주님께서 힘들어하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괜찮아, 내가 있잖아.”                  

당신의 감정은 100% 당신 책임이다

-전삼용신부-


어떤 분들은 상담이나 고해성사를 하며 제가 그분들 감정에 맞장구쳐주기를 바라십니다. “신부님은 이런 상황에서 화 안 나시겠어요?”라고 말하는 듯하고, 또 어떤 경우는 “신부님은 이런 상황이라면 주일미사에 나올 수 있었겠어요?”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이해해주고 위로해주고 보듬어달라는 것입니다. “저는 화 안 날 텐데요?”, “저는 그래도 주일미사에 빠지지 않았을 텐데요?”라고 말하면 그분과의 관계는 끝입니다. 아주 냉담할 수 있어서 그렇게는 말하지 못하고 잘 감싸주며 말해줍니다. 그러나 오늘은 복음 말씀이 그런 것이기에 일대일로 말할 때는 할 수 없었던 말을 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당신이 그런 건 100% 당신 책임입니다.”

      물론 100% 책임이라고 말하는 것은 좀 지나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 1%라도 남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그런 상황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면 점차 그 핑계가 늘어나서 자신이 변화할 기회를 잃게 됩니다. 자신의 행복과 감정에 대한 책임을 100% 자신의 책임이라고 느낄 때야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가 보이게 됩니다.

      17살에 최연소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소녀가 있습니다. 파키스탄의 말라라 유사프자이라는 소녀입니다. 그녀는 어린 소녀들의 교육을 받아야 할 권리를 주장하다 15살 때 파키스탄 탈레반 무리가 쏜 총이 머리에 맞았습니다. 그녀는 기적적으로 살아나서 트라우마를 이겨내고 16살 생일에 유엔에서 연설하였습니다. 어떠한 상황도 그녀의 소녀들에 대한 교육권에 관한 주장을 중단할 핑계를 주지 못했습니다.

      베서니 해밀턴은 서핑 선수였습니다. 13살에 하와이 카우아이섬에서 서핑 보드에 잠시 누워있다가 상어에게 어깨 밑으로 팔 한쪽을 잃었습니다. 당시 몸에서 60%의 피가 빠져나가 저혈량 쇼크로 죽음에 직면했지만, 그 모든 위기를 이겨내고 1달 뒤 다시 바다에 나가 서핑 보드를 잡았습니다. 그로부터 1년 뒤 전국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우승행진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짐바브웨의 촌구석에 테레라이 트렌트라는 이름의 11살짜리 여자아이가 있었습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지 1년도 되지 않아 아버지가 소 1마리 가격으로 툭하면 손찌검해대는 남자와 혼인시켰습니다. 테레라이는 박사학위를 받아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을 돕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20살도 되기 전에 4명의 아이를 낳고 끊임없는 남편의 손찌검에 피해를 보며 공부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돈을 한 푼 두 푼 아껴가며 결국 가족을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대학에 합격했고 쓰레기통을 뒤져가며 아이들을 먹여가면서도 공부를 끝까지 마쳐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물론 계속 꿈을 방해하며 손찌검하는 남편과는 결별을 선언했습니다. 그녀는 시골 지역 교육을 지원하기 위해 테레라이트렌트인터네셔널을 설립해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특별한 사람들만의 이야기일까요?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다만 그들은 자신의 감정과 상황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은 것이 다를 뿐입니다.

      내가 감정이 격해져 화를 냈다면, 나는 내가 감정이 나빠진 것을 남의 탓을 하는 중입니다. 화가 난다면 그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자신을 먼저 살펴야 합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누구라도 화가 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화가 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그 사람이 본래 그런 무감각한 사람이라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람은 그만큼 노력한 것입니다. 감정이 저절로 일어나는 것인데 어떻게 컨트롤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오늘 복음 말씀을 인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시키실 분이 아닙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바로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그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당신 안에 살게 하심으로써 아버지께서 주시는 성령의 은혜로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죽음이라는 극도의 고통 앞에서도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시며 성령을 청하셨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할 수 없어도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성령으로 우리는 매 순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매 순간 행복할 수 있음을 믿지 못하면 계속 핑계만 대다 한 번도 행복하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지금 행복하지 못한 것은 다 나의 탓입니다.

