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5월 12일 부활 제5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20. 5. 11. 19:17

2020년 5월 12일 부활 제5주간 화요일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라.
(
요한 
14,27-31)

 

"Peace I leave with you; 
my peace I give to you.
Not as the world gives do I give it to you. 

Do not let your hearts be troubled or afrai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이따금 평화를 잔잔한 호수의 평온함에 빗대어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거친 파도와 소란한 빗줄기를 ‘평화’라는 말마디로 표현하기에는 무리가 있지요. 잔잔한 호수를 떠올리며 예수님의 평화를 묵상해 보자니, 예수님께서 평화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자리가 꽤나 불편하게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세상을 떠나시는 당신 수난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들려주고 계십니다. 스승을 따르며 한생을 내어 맡긴 제자들은 잔잔한 호수의 평화는커녕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여 있을 만한데, 평화라니요?

예수님께서는 분명 세상의 평화와 다른 ‘당신의 평화’를 주시겠노라 말씀하십니다. 잔잔한 호수 같은 평화라면 무리 없이 받아들일 테지만, 세상과 다른 평화라면 도대체 어떤 평화일까요?
예수님의 평화는 무엇보다 마음의 산란함과 두려움이 사라진 상태입니다. ‘무엇 때문에 제자들의 마음이 산란하고 두려움에 휩싸일까?’ 되물어 봅니다. 스스로 챙겨야 할 몫과 예수님을 통하여 꿈꾸어 온 영광의 시간들이 모두 사라질 수 있다는 위기감에 제자들은 불안한 것일까요? 아니면 예수님께서 걸어가실 수난의 길이 너무나 힘겨울 것 같아 연민의 정으로 제자들의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일까요?
불안과 두려움을 이겨 낸 자리에 예수님의 평화는 기쁨의 자리로 다시 정리됩니다. 기쁨의 이유는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과 만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챙겨야 할 몫도, 우리 각자가 지향하는 영광의 시간이나 명예로운 순간도 아닌, 그저 하느님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뻐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기쁨을 위하여 수난의 길을 꿋꿋이 걸어가실 것입니다.
우리가 불안한 이유는, 우리가 두려운 이유는, 스쳐 지나듯 사라지는 것들에 우리의 영혼마저 빼앗겨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예수님을 만나 평화로워지려면 우리는 자유로워야 합니다. 잠시 만족할 것들에 사로잡혀 진정 나아가야 할 길을 잃어버린 노예의 삶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저마다 자유로운 삶의 회복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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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여성 작가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습니다. 기자는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다시 태어나면 결혼할 건가요? 엄마가 되고 싶으세요?”

작가는 잠깐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다시 태어나고 싶지도, 또 결혼하고 싶지도 않아요. 그래도 다시 태어난다면 정아 엄마로 살고 싶어요.”

여기서 정아는 이 작가의 딸입니다. 이 대답을 들으면서, 딸과 이어지는 끈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볼 수 있었습니다. 다른 것은 다 원하지 않는 삶이지만, 딸과 엄마라는 관계만큼은 영원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즉, 사랑의 관계는 결코 깨뜨리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삶이 후회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절대로 후회할 수 없는 삶은 사랑하는 삶이었습니다. 받는 사랑뿐 아니라 주는 사랑을 통해 후회하지 않는 멋진 삶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 사랑을 점점 잊어버리는 세상이 되는 것 같습니다. 대신 그 자리를 욕심과 이기심으로 채워나가고 있습니다. 욕심과 이기심은 사랑을 밀어내고, 강요와 억압을 주기 마련입니다.

진짜 사랑은 내가 원하는 대로 남에게 해줄 수 있는 것, 누군가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줄 수 있는 것, 사랑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웃을 수 있는 것…….

주님께서 직접 보여주신 진짜 사랑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세속적인 것들에 쉽게 영향받지 않고 두려움에 빠져 걱정하지 않게 합니다. 또 의심으로 괴로워하지 않고 고통에 쉽게 지치지 않게 합니다. 마음의 평온과 영혼의 평화로움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평화이신 그리스도께 의지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분께 의지하는 것보다 세상에 의지하려고만 합니다. 세상이 주는 외적인 평화에만 집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주는 외적인 평화는 해로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단적인 예로 전쟁을 생각해보십시오. 평화를 위한다면서 더 강력한 전쟁 무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전쟁이 났을 때, 얼마나 많은 생명을 잃게 됩니까?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우리가 모두 사랑으로 하나가 될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남겨주신 평화를 우리의 마음속에 잘 간직할 수 있도록 조금 더 노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명령이며,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 됩니다.