왜냐하면, 언제든 성령께서 나에게 행복한 감정을 주시기 위해 준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언제든 원하면 행복한 감정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가신 이유는 이 성령을 우리에게 내려주시기 위함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은 외적인 변화가 아니라 내적인 변화입니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자기 자신을 매 순간 평화롭고 행복하게 할 수 있다면 그것보다 큰 기적은 없습니다. 당장 핑계를 집어치우고 지금, 이 순간부터 결코 행복을 잃지 않으려고 결심해야 합니다.

      제가 군대에서 운전병을 하다가 큰 사고를 낸 적이 있습니다. 군용트럭으로 자동차를 박아 폐차시켰습니다. 다행히 운전자는 많이 다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돈을 빌려 합의금을 싸 들고 오셔야 했습니다. 저는 운전을 하기 싫었습니다. 이것을 들은 상관은 “그런 거 가지고 운전 못 하면 운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지금 못 하면 영원히 못 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운전하니 별거 아니었습니다. 얼마 뒤 제대하고 어떤 사람이 제가 모는 차를 받아서 그때 합의금으로 쓴 돈을 그대로 다시 돌려받을 수 있었습니다. 운전을 포기했다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감정을 남의 책임이나 상황의 핑계로 그대로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당장 다시 그런 상황에서도 행복할 수 있도록 내가 변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는 성령을 주시려고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믿읍시다. 그러면 불가능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기적은 우리 내면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조재형신부-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중국의 성현 순자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푸른색은 쪽풀에서 취했지만 쪽풀보다 더 푸르고, 물이 얼어 얼음이 되었지만 얼음은 물보다 더욱 차갑다.”라고 하였습니다. 한국은 근대화의 과정에서 늦게 출발했습니다. 일본에게 침략을 당했고, 한국전쟁도 있었습니다. 보릿고개를 넘어야 했고, 힘들고 어려운 시절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한강의 기적을 보여주었습니다. 촛불의 기적을 보여 주었습니다. 한국은 코로나19를 겪으면서 방역과 치료에 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격세지감(隔世之感)’이라 하겠습니다. 한국의 진단키트는 여러 나라에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한국의 성숙한 시민의식은 취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외국에서 지내면서 이런 뉴스를 들으니 기분이 좋습니다.

 

코로나19을 겪으면서 후배 신부님들의 모습을 봅니다. 저는 생각하지 못했던 일을 기획하고, 실행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성서공부 어플을 만들어 인터넷에 올렸습니다. 저도 문제를 풀면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각자의 공간에서 성가를 부르고 그것을 합창으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스마트 폰을 이용해서 실시간으로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기도 했습니다. 참여한 신자들도 현장감이 있어서 좋았다고 합니다. 아날로그에 익숙한 저는 디지털 문화에 적응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후배 신부님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문화를 디지털을 통해서 마음껏 발산하고 있습니다. 시대는 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않습니다. 변화된 시대에 변하지 않는 신앙의 진리를 전하는 신부님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 이후의 신앙생활을 생각합니다. 미사가 중단되면서 오히려 미사 참례와 영성체의 의미가 더 소중해졌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물과 공기의 고마움을 몰랐던 것처럼 미사 참례와 영성체의 소중함을 잊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공동체가 함께 어울려 미사를 봉헌하고, 친교를 나누는 것이 참으로 소중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전례를 체험했습니다. 각자의 가정에서 영상으로 미사를 참례했습니다. 사회생활과 학교생활에 쫓겨 잊고 있었던 가정과 일상이라는 보물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거룩한 장소는 성당만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의 가정은 작은 성당입니다. 예전에는 가정에서 묵주기도, 연도, 아침기도, 저녁기도를 함께했습니다.

 

코로나19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용어를 익숙하게 했습니다. 우리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남을 보호하기 위해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해야 했습니다. 답답한 마스크를 착용해야 했습니다. 좋아하는 모임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성지순례도 여행도 포기해야 했습니다. 재택근무를 해야 했고, 직장을 그만 두어야 했습니다. 실직자들이 생겨났고, 생존의 위기를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 다른 사람을 보았습니다. 환자들에게 달려간 의료진이 있었습니다. 감염의 위험이 있음에도 함께 했던 봉사자들이 있었습니다. 교황님은 환자들, 보호자들, 의료진, 봉사자들, 백신을 개발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사회적인 거리는 두었지만 나눔의 거리는 좁혔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은 변화되었습니다.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였고, 박해를 견디어냈고, 순교로 신앙을 증거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나약한 베드로 사도는 한 번의 설교로 삼천 명이 넘는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을 박해했던 바오로 사도는 초대교회의 신학과 교리의 틀을 만들었고,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마르코를 비롯한 복음사가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을 기록하였고, 그것이 복음서가 되었습니다. 예로니모, 암부로시오, 이냐시오, 아우구스티노와 같은 교부들은 이단에 맞서서 정통교리를 수호하였습니다. 베네딕토, 아빌라의 데레사,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교회의 영성을 풍요롭게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길은 고속도로가 아닙니다. 전용도로도 아닙니다. 벗이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 함께 가주는 희생의 길입니다. 자갈과 가시밭을 정리하는 개척의 길입니다. 권력의 길이 아닙니다. 명예의 길이 아닙니다. 성공의 길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이 드러나는 길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길입니다.

생명은 나만을 위한 생명이 아닙니다. 타인의 생명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하느님의 선물임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죄인일지라도, 아픈 사람일지라도, 외로운 사람일지라도, 가난한 사람일지라도, 이방인일지라도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태어난 생명입니다.

진리는 남을 구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남을 배척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류는 잘못된 신념과 가치를 진리인 것처럼 포장한 적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나와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나와 다른 가치를 지닌 사람을 포용하지 못하였습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전쟁을 하였고, 사람들을 재판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진리는 벗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바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진리는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희망입니다. 예수님의 진리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넘어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는 신앙입니다.


오늘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통해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뵙고 있습니까?

 -양승국신부-

 

신앙에 귀의한 사람들, 영적 삶에 들어선 사람들에게 있어 가장 큰 갈망은? 아마도 ‘평생에 걸쳐 단 한번만이라도 하느님을 얼굴을 한번 뵈었으면!’ 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게 너무 과도한 바람이라면 ‘적어도 하느님의 음성이라도 직접 내 귀로 들어봤으면!’ 하는 것일 것입니다.

 

필립보 사도는 이런 갈망을 아주 강하게 표출하고 있습니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요한 복음 14장 8절)

 

아직도 갈길이 먼 필립보 사도, 아직도 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은 필립보 사도의 모습이 너무도 안타까웠던 나머지 예수님의 큰 탄식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 합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요한 복음 14장 9~10절)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예수님을 어떤 존재로 인식하는가?’ 하는 문제는 신앙 여정 안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우리들 머릿속에, 마음 속에, 삶 속에 명료하게 자리잡아야 하는 화두(話頭)입니다.

 

우리가 이미 잘 파악하고 있는 바처럼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곧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과 하느님은 일심동체입니다. 두분은 서로 뗄레야 뗄 수 없는 찰떡궁합, 불가분의 관계 안에 계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아는 것과 하느님을 아는 것은 따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 아버지께서 계십니다. 예수님을 뵙는다는 것은 곧 하느님을 뵙는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인간 세상 안으로 들어오셨는데, 그분이 곧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100퍼센트 하느님의 의중을 반영한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다시 말해서 복음서를 통해서, 하루에 몇번이고 하느님을 만나뵐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과 예수님 두분은 언제나 상호내재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신다.’는 그 단순하면서도 신비스런 진리를 겸손한 마음으로 인정하는 것, 오늘 우리네 신앙 생활 안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대 명제입니다.

 

돈보스코를 얼마나 사랑하고 존경했던지, 모든 측면에서 모방했던 후계자 필립보 리날디 신부님에게 후배 살레시안들이 별명을 하나 붙여드렸는데, ‘제2의 돈보스코’‘목소리 빼도 돈보스코와 똑같았던 살레시안’이었습니다.

 

저희 후배 살레시안들은 필립보 리날디 신부님을 통해 돈보스코를 봤습니다. 또한 필립보 리날디 신부님은 돈보스코를 통해 예수님을 뵈었습니다. 돈보스코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을 뵈었습니다.

 

한 무신론자가 택시를 타고 가다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한 여인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단순하고 어눌했지만, 진심과 사랑으로 가득한 그녀의 목소리에 큰 감동과 매력을 느꼈습니다. 한 마디 한 마디 듣는 동안 온 몸은 전율이 가득했습니다.