주님의 평화를 마음에 간직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내는 일도 없게 됩니다. 이렇게 되기를 원하는 주님의 진짜 사랑을 잊지 마십시오.
어리석은 자는 멀리서 행복을 찾고, 현명한 자는 자신의 발치에서 행복을 키워간다(제임스 오펜하임).



민폐 덩어리?

어느 책에서 읽은 충격적인 구절입니다.

“당신이 지금 인맥이라고 생각하는 그 사람도 당신을 인맥이라고 생각할 것 같은가? 인맥이란 양쪽이 대등한 위치에 있을 때 성립되는 말, 일방적으로 기대기만 한다면 당신은 그 사람에게 민폐 덩어리일 뿐이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마음이 상당히 불편해졌습니다. 인맥이라고 생각하는 그 어떤 사람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과 나의 관계가 떠올려졌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주님을 가장 잘 알고 친한 인맥으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람에게 하기 힘든 부탁도 주님께 하고 있지 않습니까? 문제는 일방적으로 기대기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역할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오직 내가 받을 것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주님께 커다란 민폐 덩어리가 되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과의 관계를 다시금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더는 주님의 민폐 덩어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조재형신부-


연방 정부에서 지원하는 재난 지원금을 받았습니다. 세금보고를 했기에 미국 시민이 아니었지만 받았습니다. 신분이 불확실한 사람도, 언론인 비자로 체류하는 사람도, 영주권자도, 시민권자도 배고픈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1,200불을 받았습니다. 감사하기도 했고, 기쁘기도 했습니다. 기념으로 이웃에 있는 신부님들과 순대와 수육을 같이 먹었습니다. 전화로 주문하면 배달해줍니다. 한국도 국민 모두에게 재난 지원금을 준다고 합니다. 영주권을 받고, 시민권을 받으면 좋겠지만 많은 사람이 그렇지 못한 것이 미국의 현실입니다. 그렇다고 불행하거나, 불쌍하거나, 죄를 지은 것은 아닙니다.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면서 충실하게 사는 것이 필요합니다. 영주권이 있어도, 시민권이 있어도 불평과 불만이 있기 마련입니다.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있는 자리를 꽃자리라 생각하면 감사할 일이 생깁니다. 지금 내가 있는 자리를 가시방석이라 생각하면 불평할 일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구원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한 곳에 안정되게 살지 못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낙원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와 함께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면 그곳이 낙원이 되는 것입니다. 카인은 동생을 죽이고 추방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카인의 청을 들어 주셨습니다. 고난이 있어도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면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은 외롭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고통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습니다. 광야에서 40년을 지내야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함께 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면 광야도 낙원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시리아로, 바빌로니아로 유배를 가야했습니다. 예언자들은 유배지에서도 위로와 평화를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평화와 행복은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을 때 참된 평화와 참된 행복이 시작됩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사도들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매를 맞기도 했고, 돌에 맞기도 했습니다. 배가 난파되어서 죽을 뻔했습니다. 배교자의 밀고로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사도들은 복음을 전했고, 복음은 많은 사람에게 새로운 평화를 주었습니다. 사도들이 박해를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박해 시대에 한국으로 왔던 파리 외방 전교회 신부님들도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한국으로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았습니다. 순교할거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신부님들은 고향과 가족을 떠나서 한국으로 왔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른 평화였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타볼 산에서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주님 이곳에 초막 3개를 만들어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렇게 지내는 것이 행복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지내는 것이 평화로울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다른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세상에 내려가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고난을 겪고,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참된 행복과 평화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경치 좋은 곳에서 쉬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나의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알았습니다. 끊임없이 자신의 것들을 비워내는 평화를 알았습니다. 친숙하고 편안한 것들을 다른 이들에게 양보하고 새로운 곳을 향해 나가는 그런 평화를 알았습니다. 세상의 평화는 익숙하고, 편안하고, 안정적인 것이며 풍요로운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무엇일까요? 자기를 비우고, 겸손하며, 기꺼이 삶의 거름이 되는 것을 감수하는 평화입니다. 기도를 하고, 덕을 쌓으려고 하지만 분명 저의 마음은 작은 일 때문에, 급한 성격 때문에 평화롭지 못할 것입니다. 바람이 불면 나뭇잎은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사랑을 주셨고, 길을 알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도 이야기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양승국신부- 

 

중학교 2학년 때로 기억합니다. 체육시간이어서 열심히 운동장에서 축구 시합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장난꾸러기 친구 두 녀석이 하라는 축구는 않하고 옥신각신 다투다가, 마침내 손에 돌을 들고 서로 던지는 상황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터진다고, 그런 상황도 모르고 열심히 축구에 열중하고 있던 저는, 한 녀석이 잘못 던진 큼지막한 돌에 정통으로 맞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엄청난 강속구였습니다. 얼마나 강하게 맞았던지 저는 의식을 잃고 쓰러졌고 응급실로 실려갔습니다.