 

그는 즉시 방송국으로 전화를 걸어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물었습니다. 그 여인은 콜코타의 성녀 마더 데레사였습니다. 곧바로 찾아갔고, 그녀의 소박하면서도 강렬한 영적 조언을 들은 그는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인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는 마더 데레사의 목소리를 통해 들려오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오늘 우리의 얼굴, 우리의 말투,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통해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뵙고 있습니까?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요한 14,1) 

-이영근신부-


인생은 나그네 길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길을 걷는 이에게 중요한 것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가야 할 곳으로 가고 있는가?’ 왜냐하면,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엉뚱한 곳에 가 닿는다면, 애초에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비록 가야할 곳으로 간다할지라도 갈 수 있는 길을 모른다면, 가야할 곳에 도달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에게 올바른 길을 보여주시고, 무엇이 참 된 삶인지를 깨우쳐줍니다.

<1독서>에서는 초대교회에서 일곱 부제를 뽑는 과정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가는 믿음의 길을 제시해주며, <2독서>에서는 믿고 주님께 나아가는 이들, 곧 그분의 소유가 되는 백성에 대해 말해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길을 갑니다. 당신께서는 어디로 가는지를 분명히 알고 가십니다. 그리고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도 역시 그 길을 갑니다. 그들도 역시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갑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요한 14,4)


그러나 막상, 제자들은 그 길을 모른다고 합니다. 토마스가 대답합니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요한 14,5)


어쩌면 이 대답은 아주 솔직한 대답일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그곳에 갈 수 있는 길도 몰랐을 것입니다. 어쩌면, 따라가고 있을 뿐,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면서 가고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이 어디인지는 그곳으로부터 오신 분만이 알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오신 분만이 아버지의 집에 거처가 많이 마련되어 있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오신 분만이 그곳으로 가는 길을 아십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모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가야할 길은 다름 아닌, “믿음의 길인 것입니다. 아니, 믿음으로만이 갈 수 있는 길인 것입니다. 그것은 아버지를 믿고 아버지에게서 오신 분을 믿는 길입니다. 믿고 따라가는 믿음의 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요한 14,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요한 14,11)


사실, 세상 사람들은 진리를 알고자 하지만, 그 진리를 따르고자 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진리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려야 하고, 자신을 버리는 데는 믿음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믿지 않고는 결코 진리의 길을 갈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믿는 바의 진리를 몸소 살 때라야 자유가 오지만, 우리는 알기는 빨리하고 믿고 실행하기는 더디 하기에 자유를 얻지 못합니다. 결국에는 믿음이 자유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우리가 알게 될 때가 아니라 그 진리를 믿음으로 행할 때, 비로소 자유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저의 성소의 길이야기를 조금 하겠습니다. 저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요한복음> 832절의 말씀에 매료되어 수도원에 들어왔습니다. “진리, 자유, 해방”, 그것은 그 당시 나에게는 절대 극명의 화두였습니다. 저는 진리이신 예수님께서 저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믿고 수도원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왜 진리를 온전히 따르지도, 자유롭지도 못할까?


나는 그 이유를 믿음이 약한 탓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말했듯이 자유는 진리를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를 믿고 따르는 데 있는 까닭입니다.

그렇지만, 사실은 이 길을 가다보면 믿으니까 따르기도 하지만, 따르면서 믿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 믿음이 부족해도 결코 따르는데 주저하거나 망설일 필요는 없습니다. 따르면서 믿게 될테니까요! 사실은 내가 그분을 믿고 따르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그분이 저를 믿어 주시기에, 그분의 믿음으로 이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의 지고한 사랑입니다.

저는 이미 믿고 따라나선 자입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의 길을 걸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온전히 따르고 있지는 못합니다. 여전히 믿음이 약한 까닭입니다. 사실은 내가 그분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인도하여 함께 동행 해 주시기에 가고 있는 길입니다. 그분은 나의 길동무요, 친구가 되어 주십니다.

오늘도 저는 그렇게 길을 걷고 있습니다. 때로는 길을 걷는 발걸음이 무겁고 마음이 산란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 길을 걸음은 제가 채 걷기도 전에 이미 이 길이 저를 이끌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오늘 제가 여기 있음은 제가 여기 있기 전에 이미 생명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토록 행할 수 있음은 제가 행하기 전에 이미 진리의 빛이 저를 비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토록, 이미 당신 집에 거처를 마련하신 아버지께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당신 아드님을 통하여 저를 이끌어 주십니다.