 

돌에 맞기 전만 해도 저는 공부 쫌 한다는 소리 들었었는데, 그 뒤로 도통 집중도 잘 안되고, 학교 성적이 수직 낙하했습니다. 여파가 상당했던 것입니다.

 

선교 활동에 전념하던 바오로 사도 역시 안티오키아와 이코니온에서 온 유다인들이 던진 돌에 맞았습니다. 그냥 돌이 아니었습니다. 야구공만한 돌이었습니다. 정통으로 맞았던지 바오로 사도 역시 그 자리에서 실신해서 쓰러졌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죽은 줄로 생각하고 도시 밖으로 끌어내다 버렸습니다.

 

당시 돌은 살상용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건장한 장정들이 손에 손에 돌을 들고 한 사람을 둘러쌉니다. 집행인이 돌을 던지라는 신호를 보내면, 양손에 들고 있던 돌을 일제히 한 사람에게 집중적으로 던집니다. 강속구로 말입니다.

 

하나 하나 돌을 맞을 때 마다 그 충격이 엄청납니다. 돌에 맞은 부분에서 피가 흐릅니다. 머리에 맞게 되면 즉시 정신이 몽롱해지고, 마침내 외부충격에 의한 뇌진탕으로 절명에 이르게 됩니다. 참으로 끔찍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잔뜩 적개심을 품은 이방인들, 이방인들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동족 유다인들, 그들이 던지는 돌팔매 사이를 아슬아슬 피해 다니며, 그렇게 바오로 사도는 유랑 선교 활동에 나섰던 것입니다.

 

하루에도 몇번이고 삶과 죽음 사이를 오고 갔습니다. 매일 매순간이 살얼음 판 위를 건너는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선교활동 중에 체험하게 된 기쁨과 보람도 컸습니다. 그러나 수시로 다가오는 것이 생명의 위협이었습니다. 미움과 박해는 지극히 일상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오로 사도는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전도 여행길에 나섰습니다. 이 마을에서 전도 여행이 성공하면 하느님께 큰 감사를 드리며 찬미의 송가를 불렀습니다. 다른 마을에서 협박하고 위협하면 그러려니 하면서 쿨하게 또 다른 마을로 건너갔습니다.

 

마치 짐짝처럼 성밖으로 내던져진 바오로 사도였습니다. 돌아가신 줄 알고 슬피 울며 제자들이 둘러싸자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훌훌 털며 자리에 일어나셨습니다.

 

돌에 맞은 후유증이나 트라우마가 상당했을텐데 바오로 사도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이튿날 바르나바와 함께 또 다른 도시 테르베로 갔습니다. 저같았으면 그 상태에서 한 며칠 연가를 내서 휴식을 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해가 뜨자 벌떡 일어나서 또 다시 복음 선포에 매진했습니다.

 

그 끔찍한 고통과 혹독한 박해 속에서도 바오로 사도는 제자들의 마음에 힘을 북돋아 주었습니다. 흔들리지 말고 계속 믿음에 충실하라고 격려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고통과 시련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전진하라고 당부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사도행전 14장 22절)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27) 

-이영근신부-


오늘날 우리는 평화를 갈망합니다. 이제 우리는 진정한 평화가 무엇인지를 물어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는 구세사에서 배워야 합니다.

평화의 왕이신 우리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27)


주님께서는 단지 남기고만 가신 것이 아니라,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27)고 하시며, 분명히 우리에게 상속재산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평화롭지 못함은 당신께서는 이미 주셨지만, 우리가 그 평화를 받지 않고 있는 지는 아닐 런지요? 또 당신이 주시는 평화를 우리가 알아보지 못한 까닭은 아닐 런지요? 왜냐하면, 당신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