하오니, 저의 길이신 주님!

당신께서 길이 되어 제 발 아래에 밟혀가며 저를 이끄셨듯이,

저 역시 형제들 발아래 기꺼이 밟히는 길이 되게 하소서! 저의 생명이신 주님! 당신께서는 제 이빨에 씹혀 부서져 제 속에서 살이 되셨듯이,

저 역시 형제들에게 씹혀 부서지는 양식이 되게 하소서! 저의 진리이신 주님! 당신께서는 제 주장에 밀려 옳고도 져주셨듯이,

저 역시 형제들에게 밀려 저를 태워 진리의 빚을 밝히게 하소서! 아멘.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요한 14,1)


주님!

마음이 산란해지지 않게 하소서.

당신을 믿고 아버지를 믿게 하소서,

알면서도 안다는 사실을 모르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믿고 의탁하게 하소서. 제 자신이 아니라, 당신을 믿고 당신께 의탁하게 하소서.

당신의 사랑을 믿고 그 믿음 안에서 당신의 한결같은 사랑을 알게 하소서. 아멘.


나를 믿는 사람은 

-송영진신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요한 14,12).”

이 말씀은 제자들이 하게 될 일에 대해 예언하신 말씀이기도 하고,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을 지시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라는 말씀은,
예수님 승천 후에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들’을 이어받아서
계속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신 말씀이기도 하고,
당신이 하시던 일들을 이어받아서 계속하라고 지시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더 큰 일’이라는 말은 ‘더 위대한 일’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더 많은 일’을,
즉 더 먼 곳으로 가서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하게 되는 일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가셨던 곳보다 더 먼 곳까지(세상 끝까지) 가서,
예수님께서 만나셨던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온 세상 사람들을) 만나서
복음을 선포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기도 하고, 그렇게 하라는 지시이기도 합니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승천을 예고하신 말씀이고,
또 제자들이 ‘더 많은 일’을 하게 되는 이유,
또는 그 일을 해야 하는 이유를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승천 전에는 예수님께서 모든 일을 직접 다 하셨고
제자들은 따라다니기만 했는데,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당신이 하시던 일들을 모두 제자들에게 맡기셨습니다.
그것은 이제 제자들이 모든 일을 직접 해도 될 정도로 충분히 발전했고
성숙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제자들 자신들의 능력만으로 일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에게 꼭 필요한 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나를 믿는 사람은”이라는 말씀이 바로 그것을 나타냅니다.
제자들이 일할 때 필요한 믿음은 예수님께서 언제나 함께 하신다는 믿음입니다.
(겉으로만 보면 제자들이 일하고 예수님께서 도와주시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예수님께서 일하시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도와드립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서 떠나신 일이 아니라,
언제나 어디서나 항상 제자들과 함께하기 위해서 존재 방식을 바꾸신 일입니다.)

지금까지 한 말을 정리해서, 예수님 말씀을 다음과 같이 풀이할 수 있습니다.
“나는 곧 아버지께 간다. 그러니 이제부터 너희는 내가 하던 일을 이어받아서
계속하여라. 그리고 세상 끝까지 가서 온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다는 것을 믿어라.”
이 말씀은 마태오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8-20).”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신앙인들이 할 일 가운데 첫 번째 일은 ‘복음 선포’입니다.
우선 먼저 ‘내가’ 믿고, ‘내가’ 구원받는 것이 중요하지만, 남이야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나만’ 구원받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그런 생각은 ‘사랑 없는’ 이기적인 생각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믿음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복음 선포는 이웃도 함께 구원받기를 바라고 노력하는 ‘사랑 실천’입니다.
믿음은 사랑과 하나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 선포는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지금 강조하고 있는 ‘복음 선포’는
전문적인 선교사들의 선교활동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포함하지만, ‘복음 선포’는 신앙인들이 삶 전체를 통해서
믿음을 증언하고 희망을 고백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삶 자체가 복음 선포입니다.
(삶 자체가 복음 선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될 수 있도록,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함께 있겠다는 약속만 하신 것은 아닙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그것보다 더 중요하게 보이는 약속도 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 14,13-14).”
이 말씀은 마르코복음에 있는 다음 말에 연결됩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마르 16,19-20).”
제자들은 표징들 덕분에 주님께서 언제나 함께 계신다는 것과 주님의 이름으로
청하면 주님께서 다 이루어 주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무엇을 청하든지 간에 아무거나 다
이루어 주겠다는 약속으로 오해할 수도 있는데,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음을 놓치면 안 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청하려면, 주님의 뜻에 합당하는 것만 청해야 합니다.
만일에 주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은 것을 청하면서도 주님의 이름으로 청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대죄가 됩니다.)