<성경>에서 평화란 단지 전쟁이 없는 조약이나 힘의 균형, 혹은 평온하고 태평스러운 안정된 상태만을 뜻하지 않고 나아가서 행복이 충만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스도교의 평화는 그리스도의 임재와 현존의 결과로 나타난 그분 다스림의 충만한 상태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되는 평화로,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 있고, 그리스와의 일치 안에 있을 때 충만해지는 평화입니다. 그것은 남의 것을 가지고자 하지 않으며, 아무 것도 자신의 것이라 여기지 않는 사랑과 정의와 진리의 실현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에게서 평화를 선물로 받은 우리는 마땅히 평화를 지켜야 하고, 평화의 파괴를 막아야 하고, 평화를 이루어야 하는 사명을 지니게 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타인을 죽여서가 아니라, 타인을 위해 자신이 죽음으로써 평화를 이루십니다. 타인의 것을 차지해서 채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을 타인에게 내어주고 비워줌으로써, 타인을 누르고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떠받들고 자신이 낮아지고 작아짐으로 평화를 이루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르기에, 오히려 세상의 평화를 뒤흔들어 놓습니다. 기만적인 안전을 뒤흔들어 놓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진정한 평화를 바란다면, 오히려 하느님의 평화가 항상 우리를 뒤흔들어놓기를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


이처럼, 우리가 평화를 얻는 이 길은 부활의 새로운 삶의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


사부 성 베네딕도는 그의 <수도규칙> 머리말에서 말합니다.

평화를 찾아서 뒤따라가라.”(머리말 27)


하오니, 주님!

평화를 위해 가시관을 쓰게 하소서.

누르고 빼앗고 장악하고 차지해서가 아니라, 내어주고 비워져서 평화로워지게 하소서.

잔잔한 호수처럼 마음이 가라앉아서가 아니라, 당신과 함께 있음에 평화롭게 하소서.

오늘 하루 평화롭기를 바라기보다,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소서! 아멘.


-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


주님!

평화를 위해 가시관을 쓰게 하소서.

창에 찔리신 당신 가슴으로 세상을 품게 하소서.

누르고 빼앗고 장악하고 차지해서가 아니라,

내어주고 비워져서 평화로워지게 하소서!

잔잔한 호수처럼 마음이 가라앉아서가 아니라, 당신과 함께 있음에 평화롭게 하소서.

오늘 하루, 평화롭기를 바라기보다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소서! 아멘.


참 평화를 갈망하라

-반영억신부-


우리는 세계평화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전쟁이 없기를 희망합니다.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기를 바라며 그를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러면서도 꾸준히 자기 국가의 안위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국방비를 증가 시킵니다. 평화를 갈망하면서도 평화를 방해하는 물리적인 환경을 막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 있을까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내 자신이 먼저 마음의 평온가운데 머물지 못하는데 어떻게 남에게 평화를 줄 수 있겠습니까? 진정한 평화는 외적인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오는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평화의 주체이십니다. 


예수님시대에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던 로마제국은 ‘로마의 평화’를 널리 선전하였습니다. 이 평화는 힘으로 얻은 평화, 약한 이를 굴복시킴으로써 얻은 평화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같지 않다”(요한14,27). 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가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는 것은 바로 평화가 ‘밖’으로부터 오는 평화가 아니라 ‘안’에서 나오는 평화입니다. 강한 힘으로 누르는 데서 오는 평화가 아니라 당신이 것을 내어주는 데서 오는 평화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아들 예수님께, 예수님께서는 협조자 성령께 당신의 것을 몽땅 내어주십니다. 그러면 성령께서는 당신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내 자신이 먼저 평온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남에게도 평화를 줄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평화가 내 마음을 사로잡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4,6-7).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콜로1,20). 세상은 권력이나 힘으로 다툼과 소란을 억압해서 평화를 이루고자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억압하지 않고 서로 다른 생각을 존중하며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심으로 평화를 주셨습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평화를 주시지만 제자들이나 우리가 곧장 평화를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행할 수 있는 믿음이 아직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 먼저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말씀과 계명을 지키며 주님께 대한 믿음을 굳건히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의 평화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사실 세상이 시끄러운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평온하지 못한 것입니다. 평화를 갈망하는 만큼 내 자신이 맑아져야 하고 고요해져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해 만물을 창조하셨으니, 우리 마음이 하느님 안에 평안히 쉴 때까지는 그 어디에서도 평화를 누리지 못합니다”(아우구스티노).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송영진신부-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여기서 ‘평화’는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요한 14,1).”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려면, 즉 평화를 누리려면,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믿음’은 평화를 누리게 해 주는 힘입니다.)