(여기서 ‘표징’이라는 말은 ‘놀라운 기적’들 외에도, 주님의 현존과
주님 말씀의 힘을 확신하게 해 주는 어떤 체험들도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주님의 말씀에는 단 한 마디도 ‘빈말’이 없습니다.
언제나 항상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살아 있는 말씀이기 때문에 주님의 약속은 늘 현실이 됩니다.
그것을 한 번이라도 체험하게 된다면,
신앙생활이 얼마나 위대한 생활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믿음’을 가장 크게 방해하는 걸림돌은 ‘의심’입니다.
야고보서 저자는 ‘의심’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주님에게서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그는 두 마음을 품은 사람으로
어떠한 길을 걷든 안정을 찾지 못합니다(야고 1,6-8).”
(혹시, 의심을 잘 물리치는 ‘비결’ 같은 것이 있을까?
믿으려고 더욱 노력하면서, 도와달라고 주님께 더욱더 열심히 기도하는 것 외에는
비결 같은 것은 없습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요한 14,1-12: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오늘 복음의 내용은 마지막 고별사의 시작 부분으로서 예수께서는 파스카 사건을 통해 그분의 참된 모습을 드러내실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장차 제자들과 영원한 파스카를 지내기 위한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성부께 올라가셨다가 그들을 데리러 다시 돌아오신다고 하신다.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이 성부께 이르는 유일한 이라고 하신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다. 예수님의 말씀의 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리라는 것을 생각지 못한다. 토마스가 이렇게 말한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5). 그러자 예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6)고 하신다. 이 말씀은 아버지께 이르는 길은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으로 생각했던 토마스에게 하신 말씀이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이르는 십자가의 길이라는 말씀이다. 그분이 바로 아버지와 같으신 분이라는 것이다(11절 참조).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진리요 생명이라고도 하시지만, 거기에 강조점은 이다. 여기서 생명진리는 예수께서 안내하시는 목적지라기보다 그분이 자신을 이라고 선포할 수 있는 근거이다. 즉 그분이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에 이신 것이다. 아들 그리스도는 진리이시다.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의 생명이시다. 우리를 일으켜 세우고, 죄의 저주로 죽은 우리를 되찾아 하느님과의 관계를 돌려주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진리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에 의해 드러난 계시의 선물이다. 그것은 하느님과 동일시되는 것이 아니라, 이 지상에서 또 역사 내에서 활동하며 계시를 전해주는 그리스도와 성령과 동일시되고 있다.”(I. De La Potterie, La verité dans st. Jean, vol. II, Roma 1977, p. 1009). 진리는 우리의 사고나 덕을 닦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강생의 신비를 통해, 또 성령의 선물로 우리를 만나러 오신 그리스도라는 살아있는 길’(히브 10,20 참조)에 자신을 맡기는 겸손한 믿음을 통해서만이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이 모든 말씀을 알아듣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내용이다. 그래서 필립보가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8) 라고 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을 당신과 하나이신’(요한 10,30; 17,11.21-22) 아버지께서 보내신 분임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답답하게 여기신다. 그분이 하느님과 같은 분이심을 입증해주는 말씀들을 보고 체험했음에도 말이다. 그것을 보는 눈은 믿음의 눈이어야 한다.

 

2독서: 1베드 2,4-9: 모퉁이의 머릿돌

베드로 사도는 이라는 상징적 개념을 통해 그리스도를 제시하고 있다. 이 돌은 버림을 받았지만, 하느님께서는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으셨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머릿돌에다가 매 순간 자신들을 쌓아 나감으로써 교회라는 신령한 집을 완성시켜 나아간다.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은 살아있는 돌이신 그분과의 결합에서 이루어진다. 여기서 세례를 받은 모든 신앙인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영적 제물을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5) 드리는 사제직을 부여받고 있다. 이 사제직을 잘 수행하는 것은 크나큰 정신력과 희생정신이 필요하다. 이것이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신령한 제사이다.

 

매일 아침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우리의 하루를 받고 있다. 그 하루는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미리 준비하신 하루이다. 그것은 지나치게 길지도 부족하지도 않으며, 별로 쓸데없는 허망 된 것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하루를 걸작이 되게 살라고 요청하신다. 이것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 하루가 오래전부터 만들어져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그것이 인간적 차원에서 지닌 중요성을 이해하고, 이 하루를 그래서 신앙인으로서 역시 열심히 살고자 할 것이다. 이렇게 주님께 신령한 제사를 드릴 수 있을 것이다.

 

1독서(사도 6,1-7)일곱부제의 선발은 우리에게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형제들에 대한 봉사도 우리가 세례를 통하여 부여받고 있는 그 왕다운 사제직의 요소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바로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께로 가는 십자가의 길이시며, 그 길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맡길 수 있으며, 그분을 닮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그 방법은 우리 자신의 삶을 통하여 매 순간 주님과 연결되어 있으면서 신령한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한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 6)

삶다운 삶은
예수님 안에서
믿음을 회복하는
삶입니다.

믿지 않고서는
통하여 나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삶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입니다.

자아를
벗어나는 것이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과
하나되는 삶입니다.

말씀을 통해
삶을 위로해
주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삶입니다.

매순간마다
말씀을 통해
삶을 위로해
주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집착을 벗어놓는
생명의 기쁨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쏟아져내리는
은총입니다.

진리와 생명
믿음의 길은
내려놓는 데서
열리게되는
일치의 삶입니다.

자아의 뜻을
내려놓는 것이
잘사는 법임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변화되어가고
완성되어가는
우리의 삶입니다.

그 삶을
걸어갑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믿음'을 촉구합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요한 14,1).

우리는 때때로 마음이 산란해지는 것을 체험합니다. 예수님도 수난을 앞두시고 겟세마니에서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마르 14,34)이라고 토로하신 적이 있으시지요. 마음의 산란함은 보통의 인간 삶에서도 그렇지만 영적 여정에서도 피할 수 없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고대의 관상가들, 은수자들은 마음이 완전히 평화롭고 평정을 이룬 상태인 "아파테이아(apatheia)"를 추구하며 기도와 수행에 전념했지요.

"믿음"

예수님께서 산란한 마음에 특효약으로 믿음을 제시하십니다. 당신을 믿고, 당신을 보내신 하느님을 믿음으로써 산란함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아파테이아"는 덕의 토양 위에 굳건히 서서 욕정이나 정념에 동요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믿음의 덕은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한 토양이 되어 줍니다.

"믿어라"(요한 14,11).

예수님은 줄곧 제자들에게 '아버지와 당신이 하나이고, 서로 안에 머무르시며, 당신의 일이 곧 아버지 뜻의 실현'임을 밝히시지만, 다 알아듣지 못하는 제자들은 엉뚱한 질문과 청원을 던집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지치지 않고 '믿으라'고 반복해 말씀하시지요.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요한 14,12).

그동안 제자들은 예수님 곁에서 그분을 보고 듣고 만졌지만, 머지않아 기억과 믿음으로 홀로서야 할 때가 올 겁니다. 그때는 말씀을 선포하고 아버지 뜻을 실행하셨던 예수님의 일을 그들도 하게 될 것입니다. 몇 차례 선교 여행에서 실습한 바를 직접, 책임을 가지고 수행해야 하겠지요. 그때 믿음이 그들을 지탱해줄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교회의 태동기에 일어난 갈등과, 이를 풀어나가는 사도들의 지혜가 펼쳐집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사도 6,2).

교회가 이제 막 꼴을 갖춰가는 초기다 보니 아직 제도적으로 임무가 분화되거나 직무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기에, 백성들이 권한을 인정하는 일부에게 과도한 양의 봉사가 부여될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사실 식탁 봉사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일 때문에 하느님 말씀을 제쳐 놓게 되는 상황이 문제가 될 수 있겠지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인 ...를 뽑아 사도들 앞에 세웠다"(사도 6,5).