예수님 수난 때 제자들의 모습에서,
믿음이 흔들리고 마음이 산란해져서 평화를 잃어버린 모습을 잘 볼 수 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일어나시어 제자들에게 와서 보시니,
그들은 슬픔에 지쳐 잠들어 있었다(루카 22,45).”
<여기서 ‘슬픔에 지쳐’ 라는 말은 지칠 정도로 크게 슬퍼했다는 뜻이 아니라,
마음과 영혼의 평화를 완전히 잃어버려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시시각각 다가오는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예감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다(마르 14,50).”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는데,
그 모습은 공포심에 사로잡혀서
마음과 영혼의 평화를 완전히 잃어버린 모습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거나 배반하려고 한 것은 아니고,
차분하게 상황을 판단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두려움에 휩쓸렸을 것입니다.>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요한 20,19).”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는 것은 숨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신 뒤에,
자기들도 박해받고 죽을까봐 두려워서 숨어 있었습니다.
그 모습도 평화를 완전히 잃어버린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 때에 제자들이 그렇게 된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특별히 ‘평화’의 은총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 때에는 믿음이 흔들렸고, 마음이 산란해졌고,
평화를 잃었지만, 그래도 예수님께서 주신 은총 자체는 제자들 안에
씨앗으로 남아 있었고,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 강림 뒤에 열매를 맺었습니다.
제자들의 다음 모습이 바로 그것을 나타냅니다.
“... 사도들을 불러들여 매질한 다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지시하고서는 놓아주었다.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다. 사도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또 이 집 저 집에서 끊임없이 가르치면서 예수님은 메시아시라고
선포하였다(사도 5,40-42).”
전에는 박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평화를 잃고 숨어 있었던 제자들이었는데,
나중에는 박해를 받아도 굴하지 않고 기쁨과 평화로 가득 차서
더욱 열성적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이들로 변화되었습니다.
그 모습은 예수님께서 주신 평화의 은총의 씨앗이
제자들 안에서 열매를 맺고 꽃을 피운 모습입니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라는 예수님 말씀의 표현만 보면,
무슨 물건을 주시듯이 평화를 주시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평화의 은총’을 주신 것입니다.
원래 ‘은총’이란, 주시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결실을 맺는 것이 아니라,
받는 쪽에서 능동적으로 응답해야 결실을 맺게 됩니다.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마태 10,12-13).”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은 “평화의 은총에 능동적으로 응답하면”이고,
그 ‘응답’은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영혼의 평화도 없습니다.

여기서 ‘내 평화’ 라는 말도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디 다른 곳에서 평화를 가지고 오셔서
제자들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평화를 주셨습니다.
그 평화는 예수님의 것이고,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고,
이미 예수님께서 누리고 계시는 것이고,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평화 자체이신 분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에페 2,14).”
따라서 믿음이 있는 한,
아무도(사탄도, 박해자도) 우리에게서 그 평화를 빼앗지 못합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화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평화는
다르다는 뜻입니다.
(두 종류의 평화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평화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
하느님의 나라는 ‘평화의 나라’인데, 그 평화는 ‘하느님의 의로움’을 바탕으로 한
평화이고, 모두가 함께 기뻐하는 평화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혼자서만 편안해도 평화라고 생각할 때가 많지만,
혼자서만 편안한 것은 평화가 아니고, 모두가 함께 편안해야 평화입니다.
이웃에 대해서 관심 없이 이기적으로 사는 자들에게는 참 평화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영혼이 어떤 상태이든지 간에 겉으로만 잘 지내면
그것을 평화라고 생각할 때가 많지만,
아무리 잘 지내는 것처럼 보여도 죄 속에서 살고 있으면 평화가 아닙니다.
(평화는 선에서 오고, 평화 자체가 선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잘 먹고 잘 살면서 몸이 편안하면 그것을 평화라고 생각할 때가
많지만, 참 평화는 몸의 평화가 아니라 영혼의 평화입니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에도 ‘몸의 편안함’보다 ‘마음의 평화’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데, ‘마음의 평화’와 ‘영혼의 평화’는 다릅니다.
마음의 평화는 정신적으로 편안한 상태일 뿐입니다.
그러나 영혼의 평화는 “주님과 함께하는 삶에서 얻는 영적인 기쁨”입니다.) 


주님의 평화와 아버지의 뜻

-조욱현신부-

 

복음: 요한 14,27-31: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27) 평화는 내적인 조화이고 영적인 평온이며 마음의 순박함이고 사랑의 유대이며 자애로운 친교라고 할 수 있다. 평화는 미움을 없애며 전쟁을 그치게 하고 분노를 억제하며 교만을 없애고 인간애를 실천하고 불화를 잠재우며 원수와도 화해하게 한다. 하느님의 자녀들이 평화를 실천할 때, 그 평화는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된다.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상속자가 된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당신의 평화를 상속재산으로 주셨다. 그러기에 이 평화는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면, 우리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이 평화는 그분 안에 있고 그분에게서 온다. 그것은 당신의 현존에서 오는 것이다. 바로 그분이 우리의 평화이시다. 그래서 그분은 평화라고 우리가 믿을 때나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1요한 3,2) 때나 우리의 평화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유언형식으로 사도들에게 이 평화를 남기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의 하느님이시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28)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떠나는 것이 좋은 일임을 말씀하신다. 이는 사랑하는 이들이 이 세상을 떠날 때 우리는 슬퍼하기보다 기뻐해야 함을 설명하시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위대하시다는 것은 당신이 하느님이시자 인간이심을 말씀하신 것이다. 당신이 인간으로서 하신 말씀이다. 아버지는 아버지시므로 더 위대하시고, 아들을 낳으신 분으로 위대하시고, 아들이 아버지께 영광스럽게 해주십사고 기도하시므로 위대하신, 아버지로서 더 위대하신 분이다. 이것은 아들이 아버지께 근원을 두고 있다는 말씀이다.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29)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난 뒤에, 그분께서 살아 계시고 당신 아버지께 올라가시는 것을 그들이 보게 되리라는 뜻이다. 이것은 그분이 말씀하신 대로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이시며,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실히 믿게 하시려고 하신 것이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들이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 아무 권한도 없다.”(30) 이 세상의 우두머리는 유대인들이나 로마민족만이 아니라,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하는 권세와 권능들을 말한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들은 그들의 무지로 말미암아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분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에게 속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신 분이시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를 말하는데, 그분에게는 죄가 없으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을 완전히 이루신 분이시기에, 아버지의 뜻을 어긴 일이 없으신 분이시기에 죄를 짓지 않으셨다. 그분이 돌아가신 이유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요한 14,31)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 대한 사랑 때문에 그분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게 하려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다. 주님은 하느님의 능력으로 죽음을 파괴하실 것이며, 은총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모든 인간의 운명이 될 것이다. 아드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셨다. 목숨을 바치시면서 까지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언제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 자신을 바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 27)

-한상우신부-

주님안에서
찾게되는 참된
평화입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참평화입니다.

가지 않았던 평화의
길을 예수님께서
직접 걸어가십니다.

평화는 잃어버린
주님을 되찾는
길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주님을 만나는 것이
참된 평화입니다.

주님을 통한
참된 평화입니다.

예수님께
우리의 불안을
봉헌합니다.

십자가의
여정과 함께하는
평화이며

십자가를 통해
비로소 얻게 되는
참평화입니다.

평화는 우리의
여정과 함께합니다.

끝내 하느님
나라를
이루고마는
힘찬 평화입니다.

구원의 의미는
평화의 의미입니다.

모두를 살려내는
주님의 평화입니다.

매일의 삶안에서
평화를 갈망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소중한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제자들에 대한 스승의 자상한 위로가 드러납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요한 14,27).

어린 아이들은 엄마가 안 보이면 분리불안을 느끼지요. 예수님도 당신이 떠나신 뒤 제자들이 갖게 될 두려움을 잘 아시기에 자상히 준비를 시키십니다. 아직 스승 없이 흘로서기 할 준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제자들에게 스승이 주시는 선물은 "평화"입니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

머지않아 당신 목숨까지 아까워하지 않고 내어주실 예수님께서 지금 제자들에게 당신의 평화를 선뜻 내어주십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불편할 일 없고 위협이나 대립도 없는 안락하고 안온한 상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건 세상이 제시하는 아슬아슬 깨지기 쉬운 일시적 무탈 상태 정도에 불과할 겁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예수님의 평화는 마음이 산란해지고 겁도 더럭 날 만한 상황에서도 동요하지 않고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는 상태일 겁니다. 세상이 아무 문제 없이 잠잠한 상태를 평화라 여긴다면,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폭풍우 속에서도 그것이 별 문제가 되지 않아 잠잠할 수 있는 힘입니다. 이 평화는 감정이나 신경의 작용이 아니라 믿음과 의탁, 긍정의 산물이 되겠지요.

제1독서에서는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선교 여행이 속도감 있게 펼쳐집니다.

리스트라에서 돌 맞고 버려졌다가 살아나서 데르베로, 다시 리스트라와 이코니온, 그리고 안티오키아... 이어서 피시디아, 팜필리아, 페르게, 아탈리아, 다시 안티오키아! 길지 않은 독서 내용 안에 드러난 두 사도의 동선이 숨막히게 분주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사도 14,22).
그 과정에서 그들이 겪은 죽음의 위협과 배척, 버려짐의 평지풍파가 이 고백을 끌어냈을 겁니다. 제자들에게 한 이 말은 사실 "제자들의 마음에 힘을 북돋아 주고 계속 믿음에 충실하라고 격려하면서"(사도 14,22) 나온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십자가 없이 구원이 없고 죽음 없이 부활이 없다는 진리를 이제 막 신앙의 길에 들어선 제자들에게 안쓰러움과 기대를 담아 나누어 줍니다.