사도들은 공동체의 짐을 나누어질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사도 6,3)들을 뽑자고 제안합니다. 그래서 뽑힌 일곱 명의 봉사자는 무엇보다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이들이었습니다. 믿음은 지상 생활을 마치고 하늘에 오르신 예수님을 이어받아 이 세상에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헌신할 협력자들의 기본 자질입니다.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사도 6,4).

믿음과 성령으로 무장하고 초대교회의 행정과 봉사에 투신할 동료들 덕분에 이제 사도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더욱 올바로 풍부히 살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공동체 안의 형제자매, 이웃, 동료들이 저마다의 개인 소명과 은사를 꽃피우게 돕는 토양이 됩니다.

제2독서에서는 반석인 베드로의 편지답게 믿음을 가리키는 "돌"의 심상이 반복되어 등장합니다.

"믿는 여러분에게는 이 돌이 값진 것입니다"(1베드 2,7).

예수님은 사람들에게는 버림 받았지만 하느님께 선택된 값진 모퉁잇돌이십니다. 단, 믿는 이들에게만 그렇습니다. 믿지 않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애석하게도 "차여 넘어지게 하는 돌, 걸려 비틀거리게 하는 바위"(1베드 2,8), 즉 걸림돌일 뿐입니다.

믿음은 논리나 감성을 뛰어넘는 은총이고 신비입니다. 믿음으로 초대받은 우리는 응답한만큼 자신의 소명을 충만히 살아내게 되고, 또한 동시에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신분이 어떠하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영적 제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치는 거룩한 사제단"(1베드 2,5)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누구를 믿습니까? 오늘 잠시 시간을 내어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소리내어 기도로 바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믿는 우리는 믿는 만큼 행복합니다. 어떤 처지에 있든 믿음이 우리 마음을 산란함에서 끌어내어 평화와 평정의 상태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믿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벗님의 믿음을 축하하며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기도를 올립니다.

"아무것도 벗님을 산란케 하지 말며
아무것도 벗님을 놀라게 하지 말지니
모든 것은 다 지나가고
하느님만 불변하시기 때문이지요.
인내하면 다 얻게 되지요.
하느님을 소유한 이는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아요. 하느님만으로 충분해요!
하느님을 뵙는 것이 벗님의 바램이고,
그분을 잃어버리는 것이 벗님의 두려움이며,
그분을 소유하지 못하는 것이 벗님의 고통이고, 벗님을 그분께 데려다 줄 수 있는 것이 벗님의 기쁨이길 빌어요.
그러면 벗님은 큰 평화 안에 살게 될 겁니다." 아멘.

영적 집의 건축가들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48801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너희가 나를 알았으니 나의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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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의 행복과 감정에 대한 책임을 100% 자신의 책임이라고 느낄 때야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가 보이게 됩니다.

  내가 감정이 격해져 화를 냈다면, 나는 내가 감정이 나빠진 것을 남의 탓을 하는 중입니다. 화가 난다면 그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자신을 먼저 살펴야 합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누구라도 화가 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화가 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그 사람이 본래 그런 무감각한 사람이라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람은 그만큼 노력한 것입니다. 감정이 저절로 일어나는 것인데 어떻게 컨트롤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오늘 복음 말씀을 인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할 수 없어도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성령으로 우리는 매 순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매 순간 행복할 수 있음을 믿지 못하면 계속 핑계만 대다 한 번도 행복하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지금 행복하지 못한 것은 다 나의 탓입니다.

왜냐하면, 언제든 성령께서 나에게 행복한 감정을 주시기 위해 준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언제든 원하면 행복한 감정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가신 이유는 이 성령을 우리에게 내려주시기 위함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우리 감정을 남의 책임이나 상황의 핑계로 그대로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당장 다시 그런 상황에서도 행복할 수 있도록 내가 변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는 성령을 주시려고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믿읍시다. 그러면 불가능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기적은 우리 내면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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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우리는 믿는 만큼 행복합니다. 어떤 처지에 있든 믿음이 우리 마음을 산란함에서 끌어내어 평화와 평정의 상태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믿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벗님의 믿음을 축하하며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기도를 올립니다.
"아무것도 벗님을 산란케 하지 말며
아무것도 벗님을 놀라게 하지 말지니
모든 것은 다 지나가고
하느님만 불변하시기 때문이지요.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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