"하느님께서 자기들에게 해 주신 모든 일과 또 다른 민족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을 보고하였다"(사도 14,27).

이방인의 구원을 위해 파견된 자리, 안티오키아로 무사히 되돌아온 두 사도는 자신들이 겪은 일을 신자들에게 증언합니다. 때론 열정에 차서, 어느 대목에서는 담담히 그간의 여정을 나누었겠지요. 우리도 알다시피 꽃길만 있지 않았고 그다지 평안하거나 무탈하지만은 않았지만, 모든 것을 견디어내고 우뚝 선 이 자리에서는 누구도 깨뜨릴 수 없는 평화가 흘러나옵니다. 이 평화가 바로 주님의 평화일 것입니다!

"그는 나에게 아무 권한이 없다"(요한 14,30).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에 심어 주신 평화에 쐐기 하나를 단단히 박아 주십니다. 흔히 평화를 파괴하고 훼손하는 힘이라 여겨 두려워하는 온갖 악의 세력에게, "넌 나에게 아무 권한이 없다!"고 선포하시는 겁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 우리를 둘러싼 채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려고 들쑤시며 찔러대는 죄악과 어둠, 욕정과 상처의 올가미를 향해 넌 나에게 아무 권한이 없다고, 주님에게서 받은 내 평화는 너쯤으로 깨지지 않는다고 단호히 외칩시다. 모든 것을 견디어낸 평화는 쉽사리 무너지거나 변질되지 않습니다. 그 평화의 원천이 우리와 함께 수난 받고 십자가에 못박히고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삶의 자리가 행여 악다구니 넘치는 거친 장터나 광야일지라도 모든 것을 견디어 낸 주님의 평화로 충만하고 그윽한 하루 되시길 기도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가 벗님과 함께.

환난과 환멸의 관계    
-김찬선신부-


오늘 바오로 사도는 죽다가 살아납니다.
이코니온에서 사람들이 돌을 던져 죽이려고 하기에 피해 리스트라에 온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여기서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적을 일으켜 사람들이
자신들을 신격화하는 일도 겪지만 이코니온 사람들이 여기까지 쫓아와
선동하자 돌변한 사람들에 의해 돌팔매질을 당하고 성밖에 버려집니다.

이런 일을 겪었음에도 이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일어나 선교 여행을
계속하여 마침내 그들의 1차 전도 여행을 마무리하게 되는데
그들은 가는 곳마다 이렇게 격려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우리는 어떻게 알아들어야 할까요?

하늘나라로 가는 길은 꽃길이 아니니 꽃길만 걸으려 해서는 안 되고,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으니 오히려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꽃길만 걸으려 해서는 안 되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정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꼭 환난을 겪어야 합니까?
그렇다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나 좋자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인데 좋은 일이 아니라
안 좋은 일만 겪는 하느님 나라 여정을 떠날 사람이 있겠냐는 거지요.

사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열망이 웬만큼 크지 않으면
아무도 그 여정을 떠나려 하지 않을 것이고,
하느님 나라보다 이 세상이 좋은 사람은 더더욱 떠나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자신에게 질문을 하게 됩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에 가고 싶은 열망이 큰가?
모든 환난을 무릅쓰고 갈 만큼 하느님 나라를 열망하나?

그러기 위해서는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고 깨달았어야 하는데
나는 하느님을 정말 사랑하고 하느님 나라를 정말 좋아하는가? 지금.

그런데 만일 지금 내가 하느님을 그렇게 사랑하지도
그리고 하느님 나라가 얼마나 좋은지 맛보지도 못해
하느님 나라에 가려는 열망이 없다면 또 어떻게 해야 하나?

그렇다면 역순으로 가야만 할 것 같습니다.
이 세상이 좋아서 하느님 나라가 얼마나 좋은지 모르는 것이니
이 세상에 환멸을 느껴야 하고,
환멸을 느끼기 위해서 환난을 많이 겪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환멸을 느껴야 한다는 말이 맞습니까?
이것은 건전한 가르침이 아니라 사이비 종교의 냄새가 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건전한 환멸을 느껴야 합니다.
우리는 염세주의적으로 이 세상을 포기하지 말아야 하고, 오히려
이 세상에서 이미 시작되는 하느님 나라를 이루려 노력해야 하지만
이 세상에 안주하려거나 이 세상에서 영원히 완전한 하느님 나라를
이룰 수 있다는 그런 환상이 깨지는 환멸은 느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환멸幻滅이란 환상이 없어진다는 뜻이니
환상은 깨져야 한다는 말처럼 환멸은 느껴야 하고,
환멸을 느끼게 하는 환난은 그래서 귀한 영약임을 깨닫는 오늘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5월 1일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14,2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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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해 만물을 창조하셨으니, 우리 마음이 하느님 안에 평안히 쉴 때까지는 그 어디에서도 평화를 누리지 못합니다”(아우구스티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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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분명 세상의 평화와 다른 ‘당신의 평화’를 주시겠노라 말씀하십니다. 잔잔한 호수 같은 평화라면 무리 없이 받아들일 테지만, 세상과 다른 평화라면 도대체 어떤 평화일까요? 
예수님의 평화는 무엇보다 마음의 산란함과 두려움이 사라진 상태입니다. ‘무엇 때문에 제자들의 마음이 산란하고 두려움에 휩싸일까?’ 되물어 봅니다. 스스로 챙겨야 할 몫과 예수님을 통하여 꿈꾸어 온 영광의 시간들이 모두 사라질 수 있다는 위기감에 제자들은 불안한 것일까요? 아니면 예수님께서 걸어가실 수난의 길이 너무나 힘겨울 것 같아 연민의 정으로 제자들의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일까요? 
불안과 두려움을 이겨 낸 자리에 예수님의 평화는 기쁨의 자리로 다시 정리됩니다. 기쁨의 이유는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과 만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챙겨야 할 몫도, 우리 각자가 지향하는 영광의 시간이나 명예로운 순간도 아닌, 그저 하느님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뻐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기쁨을 위하여 수난의 길을 꿋꿋이 걸어가실 것입니다. 

잠시 만족할 것들에 사로잡혀 진정 나아가야 할 길을 잃어버린 노예의 삶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저마다 자유로운 삶의 회복입니다

-박병규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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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알았습니다끊임없이 자신의 것들을 비워내는 평화를 알았습니다친숙하고 편안한 것들을 다른 이들에게 양보하고 새로운 곳을 향해 나가는 그런 평화를 알았습니다세상의 평화는 익숙하고편안하고안정적인 것이며 풍요로운 것입니다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무엇일까요자기를 비우고겸손하며기꺼이 삶의 거름이 되는 것을 감수하는 평화입니다. 기도를 하고덕을 쌓으려고 하지만 분명 저의 마음은 작은 일 때문에급한 성격 때문에 평화롭지 못할 것입니다바람이 불면 나뭇잎은 흔들리기 마련입니다그럼에도 감사드립니다주님께서는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사랑을 주셨고길을 알려 주셨기 때문입니다오늘 바오로 사도도 이야기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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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의 평화는 그리스도의 임재와 현존의 결과로 나타난 그분 다스림의 충만한 상태를 말합니다다시 말해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되는 평화로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 있고그리스와의 일치 안에 있을 때 충만해지는 평화입니다그것은 남의 것을 가지고자 하지 않으며아무 것도 자신의 것이라 여기지 않는 사랑과 정의와 진리의 실현을 가리킵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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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다(마르 14,50).”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는데,
그 모습은 공포심에 사로잡혀서
마음과 영혼의 평화를 완전히 잃어버린 모습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거나 배반하려고 한 것은 아니고,
차분하게 상황을 판단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두려움에 휩쓸렸을 것입니다.>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요한 20,19).”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는 것은 숨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신 뒤에,
자기들도 박해받고 죽을까봐 두려워서 숨어 있었습니다.
그 모습도 평화를 완전히 잃어버린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 때에 제자들이 그렇게 된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특별히 ‘평화’의 은총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 때에는 믿음이 흔들렸고, 마음이 산란해졌고,
평화를 잃었지만, 그래도 예수님께서 주신 은총 자체는 제자들 안에
씨앗으로 남아 있었고,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 강림 뒤에 열매를 맺었습니다.


전에는 박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평화를 잃고 숨어 있었던 제자들이었는데,
나중에는 박해를 받아도 굴하지 않고 기쁨과 평화로 가득 차서
더욱 열성적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이들로 변화되었습니다.
그 모습은 예수님께서 주신 평화의 은총의 씨앗이
제자들 안에서 열매를 맺고 꽃을 피운 모습입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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